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서문은 나중에 쓰여진다


책의 서문은 언제나 책의 다른 모든 부분이 완성된 후 가장 마지막에 쓰여진다. 독자는 서문을 가장 먼저 읽게 되지만, 반대로 저자는 서문을 가장 마지막에 쓴다. 그러면 왜 책의 서문은 가장 마지막에 쓰여지는 것일까? 아마도 저자 역시 책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책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 어느 방향으로 진행될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서문은 마치 저자가 책이 담고 있는 전체적 내용을 책을 쓰기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사실 그것은 책을 쓴 후 사후적으로 서문을 쓰기에 생겨나는 ‘서문효과’에 불과하다. 자신의 생각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글을 쓴다고 한 미셸 푸코의 말도, 글은 앎과 무지의 경계에서 쓰여진다는 들뢰즈의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쓰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란 매끄럽고 완벽한 계획 속에서는 잘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글쓰기는 우연이 연속되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을 쓰기 전 저자 자신도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생각이 글쓰기로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모든 글쓰기는 새로운 세계로의 모험이라는 점에서는 여행과 같다. 그렇다면 서문은 글쓰기라는 여행을 마친 저자가 남긴 여행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이 하나의 위험이 된 사회에서 ‘우연의 여행’을 감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검증이 이뤄진 식당에만 가는 것도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최적화된 경로가 아닌 길로 진입해 헤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여행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 우연히 동행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뭘 먹고, 뭘 타고, 뭘 보고, 어디가서 자야할지는 여행 전에 준비된 매뉴얼에 따라 매끄럽게 이뤄진다. ‘위험’은 피하게 되었지만 ‘모험’은 사라져 버렸다. 이청준은 “소설이란 기껏해야 한 사람이 끝없이 감당해내는 '헤맴'을 적는 일”이라고 썼는데, 매뉴얼을 따라 다녀 아무런 헤맴도 없었던 여행에서 글이 쓰여지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연성은 낭비를 가져오고, 위험을 가져온다고 믿는 사회에서 누군가를 배척하는 문화가 생기는 결과는 당연한 것이다. 우연적이고 이질적인 것을 견뎌낼 힘이 미약해진 사회는 엄마들을 ‘맘충’으로 부르고, 성 정체성이 다른 이들을 혐오하고, 난민을 위험하다며 추방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지게 된다. ‘위험’은 피하게 되었지만 ‘타자’는 사라져 버렸다.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우연적인 모든 것에 자신을 개방하는 사회가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윤리적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서문은 한 권의 책이 매끄럽게 보이도록 해주지만, 글로 쓰여질 만한 삶은 계획된 삶이 아니다. 오직 우연에 내맡겨진 삶이다.


<책의 서문은 나중에 쓰여진다>라는 제목으로 매일신문에 쓴 글(2016.6.28)이다. 책의 서문이 나중에 쓰여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데리다도, 사사키 아타루도 쓴 바 있다. 특히 데리다의 경우는 책의 서문이 나중에 쓰여지는 것을 예로 전미래시제와 관련해 그의 시간관을 개진하기도 한다. (물론 해석학자들에게는 익숙한 문제이기도 하다) 매일신문에 쓰는 글은 분량이 1300자 내로 써야 해 그런 이야기는 거의 다루지 못했다. 대신 이번에는 '서문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원래 한 편의 글은 글쓴이가 글을 쓰면서 만나는 온갖 우연적인/우발적인 생각들을 조직하는 과정인데, 서문은 그런 우연성을 마치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책의 내용 전체가 매끄럽게 쓰여진 것처럼, 책을 쓰기 전부터 저자가 책의 내용을 모두 장악하듯 파악하고 있었고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쓴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그건 단지 서문이 만들어 내는 환상 내지 효과라 할 수밖에 없다. 말에 도취되면 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말을 하듯이, 글쓰기 역시 그런 도취의 과정이자 어떤 세계에 사로잡히는 경험이다. 그래서 이번 글에는 글쓰기를 하나의 여행에 비유했지만, 동시에 내 생각을 넘어선 생각을 받아쓴다는 점에서 '계시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서문은 계시에 대한 저자의 응답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데리다가 글쓰기를 In-scription이라고 할 때, 텍스트 '안'으로 기입'되는 것은 텍스트 밖의 것, 어떤 미지의 것에 대한 응답일 것이다. 현대 철학이 정치신학으로 돌입하는 동기가 여기에서 비롯한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런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또 같은 이유로 성서가 계시에 의한 받아쓰기의 결과물이라는 신학적 주장의 의미도 재고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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