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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여름
데버러 와일즈 지음, 제롬 리가히그 그림, 김미련 옮김 / 느림보 / 2006년 7월
평점 :
- 평등의 날이 올 거라고 굳게 믿었던 그 시절 어린이들을 위하여- 이 글의 작가인 데버러 와일즈가 책 앞에 붙인 말이다. 의미심장하다... 흑인인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까지 되었지만, 평등의 날이 금방 오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1964년 여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건 정말 얼마나 더디게 오는가, 오긴 오는 걸까.. 그저 헛된 희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도 뉴스에는 한국에서 재직 중인 인도인 교수가 버스에서 한국인 여자와 동행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더러운 놈, 니네 나라로 꺼져!" 소리를 들어야 했다는 울적한 소식이 들린다. 아니 울컥하다. 함께 있던 여자도 함께 욕을 먹었다지. 한국에서 KKK의 망령을 보는 것 같다. 뭐 드문 일도 아니다. 인도인 교수는 인종차별 방지를 위해 힘들어도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씁쓸하다.
미국에서는 1964년에야 공민권법이라는 게 선포되어 "모든 인간은 인종, 피부색, 종교, 국적에 상관없이 공공시설을 평등하게 즐길 권리가 있다" 고 되었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다. 그 전에는 알다시피 흑인이라면 백인이 사용하는 수도를 쓸 수도 없었고, 물론 백인이 다니는 학교에는 다닐 수 없었으며, 수영장 같은 공공시설도 쓸 수 없었다는 것.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 커플은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당장 린치를 당했다. 반대의 조합은? 묵인되었지만 그건 커플이 아니라 노리개감이었을 뿐이다. 그런 사회 속에서 흑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멸시와 모욕의 나날이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부딪혀야 한다면... 슬픔과 분노가 속으로 쟁여질 거라는 것, 뻔하지 않는가. 그런 시절이었다.
그림책을 열면, 흑인 아이 존 헨리와 함께 노는 백인 아이가 나온다. 두 아이가 주인공이다. 둘은 같은 또래, 존 헨리의 엄마는 주인공 백인 아이의 집에서 일을 돌봐주는 게 직업이다. 이 집은 인종문제에 대해 비교적 진보적인 집안인 듯, 서로가 필요에 의해 고용하고 고용되고,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어울려 논다. 여름이라 수영이 제일 즐거운 놀이지만, 둘은 마을 수영장에는 갈 수가 없다. <수영장: 흑인 출입 금지> 라는 팻말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은 수영을 맘껏 즐길 수 있다. 냇가에서 자기들만의 더 멋진 수영장을 만들어놓고 놀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걸 원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활기차게 논다. 커서 소방관이 되겠다는 희망도 같다. 존 헨리의 살결은 비온 뒤의 솔잎 향기가 나는 듯한 반질반질한 갈색이라고, 아이는 생각한다. 자신의 살결은 어두운 밤, 현관 불빛을 감싸고 춤추는 나방처럼 창백한 색깔이라고도 생각한다. 검고 흰 색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 아이들의 몫이 아닌 것이다. 수영을 마친 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지만, 아이스크림 가게에는 흑인 아이는 들어갈 수 없다. 메이슨의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가서 두 개의 아이스크림을 사 오는 것은 언제나 '나'다. 하지만 둘 다 아이스크림을 정말 좋아하는 건 마찬가지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 아빠가 말씀하시길, "내일부터는 피부색에 상관없이 누구나 다 마을 수영장에도 들어갈 수 있으며, 식당, 화장실, 수돗물 등 뭐든지 다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되었다"는 것이다. 두 아이는 당장, 당장 내일 이른 아침의 약속을 한다. 마을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기로!
그리고 다음날 아침. 수영장의 그날 아침 첫 물살을 가를 수도 있었던 아이들은, 그러나 우뚝 서고 만다. 물이 없어지고 그 너른 마을 수영장이 검은 아스팔트로 가득 채워지고 있는 것을 본다... 단 하루도 미루지 않고 그렇게나 빨리. 게다가 거기 뜨거운 김이 나는 검은 구멍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은 존 헨리의 형과 같은 젊은 흑인 일꾼들... 잔인한 일이다. 파렴치하다. 일꾼들의 눈은 검은 아스팔트의 습기와 열기 속에서 분노로 번뜩인다. 실상 그들이 뜨거운 아스팔트로 메워버리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삽을 휘둘러야 할 곳은 어디인가...?
두 아이는 결코 마을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지 못한다. 다이빙대에 올라앉아 아스팔트 위에 박힌 수영장의 은빛 사다리를 내려다 보는 아이들의 힘없이 쳐진 어깨가 안쓰럽다.
' 가슴이 쉬지 않고 두근거렸어요. / 존 헨리는 흐느끼면서 말했지요. / "백인들은 흑인들이랑 수영하는 게 싫은 거야." / "아냐, 그렇지 않아." /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
한 아이가 다른 한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다. "어서 냇가로 가자, 나도 이렇게 낡은 수영장에서 수영하기는 싫었어."
하지만 다른 한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기서 수영하고 싶었어. 나도 너랑 똑같이 하고 싶었어."
....
아이들은 그러나 마음을 먹는다. 메이슨의 아이스크림 가게에 둘이 같이 들어가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그리고, 어깨동무를 하고 가게 앞문으로 걸어들어간다.
그렇게 그림책 이야기는 끝난다. 메이슨은 두 꼬마 고객에게 아이스크림을 웃으며 건네줬을까? 아니면 화를 내면서 나가라고 했을까. 기록에 의하면, 그 시기 공민권법의 발표와 함께 아예 문을 닫아버린 아이스크림 가게도 많았다지. 무서운... 혹은 우스운 일이다. 그런 가게들은 끝까지 문을 다시 열지 않았다지. 이 책을 쓴 데버러 와일즈는 그 결과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거기에서 멈춘 건 분명 현명한 생각이다. 그 뒤의 일을 생각해 보는 것은 각각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데버라 와일즈는 어린 시절 이 이야기와 비슷한 일을 일상에서 겪으며 의문을 느꼈다.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어째서 그럴까?' 라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이 이런 책이 되어 나왔다. 물론 문학적으로 창작된 이야기지만,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일들을 흔히 겪었던 것이다. 사실에 기초한 한 편의 문학 작품이 주는 감동은 그 울림이 크다. 지난 시절의 과오에서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은 현재의 우리들에게 이 책은 여전히 묵직하다. 이런 이야기를, 초등학생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로 풀어쓰고, 그림으로 훌륭하게 그려낸 두 작가에게 진심어린 박수와 감사를 보낸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면서, "그땐 정말 왜 그랬을까?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 지금은 그런 일이 없어진 걸까...?" 라고 마음 속에 의문의 불씨 하나 품을 수 있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