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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턴가 한겨레문학상 수상작품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뭔가, 다른 문학상과는 지향점이 다른, 주류와 모범을 벗어난 마이너리티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 세상이 거기에 있었다. 그런 기대감, 이번에도 벗어나지 않았다.
이야기가 마치, 네 개의 날개를 단 종이 바람개비의 끝에서 시작하듯 하나하나 시작되었다. 하나의 날개마다 다른 색과 다른 질감과 무게감을 가지고 나름의 곡선을 그리며 돌아간다. 그 하나하나는 어김없이 우리 사회의 열외자들이 그리는 무늬에 다름아니다. 그 무늬들은 비틀리고, 무기력하고, 천박하거나 개념없다. 그러나 그 특성들은 작가의 말마따나, 천민자본주의의 막장에 서 있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이나 다름없다. 한 껍질만 벗기면 바로 그 일그러진 무늬들이 노출된다. 물론, '견해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작가의 말을 살짝)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거대한 바람개비의 서사는 기실 단 하루로 압축 표현된다.
1 장영달, AM 8:00
2 윤마리아, AM 8:20
3 김중혁, AM 8:10 / 4 김중혁, AM 8:30
5 기무, AM 8:20
6 장영달, AM 9:00 / 7 장영달, AM 10:20
8 기무, AM 9:20 / 9 기무, AM 10:10
10 윤마리아, AM 10:20
..
그리고
33 김중혁, PM 4:07 . 코엑스몰의 난데없는 정전.
그리고 1부가 끝난다. 이제 바람개비의 네 날개는 끝점으로부터 안쪽을 향하여 각자의 날개를 타고 굽어들어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인다. 그 가볍게 팔랑거리는 끝에서는 어떤 연관도 없었으되, 안으로 모여들면서 그들은 소실점을 위해 준비된 하나의 사건으로 얽혀든다. 그리고 암전. 뭔가 확실히 그림이 된다.
결국 그들은 하나의 장소, 같은 시간대에 희대의 코믹잔혹이벤트를 위해 준비되고 있었던 거다. 암울한 21세기에는 말이 되는 이벤트... 혼돈과 모순 가득한 대한민국에서는 더더욱 말이 되는 이벤트. 작가의 말에 주목한다.
"경쟁과 착취, 혼돈과 모순, 그로 인해 어느 순간 돌이켜본 우리들의 현실은 천민자본주의의 막장에서 비로소 드러나버린 '열외인간'이라는 낙인뿐입니다. 과연 이 지독한 경쟁에서 승리한 이들은 이른바 '열외인간'이라는 유전자로부터 말끔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천민자본주의의 오물통 속에서 벌이는 진흙탕 싸움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모두 열외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 대한민국을 양분하고 있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천민자본주의 경제논리 앞에 우성과 열성 유전자로 줄 세우기하는 가름의 방식이라는 데 동의하는 터라 작가의 말은 공감이 간다. 게다가 신인 작가가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서 소설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라고 자탄하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뿐이라는 데도 막연하나마 수긍할 수 있다. 달리 어쩌겠는가.
이 작품은 대단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놀라운 상상력과 탄탄한 구성 앞에서 경탄하다보면 어느새 종점이다. 독자는 숨돌릴 틈도 없이 이야기의 재미에 이끌리며, 끝모를 상상력의 손에 땀나는 결말로 끌려든다. 네 개의 바람개비의 날개가 하나의 어둠의 터널로 이끌리듯이 이야기도 독자도 그 터널로 빠져들고 만다. 높아지는 기대감.
그러나, 아쉽게도 막판에 맥이 빠진다. 2부가 얼크레설크레 휘돌다가 결말을 향해 치달으면서 정점을 향하다가 결국에는, 뭔가를 펼쳐보이는 상황이 다가오고야 만다. 그러나 그 속에 정작 들어있는 것은? 다소 진부하고 도식적인, 무책임한 설명으로 서둘러 마감해버린 결말. (물론 견해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바람개비의 날개가 마치 여태껏 받은 세찬 바람과 달리기의 힘을 견디지 못할 만큼이었는지, 어느새 스르르 풀려버린 듯 맥이 빠진다. 벅찬 마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어떤 거대한 음모가 이 말도 안되는 기막힌 사태를 더욱 기막힌 명쾌함으로 풀어줄 것인지를 은근히 기다리는 기대감이 너무 컸는지도 모른다. 그거야.. 작가가 만들어낸 기대감이니 독자인 내 몫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하여간 결말은 많이 아쉬웠다. 작가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신인 작가가 할 수 있는 눌변의 전부"라고 하겠지만, 질문에도 나름의 완결 구조가 있어야 하는 거니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그러나 어쨌든, 멋진 작품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느꼈던 그 씁쓸함, 그건 어쩔 수 없이 돌이켜 보게 되는 현실이 주는 씁쓸함이다. 그리고 똑같이 책을 읽는 동안 느꼈던 그 짜릿함, 그건 아마도 그로테스크한 생기를 뿜어내는 작가의 필력에 힘입은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