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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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진부해하며 변화를 바랄 때도 있지만 현실에서의 변화를 바랄 뿐, 전혀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바라는 건 아니다. 지금의 내가 전혀 다른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상상한다면 내가 누리고 지키며 살아왔던 지금의 모습이 몹시도 그리울 것 같다.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두려움도 커진다고 했던가.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남편과 아이가 있는 나에겐 이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몹시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인지 평범한 고등학생 요코에게 일어난 일들이 궁금하면서도 다시 그 전의 생활로 돌아올 수 있을지 조바심이 났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낯선 이가 나타나 위험에 처했으며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허락을 하라고 말한다면 과연 그 상황을 쉽게 납득할 수 있을까? 말로만 한다면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겠지만 내가 속해있던 일상이 무너지고 다른 세계의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생물들이 나타나 위협한다면 낯선 이의 말을 듣고 따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요코가 그랬다. 교무실에서 담임선생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게이키라는 낯선 남자에게 황당한 이야기를 듣고 이상한 생물들에게 쫓기다 전혀 다른 세계로 흘러들어와 버렸다. 그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주고 자신의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정체를 알 수 없는 게이키란 남자와도 떨어져 버렸다. 그야말로 갑자기, 엄청난 재앙이 닥친 것처럼 낯선 세계에서 혼자가 된 요코.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절대 견디지 못했을 것 같다.

  요코가 혼자가 되어 경험한 세계의 색깔은 어둠이었다. 서서히 그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사람들이 살고 어떤 나라가 형성되어 있는지 알아가게 되지만 그 모든 일을 경험하는 요코의 시선에 비친 세계는 어둠이었다. 꼭 흑백 꿈을 꾸는 것처럼 빛이라곤 없는, 암흑의 세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요코가 떠나 온 세상, 즉 우리가 알고 있는 평범한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 그리고 다시는 요코가 속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자신이 인간의 몸으로 허해를 건너왔다는 이유로 속이고 속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요코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슨 이유로 자신이 이러한 일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그 이유를 찾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10대 소녀의 몸으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종종 만나는 사람들(늘 요코의 뒤통수를 쳤다.)에 의해 그 거대한 세계를 알아간다는 건 엄청난 에너지와 의지와 목적이 필요했다.

  그랬기에 게이키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요코가 낯선 세계에서 만날 때 쥐어준 칼 한 자루로 끔찍한 요마들을 물리쳐야 하고 그 와중에 먹고 살아야 하는 일이며 게이키를 찾아나서는 일까지, 엄청난 고생을 하고 있는데도 게이키는 요코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요코 앞에 나타난 푸른 원숭이는 요코를 더 절망으로 이끌었다. 게이키만 나타난다면 단박에 모든 것이 해결되고 왜 자신이 이런 세계로 와야만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과정을 쉽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요코가 이 세계에 흘러온 이유, 요코가 어떤 존재인지가 밝혀졌을 때 그제야 모든 궁금증이 풀렸지만 결코 그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늘 의지박약이라고 내 스스로를 폄하하는 나로서는 요코처럼 그런 고행을 할 용기도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선택의 순간에서도 결코 현명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 말이야, 요코. 어느 쪽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을 때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쪽을 골라. 어느 쪽을 골라도 반드시 나중에 후회할 거야. 똑같이 후회할 거라면 조금이라도 가벼운 쪽이 좋잖아. (514쪽)

  요코가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서 게이키를 원망하면서도 요코에게 또렷한 충고도 할 수 없는 내가 결국에는 그 모든 게 요코가 이러한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평범하게 인간세계에 살던 내가 다른 세계에서 엄청난 책임을 져야 하는 인물이었고, 게이키가 그런 나를 찾아낸 인물이었다면 모든 게 수긍이 갔다. 하지만 최종 선택은 요코가 해야 했다. 우리도 늘 선택의 기로에 서있지만 운명이 바뀌는 선택 앞에서는 신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요코의 고민과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마침내 그녀가 결정한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하게 되었다.

  장르소설을 그다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는 나임에도 꽤 두툼한 책을 순식간에 읽어버렸을 정도로 흡인력이 있었다. 인간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를 그리다보니 용어라든지 각 나라의 특징과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생명들에게 조금은 이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장르불문하고 완성도가 있다면 개인적으로 그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편이다. 1992년도에 일본에서 출간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재 읽어도 낯선 느낌이 없었고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 이 시리즈를 꼭 완독하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퇴마록』이후로 이런 장편 장르소설에 매료된 게 오랜만이라 개인적인 기대감이 큰지는 모르나, 현실을 잊고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정도로 흥미로워 나야말로 다른 세계로 빠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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