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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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한겨레문학상 수상작품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뭔가, 다른 문학상과는 지향점이 다른, 주류와 모범을 벗어난 마이너리티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 세상이 거기에 있었다. 그런 기대감, 이번에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야기가 마치, 네 개의 날개를 단 종이 바람개비의 끝에서 시작하듯 하나하나 시작되었다. 하나의 날개마다 다른 색과 다른 질감과 무게감을 가지고 나름의 곡선을 그리며 돌아간다.  그 하나하나는 어김없이 우리 사회의 열외자들이 그리는 무늬에 다름아니다. 그 무늬들은 비틀리고, 무기력하고, 천박하거나 개념없다. 그러나 그 특성들은 작가의 말마따나, 천민자본주의의 막장에 서 있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나 다름없다. 한 껍질만 벗기면 바로 그 일그러진 무늬들이 노출된다. 물론, '견해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작가의 말을 살짝)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거대한 바람개비의 서사는 기실 단 하루로 압축 표현된다.  

1 장영달, AM 8:00  

2 윤마리아, AM 8:20   

3 김중혁, AM 8:10  /  4 김중혁, AM 8:30   

5 기무, AM 8:20   

6 장영달, AM 9:00  / 7 장영달, AM 10:20 

8 기무,   AM 9:20  / 9 기무, AM 10:10   

10 윤마리아, AM 10:20   

..  

그리고  

33 김중혁, PM 4:07 . 코엑스몰의 난데없는 정전.  

그리고 1부가 끝난다. 이제 바람개비의 네 날개는 끝점으로부터 안쪽을 향하여 각자의 날개를 타고 굽어들어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인다. 그 가볍게 팔랑거리는 끝에서는 어떤 연관도 없었으되, 안으로 모여들면서 그들은 소실점을 위해 준비된 하나의 사건으로 얽혀든다. 그리고 암전. 뭔가 확실히 그림이 된다.

결국 그들은 하나의 장소, 같은 시간대에 희대의 코믹잔혹이벤트를 위해 준비되고 있었던 거다. 암울한 21세기에는 말이 되는 이벤트... 혼돈과 모순 가득한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말이 되는 이벤트. 작가의 말에 주목한다. 

"경쟁과 착취, 혼돈과 모순, 그로 인해 어느 순간 돌이켜본 우리들의 현실은 천민자본주의의 막장에서 비로소 드러나버린 '열외인간'이라는 낙인뿐입니다. 과연 이 지독한 경쟁에서 승리한 이들은 이른바 '열외인간'이라는 유전자로부터 말끔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천민자본주의의 오물통 속에서 벌이는  진흙탕 싸움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모두 열외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 대한민국을 양분하고 있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천민자본주의 경제논리 앞에 우성과 열성 유전자로 줄 세우기하는 가름의 방식이라는 데 동의하는 터라 작가의 말은 공감이 간다. 게다가 신인 작가가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서 소설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라고 자탄하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뿐이라는 데도 막연하나마 수긍할 수 있다. 달리 어쩌겠는가. 

이 작품은 대단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놀라운 상상력과 탄탄한 구성 앞에서 경탄하다보면 어느새 종점이다. 독자는 숨돌릴 틈도 없이 이야기의 재미에 이끌리며, 끝모를 상상력의 손에 땀나는 결말로 끌려든다. 네 개의 바람개비의 날개가 하나의 어둠의 터널로 이끌리듯이 이야기도 독자도 그 터널로 빠져들고 만다. 높아지는 기대감.  

그러나, 아쉽게도 막판에 맥이 빠진다. 2부가 얼크레설크레 휘돌다가 결말을 향해 치달으면서 정점을 향하다가 결국에는, 뭔가를 펼쳐보이는 상황이 다가오고야 만다. 그러나 그 속에 정작 들어있는 것은? 다소 진부하고 도식적인, 무책임한 설명으로 서둘러 마감해버린 결말. (물론 견해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바람개비의 날개가 마치 여태껏 받은 세찬 바람과 달리기의 힘을 견디지 못할 만큼이었는지, 어느새 스르르 풀려버린 듯 맥이 빠진다. 벅찬 마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어떤 거대한 음모가 이 말도 안되는 기막힌 사태를 더욱 기막힌 명쾌함으로 풀어줄 것인지를 은근히 기다리는 기대감이 너무 컸는지도 모른다. 그거야.. 작가가 만들어낸 기대감이니 독자인 내 몫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하여간 결말은 많이 아쉬웠다. 작가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신인 작가가 할 수 있는 눌변의 전부"라고 하겠지만, 질문에도 나름의 완결 구조가 있어야 하는 거니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그러나 어쨌든, 멋진 작품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느꼈던 그 씁쓸함, 그건 어쩔 수 없이 돌이켜 보게 되는 현실이 주는 씁쓸함이다. 그리고 똑같이 책을 읽는 동안 느꼈던 그 짜릿함, 그건 아마도 그로테스크한 생기를 뿜어내는 작가의 필력에 힘입은 것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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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문선명 지음 / 김영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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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스스로의 말에 의하면, '이름 석 자만 말해도 세상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지는, 세상의 문제인물'인 사람. 동전의 이면을 보듯 다시 보면 '돈도 명예도 탐하지 않고 오직 평화만을 이야기하며 90평생 살아왔다'는 사람. 세상에 알려지기를 통일교 즉,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창시자이며 최고 목회자인 사람이다. 문선명 총재라고들 한다..  

세상의 많은 종교가 평화에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전쟁과 재앙의 불씨가 되었다는 걸로 하여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해서 커다란 반감을 갖고 있다. 막연히 기독교의 한 종파라는 것만으로도 듣기 거북하고- 실제로는 기독교계에서도 이단으로 몰리니 오히려 종교적 박해를 받는 입장이지만 어쨌든 기독교, 게다가 교차결혼 같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마구 이루어내는 집단, 나름 거대한 재력을 소유한 기업화된 이미지... 였으니 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주 보는 주간지에서 생각과는 달리 비교적 긍정적인 의미로 교차결혼을 소개하고 있어서 그저 '달리 보면 그런 측면도 있을 수 있겠구나', 했던 게 전부였는데. 확실히 지금은 달라졌다. 

실제로 교차결혼으로 일본에서 한국의 농촌 총각과 결혼한 분을 알게 되어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니까 종교적인 만남 말고, 일본어 수업을 통해 만나게 되었는데, 그이는 인간적으로도 정말 매력적인 여성이다. 왠지 조심스러워 종교 이야기 말고 여러 가지를 나누었는데, 좋은 친구 한 사람이 새로 생겨서 기쁠 따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특이한 결혼 방식 말고는, 정말 아무 것도 특별할 게 없는 그저 편안하고 좋은 사람이어서 편하게 종교에 대해서도 물어보게 되었다. 일본인이지만 편견 없이 통일교를 접했고, 문선명 총재에 대해 공감하고 존경하게 되어 그에 맞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지금도 자신의 선택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나야말로 좀 더 알고 싶어졌다. 종교인으로서 조금도 과하지 않고, 생활인으로서는 더할나위없이 소박하고 훌륭한 한 개인과의 만남이 내 편견을 어느새 희석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책을 권해주셔서 보게 되었다. 그것 참, 적절한 때에 보게 된 것 같다. 

책을 통해 보는 문총재의 삶은 믿을 수 없을만큼 역동적이었다. 종교적 에너지라고는 하지만,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치를 훌쩍 넘은 많은 일을 해 왔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실은 어두운 안개에 둘러싸인 안좋은 소문 말고는 자세히 알아보려 한 적이 없었으니, 일단은 흑막에 쌓인 인물이 전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지은이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 대해 너무나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어하는 게 느껴진다. 너무 많은 오해를 받았으니 제발 제대로 듣기나 해보고 판단하라는 말일 것이다. 90평생 얼마나 많은 '사명' 앞에 섰는지 듣기만 해도 힘들 정도였는데, 그런 일들이 일관되게 인류와 세상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존경스러운 일이다. 나 자신 국제 정세 속에서 그런 일들이 실제로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파악할 만큼은 안되니 아무래도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지만, 진심으로 평화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한 사람의 진실성이 느껴졌다.  

"2001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두 동강 나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를 두고 이슬람교와 기독교사이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명의 충돌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충돌과 대립의 종교가 아닙니다. 둘은 하나같이 평화를 중시하는 종교입니다. 이슬람 세력은 과격하다는 생각이 편견인 것처럼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도 편견일 뿐입니다. 종교의 본질은 똑같습니다. "  

"1994년 우리는 전 세계 종교학자 40여명을 모아 <세계경전>을 편찬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불교를 비롯한 세계 주요 종교의 경전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비교 연구한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작업을 끝내고 보니 그 많은 종교의 가르침 중에서 73%는 모두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나머지 27%만이 각 종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 종교의 73%는 동일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터번을 두르고 염주를 목에 걸고 십자가를 앞세우는 겉모습은 다르지만 우주의 근본을 찾고 창조주의 뜻을 헤아리는 것은 모두 같습니다 (잠깐, 불교가 창조주의 뜻을 헤아리는 종교인지는 별개로 치고..).  

사람들은 서로 취미만 같아도 좋은 친구가 됩니다. 태어난 고향만 같아도 몇 십 년 같이 지낸 사이처럼 말이 통합니다. 그런데 무려 가르침의 73%나 같은 종교들끼리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서로 통하는 것들을 이야기하며 손을 잡으면 될 일을 서로 다른 것들만 내세우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평화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평화와 사랑을 놓고 다툼을 벌입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이 사는 곳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면서도 평화를 내세웁니다.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이 죽어가는데도 그들은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믿는 유대교 역시 평화의 종교입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경전>을 만들면서 우리가 얻은 결론은 세계의 종교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가르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잘못된 신앙은 편견을 부르고 편견은 싸움을 부릅니다."   

종교의 '문제'를 짚고 있는데, 공감이 가는 이야기다.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문총재가 아라파트를 12번이나 만났다는 걸 알고 놀랐다.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인들 수천 명을 한 자리에 모아 화해의 광장을 마련하고 평화행진을 벌였다는 것, 평생 세상의 낮고 구석진 곳을 찾아 아프리카와 남미를 찾아다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스케일이 크고 대단한 일을 하는 것과 별개로, 스스로의 일상이 소박하고 검소하다고 한다. 반찬은 세 가지 이상을 놓고 먹지 않는다든가, 대형할인점에서 5만원도 안 하는 구두를 사서 신는다든가, 값싸고 시간이 절약되니 맥도널드를 즐겨 먹는다든가, 심지어 식구들에게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 같은 걸 사먹지 말고 물을 마셔서 절약하라고 한다니.(이토록 소소한 실천 이야기, 대범한 누군가는 웃어넘길지 모르지만 내게는 와서 꽂힌다..) 세상 사람 모두 넥타이를 풀고 그 돈을 굶주리는 이웃을 위해 쓴다면 세상은 좀더 살만한 곳이 될 것이라는 제안에는 나도 슬며시 웃음이 난다.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너무나 소박해서 존경스러운 삶이 아닌가.  

문 총재의 삶은 열정적이고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구나. 공감.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세상의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나, 가족 안에 가부장적인 질서가 평화를 유지하는 받침이라고 생각하는 것, 공산주의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 등에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정에 찬 실천주의자의 삶을 들여다본 일이 내게는 근거없는 편견을 없애게 된, 아주 좋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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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기적 - 글 없는 그림책
피터 콜링턴 지음, 문학동네 편집부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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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가의 다른 그림책 <똑똑한 고양이>를 보고 하도 재미있어서 찾아보게 된 책인데, 이 책도 아주 좋았다. 음.. 굉장히 멋지다. 다른 작품도 또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믿음이 가는 작가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면 하도 많고 또 비슷비슷해서 좀 식상한데다가 감동을 강요받는 기분이 들 때도 있는데, 그렇게 흔하디흔하고 많고 많은 이야기 중에서 이런 이야기를 발견한 게 여간 상큼한 게 아니다.  

글자 하나 없는, 오로지 그림만의 그림책.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글자 한 줄이면 다 말해버릴 것 같은 내용을 크고 작은 여덟 컷으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는, 기술적인 면을 보여주는 장면도 있는데 그런 걸 보면 말보다 그림으로써 더 잘 표현할 수 있구나, 하는 데 생각이 미친다.   

작가가 이끄는 대로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순간이 온다. 그러고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이야기라든가, 그림책 안에서 인물 동선의 배치라든가 하는 것들이 아주 영화적이다. 인물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그림책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시선을 움직이고 있다. 시각적인 효과를 충분히 고려한 이런 구도가 신선하고도 효과적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그림책은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져서 TV를 통해 방영되었다고 한다. 꼭 한 번 보고 싶어진다. 음악과 효과음은 어떻게 썼을까, 그것도 궁금하다.

외딴 곳에 오두마니, 할머니의 작고작은 오두막이 눈밭에 서 있다. 아마도 크리스마스 날 아침인 듯싶지만, 먹을 것도 돈도 다 떨어지고 불도 때지 못하고 있다. 할머니는 잠시 고민해 보지만, 별 수 없이 생계수단인 아코디언을 들고 추운 거리로 나간다. (그러고 보면 할머니는 예술가다. 그것도 하필이면 마음의 향수를 자극하는 아코디언...) 눈밭을 지나 멀리 교회가 있고 다시 마을이 나온다. 춥고, 배고프고, 기운도 없는 할머니는 한 카페 앞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힘겨운 아코디언 연주를 한다. 아, 할머니 등 뒤의 밝고 따뜻해 보이는 카페 안에서는 사람들이 창가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서로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들은 길 위의 할머니가 점점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절대 알지 못하는 거다... 쉬지 않고 사람들은 부산하게 지나가지만, 그 따뜻함, 그 다정함, 그 부산함은 할머니의 것이 아니다. 펼친그림 한 면에서 절망은 아프도록 느껴진다.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까? 어쩔 수 없이 할머니는 아코디언을 팔아 돈을 마련한다. 게다가 바로 뒤에 <물건 삽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붙여 놓은 가게. 동반자였던 아코디언에 주는  이별의 키스, 눈물. 그리고 그걸로 바꾼 허기를 채워 줄 한 장의 지폐. 그러나 참말 하늘도 무심하지, 어찌 이런 일이! 가게 유리문을 나서자마자, 모퉁이를 돌기도 전에, 얼굴을 가린 채 오토바이를 탄 청년이 돈을 휙, 낚아채 가버린다. 눈 위에 난 자국을 보고 정신없이 교회까지 따라가지만, 청년은 교회의 모금함까지 들고 나오는 중이다. 할머니가 붙들자 오토바이가 쓰러지고, 이번에는 할머니가 모금함을 낚아채서 서둘러 교회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린다. 청년이 빼앗아 간 자신의 돈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다. 모금함에 손을 대다니, 안될 일이야! 라는 생각이 앞선 거다. 그렇게 들어간 교회 안은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다 흩어져 쓰러져 있고 어수선하다. 할머니는 모든 걸 정성스럽게 다시 정돈하고 모금함도 제자리에 두고 교회를 나선다. 

다시 눈밭. 먼먼 길. 한 걸음 한 걸음이 점점 힘들어지고, 등은 점점 굽어지고, 나중에는 걷기도 힘들어지고, 결국, 할머니는 쓰러지고 만다. 그 위로 크리스마스 눈이 쌓인다. 얼굴도, 맨손도 차디찬 눈 위에 그대로. 그리고,

기적이 일어난다. 저 멀리 교회에서부터 종종거리며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작은 사람들이! 다가오고 보면 그들은 아까 할머니가 정돈했던 크리스마스 장식 안의 여러 인물들이다.  마리아, 요셉, 세 명의 동방박사들, 목동. (세상에나, 정말 멋진 일이다!) 그들이 쓰러진 할머니를 메고 끌고 할머니의 집으로 간다. 그들은 할머니에게 따뜻한 크리스마스 저녁을 선물할 준비를 한다. 그것도 각자 자기의 몫으로.. 여기서도 작가는 아주 치밀하게 그들의 역할을 분담시킨다. 

세 명의 동방박사들은 각자 자신이 아기 예수에게 선물하려고 장만해온 황금, 유향, 몰약 들을 팔러 나간다. 할머니가 아코디언을 팔고 나온 <물건 삽니다> 라고 적혀 있던 가게. 주인은 천연덕스럽게 그 물건들을 감정하고는, 값을 치러준다. (여기서 피터 콜링턴식 유머!) 돈이 되자 그들은 아코디언을 되찾고, 마트에 가서 식료품을 듬뿍 사서 이고지고 돌아온다. 그새 목수인 요셉은 땔감을 장만하고 크리스마스 트리까지 준비했다. 목동은?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목동은 할머니가 빼앗겼던 돈통을 어디선가 찾아온다. 그도 딱 필요한 일을 한 거다. 마리아는 따뜻한 눈길로 의식이 없는 할머니 곁에서 손을 잡고 있다. 그리고, 

모두들 일을 한다. 활활 타오르는 따뜻한 불길, 커다란 칠면조 요리, 따뜻한 스프와 차가 준비되고 목수 요셉은 전공을 살려 구멍 난 마루 바닥을 수리하고 있다. 목동은 트리를 장식하느라 여념이 없다. 나무에는 촛불들이 반짝이고, 그 옆에는 남은 돈이 든 할머니의 돈통, 되찾은 아코디언, 그리고 과일 바구니까지. 창 밖에는 조용히 눈이 내린다. 그리고, 

모두들 퇴장. 마지막 순간 마리아의 손끝이 뭔가 표식을 남기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종교적인 무지..) 할머니가 문득 의식을 되찾고, 눈이 휘둥그레지고, 기쁨에 넘쳐 사방을 둘러본다. 모든 것이 충만하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지만, 어떤 흔적도 없다. 할머니는 한번 어깨를 으쓱, 그리곤 맛난 식사를 즐기고 기쁨에 겨워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맘껏 크리스마스 밤을 누린다. 이 장면도 완전 좋았다. 할머니가 무릎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장면으로 처리할 수도 있겠지만, 피터 콜링턴은 그러지 않는다. 너무 진지해지면 그만... 유머가 깃들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똑똑한 고양이>에서 보여준 작가의 유머 감각이 어디 가랴. 대신 할머니는 그 선물, 그 축복을 온전히 누리는 것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아코디언 연주와 그에 맞춰 부르는 기쁨의 노래가 행복과 감사의 표현이 아닐까. 그게 더 자연스럽다. 

마지막 한 컷은 그대로 한 장의 크리스마스 카드. 캄캄한 하늘에 반짝이는 별빛, 아래는 하얗게 눈이 쌓여있고 작은 집 굴뚝에서는 따뜻하고 하얀 연기가 새어나온다. 하나밖에 없는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노란 불빛과 크리스마스트리. 언뜻 그걸 보여주는 듯하다. 그걸로도 이미 완벽한 크리스마스 밤이 아닌가! 그런데 거기에 주어지는 덤. 노란 불빛 새어나오는 창문은 흰 눈 바닥에 커다랗게 퍼져 나간 빛의 그림자를 남긴다. 윗부분이 희미하게 묻혀버린 그건 그대로 십자가를 보여주는데, 그건 아주 영리한 장치다. 작은 집의 노란 불빛은 분명 그저 창문일 뿐인데, 땅 위의 그것은 명백한 십자가다. 작가는 그 두 가지를 공통의 따뜻한 이미지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무수한 작은 발자국들이 줄지어 나 있다. 바로 이 밤의 기적을 드러내면서. 이 얼마나 매력적인 이야기인가!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 편안하게 깃드는 밤, 마음 속에 그 노란 불빛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것만 같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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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아 - 월드원더북스 1
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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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알래스카의 바람이고 싶었고, 바람이었던 호시노 미치오, 그가 취재중이던 캄차카에서 곰의 습격을 받고 45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지도 벌써 13년이나 흘렀다. 이제 그는- 그의 영혼 그의 몸은, 생전에 그가 그토록 애틋하게 여겼던 곰으로 이어지고 있는 걸까. 그는 이렇게 다정하고 편안하게 "곰아," 하고 부르고 있는데. 

"나는 알았지. 

너와 나 사이에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도쿄에서 어린 시절,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던 때, 그는 전차 안에 있다가 문득 곰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떤 영상이 확연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여행하는 나무>, 호시노 미치오) 곰은, 깊은 산속에서 풀숲을 힘차게 헤치며 쓰러진 큰 통나무 위를 건너고 있었다. 그때부터 큰곰과 그는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도쿄와 홋카이도 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미지의 존재로부터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림책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책은, 아이에게도 어른에게도 좋을 것이다. 알래스카 곰이 봄 여름 가을의 자연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지은이가 찍은 것이다. 바로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위치에서 찍은 듯한 사진도 있다. 무심코 앞을 봤을 때 풀숲 속에 앉아있던 곰의 모습도 있다. 가을이었나, 불타는 듯한 풀을 배경으로 그윽한 눈매의 곰이 바로 나를 바라보는 듯, 고요하게 있다. 긴장이 흐른다. 사진을 찍은 지은이는, 스스로도 어쩔 줄 몰라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서로 마주 본 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지은이의 귀에 가늘게 쉬는 곰의 숨소리가 들렸다고 하니... 곰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진이 달리 어디 있으랴.  

그런 사진들이 한 면 한 면마다 펼쳐진다. 사진가인 지은이의 그리움도 있고 두려움도 있다. 극북의 석양과 밤과 오로라와가 책 안에 펼쳐지고, 여름의 미크픽 강과 베어플라워꽃 무더기, 가을의 툰드라가 펼쳐진다. 여러, 여러 장면들이 펼쳐진다. 현실의 우리에겐 저 너머의 어떤 것을 보여주는 신비로운 사진들이다. 스스로 원시인이 된 듯, 짐승이 된 듯 느꼈다는 지은이의 감성과 경험을 따라갈 수야 없겠지만, 나즉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는 있다. 그것 만으로도... 

이 책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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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 사랑이 내게 온 날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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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서 영미시란, 그저 모래펄에 흩어져 빛나는 줄도 몰랐던 원석 혹은 사금파리 조각이었던가.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더니, 지은이가 이렇게 꿰어 내 놓으니 보석인 줄 알겠다.  

번역된 시가 아름다워 영시를 본다. 그리 보니 그것도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뒤에는 지은이의 작은 느낌이 덧붙여져 있다. 그것도 기품있다. 이 책에 실린 시들을 대체로 그런 순으로 보았다. 지은이의 소회는 그대로 하나의 짧디짧은 산문으로 반짝거린다. 허투루 들을 만큼 헤프지도, 감상이 넘치지도 않는다. 연륜이 느껴지는 산문이다.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시를 보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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