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식 보편주의라는 낡은 배>

테세우스는 하반신은 소이며 상반신은 인간의 몸을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기 위해 크레타섬으로 모험을 떠났다. 미노타우로스를 제압한 후 그는 이제 고향으로 귀환해야 한다. 편의상 테세우스가 탄 배는 부품(P) 10개로만 만들어진 것이라 하자. 배가 부서지면 파손된 부품을 미리 준비해 둔 새 것으로 교체한다. 테세우스는 T0 시점에 출발했고, T1 시점에서 파손된 P1 부품을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했다. T2, T3를 지나 T10 시점에 이르면서 P10 부품까지 완전히 교체했다. 그렇다면, T0에 테세우스가 탄 배와 T10에 테세우스가 탄 배는 같은 배라고 해야 할까, 다른 배라고 해야 할까? 이것이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패러독스다.

먼저 T0의 배와 T10의 배는 ‘다른 배’라고 대답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두 시점의 배를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배의 부품이 교체되는 T1부터 이미 다른 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지금도 나는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가 새로 만들어지는 등 구성요소가 계속 바뀌고 있으니 나 역시 계속 다른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인가?”하고 반박하면 이들은 놀랍게도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답한다. 사실 이 문제에서 두 시점의 배가 ‘다른 배’라고 주장하는 것이 ‘같은 배’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같은 부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면 같은 배라고 말할 수 없다고 끝까지 우기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품 하나가 달라진다고 해서 그 배가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T0와 T10의 배를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우선 어떤 이들은 이 배의 부품이 달라지긴 했지만 두 시점에서 테세우스의 귀환이라는 ‘동일한 목표’가 있었다는 것을 같은 배로 볼 수 있는 근거로 든다. 하지만 만약 돌아오는 길에 테세우스가 죽거나 테세우스가 만약 귀환하지 않고 다시 크레타섬으로 갔다면? 이들은 목표가 달라지는 경우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또 어떤 이는 테세우스의 배를 구성하는 부품은 매 시점마다 바뀌고 있지만 ‘테세우스가 탄 배의 이데아’가 모든 시점의 배가 같은 배라는 것을 보증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만약 선원 중 한 사람이 아테네로 도착 후 자기 집 앞마당에서 교체된 낡은 부품을 조립해 배를 건조했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 테세우스가 타고 온 배와 선원이 만든 배 중 어느 것이 ‘테세우스가 탄 배의 이데아’에 더 가까운 배인지 이들은 설명하지 못한다.


‘T0와 T10 시점의 테세우스의 배는 같은 배다’라는 생각이 우리의 직관에 부합하지만 그 근거를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왜일까? 현대철학자들은 우리가 이 문제에서 ‘운동’을 무시했기 때문에 패러독스에 빠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들에 따르면 테세우스의 배는 T1, T2 각각에서 정지된 채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T1에서 T2로 이동하는 과정 혹은 T1에서부터 T10으로 운동하는 과정에 존재한다. 즉, 배는 운동하고 변화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배가 운동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T1에서 T2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그 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테세우스의 배’의 자리에 ‘인권’, ‘자유’를 넣어보자.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시기의 인권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인권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인권’과 ‘중동-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권’은 정말 같은 인권일까? 지금 ‘영국의 기득권층이 지지하는 자유’와 ‘난민들이 찾아나선 자유’는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이 모든 질문에 대해 같은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에서 봤듯이 인권과 민주주의의 이데아도, 동일한 목표도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동안 유럽 세계는 자신들을 인권,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의 대변자로 내세워 왔다. 하지만 난민 문제에 대해 유럽 세계가 보여준 태도는 그들의 인권이 단지 자신들의 권력과 정책을 정당화하는 레토릭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한 영국은 그동안 의회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해왔지만 이번 브렉시트 결정은 그들의 민주주의가 단지 자국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이처럼 유럽인들이 인권, 자유, 민주주의를 내세워 추구한 목표는 제3세계인들이 추구해온 목표와는 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 민주주의, 자유와 같은 보편적 가치는 낡아버린 부품이 되어 버린걸까?

테세우스의 배가 운동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인권, 민주주의 역시 정지해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도 끊임 없이 운동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낡아버린 부품은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이러한 가치들을 지배해온 ‘유럽 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테세우스의 배의 낡은 부품을 교체하듯 낡아빠진 유럽식 보편주의를 변화시켜야 하는 역사적 책임이 주어져 있다. 즉 영국의 EU 탈퇴로 인해 흔들리고 있는 ‘유럽식 보편주의’를 중동-아시아-아프리카-난민을 모두 포함하는 ‘새로운 보편주의’로 대체해야 할 책임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느 시점에 와 있는 것인가? 브렉시트는 낡은 부품이 교체될 때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유럽식 보편주의’라는 낡은 부품을 ‘새로운 보편주의’로, 형식적 민주주의를 ‘새로운 민주주의’로 교체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세계화를 ‘새로운 국제주의’로, 이익 추구의 자유를 ‘새로운 자유’로, 난민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인권’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운동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말이다.

대구신문에 쓴 글이다.(2016.6.30)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를 단서로 삼아 브렉시트 이후 인권, 민주주의, 자유와 같은 소위 '보편적 가치'의 존립에 대해서 써본 글이다. 정교한 글은 못되지만, 나는 이 글에서 브렉시트 이후 보편주의를 회의하는 움직임을 경계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무엇보다 유럽식 보편주의를 넘어서는 보편주의, 요컨대 월러스틴이 말한 바 보편적 보편주의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이를 이뤄가려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세상은 지금 사이비 보편주의로 가득하지 않은가!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는 보통은 '자아의 아이덴티티' 문제와 관련해 자주 논의된다. 나는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베르그송의 관점, 즉 운동성 자체가 동일성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지한다. 운동 자체가 존재라면, 그 존재는 뭔가 '흐린 존재', 운동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 '자아'에 대해서도, '자유'나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자유, 민주주의, 인권 모두 '투명한 개념'이 아니라 '흐린 개념'일 수밖에 없다. 오직 흐린 개념을 불투명하게나마 유지시키려는 운동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쓰고 싶었다. 새로운 보편주의라는 흐린 개념을 쓴 것도 그런 이유다. 문제는 그런 생각을 글로 옮겨 쓰는 것에는 성공한 것 같지가 않다. 성긴 생각을 거친 글로 표현했지만 섬세하고 눈 밝은 독자들에게는 작은 의미라도 있는 글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오늘자, 한겨레 정의길 기자가 쓴 <브렉시트 긍정적으로 보기>는 내 논지와 연결된다. 물론 훨씬 더 실증적이라 참고할 점이 많다. 일독을 권하며 링크한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0304.html

2016.7.1 추가
정의길 기자의 글을 추천한다고 쓰자, 한 선생님께서 이런 글을 남겨주셨다. 이 기사를 읽으실 분을 위해 옮겨 놓는다.
"정의길씨의 글은 미국 프레임을 강조하다보니 오류(영국에 중동난민이 적다니요. 지금 영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프랑스 칼레로 모여드는 난민들, 도버해협을 건너는 이들의 에피소드가 영국노동자 심정적 공포의 워천인데)가 있어 아쉽습니다.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을 주문하며 왜 시라아 내전의 수백만 자국민 학살의 책임을 뭍는 일은 거론하지않는지. 진정 제삼세계인의 인권이나 난민을 고려하는 제안이라면 이 어려운 문제를 먼저 직시하는 것이 옳다고봅니다. 미국과 미국의 하수 영국, 서유럽의 제국주의자 독일이라는 프레임을 관철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전 잘 모르겠어요. 이 기자분 유럽 관련 글 읽을 때 자주 드는 생각."



대구신문 링크
http://www.idaegu.co.kr/news.php?code=op03&mode=view&num=201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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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서문은 나중에 쓰여진다


책의 서문은 언제나 책의 다른 모든 부분이 완성된 후 가장 마지막에 쓰여진다. 독자는 서문을 가장 먼저 읽게 되지만, 반대로 저자는 서문을 가장 마지막에 쓴다. 그러면 왜 책의 서문은 가장 마지막에 쓰여지는 것일까? 아마도 저자 역시 책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책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 어느 방향으로 진행될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서문은 마치 저자가 책이 담고 있는 전체적 내용을 책을 쓰기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사실 그것은 책을 쓴 후 사후적으로 서문을 쓰기에 생겨나는 ‘서문효과’에 불과하다. 자신의 생각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한 미셸 푸코의 말도, 글은 앎과 무지의 경계에서 쓰여진다는 들뢰즈의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쓰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란 매끄럽고 완벽한 계획 속에서는 잘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글쓰기는 우연이 연속되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을 쓰기 전 저자 자신도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생각이 글쓰기로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모든 글쓰기는 새로운 세계로의 모험이라는 점에서는 여행과 같다. 그렇다면 서문은 글쓰기라는 여행을 마친 저자가 남긴 여행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이 하나의 위험이 된 사회에서 ‘우연의 여행’을 감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검증이 이뤄진 식당에만 가는 것도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최적화된 경로가 아닌 길로 진입해 헤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여행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 우연히 동행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뭘 먹고, 뭘 타고, 뭘 보고, 어디가서 자야할지는 여행 전에 준비된 매뉴얼에 따라 매끄럽게 이뤄진다. ‘위험’은 피하게 되었지만 ‘모험’은 사라져 버렸다. 이청준은 “소설이란 기껏해야 한 사람이 끝없이 감당해내는 '헤맴'을 적는 일”이라고 썼는데, 매뉴얼을 따라 다녀 아무런 헤맴도 없었던 여행에서 글이 쓰여지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연성은 낭비를 가져오고, 위험을 가져온다고 믿는 사회에서 누군가를 배척하는 문화가 생기는 결과는 당연한 것이다. 우연적이고 이질적인 것을 견뎌낼 힘이 미약해진 사회는 엄마들을 ‘맘충’으로 부르고, 성 정체성이 다른 이들을 혐오하고, 난민을 위험하다며 추방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지게 된다. ‘위험’은 피하게 되었지만 ‘타자’는 사라져 버렸다.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우연적인 모든 것에 자신을 개방하는 사회가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윤리적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서문은 한 권의 책이 매끄럽게 보이도록 해주지만, 글로 쓰여질 만한 삶은 계획된 삶이 아니다. 오직 우연에 내맡겨진 삶이다.


<책의 서문은 나중에 쓰여진다>라는 제목으로 매일신문에 쓴 글(2016.6.28)이다. 책의 서문이 나중에 쓰여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데리다도, 사사키 아타루도 쓴 바 있다. 특히 데리다의 경우는 책의 서문이 나중에 쓰여지는 것을 예로 전미래시제와 관련해 그의 시간관을 개진하기도 한다. (물론 해석학자들에게는 익숙한 문제이기도 하다) 매일신문에 쓰는 글은 분량이 1300자 내로 써야 해 그런 이야기는 거의 다루지 못했다. 대신 이번에는 '서문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원래 한 편의 글은 글쓴이가 글을 쓰면서 만나는 온갖 우연적인/우발적인 생각들을 조직하는 과정인데, 서문은 그런 우연성을 마치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책의 내용 전체가 매끄럽게 쓰여진 것처럼, 책을 쓰기 전부터 저자가 책의 내용을 모두 장악하듯 파악하고 있었고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쓴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그건 단지 서문이 만들어 내는 환상 내지 효과라 할 수밖에 없다. 말에 도취되면 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말을 하듯이, 글쓰기 역시 그런 도취의 과정이자 어떤 세계에 사로잡히는 경험이다. 그래서 이번 글에는 글쓰기를 하나의 여행에 비유했지만, 동시에 내 생각을 넘어선 생각을 받아쓴다는 점에서 '계시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서문은 계시에 대한 저자의 응답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데리다가 글쓰기를 In-scription이라고 할 때, 텍스트 '안'으로 기입'되는 것은 텍스트 밖의 것, 어떤 미지의 것에 대한 응답일 것이다. 현대 철학이 정치신학으로 돌입하는 동기가 여기에서 비롯한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런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또 같은 이유로 성서가 계시에 의한 받아쓰기의 결과물이라는 신학적 주장의 의미도 재고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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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를 만나다 - 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 문지 푸른 문학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엮음, 김종회 책임편집, 황순원 원작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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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얼마 전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읽으며, 이야기에 있어서 죽어 가는 자의 권위에 대해 생각했었다. 나는 방송에서 책을 소개하려고 몇 년만에 황순원의 <소나기>를 다시 읽었고, 그 직후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읽은 탓인지 이번에도 두 책이 겹쳐 보였다. <소나기>는 1952년에 쓰여진 작품인데, 이 시기가 한국전쟁 당시였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 나라에서 "죽음이 또 다른 얼굴을 획득하는 과정" 에서 쓰여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둠에서 벗어나기>에서 디디 위베르만은 우리가 이야기와 멀어진 이유를 벤야민의 말을 빌려와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죽음이 또 다른 얼굴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지나친 격의일 수 있지만, (나는 모든 것을 정확히 말해야 하는 학자적 책임과 같은 것은 사람이기에) <소나기>에서 소녀가 죽을 때 한 말, "자기가 죽거던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고 한 부분에서 벤야민이 이야기꾼에 대해서 쓰면서 하는 말, "이야기를 구성하는 질료들은 죽어 가는 자에게서 소통 가능한 형식을 띠게 된다. (중략) 그리고 자신의 표현과 자신의 시선 속에서 갑자기 잊을 수 없는 것이 솟아 오른다. 이것이 이 사람을 스쳤던 모든 것에 권위를 부여한다"와 겹쳐 보였다. 아마도 소녀의 분홍색 스웨터는 그래서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었을 것이다. <소나기>의 기원에는 죽어가는 소녀의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소나기>에 대한 아홉편의 오마쥬다. 개인적으로는 전상국의 <가을하다>는읽기 좀 거북했지만 나머지 단편들은 모두 재밌었고, 발상도 흥미로웠다.  특히 '이어쓰기'를 전승이라고 할 때 이어쓰기는 이야기만의 독점적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이 책이 <소나기>를 정보를 전달하는 하나의 고립된 소설이 아니라 경험을 전달하는 이야기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홉 편의 이야기에 모두 죽음이 드리워져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

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


1.안녕하세요? 이번 주에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시나요?


혹시 황순원 작가의 단편소설 <소나기> 읽어보셨나요? 


2.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라면 국민단편이니 저도 당연히 학교 다닐 때 읽어봤죠.


 그러면, 혹시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 소녀의 이름도 아시나요? 혹시 기억하세요?


3. 소설 <소나기>에는 소년과 소녀의 이름이 나왔나요? 저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네, 소설 <소나기>에는 한 소녀와 한 소년이 나옵니다. 소녀는 서울에서 온 윤초시네 증손 딸이구요 분홍색 스웨터에 단정한 치마를 입은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 5학년 여학생입니다. 소년은 소녀가 온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고 소녀가 던진 조약돌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만지작 거리는 부끄러움 많은 동갑내기 친구에요. 소년은 개울가 징검다리에서 만난 소녀를 좋아해 꽃도 꺾어다 주고, 밭에 들어가 무도 뽑아 나눠 줍니다. 소녀에게 잘 보이려 코뚜레도 뚫지 않는 송아지 등을 타보이기도 하구요. 그러다가 둘은 산너머로 놀러 갔다가 소나기를 만납니다. 소년은 소녀가 소나기를 피할 수 있도록 수수밭으로 달려가 수숫단을 세워주고, 비가 와 물이 불어 있는 도랑을 소녀를 업어 건넙니다. <소나기>의 결말은 아마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소녀는 소나기를 맞은 일로 앓다가 제대로 약도 써보지 못하고 죽고 맙니다. 소녀의 아버지가 사업 실패로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이죠. 소녀는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해요. “그런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구..”. 


4. 그 옷은 소년과 함께 소나기가 오는 날 소녀가 입고 있던 옷이죠? 소년의 등에서 진흙물이 베어 버려서 얼룩이 생긴..


 네, 아마 소녀는 소년과 산너머까지 놀러다닌 것이 참 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기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달라구’ 했는데요, 이 말은 소녀의 마지막 말이기도 하고, 또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해요. 


5. 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여운이 오래 남았습니다. 이제 홀로 남은 소년의 마음은 어땠을까, 죽기 전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네, 저도 <소나기>를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다니며 국어 시간이었는데요, 교과서에 참 좋은 작품이 많지만 제게는 <소나기>는 소설을 읽은 원-체험이라고 할까요, 소설이란 것이 이런 거구나 하고 처음 느낀 원초적 기억처럼 남아 있습니다.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도, 또 소설의 배경이 되는 개울이 흐르고, 갈대 밭이 있고, 수박 밭, 무 밭 사이로 저 멀리 원두막이 보이고, 허수아비를 흔들고, 아름다운 풀꽃 들꽃이 피어있는 공간은 한국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보편적 기억’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소녀가 남긴 말은 많은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죠. 

 지금까지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에 대해서 길게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사실 <소나기>가 아닙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문학과 지성사에서 만들고,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에서 엮은 <소년, 소녀를 만나다>라는 책이에요. 이 책의 부제에는 ‘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라는 제목이 붙어 있어요. 말 그대로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 남는 여운과 마지막 대사가 불러 일으키는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소나기>를 이어쓰는 9편의 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6. 아, 그러니까 <소나기>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아홉 개의 작품을 담은 책이군요. 정말 재미있는 기획이네요.


 아까 제가 소년과 소녀의 이름을 기억하시냐고 여쭸는데요, 원작 <소나기>에는 소년과 소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작가는 소년과 소녀의 이름을 붙이지 않는 방법으로 소설을 읽는 독자가 누구라도 자신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도록 했겠죠. 그런데 이 책에서 <소나기>를 이어 쓴 서하진 작가의 <다시 소나기>에는 소년의 이름은 ‘환’, 소녀의 이름은 ‘윤희수’로 소개됩니다. 소년, 소녀에게 이름을 붙인 것도 재밌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소설의 내용도 흥미롭습니다. <다시 소나기>에서 ‘환’은 윤희수의 사촌인 윤희영과 한 반이 됩니다. 처음에는 희영이 희수의 사촌인 줄 몰랐던 환은 희영이 희수와 많이 닮았다고만 생각했는데, 우연히 함께 귀가하다가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둘이 걷다 다시 소나기를 만나고, 둘은 함께 달리기 시작합니다. 서하진 작가는 희수와의 기억이 사촌인 희영과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상상력을 발휘해본 것이죠.


7. 아, 재밌네요. 마지막에 환과 희영이 다시 소나기를 만나는 것도 원작 <소나기>의 내용이 오마쥬되는 거네요.


 네, 그래서 이 작품 제목이 <다시 소나기>이기도 해요. 이외에도 아홉 편의 단편에서 원작 <소나기>의 여러 내용이 차용되고, 저마다 다른 상징과 의미로 활용됩니다. <소나기>에서 소녀가 개울가에서 소년에게 집어 던진 ‘조약돌’, 그리고 조약돌을 집어 던지며 소녀가 소년에게 한 말 ‘이 바보’라는 말, 또 소녀가 소녀에게 건네 준 ‘대추 한 줌’, 거기에 대한 보답으로 소년이 근동에서 제일 가는 맛이라 서리한 ‘호두’, 소녀가 입고 다녔던 ‘분홍색 스웨터’, 둘이 함께 맞았던 ‘소나기’ 등 소설에 나오는 소품과 소재들이 아홉편의 소설에서 저마다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 책에서 구병모가 이어 쓴 <헤살>은 소녀가 죽고 나서 소년의 슬픈 마음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헤살>에서는 소녀가 죽고난 후 소년도 며칠 아팠다고 작가는 상상합니다. 소년은 학교도 한동안 가지 못했는데, 유급을 피하려 학교에 가는 날 다시 문제의 개울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물 안개가 자욱히 껴 잘 보이지 않는 건너편을 응시하며 징검다리를 건넙니다. 제가 잠깐 읽어보겠습니다.


“소년은 한 발을 돌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 그리고 다음. 네댓번째, 예닐곱번째를 가볍게 건너뛰어 기어이 그 자리에 섰다. (중략) 소년은 부스러지고 눅눅해져 이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호두 알맹이를 개울에 뿌렸다. 물살을 따라 어딘가로 춤을 추는 듯 떠내려갔다. 주머니를 까뒤집어 나오는 대로 뭐든 개울에 떨어뜨렸다. 말라비틀어진 대추 몇 알하며 소녀의 목덜미처럼 흰 조약돌까지”.


8. 호두 알맹이도, 대추알도, 조약돌도 개울에 떠내려 보내며 슬픔까지 떠내려 보려고 했던 것이군요. 


 네, 그래서 저도 구병모가 이어 쓴 <헤살>은 소년의 애도를 담고 있는 이야기로 읽었구요, 특히 <헤살>은 이야기가 이뤄지는 시점도 소녀가 죽고 난 직후고, 문체도 황순원 작가의 것을 최대한 따라 쓰고자 한 점이 있어 마치 <소나기>와 한편의 이야기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소나기>에서 호도, 대추알, 조약돌은 소년과 소녀의 소박하고 수줍은 사랑을 상징하는 것들이었지만 <헤살>에서는 슬픔과 애도의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점이 차이라 할 수 있겠죠.


9. 선생님께서는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었던 이야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솔직히 말씀드려 모두 다 재밌었는데요, 특히나 기발하다고 생각하며 읽었던 작품은 손보미 작가가 쓴 <축복>입니다. 좀 소개를 해드리면요, 손보미 작가는 <소나기>에 소년과 소녀 두 사람 말고 원작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제 3자를 개입시킵니다. 그 제 3자는 바로 소녀를 좋아하는 소년을 좋아하는 또 다른 소녀입니다. 기발한 상상이죠? <축복>에서의 주인공인 이 시골 소녀는 서울서 전학 온 소녀를 부러워 합니다. 얼굴이 ‘햇볕에 타서 시커멨고 머리카락은 귀밑까지 짧게 자르고 다녔던’ 자신과 ‘분홍색 스웨터와 남색 스커트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반양말을 신고서는 얼굴이 아주 하얀’ 서울서 온 소녀와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한 소년이 서울 소녀에게 갈꽃을 꺽어주고, 조약돌을 집어던지고 하는 걸 모두 숨어서 바라 봅니다. 못났고 예쁘지도 않은 자신의 모습에 비해 서울 소녀와 소년의 데이트는 너무나 아름다웠던 거죠. 그런 소녀는 서울 소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여자애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또 소녀가 죽습니다. 소녀는 자라서 서울에 있는 여대에 진학 후 친구들이 시위를 하며 거리에서 죽어가는 것을 봅니다. 이 과정에서 ‘죽음’의 의미를 좀 더 이해하게 됩니다. 소년이 서울 소녀가 죽었을 때의 느꼈을 감정에 대해서도 생각하구요.


10. 아, 소년과 소녀를 바라보는 또 다른 소녀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네요.


 심지어 이 책에는 소년이 노인이 되어 등장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노희준 작가가 쓴 <잊을 수 없는>에서 소년은 이제 노인이 되어 동물원에서 어린 손녀와 함께 앉아 있습니다. 이제 노인이 된 소년은 치매 초기 증상를 보입니다. 치매를 앓으며 가까운 기억부터 사라져 이제 노인은 소년일 때의 기억 앞에 있습니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상처도 이십대의 가슴앓이와 함께 지나가 버렸고”, “열심히 일하는 동안, 소녀의 기억은 전생처럼 멀어져” 갔습니다. 그리고는 손녀와 함께 있는 동물원에도 소나기가 내립니다. 인생의 끝자락에는, 열정도, 사랑도, 가슴앓이도 사위어가지만 그럼에도 동심의 기억은 여전히 강렬합니다. 이 작품에서 원작 <소나기>의 이야기는 하나의 추억이 되고, 소나기는 그 추억을 되살리는 매개가 됩니다.


11. <소나기>의 소년이 노인이 된 이야기까지, 흥미로운 책입니다. 이 책을 소개해주시는 이유 정리해주시죠.


 이 책은 지난 2015년 황순원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황순원 문학촌에서 여러 작가들이 <소나기>를 오마주한 작품을 묶은 책입니다. 다섯 편은 황순원 작가의 경희대 제자인 다섯 명의 현역 작가들, 네 편은 경희대 출신의 젊은 작가 4명의 작가가 썼습니다. <소나기>는 1952년 작품이구요, 이 소설이 쓰여진지는 60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 엮인 아홉 편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고민들도 담고 있습니다. 소년을 노인으로 그린 작품은 기억의 문제, 세대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또 시골 소녀와 서울 소녀의 대비가 나타나는 작품에서는 서울과 지방 사이의 문제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작품에서는 소년이 이제 자라 공장 노동자가 되는데 여기에서는 도시 삶의 고단함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야기에서는 소녀가 외계인이었다는 설정도 있습니다. 저마다 지금의 문제를 <소나기>의 뒷이야기를 상상하며 다루고 있습니다. 


 책을 구매하시면, 별책으로 ‘소나기 이어쓰기’라는 노트를 한 권 받게 되시는데요, 여기에는 독자들 역시 자신만의 <소나기> 이어쓰기를 권유하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도 아홉 명의 작가처럼 이번 여름 소나기 오는 날, 마음을 다잡고, <소나기> 이어쓰기를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어떤 이야기라도 좋습니다. 그렇게 쓴 이야기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시대가 담겨 있는 것이죠. 거기서부터 치유가 일어납니다. 문학의 힘인 것이지요. 이 책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읽어보신다면, 청취자분들, 문학을 만나게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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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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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이번 주는 교통방송에서 진중권의 <아이콘>을 소개했다. '왠 진중권?' 하는 반응도 있었는데, 거기에 나는 '진중권이 왜?'라고 응수했다. 진중권이 쓴 책의 부정확한 부분 때문에 논란이 있는 것도 알고, 진중권의 말에 상처를 받은 사람도 많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그리고 진중권의 '모두까기식 화법'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겠지만 나는 최소한 진중권의 모두까기에는 먼 사람이라면 가혹하고, 가까운 사람이라면 봐주는 식이 없다는 일관성을 늘 높이 사는 쪽이었다. 또, <미학오딧세이>는 미학의 대중화 뿐 글쓰기에 있어서도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이 있다. 너무 많은 책을 쓰고, 너무 많은 말을 해서 진중권의 '말의 힘'이 약해진 것일까. 말의 힘은 말 자체에서 나오지 말의 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진중권이 여전히 정확하지는 않을지언정 솔직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도 그렇다. 이 책은 어시스턴트를 두고 자료조사하게 해서 얼치기로 인문학 강의하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해내지 못한 현대 철학의 몇 가지 개념들을 재미있게 포착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 유럽철학이 지시하는 '모호한 영역', 지젝이 대타자의 똥이라고 불렀고, 데리다라면 '구조의 배꼽'이라 불렀던 지점을 현대철학자들이 결코 해주지 않는 쉬운 방식으로 그려준다. 이해의 단순화가 만들어내는 왜곡은 장승업이 그린 작품이 아닌데 장승업이 그렸다고 하는 것에 비하자면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다. 진중권은 최근 들어 조영남이 보조작가 시켜서 작품을 만든 것이 사기냐는 논란에 대해 별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 쪽에 있는데, 어시스턴트 시켜서 강의만드는 사람이 그런 편을 든다면 같이 두들겨 맞아야겠지만 진중권은 일단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충분히 확보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 책 <아이콘>은 김규항에 대한 비판이라 해도 좋을 책이다. 이 책에서 데리다를 불러오는 부분은 모두 김규항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도 좋다. 김규항은 언젠가 진중권에게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 썼는데, 결국 김규항이 보기에 진중권은 '제대로 된 정체성'을 가진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진중권은 거기에 '근대적 강박관념', '복고적인 비판', '순혈주의자의 아집'이라고 일갈한다. 글을 읽으면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왜 김규항이 박유하에 대해서 보이는 관대함을 진중권에게는 발휘하지 않는가?". 진중권에게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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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씨네21북스에서 만들고, 진중권이 쓴 <아이콘>이라는 책입니다. 진중권 선생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이미 잘 알고 계실텐데요, 다양한 정치, 사회 문제에 비판적으로 개입해 오신 한국 사회의 대표 논객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그런 평가에 동의하는데요, 사실은 진중권 선생은 논객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이 분의 정체성을 드러내기에는 역부족일 것 같아요. 먼저, 미학자로도 각각 세 권짜리인 <미학오딧세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이미지 인문학>, <현대미학 강의>, <미학에세이> 등 수십 권의 책이 있구요, 정치평론가로서 <폭력과 상스러움>, <내 무덤에 침을 뱉으마>, <레퀴엠> 등 또 여러 권의 책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팟캐스트 <진중권의 문화다방>을 진행하면서 만난 예술가들과의 인터뷰를 엮은 책 <예술가의 비밀>이라는 책도 냈고, TV에도 <속사정 쌀롱>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도 있지요. 그리고 동시에 대학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 그러고 보니 정말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네요.


 네, 생산력이 대단하다는 것도 인상적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중권 선생에 대해서 정치적인 관점 때문에 편견을 가진 분들은 진중권 선생의 이런 다양한 면모를 모르시는 분들도 꽤 있습니다. 사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진중권 선생의 대표작인 <미학오딧세이>는 미학이 어떤 학문인지 한국 사회에 널리 알린 중요한 계기가 된 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미학오딧세이>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만큼 많은 분들이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미학 분야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비판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만, 저는 미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인지 그런 부분은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았구요, 오히려 <미학오딧세이>라는 책을 통해서 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소개해드리는 진중권은 논객이나 정치 비평가로서의 진중권이 아닌 미학자로서의 진중권 선생과 진중권 선생이 쓴 <아이콘>이라는 책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물론 논객 진중권과 미학자 진중권이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겠지만요.


3. 저도 TV에서 진중권 선생이 토론하는 것 보면, 말씀을 너무 잘하셔서 놀랄 때가 있는데, 최근에는 조영남씨가 그린 작품에 대해서 의견 표명한 적을 들은 적이 있어요. 진중권 선생은 조영남씨의 작업을 사기로 볼 수는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오늘 소개해드리는 <아이콘>이라는 책을 보시면, 왜 진중권 선생이 조영남씨의 작업을 사기나 범죄로 보지 않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혹시 ‘파르마콘’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아마 청취자분들께서도 처음 들어본 말일텐데요, 이 말은 플라톤이 쓴 <파이드로스>라는 책에 나오는 말인데, 우리가 약국을 영어로 pharmacy라고 하잖아요? 파르마콘은 pharmacy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파르마콘에는 약 혹은 치료라는 뜻이 있어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파르마콘에는 약이라는 뜻과 함께 ‘독약’이라는 뜻도 함께 있습니다. 한 단어에 완전히 반대되는 두 말이 모두 들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만약에 이 말이 들어간 문장을 번역한다고 하면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앞 뒤 내용을 잘 보고 파르마콘을 약으로 번역할지, 독으로 번역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거죠. 사실 철학자 플라톤은 모든 것에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고 가짜를 솎아내려고 했어요. 이상 세계인 이데아에 가까운 것은 진짜고, 그렇지 않으면 가짜라고 봤던 건데요, 파르마콘의 뜻이 사람을 살리는 약도 되고, 사람을 죽이는 독도 되는 것을 보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파르마콘이라는 말을 독으로 번역해야 진짜인가요? 약으로 번역해야 진짜인가요? 말하기 쉽지 않은 거지요. 이렇게 ‘파르마콘’이라는 말을 가지고 생각해보면 조영남의 작품이 사기냐, 사기가 아니냐 말하기 어려워 집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윤리적 관점에서는 직접 그리지 않았으니 사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예술의 문제에서는 최근 들어 작가가 직접 그리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조영남씨 작품은 진짜가 되고, 어떻게 보면 가짜가 되는 거죠. 진중권 선생은 파르마콘이라는 말을 설명하면서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는 것보다 조영남씨가 보조 작가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해서 서명만 한게 어떻게 작품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4. 좀 어려운 말이기는 한데, ‘파르마콘’이라는 독도 되고, 약도 되는 말을 통해서 조영남씨의 작품도 어떤 경우에는 사기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식의 결론을 끄집어 내는 거군요. 


 네, 맞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리는 이 책 <아이콘>은 바로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파르마콘, 파타피직스, 니힐리즘, 탈주 등 현대 철학에서 가장 자주, 또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소개하고, 그것을 정치나 미술, 음악, 문학 등 여러 가지 사례에 적용하면서 아주 재밌게 소개해주는 책입니다. 사실 이 책에서 금방 말씀 드린 파르마콘으로 조영남씨 사건을 직접 설명하고 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 일상, 변화를 개념을 통해서 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5. 그런데, 개념, 플라톤, 니힐리즘 이런 어려운 말이 나오고, 또 철학이라니까 조금 어렵게 느끼실 청취자분들도 많으실 것 같아요. 


 아마 그렇게 느끼시는 분들도 분명히 계실텐데요, 사실 ‘개념’이라는 것은 전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일상에서도 우리가 하는 말들이 다 일종의 ‘개념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요즘 자주 쓰는 ‘헬조선’이라는 말이나 ‘금수저’, 취업, 결혼, 자녀 갖기를 포기하는 ‘삼포세대’ 같은 신조어도 일종의 모두 개념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점이 중요합니다. ‘금수저’라는 말도 개념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틀림 없이 이 말은 아버지가 부자인 금수저 자식들은 노력하지 않아도 잘먹고 잘살고, 흙수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세태를 드러내는 말인데요, 우리는 이런 금수저라는 말 때문에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현실을 이전보다 더 잘 이해하고 포착하게 됩니다. 삼포세대도 그런 말이에요. 삼포세대라는 말이 있기 전에도 청년들의 삶은 어려웠는데, 이런 개념어가 만들어져서 사회가 청년들이 처한 현실을 더 잘 포착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 뿐만 아니에요. 삼포세대나 금수저라는 말은 현실을 드러내주기도 하지만 이런 말을 쓴다는 것은 지금의 불평등이나 어려운 현실을 개선하자는 요구를 나타내기도 하거든요. 책의 제목이 ‘아이콘’인데요, 컴퓨터 상에 있는 아이콘을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아이콘을 클릭하면 프로그램이 실행되거나 파일이 열리죠? 옛날에는 프로그램 하나를 실행하는 것도 명령어를 일일이 넣어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지만, 이제 아이콘만 클릭하면 복잡한 명령어 없이도 필요한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죠. 마찬가지입니다. 개념어를 잘 이해하면 복잡하고 어려운 철학적 문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철학자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6. 아, 그러니까 금수저라는 개념으로 우리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바라보는 것처럼, 파르마콘이라는 개념을 통해 조영남씨 논란을 철학자처럼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네요.


 네, 바로 그 점이 이 책이 가진 미덕인데요, 사실 파르마콘이라는 개념어는 데리다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가져와 사용하는 말인데, 데리다 철학을 이해하기란 정말로 어렵지만 이 책을 따라 읽어가면 훨씬 쉽게 이해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재밌는 사례와 개념들이 정말 너무너무 많습니다. 현대철학에서 많이 다뤄지는 개념 중 또 하나가 ‘지루함’입니다.


7. ‘지루함’이 개념어인가요? 


 네, ‘지루함’도 개념어에요. 사실 우리가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본다고 해도 기분에 같은 세상이라도 다르게 보이잖아요? 저만 해도 배가 부를 때는 모든 것을 용서하는 쪽이지만, 배가 고픈 날에는 짜증을 많이 냅니다. 우리가 이성을 가지고 세상을 대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기분을 통해서 세상을 먼저 만나죠. 지루함도 이런 기분 중의 하나입니다. 지루한 날과 지루하지 않은 날을 비교해 보시면 확실히 다르죠? 현대철학에서는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기분 중 하나가 바로 ‘지루함’이라고 해요. 지루함이라는 개념어를 가지고 세상을 보면 설명되는 게 많습니다. 이 책에서는 ‘묻지마 범죄’의 경우도 지루함에 그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동의가 안되시는 분도 많으실텐데요, 영화 배트맨을 보면 조커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그가 살고 있는 고담시가 특별히 미워서가 아니라 너무 지루해서 그러는 거 같아요. 조커는 ‘악을 물리치는 정의의 사도’라는 배트맨을 영웅 만드는 이야기를 너무 너무 지루하게 느끼는 거죠. 만약 조커가 악행을 저질렀는데, 배트맨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조커는 게임에 흥미를 잃고 인질로 잡은 이들을 그냥 풀어줬을지도 몰라요. 오직 배트맨과의 대결만 조커에게 재미를 주기 때문입니다. 


8. 조커는 지루함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지루함’이라는 개념어를 통해 보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네요.


 네, 그 뿐만 아니구요,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금각사>라는 아름다운 소설을 쓴 사람인데 국수주의자였어요. 이 사람이 일본 무사들이 자결하는 방식으로 할복하여 자살했습니다. 이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이런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해요. “전후의 일본은 전사의 미덕으로 이룩한 시적 위대함을 잃고, 이해관계만 따지는 경제동물들의 산문적 사회로 전락해버렸다”. 이 책에서 진중권 선생은 미시마 유키오가 이런 산문적 사회가 된 일본을 지루하게 느꼈고, 지루함을 깨고 일본인들의 삶에 의미를 주기 위해 자신의 배를 갈랐다고 합니다. 역시 지루함이라는 개념으로 사건을 설명하는 거죠. 이렇게 보면 일베 같은 사이트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설명이 됩니다. 제 주변의 일베 이용자들에게 왜 그 사이트를 이용하냐고 물어보면 단지 재밌어서 그냥 한다고 하거든요. 일베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혐오 문제도 결국 지루함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9. 철학적인 개념을 통해 현실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해주는 책인데요, 정리해주시죠.


 사실 개념은 말에 불과하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개념은 힘이 셉니다. 어린이라는 말이 중세에는 없었던 것 아세요? 어린이라는 것도 개념이고 근대에 이르러 발명된 겁니다. 인권이라는 개념도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없었어요. 소외라는 개념도, 민주주의라는 개념도 모두 만들어진 개념들인데, 그 개념 때문에 사람들이 세상을 전혀 다르게 보게 되었고 세상이 이만큼이나 변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 책은 생각의 힘이 세지도록 하는데 유용합니다. 

 어려운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진중권 선생의 특유의 문체로 쉽고 재밌는 글이 되었습니다. 책에 실린 내용들은 대부분은 영화 매거진인 씨네21에도 실은 글이라 내용은 어렵지만 이해하기는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청취자분들에게 조금 어려운 책, 철학책을 읽어보시라고 강력하게 권하고 싶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읽기 쉬운 책을 찾기 마련이지만, 책이 쉽다는 것은 거기에 별 내용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복잡한데 글이 쉽게 쓰여지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글을 못쓰는 사람이 쓴 책이 아니고서야, 깊이 있는 생각을 담은 책들은 대부분 읽기 쉽지만은 않습니다. 쉬운 책만 선호한다는 것은 지적인 성장을 그만두기로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헬스장 가서 가벼운 것만 들어서는 근육이 안 생기는 것과 똑같지요. 

 특히 철학책은 깊은 생각을 하도록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사람들 중 최고로 깊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써내는 책들이기에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벤치 프레스 같은 역할을 합니다.  여러 나라로 여행을 다니며 온갖 경험을 단편적으로 수십년하는 것보다 한 권의 철학책이 더 가치있는 경험과 지혜를 줍니다. 제가 유명하지만 논란도 많은 진중권 선생의 책을 소개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어려운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쉽고 정확하게 현대철학의 가장 깊은 생각들을 재미있게 소개해주고 있어 일독의 가치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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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8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철학본색 2016-06-25 20:35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만약 당사자라면 기분이 많이 나쁠 것 같아요^^
 

아이의 시간, 두 시


 아이가 세 살 때였던 것 같다. 세 살 아이는 “언제?”라고 물음에 항상 “두 시”라고 답했다. “할아버지는 언제 왔어?”, “밥은 언제 먹었니?”, “아빠 언제 올까?”, 어떤 질문을 해도 언제나 대답은 “두 시”였다. 아이 대답이 웃기기도 했지만 그걸 알고도 매번 묻는 내가 우습기도 했다. 아이가 두 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대답했을리 없다. 아마 아빠나 할머니에게 들어서 ‘두 시’라는 것이 ‘언제?’라는 질문에 호응되는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겠지만, 세 살 아이에게는 시간 관념, 아니 숫자 관념이 없었다. 하나, 둘도 모르는 아이가 한 시, 두 시를 알 리 없을테니까. 그런데 왜 하필 ‘두 시’였을까? 한 시, 세 시, 네 시, 열두 시 등 다른 시간도 얼마든지 있는데 두 시만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추측건대 아이의 엄마가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시간이 두 시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이가 보채거나 엄마를 찾곤 하면 나는 습관적으로 “엄마 두 시 되면 온다”고 달래곤 했다. 아이가 이해하리라 생각하고 했던 말이 아니다. 보채고 우는 아이 앞에서 당황한 내가 스스로를 격려하려고 한 말이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이가 ‘두 시’로 답하는 다른 이유는 찾지 못하겠다. 


 아이 엄마가 미국으로 유학길을 올랐을 때 아이를 미국에 데려 간 적이 있다. 열흘 간의 달콤한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날, 지하철을 타고 공항으로 가는 내내 아이도 말이 없었고 아이 엄마도 말이 없었다. 아이도 큰 짐들을 보고 눈치를 채 버린 것일까. 공항에서도 수속을 밟는 내내 엄마에게 안겨 떨어지려 하질 않았다. 나더러 “아빠 가. 아빠 싫어. 엄마 좋아”라며 응석을 부렸다. 공항 검색대에 길게 늘어진 줄 앞에서 아이에게 “이제 아빠한테 안기자”라고 했다. 뭔가 이해하고 있는 듯 엄마 품에서 내게로 오는 아이 모습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에 내가 먼저 울고 말았다. 아이 엄마도 곧장 따라 흐느끼기 시작하자 아이가 “엄마… 엄마…”라고 하면서 평소와 다르게 입을 꼭 다물고 울기 시작했다. 아! 지금도 아이의 그때 울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우리가 이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수십 번을 되물은 것 같다. 울면서, 달래면서, 파트너에게 손을 흔들면서, 공항 검색대를 빠져나왔다. 얼마 남지 않은 탑승 시간 때문에 탑승구를 향해 아이를 안고 달려가면서 아이에게 말했다. “우리 엄마 만나러 다시 오자. 언제 또 올까?” 이번에도 아이 대답은 “두 시에”였다. 아, 두 시! “응, 우리 두 시에 엄마 보러 다시 오자”. 


 아이에게 두 시는 엄마의 시간이었다. 기다리던 엄마를 만나는 시간, 엄마가 오기로 한 약속의 시간이 ‘두 시’였다. 실제로 엄마가 집에 오는 시간이 정확히 두 시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었다. 다시 엄마를 만나러 미국에 가는 시간도 꼭 두 시일 필요가 없었다. 엄마가 두 시에 오든 세 시에 오든, 아이에게는 엄마가 오는 시간이 바로 ‘두 시’였다. 마치 아침은 여섯 시나 일곱 시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뜰 때 시작되는 것처럼, 아이의 시간도 엄마의 시간에 따라 흘렀고 해가 반드시 뜨는 것처럼 아이와 엄마는 항상 ‘두 시’에 재회했다.


 “댁의 아이가 반에서 좀 처진대요”. 얼마 전 학부모 모임에 나갔다가 들은 말이다. 순간 어질했다. 집에 돌아와 일곱 살 아이를 영어학원에 보내야 할까, 이제는 축구 교실에라도 보내고, 노는 것도 ‘뒤처지지 않도록’ 놀이교실을 보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동안 영어도, 수학도 안 가르쳤으니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축구교실 대신 친구들과 축구하면 되고, 시간이 지나면 한글 맞춤법도 알게 될테고, 사칙연산 정도는 스스로 해내는 성취감 정도는 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뒤처진다고 하니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초조한 마음으로 학원을 알아보는 내게 아이 엄마가 말했다. “여보, 지금 좀 뒤처져도 돼. 금방 따라갈거야”. 나는 아이 엄마를 답답하다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자신감을 잃지 않을까? 언제 따라갈 수 있을까?”, 아이 엄마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두 시에”,


 아이가 엄마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믿었던 것처럼, 그래서 엄마의 시간, 약속의 시간, ‘두 시’를 기다린 것처럼 나도 아이의 시간을 그렇게 기다려야 한다. 서쪽보다 동쪽에 아침이 먼저 온다고 해서 서쪽에 아침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아이가 뒤처진다고 해서 자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무리 서둘러도 아이는 아이의 시간이 되어서야 무서워 오르지 못하던 미끄럼틀 꼭대기에 올라가고, 밀어주지 않으면 타지 못하던 그네를 혼자서 타기 시작하고, 말을 하고, 글을 깨치고, 숫자를 알게 되지 않았던가. 아이들은 이 모든 일을 자신의 ‘시간’에 해냈을 때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자신감은 남들보다 빨리 갈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조금 늦더라도 스스로 해낼 때 생긴다. 어쩌면 나는 ‘뒤처진다’는 말에 그만 불안해져서 조금 빨리 영어를 말하고 셈을 하는 것과 아이의 자부심을 맞바꾸려 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네 발 자전거에서 보조바퀴를 떼어 버리고 처음으로 두 발 자전거를 탄 날, 아이의 얼굴은 환하게 빛났다. 아빠가 밀어주던 세 발 자전거를 타던 아이가 어느 새 두 발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보니 아이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움베르트 에코는 “신은 달팽이 같다”고 했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메시아가 오기까지 왜 그토록 긴 시간이 필요했단 말인가. 신을 믿는다는 것은 그 더딤을 인내하는 것이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내 아이의 더딤을 답답해하기도 하고, 불안해하고, 그러면서도 그 더딤을 기다리려는 초조한 몸부림을 거듭하고... 밤이 아침을 기다리듯,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듯, 나도 그렇게 아이의 때를 기다리리라. ‘두 시’ 아니 ‘세 시’까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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