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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기적 - 글 없는 그림책
피터 콜링턴 지음, 문학동네 편집부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2월
평점 :
이 작가의 다른 그림책 <똑똑한 고양이>를 보고 하도 재미있어서 찾아보게 된 책인데, 이 책도 아주 좋았다. 음.. 굉장히 멋지다. 다른 작품도 또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믿음이 가는 작가다.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면 하도 많고 또 비슷비슷해서 좀 식상한데다가 감동을 강요받는 기분이 들 때도 있는데, 그렇게 흔하디흔하고 많고 많은 이야기 중에서 이런 이야기를 발견한 게 여간 상큼한 게 아니다.
글자 하나 없는, 오로지 그림만의 그림책.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는 글자 한 줄이면 다 말해버릴 것 같은 내용을 크고 작은 여덟 컷으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는, 기술적인 면을 보여주는 장면도 있는데 그런 걸 보면 말보다 그림으로써 더 잘 표현할 수 있구나, 하는 데 생각이 미친다.
작가가 이끄는 대로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순간이 온다. 그러고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이야기라든가, 그림책 안에서 인물 동선의 배치라든가 하는 것들이 아주 영화적이다. 인물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새 그림책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시선을 움직이고 있다. 시각적인 효과를 충분히 고려한 이런 구도가 신선하고도 효과적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그림책은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져서 TV를 통해 방영되었다고 한다. 꼭 한 번 보고 싶어진다. 음악과 효과음은 어떻게 썼을까, 그것도 궁금하다.
외딴 곳에 오두마니, 할머니의 작고작은 오두막이 눈밭에 서 있다. 아마도 크리스마스 날 아침인 듯싶지만, 먹을 것도 돈도 다 떨어지고 불도 때지 못하고 있다. 할머니는 잠시 고민해 보지만, 별 수 없이 생계수단인 아코디언을 들고 추운 거리로 나간다. (그러고 보면 할머니는 예술가다. 그것도 하필이면 마음의 향수를 자극하는 아코디언...) 눈밭을 지나 멀리 교회가 있고 다시 마을이 나온다. 춥고, 배고프고, 기운도 없는 할머니는 한 카페 앞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힘겨운 아코디언 연주를 한다. 아, 할머니 등 뒤의 밝고 따뜻해 보이는 카페 안에서는 사람들이 창가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서로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들은 길 위의 할머니가 점점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절대 알지 못하는 거다... 쉬지 않고 사람들은 부산하게 지나가지만, 그 따뜻함, 그 다정함, 그 부산함은 할머니의 것이 아니다. 펼친그림 한 면에서 절망은 아프도록 느껴진다.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까? 어쩔 수 없이 할머니는 아코디언을 팔아 돈을 마련한다. 게다가 바로 뒤에 <물건 삽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붙여 놓은 가게. 동반자였던 아코디언에 주는 이별의 키스, 눈물. 그리고 그걸로 바꾼 허기를 채워 줄 한 장의 지폐. 그러나 참말 하늘도 무심하지, 어찌 이런 일이! 가게 유리문을 나서자마자, 모퉁이를 돌기도 전에, 얼굴을 가린 채 오토바이를 탄 청년이 돈을 휙, 낚아채 가버린다. 눈 위에 난 자국을 보고 정신없이 교회까지 따라가지만, 청년은 교회의 모금함까지 들고 나오는 중이다. 할머니가 붙들자 오토바이가 쓰러지고, 이번에는 할머니가 모금함을 낚아채서 서둘러 교회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 버린다. 청년이 빼앗아 간 자신의 돈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다. 모금함에 손을 대다니, 안될 일이야! 라는 생각이 앞선 거다. 그렇게 들어간 교회 안은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다 흩어져 쓰러져 있고 어수선하다. 할머니는 모든 걸 정성스럽게 다시 정돈하고 모금함도 제자리에 두고 교회를 나선다.
다시 눈밭. 먼먼 길. 한 걸음 한 걸음이 점점 힘들어지고, 등은 점점 굽어지고, 나중에는 걷기도 힘들어지고, 결국, 할머니는 쓰러지고 만다. 그 위로 크리스마스 눈이 쌓인다. 얼굴도, 맨손도 차디찬 눈 위에 그대로. 그리고,
기적이 일어난다. 저 멀리 교회에서부터 종종거리며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 작은 사람들이! 다가오고 보면 그들은 아까 할머니가 정돈했던 크리스마스 장식 안의 여러 인물들이다. 마리아, 요셉, 세 명의 동방박사들, 목동. (세상에나, 정말 멋진 일이다!) 그들이 쓰러진 할머니를 메고 끌고 할머니의 집으로 간다. 그들은 할머니에게 따뜻한 크리스마스 저녁을 선물할 준비를 한다. 그것도 각자 자기의 몫으로.. 여기서도 작가는 아주 치밀하게 그들의 역할을 분담시킨다.
세 명의 동방박사들은 각자 자신이 아기 예수에게 선물하려고 장만해온 황금, 유향, 몰약 들을 팔러 나간다. 할머니가 아코디언을 팔고 나온 <물건 삽니다> 라고 적혀 있던 가게. 주인은 천연덕스럽게 그 물건들을 감정하고는, 값을 치러준다. (여기서 피터 콜링턴식 유머!) 돈이 되자 그들은 아코디언을 되찾고, 마트에 가서 식료품을 듬뿍 사서 이고지고 돌아온다. 그새 목수인 요셉은 땔감을 장만하고 크리스마스 트리까지 준비했다. 목동은?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목동은 할머니가 빼앗겼던 돈통을 어디선가 찾아온다. 그도 딱 필요한 일을 한 거다. 마리아는 따뜻한 눈길로 의식이 없는 할머니 곁에서 손을 잡고 있다. 그리고,
모두들 일을 한다. 활활 타오르는 따뜻한 불길, 커다란 칠면조 요리, 따뜻한 스프와 차가 준비되고 목수 요셉은 전공을 살려 구멍 난 마루 바닥을 수리하고 있다. 목동은 트리를 장식하느라 여념이 없다. 나무에는 촛불들이 반짝이고, 그 옆에는 남은 돈이 든 할머니의 돈통, 되찾은 아코디언, 그리고 과일 바구니까지. 창 밖에는 조용히 눈이 내린다. 그리고,
모두들 퇴장. 마지막 순간 마리아의 손끝이 뭔가 표식을 남기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종교적인 무지..) 할머니가 문득 의식을 되찾고, 눈이 휘둥그레지고, 기쁨에 넘쳐 사방을 둘러본다. 모든 것이 충만하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지만, 어떤 흔적도 없다. 할머니는 한번 어깨를 으쓱, 그리곤 맛난 식사를 즐기고 기쁨에 겨워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맘껏 크리스마스 밤을 누린다. 이 장면도 완전 좋았다. 할머니가 무릎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장면으로 처리할 수도 있겠지만, 피터 콜링턴은 그러지 않는다. 너무 진지해지면 그만... 유머가 깃들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똑똑한 고양이>에서 보여준 작가의 유머 감각이 어디 가랴. 대신 할머니는 그 선물, 그 축복을 온전히 누리는 것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아코디언 연주와 그에 맞춰 부르는 기쁨의 노래가 행복과 감사의 표현이 아닐까. 그게 더 자연스럽다.
마지막 한 컷은 그대로 한 장의 크리스마스 카드. 캄캄한 하늘에 반짝이는 별빛, 아래는 하얗게 눈이 쌓여있고 작은 집 굴뚝에서는 따뜻하고 하얀 연기가 새어나온다. 하나밖에 없는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노란 불빛과 크리스마스트리. 언뜻 그걸 보여주는 듯하다. 그걸로도 이미 완벽한 크리스마스 밤이 아닌가! 그런데 거기에 주어지는 덤. 노란 불빛 새어나오는 창문은 흰 눈 바닥에 커다랗게 퍼져 나간 빛의 그림자를 남긴다. 윗부분이 희미하게 묻혀버린 그건 그대로 십자가를 보여주는데, 그건 아주 영리한 장치다. 작은 집의 노란 불빛은 분명 그저 창문일 뿐인데, 땅 위의 그것은 명백한 십자가다. 작가는 그 두 가지를 공통의 따뜻한 이미지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무수한 작은 발자국들이 줄지어 나 있다. 바로 이 밤의 기적을 드러내면서. 이 얼마나 매력적인 이야기인가!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 편안하게 깃드는 밤, 마음 속에 그 노란 불빛이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것만 같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