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방고의 숲속학교
트래버스 외 지음, 홍한별 옮김 / 갈라파고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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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가장 아래쪽, 남아프리카 공화국 바로 위에 보츠와나라는 나라가 있다. 물론.. 처음 알았다. 거기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먼저 케이트 니콜즈, 어느 날 갑자기 아프리카로 생활의 터전을 옮기기로 마음 먹은 비범한 아줌마다. 30대 후반에 배우로서 성공했지만 무대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진화생물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때 코츠월드에 살면서 공부하고 있던 그녀는 옥스퍼드에서 리처드 도킨스를 만나 몇 차례 도움을 받는다. 끝장을 보는 성격인 그녀는, 엄청난 독서와 공부로 다윈 이론의 전문가가 되는데, 마침내 일상 생활에서 다윈 이론을 실제로 관찰할 수 있는 보츠와나로 이주해서 연구하기로 마음먹는다. 도킨스의 말에 의하면 그녀에게는 그 결정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니..  

그때까지 다섯 아이들은 코츠월드의 홀리부시 오두막에서 자신들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시끌벅적하게 엉켜 살고 있었다. 제일 큰 에밀리와 막내 오클리는 다른 세 아이들- 트래버스, 앵거스, 메이지-과는 아버지가 다르지만, 그렇다고 다른 점은 하나도 없다고 트래버스는 기억한다. 그리고 이 책의 시작이기도 한, 아프리카로의 이주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 날 아침 난로 옆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데, 엄마가 아프리카로 가서 새로운 생활을 해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빠는 로스앤젤레스에 이민할 예정이었고, 엄마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했다. 엄마는 유럽인들의 생활방식을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 사회가 기술적으로 점점 복잡해지면서 아이들이 점점 무력해진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우리 가족이 어떤 도전이라도 맞서고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하는 법을 익히길 바랐다. 영국에 살 때는 무슨 일만 생기면 그 분야 전문가를 찾았다. 심지어 언젠가는 부엌에 나타난 쥐 한 마리 때문에 모두 집밖으로 대피하고 쥐 잡는 사람을 불러 처리한 일도 있었다. //  세계지도를 꺼내온 엄마는 보츠와나라는 나라를 짚어 보이며 오카방고 삼각주와 칼라하리 사막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날 아침까지 그런 나라가 있는 줄도 몰랐다.' 

이것이 오카방고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경위를 적고 있는 트래버스의 말이다. 그때 세 아이들은 초등학생 또래였다. 그리고 여섯 달 후, 아이들은 보츠와나에 있었다. 

음.. 남다른 엄마이기는 하다. 그녀가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유럽인들의 생활방식이라는 건 실은 지금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분야 전문가를 찾는다.. 사회는 기술적으로 점점 복잡해지면서 과연 아이들은 점점 무력해진다. 아이들 뿐인가?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움츠린 채 살아가면서도 그런 삶을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게 맘에 안 든다고 떠날 생각을 한다. 그렇게 시작할 수 있었다. 

보츠와나에서 아이들은 케이트의 생각 그대로, 어떤 도전이라도 맞서고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하는 법을 익히면서 자란다. 세 아이 모두 발이 액셀러레이터에 닿을 때부터 랜드로버를 몰았고, 타이어를 들어올릴 수 있었을 때부터 일상적으로 타이어를 갈았다. 막내 오클리가 기억할 수 있는 때부터 천막집에서 살아왔다.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교육받았다. 수업은 전적으로 캠프 내에서 이루어졌는데, 정해진 학기에 따랐고 힘든 숙제도 있었고 국제 공인 시험에도 대비했다. 케이트는 표준교육 과정에 따르면서 한편으로는 대부분 아이들이 십대 때 잃고 마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키우고 간직할 수 있게 아이들을 교육했다. 이 책을 읽어보면, 그 교육은 더할 나위없는 성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교육의 결과물이기도 한 이 책, 아이들은 자신들 스스로의 힘 만으로 이 책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책은 그저 어린이들의 감상적인 체험기.. 정도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아이들의 글은 아주 훌륭하다. 오카방고 삼각주의 숲속 생활의 기록으로서도, 가족과 타인들간의 관계의 기록으로서도, 또한 사자 연구로서도 탁월하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갖고 있는 순수성, 열정, 호기심, 조심성과 두려움 들이 글 속에서 반짝인다. 섬세하고 명석하다. 그들의 그림은 처음 이 책을 대하는 우리들에게도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정말 문학적이면서도 인문학적으로도 뛰어난 기록물이다. 한 편의 서정적인 다큐멘터리를 손에 들고, 나 스스로 열정에 들떠 이 책을 읽어나갔다. 물론 끝날 때까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모르는 동물을 발견하면 여행 안내서를 여러 권 뒤져서 무엇인지 알아낸다. 숲에 다니면서 새에 대해 공부하고 하늘을 나는 수리를 관찰한다. 수리가 땅으로 날아 내려오는 것은 가까이에 죽은 동물이 있다는 뜻이다... 아이들이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는 과정은 그것이 생활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이상적이다. 차를 타고 가면서 동물의 학명을 외우는 게임을 한다. 이들은 거의 매일 동물들을 만나면서 생활한다. 캠프 안으로 동물들이 드나든다. 밤이면 텐트 바깥을 스쳐지나가는 코끼리와 사자, 하이에나 같은 동물들의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면서 캠프의 생활은 안락한 영국에서의 생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롭지만, 말할 수 없이 불편하다는 생각도 한다.  

'비가 오면 우리 생활은 완전히 달라진다. 우선 사자를 만나기가 너무나 힘들다. 차는 계속 진창에 빠져 끌어내야 하고.... 어느 날 밤, 배설물 샘플 하나를 건지려다 열한 번이나 차가 진창에 박혔을 때는 극도로 절망에 빠졌다. 그래도 쏟아지는 빗속에서 밤새 차를 파내고 들어올려 꺼내야 했다. 새벽에 흠뻑 젖고 기진맥진한 채 캠프로 비틀비틀 돌아가니 엄마가 불안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차라리 차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 빠져나오지 그랬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날 밤은 차창을 새까맣게 덮어버릴 정도로 모기 떼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모기 떼에 뜯기느니 차라리 차를 빼내면서 몸을 계속 움직이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지금도 며칠째 비가 내리고 있다. 편안한 집 놔두고 왜 여기에 와서 이러고 있나, 이렇게 해서 얻는 게 과연 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최근에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사자가 우리를 지탱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여기에 사는 이유는 사자 때문이다. 이 비와 진창 속에도 지금 사자들이 무얼 하고있는지, 별 탈 없는지 궁금하다. 사자에 대한 사랑으로 버텨나가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지난 3년간 우리는 아주 많이 성장했다. 우리는 이제 동물에 대한 이해가 자연을 보존하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이것은 앵거스의 기록이다. 14세, 성숙한 청소년의 품새가 드러난다. 놀라운 아이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아프리카가 만드는 아이들일지도 모른다는 게 이 책을 보는 동안에 든 내 생각이다. 근대의 학교 교육은 분명히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삶과 경험과 유리된 채 교실 안에서 오직 책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교육, 그것도 나이가 같으면 한꺼번에 같은 과정을 배워야 하고, 누구나 같은 것을 배워야 한다. 지혜는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통해 외워야 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 사실 지혜는 생활에서 사라지고 만다. 우리나라의 교육 과정을 생각하면, 그건 더이상 전혀 교육이 아니다. 말할 수 없이 서글프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 속에서 죽을동 살동 경쟁하고 있는 중이고, 그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거기에 삶의 아름다움, 존엄함, 자연에서 느끼는 경외감 등은 어디에도 깃들 여지가 없다. 그래서 오카방고 숲속 학교는 그 '거의 불가능해보이는' 실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에 깃든다.  

모든 사람들이 아프리카라면 바로 떠올릴지도 모르는 위험, 온갖 병들과 사고, 미진한 의료 체계 들은 이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던가? 운 좋게 건강했기에 가능한 생활이었던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말라리아에 걸리고, 빌하르츠 주혈흡충에 감염되어 석 달 씩이나 고생하기도 한다. 언제든지 야생의 동물들은 위협적일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하고 차는 시도때도 없이 탈이 난다. 아파도 병원에 가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송용 헬기가 날씨 때문에 뜨지 못하기도 한다. 이런 것이 바로 아프리카적인 것이다... 그들에게도 그런 일들이 일상 다반사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래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 또한 희한하다. 그렇게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런 것은 생활의 일부일 뿐이다. 며칠 씩 비가 내리는 가운데 텐트 속 생활을 한다는 것, 거센 바람에 텐트 기둥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도 물건들은 날아가고 물에 젖고, 엉망진창이 되기도 하지만, 또 그런 시간은 지나가고 다시 멋진 생활을 할 수도 있다는 것, 그게 아프리카적인 삶이다. 무엇보다 이 글을 쓴 세 아이들은 아프리카의 삶을 사랑하고 있다. 사자를 이해하면서 자연을 이해하게 되는 트래버스의 말을 들어보자. 

"사자들은 무자비한 자연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자연적인 원인에 의한 죽음이 삶이 초래한 것보다 훨씬 많다. 지난 5년 동안 연구 지역에서만 한창 나이의 수사자 열 마리, 암사자 여섯 마리, 새끼 쉰두 마리가 모두 자연적 원인으로 생명을 잃었다. 질병이나 싸움 때문에, 사냥중에 채이거나 찔려서, 돌보지 않아서, 다른 맹수에 의해, 다리가 부러지거나 아니면 늙어서 죽기도 한다. 자연에는 옳고 그른 것이 없다. 단지 야생의 삶은 힘들 뿐이다. 이곳에서는 제일 힘세고 영리하고 건강하고 운 좋고 질긴 놈만 살아남는다. 때로는 이런 자연의 현상을 보고 있으면 고통스럽기조차 하다." 

말할 수 없이 특별하고 대단한 책이다.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는 깊은 신뢰와 사랑이 깃들어있고, 아이들이 그것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도 특별한 점이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연과 관계를 맺을 것인지,  서로 다른 경험과 방식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 가는 것인지, 인간의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이란 진정 무엇인지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특별하게 보이기 위한 과장도, 스스로에 도취된 감상도 없다. 아이들의 기록 방식은 정직하고, 논리적이고, 새롭다. 너무나 다른 삶의 방식인데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의 편안함도 여러 가지 장점 중의 하나다. 세 아이들의 눈으로 나는 아프리카를 잠시라도, 가득가득 경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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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여름
데버러 와일즈 지음, 제롬 리가히그 그림, 김미련 옮김 / 느림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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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등의 날이 올 거라고 굳게 믿었던 그 시절 어린이들을 위하여-  이 글의 작가인 데버러 와일즈가 책 앞에 붙인 말이다. 의미심장하다... 흑인인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까지 되었지만, 평등의 날이 금방 오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1964년 여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건 정말 얼마나 더디게 오는가, 오긴 오는 걸까.. 그저 헛된 희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도 뉴스에는 한국에서 재직 중인 인도인 교수가 버스에서 한국인 여자와 동행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더러운 놈, 니네 나라로 꺼져!" 소리를 들어야 했다는 울적한 소식이 들린다. 아니 울컥하다. 함께 있던 여자도 함께 욕을 먹었다지. 한국에서 KKK의 망령을 보는 것 같다. 뭐 드문 일도 아니다. 인도인 교수는 인종차별 방지를 위해 힘들어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씁쓸하다.  

미국에서는 1964년에야 공민권법이라는 게 선포되어 "모든 인간은 인종, 피부색, 종교, 국적에 상관없이 공공시설을 평등하게 즐길 권리가 있다" 고 되었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다. 그 전에는 알다시피 흑인이라면 백인이 사용하는 수도를 쓸 수도 없었고, 물론 백인이 다니는 학교에는 다닐 수 없었으며, 수영장 같은 공공시설도 쓸 수 없었다는 것.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 커플은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당장 린치를 당했다. 반대의 조합은? 묵인되었지만 그건 커플이 아니라 노리개감이었을 뿐이다. 그런 사회 속에서 흑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멸시와 모욕의 나날이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부딪혀야 한다면... 슬픔과 분노가 속으로 쟁여질 거라는 것, 뻔하지 않는가. 그런 시절이었다.  

그림책을 열면, 흑인 아이 존 헨리와 함께 노는 백인 아이가 나온다. 두 아이가 주인공이다. 둘은 같은 또래, 존 헨리의 엄마는 주인공 백인 아이의 집에서 일을 돌봐주는 게 직업이다. 이 집은 인종문제에 대해 비교적 진보적인 집안인 듯, 서로가 필요에 의해 고용하고 고용되고,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어울려 논다. 여름이라 수영이 제일 즐거운 놀이지만, 둘은 마을 수영장에는 갈 수가 없다. <수영장: 흑인 출입 금지> 라는 팻말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은 수영을 맘껏 즐길 수 있다. 냇가에서 자기들만의 더 멋진 수영장을 만들어놓고 놀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걸 원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활기차게 논다. 커서 소방관이 되겠다는 희망도 같다. 존 헨리의 살결은 비온 뒤의 솔잎 향기가 나는 듯한 반질반질한 갈색이라고, 아이는 생각한다. 자신의 살결은 어두운 밤, 현관 불빛을 감싸고 춤추는 나방처럼 창백한 색깔이라고도 생각한다. 검고 흰 색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 아이들의 몫이 아닌 것이다. 수영을 마친 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지만,  아이스크림 가게에는 흑인 아이는 들어갈 수 없다. 메이슨의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가서 두 개의 아이스크림을 사 오는 것은 언제나 '나'다. 하지만 둘 다 아이스크림을 정말 좋아하는 건 마찬가지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 아빠가 말씀하시길, "내일부터는 피부색에 상관없이 누구나 다 마을 수영장에도 들어갈 수 있으며, 식당, 화장실, 수돗물 등 뭐든지 다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되었다"는 것이다. 두 아이는 당장, 당장 내일 이른 아침의 약속을 한다. 마을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기로! 

그리고 다음날 아침. 수영장의 그날 아침 첫 물살을 가를 수도 있었던 아이들은, 그러나 우뚝 서고 만다. 물이 없어지고 그 너른 마을 수영장이 검은 아스팔트로 가득 채워지고 있는 것을 본다... 단 하루도 미루지 않고 그렇게나 빨리. 게다가 거기 뜨거운 김이 나는 검은 구멍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은 존 헨리의 형과 같은 젊은 흑인 일꾼들... 잔인한 일이다. 파렴치하다. 일꾼들의 눈은 검은 아스팔트의 습기와 열기 속에서 분노로 번뜩인다. 실상 그들이 뜨거운 아스팔트로 메워버리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삽을 휘둘러야 할 곳은 어디인가...? 

두 아이는 결코 마을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지 못한다. 다이빙대에 올라앉아 아스팔트 위에 박힌 수영장의 은빛 사다리를 내려다 보는 아이들의 힘없이 쳐진 어깨가 안쓰럽다.  

'  가슴이 쉬지 않고 두근거렸어요. / 존 헨리는 흐느끼면서 말했지요. / "백인들은 흑인들이랑 수영하는 게 싫은 거야." / "아냐, 그렇지 않아." /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 

한 아이가 다른 한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다. "어서 냇가로 가자, 나도 이렇게 낡은 수영장에서 수영하기는 싫었어." 

하지만 다른 한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기서 수영하고 싶었어. 나도 너랑 똑같이 하고 싶었어." 

.... 

아이들은 그러나 마음을 먹는다. 메이슨의 아이스크림 가게에 둘이 같이 들어가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그리고, 어깨동무를 하고 가게 앞문으로 걸어들어간다.  

그렇게 그림책 이야기는 끝난다. 메이슨은 두 꼬마 고객에게 아이스크림을 웃으며 건네줬을까? 아니면 화를 내면서 나가라고 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그 시기 공민권법의 발표와 함께 아예 문을 닫아버린 아이스크림 가게도 많았다지. 무서운... 혹은 우스운 일이다. 그런 가게들은 끝까지 문을 다시 열지 않았다지. 이 책을 쓴 데버러 와일즈는 그 결과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거기에서 멈춘 건 분명 현명한 생각이다. 그 뒤의 일을 생각해 보는 것은 각각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데버라 와일즈는 어린 시절 이 이야기와 비슷한 일을 일상에서 겪으며 의문을 느꼈다.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어째서 그럴까?' 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이런 책이 되어 나왔다. 물론 문학적으로 창작된 이야기지만,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일들을 흔히 겪었던 것이다. 사실에 기초한 한 편의 문학 작품이 주는 감동은 그 울림이 크다. 지난 시절의 과오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은 현재의 우리들에게 이 책은 여전히 묵직하다. 이런 이야기를, 초등학생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로 풀어쓰고, 그림으로 훌륭하게 그려낸 두 작가에게 진심어린 박수와 감사를 보낸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면서, "그땐 정말 왜 그랬을까?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 지금은 그런 일이 없어진 걸까...?" 라고 마음 속에 의문의 불씨 하나 품을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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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다섯 명의 오케스트라 비룡소의 그림동화 20
칼라 쿠스킨 지음, 정성원 옮김, 마크 사이먼트 그림 / 비룡소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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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준비된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며 저런 조화를 위해 저들은 무지 강도높은 연습을 할거야.. 전체의 흐름을 흐트리거나 원치 않는 음악이 만들어질 때면 지휘자에게 혼나기도 하겠지. 나름대로 다 타고난 연주자에 훌륭한 교육과 훈련을 거친 연주자들인데도 모여서 연주하는 건 쉽지 않을거야, 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들의 연습 시간을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가끔 영화를 보면 독주 악기를 갖고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그럴 때면 그 협주곡을 만들어 내기 위해 지휘자와 그의 오케스트라의 음악과 솔로 연주자의 음악이 충돌하면서 서로 맞서는 걸 보기도 한다. 만들어내고자 하는 음악이 다른 거야.. 라고 생각을 하지만, 어쨌든 참 쉬운 일이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이 그림책은 <백 다섯 명의 오케스트라>의 연주 '전' 모습에 집중한다.  

물론 피날레는 그날 저녁의 연주다. 필하모닉 홀 천장에는 샹들리에 여섯 개가 조용히 반짝거리고, 빨간 벨벳이 깔려 있고 축구장만큼이나 커다란 공연장이 음악으로 가득차는 순간을 채우는 사람들이 바로 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이라는 걸 보여준다. 금요일 밤 8시 30분, '검은 색과 흰색으로 잘 차려입은' 백다섯 명이 함께 자신의 일을 하는 순간, 그 일이란 '흰색 종이에 그려진 검은 색 음표'를 멋진 음악으로 바꾸는 일이란다. 검은 색과 흰 색이 그렇게 연관이 되어 있었다니. ^^ 

그런 피날레를 향해 백 다섯 명은 어떤 준비를 하는가? 그걸 유쾌하게 보여주는 그림책이다. 연습 과정? NO!  

집집마다 하나 둘 불이 켜지기 시작하면, 백 다섯 명은 일하러 나갈 준비를 한다. 어떤 준비?  

모두들, 옷 입을 준비를 한다고! 하하.  

아흔 두 명의 남자와 열세 명의 여자가 먼저 몸을 씻고( 누구는 샤워를 누구는 욕조에 푹 담그는 목욕을, 누구는 거품 목욕을... 그런데 이게 뭐? ), 그 다음에는 모두모두 수건으로 닦고, 그 다음에는 파우더를 뿌려서 물기를 다 말리고, 남자들은 면도를 하고, 그리고 속옷을 입는다네. 

남자들은 삼각팬티도 입고 사각팬티도 입고, 러닝셔츠는 입거나 안입거나 하고, 아래위가 붙은 긴 내복을 입는 빼빼마른 남자도 있고, 검은색 양말을 신고 어떤 사람은 양말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양말 대님을 매기도 하고. (그게 대체 어쨌다고? ) 

여자들은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속옷을 입고, 스타킹 위에 모직 양말을 덧대어 신기도 하고. 

이렇게 속옷을 다 입고 나면 이제 남자들은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검은 색 바지를 입고, 여자들은 검은 색 긴 치마를 입고, 치마와 어울리는 검은색 윗옷을 입고, 누구는 긴 드레스를 입기도 하고, 목걸이나 귀걸이도 하고. 하지만 팔찌는 절대 하지 않고(물론 연주하는 데 방해가 되니까). 

단 한 명의 남자만 앞쪽에 주름 장식이 달린 부드러운 흰색 셔츠를 입고 멋진 커프스 단추를 채운 뒤, 허리에 커머번드라고 부르는 널따란 검은색 허리띠를 두른다. 단 한 명의 남자만. 

또 또 모든 남자들은 검은 색 나비넥타이를 매고 모두들 턱시도를 입는데,  한 남자만 희고 커다란 나비넥타이를 매고, 특히 연미복을 입는다. 남자들이고 여자들이고 모두 다 차려입으면 그 위에 코트나 재킷, 망토를 걸치고 부츠를 신고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거나 귀마개까지 하고, 가방을 들고 나선다. 백 다섯 명은 모두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택시도 타고..  

금요일 밤 8시 25분, 백네 명이 필하모닉 홀의 커다란 무대로 입장을 한다. 가방 속에 든 악기를 모두 꺼내 무대로 나르고, 외투와 장갑 같은 것은 무대 뒤쪽의 어두운 사물함에 놔두고. 세 명은 악기를 나르지 않는다. 누구? 무거운 악기의 주인들은. 하프 연주자, 팀파니와 같은 타악기 연주자 들이다. 무대에 있는 백 네 개의 의자에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는다. 보면대에 악보를 올린다. 더블베이스 주자만이 등받이가 없는 높은 의자에 앉는다.... 

특별한 한 남자, 그 남자가 무대 앞으로 걸어와서 지휘대로 뛰어 오른 뒤, 청중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 지휘봉을 휘둘러서 그 넓고 조용한 공간을, 

음악으로 가득 채운다는 말씀.  

칼라 쿠스킨, 도대체 어떻게 이런 엉뚱한 구상을 한 걸까?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준비라는 것이, 연주가 있는 금요일 저녁에는 각자의 장소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두 똑같이 목욕하고 옷입고 인사하고 악기를 챙겨서 나온다는 거다... 모두모두 그렇게 한다. ^^ 이것, 유모어 그림책인가? 엉뚱하다. 그런데 뭐, 새삼스럽게 그걸 챙겨서 보고 있자니 실실 재밌기도 한 거다. 그러면 된 거겠지? 

그래도 악기도 다 나오고, 오케스트라 자리도 대충 다 나오고, 흰 건 종이고 검은 건 음표라는 중요한 사실도 다 나온다. 그러면 충분한 거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렇지, 그래서 재밌게 볼 수 있었던 거니까 그러면 충분한 거라고, 고개 끄덕여 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거 참.. 싱겁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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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 공지영 에세이
공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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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스스로의 말에 의하면, 여태 너무 심각하고 까탈스럽고 엄숙하게 글을 써온 탓에 자신은 잔뜩 오해를 받고 있다. 원래는 소탈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것. 글을 쓴 동기와 시절이 유머 같은 것, 상상도 못할 시대 아니었냐 말이다, 하면서 이번에는 꼭, 부질없는 글을 써보겠다고 한다. 부질없는 글. ^^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이 책은 실은, 부질없는 책이 아니라 유머 가득한 책이 되었다. 보는 내내 때로는 사심없이 웃게 만들고, 때로는 썰렁한 가운데도 웃게 만든다. 가벼움 만도 무거움 만도 아닌 것이, 어느 새 마음 가득 포만감을 준다. 

한겨레신문의 목요 섹션 ESC에 줄곧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책으로 낸 것이니, 실은 목요일마다 기다려서 출근하기 전에 꼭 보고 갔다. 작가의 바램대로 아침에 노란 풍선같은 즐거움을 준 때도 많다. 어떻게 그이의 일상에는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넘쳐나는 걸까? 하고 갸웃거린 적도 있다. 목요일 아침마다 그이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은 거의가 친구들 이야기, 가족 이야기, 자신의 옛적 경험 이야기들인데 그게 참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며 듣고 있으면 참 부럽기도 하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 때도 많은 것이,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서 목요일마다 기다리게 되는 것이었다. 끝나니 아쉽더니 책으로 나왔다기에 사서 보고 진짜 무겁게 사는 데 질렸다 싶을 때는 그저 누구에게라도 사서 주고 싶은 책이 되었다. 그 뒤로도 이 책이 집안 어느 곳인가를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불쑥불쑥 존재를 알리니, 다시 슬쩍 보는 김에 웃고 가자는 심정으로 한번씩 봐주는 책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가족 이야기며 친구 이야기며, 자신의 이야기까지 소재로 삼아 뭐, 이게 내 생각이야 하면서 자신감있게 드러내는 걸 보고 지지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그이가 사는 것도 남다르지 않고, 생각도 유다르지 않고, 소탈하고 마음이 열려있구나 하는 신뢰감, 게다가 원래 그런지 살다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낙천적인 품새까지 느껴져 편안했다. 아이 키우는 것이랑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랑, 세상을 버티고 살아가는 것도 다 편히 들어도 새겨들을 이야기들이어서 좋았다. 어느새 이렇게 마음으로 가까와져버리다니, 깜짝! 

물론 시시콜콜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궁금함이 많은 아줌마가 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세상사가 가볍기만 할 수는 없는 법, 때로 가벼워도 무거운 이야기가 있고 또는 희한하게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붕 뜬 세상의 뜬구름 같은 이야기도 있지만, 정말 깃털만큼 기분좋게 가벼이 팔랑거리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그럴 땐 딱, 완전히 수다쟁이 아줌마다 (아마도 참새 깃털? ^^ ). 어떤 땐 '아유 말도 많아,뭐 그리 소소한 것들 가지고 수다를 끝도 없이 늘어놓아~ 이제 자기가 뭔생각으로 사는지 척, 생글거리는 눈빛만 봐도 알 거 같아~!!' 라는 생각이 참말로 들기도 하니, 그거야말로 작가 공지영이 이번 기회에 딱 이루어보고 싶었던 경지가 아니겠는가!  

그건 그렇고 참, 이게 궁금하다. 이 책의 면면을 메꾸면서 빛내고 있는 이만한 감각있는 일러스트에, 작가 소개도 없이,책날개 한 귀퉁이에 너무너무 쪼그만하게 '일러스트 이민혜'라고만 해버리는 것, 이 무슨 부당한 처사인고? 이 책에서 공지영 작가 말고 이민혜 작가 때문에도 즐거웠을 이들 많을 터인데 걸맞는 소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일러스트레이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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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그건 무척이나 힘든 투쟁이었다. 모두들 녹초가 될 만큼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벌목꾼들이 길을 고치고 있을 때, 커다란 흰참나무 한 그루가 마차 위로 넘어졌다. 노새 두마리가 깔려 죽고 마차는 박살이 났다. 할머니 말로는 튼튼하고 잘 뻗은 나무여서 넘어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는데 그렇게 넘어졌다고 한다.  

드디어 벌목꾼들은 길닦기를 포기했다. 곧이어 봄비가 내리는 우기가 시작되었고... 그후 그들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보름달이 꽉 찼을 때 체로키들은 흰참나무 숲에서 잔치를 벌였다. 모두들 둥글고 노란 달님 아래서 춤을 추었다. 그랬더니 흰참나무들도 가지를 서로 스치거나, 가지로 체로키들을 건드리면서 함께 춤추고 노래불렀다. 또 다른 나무들들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진 그 참나무를 애도하는 노래도 불렀다. 그 느낌이 워낙 강해서 할머니는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고 하셨다. 

"작은 나무야, 이런 이야기는 절대 하면 안된다. 백인들의 세상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봤자 아무 쓸모도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넌 반드시 이 이야기를 알아두어야 해. 그 때문에 내가 너한테 이야기해주는 거란다." 

그제서야 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마른 통나무만을 땔감으로 쓰는 이유를 알았다. 또 그때서야 비로소 숲과 산에도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은이 포리스터 카터의 자서전적 소설이라는 이 책, 그래서인지 픽션과 실화의 경계를 종잡을 수 없이 읽었다. 그 전에도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삶의 방식은 여러 권의 책을 통해서 너무나 특별하게 다가왔다. 우리에게는 픽션일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들의 삶에서는 실제로 그들 삶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들 삶의 방식을 경외감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그러한 삶의 기회는 결코 오지 않겠지만... 다른 삶의 양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만도 다르다는 생각이었다.  

"자연의 비밀은 이미 다 밝혀졌고, 자연에 영혼 따위는 없다고 하면서 자연을 비웃는 사람들은 아마 산속의 봄태풍을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자연이 봄을 낳을 때는 마치 산모가 이불을 쥐어뜯듯 온 산을 발기발기 찢어놓곤 한다. 

겨울 찬바람을 악착같이 버티고 살아남은 나무가 있는데, 자연이 그걸 없애버리려고 마음먹었다고 하자. 자연은 그 나무를 땅에서 뿌리째 뽑아 산 아래로 굴려버린다. 온갖 관목과 나뭇가지들 사이를 훑고 지나가다가 약하다고 느끼는 것이있으면 그 바람 손가락으로 말끔히 없애버리는 게 바로 자연이다.  

자연이 보기에 없애버려야 하는데 바람의 힘으로 쓰러뜨릴 수 없을 때는, 그저 꽝! 하고 내리치면 된다. 그러면 그 자리에는 불타오르는 거대한 횃불만이 남게 된다. 자연은 살아있고 출산의 진통을 겪는다. 산에서 봄을 맞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것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는 작년에 남겨둔 모든 찌꺼기들을 자연이 깨끗이 쓸어없애는 중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래야 자연의 새로운 출산이 정갈하고 튼튼한 것으로 될 수 있다고 하시면서. 

태풍이 지나고 나면 작고 밝은 연초록빛의 새로운 생명들이 덤불이나 나뭇가지에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그러면 자연은 4월의 비를 내려준다. 부드럽고 촉촉한 비에 젖은 산골짜기가 안개로 뿌예지면 나뭇가지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길 위로 똑똑 떨어졌다. 

4월의 비에는 상쾌하고 들뜬 기분과 왠지 모를서글픔이 함께 배어있다. 할아버지도 항상 그런 감정들이 뒤범벅된 느낌을 받는다고 하셨다. 그 비는 서글픈 기분을 갖게 한다. 아무도 그걸 붙잡아둘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건 눈 깜짝할 새에 스러져가는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가졌던 또다른 즐거움 하나가 바로 이것, 자연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아무래도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삶은 자연이 아니라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갇혀 버렸다. 아니 갇힌 게 아니라 스스로를 거기 가두고 안심하고 살아가는 것이리라.. 자연은 때로 두렵고 때로 얕잡아보이고, 대부분은 생소한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도 자연과의 소통을 희구하는 본능이란 게 아직은 남아있는가.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연의 소리를 듣는 일이 마음을 울렸다. 마치 새로운 탄생을 위해 남아있는 모든 찌꺼기들을 자연이 쓸어내려고 할 때 모든 것을 산 아래로 굴려가듯, 마음에 돌들이, 또  부러진 나무들이 굴러가는 우릉우릉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커다란 울림으로 자연의 이야기가 다가왔다. 아직은 우리 몸 일부에, 우리가 그저 자연의 일부이며 아무리 아닌 듯 살아도 본능은 남아 때로 이렇게 울리기도 한다는 것, 그걸 느낄 때 신비로왔다.  

다섯 살 여섯 살의 작은 나무는 체로키 인디언인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산에서 생활하며 말 그대로 자연 그대로 살아간다. 산은 한없이 정답고 때로 한없이 크고 강하다. 산의 힘있는 부드러움, 그 산의 품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들의 존재를 함께 사는 동반자로서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다. 두 분 어른들이 오랜 경험과 지혜로 작은 나무를 받쳐준다. 아니, 산과 산속 생물들의 사랑에 눈뜨게 해준다. 다들 그런 존재로 살아가면서 우호의 팔을 벌릴 때, 그때 자신의 손을 뻗어 스치기만 해도 되는 것이다. 공존의 아름다운 삶이다. 지은이가 작은 나무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별빛과 같이 반짝인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자전적 소설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들려주는 포리스트 카터의 삶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비극적인 이야기. 이 이야기의 작가는, 믿을 수 없게도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것.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흑백분리주의자의 단체인 KKK단원이었으며, 그 지도자의 연설문을 작성한 사람이었다는 것, 믿을 수 없었다. 백인우월주의 어디에 이 책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석류알같은 영혼의 이야기가 깃들 수 있단 말인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을 다 읽고서야 그 사실을 인터넷에서 보게 되었다. 책 자체에서 오는 감동은 그대로 누린 터이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 뒤에 느낀 배신감, 당혹감은? 결국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맘껏 비난하기도 아직 석연치 않다.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이 한자락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보석과도 같은 한 권의 책이 삶과 철저히 분리된 작가적 재능의 산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지은이가 스스로 믿지 않는 것을 독자인 우리는 또한 믿을 수 없다... 결국 섣불리 단정지을 수 없는 채로 마음을 닫아둔다. 어리석게도, 시간이 그 이유를 들려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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