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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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도C- 뜨거운 기억, 6월 민주항쟁>. 물론, 87년의 이 이야기는 아직 전혀 과거형으로 덮이지 못한다. 서글프고 화도 나지만 그 사실은 엄연하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생각하는 것도 복잡하다. 그러나, 이렇게 뒤돌아서서 그 시기를 정색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무의미에 짱돌을 던지는 듯, 짱- 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지금은 대체 몇 도 쯤일까? 물이 끓는 100도C, 그 아래 어디쯤일까. 아직은 화르르 끓어오르지 않는 100도 이하의 온도, 그러나 그 속에서 뜨겁고도 거센 물의 대류가 느껴진다. 4대강으로, 무상급식으로, 삼성공화국으로, 다들 끓어오르려는 물 알갱이처럼 아래위를 거침없이 오르내린다. 하지만 아직 표면을 뚫고 기화하지 않는다. 

최규석 만화의 새로운 면이다. 장편이다. 픽션과 넌픽션이 뒤섞이고 팩션이라고 부른다. 사실 부분에 불특정의 인물을 창조해- 물론 가능한 인물을 참조해서- 접합하여 사실감을 높인다. 내용은 역사를 끌어내 생생하고 공감이 가면서 인물은 또, 사실에만 국한되지 않아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다. 공감과 흥미를 함께 유지할 수 있는, 작가에게는 매력적인 방식이겠고 독자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다. 이런 방식의 장점이 이 책에서도 십분 발휘된다. 그 힘든 시기를 온몸으로 뻑뻑하게 통과하는 주인공들이, 그 정도의 여유와 낙천성을 -거의 만담 수준이다- 보여준다는 건 어쩌면 사실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물론 부분적으로 사실과 겹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 책의 그들은 다행히, 정면을 바라보고 눈에 힘을 주다가도 순간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낄낄거리기를 멈추지 않는데, 그게 이 책의 숨통을 틔워준다.  이런 표현. 

.. 모르는 거는 지어내서라도 불게 만드니가 고문인 거다.  

선배 죄송해요. 전 밥 한끼만 굶어도 선배 이름 불 거예요. 

밥 한 끼에 파는 건 좀 심하지 않나? / 내는 두끼까지 참아볼게. 

오, 두끼, 센대요? 

.. 남자라면 두끼까지는 버텨야지..  

.. 거기 남자분들... 심각한 주제로 만담 좀 하지 말죠? 

... 

에이 뭐, 독립투사들도 술 마실 땐 만담하고 그랬을 거야. / 그럼그럼, 민주화도 웃으면서 해야지.

사실 <습지 생태 보고서>에서 보여주었던 최규석의 유머는 언제나 가볍지 않았던 그의 주제를 가볍게 띄워 눌린 가슴을 해방시켜 주기도 하는데, 바로 그 유머가 이 책의 무게감을 버겁지 않게 느낄 수 있게 하는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화라는 장르의 특색을 생각할 때, 그건 정말 유용한 무기다. 때로는 무기 이상이다. 

영호는 어릴 때부터 모범생에 반공소년이고 집안의 자랑이다. 부모님은 노력하면 잘 될 수 있는데 뭔가 그게 안 풀리는 나쁜 놈들이 꼭 데모나 한다고 철썩같이 믿고 영호를 사상의 안전지대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영호, 총명한 그가 애초에 이 시대의 진실을 몰라볼 수는 없다. 그는 함께 참여하고, 부모님이 우려하던 그 길을 간다. 그리고 어느 날 덜컥, 구속 소식.  

부모님은 거의 실성한다. 처음에는 착한 내 아이가 그럴 리가 없다고, 뭔가 착오가 있다고. 

나중에는 세상에 이럴 수가, 이 나쁜 놈의 세상이 그렇게 착하던 아이를 버려놨다고,   

그리고 결국은 그래, 그것도 이 세상을 잘 살아내는 한 방법이겄지. 그란디 니가 꼭 그래야 쓰겄냐?고. 

마지막에 어머니는 함께 뛰어든다. 내 아들이 그렇게 하는 건 그래야 하기 때문이여! 오냐, 내 아들을 잡아 가두는 이 세상아, 나랑도 한판 맞장을 떠야겠다! 다.  

영호와 영호의 어머니가 중심이 되어 세상을 알아가고 잘못된 걸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는 이야기가 때로 힘 있게, 때로 비장하게, 때로 살짝 꼬리를 들어올리듯 가볍게 펼쳐진다. 그 이야기는 6월 항쟁 거리의 물결, 그리고 629 항복선언으로 이어진다.... 

그 많은 순정하고도 가열찬 댓가를 치르고 얻어낸 것은? 

작가는 그것에 '소중한 백지 한 장'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각자가 꿈꾸던 그 다양하던 이상의 꽃은 단지 백지 한 장이 되어 내 손에 쥐어진다. 

조금만 함부로 대하면 구겨져 쓰레기가 될 수도 있고, 잠시만 한눈을 팔면 누군가가 낙서를 해버릴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꿈꿀 수 없는 약하면서도 소중한, 그런 백지 한 장. 

그 한 장의 위대할 수 있었던, 투표권. 그 한 장이 내 손에 쥐어지기까지는 그토록 다사다난하고 험난한 기승전결을 거쳐야 했던 거다. 그러나 그걸 알아내기까지는 그렇게 다사다난하고도 험난하지 않도록, 이렇게 한 권의 만화책이라는 양식으로 내 손에 떡 쥐어지니 

최규석이라는 만화가가 반갑고도 고맙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그 한 장의 백지가 내 손에 쥐어지긴 했지만, 그런데 그 백지는 실은 함부로 대해 구겨져 쓰레기가 되기도 했고, 한눈 파는 사이 누가 낙서를 해버리기고 했고, 누군가는 꿈을 꾸기도 했는데.. 거기까지 오는 과정의 장대함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참담했었지. 그래서 그 뒤로, 시민교육센터 강사인 이한선생의 '청소년을 위한 민주주의 강의'가 최규석의 그림으로 부록으로 이어진다. 거기까지다. 

잘 만든 만화 한 편, 좋은 세상의 초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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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지음 / 길찾기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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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 중의 한 사람이고, 가장 기대하는 젊은 만화작가인 최규석, 나는 그의 팬이다. 이런 굉장한 작품집을 첫 작품집으로 내놓은 작가가 하는 말은, 다시 보니 진짜 의외다. 

... 이 책 속에는 읽히기를 바라는 저의 간절한 마음과 그것을 위한 노력만이 들어있습니다. 지금은 마음 밖에 보여드릴 것이 없지만 훗날에는 무언가를 더 보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그냥... 마음만 받아 주세요. (프로포즈 같습니다.) 

2004년 3월에, 내놓으면서 당장 문제작이 되어버린 작품집을 내놓는 작가가 하는 말이 이렇게, 조마조마하고 두근두근하는 마음을 담은 것이라니, 내가 다 조심스런 마음이 된다. 그리고 그는, 어느 새 한국 만화의 튼튼한 주인공이 되어 있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는 놀라웠다. 처음 보았을 때도, 지금 보아도 그러하다. 김수정이 만들어낸 천진하고 넉살 좋은, 모든 사람들이 그저 보기만 해도 입에 웃음이 물리는 아기 공룡 둘리는, 사실상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하나의 상징이기도 했다. 아마도 둘리는 우리 만화가 내세울 최고의 캐릭터였을 것이다. 그만큼, 그건 고정관념이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하도 확고한 것이어서, 그 둘리를 감히 '이렇게', 최규석이 오마주 하는 순간, 모두들 띵! 했다. 나도 물론, '띵! 했다. 당황스럽고 배반적이었다. 어.. 이래도 되는 거얌?  우리의 둘리를...! 감, 히, 이, 렇, 게... 처절하게? 

둘리는 어린이 세상에 있었다. 그리고 감히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당연히, 세월이 지나 어른 세상으로 진입했다. 먹고 살아야 하는 둘리와, 그 철 없던 친구들. 둘리는, 먹고 살기 위해 노동자가 되고, 현장에서 프레스기에 오른쪽 엄지 손가락 첫 마디를 잃었다. 그리고, 당연히, 초능력을 잃었다. 그러자 더이상, "호이." 하고 외치는 귀여운 초능력 아기 공룡의 세계에 머물지 못한다. 둘리는 "이 민증도 없는 새끼!! 사고 한 번 칠 줄 알았어!! 당장 나가!!"라는 공장 측의 폭언을 감수하며 쫒겨나고, 이리저리 떠돌며 비정규 일용노동자가 되어 있는 신세가 되었다. 아, 이 무슨 처참한!  

최규석의 오마주는 대담하다. 풍자는 거침없다. 고철수와 희동이도 역시나 건전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특이한 인물들과 함께 어울려 보낸 어린 시절은 마치 한 때의 유행처럼 이미 지나가 버렸다. 남은 것은, 어쩌면 그 거품 같은 어린 시절의 여파인 듯한 쇠락의 삶. 철수도 희동이도 이미 아웃사이더가 되어 살고 있다. 또치는 동물원에서 남은 생을 비루하게 이어가고, 도우너는 악에 받친 철수에게 외계 생명체로 연구실에 팔아넘겨져서 해부당한다. 포장마차에서 만난 마이콜도 그 비루함에 있어서는 역시나,다. 그들의 이미 동심의 세계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들은 사회 구석구석의 소외계층의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버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 하나하나 그들의 과거형에서 그들의 현재형으로 치밀하게 오버랩될 때, 그 충격의 강도도 체념처럼 희미해진다. 총체적 충격이었으니. 이 신진 작가의 상상력과 노회함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삶의 신산함에 지칠 대로 지친 둘리가 우리를 전율하게 한다. 그러나 그 속에 오늘, 현재가 있어 한없이 무겁다.  

<사랑은 단백질>도 눈에 번쩍 띄는 작품이다. 한 번 보고 도저히 잊히지 않는 작품을 만들어낸, 그때로서는 신인이었던 작가의 저력이 놀랍다. 이 작품에서는, 정말 놓칠 구석이 없다. 충만감을 주는 작품이다. 삶의 한 단면을 무심한 듯 그려내는 이 불온한 기운, 지금 와서 다시 봐도 너무나 최규석다운 작품이다. 

두 편이 하도 강렬해서 다른 몇 편은 습작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다 해도 새롭지 않거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내게는 위의 두 편이 하도 '감동적'이어서, 다른 데 정신을 팔지 못했다는 말이 오히려 맞겠다. 몇 년 전에 발견한 이 작품들을, 요즘도 꺼내 보면서 그의 불온한 상상력에 흠뻑 빠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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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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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확실히, 이 정도로 재미있는 만화가 연재되는 신문이라면 정기구독 신문을 바꿔볼까, 하는 생각이 들 만 하지 않을까? ^^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만화였다니)

나는 최규석의 만화를 좋아한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때부터 그랬다. 만화라는 장르를 무지 좋아하는 편이지만, 물론 모든 만화에 끌리는 건 아니다. <캔디>와 <유리가면>부터 <쥐><팔레스타인>까지, <또디>부터 <오늘의 네코무라씨>, <내이름은 팬더댄스>에 대해서 리뷰를 써본 적이 있을만큼은 좋아한다. 어떤 것은 재기발랄해서 즐겁고, 어떤 것은 스토리에 땡기고, 어떤 것은 시사적인 무게감과 독창적인 표현 방식이 좋다. 대체로 그런 경향성이 뚜렷이 구분이 되는 만화들이지만, 내가 처음 본 최규석의 만화는 그 사이 어딘가에, 엄연히 있었다. 

<습지생태 보고서>, 제목부터 맘에 쏙 든다.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 다섯은, 그들의 삶을 '습지의 삶'이라고 규명하는 순간 이미 독특한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그들 모두, 진짜 매력적이다. (^^ 심지어 녹용이까지 ) 그 다섯은, 언제 햇볕 들어 깔깔한 양지의 삶을 살 수 있을 지, 어쩐지 아무도 장담이 되지 않는 캐릭터들이다. 너무 철저히 습지,적이어서 아마도 나중 언젠가 해뜰날이 온대도 포슬포슬 깔깔해지지 않을 것만 같다. 습지 삶은 그들의 몸에, 뇌에 완전히 배어서 ... ^^ 마치 유전자처럼 지니고 살아갈 것만 같다.  

그들은 비굴 속에서 당당하고, 개별화 되어있으면서도 공동체적이고, 냉철하다가도 갑자기 허물어진다. 그들은 당연 적당히 위선적인데, 스스로 그러하다는 걸 알고 있는 그 상태가 그들의 습지 삶을 지탱한다. 그 점, 바로 그 점을 작가가 내세우면서 이 만화는 당당해지고 풍자가 되고 젊음이 된다. 대부분 인간의 삶은, 결국 누구에게나 비루하지 않나?  

'양지의 삶은 그 비굴을 좀체 인정할 수 없고, 아닌 척 위선적이 되고, 결국은 그 사실을 외면하고, 마지막엔 스스로 잊어버린다.'  

합리화를 시키면서 우아한 부분만 인정하고 살게 되면서, 그들은 유머를 잊어버린다. 기분좋은 유머란, 못남을 스스로 인정할 때, 고조되어 저절로 터져버리는 고무 풍선처럼 경쾌한 것이다. 스스로 비루함을 알고 있는데, "아는데 뭐? " "그래도 때로 우아한 척도 좀 해보자 뭐!" 이러는 것, 스스로 조롱하고 자학하고 체면을 구기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면서 그들은 그들의 삶을 풍자한다. 그 풍자로 하여 우리는 그들의 습지 삶에서, 구차함과 유쾌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들의 습지 삶, 이라 하지만 실은 우리 모두의 삶은 일견 습지적이고, 그건 내 삶의 여러 풍경과 결국 공명을 일으킨다.  

최규석의 '작가의 말'에서 첫 문장에 이렇게 뇐다.  

"만화가 재미없는 것은 작가가 게을러서다." 

재능있는 작가가 그런 말을 하다니, 얼마나 이쁜가! 언제나 성실하게, 재미있는 만화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젊고 재기발랄한 작가의 다짐은 독자를 들뜨게 한다. 첫 작품부터 그에게 투항한 독자로서, 세상에 널리 그의 작품의 우수함을 알리고(^^),  앞으로도 당연히 그의 작품집을 애면글면 기다리고야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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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와 게 두껍아 두껍아 옛날 옛적에 10
김중철 지음, 김고은 그림 / 웅진주니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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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세 정도의 유아들에게 읽어주기 적당할 것 같다. 북한의 민담에서 채록한 것이 이야기의 근원이라는데, 뼈대만 남았다는 이야기에 김중철 님은 진짜 살 하나 붙이지 않고 담백하게 글을 썼다. 어른인 내게는 그 군더더기 없이 단단한 글이 좋았다. 이야기의 진행을 막지 않으니 아이들도 좋아할 것 같다. 

쥐와 게가 오다가다 만나 친구가 되었다. 각자 그럭저럭 형편 따라 잘 사는 듯, 여기서는 서로 기우는 처지는 아니라는 전제에서 시작하는 듯하다. 그렇게 나란한 관계라야 하는데, 지내보니 그렇지 않다. 쥐가 놀러오면 (마음이 착하다는) 게는 성심껏 장만해서 대접한다. 쥐는 답례로 내일은 우리집에 놀러와, 라지만 막상 게가 찾아가니 뜻밖에 모른체,다. ?? 다음 날, 쥐는 엉성하게 변명하지만 게는 판단을 미룬다. 그런데, 똑 같은 일이 다시 한 번 더 되풀이 되고, 쥐는 여전히 엉성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마치 게가 착해서든, 어리석어서든 꼭 집어 따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어물쩡 넘어가려는 듯, 쥐의 꼼수가 보일듯 말듯하다. 그래도 실은 '쥐, 뭘까? 안 평범한, 비범한 인물이야? 아님 무슨 비밀이라도 있나?' 그런 생각도 슬그머니 든다. 그러나 세 번 째 그런 일이 되풀이되려 하자, 게는, 쥐의 생각에는 뜻밖에, (내 생각에는 으응, 역시나, 평범한 진리가 중요하지!..)

버럭, 화를 내고 쥐를 응징한다. "야, 거짓말 하지 마!" 란다.  쥐의 다리를 꽉 물면서. 

그러자 쥐가 보인 반응은 어이없기도 하지만,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게가 착한 줄만 알았더니 사납기도 하구나." 란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이스크림을 들이밀며 살짝 얼굴을 붉힌다. (반성하고 화해의 몸짓?)

모르는 척, 속아주는 척 하고 있어도 속으로는 다 안다. 실은 어느 정도 참아주기도 한다. 매번 갋을 수야 있나, 다음엔 안 그러겠지. 하는 게 보통 수더분한 사람들의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가 그렇게 알고도 모르는 척, 해 주는 것 다 안다. 그러니 다음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조심하기도 한다. 세상은 자주 그렇게 두루뭉술하기도 한 거다.

그런데 진짜, 이 세상엔,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 말고, 진짜 특이한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아서, 모르는 척 참아주고 있으면 괜찮은 듯 매번 그러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 좋은 거만 생각하고 남 힘든 건 진짜 몰라서 그런 사람도 있고(멍청이..들이다), 상대가 힘들면서도 참아주기만 하면 내몰라라 하는 사람도 있다(얌체들이다). 사실 20%의 사람들이 80%의 자산을 움켜쥐고 80%의 사람들이 20%로 힘들게 비명지르며 사는 걸 몰라몰라 하는 게 실제 세상이니 달리 덧붙일 필요도 없겠다. 80%의 사람들이 한 번 두 번 참다가 세 번 째 꼭, 깨물어 버린다면 20%는 "80%가 착한 줄만 알았더니 사납기도 하구나." 라고 할까? ^^ 이런 데 까지 생각이 나아갔지만, 이 유아 대상의 그림책에서는 둘의 관계는 그저 내면을 제외하고 외양은 수평 관계이니 그런 생각까진 할 필요 없겠다. 서로 마음을 내 줘야지 관계가 지속된다는 것, 함께 나누어야 서로 사이도 좋아진다는 것, 그런 걸 본때 있게 보여주려는 거겠지.  

어쨌든, 이야기는 단순 명료하다. 군더더기도 거의 없다. 어이없는 성격의 쥐가 나오니 절로 긴장이 유발되어 다음에는 어쩌려나? 게가 언제까지 참으려나? 기다리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유아들에게 충분할 것 같은데, 그러다 보니 내게는 그림이 군더더기가 너무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기자기하고 주변 이야기가 많은 만화풍의 그림이다. 나중에 하나하나 짚어보고 마치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자세히 보면 그 나름의 볼거리를 주니 재미있다 하겠지만, 우선은 번잡스럽다. 이야기가 물흐르듯, 뒤로 갈수록 급류를 타듯 진행되는데 뭔가 자꾸만 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 같다. 이 책을 볼 만한 또래의 아이들에게는 결국 잔재미를 주겠지만,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꼭 그런 주변부는 다 무시하고 그저 이야기를 따라 쭉- 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한 번 볼 책이 아니니까 우선은 이야기의 재미를 보고, 그게 충분할 때 그 부수적인 재미에 눈 돌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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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봄 여름 가을 겨울 - 감성 발달을 위한 사계절 그림책
린리쥔 지음, 린리치 그림, 린리치웅 미술편집, 심봉희 옮김 / 베틀북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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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반갑다. 이렇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그림에 시와 같은 감성을 지닌 글이라니. 향기로운 글과 그림을 벗하며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너무나 상큼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풀과 벌레와 새들의 세계를 우리를 이끄는 이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자연과 더불어 충만한 삶을 생각하면 내가 다 두근두근하다. 온 세상의 아이들을, 진정으로 이 세계로 초대하고 싶다.  

기나긴 겨울이 가고 햇살 가득한 봄이 되자 아이는 흙 조금, 씨앗 몇 알, 물, 따스한 봄볕으로 정말 새싹이 자라나는지 실험해 보기로 한다.

씨앗을 심고 /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물 주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 나는 하루빨리 새순이 껍질을 벗고, / 나를 만나러 와 주길 기다렸지요.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 하루, 이틀, 사흘.... / 일 주일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요. / 나는 엄마에게 왜 씨앗이 아직도 싹을 틔우지 않느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엄마가 말씀하셨어요. / "한 가지가 빠졌는 걸." / "그게 뭔데요?" 

 "인내심 말이야! /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단다." 

새싹을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노래가 되었다. 화분에서 싹이 얼른 트기를 기다리는 조그만 도토리 요정들이 그대로 아이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노래의 마지막 장에서 파릇파릇 소복소복 나란히 자라난 초록의 싹들에 내 마음이 벅차다. 기다리고 기다렸기 때문에! 

실은 내게도 꼭,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보물 상자가 있다. 나는 언제나 대자연 속의 보물찾기를 즐긴다. 내 상자 안에 있는 것은  

빨갛고 여린 날개를 가진 단풍나무 열매들, 북실북실한 모자를 쓴 상수리나무 도토리, 귀여운 쌍동이 같은 고추나무 열매, 활짝 벌어지거나 혹은 푸른 채 꽁꽁 닫힌 소나무 열매, 노랗고 빨간 노박덩굴 열매, 신비로운 파랑을 지닌 댕댕이덩굴 열매, 단단하기 그지없는 물오리나무 열매, 터져버린 박주가리 씨앗 주머니, 빨갛게 익은 찔레 열매, 어느새 깜짝 놀랄만큼 작아져버린 고욤 하나, 보랏빛 작살나무 열매...  그리고 여름의 흔적을 보여주는 조약돌, 조개껍질, 바다유리들.

그리고 내게는 또 보물을 담은 책이 있다. 그 책갈피 속에는 섬세한 단풍나무 잎, 당당한 왕고들빼기 잎, 물오리나무 잎, 붉게 물든 산딸기나무잎, 손바닥같은 고로쇠나무 잎, 기기묘묘 까마귀머루 잎, 솜털 보송한 산철쭉 잎사귀, 저마다 조금씩 다른 산뽕나무 잎 형제들, 잎자루에 날개를 단 붉나무잎, 개암나무잎, 마른 억새 가지, 아직도 보랏빛을 갖고 있는 제비꽃, 돌돌 말린 댕댕이덩굴, 얼룩덜룩한 망개나무잎, 겨울눈을 달고도 반짝이는 잎으로 남아있는 감태나무 잎사귀, 접힌 채로 말라버린 자귀나무 잎들, 아직 연두색 그대로인 어린 졸참나무잎...  

나는 늘 숲에서 나올 때면 주머니가 마른 열매들로 불룩했다. 목에 감았던 손수건을 풀어 작은 주머니를 만들어 예쁜 나뭇잎이 다치지 않게 담아 손에 들고 돌아오곤 했다. 그것들은 내게는, 거의 언제나 그냥 지나치지 못할 만큼 예뻤고 신비로왔다. 눈을 질끈 감지 않으면 숲길을 걸어나오지 못할 만큼... 새들의 노래소리에 발 소리를 죽이며 멈춰야 했고, 벌레들의 연주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람이 향기를 담아 불어오면 눈 감지 않을 수 있었던가?... 그 순간의 행복을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느낀다. 들여다보고, 냄새 맡고, 만지고, 소리를 들으며 또 때로 행운처럼 다가온 산뽕나무 오디 열매를 맛보며, 온몸으로 나아가던 그 순간들은 내게는 전율이었다. 그 심정을, 나는 이 책의 지은이에게서 느낀다. 내가 가슴 벅차게 느끼던 그 순간들을 이토록 아름답게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니  

행복하다. 그들의 노래를 듣고, 그들의 화폭을 들여다보고, 그들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는 내 마음이야말로,  

가득하고 가득하다. 세상 모든 아이들에게, 또 지친 삶을 이어가는 어른들에게도 이 가득함을 나눠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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