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관한 일기 (5) - 지방샘

                             성공과 실패의 표상으로서의 비만 



나는 집에서 버스로 25분 정도는 가야 하는 중학교에 배정받아 다녔다. 내가 살고 있는 집 가까이에는 중학교가 없었기 때문인데, 버스는 언제나 만원이었고, 비가 오는 날은 초만원이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10분 정도를 걸으면 학교 정문이 보였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40년이나 되어 낡디 낡았을 뿐 아니라 곧 이전을 앞두고 있어 관리가 전혀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아주 거칠었다. 입학 첫 날부터 각 국민학교에서 온 주먹질 좀 한다는 아이들이 겁을 줬고, 누가 진정한 일진인지를 두고 싸움을 벌였다. '쓰바리'란 말은 중학교에 가서 처음 들었다. 상급생들이 신입생들에게 버스 승차권이라던가 잔돈 따위를 뺏아가는 '쓰바리'를 쳤다. 심지어 나는 중학교에 배정 후 입학 전에 치른 반 배치고사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지 못했다. 어머니께 야단을 하도 맞은 탓에 지금도 정확히 등수를 기억한다. 학급 9등, 전교 81등. 600명 신입생 중에서 10%에도 들지 못한다는 것을 어머니는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다. 학교까지 오고 가고, 일진 아이들에게 치이고, 선배들을 피해다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는데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성적 때문에 학교를 마치면 셔틀 버스를 타고 다시 학교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종합반 학원을 다녀야 했다. 셔틀 버스에서 아이들은 어느 학교의 누가 더 주먹이 쎈지, 어느 만화가 볼만한지, 어느 오락실이 좋은지를 이야기했다. 자위행위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도 그 셔틀 버스 안이었다. 다른 학교에 다니던 한 녀석은 자위 행위를 소설가적 감수성으로 이야기하고는 했다. 어떤 여자를 생각하는지, 사정이 될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인지 떠들어 대는 녀석 앞에서 나는 그저 애송이에 불과했다. 성적이나 학원 수업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해 본 기억이 없다. 그 때 한창 드라마 <마지막 승부>가 인기를 끌던 때라 이따금씩 주말에 만나 농구를 하자고 약속하는 정도가 셔틀 버스 토크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건전한 주제였다. 


중학교 시절은 지금 생각해봐도 모든 것이 어둡기만 하다. 이제 제법 근육이 붙기 시작하는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힘의 각축전으로 학교는 홉스적 자연상태라 늘 나는 뭔가 위축되어 있었고, 국민학교 때에 비해 성적도 떨어져 나는 선생님께나 다른 아이들에게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중학교를 입학할 때만 하더라도 72Kg 정도였던 몸무게가 2학년 때는 100Kg까지 나갔다. 학교에서의 일과가 끝나고 곧장 학원으로 가면 저녁은 언제나 라면이었다. 밤 10시에 집에 들어가면 늘 야식을 먹었다. 아버지는 다정한 분이시라 밤 10시에 가족이 함께 둘러 앉아 드라마를 보며 치킨을 먹고, 빵을 먹고, 과일을 먹는 것을 좋아하셨다. 공부 부담 때문에 운동할 겨를도 없었다. 성적은 꾸준히 올라 어느 덧 1, 2등을 다투게 되었지만 나도 모르게 살은 어마어마하게 쪄 있었다. 살이 쪘지만 사실 불편한 것은 없었다. 금화주머니와 그림자를 바꾼 사내처럼 나도 성적과 몸무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심지어 당시에는 나 자신이 '비만'이라는 인식조차 없었다. 덩치가 좋아진 것일 뿐이었고 그것이 나의 학교 생활을 점점 더 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14살 남자 아이들은 단순하다. 덩치가 크다는 것은 곧 강함을 의미했다. 어떤 세계에서는 큰 차가 권위를 상징하고, 큰 집이 부를 상징하고, 큰 것이 곧 권력을 상징하는 것처럼 말이다. 덩치가 커지자 학교에서 눈치 볼 일이 줄어들었다. 학교에서 꽤나 주먹을 쓴다고 하던 아이들까지도 나를 견제할 정도가 되었다. 나 역시 내 힘을 과시하고 싶었다. 나보다 덩치가 작았던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게 굴면 가차 없이 두들겨 팼다. 나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불량 학생의 표상이던 교내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힘이 약한 아이들에게 쓰바리를 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학교의 일진들이 공유하는 기호를 하나씩 갖기 시작했다. 빈폴 코트, 노티카 점퍼, 트래벌 폭스 야구화, 블랙앤화이트 바지 등을 입고선 마음에 들지 않는 덩치 작은 녀석 하나 두들겨 패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 태도까지. 게다가 공부도 제법 했기 때문에 3학년이 되자 나는 언제나 학급의 중심에 있게 되었다. 신입생 때 가졌던 두려움은 모두 사라졌다. 성적은 올랐고, 덩치가 커져서 어느 누구도 나를 괴롭힐 수 없고, 최고학년이 되어 쓰바리를 당할 걱정도 하지 않았다. 힘이 생기자 학교 생활은 편해졌다. 그 때 나는 내가 느끼는 자신감의 원천을 지금처럼 제대로 규명해낼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다행스럽게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또렷이 기억한다.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내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 성적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남들보다 상당히 덩치가 크다는 것, 거기에 안도했다. 


어머니도 내가 살이 찌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셨다. 어머니는 나더러 뚱뚱하다는 친척들에게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국민학교 때도 살이 많이 쪘었는데 그게 다 키로 가더라구요". 살이 키로 갈리 없는데도, 어머니는 이번에도 내 살이 키로 갈 것이라 믿고 계셨다. 그래서 튼 살이 생기고, 몸에 맞는 옷이 점점 줄어들어도 어머니는 개의치 않으셨다. 오히려 어머니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내 몸 곳곳에 여드름처럼 올라오는 붉은 뾰루지들이었다. 사춘기 시절에는 누구나 얼굴에 나는 여드름으로 고민하지만, 나는 뾰루지가 팔뚝에 집중적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주말 저녁이면 나를 무릎에 눕혀 놓고선 팔뚝에 난 뾰루지의 고름을 짜냈다. 뾰루지는 아주 작았기 때문에 고름의 양은 많지 않았지만 양 팔의 팔뚝에 작은 뾰루지가 수백개나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단순한 여드름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심각한 피부병일 수 있겠다며 걱정하셨다. 며칠 후 내 엄지 손톱의 물집을 치료했던 피부과로 갔다. 오랜만에 나를 본 의사는 내 팔에 난 뾰루지를 보기도 전에 이렇게 물었다. "왜 이렇게 살이 쪘어?". 어머니는 대답 대신 내 팔뚝에 난 뾰루지를 의사에게 보이며 이게 왜 생기는 거냐고 물었다. 의사는 이번에도 "당장 살을 빼세요"라며 이번에도 내 살을 문제 삼았다. 어머니는 "살이 요새 좀 쪘는데 다 키로 갈거에요"라고 하신 후 내 팔에 난 뾰루지에 대해서 다시 물었지만 의사는 내 팔에 난 뾰루지가 뭔지 정확히 설명해주지 않았고, 별 다른 치료도 없었다. 그냥 여드름 같은 거니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고만 했다. 진료실을 나서려 하자 의사는 등 뒤에서 다시 말했다. "지금 팔이 중요한 게 아냐. 당장 살을 빼야 해요!".


의사의 말과 달리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내 팔뚝의 뾰루지는 없어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동안 뾰루지 짜내기에 집중하셨지만, 얼마 안 가 그만두셨다. 내 피부가 닭살이라서 그렇다고 어머니는 자체 결론을 냈다. 사실 별로 불편한 것이 없었다. 가렵거나 아프지 않고, 일부러 짜지 않으면 고름이 나와 옷을 더렵히는 일도 없었다. 민소매만 입지 않으면 남들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피부 문제를 해결도 못하는 실력 없는 피부과 의사 주제에 나더러 왜 자꾸 살을 빼라는 건지 짜증만 났다. 살은 나의 힘이었기 때문에 살을 빼라는 것은 힘을 버려라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어머니도 그 의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살은 키로 곧 갈 것이기에, 또 의사가 말한대로 뾰루지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살을 빼라는 말을 진지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확실히 그 의사는 돌팔이였다. 내 팔뚝에 난 수백개의 뾰루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대로다. 20년이 넘도록 전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만약 여드름이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2차 성징기를 겪고 있는 셈이 되는 거다.


내 팔뚝의 뾰루지를 여드름이 아닌 다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대학 3학년 때이다. 교회에서 친하게 지냈던 선배 둘과 함께 목욕탕에 갔는데 공교롭게 두 선배에게도 팔뚝 뾰루지가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것, 같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 같은 성가대에서 노래한다는 것, 팔뚝에 같은 뾰루지가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셋 다 뚱뚱하다는 것. 같은 대학, 같은 교회, 같은 성가대라고 해서 같은 뾰루지가 있을 가능성보다는 우리 모두가 뚱뚱하다는 것이 같은 뾰루지의 원인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고 나는 그날부터 생각날 때마다 뚱뚱한 사람들의 팔뚝을 관찰했다. 뚱뚱한 사람들은 뚱뚱하기 때문에 민소매 티셔츠를 거의 입고 다니지 않아 일부러 티셔츠의 소매를 들춰보지 않는 한 팔뚝에 뾰루지가 있는지를 확인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었다. 의심스러우면 모른 척 좀 더 가까이 가서 보기도 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 사이라면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뾰루지가 주로 뚱뚱한 남자들에게 많이 발견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께 오랜만에 다시 한번 뾰루지를 짜달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짜낸 것은 고름과는 확실히 달랐다. 고름을 짜내면 피가 섞여 나오지만 내 팔뚝의 뾰루지에서는 피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고름처럼 보이는 노란 것은 끈적한 액체가 아니라 오히려 작은 알갱이 같았다. 나는 친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생물학과에 다니는 동아리 후배에게 '노란 알갱이'의 성분이 무엇인지를 알아봐달라 부탁했다. 다음 날 문자 메시지가 왔다. "형 어제 주신거요. 그거 지방인데요".


지방이라고? 그러면 내 몸에 과잉 축적된 지방이 팔뚝 지방샘으로 분비되는 것인가? 그때 의사가 살을 빼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나? 여드름이 아니라 지방샘인가? 몸에 지방을 더 이상 저장할 곳이 없어서 뚱뚱한 사람들만이 지니고 있는 새로운 배출 기관인건가? 물론 얼마 안가 이런 생각이 조금도 신체애 대한 완전한 무지에서 나온 공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팔뚝의 뾰루지가 '팔뚝 여드름' 증상의 하나이고, 팔뚝 모공이 각질로 인해 막히면서 생기게 된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실제와는 정반대로 추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팔뚝의 뾰루지는 지방을 배출하는 지방샘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반대로 정상적인 경우라면 지방샘에서 지방이 배출되어야 하는데 각질과 노폐물로 지방샘이 막혀 지방이 나가지 못해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과는 다르게 나는 내 팔뚝 뾰루지를 볼 때마다 나 자신이 지방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을 다시 인지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게 팔뚝 여드름은 모공의 고장이 아니라 지방이 꽉 차 있음을 드러내는 문학적인 상징 같은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항상 모든 것을 거꾸로 이해하며 지내왔다. 12살 어린이일 때는 살이 키가 된다고 믿었고, 14살 까까머리 중학생일 때는 살이 찌는 것을 문제가 아니라 자랑으로 믿었고, 23살 대학생 때는 팔뚝 여드름을 보며 지방이 너무 많이 분출되고 있다고 믿었고, 최근까지 나는 고도비만이면서 동시에 건강할 수 있다고, 수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또 어떤 것을 완전히 거꾸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 몸의 변화와 내가 하는 작은 습관 조차도 알지 못하면서 모두 아는 양 여기에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두웠던 중학교 시절에 성적을 올리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살이 쪘고, 다른 한편 힘을 갖기 위해 일부러 살을 찌웠다. 살은 성적 상승의 결과였고, 작은 아이들을 굴복하게 만들었으니까. 오래동안 살을 빼지 못했던 것은 '살'은 최소한 나 자신에게만큼은 승리의 표상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패배와 무책임과 낮은 자존감의 표상이다. 의학에서나 팔뚝 여드름이나 비만은 단정적으로 문제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실제에서는 팔뚝 여드름 하나 조차 앞서 내가 문학적 상징으로 이해한 것처럼 의미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중학교 때 아이들을 두들겨 팬 것에 대한 대가는 지금 충분히 치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큰 덩치로 지금 나는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3월 29일.

27일이 생일이었다. 생일에는 일을 했다. 28일에 처형이 생일축하를 해주셨다. 나를 위한 케잌을 사기 위해 버스를 타고 2시간이나 시간을 쓰셨기 때문에 사양할 수가 없어서 조금 먹기로 했다. 그런데 너무 맛있었다. 케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2시간을 쓸만큼 맛있는 케잌이었기 때문에 유혹을 이길 수가 없었다. 오늘은 아이와 집근처 커피샵에 갔다. 아이가 배 고파해 커피샵에서 파는 피자를 사줬다. 아이가 졸라대는 통에 몇 조각을 먹었다. 다이어트는 정성을 거절하고, 남은 음식은 버릴 수 있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정말 나 자신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케잌과 피자를 먹은 나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이어트는 음식만이 아니라 예의와 경제 관념과도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나는 아직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내가 먹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먹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거다. 하지만 정말 맛있었다. 케잌도, 피자도. 내일은 어떤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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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관한 일기 (4) - 손톱 물어 뜯기

                             꽤나 시적인 자해가 아닌가 


나는 뚱뚱하고, 최근에는 건강까지 나빠졌는데 나쁜 습관도 있다. 내 손톱은 언제나 짧고 뭉퉁하다. 손톱 주변의 손가락 마디 곳곳에 상처가 있다. 모르긴 몰라도 겨울철만 되면 아데노이드가 붓는 것도 손톱 밑의 세균이 원인일 것이다. 나는 손도 씻지 않고 손톱이 자라 올라오기 무섭게 물어 뜯는다. 물론 의식적으로 나 자신이 '이제 제법 길었으니 물어 뜯을 때가 되었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손이 입가에 가 있다. 어쩌면 손톱 물어 뜯기는 내게 일종의 기호식품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담배 한 대가 주는 안온함처럼 손톱을 물어 뜯는 것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담배는 피지 않기 때문에 손톱 물어 뜯는 것보다 그게 얼마나 더 효과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손톱 물어 뜯기가 담배보다 나은 점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담배만큼 건강에 나쁘지는 않다는 점, 비싼 담배와는 달리 공짜라는 점, 남들이 보기 싫은 것을 제외하면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점, 무엇보다 점점 담배 태울 곳이 없어지는 상황과 달리 누구도 손톱 물어 뜯기는 금지하지도 않고, 사실상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는 점. 그러니까 자라나는 손톱은 내 몸에서 자라는 중독성 물질에 가까웠다. 예전에 나는 어느 일기에, '내 손톱은 내 손에서 자라는 대마'라고 쓴 적이 있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가 기도했다. "주여, 내가 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 마약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지 않게 하소서".


사실 내가 언제부터 이 '죄 아닌 죄'를 갖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학교 때인가 엄지 손톱 주변에 작은 물집 같은 것이 생겨 드라이아이스 소독으로 그 주변을 치료했던 적이 있다. 그 때 상처부위가 괴사되면서 딱지가 앉았는데, 학교에서 수업 중에도 촉이 날카로운 '제도1000' 샤프로 딱지 부위를 떼어내고, 다른 손가락에도 짓무른 곳이 있으면 '도루코칼'을 빼내어 도려내느라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다시 손가락은 상처 투성이가 되고, 또 다시 딱지가 앉고, 다시 떼어내고, 상처가 생기고 그러기를 반복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수업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해도 오래가지 않았다. 책을 보면 책을 잡고 있는 손이 보였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몇 번을 잡고 나면 어느 새 나는 손톱 주변에 있는 죽은 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 후에는 제법 성적이 나와 도서관 열람실 자리를 배정 받을 수 있었다. 일인당 하나씩 독서실용 책상이 주어졌는데 손톱 물어 뜯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고, 온전히 내 손톱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집이 갑자기 어려워지게 되었다. 손톱 물어 뜯기가 불안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답답할 때 담배를 한 대라도 더 태우게 된다면 아마 손톱 물어 뜯기도 그런 것이 분명할 것이다. 아버지가 집을 비우시고,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더 벌이가 되는 공장 야근일을 하러 가셨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점심 도시락도 싸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 때 나는 배가 고팠다. 그리고 마침 좋아하는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여자애에게 고백이라도 하기 전에, 또 기왕 배가 고픈 김에 살을 한번 빼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게 내가 처음 한 다이어트였는데, 그 때의 다이어트는 '강제된 것'이었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지도 모른다. 그 때 나는 물론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배가 고파서 친구들의 도시락을 숟가락 하나를 들고 '빈대짓'을 했고, 그리고 내 손톱도 물어 뜯었다. 비록 삼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왼쪽 손등에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상처가 났는데, 언뜻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 상처가 생긴지는 1년도 지났다. 나는 손톱을 물어 뜯듯이 손등에 난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딱지를 집요하게 떼어내고, 다시 피가 나는 것이 반복됐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는데,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손톱을 물어 뜯기 시작한 것이 벌써 20년이 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 손이 무려 23년동안 상처가 나고 아물기를 반복했고, 잘려나갔다가 다시 자랐던 것이구나. 나는 왜 이토록 손에, 아니 손가락에, 아니 손톱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이가 손을 빨 때마다 "손이 똥꼬보다 더럽다" 했더니 물끄러미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내게 "아빠 손은 똥꼬보다 더럽지 않아?"라고 물었다. 아이도 보고 있었구나.  내 손이 똥꼬보다 더 더럽지는 않겠지만, 똥꼬보다 예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손톱은 항상 뭉퉁하고 거치니까.


손톱을 물어 뜯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텐데, 사실 손톱을 뜯으면 손톱만 뜯기는 것이 아니다. 손톱의 깊은 안 쪽에는 손톱이 마치 나무처럼 살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손톱을 잡아 뜯으면 살이 뜯어질 때도 가끔 있다. 흡연가들 중에는 끽연가도 있고 입담배를 태우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손톱을 물어 뜯는 것도 사실 사람마다 다 같지는 않다. 내가 아는 J는 손톱 물어 뜯기에서는 끽연가급인데 그 친구의 손톱은 내 손톱의 절반도 채 미치지 못할 정도다. 심지어 손가락 끝은 언제나 피가 멍울져 있어서 누군가와 손도 잘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거기에 비하자면 나는 보통 수준에 가깝다. 가끔 나도 피가 나지만 대개의 경우는 손톱이 자라 올라와 색깔이 변하는 지점까지를 목표로 삼는다. 다른 친구 K는 손톱만 물어 뜯지 않는다. K는 엄지 손가락 아래 손바닥을 물어 뜯는다. 굳이 비유하자면 그건 담배도, 대마도 아닌 필로폰 수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 친구도 처음은 엄지 손가락 아래 손바닥에 난 딱지를 떼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했다. 


담배라면 누구라도 끊어보라고 했겠지만 손톱을 물어 뜯는 나의 은밀한 중독에 대해 나더러 그만두라고 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나 자신도 '이제는 고쳐야겠다'고 생각하거나 다짐한 적이 없다. 나는 손톱을 물어 뜯고 뭉퉁해진 내 손을 보면서, 나 자신이 어떤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고도 별로 생각했던 적이 없다. 전문가들은 그걸 강박적 행동이라고 했지만 내게는 그냥 흡연처럼 가벼운 중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손톱을 물어 뜯을 때 느끼는 입술의 쾌감, 손톱 아래의 개운함, 탁탁 거리는 소리의 경쾌함까지, 담배를 한 대 물고 있는 것만큼 손톱을 물어 뜯는 것은 누군가에 멋있어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보다 공감각적인 쾌감을 주었다. 자기 손바닥을 물어 뜯는 녀석도 아마 살을 뜯을 때 느끼는 아픈 감각이 쾌감이 되었을 것이다. 충분히 그 쾌감을 이해할 수 있다. 손톱을 물어 뜯을 때 가장 짜릿한 순간은 살이 뜯어져 나오는 바로 그 순간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나는 손톱 물어 뜯기가 심지어 아주 시적인 습관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나는 살과 손톱을 뜯는 야수적인 본성으로 최소한의 야수적 성향도 남지 않도록 손톱을 없애고 있었다. 내 손으로는 그 누구도 긁히지 않고, 다치지 않는다. 내 입도 그 누구도 공격하거나 물어 뜯지 않는다. 오직 내 손과 손톱만 물어 뜯을 뿐이었다. 자해치고는 꽤나 시적인 자해가 아닌가. 이렇게 쓰고 있지만 이 시적인 자해로 상한 손을 내 보이는 것은 부끄럽다.


그것도 병이라고, 교조증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글을 읽고서 병은 신에게 기도하는 것보다 병원에 가는 것이 빠르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나는 의사를 좋아하지 않아 (정확히 말해 직업적으로가 아니라 의사가 되는 인간 종류를 싫어해서), 일단 먼저 스스로 한번 사람들이 교조증이라는 병이자 동시에 내게는 흡연과 같은 중독과 한번 싸워 보기로 한지 3주가 되었다. 손등에 난 상처는 이번에는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연고를 바르고 기다렸더니 두 주만에 완전히 나았다. 손톱도 제법 자랐고, 손톱 주변에 피부가 갈라지고 상한 부분도 내가 보기에는 80% 정도 회복이 되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손톱이 자라니까 이전에는 없었던 다른 감각 하나가 생긴 것 같이 손톱 아래가 아린 느낌이 들고,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한다. 책장을 넘길 때 손가락 끝이 아니라 손톱이 먼저 닿는 것은 정말로 23년만에 느끼는 감각이다.  자판을 칠 때 C, N, M 등의 문자열 맨 아래는 손가락이 아니라 손톱으로 미끌려지듯이 치게 되는데 그 때마다 들리는 손톱과 키패드가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와 손톱에서 전해져 오는 감각이 낯설게 느껴진다. 


엄마 젖을 덜 빨아서 손톱이나 물어 뜯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설명보다는 내가 정확히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살이 급격하게 쪘다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중학교 1학년 때는 덩치는 컸지만 그렇다고 내가 고도 비만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몸이 급격히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어두워 졌고, 손톱으로 마음을 달래기 시작했다. 그렇다. 내가 손톱을 물어 뜯은 것이 아니다. 뚱보자아가 나를 물어 뜯기 시작한 것이다. 뚱뚱한 나를, 내 손을, 내 손톱을 말이다.


2016년 3월 16일. 지난 주말은 현미로 된 김밥집을 찾아 떼운 끼니가 많았다. 현미김밥이라면 평생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데, 밥알을 자세히 보니 꼭 백미처럼 보였다. 만일 속이는 것이라도 기분 좋게 속기로 했다. 그래서 진짜 현미인지는 물어보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오늘 아침은 미역국을 먹었고 여주 가루를 먹었다. 여주 가루는 목 뒤로 넘어가면 말도 못하게 쓴 편이라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점심 때 주변 산을 한시간을 걸었고 아메리카노를 한잔 마셨다. 오후에는 아이와 함께 오리고기를 먹었는데, 이제 오리고기도 많이 먹지는 못한다는 생각에 먹으면서도 뭔가 참울한 기분이 들었다. '오리고기와 혈당'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니 오리 고기의 기름을 떼어내고 먹으면 괜찮다는 내용이 나왔는데, 제길 오리고기에서 기름을 빼면 그걸 오리고기라 할 수 있나? 그런 식이라면 만두에서 만두 속을 빼면 만두가 되나? 냉면에서 면을 빼고, 잡채에서 당면을 빼고, 비빔밥에서 밥을 빼면 그게 냉면이고 잡채고 비빔밥인가.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이와 목욕탕에 다녀왔다. 요근래한 운동 중에 가장 격렬한 운동이었다. 무엇보다 몸에서 때를 벗겨내는 것은 손톱을 물어 뜯을 때 못지 않은 쾌감이 있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목욕을 마치고 아이가 편의점에 가자고 졸라댔다. 아빠는 먹을 것이 없으니 네 것만 사라고 하니, 아이는 같이 먹자며 이렇게 말했다. "아빠, 얼굴 좀 작아졌어. 턱 쪽에 붙어 있던 살이 좀 나갔어". 다음 주에는 용기를 내어 체중을 달아 보리라.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용기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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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관한 일기 대신 책 – 팻(돈 쿨릭과 앤 메넬리 엮음)
몸, 특히 뚱보에 관한 문화인류학적 보고서

매주 금요일 교통방송에 나가서 책을 소개한다. <팻>은 내가 17번째로 소개한 책이다. 지금 서경식 선생님은 아주 날씬해지셨지만 1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덩치가 크고 머리도 아주 짧게 자르시고, 중절모에 검은 코트를 입고 다니셨는데, 서경식 선생님을 내게 소개시켜 주셨던 사학과 I 교수는 내게 "따뜻하고 다정한 분이시지만 실제 만나뵈면 야쿠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고 하셨다. 서울에 선생님께서 계실 때 선생님께 비만인권리투쟁협회, 비투협을 만들어야 한다고 농담을 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그저 웃기만 하셨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가끔 비투협에 대해 언급하셨다. 나는 정말 그런 협회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비만인권리협회가 미국에서 소수이지만 현재 활동을 하고 있고,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활동이나 철학이 아주 섬세하다. 예를 들어 협회 소속원들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모순적일까, 우리의 주장이 청소년들에게 전달되는 것은 과연 바람직할까 등등의 진지한 고민, 그리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뚱뚱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등의 캠페인은 섬세하게 계산하지 않았다면 이뤄지기 어려웠을 활동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내용은 뚱보 인권운동가에게 "사이즈가 얼마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이다. 사이즈는 달라진다고 한다. 브랜드마다 다른 사이즈를 입고, 셔츠와 코트와 바지를 살 때도 같은 사이즈가 아니고, 시기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그리고 그들은 비만인들에게 맞는 옷 사이즈가 제공되지 않는 브랜드 매장 앞에서 공격적 시위를 하기도 한다. 나만 해도 이 정도 몸집이 되면 어지간한 브랜드에는 사이즈가 없을 때가 많다. 나는 폴 스미스에서 만든 옷을 예쁘다고 생각해 왔는데 여태 단 한번도 사입어 본 적이 없다. 사이즈가 없어서 둘러보다 그냥 나오기 민망해 머플러를 하나 산 것이 전부다. 랄프로렌은 예민한 디자인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선호할 만한 브랜드가 아닐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폴로가 없다면 기성복 라인에서 내 몸에 맞는 남방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20대 초반에는 제일모직에서 나온 푸부라는 브랜드가 있었는데, 지금은 잘 찾아보기 힘들고 내 나이대에 걸맞는 디자인도 아니다. 백화점 점원들은 내가 너무 커서 맞는 옷을 팔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 하지만 시장 상인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면 "사이즈 없어요"라고 물을 기회도 주지 않는다. 심지어 제주에 어떤 시장에서는 사이즈를 볼 수 있냐고 물으니 상인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보던 TV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살을 가장 빼고 싶은 이유를 들자면 폴로 말고 다른 옷을 입어 봤으면 하는 것이다!

이 책의 가장 강렬한 메시지는 다이어트는 항상 실패한다는 것이다.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의 76%는 다이어트를 시작한지 3년 뒤에 다이어트 이전보다 살이 더 찌며, 5년 뒤에는 95%나 살이 더 찐다”는 통계를 마주하면 내가 저 통계 안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뭔가 모를 안도감이 생긴다. 나는 95%니까 요요가 온 것은 내 절제력의 부족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에게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에 말이다. 저자들은 다이어트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는 다이어트의 제단에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의 합리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온갖 병과 낮은 자존감, 불편의 원인이 비만인 줄 알면서도 살을 빼지 못하는 것일까?

‘스팸’을 다룬 장에서 한가지 대답을 찾을 수 있다. 하와이는 미국에서도 스팸 소비가 가장 많은 지역이고, 스팸과 관련된 축제도 열릴 정도로 이 고기 통조림을 좋아한다. 물론 하와이 사람들도 스팸이 건강에는 좋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스팸을 왜 좋아하는 걸까? 스팸은 통조림 제품이라 2차 대전 당시에 미군들에게 식량으로 보급되었는데, 진주만 공습 후 하와이에 미군이 증강되면서 군인 뿐만 아니라 스팸이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또 진주만 피습 후에 미국 정부가 근해 어업을 금지하면서 하와이 사람들의 주식인 생선이 귀해진 반면에 스팸은 구하기 쉽고 저렴했다. 하와이에서는 전쟁의 힘든 시기를 성공적으로 이겨낸 것을 연상시키는 ‘그리운’ 음식이 되었고, 해를 거듭하면서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게 빗대자면 일종의 “만두” 같은 거다. 아버지께서 늘 사다주시던 중국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의 군만두 같은 것 말이다.
살을 빼지 못하는 것은 이런 문화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라틴랩의 거장인 ‘빅 펀’은 사망 당시 몸무게가 698파운드, 그러니까 316킬로그램이었다. 어렸을 때는 뚱뚱하지 않았지만 섭식장애를 앓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헤로인 중독자였고, 양아버지는 아주 폭력적이었는데 거기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으로 빅펀은 벽에 구멍을 내서 벽돌 부스러기를 먹곤 했다. 부모의 방치나 학대로 이식증이 생긴 것이다. 빅펀은 돈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식욕을 채우는데 집착했고, 체중이 급격하게 불어났다. 그리고 결국은 28살의 나이에 심장병으로 죽었다. 빅펀이 살을 빼지 않은/못한 것은 빅펀의 마음 속에는 ‘학대 받아 배고픈 자아’와 ‘뚱보 자아’가 모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미국의 힙합 문화에서는 ‘크기’를 ‘힘’으로 여기는 문화가 있었다. 마치 큰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권력을 상징하는 것처럼 큰 몸집은 힘과 성공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힙합 가수들은 헐렁한 옷을 입고 신체를 더 크게 보이도록 만든다. 유럽의 귀족들도 큰 덩치를 권력으로 여겼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빅펀은 살을 빼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책은 다이어트가 항상 실패인 이유를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이 외에도 ‘비만’을 읽는 다양한 비평적 관점을 제시해 준다.
방송에서는 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데, 특히 뚱보 포르노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아쉽다. 뚱보 포르노에는 뚱보 여성이 성관계하는 모습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가슴과 배를 드러내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생크림을 숟가락으로 떠먹는 모습을 비춰 준다는 것인데, 저자는 말년에 푸코가 가학/피학 성애에 대해 말을 많이 했다는 것을 가져와서 아마 푸코도 뚱보 포르노에 열광했을 것이라 예상한다. 푸코의 관점에서 이런 '변태 성향'은 남근 중심의 성적 욕망이 재배치된 결과이다. 보통 포르노 영상은 금지되고, 소수적인 취향을 미세하게 반영한다. 엄청나게 뚱뚱한 여자가 마음껏 음식을 먹는 것을 보는 것은 '금지'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다. 뚱보 포르노에서 '비대한 살'은 역겹거나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랑스럽고 욕망의 대상이 된다. 성기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과 비슷하게 말이다. 뚱뚱한 여자가 나오는 포르노가 성적으로 매력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지만 깡마른 여자보다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이 책은 '뚱뚱하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문화사회학적으로, 인류학적으로 해명하는 여태 보지 못했던 책이다. 마지막으로, 솔직히 말해 잘 읽히지는 않는다. 그래도 팻에 대해서만큼은 팻하게 담고 있는 아주 내실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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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관한 일기(2) - 비만이 의미하는 것들

                            뚱보자아는 잘 죽지 않는다. 


 나는 상체 비만이 유독 심하다. 배가 많이 나와서 소위 배바지로 부르는 형태로 바지를 입는다면 허리 사이즈가 족히 45인치는 되어야 할 것이다. 파트너는 내 가슴이 크다며 놀라워 하는데, 인정하기는 싫지만 어쩌면 유방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얼마 전 내가 가르쳤던 학생에게 안부 전화가 왔는데 간단한 수술을 했다고 전해왔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어떤 수술인가 물었지만 "별 것 아니에요"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말하기 어려워 한다는 생각에 더 묻지는 않았는데, 다른 학생을 통해 그 친구가 남성 유방증 수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랍기도 했지만 우선 호기심이 생겼다. 남성에게 여성과 같은 유방이 있어서 이것을 축소시킬 수 있는 방법도 있다는 생각은 그 이전에는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었고, 나는 그저 살을 빼면 자연스럽게 빠지게 된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샤워를 하며 내 가슴을 보며 이게 살인지, 유방인지 쳐다 봤다. 내 가슴이 그저 살이든, 유방이든 어느 경우라도 부끄럽게 여겨졌다. 그리고 군 복무 시절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자대에 배치 받은지 얼마되지 않았던 신병 시절에 같은 내무실은 아니었지만 한 건물을 쓰는 운항대에 A라는 상병이 있었다. 내가 있던 부대에서는 후임들을 괴롭히는 악독한 선임들을 '꼽창'이라고 불렀는데 A는 꼽창 중의 꼽창이었다. 껌을 씹지 않아도 껌을 씹는 듯이 말을 했고 억양이 강하고 아주 불량스럽게 부산 사투리를 썼는데, A의 가장 악질적인 면모는 후임들을 자신의 성적인 노리개 정도로 취급했다는 것에 있다. 이미 썼던 것처럼 나는 군복무 시절에는 그래도 "표준적인 체형"보다 약간 더 몸무게가 나가는 정도였지만 내 동기 중에는 100킬로그램이 넘게 나가는 녀석이 있었다. 운이 나쁘게도 그 녀석은 A와 한 내무실을 쓰게 되었는데, 밤마다 괴롭힘을 당했다. 나는 그 괴롭힘을 성적 유린이라고 쓰더라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A는 내 동기생의 침구 옆에 자기 침구를 깔아두고서 그의 옷으로 손을 집어 넣어 가슴을 밤새 주물렀고, 그렇게 잠이 들었다. 동기 녀석은 거의 잠을 잘 수 없었다. 잠이 들만 하면 주물러 대기 시작했으니까. A는 겉으로는 그 친구를 위해주는 척 다른 선임들이 그 친구에게 청소를 시키거나 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못하도록 했다. 내 동기는 A의 보호 아래 내무반 사역이 있어도 항상 열외였다. 그리고는 밤에 가슴만 내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군대라는 곳을 저주하고, 될 수 있는 한 병역을 기피하라고 권하는 것은 이런 기억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비만은 단지 '뚱뚱하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웃옷을 벗은 채로 거울을 바라보며 느끼는 자기 혐오감, 다른 사람에게 놀림감이나 노리개가 되는 모욕감까지도 포함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A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어디선가 우연하게라도 만난다면 죽이고 싶다. 내 동기생은 일병 휴가를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부대 복귀 하루 전 날 자살했다. 


 지금 뚱뚱하지 않다고 해도 한 때 잠시라도 뚱뚱한 적이 있었던 사람은 마음 속의 '뚱보 자아'가 살아간다. 개그콘서트에서 비만인 개그맨들이 다이어트를 하는 과정이 코너로 만들어졌던 적이 있었는데 23킬로그램을 감량했다는 이희경씨나 65킬로그램이나 뺀 김수영씨나 지금은 날씬한 몸매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들도 마음 속에는 사람들에게 놀림 받고, 모욕당하고, 자기를 비하하며 상처 받은 '뚱보 자아'가 여전히 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나치게 속이 좁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여섯살 짜리 아이 친구들이 친구의 아빠인 나를 더러 "야, 돼지 아빠다"라고 하고 외치면 기분이 나쁘다. 아이들이니까 하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싶다가도 아이 친구 엄마들의 키득거림, 또래 아이들의 "와" 하는 웃음 소리, 거기에 마냥 따라 웃을 수 없는 내 아이의 뻘쭘함까지 생각하면 사실 속이 끓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아이에게는 지금까지도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명절 날 큰 댁에 가고 싶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다. 사람들은 내가 살이 더 찐 것은 아닌지 관심이 지나치게 많다. 고종 형님은 지난 10년 간 명절 첫 인사가 단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 "야, 너 살 더 쪘네. 이 돼지 봐라". 또 다른 삼촌도 마찬가지다. "왜 자꾸 살이 더 쪄?". 


 이런 말은 단지 내가 살이 쪘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조롱이 담겨 있다. 내 마음 속에 사는 '뚱보 자아'는 지금껏 팽생 이런 모욕에 가까운 평가와 조롱을 들으며 살아왔다. 살을 빼더라도 뚱보 자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살을 빼면 더 이상 뚱보 자아가 상처를 받을 일은 없겠지만 그 전에 겪었던 일들로 인해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야 한다고 하는데, 뚱보 자아는 죽여도 잘 죽지 않는다. 오히려 뚱보 자아가 사람을 죽인다. 내 동기생을 결국 죽게 만든 것도 A에게 상처 받은 뚱보 자아다. 


 아직 살을 빼지도 못한 주제에 너무 이른 예단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살'을 뺀다고 해도 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건강이 더 나빠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은 사라지겠지만 내 속에 살아가고 있는 나의 또 다른 뚱보 자아가 받은 상처는 그대로일 것이다. 뚱보 자아에게 상처를 준 어느 누구도 용서를 구한 적이 없다. 그들은 뚱뚱한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말하는 것에 어떤 잘못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민하게 굴면 덩치를 운운하면서 속이 좁다느니, 히스테릭한 뚱보라며 놀려댄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단지 비만이 단지 뚱뚱한 체형을 갖게 되었다거나 건강에 좋지 않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유방증을 걱정하고, 다른 남자가 내 가슴을 만지려 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고, 명절 때마다 내 몸에 대한 품평을 들어야 하는 모욕감과 같은 정서적 충격까지도 포함한다. 이제 뚱뚱하면서 건강까지 나빠지게 되니 주변 사람들까지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어머니는 건강식품을 사다 놓기 바쁘시고, 아이는 아빠 덕에 간이 된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해 투덜대고, 파트너는 걱정을 애써 감추고 아닌 척 용기를 주려 한다. 비만으로 건강까지 나빠지면 존재 자체가 '민폐'가 된다. 비만이 의미하는 이 무수한 것들 중에 단 하나라도 덜어야지 하는 마음에 밤 11시에 나가 동네를 걸었다. 퍼스널트레이닝을 전문적으로 하는 짐 앞에는 PT에 성공을 한 30대 중반의 양모씨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런 사진은 비포-애프터가 되어야 하는 법, 상의를 탈의한 양씨의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비포의 가슴은 내 가슴보다도 훨씬 컸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유방증일리 없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살이 빠지면 가슴도 빠질테니 수술도 필요 없다. 그래서일까? 1시간의 산책에 발걸음 유난히 가벼웠다.


2016년 3월 10일. 늦은 아침을 먹었다. 현미밥과 쇠고기를 넣은 미역국, 무채 나물을 먹었다. 돼지감자가루는 맛도 별로지만 이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빠는 돼지라서 돼지감자가루를 먹냐고 묻는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었다면 때렸을 수도 있다. 점심은 선식을 먹었다. 오후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뭔가 맛이 있는 것을 먹고 싶었는데 주변 식당을 둘러 봐도 들어갈만한 곳이 없었다. 결국 집에서 현미밥에 된장찌게와 나또, 쌈을 저녁으로 먹었다. 어제 좀 과하게 운동을 한 탓인지 허벅지 안쪽이 무척 아팠다. 몸을 풀기 위해 늦은 밤에 동네를 한바퀴 돌았다. 걷는 내내 소설가 김영하가 읽어주는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을 들었는데, 그는 걷는다는 것은 세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고, 혼자 걸을 때의 침묵이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고 또 새로운 생각을 가져다준다고 쓰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미문을 따라 침묵의 가치를 생각해보다가 도시의 11시 밤 공기를 가득 채운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내 생각과 마음을 온통 사로 잡았다. 그리고 걷기는 브르통의 말대로 내게 새로운 생각을 주었다.  여기  '육박사'라는 고기집에서 언젠가 반드시 육박사가 손질한 돼지고기를 숯불에 굽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뚱보 자아는 상처도 잘 받지만, 잘 죽지도 않고, 욕망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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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관한 일기(1) - 러닝머신을 타고

                            금욕에서 향락의 세계로


 나는 나 스스로를 꽤나 금욕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맥주를 두세달에 한 캔 정도 마시는 것이 전부일 뿐 살아오면서 취할 정도로 술을 마셔본 일은 없다. 예전에 어떤 음악가와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는데, 내가 술에 취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하자 그 사람은 내게 "당신은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없다"고 했다.(사실 나는 그 음악가와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그 음악가와 함께 했던 술자리 이야기가 나오니까 생각나는 일이 또 있는데, 사실 그 술집은 일종의 세미-룸살롱이었다. 10만원을 내면 젊은 여성 접대원들이 남자 손님의 옆에서 술을 따라줬다. 서른 중반이 될 때까지 그런 경험이 한번도 없었던 나에게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술은 조금도 입에 대지 않은 채 서비스로 나와 있는 캔 옥수수차만 몇 병을 마셨다. 음악가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10만원은 자신이 낼테니 내 옆에 앉을 '아가씨'를 데려오라고 마담처럼 보이는 여자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좋은 술이 있는 자리의 분위기를 망친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러 차례 사양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접대원이 들어와서 내 옆에 앉아 옥수수차를 채운 잔이 빌 때마다 채워주었다. 그 여자분도, 나도 서로 어색했다. 


 늘 이런 식인 나를 두고 금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금욕'이라는 말이 지닌 깊이를 모욕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금욕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술도 마시고 마음에 드는 상대와 섹스도 즐기고, 하루에도 몇 갑씩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우더라도 얼마든지 금욕적일 수 있다. 사실은 나보다 그 음악가가 더 금욕적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취할 만큼 술을 마시고 싶고, 답답한 일이 생기면 담배 한 대면 괜찮지 않을까 하기도 하고, TV에 매력적인 여자가 나오면 성적 공상이 나도 모르게 펼쳐지기도 한다. 한 때 나가던 교회에서 훈련 받았던 규칙이 교회를 나가지 않는 지금까지도 관성적으로 위태롭게 지탱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술에 취하고, 담배를 마시고, 섹스에 탐닉하는 일은 어쨌든 신에게 '죄'가 되는 일이다. 굳이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나는 아주 얕은 수준의 금욕적인 사람일 수도 있겠다.


 이제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 음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현재 심각한 비만이고, 몸이 별로 좋지 않다. 특히 상체가 비대해서 조금 걸었다 싶으면  무릎 관절이 아려온다. 나는 어릴 적부터 거의 항상 뚱뚱했다. 국민학교를 다닐 때 한 친구는(이름이 재선이었다) 나를 드럼통이라고 불렀다. 중학교를 다닐 때에는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나더러 복도를 가린다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학생 주임이었던 국어 선생은 나더러 배둘레햄이라 불렀다. 나는 실제로 뚱뚱했지만 그런 말들이 듣기 싫었다. 아니, 나는 정말 뚱뚱했기 때문에 그런 말들이 더 없이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처음의 다이어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느 여자 아이를 좋아하게 되면서 시작했다. 당시 나는 110킬로그램 정도였는데 살을 빼겠다는 일념 하에 오전에 우유팩 하나를 마시고 나서는 종일 굶다시피 했다. 우유를 마시고 나면 어김 없이 설사로 오전 내내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복부의 지방을 분해하려면 뱃살을 주물러야 한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수업을 듣는 내내 뱃살을 주물렀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몇 달이 지나자 체중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리고 수능 시험을 칠 때는 몸무게가 80킬로그램도 나가지 않았다. 어린 아이 하나가 몸에서 나간 셈이었다. (아마도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체중이지 않을까) 여자 아이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살을 빼긴 했지만 불행하게도 그 여자 아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아이의 눈에는 80킬로그램으로 살이 빠진 내가 여전히 110킬로그램으로 보였을 것이다. 군에서 제대할 때까지는 80킬로그램 정도로 몸무게가 유지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다시 체중이 불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다시 살이 쪘다가 빠졌다가 하는 일을 몇 번 반복했는데, 앞으로 쓰게 되는 글에 거기에 대해서도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다이어트는 단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성공을 했다가도 항상 끝은 실패였고, 나는 지금 여전히 뚱뚱하다. 그리고 예전에는 뚱뚱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건강 상태까지 좋지 않다. <팻>이란 문화인류학 책에서 돈 쿨릭과 앤 매넬리는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의 76퍼센트는 다이어트를 시작한지 3년 뒤에 다이어트 이전보다 살이 더 찌며, 5년 뒤에는 95퍼센트나 살이 더 찐다"고 한다. 나는 정확히 그 76퍼센트와 95퍼센트에 해당한다.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내가 특별히 음식을 무절제하게 좋아하거나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말했던 대로 나는 "얕은 수준의 금욕주의자"다. 내 파트너도, 내 어머니도, 나와 함께 밥을 먹는 그 어느 누구도 식탁에서 내가 일반의 경우에 비해 과식한다고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어김 없이 해내기 위해 노력한다. 자주 원고 마감을 어기지만, 써야 할 원고를 쓰고, 강의를 하고, 아이를 돌보고, 남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자식으로서 해야 할 일도 하고자 애를 쓴다. 나는 집에 앉아 있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라 산책을 하자고 먼저 말을 건네는 쪽은 파트너가 아니라 항상 내 쪽이다. 내가 무절제한 점이 있다면, 즉 금욕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글쓰기'와 관련한 것이다. 글을 쓰는 것과 같은 생산적인 일은 주로 밤에 한다. 황현산 선생은 자기 책에 <밤이 선생이다>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밤은 좋은 생각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을 늦게 잔다. 빠르면 새벽 2시, 늦으면 4시 정도가 일반적이다. 이런 이야기를 같은 대학 체대를 다녔던 친구에게 말하니 약간 비웃음띤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럴리가 없다. 살 찌는 것은 단순하다. 먹는 것만큼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지". 한마디로 내가 너무 많이 먹던가, 너무 게으르다는 건데 그 이야기를 듣고서 정말 그런가 하고 잠시 멍해졌다. 그리고는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열심히 산단 말인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던 기억이 난다. 나는 더 열심히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은 생산성의 많은 부분은 포기하고 그저 보잘 것 없는 '몸'을 위해 저녁 시간 종일을 보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도 함께 말이다.


 어쩌면 친구의 대답이 아니라 내 질문에 내가 살을 빼지 못하는 한가지 이유가 담겨 있다. '보잘 것 없는 몸'을 위해 '생산성'을 포기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로 여기는 자에게 몸이 주는 대답은 몸을 비대하게 만들고, 건강을 앗아가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보잘 것 없는 몸을 위해서 아무 것도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건강 관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고,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한다는 생각도 다이어트 시기를 제외하고는 한 적이 없다. 심지어 다이어트를 하는 시기에도 나는 내 몸을 '가혹하게' 다뤘다. 평상시에는 음식을 가려 먹는 것이 쿨하지 않게 느껴졌고, 다이어트 시기에는 뭔가를 먹는 것이 쿨하지 않게 느껴졌다. 소설가 김영하가 피트니스 센터는 결심 산업이라고 부르던 것이 기억난다. 나 역시 수십번의 결심으로 피트니스 센터를 끊어 놓고, 두 주를 가고 나면 더 이상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러닝머신은 너무 지루하다. 러닝머신 앞의 TV를 보며 운동하는 것은 내게 뭔가 모르게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마치 머리 앞에 나무 장대로 음식을 매달고 그것을 먹겠다고 따라가는 멍청한 동물처럼 TV를 켜놓고 걷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멍청해 보인다. 그렇다고 TV를 꺼놓고 걷자니, 러닝머신에는 보통의 걷기라면 없을 수 없는 '풍경'이 없어서 걷기 자체가 몸의 단련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고, 그래서인지 어떠한 사유도 일어나지 않는다. 걸으며 철학했다는 칸트도, 하이데거도, 니시다 기타로도 러닝머신 위에서는 '사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러닝 머신 위에서는 나 자신이 '강제되고' 있다는 불쾌한 기분 외에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가끔 바로 옆 러닝 머신을 타고 있는 사람의 걸음 속도를 힐끗 보거나, 늘씬하고 건강미 넘치는 여자의 경쾌한 발놀임을 감상하는 것 정도가 전부인 '건조한' 경험이다. 


 건강이 나빠졌다는 감각이 이제서야 생기고 나니 그 건조한 경험도 가치 있는 활동일 수 있다는 자각이 생긴다. 최근 나는 온갖 병이 내게 다 달라 붙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늘 손목이 아프고, 무릎 관절이 좋지 않고, 혈당도 비교적 높고, 혈압이 높고, 편도가 커서 열이 자주 나고, 심한 알러지에 자주 감기에 걸린다. 강의를 하고 나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강의 후 20분이라도 잠깐 자두지 않으면 다음 강의에 영향이 생긴다. 


 그러니까 나는 '살'에 신경을 쓰는 동안 '몸'에 무관심했다. 저 여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매장에서 내게 맞는 사이즈가 없다고 할 때 느끼는 불쾌감을 생각하는 것의 단 절반만큼이라도, 살 대신 몸에 집중했다면 더 좋았을텐데,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고, 불규칙하게 생활하고, 적당하게 몸을 움직이는 일에도 무관심했다. 즉 '뚱뚱함'에 대한 저항이 역설적으로 '몸'의 존재를 은폐시켰다. 나는 단지 뚱뚱해 보이지 않길 바랬을 뿐이지, 뚱뚱함이 내 존재의 물질적 기반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고는 그동안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날씬해질 수 있다면 보잘 것 없는 몸이야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식의 생각을 한 것이다. 내가 몸에 관한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살에 관한 일기가 아닌, 다이어트에 관한 일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나에 대한 일기가 아닌, 나의 가장 내밀한 부분인 나의 물질적 기반에 대한 일기를 쓰는 이유 말이다.


 나는 얕은 수준의 금욕주의자다. 소위 '죄'라고 하는, 알고보면 별 것 아닌 것을 스스로 금지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나는 금욕적이지만, 나는 생산성을 높여야겠다는 욕망과 다른 사람에게 더 낫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에서 단 한번도 놓여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내 금욕은 얕다. 이 일기를 오늘 밤에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고백하자면, 이런 일기라도 써서 글로 남겨 두지 않는다면 보잘 것 없는 몸을 위해 보내는 내 시간과 노력이 아깝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음식을 세심하게 조절하고, 시간에 맞춰 운동을 하고, 때에 맞춰 잠을 자는 것, 다시 생각해봐도 별로 쿨하지 않은데 원래 '먹고 사는 일'이라는 것은 항상 쿨하지 않은 법이다. 어떻게 보면 찌질하다. 직장에서 모욕을 당해도 그만두지 못하고, 밥을 먹으면 똥을 싸야 하고, 죽는 줄 알면서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살아가는 것은 결코 쿨하지만은 않다. 영혼으로 물질적 삶을 초월해 있다는 거짓된 종교적 관념의 끝, 실제는 어떻든 간에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자기 기만의 끝은 늙어감과는 다른 몸의 부서짐이다.


 2016년 3월 9일. 오늘은 오전에 현미에 무채가 들어간 무침, 호박전을 먹었다. 아침 식사가 늦어 점심에는 커피를 한잔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늘은 아이 생일이라 아이가 원하는 스시 뷔페에 갔다. 스테이크를 먹었고, 스시의 밥을 거의 다 덜어내고 먹었다. 방울 토마토가 오늘따라 맛이 좋아 30개는 족히 먹은 것 같다. 뷔페에 가니 본전 생각이 나 토마토라도 많이 먹자는 생각에 좀 과하게 먹었다. 토해낼까 하다가 말았다. 아이 생일날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돼지감자와 여주차를 먹고 있는데 돼지감자가루는 맛이 없다. 저녁에는 러닝머신을 40분을 타면서 라디오를 들었다. 지루했다. 그리고 다리 근력 운동을 종류대로 두세트씩 스무번했다. 진정한 향락주의자는 향락이 몸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오히려 향락을 위해서 몸을 지킨다. 사이비 금욕주의자의 세계에서 진정한 향락주의자의 세계로 가보고 싶다. 삐걱대는 러닝머신을 타고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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