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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살이의 지루함 (2016.10.21 한국일보에 쓴 글)

아이 엄마의 출산 휴가가 끝이 났다. 이제 낮 동안 아이를 돌보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아이가 깨어 있는 동안은 책을 읽어 주거나, 잠시 산책을 하고, 목욕을 시킨다. 아이가 자는 동안은 젖병을 씻어 소독하고, 설거지하고, 빨래를 널기 전 널었던 빨래를 가져와 개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담고, 쌓여 있는 쓰레기를 정리하고 밥을 짓고 요리를 한다.

<출처 한국일보>

글로 쓰면 이렇게 매끄러운 일이지만 실제로는 조금도 매끄럽지 않다. 설거지하고 뒤돌아서면 조금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머그컵이 집안 곳곳에 있다. 다시 설거지한다. 뒤늦게 아이 유치원 가방에서 간식통을 발견하면 다시 설거지한다. 그렇게 하기를 여러 번 해야 겨우 설거지가 끝난다. 세탁실도 하루 평균 10번은 넘게 드나들어야 한다. 큰 아이가 유치원 다녀온 후 벗어둔 옷을 세탁실에 가져다 둔다. 욕실 수건에 냄새가 나서 세탁실로 다시 갔다. 백일이 지난 아이가 입은 옷은 따로 세탁하기 위해 세탁실로 다시 간다.

살림살이가 이토록 지루한 반복이었을까. 나는 살림을 시작하고 나서야 아이 엄마가 내 방에 들어와 “컵 없어?” “빨아야 할 것 없어?”라고 물었던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이 엄마처럼 설거지하기 전에 먼저 각 방과 거실을 살피고 빈 그릇과 컵을 먼저 설거지통에 가져다 놓는다면 이렇게 몇 차례나 설거지를 반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빨랫감도 미리 챙겨 둔다면 몇 번만 세탁실에 들어가도 충분할 것이다. 말하자면 내게 그런 요령이 없었던 것인데, 요령이 없기 전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더 솔직한 말일 것이다. 나는 내가 쓴 컵을 설거지통에 가져다 두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그 정도만으로도 칭찬을 들었기 때문에 방마다 들어가 빈 컵을 챙겨올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최소한 집안 살림에 대해서만큼은 나는 나 자신만 생각할 뿐 전체를 보는 시야가 부족했던 것이다. 살림하기 전에는 살림은 그냥 되는대로 하면 되는 것이지 이렇게나 많은 디테일이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처럼 여러 번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일의 순서를 지켜야 한다.

얼마 전에는 아이 엄마와 크게 다퉜다. 내가 외출한 사이 집에 들어온 엄마가 내게 전화를 해 대뜸 화부터 냈다. 내가 가스 밸브를 잠그지 않은 채 나갔고, 끓여둔 국을 냉장고에 넣지 않아 모두 상해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고의로 한 일이 아닌데도 이렇게까지 혼이 나야 하는 일인지 납득이 되지 않아 같이 성을 냈다. ‘신경 좀 써 달라’는 아이 엄마의 말에 화를 내다 얼마 전에 한 잡지와 했던 인터뷰가 떠올랐다. 기자는 육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서 내게 “그러면 집안 살림에는 얼마나 동참하고 계시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육아에 동참하는 것으로 살림에 동참하고 있고, 설거지나 청소에는 별로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답했다. 집안 살림은 엄마의 몫이고, 아빠는 돈을 벌어다 주고 아이와 놀아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살림은 노동인 반면에 살림을 빼고 아이와 놀기만 하는 일은 내게는 하나의 취미 생활에 불과하다는 것은 최근에나 와서야 깨달은 것이다.

조지 소로우는 ‘월든’에서 ‘살림을 잘하는 사람’은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 잘하는 살림만이 아니라 죽은 것을 되살아나게 하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기르고 만들고 나누면서 스스로 몸과 마음과 영혼을 지켜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돈을 벌어주는 것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왔던 것은 아닐까. 죽은 것을 되살리는 것은 오직 지루한 살림살이뿐이라는 것은 그동안 알지 못했다. 오늘은 설거지하기 전에 집안부터 둘러봐야지. 내 빨래를 넣기 전에 아이 빨랫감은 없는지도 봐야겠다. 시장에 가기 전에 이번에는 내가 아이 엄마에게 물어봐야지. “마트 갈 건데 필요한 것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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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오늘 자에 쓴 졸문.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고 생각난 <테러리스트의 아들>과 엮어서 썼는데, 결말이 너무 성긴 글이 되었다. 사실 원고 마감 날짜를 착각해 급히 쓴 탓도 있는데, 하고 싶었던 말이 너무 많았던 것 같다. 이웃의 공감에 대해서도, 가해자의 가족들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도, 아이가 타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사회 곳곳에 가득한 혐오 표현에 대해서도 모두 쓰고 싶었는데, 그걸 이런 모양으로 밖에 못 써내서 아쉽다. 굳이 다시 정리해보면, 내 아이가 타자인만큼, 이웃도 타자고, 타자에 대해서는 혐오 대신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논지가 제대로 담기지 못한 듯 아쉽다. 여하간 두 책은 꼭 엄마, 아빠가 아니더라도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육아분투기, 가해자의 엄마, 가해자의 아들 (2016.8.12 한국일보에 쓴 글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반비)를 쓴 수 클리볼드는 1999년 4월 미국 콜로라도주 컬럼바인 고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인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이다. 졸업반 학생이던 딜런은 다른 친구 하나와 함께 별다른 이유 없이 학교에서 총을 난사해 학교 학생과 교사 13명을 죽이고 24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자살했고, 이후 이 사건은 조승희 총기난사 사건을 포함해 미국 내의 총기 사건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수는 사건이 일어난 후 딜런이 왜 이런 짓을 했는지를 한참 동안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딜런은 언제나 수에게 “우리 햇살, 착한 아이, 늘 내가 좋은 엄마라고 느끼게 해주던 아이”였다. 실제로 그랬다. 딜런은 졸업 후 애리조나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평소 행실도 발라 그런 낌새가 없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수 클리볼드도 보통의 엄마들보다 더 잘 준비된 엄마였다. 수는 타고나기를 걱정이 많은 편이라 늘 아이들의 건강을 챙겼고, 좋은 버릇을 가르치려 유난을 떠는 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석사 학위를 취득할 때는 아동발달과 아동심리를 공부했고, 취직한 뒤에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고 한다. 도대체 딜런은 왜 그런 비참한 사건을 일으킨 것일까. 아들을 잃고 가해자의 엄마가 된 후 17년 동안 수는 어떻게 이 비극의 어둠 속에서 살아왔을까.



이 책을 읽으며 ‘테러리스트의 아들’이라는 또 다른 책이 생각났다. 이 책은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와는 반대로, 가해자 아빠를 둔 아들이 쓴 책이다. 저자인 잭 이브라힘은 1990년 11월 뉴욕 메리어트 호텔에서 일어난 메이르 카하네 암살 사건의 범인이자 세계무역센터 폭발 테러를 공모했다는 이유로 무기징역형을 받은 엘사이드 노사이르의 아들이다. 잭은 사건이 있고 난 후 자신이 살던 집을 떠나 수차례 전학을 거듭했고, 학교에서 다르다는 이유로, 말이 없다는 이유로, 땅딸막하고, 테러리스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얻어맞고 다녔다. 아버지가 테러리스트라는 이유로 내내 차별을 당해야 했던 아이는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이브라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인 후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비극의 어둠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는 편견 속에서 폭력에 시달리고, 끊임없이 증오를 세뇌받으며 살아온 삶과 단절하고 이제는 공감이 증오보다는 힘이 세다고, 공감을 퍼뜨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런 비교는 무의미하지만, 이브라힘 가족이 겪었던 일에 비해 클리볼드 가족의 사정이 나은 점이 있다면 사려 깊은 이웃들이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잭은 아버지가 체포된 이후로 살고 있던 집을 떠나야 했지만, 클리볼드의 가족은 지금도 딜런이 살던 그 집에 살고 있다. 많은 위협과 협박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을 위로하고 지지해주는, 심지어 몇몇 희생자 가족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의 따뜻한 말, 특히 범죄자 살인자의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의 공감이 있어 “비극의 여파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 “하느님이 축복하시길”.

며칠 전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마주치는 엄마들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을 하시길래 이렇게 유치원에 자주 오세요, 아이 엄마는 무슨 일 하세요, 집은 어디세요?”. 나는 왜 이런 질문들이 두려웠던 것일까. 부족한 내 사교성 탓일 수도 있지만, 공감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잭은 “나는 아버지가 아니다”고, 수는 “나의 가장 큰 실수는 내 아들은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고 썼다. 공감은 다른 이들은 물론 심지어는 내 아이까지도 나와는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엄마들을 “맘충”으로 부르고, 장애인 교육 시설을 혐오시설로 여기는 사회였다면 클리볼드 가족은 동네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내 아버지도, 내 아이도 아니다.


육아분투기,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테러리스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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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2016-08-13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공부 중독 - 공부만이 답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엄기호.하지현 지음 / 위고 / 201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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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페북에도 몇번 쓴 적이 있는데 지난 명절에 사촌동생의 진로를 두고 작은 아버지와 의견이 충돌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스물 셋인 동생에게 계속 공부를 하라고 권했다. 지금 동생에게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은 모두 모으고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서 생활하고, 모은 돈으로 계속 공부를 하라고 권했다. 작은 아버지는 의견이 달랐다. 직접 생활 전선에서 부닥치며 배우는 것도 많고, 자립심을 키우기 위해서 용돈을 주지 않겠다고 하셨다. 나는 지금 생각해보니 작은 아버지가 느끼시기에 다소 예의 없는 태도로, 하지만 동생에 대한 진정한 애정을 담아, 답답한 마음으로 지금 자립시키면 더 멀리 못나간다고, 용돈 주시고 돈을 모으고 공부를 시켜라고 권했다. 작은 아버지는 내게 화를 내며 이렇게 물으셨다. "네가 내 노후를 책임을 질 것이냐?", "우리 가족이 합의한 이야기를 네가 무슨 권리로 흔드냐?", "네가 공부를 좀 더 했다고 네가 생각하는 공부만 공부로 아느냐? 이렇게 배우는 건 공부가 아니냐?".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작은 아버지 생각은 틀렸고,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해왔다. 공부를 더 많이 하면 확실히 더 멀리까지 가는 것이라 믿어왔기 때문이다. 내 경험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하지현 선생은 노후 자금 털어서 교육시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꼬집는다. 엄기호 선생님은 배움에는 정말 여러 종류가 있다고 강조하신다. 두 선생님이 만약 나와 작은 아버지의 대화를 들었다면 나에게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을 것이다. '당신이야말로 공부중독에 빠져 있다고, 당신의 경험치를 일반화하고 있다고, 개인의 다양한 삶을 존중하지 않고 있다'고 말이다. 어쩌면 나는 공부에 대한 물신화된 믿음으로 사촌동생에게까지 공부라는 마약을 권하고 있었던 것이었던지도 모른다. 내 작은 아버지는 거기에 비하자면 공부라는 마약, 이 책의 표현으로 하자면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존재다. 그 누구의 삶도 아닌 스스로의 삶은 선택하고 계신 것이니까. 

 이 책은 나 자신이 공부중독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진단할 수 있는 킷처럼 읽을 수 있다. 책을 읽으며 나는 내 아이에게도 공부중독을 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면서 공부만 답이라는 도그마적 해결방식에 집착하며 많은 돈을 쓰고 있는 것이었던지도 모른다. 책의 조언대로, 또 내 작은 아버지가 하시듯이 아이에게 많은 돈을 쓰는 것 대신 내 노후자금이나 마련해두는 것이 훨씬 더 아이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마약을 계속 사들일 수 있을만큼 판돈이 많지 않고, 지금은 건강도 좋지 않아 이대로가면 아이에게 얼마가지 않아 짐만 될 것 같다. 비싼 교육 대신 싼 교육, 노후대비를 위한 현실적 대책이 내 계급 수준에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보며 나는 내 계급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착각 속에서 나와 내 아이와 심지어 사촌동생까지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한가지 더, 하지현 선생님은 내 책을 상당히 기대하면서 읽기 시작하셨지만, 이미 다 아는 이야기만 하는 좀 지루한 책이라는 취지의 평을 트위터에서 하셨던 적이 있다. 나는 하지현 선생님의 독자로서 하지현 선생님의 책은 상당히 재미있고, 아주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지는 책이라 평하고 싶다. 그리고, 내 책에 대해서는 변명할 말이 별로 없다. 아마도 하지현 선생님과 같은 높은 안목을 가지신 분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사실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책에는 두 분의 대화가 아주 경쾌하게 이뤄져 있고, 정보도 풍부해 배울 점이 많다. 두분이 제시하는 해결책, 여러 사람이 문제점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확산시키면 결국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낙관적인 면도 있지만 어쩌면 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이 책의 제목인 <공부중독>처럼 어떤 의미에서는 소위 '교육 자체'를 문제시 삼는 방법 밖에는 없을 것이다. 



공부중독

공부만이 답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시나요?


이번 주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위고에서 만들고, 엄기호, 하지현 두 분이 쓴 <공부중독>이라는 책입니다. 아무래도 하지현 선생이 정신과 의사인만큼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이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어떤 정신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와 같은 조금은 개인적인 영역에 주목하신다면, 엄기호 선생은 인류학적 시각을 가지고 우리 교육 문제를 조망하는 시선을 보여줍니다. 오늘 소개해드리는 <공부중독>은 이렇게 비슷하지만 다른 시각을 가진 두 분이 서로 네 차례에 걸쳐 했던 대담을 정리한 책입니다. 두 분 모두 우리 사회가 지금 ‘공부중독’에 빠져 있다고 진단합니다. 


2. ‘공부중독’이라면 좋은 것 아닌가요? 다들 공부에 중독되고 싶어도 중독되지 않아서 걱정인데 공부에 중독된다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이 책에서 하지현, 엄기호 선생은 우리 사회의 공부 중독이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합니다. 먼저 두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 모두가 ‘공부’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공부가 우리의 삶을 식민화한다는 거죠. 예를 들면 요즘 많은 대학에 실용음악과가 있는 것 아시죠? 아이들이 TV에 연예인이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런 학과들이 인기가 좋아졌는데, 이 책에서는 그 분야에서 전문적으로 일하면서 배워도 되는 것을 굳이 대학이라는 곳에서 배우려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진단합니다. ‘뭘해도 대학은 나와야지’라는 것이 마치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의 신념처럼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예전에는 도제시스템으로 가능했던 일이 이제는 학교 시스템으로 대치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이 학교가 되어버린 건데요, 네일아트 학원, 바리스타 학원도 일종의 그런 것이라 할 수 있구요, 삶의 전 영역이 모두 ‘공부’를 통해서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이 책은 ‘식민화’라고 하는 거죠. 재밌는 이야기 중 하나가 연극영화과였는데요, 연극영화과의 신입생 입학정원이 대략 3천명에서 5천명 정도인데, 졸업한 친구들의 가장 큰 수입원은 놀랍게도 배우나 연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연기학원강사라고 합니다. 연극영화과 입학 경쟁률이 70:1, 100:1이니까 학원이 되는거지요. 심지어 JYP, YG, SM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기 위한 학원까지 따로 있다고 합니다. 


3. 예전 같으면 공부로 해결할 일이 아닌 것을 모두 학원이나 학교에 가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두고 ‘공부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진단하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도 도제식으로 배우는 것이나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나 모두 똑같은 ‘공부’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모두 공부라는 점은 같은데, 이 책에 이런 예가 나옵니다. 만약에 제가 음악하겠다고 집에서 혼자 기타치고 있으면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가능성이 크지요. 그런데, 학교를 다니고 2년 공부해서 자격증을 얻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스스로도 앞날이 불안했던 차에, 일단 2년동안은 공부를 하는 거고, 주변에도 내가 지금 뭘하고 있는지 이야기하기가 훨씬 더 쉬워집니다. 학교 제도가 주는 안정감에 요리사가 되고 싶었던 사람, 음악하고 싶었던 사람, 커피 만들고 싶었던 사람도 모두 학교에 들어가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같은 공부라고 해도 같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학교에서나 학원에서 배우는 사회가 되면 다양한 형태의 배움 방식이 출현하지 못하게 됩니다. 학교나 학원에서 공부하는 방식대로만 배워야 하는데, 모든 것을 학교, 학원 같은 제도에서 가르치다 보니까 삶이 획일화되어 버리는 문제가 생긴다고 보는거죠. 


4. 네, 하긴 학교나 학원에서 가르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천편일률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긴 합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가르칠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실제로 직업현장으로 나가야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거든요.


이 책에 재밌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요즘은 연애도 배워서 한다고 합니다. 연애연구소를 운영하는 분이 주로 하는 강의가 “연애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라는 제목의 강연인데, 가장 반응이 좋은 직업군이 뭔지 아세요? 바로 법조계와 의료계라고 해요.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때 저렇게 해라’라고 가르쳐주면 반응이 아주 뜨겁답니다. 법조인들과 의료인들은 소위 ‘공부’를 잘했던 사람들이니까 연애도 이런 공부 형태로, 딱 매뉴얼대로 하는 것을 선호하는 거에요. 심지어는 교육이 끝나고 나서 어떤 분이 이런 질문도 한다고 합니다. “저, 이런 거 질문해도 될까요? 문자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요, 이건 거절의 의미일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가장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직업군은 어딘지 아세요? 대형마트 직원분들이랍니다. ‘이런 뻔한 걸 왜?’ 이런 반응이라는 거죠. 이분들은 늘 사람을 대하고 있으니 연애기술이나 사람 대하는 기술 같은 걸 가르치는 게 그냥 웃긴 거에요. 이런 건 경험을 통해, 삶을 통해 배워야 하는거니까요. 


5. 아, 그러니까 직접 경험과 삶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까지도 단지 ‘공부’를 통해, 잘 정리된 매뉴얼을 통해 배우려고 하는 것을 두고 ‘공부중독’이라고 표현하는 거군요. 


네, 바로 그겁니다. 사실 연애가 매뉴얼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연애를 해본 분들은 누구나 공감하시겠지만 막상 남자와 여자가 만나 연애한다는 것은 매뉴얼처럼 그렇게 매끄럽게 되지 않습니다. 제가 지난 주에 여행을 가실 때 족보를 따라다니면서 여행하시지 말고, 길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해보며 여행해 보시라고 권해드렸는데요, 여행만 하더라도 계획대로, 미리 공부한대로 꼭 그렇게 되지만은 않습니다. 삶은 공부하며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울퉁불퉁하거든요. 

뭘 하든 아직 공부하고 있다면 용서가 되는 사회, 모든 것을 공부로 만들어 버리는 사회, 삶의 생생하고 구체적인 배움은 사라지고 매뉴얼만 따라다니는 사회를 이 책은 공부에 중독된 사회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6. 음,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왜 이런 공부중독에 빠지게 된 것일까요? 저자들은 어떻게 진단하고 있나요? 


이 책의 저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학교에라도 소속되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끼는 심리도 공부중독의 이유가 되고, 또 우리나라 486세대 부모들으 경험도 이유라고 합니다. 486세대 부모들은 공부를 잘하면 잘살 수 있다는 생각이 자기 몸으로 체득된 세대거든요. 무엇보다 제가 인상 깊었던 분석은 저자들은 우리 사회가 ‘공부가 가장 공정하다’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공부중독이 왔다는 진단이었습니다. 공정함에 집착하다 보니까 공부 중독이 왔다는 것이죠.


7. 공정함에 대한 집착 때문에 공부 중독이 왔다는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엄기호 선생이 지방의대에서 강의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엄기호 선생이 보기에 지방의대생들은 완전히 격리된 학생들이라는 거에요. 자신들은 엘리트이기 때문에 이 대학의 다른 학생들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여기는 거에요. 자기들끼리만 동아리를 만들고, 만나고, 헤어지고 합니다. 이런 식의 선민 의식을 가지면 보상 심리도 강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신과 비슷한 수준으로 노력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자신과 비슷한 보상을 받게 되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은 “왜 비정규직에게 정규직을 쉽게 주냐?”고 합니다. 자기는 죽을 노력을 해서 정규직이 되었는데, 왜 비정규직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비슷하게 대우하냐는 거죠. 서울대생들끼리도 혹시 계급이 있는 것 아시나요? 어떤 전형으로 입학했는지 따라 차별이 있는 거에요. 상대적으로 수학능력시험 점수를 높게 받아 들어온 학생들이 학교장 추천에 의해 상대적으로 쉽게 들어온 학생들을 차별합니다. 지균충이라고 부르죠. 

그러니까 나눠 먹을 파이의 크기는 점점 줄어드는데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공부에 집중하게 됩니다. 다른 것보다는 비교적 공부가 공정한 게임이라는 생각이 공유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일단 자기 몫의 파이를 갖게 되면 공정한 게임인 공부에서 패배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8. 교육 문제라면 입시 문제도 빼 놓을 수 없는데 이 책에서는 어떻게 진단하고 있나요?


금방 우리나라 공부 중독이 486세대 부모들에 의해서 생겨난 점도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486세대 부모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성공하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자식들에게도 공부를 많이 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이 책의 진단에 따르면 486세대 부모들의 그 경험은 지금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가능했던 것에 불과했다고 해요. 486 부모들이 살던 80년대 후반은 아시다시피 우리나라가 고도로 성장하던 때였구요, 대학졸업자보다 일자리가 더 많았고, 서울도 점점 커져서 부동산 부자가 된 사람도 많았던 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경기 침체가 오래 지속되고 있고, 일자리도 점점 줄고 있죠. 그러니까 공부를 잘하면 성공한다는 공식은 사실 더 이상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울산, 창원 지역 노동자 부모들 중 상당수는 자식들을 전문대에 보내고, 지방 4년제에 보내면 중퇴를 시키는 경우도 많다고 해요. 4년제 대학을 나오면 중공업, 자동차, 조선소 노동자로 못가거든요. 더 이상 좋은 대학 나온다고 더 잘사는 것은 아닌 사회가 된 것이죠.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 중 졸업을 유예한 학생이 50%가 넘는다고 합니다. 서울대 나온다고 성공은커녕 취업도 보장받기 어려워진거죠. 


9. 정리해주시죠.


이 책은 현재 우리나라 입시판을 두 가지로 비유합니다. 하나는 도박판이구요, 다른 하나는 다단계 사업입니다. 먼저 다단계부터 말씀드리면요, 다단계라는 건 전국민이 다하면 망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 중 다수가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대학 나온다는 것이 전혀 장점이 될 수가 없는 사회가 된거에요. 박사가 너무 많아서 박사 학위만으로는 교수가 될 수 없는 사회가 된 것도 다단계와 비슷한 논리입니다. 다른 하나는 도박판인데요, 카지노에서 돈을 따는 사람은 프로겜블러도, 딜러도 아니고 판돈이 무한인 사람, 예를 들면 아랍 왕자가 결국 돈을 쓸어간다고 합니다. 지금 강남의 많은 사람들이 한등급 높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서 학원에 많은 돈을 쏟아붓는데, 점점 더 판돈이 커져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 판돈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이 끝까지 싸우게 되는데 판돈이 부족한 사람은 결국 노후 자금까지 깨면서 이 도박을 한다고 해요. 대기업 부장 뿐 아니라 의사, 변호사가 되어도 미래는 불확실한데 이런 도박을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진단합니다. 

이 책은 공부에 중독된 우리 사회의 모습, 원인, 해결 방법을 제시하려는 책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살라’는 메시지로 읽힙니다. 배운다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가르침에 지배되는 일이기도 하구요, 배움에 집착하다가 자신의 노후의 삶도 어렵게 되고, 자식의 삶도 차별 의식에 삐뚫어지게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배움이나 공부를 모두 거부하는 게 아닙니다. 이 책을 통해 진정한 배움, 공부란 무엇인지 되새겨 보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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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부 다 멸종으로 끝나?


얼마 전 아이와 읽던 책의 한 부분이다. “지금은 늑대가 너무 많이 죽어서 늑대를 볼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어요. 몇몇 사람들은 늑대가 멸종될까 봐 걱정했어요”. 아이에게 이 부분을 읽어주자 아이는 “또 멸종이야?”라며 고개를 들었다. “또 멸종이라니?”, 내가 되묻자 아이는 “말리 코끼리도 원래 1000마리나 됐는데 지금은 400마리도 안 남았대. 지구가 더워져서. 지난 번에 읽었던 책에는 바다 거북도 바다에 기름이 퍼져서 많이 죽었대. 왜 전부 다 멸종으로 끝나?”. 그러고 보니 그랬다. 아이와 함께 읽었던 동식물 관련 책은 언제나 멸종으로 끝난다. 동물은 위기에 처해있고, 자연은 더러워졌고, 지구는 병이 들었다.

"아빠, 왜 전부 멸종으로 끝나?"


영국에 사는 데이비드 본드라는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자연’에 대한 이런 이미지들을 바꿔보고 싶어했다. 자신의 두 아이가 스마트 기기에 중독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아이들이 자연으로 나가지 않는 이유가 ‘자연’에 대한 아이들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두 아이들에게 자연은 따분하고, 지저분하고, 썩어가는 공간이다. 그는 자신의 두 아이 뿐 아니라 영국의 대다수 아이들이 가진 이런 생각을 바꿔보기 위해 ‘Wild Thing Project’를 시작했다. 우선 그는 폭스바겐과 같은 대기업의 브랜드를 구축해온 마이클 울프의 조언에 따라 아이들이 ‘자연’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브랜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사람들이 어떤 디젤 자동차에 대해 ‘클린 디젤’, ‘친환경’, ‘경제성’과 같은 긍정적 이미지를 가진다면 구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연비를 속였음’, ‘배출가스 측정을 조작함’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가진다면 구매로 이어질 가능성이 낮을 것이다. 데이비드는 ‘자연’이란 브랜드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 과학자와 환경보호활동가, 작가들을 인터뷰했다. 이들에 따르면 자연은 아이들을 더 행복하게 하고, 자연을 더 사랑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야생(wild)은 의지(will)의 원천이다. 데이비드가 ‘자연’을 새로운 이미지로 브랜드화하고 아이들을 자연으로 데려나가기 시작하자 ‘자연’이라는 말에서 따분함, 지루함, 불결함을 떠올렸던 아이들도 표정이 하나같이 밝아졌다.

영국 아이들에게도 ‘자연’은 인기가 없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단지 쥐와 뱀과 거미가 있는 무서운 곳이고, 너무 춥고 더워 불편하고, 해야 할 것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지루하고, 신발에 진흙이 묻기도 하고 동물이 썩어가는 것도 보이는 더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데이비드 본드처럼 사람들이 ‘자연’이라는 브랜드를 잘 구축하여 긍정적인 이미지를 갖도록 한다면 쉽지는 않겠지만 아이들을 자연으로 데려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처한 상황은 이와 다르다. 우리 아이들이 가진 자연에 대해 갖는 무서움, 불편함, 지루함, 더러움을 마이크 울프와 같은 브랜드 대가가 와서 모두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꿔준다고 해도 아이는 자연으로 나갈 수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해 자연으로 나가도록 허락할 수가 없다. 며칠 전 아이가 쓴 그림일기를 살펴보니 날씨란에 맑음, 흐림, 비, 눈, 안개가 적힌 날은 며칠되지 않았다. 대신 ‘미세먼지’가 적힌 날은 절반이 넘는다. 날씨란에 미세먼지라고 적은 날, 아이는 심심하고, 답답하고, 짜증났고, 집에서 낮잠을 잤다고 썼다. ‘야생’은 고사하고 마음껏 달리지도 못하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어떤 ‘의지’를 품고 이 사회에서 자라날 수 있을까.



배출가스 측정을 조작한 자동차 회사는 조작 사실이 드러난 직후 대규모 할인을 실시해 조작이 알려지기 전보다 판매량이 더 늘었다고 한다. 배출가스 측정을 조작했다는 것이 드러나자 소비자들이 ‘미세먼지’, ‘부도덕’, ‘범죄’ 등 부정적 이미지를 대신해 ‘합리적 가격’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갖도록 재빠르고 영리하게 브랜드를 관리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상아를 얻으려 코끼리를 죽이고, 가죽을 얻으려 늑대를 밀렵하는 것과 몇 푼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런 회사의 자동차를 사는 것은 얼마나 다른 일일까? 동물들에게만 닥친 일이 아니다. 지금 아이들도, 어른들도 온갖 위기에 처해 있다.


한국일보 오늘자에 쓴 글이다. 분량이 너무 많았는지, 글의 마지막 문단은 잘린 채로 기사가 나갔다. 아쉽다. 

여기에 원글을 옮겨둔다. 관심있는 분들 두 글 모두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http://www.hankookilbo.com/v/043033ac2dcd4ce6b6eba657842a8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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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시간, 두 시


 아이가 세 살 때였던 것 같다. 세 살 아이는 “언제?”라고 물음에 항상 “두 시”라고 답했다. “할아버지는 언제 왔어?”, “밥은 언제 먹었니?”, “아빠 언제 올까?”, 어떤 질문을 해도 언제나 대답은 “두 시”였다. 아이 대답이 웃기기도 했지만 그걸 알고도 매번 묻는 내가 우습기도 했다. 아이가 두 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대답했을리 없다. 아마 아빠나 할머니에게 들어서 ‘두 시’라는 것이 ‘언제?’라는 질문에 호응되는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겠지만, 세 살 아이에게는 시간 관념, 아니 숫자 관념이 없었다. 하나, 둘도 모르는 아이가 한 시, 두 시를 알 리 없을테니까. 그런데 왜 하필 ‘두 시’였을까? 한 시, 세 시, 네 시, 열두 시 등 다른 시간도 얼마든지 있는데 두 시만을 고집스럽게 되풀이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추측건대 아이의 엄마가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시간이 두 시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이가 보채거나 엄마를 찾곤 하면 나는 습관적으로 “엄마 두 시 되면 온다”고 달래곤 했다. 아이가 이해하리라 생각하고 했던 말이 아니다. 보채고 우는 아이 앞에서 당황한 내가 스스로를 격려하려고 한 말이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이가 ‘두 시’로 답하는 다른 이유는 찾지 못하겠다. 


 아이 엄마가 미국으로 유학길을 올랐을 때 아이를 미국에 데려 간 적이 있다. 열흘 간의 달콤한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날, 지하철을 타고 공항으로 가는 내내 아이도 말이 없었고 아이 엄마도 말이 없었다. 아이도 큰 짐들을 보고 눈치를 채 버린 것일까. 공항에서도 수속을 밟는 내내 엄마에게 안겨 떨어지려 하질 않았다. 나더러 “아빠 가. 아빠 싫어. 엄마 좋아”라며 응석을 부렸다. 공항 검색대에 길게 늘어진 줄 앞에서 아이에게 “이제 아빠한테 안기자”라고 했다. 뭔가 이해하고 있는 듯 엄마 품에서 내게로 오는 아이 모습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에 내가 먼저 울고 말았다. 아이 엄마도 곧장 따라 흐느끼기 시작하자 아이가 “엄마… 엄마…”라고 하면서 평소와 다르게 입을 꼭 다물고 울기 시작했다. 아! 지금도 아이의 그때 울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우리가 이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수십 번을 되물은 것 같다. 울면서, 달래면서, 파트너에게 손을 흔들면서, 공항 검색대를 빠져나왔다. 얼마 남지 않은 탑승 시간 때문에 탑승구를 향해 아이를 안고 달려가면서 아이에게 말했다. “우리 엄마 만나러 다시 오자. 언제 또 올까?” 이번에도 아이 대답은 “두 시에”였다. 아, 두 시! “응, 우리 두 시에 엄마 보러 다시 오자”. 


 아이에게 두 시는 엄마의 시간이었다. 기다리던 엄마를 만나는 시간, 엄마가 오기로 한 약속의 시간이 ‘두 시’였다. 실제로 엄마가 집에 오는 시간이 정확히 두 시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었다. 다시 엄마를 만나러 미국에 가는 시간도 꼭 두 시일 필요가 없었다. 엄마가 두 시에 오든 세 시에 오든, 아이에게는 엄마가 오는 시간이 바로 ‘두 시’였다. 마치 아침은 여섯 시나 일곱 시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뜰 때 시작되는 것처럼, 아이의 시간도 엄마의 시간에 따라 흘렀고 해가 반드시 뜨는 것처럼 아이와 엄마는 항상 ‘두 시’에 재회했다.


 “댁의 아이가 반에서 좀 처진대요”. 얼마 전 학부모 모임에 나갔다가 들은 말이다. 순간 어질했다. 집에 돌아와 일곱 살 아이를 영어학원에 보내야 할까, 이제는 축구 교실에라도 보내고, 노는 것도 ‘뒤처지지 않도록’ 놀이교실을 보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동안 영어도, 수학도 안 가르쳤으니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축구교실 대신 친구들과 축구하면 되고, 시간이 지나면 한글 맞춤법도 알게 될테고, 사칙연산 정도는 스스로 해내는 성취감 정도는 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뒤처진다고 하니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초조한 마음으로 학원을 알아보는 내게 아이 엄마가 말했다. “여보, 지금 좀 뒤처져도 돼. 금방 따라갈거야”. 나는 아이 엄마를 답답하다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자신감을 잃지 않을까? 언제 따라갈 수 있을까?”, 아이 엄마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두 시에”,


 아이가 엄마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믿었던 것처럼, 그래서 엄마의 시간, 약속의 시간, ‘두 시’를 기다린 것처럼 나도 아이의 시간을 그렇게 기다려야 한다. 서쪽보다 동쪽에 아침이 먼저 온다고 해서 서쪽에 아침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아이가 뒤처진다고 해서 자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무리 서둘러도 아이는 아이의 시간이 되어서야 무서워 오르지 못하던 미끄럼틀 꼭대기에 올라가고, 밀어주지 않으면 타지 못하던 그네를 혼자서 타기 시작하고, 말을 하고, 글을 깨치고, 숫자를 알게 되지 않았던가. 아이들은 이 모든 일을 자신의 ‘시간’에 해냈을 때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자신감은 남들보다 빨리 갈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조금 늦더라도 스스로 해낼 때 생긴다. 어쩌면 나는 ‘뒤처진다’는 말에 그만 불안해져서 조금 빨리 영어를 말하고 셈을 하는 것과 아이의 자부심을 맞바꾸려 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네 발 자전거에서 보조바퀴를 떼어 버리고 처음으로 두 발 자전거를 탄 날, 아이의 얼굴은 환하게 빛났다. 아빠가 밀어주던 세 발 자전거를 타던 아이가 어느 새 두 발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보니 아이의 시간을 기다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움베르트 에코는 “신은 달팽이 같다”고 했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메시아가 오기까지 왜 그토록 긴 시간이 필요했단 말인가. 신을 믿는다는 것은 그 더딤을 인내하는 것이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내 아이의 더딤을 답답해하기도 하고, 불안해하고, 그러면서도 그 더딤을 기다리려는 초조한 몸부림을 거듭하고... 밤이 아침을 기다리듯,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듯, 나도 그렇게 아이의 때를 기다리리라. ‘두 시’ 아니 ‘세 시’까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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