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그건 무척이나 힘든 투쟁이었다. 모두들 녹초가 될 만큼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벌목꾼들이 길을 고치고 있을 때, 커다란 흰참나무 한 그루가 마차 위로 넘어졌다. 노새 두마리가 깔려 죽고 마차는 박살이 났다. 할머니 말로는 튼튼하고 잘 뻗은 나무여서 넘어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는데 그렇게 넘어졌다고 한다.  

드디어 벌목꾼들은 길닦기를 포기했다. 곧이어 봄비가 내리는 우기가 시작되었고... 그후 그들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보름달이 꽉 찼을 때 체로키들은 흰참나무 숲에서 잔치를 벌였다. 모두들 둥글고 노란 달님 아래서 춤을 추었다. 그랬더니 흰참나무들도 가지를 서로 스치거나, 가지로 체로키들을 건드리면서 함께 춤추고 노래불렀다. 또 다른 나무들들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진 그 참나무를 애도하는 노래도 불렀다. 그 느낌이 워낙 강해서 할머니는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고 하셨다. 

"작은 나무야, 이런 이야기는 절대 하면 안된다. 백인들의 세상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봤자 아무 쓸모도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넌 반드시 이 이야기를 알아두어야 해. 그 때문에 내가 너한테 이야기해주는 거란다." 

그제서야 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마른 통나무만을 땔감으로 쓰는 이유를 알았다. 또 그때서야 비로소 숲과 산에도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은이 포리스터 카터의 자서전적 소설이라는 이 책, 그래서인지 픽션과 실화의 경계를 종잡을 수 없이 읽었다. 그 전에도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삶의 방식은 여러 권의 책을 통해서 너무나 특별하게 다가왔다. 우리에게는 픽션일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들의 삶에서는 실제로 그들 삶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들 삶의 방식을 경외감으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그러한 삶의 기회는 결코 오지 않겠지만... 다른 삶의 양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만도 다르다는 생각이었다.  

"자연의 비밀은 이미 다 밝혀졌고, 자연에 영혼 따위는 없다고 하면서 자연을 비웃는 사람들은 아마 산속의 봄태풍을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자연이 봄을 낳을 때는 마치 산모가 이불을 쥐어뜯듯 온 산을 발기발기 찢어놓곤 한다. 

겨울 찬바람을 악착같이 버티고 살아남은 나무가 있는데, 자연이 그걸 없애버리려고 마음먹었다고 하자. 자연은 그 나무를 땅에서 뿌리째 뽑아 산 아래로 굴려버린다. 온갖 관목과 나뭇가지들 사이를 훑고 지나가다가 약하다고 느끼는 것이있으면 그 바람 손가락으로 말끔히 없애버리는 게 바로 자연이다.  

자연이 보기에 없애버려야 하는데 바람의 힘으로 쓰러뜨릴 수 없을 때는, 그저 꽝! 하고 내리치면 된다. 그러면 그 자리에는 불타오르는 거대한 횃불만이 남게 된다. 자연은 살아있고 출산의 진통을 겪는다. 산에서 봄을 맞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것을 알 수 있다. 할아버지는 작년에 남겨둔 모든 찌꺼기들을 자연이 깨끗이 쓸어없애는 중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래야 자연의 새로운 출산이 정갈하고 튼튼한 것으로 될 수 있다고 하시면서. 

태풍이 지나고 나면 작고 밝은 연초록빛의 새로운 생명들이 덤불이나 나뭇가지에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그러면 자연은 4월의 비를 내려준다. 부드럽고 촉촉한 비에 젖은 산골짜기가 안개로 뿌예지면 나뭇가지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길 위로 똑똑 떨어졌다. 

4월의 비에는 상쾌하고 들뜬 기분과 왠지 모를서글픔이 함께 배어있다. 할아버지도 항상 그런 감정들이 뒤범벅된 느낌을 받는다고 하셨다. 그 비는 서글픈 기분을 갖게 한다. 아무도 그걸 붙잡아둘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건 눈 깜짝할 새에 스러져가는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가졌던 또다른 즐거움 하나가 바로 이것, 자연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아무래도 자연의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살아간다. 삶은 자연이 아니라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갇혀 버렸다. 아니 갇힌 게 아니라 스스로를 거기 가두고 안심하고 살아가는 것이리라.. 자연은 때로 두렵고 때로 얕잡아보이고, 대부분은 생소한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도 자연과의 소통을 희구하는 본능이란 게 아직은 남아있는가.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연의 소리를 듣는 일이 마음을 울렸다. 마치 새로운 탄생을 위해 남아있는 모든 찌꺼기들을 자연이 쓸어내려고 할 때 모든 것을 산 아래로 굴려가듯, 마음에 돌들이, 또  부러진 나무들이 굴러가는 우릉우릉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커다란 울림으로 자연의 이야기가 다가왔다. 아직은 우리 몸 일부에, 우리가 그저 자연의 일부이며 아무리 아닌 듯 살아도 본능은 남아 때로 이렇게 울리기도 한다는 것, 그걸 느낄 때 신비로왔다.  

다섯 살 여섯 살의 작은 나무는 체로키 인디언인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산에서 생활하며 말 그대로 자연 그대로 살아간다. 산은 한없이 정답고 때로 한없이 크고 강하다. 산의 힘있는 부드러움, 그 산의 품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과 무생물들의 존재를 함께 사는 동반자로서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다. 두 분 어른들이 오랜 경험과 지혜로 작은 나무를 받쳐준다. 아니, 산과 산속 생물들의 사랑에 눈뜨게 해준다. 다들 그런 존재로 살아가면서 우호의 팔을 벌릴 때, 그때 자신의 손을 뻗어 스치기만 해도 되는 것이다. 공존의 아름다운 삶이다. 지은이가 작은 나무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별빛과 같이 반짝인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자전적 소설이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들려주는 포리스트 카터의 삶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비극적인 이야기. 이 이야기의 작가는, 믿을 수 없게도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것.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흑백분리주의자의 단체인 KKK단원이었으며, 그 지도자의 연설문을 작성한 사람이었다는 것, 믿을 수 없었다. 백인우월주의 어디에 이 책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석류알같은 영혼의 이야기가 깃들 수 있단 말인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을 다 읽고서야 그 사실을 인터넷에서 보게 되었다. 책 자체에서 오는 감동은 그대로 누린 터이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그 뒤에 느낀 배신감, 당혹감은? 결국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맘껏 비난하기도 아직 석연치 않다.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이 한자락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보석과도 같은 한 권의 책이 삶과 철저히 분리된 작가적 재능의 산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지은이가 스스로 믿지 않는 것을 독자인 우리는 또한 믿을 수 없다... 결국 섣불리 단정지을 수 없는 채로 마음을 닫아둔다. 어리석게도, 시간이 그 이유를 들려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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