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식 보편주의라는 낡은 배>

테세우스는 하반신은 소이며 상반신은 인간의 몸을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기 위해 크레타섬으로 모험을 떠났다. 미노타우로스를 제압한 후 그는 이제 고향으로 귀환해야 한다. 편의상 테세우스가 탄 배는 부품(P) 10개로만 만들어진 것이라 하자. 배가 부서지면 파손된 부품을 미리 준비해 둔 새 것으로 교체한다. 테세우스는 T0 시점에 출발했고, T1 시점에서 파손된 P1 부품을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했다. T2, T3를 지나 T10 시점에 이르면서 P10 부품까지 완전히 교체했다. 그렇다면, T0에 테세우스가 탄 배와 T10에 테세우스가 탄 배는 같은 배라고 해야 할까, 다른 배라고 해야 할까? 이것이 ‘테세우스의 배’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패러독스다.

먼저 T0의 배와 T10의 배는 ‘다른 배’라고 대답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두 시점의 배를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배의 부품이 교체되는 T1부터 이미 다른 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지금도 나는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가 새로 만들어지는 등 구성요소가 계속 바뀌고 있으니 나 역시 계속 다른 존재가 되고 있는 것인가?”하고 반박하면 이들은 놀랍게도 “같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답한다. 사실 이 문제에서 두 시점의 배가 ‘다른 배’라고 주장하는 것이 ‘같은 배’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같은 부품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면 같은 배라고 말할 수 없다고 끝까지 우기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품 하나가 달라진다고 해서 그 배가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T0와 T10의 배를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우선 어떤 이들은 이 배의 부품이 달라지긴 했지만 두 시점에서 테세우스의 귀환이라는 ‘동일한 목표’가 있었다는 것을 같은 배로 볼 수 있는 근거로 든다. 하지만 만약 돌아오는 길에 테세우스가 죽거나 테세우스가 만약 귀환하지 않고 다시 크레타섬으로 갔다면? 이들은 목표가 달라지는 경우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또 어떤 이는 테세우스의 배를 구성하는 부품은 매 시점마다 바뀌고 있지만 ‘테세우스가 탄 배의 이데아’가 모든 시점의 배가 같은 배라는 것을 보증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만약 선원 중 한 사람이 아테네로 도착 후 자기 집 앞마당에서 교체된 낡은 부품을 조립해 배를 건조했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 테세우스가 타고 온 배와 선원이 만든 배 중 어느 것이 ‘테세우스가 탄 배의 이데아’에 더 가까운 배인지 이들은 설명하지 못한다.


‘T0와 T10 시점의 테세우스의 배는 같은 배다’라는 생각이 우리의 직관에 부합하지만 그 근거를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왜일까? 현대철학자들은 우리가 이 문제에서 ‘운동’을 무시했기 때문에 패러독스에 빠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들에 따르면 테세우스의 배는 T1, T2 각각에서 정지된 채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T1에서 T2로 이동하는 과정 혹은 T1에서부터 T10으로 운동하는 과정에 존재한다. 즉, 배는 운동하고 변화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배가 운동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T1에서 T2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그 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테세우스의 배’의 자리에 ‘인권’, ‘자유’를 넣어보자.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시기의 인권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인권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인권’과 ‘중동-아시아-아프리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권’은 정말 같은 인권일까? 지금 ‘영국의 기득권층이 지지하는 자유’와 ‘난민들이 찾아나선 자유’는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이 모든 질문에 대해 같은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에서 봤듯이 인권과 민주주의의 이데아도, 동일한 목표도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동안 유럽 세계는 자신들을 인권,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의 대변자로 내세워 왔다. 하지만 난민 문제에 대해 유럽 세계가 보여준 태도는 그들의 인권이 단지 자신들의 권력과 정책을 정당화하는 레토릭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한 영국은 그동안 의회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해왔지만 이번 브렉시트 결정은 그들의 민주주의가 단지 자국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이처럼 유럽인들이 인권, 자유, 민주주의를 내세워 추구한 목표는 제3세계인들이 추구해온 목표와는 달랐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 민주주의, 자유와 같은 보편적 가치는 낡아버린 부품이 되어 버린걸까?

테세우스의 배가 운동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인권, 민주주의 역시 정지해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도 끊임 없이 운동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낡아버린 부품은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이러한 가치들을 지배해온 ‘유럽 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테세우스의 배의 낡은 부품을 교체하듯 낡아빠진 유럽식 보편주의를 변화시켜야 하는 역사적 책임이 주어져 있다. 즉 영국의 EU 탈퇴로 인해 흔들리고 있는 ‘유럽식 보편주의’를 중동-아시아-아프리카-난민을 모두 포함하는 ‘새로운 보편주의’로 대체해야 할 책임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느 시점에 와 있는 것인가? 브렉시트는 낡은 부품이 교체될 때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유럽식 보편주의’라는 낡은 부품을 ‘새로운 보편주의’로, 형식적 민주주의를 ‘새로운 민주주의’로 교체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세계화를 ‘새로운 국제주의’로, 이익 추구의 자유를 ‘새로운 자유’로, 난민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인권’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운동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말이다.

대구신문에 쓴 글이다.(2016.6.30)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를 단서로 삼아 브렉시트 이후 인권, 민주주의, 자유와 같은 소위 '보편적 가치'의 존립에 대해서 써본 글이다. 정교한 글은 못되지만, 나는 이 글에서 브렉시트 이후 보편주의를 회의하는 움직임을 경계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무엇보다 유럽식 보편주의를 넘어서는 보편주의, 요컨대 월러스틴이 말한 바 보편적 보편주의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이를 이뤄가려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세상은 지금 사이비 보편주의로 가득하지 않은가!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는 보통은 '자아의 아이덴티티' 문제와 관련해 자주 논의된다. 나는 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베르그송의 관점, 즉 운동성 자체가 동일성을 가져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지한다. 운동 자체가 존재라면, 그 존재는 뭔가 '흐린 존재', 운동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 '자아'에 대해서도, '자유'나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자유, 민주주의, 인권 모두 '투명한 개념'이 아니라 '흐린 개념'일 수밖에 없다. 오직 흐린 개념을 불투명하게나마 유지시키려는 운동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쓰고 싶었다. 새로운 보편주의라는 흐린 개념을 쓴 것도 그런 이유다. 문제는 그런 생각을 글로 옮겨 쓰는 것에는 성공한 것 같지가 않다. 성긴 생각을 거친 글로 표현했지만 섬세하고 눈 밝은 독자들에게는 작은 의미라도 있는 글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오늘자, 한겨레 정의길 기자가 쓴 <브렉시트 긍정적으로 보기>는 내 논지와 연결된다. 물론 훨씬 더 실증적이라 참고할 점이 많다. 일독을 권하며 링크한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0304.html

2016.7.1 추가
정의길 기자의 글을 추천한다고 쓰자, 한 선생님께서 이런 글을 남겨주셨다. 이 기사를 읽으실 분을 위해 옮겨 놓는다.
"정의길씨의 글은 미국 프레임을 강조하다보니 오류(영국에 중동난민이 적다니요. 지금 영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프랑스 칼레로 모여드는 난민들, 도버해협을 건너는 이들의 에피소드가 영국노동자 심정적 공포의 워천인데)가 있어 아쉽습니다.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을 주문하며 왜 시라아 내전의 수백만 자국민 학살의 책임을 뭍는 일은 거론하지않는지. 진정 제삼세계인의 인권이나 난민을 고려하는 제안이라면 이 어려운 문제를 먼저 직시하는 것이 옳다고봅니다. 미국과 미국의 하수 영국, 서유럽의 제국주의자 독일이라는 프레임을 관철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전 잘 모르겠어요. 이 기자분 유럽 관련 글 읽을 때 자주 드는 생각."



대구신문 링크
http://www.idaegu.co.kr/news.php?code=op03&mode=view&num=201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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