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00도C- 뜨거운 기억, 6월 민주항쟁>. 물론, 87년의 이 이야기는 아직 전혀 과거형으로 덮이지 못한다. 서글프고 화도 나지만 그 사실은 엄연하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생각하는 것도 복잡하다. 그러나, 이렇게 뒤돌아서서 그 시기를 정색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무의미에 짱돌을 던지는 듯, 짱- 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지금은 대체 몇 도 쯤일까? 물이 끓는 100도C, 그 아래 어디쯤일까. 아직은 화르르 끓어오르지 않는 100도 이하의 온도, 그러나 그 속에서 뜨겁고도 거센 물의 대류가 느껴진다. 4대강으로, 무상급식으로, 삼성공화국으로, 다들 끓어오르려는 물 알갱이처럼 아래위를 거침없이 오르내린다. 하지만 아직 표면을 뚫고 기화하지 않는다. 

최규석 만화의 새로운 면이다. 장편이다. 픽션과 넌픽션이 뒤섞이고 팩션이라고 부른다. 사실 부분에 불특정의 인물을 창조해- 물론 가능한 인물을 참조해서- 접합하여 사실감을 높인다. 내용은 역사를 끌어내 생생하고 공감이 가면서 인물은 또, 사실에만 국한되지 않아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다. 공감과 흥미를 함께 유지할 수 있는, 작가에게는 매력적인 방식이겠고 독자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다. 이런 방식의 장점이 이 책에서도 십분 발휘된다. 그 힘든 시기를 온몸으로 뻑뻑하게 통과하는 주인공들이, 그 정도의 여유와 낙천성을 -거의 만담 수준이다- 보여준다는 건 어쩌면 사실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물론 부분적으로 사실과 겹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 책의 그들은 다행히, 정면을 바라보고 눈에 힘을 주다가도 순간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낄낄거리기를 멈추지 않는데, 그게 이 책의 숨통을 틔워준다.  이런 표현. 

.. 모르는 거는 지어내서라도 불게 만드니가 고문인 거다.  

선배 죄송해요. 전 밥 한끼만 굶어도 선배 이름 불 거예요. 

밥 한 끼에 파는 건 좀 심하지 않나? / 내는 두끼까지 참아볼게. 

오, 두끼, 센대요? 

.. 남자라면 두끼까지는 버텨야지..  

.. 거기 남자분들... 심각한 주제로 만담 좀 하지 말죠? 

... 

에이 뭐, 독립투사들도 술 마실 땐 만담하고 그랬을 거야. / 그럼그럼, 민주화도 웃으면서 해야지.

사실 <습지 생태 보고서>에서 보여주었던 최규석의 유머는 언제나 가볍지 않았던 그의 주제를 가볍게 띄워 눌린 가슴을 해방시켜 주기도 하는데, 바로 그 유머가 이 책의 무게감을 버겁지 않게 느낄 수 있게 하는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화라는 장르의 특색을 생각할 때, 그건 정말 유용한 무기다. 때로는 무기 이상이다. 

영호는 어릴 때부터 모범생에 반공소년이고 집안의 자랑이다. 부모님은 노력하면 잘 될 수 있는데 뭔가 그게 안 풀리는 나쁜 놈들이 꼭 데모나 한다고 철썩같이 믿고 영호를 사상의 안전지대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영호, 총명한 그가 애초에 이 시대의 진실을 몰라볼 수는 없다. 그는 함께 참여하고, 부모님이 우려하던 그 길을 간다. 그리고 어느 날 덜컥, 구속 소식.  

부모님은 거의 실성한다. 처음에는 착한 내 아이가 그럴 리가 없다고, 뭔가 착오가 있다고. 

나중에는 세상에 이럴 수가, 이 나쁜 놈의 세상이 그렇게 착하던 아이를 버려놨다고,   

그리고 결국은 그래, 그것도 이 세상을 잘 살아내는 한 방법이겄지. 그란디 니가 꼭 그래야 쓰겄냐?고. 

마지막에 어머니는 함께 뛰어든다. 내 아들이 그렇게 하는 건 그래야 하기 때문이여! 오냐, 내 아들을 잡아 가두는 이 세상아, 나랑도 한판 맞장을 떠야겠다! 다.  

영호와 영호의 어머니가 중심이 되어 세상을 알아가고 잘못된 걸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는 이야기가 때로 힘 있게, 때로 비장하게, 때로 살짝 꼬리를 들어올리듯 가볍게 펼쳐진다. 그 이야기는 6월 항쟁 거리의 물결, 그리고 629 항복선언으로 이어진다.... 

그 많은 순정하고도 가열찬 댓가를 치르고 얻어낸 것은? 

작가는 그것에 '소중한 백지 한 장'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각자가 꿈꾸던 그 다양하던 이상의 꽃은 단지 백지 한 장이 되어 내 손에 쥐어진다. 

조금만 함부로 대하면 구겨져 쓰레기가 될 수도 있고, 잠시만 한눈을 팔면 누군가가 낙서를 해버릴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꿈꿀 수 없는 약하면서도 소중한, 그런 백지 한 장. 

그 한 장의 위대할 수 있었던, 투표권. 그 한 장이 내 손에 쥐어지기까지는 그토록 다사다난하고 험난한 기승전결을 거쳐야 했던 거다. 그러나 그걸 알아내기까지는 그렇게 다사다난하고도 험난하지 않도록, 이렇게 한 권의 만화책이라는 양식으로 내 손에 떡 쥐어지니 

최규석이라는 만화가가 반갑고도 고맙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그 한 장의 백지가 내 손에 쥐어지긴 했지만, 그런데 그 백지는 실은 함부로 대해 구겨져 쓰레기가 되기도 했고, 한눈 파는 사이 누가 낙서를 해버리기고 했고, 누군가는 꿈을 꾸기도 했는데.. 거기까지 오는 과정의 장대함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참담했었지. 그래서 그 뒤로, 시민교육센터 강사인 이한선생의 '청소년을 위한 민주주의 강의'가 최규석의 그림으로 부록으로 이어진다. 거기까지다. 

잘 만든 만화 한 편, 좋은 세상의 초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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