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모삼


아이가 신발을 벗자 집에는 발냄새가 진동한다.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입고 있던 옷이 땀에 절었고 머리카락까지도 뻑뻑하다. 불결한 냄새를 풍기는 아이는 이번에도 “목욕하기 싫어”라며 억지를 부린다. “그러면 우리 목욕하지 말고 세차하자.” “아빠, 내가 차도 아닌데 어떻게 세차를 해?”라며 투덜대지만 아이의 눈이 세차라는 말에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첫 공정은 충분히 물을 뿌린 후 광택기를 이용해 자동차의 때를 제거해 주는 것이다. 아이의 광택기는 아빠의 손에 끼워진 노란색 이태리 타월이다. 이때 효과적인 광택이 되려면 자동차의 컴파운드라 할 수 있는 비누를 조금 바르는 게 좋다. ‘위이잉~’ 하는 광택기 소음은 사실 아빠의 입에서 나는 소리다. 아이는 아빠의 눈과 코를 스위치 삼아 광택기의 세기를 조절한다. 배터리가 방전되었다고 하면 충전 입력 단자인 아빠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고 충전을 시작한다. 세차를 하다 보면 하기 전엔 몰랐던 내 차의 흠집도 알게 되기 마련이다. “아빠, 광택기 돌리고 나면 흰색 차가 될 수 있을까?” 수영하러 갔다 친구들이 아이의 피부가 검다고 조금 놀렸던 모양이다. 세차를 하고 광택을 낸다 해서 검은 차가 흰 차가 될 리 없는 법, 아이에게 평소 지론대로 ‘자동차는 검은색이 멋있어’라고 해 놓고선 광택기를 보다 힘껏 돌린다. 광택 작업의 마지막 공정은 왁스칠이다. 보디로션을 왁스 삼아 아이 몸에 펴 바르자 검은 피부가 반짝반짝 윤이 난다. 식탁은 아이의 주유소다. 엔진에 있는 때를 벗겨 내야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며 아이가 평소 잘 먹지 않던 배추쌈도 건네 보았다. 아이는 말이 많아도 자동차는 말이 없다. 주는 대로 잘도 받아먹는다.


하긴 늘 그랬다. 잠은 자지 않겠다는 아이가 ‘충전’은 하겠다고 했다. 피아노 연습은 싫다면서 피아노 특공대 훈련은 좋단다. 이런 아이를 보며 아이 엄마는 ‘조삼모사’라며 바보 같다고 놀리지만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는 것은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는 것과 확실히 다르다. 수량은 같지만 의미가 다르고,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대상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모두 금성을 부르는 이름들이지만 금성과 샛별은 다르고, 샛별과 개밥바라기도 다르다. 새벽 동쪽 하늘의 저 별과 저녁 서쪽 하늘의 저 별이 어찌 금성과 같단 말인가. 그래서 조삼모사도 ‘조사모삼’과 다르고, 목욕도 ‘세차’와 다르며 잠과 ‘충전’도 다르다. 인간이 말 한마디에 달라질 만큼 소심한 까닭은 우리 모두 조금씩은 시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밤 충전을 마치면 세차를 하러 다녀와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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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서재 (2) 정보를 버리기,  책을 읽어버리기

-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한 주에 한 번 지역 라디오 방송에 나가 책을 소개하고 있다. 책 한 권을 정해 진행자와 15분 정도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다. 아마도 이 방송의 주청취자는 운전 중인 이들일텐데, 이들이 복잡한 교통상황을 읽어가며 도로를 누비면서 동시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책 소개에도 집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가는 프로그램의 작가는 항상 내게 ‘좀 더 쉬운 책’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한다. 책 소개도 쉬워야 하고, 소개하는 책도 쉬워야 한다. 물론 나 역시 쉽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처음 방송에 나가 소개했던 책은 서경식 선생의 <내 서재 속 고전>이라는 책이었다. 작가와 PD는 책이 어려운 편이기는 했지만 소개는 쉽게 해서 다행이라고 피드백을 해줬지만, 다음 방송부터 소개해 줬으면 하고 예로 든 책은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 받을 용기>와 같은 책이었다. 청취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베스트셀러나 상대적으로 가벼운 에세이를 소개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라디오의 청취자들이 쉬운 책에 더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누군가 소개까지 하며 알려주지 않더라도 이미 다 아는 유명한 책이나 예비적인 준비가 없어도 읽을 수 있는 쉬운 책들은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해도 방송에서 소개하고 싶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청취자들이 항상 쉬운 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믿는 쪽이다. 조심성이 없는 비교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기 있는 최신가요보다 바흐의 음악을 어렵게 느낀다. 하지만 바흐의 음악을 듣는 것은 최신가요를 듣는 것과는 다른 ‘특별한 경험’으로 여기지 않는가. 쉬운 책도 당연히 좋은 책일 수 있지만, 쉬운 만큼 사실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신문에 쓰는 글도 마찬가지다. 내가 쓴 칼럼이 신문에 실리고 나면 '지나치게 철학적이다'라는 평을 한번은 듣게 된다. 여기서 ‘철학적’이라는 것은 칭찬이 아니다. 담당 기자가 ‘어렵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일 뿐이다. 얼마 전, 한 신문사에 원고를 보내자 이번에도 기자는 '너무 철학적'이라고 했다. 사실 내가 보낸 원고의 글감이었던 황현산 선생의 <우물에서 하늘보기>는 내가 쓴 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결코 쉽게 읽히지만은 않는 시화(詩話)들은 일간지에 선생이 4000자 분량으로 두 주에 한 번씩 1년여간 연재했던 글이다. 



그러니까 소위 ‘쉽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이 필요하다. 이미 탄탄한 독자층이 확보되어 있는 논객이나 작가, 직업적으로 어려운 말을 해도 좋다고 암묵적인 허락을 받은 경우라 할 수 있는 교수나 변호사, 평론가들이라면 굳이 글을 쉽게 쓰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이 쓰는 글에 앞서 있는 그들 존재가 이미 독자들을 설득하는 힘이 있다. 내가 글을 쉽게 써야 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말해, 나는 그런 자격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어렵게, 현학적으로 쓰지 않는다. 단지 30대 남성, 지방 거주자이자, 독립연구자라는 내 위치에서 보이는 세계를 드러내고, 이 세계에서 살아가며 겪게 되는 어려움을 글로 드러내기 위해 노력해 왔을 뿐이다. 나는 가능한 한 쉽게 쓰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노력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문장을 쉽게 풀어내는 재주의 부족 탓이 크겠지만, 어렵다는 반응을 만날 때마다 나는 내 글의 주제가 독자들에게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 변명해왔다. 왜냐하면 읽는 사람이 가진 생각이나 관점과 일치하는 글이라면 복잡하고 어려운 문장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쉽게 읽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훈처럼 쉬운 표현으로 빼어난 문장을 직조해 사람들의 통념을 깨트리는 글쓰기는 나 같은 범부가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내가 독백의 방에 갇힌 이유는 어려운 글을 쓸 ‘자격’도 없는 주제에 어려운 글을 썼기 때문이겠지만, 다른 한편 길고 어려운 글을 마음과 시간을 내어 읽으려는 독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 소개하려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쓴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사람들은 책을 읽는 것을 단지 정보를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정보를 얻기 어려운 글은 금방 손에서 놓아 버리고 만다. 그러나 사사키에 따르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사사키 아타루는 책을 읽기 위해서 온갖 ‘정보’를 주는 것을 버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다양한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미술관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영화보는 것도 그만두었습니다. 듣는 것을 그만두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만, 음악활동도 그만두었습니다. 텔레비전 보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잡지 보는 것도 그만두었습니다. 스포츠 관람도 그만두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담배도 끊었습니다. ... 그리고 다양한 정보를 차단하기로 했습니다. 친구가 하는 말밖에 듣지 않고, 친구가 권하는 것밖에 보지 않습니다. 그것도 이따금 있는 일입니다. ...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정보는 우리에게 명령한다. 사람들이 악착같이 정보를 모으는 이유는 정보를 따라 살기 위해서다. 어느 사이트에 가면 최신 스마트폰을 좀 더 싸게 살 수 있다, 어느 지역에 부동산 투자를 하면 돈을 더 벌 수 있다, 어느 회사의 주식을 사면 재미를 볼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정보를 알게 되면 우리는 정보의 명령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게 된다. 결혼을 위해 중요한 것은 어느 새 사랑이 아니라 결혼정보가 되었고, 교육에서도 중요한 것은 배움이 아니라 입시정보가 되었다. 정보가 더 많은 사람들이 정보의 명령을 따르도록 만들려면, 어떤 정보도 어려워서는 안되고, 어떤 명령도 복잡해서는 안된다. 정보로 쓰여진 글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광고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사키 아타루에 따르면 책 읽기란 정보를 끌어모으는 것을 그만두고, ‘책을 읽어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냥 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오, 맙소사, 책을 읽어버리고 말았다”와 같은 느낌으로 읽는 것이야말로 책 읽기라는 것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불러온 혁명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도 루터가 철저히 성서를 읽었기 때문이다. 마호메트가 이슬람 세계의 문을 연 것도 책 읽기와 무관하지 않다. 마호메트가 천사로부터 받은 첫 계시는 바로 “읽어라”였다. 문맹이었던 마호메트에게 책은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을까! 그럼에도 책을 읽어버리면 자신이 미치던지, 세상이 미치던지 둘 중 하나가 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철저히 책을 읽고 또 읽어서 책이 그려 보이는 세계상이 세계에 대한 ‘잣대’로 서면 그때 바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인간의 삶도 단순하지 않고, 폭력적인 단순화를 하지 않는 한 진실한 책이 쉬운 글로 쓰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글이 어렵고 복잡하게 된 것은 글재주의 부족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깊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세계는 단언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의 윤리는 쉬운 주제를 쉬운 글로 쓰는 것에 있지 않다. 어렵고 복잡한 글을 견뎌줄 수 있는 독자의 존재가 글쓰기를 윤리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어려운 책이라 포기하지 말고, 책을 읽어버리자. 반복해서, 읽고 또 읽자. 루터는 성서를 읽었고, 번역했고, 많은 책을 썼고, 수없이 반복했다. 결국 혁명은 책을 읽어버리면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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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김덕희의 '낫이 짖을 때'를 읽었다. 
김덕희 작가는 이 소설로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근래 읽은 작품 장 가장 좋았다.
고백하자면, 이 작품을 손에 집어들었을 때 작품 제목을 '낫이 짖을 때'가 아니라 '낮이 짖을 때'로 잘못 읽고서, 대낮의 대지의 부르짖음을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최근에 친구의 소개로 Julien Mauve (http://www.julienmauve.com)라는 작가의 밤과 빛에 대한 사진을 보고 난 직후였던 탓인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낮'이 아니라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할 때의 그 낫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작품의 문제 의식은 다양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내게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에 대한 것이었다. 기역자를 낫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처지에 대한, 그래서 글을 읽는 것과 글쓰기에 대한, 글자를 의미로부터 끝없이 분리시키는 것에 대한, 무엇보다 오독에 대한 이야기. 마치 낫을 낮으로 읽는 것처럼 말이다.


1. 소설에서 수복의 주인은 자신의 노비인 수복의 이름을 물은 후 한자로 명이 길다는 뜻으로 한번, 명이 짧다는 뜻으로 또 한번, 두번을 써서 의미를 두 개로 갈라 놓는다. 이건 데리다가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를 분석할 때 ‘he war’가 지닌 의미론적 풍요로움을 언급하는 대목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war'는 영어에서는 전쟁을 뜻하지만 독일어에서는 존재했다는 의미로 데리다는 의미의 복수성에 대한 예로 가져온다. 이 작품에서 ‘수복’이라는 '말'은 그저 노비인 수복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주인은 그것을 바닥에 씀으로 목숨이 짧다는 것으로도, 정반대로 목숨이 길다는 뜻으로 만든다. 수복이라고 부르는 말은 이런 의미상의 차이를 소거시키는데, 음성중심주의는 차이를 소거시킨다는 데리다의 견해, 요컨대 파롤은 발화주체의 동일성을 유지하지만 에크리튀르는 그것을 바로 찢어서 이중화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모든 기호는 원리적으로 항상 동시에 복수의 언어, 복수의 컨텍스트, 복수의 독해레벨에 속한다. 실제로도 수복의 목숨은 주인의 손에 달려 있다. 주인이 원한다면 목숨을 짧게도, 길게도 만들 수 있는 '노비'의 상태에 있다. 그런 점에서 주인은 수복의 이름을 잘못 쓴 것이 이렇게 한번, 저렇게 한번 정말 정확히 쓴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이 작품에서 수복의 직업은 책을 베껴 쓰는 일, 즉 '필경사'다. 바틀비처럼 ‘I would prefer not to’를 밤낮없이 하다간 수복은 목숨이 붙어 있을 수 없을 것이기에, 수복은 바틀비와는 반대로 주어진 일을 철저하고 성실하게 빈틈 없으리만큼 정확히 수행한다. 그런데, 이 필경이라는 일, 책을 모사하고, 따라쓰고, 베껴쓰는 일의 끝은 이상하리만큼 파국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만큼은 바틀비와 공통적이다. 바틀비는 무수한 반복적 작업과 모방으로 모든 것을 거부하기에 이르고, 수복은 무수한 반복적 작업과 모방으로 글을 완전히 의미로부터, 또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버리는데까지 이른다. 즉 반복은 이상하게도 원심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어떤 중심으로부터 바깥으로 내몬다. 이 작품에서 반복의 끝은 첫 문장과 끝 문장이 반복되는 것이다. '난 글을 읽을 줄 모른다'.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말은 수복의 말인지, 주인의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되풀이(불)가능성에 대한 장면처럼 읽힌다.















3. '낫이 짖을 때' 라는 제목은 수복의 말에서 온 것이다. 흙에 그린 낫으로는 지푸라기 하나 벨 수 없고, 흙에 그린 개가 도둑을 쫓아내기 위해 짖을 수는 없다는 수복의 말은 글의 무력함을 항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낮으로 그린 개, 그러니까 글자는 짖을 수는 없을 지언정 개보다 훨씬 더 강하다. 작품 곳곳에서 글의 힘을 강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수복의 아비는 글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라 배워서는 안된다고 몇번을 거듭해 말한다. 본래 양반 가문이었던 수복의 집안을 노비가 된 것도 글 때문이고, 붉은 도포를 입은 문하생이 매질을 당한 것도 글 때문이다. 글은 소 한 필, 쌀 열가마니 보다 비싼 값에 거래되기도 한다. 수복은 글쓰기가 아닌 글을 그리지만, 만약 수복이 글쓰기가 시작된다면 글쓰기는 많은 것을 바꿔 놓게 될 것이다. 에크리튀르, In-scription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본은 정본을 파괴시키지만, 정본보다 이본들이 더 큰 진실을 담게 되는 경우가 있는 법이다. 정본은 오직 현전적인 주체, 지금 이곳에 있는 주체와 결부되어 있지만, 베껴써진 이본은 ‘자기컨텍스트와의 단절력’이 자리잡고 있다. 아즈마 히로키가 이를 두고 ‘씌어진 문자는 이야기된 소리와 다르고, 그것을 발화한 주체의 부재, 극단적인 경우 죽은 후에도 계속 남는다’, ‘에크리튀르는 항상 주체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있기에 자유롭게 인용되고 해석될 수 있다’고 한 문장도 함께 떠오른다.


4. 작품을 읽으며, 정확히 수복과 수복의 주인을 보며, 나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작품은 내게 그런 걸 묻고 있다. 나는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원심력을 그려내는 것이 가능한 반복적 회전 운동이 내게 있는 것일까? 아마도 아직은, 어쩌면 앞으로도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낫을 들고 쓴 글쓰기를 상상하게 된다. 낫은 쓰거나 말할 수 없고, 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낫으로 그려진 글이야말로 붓으로 쓰여진 글보다 훨씬 더 크게 세상을 향해 부르짖는 글이 될 수도 있다. 


 "양반들은 그 낫으로 도둑의 목을 베고 그 개를 앞세워 사냥을 할 수도 있다. 어디 그뿐일 줄 아느냐. 그 낫이 짖기 시작하고 그 개가 논두렁에 뛰어들어 추수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오래전 네 증조부 때처럼 말이다".


마지막 문장에서 단서를 삼아 이 작품에 나온 수복의 주인을 수복의 다른 자아라 생각해본다면 정사에서 누락된 사사를 기록해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주인의 뜻, 수복의 증조부의 의지는 날카로운 낫이 짖을 때의 모습, 혁명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 글을 읽을 줄 모른다'라는 문장은 'I would prefer not to'에 비견할만한 문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는 말의 조건인 힘을 가진 자가 그려내는 글의 세계를 거부하는 말, 그 말이 바로 이 말이지 않을까. ‘난 글을 읽을 줄 모른다’. 수복은 글을 쓰지 않는다. 글을 ‘그린다’.


5. 지금 쓰는 이 글은 이 작품을 제대로 베낀 것일까? 나는 문맹인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데리다로 이 작품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이 작품에 대한 배반이 아닐까? 이 소설을 제대로 그리지 않고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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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의 아들 - 나의 선택 테드북스 TED Books 1
잭 이브라힘.제프 자일스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테러리스트의 아들

  • 나의 선택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시는가요?

 

 엘사이드 노사이르는 1990년 11월 5일 뉴욕 매리어트 호텔 연회장에서 연설을 마친 메이르 카하네를 암살했습니다. 메이르 카하네는 호전적인 랍비이자 유대인 방위연맹의 창립자였는데요, 카하네를 총으로 쏜 아랍인은 달아나면서 한 노인의 다리에도 총을 쏘았고, 호텔 앞에서 기다리던 택시에 급히 올라탔지만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던 우체국 청원경찰과 총격을 주고 받다가 결국 길바닥에 쓰러졌습니다. 랍비 카하네와 암살자 둘 다 목에 총상을 입어 어느 쪽도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TV에서는 이 테러 사건을 끊임 없이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랍비 카하네에게 총을 쏘았고, 다시 총을 맞아 쓰러진 엘사이드 노사이르는 바로 오늘 소개해드릴 책의 저자인 잭 이브라힘의 아빠입니다.


2. 그러니까 책의 저자가 테러리스트의 아들인 건가요?


 네, 맞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만들고, 잭 이브라함이 쓴 <테러리스트의 아들>이라는 책입니다. 지난 주에 제가 이 코너에서 소개했던 책을 기억하시는지요? 수 클리볼드가 쓴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이었는데요, 수 클리볼드는 바로 콜럼바인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중 하나였던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였습니다. 엄마인 수가 가해자의 엄마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아들 딜런이 왜 그런 일을 저지르고 말았는지를 탐색하고자 쓴 책이었는데요, 오늘은 시점이 그와 반대인 책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테러리스트 아빠를 둔 아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고통을 어떻게 뚫고 지나왔는지를 소개하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 아들을 둔 엄마가 쓴 이야기에 이어 테러리스트 아빠를 둔 아들이 쓴 이야기라니 오늘도 지난 주처럼 마음이 아픈 이야기일 것만 같습니다. 저자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보통은 테러리스트 가족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도 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책의 저자인 잭 이브라힘의 아버지는 이집트 출신의 산업기사였고, 어머니는 미국인 교사였습니다. 그러니까 비교적 중산층이라 할 수 있는 집인데요, 잭의 어머니는 본래는 카톨릭이었는데,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기 어렵다며 사제에게 질문을 했는데, “이런 질문을 하다니, 너는 신앙심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대학 도서관에 꽂힌 이슬람에 대한 책을 발견하고 지역의 모스크를 찾아갔는데 상상과는 아주 다른 아주 포근하고 화목한 무슬림 공동체를 만났다고 해요. 보통 무슬림이라고 하면 쌀쌀맞고 차갑고 남성적인 이미지라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않았던 거죠. 잭의 어머니는 거기에서 잘 생긴 남자를 만납니다. 금속전문가였던 남자는 배를 설계하는 것부터 목걸이 디자인도 식은 죽 먹기로 했냈구요, 미국에 온 지 1년만에 보석상에 일자리를 얻어 결혼할 여자를 위해 직접 약혼 반지를 디자인하고 제작도 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오늘 소개해드리는 책의 저자와 한 살 아래 동생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놀이 공원에 아빠와 가서 함께 놀기도 한 기억을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기억할만큼 책의 저자는 테러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행복했다고 합니다.


4. 그러면 지난 주의 딜런 가족처럼 잭의 가족도 우리가 생각하는 테러리스트의 가족의 이미지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는 거네요. 그러면 왜 잭의 아버지는 테러리스트가 된 건가요? 원래부터 이슬람 근본주의자였고 테러를 목적으로 미국으로 가게 된 건가요?


 그렇죠. 잭의 아빠도 원래는 미국에 대해 호감이 있어서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해요. 잭의 아빠가 미국에 대해서 마음이 돌아서게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세부적인 사건이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바바라라는 여자가 집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고 해요. 잭의 엄마는 미국인 여성을 대상으로 이슬람교를 전도하는 활동을 했는데, 그러다가 갈 곳 없는 여인이 있다면 가끔 가족의 침대를 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이슬람교의 전통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그 바바라라는 여자가 주변에 잭의 가족이 바바라의 방에서 옷을 훔치고, 잭의 아버지를 강간범으로 고발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없었음에도 돈을 뜯어내겠다는 생각으로 말이죠.


5. 그런 일이 있었군요. 


결국 무죄로 드러나긴 했지만, 아마 잭의 아빠에게 이 일은 알라에 대한 신앙적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온 자신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 일을 계기로 아버지는 더욱 독실한 무슬림 신앙인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80년대 말 당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내 이슬람 공동체에서도 미국에 대한 저항이 고조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무렵부터 잭의 아빠는 모스크를 다녀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났고, 지하드를 위해 준비한다며 롱아일랜드의 사격장에 가서 사격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6. 그러면 잭의 아버지는 그런 일들을 겪고 나서 유대인 랍비에 총을 쏜 거군요. 


 그렇습니다. 잭의 아빠인 노이사르가 카하네를 총으로 쏜 이후부터 잭의 가족이 살던 클리프사이드파크로 한번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물론 학교로도 돌아기지 못했구요. 지난 주에 클리볼드 가족이 딜런의 총격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리틀턴에서 살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지요? 여러 곳으로 이동하며 수차례 전학을 해야 했던 잭은 어딜가나 학교에는 적응을 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 동네와 학교가 조금 편해지려고 하면 전학을 해야 했으니까요.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잭의 집이 비워진 사이 누군가가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은 모두 가져가 버리고 컴퓨터 키보드 위에 칼을 놓아두고 갔다고 합니다. 어떤 학교에서는 처음 등교한 날 아이들이 몰려와 물었다고 합니다. “네 아빠가 랍비 카하네를 죽였니?”. 이런 질문을 받아야 하는 어린 아이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런데요, 잭의 아버지 노이사르와 잭의 가족이 영영 떨어지게 된 사건은 이 사건이 아닙니다. 다른 사건이 있었던 거죠.


7. 그러면 노이사르가 다른 범죄도 저질렀다는 건가요?


 노이사르는 카하네에게 총을 쏜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노이사르가 카하네에게 총을 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어요. 결국 무죄 판결을 받습니다. 잭의 가족에게는 다행스런 일이었지만 이 사건은 미국 내에서 아랍인들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잭은 학교 폭력에서, 땅딸막하다는 이유로, 다르다는 이유로, 말이 없다는 이유로 얻어 맞았다고 합니다. 잭의 엄마도 그런 일을 겪기 비일비재였다고 해요. 머리쓰개와 베일을 썼다고 유령이나 닌자로 불렸습니다. 노이사르는 카하네 사건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노이사르가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 지하주차장에서 폭발이 일어났는데 거기에 가담한 혐의로 다시 체포된 겁니다. 그 이후로 유죄판결을 받은 노이사르는 50건의 혐의 중 48건에 대한 유죄판결을 받아 무기징역에다 15년간 가석방 금지를 당했고 가족은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 수신자부담 전화를 받을 수 없었고, 결국 아버지와 인연을 끊게 됩니다. 오늘 책의 저자 이름이 잭 이브라힘이라고 말씀드렸죠? 이 일이 있은 후 모든 가족이 성을 바꾸게 됩니다. 아버지로 인해 받은 차별, 그리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이름을 바꿔 버린거죠. 그 이후로 잭은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8. 잭의 가족사를 들으니 잭도 정상적으로 성장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떨까요? 이런 상황에서라면 정서적인 충격이 상당했을 것 같은데...


 잭도 강한 무슬림 신앙이 있던 가족 탓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편견이 자신의 사고체계에 슬며시 스며들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그래엄 벨이 전화를 발명했다”나 “파이는 3.14다”와 “유대인은 모두 사악하며 동성애는 죄악이다”를 하나의 사실로 같은 선상에서 받아들였다고 해요. 아버지는 늘 중동에 집착했고 유대인이 악당이라는 이야기를 상기시켜 토를 달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 잭이 자신의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미국의 코미디 프로그램인 <더 데일리쇼>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스튜어트는 독단적인 것을 증오했다고 합니다. 반전운동과 동성애자의 권리를 비롯해서 모든 것을 파고들어 의문을 제기하고 관심을 쏟는 모습을 보고, 그는 새로운 아버지를 만났다고 해요. 놀랍게도 스튜어트라는 그 진행자는 유대인이었구요. 


9. 코미디 방송 하나가 독단에서 깨어나게 한 거군요.


 어쩌면 코미디 방송이 당연한 것을 뒤집는 것이니, 코미디 방송에서 상식이 뒤집어졌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잭은 아버지의 범죄로 인한 가정 파탄, 학교에서의 왕따 피해 등 온갖 어려움을 당했는데 이런 일을 겪으며 증오보다는 공감이 힘이 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편견이야말로 테러리스트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잭은 이 책에서 구조적 가난, 광신, 교육 박탈로 인해 차별과 폭력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기 시킵니다. 우리의 독단과 편견이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죠. 잭은 열 여덟살 이후로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 제가 소개해드린 <테러리스트의 아들>은 지식 공유 프로그램인 테드 강연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그 강연 마지막에 잭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하면서 눈가에눈물이 맺히는데요, 거기에는 여러 의미가 있을 겁니다. 더 이상 테러리스트의 아들이라는 편견 속에서 살고 싶지도 않고, 우리의 편견에도 도전하고 있는 거지요. 책의 제목이 테러리스트의 아들이라는 것과는 대조적이죠.


10. 이 책이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를 한번 정리해주세요.


 네, 우리는 누군가가 뚱뚱하다고, 동성애자라고, 가난하다고, 혹은 타고 다니고 입고 다니는 옷으로, 직업으로, 학교로, 인종으로, 종교로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는가요? 여성이라는 혐오하고, 피부색이 다른 이들을 차별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도록 이 책은 요구합니다. 우리나라의 난민 인정율은 5%도 채 되지 않습니다. 난민이 들어오면 테러 위험이 증가하고 경제적인 부담이 된다는 건데요, 그런 생각이 세상을 더 증오로 가득차게 만듭니다. 결국 급증하고 있는 테러의 원인은 이슬람의 호전적 성향이라기 보다, 이슬람을 호전적으로 만든 구제국주의 국가들의 인종주의적 편견과 차별, 지배가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반성도 이뤄지지 않고 있지요. 이 책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 우리 자신의 좁은 시각에 대해서 성찰해보는 기회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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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타는 사람이 쓴 시집, 시인이 쓴 철학책이 가능하다면?
_이광수, 최희철의 『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

‘철학자의 서재’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게 됐다. 어떤 내용이라도 좋으니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읽었거나 갖고 있는 책들 중에서 감명 깊었던 책에 관한 이야기를 써달라는 것이 담당자의 주문이다.
‘철학자’라니? 이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쓴 책 중에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라는 책이 있지만 나 자신을 ‘철학자’로 누군가에게 소개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내 책의 제목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애초에 내가 생각했던 제목은 『인문 육아』 내지 『오이디푸스의 일기』였다. 하지만 출판사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출판사는 마크 롤렌즈라는 미국의 분석철학자가 늑대를 키우며 쓴 『철학자와 늑대』라는 책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던 참이었다. 마크 롤렌즈는 어린 늑대를 분양 받아 수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 했고 그 과정을 솜씨 좋게 철학적으로 해명해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책을 쓰면서 『철학자와 늑대』를 의식하고 있었다. 마침 어린 아이를 홀로 맡아 키우며 육아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글을 쓰고 있던 나는 이 책을 읽은 후부터는 무모하게도 『철학자와 늑대』에서 마크 롤렌즈가 제시한 시간에 대한 생각을 비롯해 욕망이나 자유에 대한 입장과 대결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원고가 완성되자 『철학자와 늑대』를 소개한 출판사로 원고를 보냈고 결국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라는 책을 출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내 책에 ‘철학자'라는 호칭이 붙은 것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를 ‘철학자’로 불러주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나는 마크 롤렌즈처럼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유명세를 얻은 책을 쓴 적도 없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철학자’라는 호칭을 붙여둔 제목을 제안해주자 한편으로 그간 어줍잖게라도 해왔던 사유를 인정 받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목에 ‘철학자’가 들어가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철학자’라 불리울 수 있는 자격은 자신만의 독자적 사유를 해오고 있는 것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철학자’는 철학교수를 의미한다. 만약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면 아직 ‘철학연구자’에 불과한 자가 ‘철학자’를 참칭하는 것이 된다.
‘철학자’가 철학교수와 동의어가 된 것은 사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경향이기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자면 그렇게 오래된 일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철학자’와 철학교수가 동의어가 된 것은 칸트 이후에 성립한 것이다. 기껏해야 독일에서 근대 대학이 성립한 이후이기 때문에 300년도 채 되지 않은 등식인 것이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는 『방법서설』과 『성찰』 등을 남긴 근대철학의 문을 연 철학자이지만 철학교수는 아니었다. 『에티카』와 『신학정치론』과 같은 철학사의 빛나는 책을 남긴 스피노자는 생업은 안경공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역시 철학교수가 아니기 때문에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연구자로 불렸을 것이다. 물론 나 자신이 이들과 같은 위대한 철학적 성취를 해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철학자가 아니면서 ‘철학자의 서재’라는 제목의 이 연재를 하게 된 것에 대한 변명이라 해두자.











‘서재’라는 말에도 ‘철학자’라는 말만큼이나 거부감이 있다. 서경식은 『내 서재 속 고전』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서재’라는 말을 별로 쓰지 않는다. 부득이할 경우에도 기껏 ‘공부방’ 정도의 말로 대신한다. “서재가 좁아 책 둘 곳이 없어서 난처해요”라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날 경우, 예전의 나는 반감을 느꼈다. 하지만 요즘 내가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는 아차, 싶은 때가 있다. 그것은 ‘서재’라는 말 자체에 수치에 가까운 감정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서경식이 ‘서재’라는 말에 수치심을 느낀 이유는 ‘서재’라는 말을 ‘부르주아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치솟는 주거비용으로 몸을 누일 방 한 칸조차 구하는 것도 힘겨운 많은 청년들에게 따로 책을 보관하는 방인 ‘서재’를 갖는다는 것은 아마 그저 사치에 불과해 보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 대학 시절 서재는커녕 좁은 하숙방에는 가진 책을 꽂아둘 공간도 없었다. 게다가 책이 많으면 하숙방을 옮길 때 이사비용이 곱절로 들었다. 그 때문에 하숙집에서 누군가 이사 나가는 날은 책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이사비용을 아끼려 누군가 책을 버리고 가면 다른 학생들은 가만히 기다렸다 읽어보지 못했던 책을 골라 왔다. 내 좁은 하숙방에도 그렇게 모은 책과 사다 모은 책이 켜켜이 쌓였다. 만약 대학 졸업 후 바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내 책들도 아마도 버려졌을 것이다. 그나마 방이 두 칸이라도 있는 신혼집을 지방에 구한 덕분에 그 때 하숙방에 쌓여 있던 책들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고, 그 책들도 지금껏 내 서재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나는 ‘철학자’도 아니고, 그럴싸한 ‘서재’를 갖췄다고 하기 힘들지만 부끄러운 기분을 누르고 이 연재를 수락한 데에는 나 나름의 읽는 방법을 통해 읽어온 책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철학자의 서재’라는 이 부담스러운 제목에 대해서는 뭐라도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 정작 중요한 책 이야기를 여태 미뤄두고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책상의 가장 가까운 오른 편 책장에는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들의 책이 꽂혀 있다. 앞으로 이 지면에서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이를테면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 『그라마톨로지』,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 『차이와 반복』 같은 책들이다. 보통 이 책장에는 가장 자주 보는 저자의 책이나 최근에 가장 관심이 있는 주제를 꽂아두는 편이다. 최근에는 서양미술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 다니엘 아라스의 『서양미술사의 재발견』, 케네스 클락의 『그림을 본다는 것』과 같은 책들이 꽂혀 있다. 그 왼편 책장에는 철학사의 고전에 해당하는 책들이 꽂혀 있다. 플라톤의 『국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같은 고대철학서에서부터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과 같은 칸트의 책까지 주로 대학과 대학원 시절 읽었던 책들이 주를 이룬다. 그 맞은 편으로는 내 전공분야인 현상학 관련 책들, 하이데거와 후설이 쓴 독일어 원서들이 꽂혀 있다. 철학 외의 분야 중 내 서재에 가장 많이 꽂혀 있는 책은 신학서적, 다음으로는 문학책이다. 근래에는 아즈마 히로키, 사사키 아타루와 같은 젊은 일본 사상가들이 쓴 책들을 많이 읽는다.

최근 내가 가장 즐겨 읽은 책을 한권 꼽자면 이광수와 최희철이 쓴 『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이다. 이광수가 찍은 사진 한 장을 두고 이광수와 최희철이 글로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이광수가 인도 여행 후 찍은 본인의 사진에 대해 “내가 보는 세계 안에 그가 보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 안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세계가 나온다”고 쓰면, 최희철은 “그걸 ‘푸른 인연’이라 말하고 싶다. 삶이 끝없이 중첩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부딪히며 바람고 파도를 만드는 것, 그 파도가 우리 삶의 귀퉁이를 적시는 것”이라 화답한다. 두 중년의 대화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사진 한 장을 두고 길러내는 두 사람의 깊은 생각 때문이다.









이 책이 아름다운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이 책에서 사진으로 묻는 이광수는 본래 ‘사진가’가 아니고, 철학으로 답하는 최희철은 본래 ‘철학자’가 아니다. 이광수는 인도 역사를 전공한 대학 교수이며, 최희철은 이광수의 소개를 빌자면, 부산수산대학 어업과를 졸업하여 “배타는 일과 닭 잡아 파는 일을 생업으로” 삼아 몇 권의 시집을 쓴 ‘철학하는 시인’이다. 최희철은 최근에도 배를 타고 저 멀리 멕시코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아마도 ‘푸른 인연’이라는 말도 배에서 일렁이는 파도를 보며 만들어낸 생각해냈을 것이다.

시인이 쓴 철학책, 역사가가 만든 사진집, 배 타고 닭 잡아 파는 사람이 쓴 시집이 가능하다면, 철학교수가 아닌 철학자가 ‘철학자의 서재’라는 제목의 글을 쓰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구태여 나는 이런 것을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를 운운하며 ‘탈주’나 ‘-되기’와 같은 개념들은 여기서 쓰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이 주제에 대해서는 곧 다시 쓰게 될 것이다.

- 한국해기사협회 매거진 <해바라기> 8월호에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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