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땐가 3학년 때 아주 친하진 않았지만, 간간이 친근한 눈빛을 주고받던 같은 과 친구가 있었다. 좀 마른 몸매에 머리는 약간 길어서 묶고 다녔던 걸로 기억난다. 어느 날 그 친구 자취방에 놀러 갔는데, 내게 마스카라를 발라 주겠다고 했다. 난, 그 때나 지금이나 화장을 잘 못하는데, 그 친구가 내게 처음으로 마스카라를 발라준 것 같다.
한 번 발라 보라며, 자기가 해주겠다면서 친한 목소리로 마스카라를 들이댔는데, 도저히 제대로 바를 용기가 나지 않아 조용히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녀는 아주 친하지도 않은 내게 자기 얘기를 했다. 변비가 있다구... 난 배변장애로 병원에 간다거나 하는 일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변비가 그렇게 심각한 병인 줄 몰랐다. 변비 때문에 별 약을 다 먹어봤는데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가면 의사가 직접 손을 항문에 넣어 관장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아무리 상대가 의사여도 그런 일을 겪는 건 수치스러울 것 같다. 그녀도 그렇게 말했다. 창피하다고...
그녀의 자취방 싱크대에는 사발면이 있었다. 돈 없는 자취생들의 고충을 아는지라 라면을 사다 끓여 먹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자, 귀찮아서 사발면이 편하다고 했던 것도 기억난다.
그녀는 베스트 프렌드 - 키가 아주 크고(중학교 때까지 배구를 했던) 비쩍 말랐고, 촌스런 이름의 -와 강의가 끝난 저녁이면 나이트 클럽에 가서 밤까지 신나게 춤을 춰댔다. 그렇게 마른 두 여대생이 살을 빼려고 그리도 열성적으로 나이트 클럽에 다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쨌든 그녀는 내게 이렇게 남아 있다. 지금도 마스카라를 바를 때나, 변비의 '변'자를 들을 때나, 사발면을 볼 때나, 나이트 클럽 앞을 지나갈 때 그녀가 생각난다.
그녀는 이 세상에 없다. 97년인가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던 그녀는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다고 했다. 97년... 난 너무 어렸다. 그보다 훨씬 나이가 어렸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걸 봤는데도 난 죽음이 뭔지 몰랐다. 그 친구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먼 세상 얘기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베스트 프렌드 외에도 장례식에 따라갔던 친구들이 몇 명 있었는데, 난 빈소에도 가보지 않았다.
운동하면서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부디 편히 잠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