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지배 (2016.8.9 매일신문에 쓴 글)


직업의 영향은 매우 강한 것이라서 직업에 따라 세상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알프레드 가드너가 쓴 <모자 철학>에는 세상과 사람들을 오직 머리의 크기로만 판단하는 모자 장수가 등장한다. 모자 장수의 직업적 경험에서는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머리를 더 많이 쓰기 때문에 머리가 더 크고, 그래서 더 큰 모자를 쓴다. 모자 장수는 존스가 7인치 반을 쓴다 해서 그를 존경하고, 스미스가 6과 4분의 3인치를 쓴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한다. 제한된 직업적 경험이 제한된 시각을 낳은 것이다.


나 역시도 제한된 시각 탓에 작은아버지와 의견 충돌이 있었던 적이 있다. 이제 막 제대한 사촌 동생에게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모두 저축해서 기회가 되면 유학을 가라고 권했다. 하지만 작은아버지는 아들이 얼른 생활 전선에 나서 자립했으면 한다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지금 자립하면 더 멀리 나가기 힘드니 공부에 집중하게 하라고 권했다. 그러자 작은아버지는 내게 다그쳐 물으셨다. “네가 공부를 좀 더 했다고 네가 생각하는 공부만 공부로 아느냐?” “생활 전선에서 배우는 건 공부가 아니냐?”

작은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공부를 더 많이 하면 할수록 더 성공할 수 있다는 나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내가 보고 겪은 경험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마치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더 큰 모자를 쓴다고 믿었던 모자 장수처럼 말이다. 존스가 7인치 반 크기의 모자를 쓴다고 해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공부를 많이 하면 더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좋은 대학을 나와 유학을 다녀오고, 학위를 받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식의 서사는 좋은 일자리가 대졸자보다 많았던 1980년대라면 몰라도 박사 실업자와 이십 대 태반이 백수라는 지금 상황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공부 외의 다른 일을 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직업의 지배를 받고 있던 모자 장수만큼이나 철저히 공부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화여대에서 미래라이프대학을 만들어 뷰티학과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도 온 사회가 ‘공부의 지배’ 속에 있지 않으면 가능한 발상이 아니다. 뷰티학과를 무시해서가 아니다. 생활 전선과 직업 현장에서 다양한 형태로 가능할 수 있는 ‘배움’을 ‘공부 산업’의 선봉인 대학이 학과라는 ‘공부 제도’ 속에서 획일화하는 것이 바로 공부의 지배가 의미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학교 바깥에 학교가 있고, 배움 바깥에 배움이 있고, 삶 바깥에 삶이 있다. 공부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공부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공부 바깥에 있는 공부로 나가는 것이다.

공부의 지배, 공부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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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오늘 자에 쓴 졸문.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고 생각난 <테러리스트의 아들>과 엮어서 썼는데, 결말이 너무 성긴 글이 되었다. 사실 원고 마감 날짜를 착각해 급히 쓴 탓도 있는데, 하고 싶었던 말이 너무 많았던 것 같다. 이웃의 공감에 대해서도, 가해자의 가족들에 대한 편견에 대해서도, 아이가 타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사회 곳곳에 가득한 혐오 표현에 대해서도 모두 쓰고 싶었는데, 그걸 이런 모양으로 밖에 못 써내서 아쉽다. 굳이 다시 정리해보면, 내 아이가 타자인만큼, 이웃도 타자고, 타자에 대해서는 혐오 대신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논지가 제대로 담기지 못한 듯 아쉽다. 여하간 두 책은 꼭 엄마, 아빠가 아니더라도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육아분투기, 가해자의 엄마, 가해자의 아들 (2016.8.12 한국일보에 쓴 글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반비)를 쓴 수 클리볼드는 1999년 4월 미국 콜로라도주 컬럼바인 고교에서 일어난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인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이다. 졸업반 학생이던 딜런은 다른 친구 하나와 함께 별다른 이유 없이 학교에서 총을 난사해 학교 학생과 교사 13명을 죽이고 24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자살했고, 이후 이 사건은 조승희 총기난사 사건을 포함해 미국 내의 총기 사건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수는 사건이 일어난 후 딜런이 왜 이런 짓을 했는지를 한참 동안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딜런은 언제나 수에게 “우리 햇살, 착한 아이, 늘 내가 좋은 엄마라고 느끼게 해주던 아이”였다. 실제로 그랬다. 딜런은 졸업 후 애리조나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고 평소 행실도 발라 그런 낌새가 없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수 클리볼드도 보통의 엄마들보다 더 잘 준비된 엄마였다. 수는 타고나기를 걱정이 많은 편이라 늘 아이들의 건강을 챙겼고, 좋은 버릇을 가르치려 유난을 떠는 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석사 학위를 취득할 때는 아동발달과 아동심리를 공부했고, 취직한 뒤에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고 한다. 도대체 딜런은 왜 그런 비참한 사건을 일으킨 것일까. 아들을 잃고 가해자의 엄마가 된 후 17년 동안 수는 어떻게 이 비극의 어둠 속에서 살아왔을까.



이 책을 읽으며 ‘테러리스트의 아들’이라는 또 다른 책이 생각났다. 이 책은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와는 반대로, 가해자 아빠를 둔 아들이 쓴 책이다. 저자인 잭 이브라힘은 1990년 11월 뉴욕 메리어트 호텔에서 일어난 메이르 카하네 암살 사건의 범인이자 세계무역센터 폭발 테러를 공모했다는 이유로 무기징역형을 받은 엘사이드 노사이르의 아들이다. 잭은 사건이 있고 난 후 자신이 살던 집을 떠나 수차례 전학을 거듭했고, 학교에서 다르다는 이유로, 말이 없다는 이유로, 땅딸막하고, 테러리스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얻어맞고 다녔다. 아버지가 테러리스트라는 이유로 내내 차별을 당해야 했던 아이는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이브라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인 후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비극의 어둠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는 편견 속에서 폭력에 시달리고, 끊임없이 증오를 세뇌받으며 살아온 삶과 단절하고 이제는 공감이 증오보다는 힘이 세다고, 공감을 퍼뜨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런 비교는 무의미하지만, 이브라힘 가족이 겪었던 일에 비해 클리볼드 가족의 사정이 나은 점이 있다면 사려 깊은 이웃들이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잭은 아버지가 체포된 이후로 살고 있던 집을 떠나야 했지만, 클리볼드의 가족은 지금도 딜런이 살던 그 집에 살고 있다. 많은 위협과 협박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을 위로하고 지지해주는, 심지어 몇몇 희생자 가족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의 따뜻한 말, 특히 범죄자 살인자의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의 공감이 있어 “비극의 여파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다. “하느님이 축복하시길”.

며칠 전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마주치는 엄마들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을 하시길래 이렇게 유치원에 자주 오세요, 아이 엄마는 무슨 일 하세요, 집은 어디세요?”. 나는 왜 이런 질문들이 두려웠던 것일까. 부족한 내 사교성 탓일 수도 있지만, 공감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잭은 “나는 아버지가 아니다”고, 수는 “나의 가장 큰 실수는 내 아들은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고 썼다. 공감은 다른 이들은 물론 심지어는 내 아이까지도 나와는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엄마들을 “맘충”으로 부르고, 장애인 교육 시설을 혐오시설로 여기는 사회였다면 클리볼드 가족은 동네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내 아버지도, 내 아이도 아니다.


육아분투기,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테러리스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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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2016-08-13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아르코미술관에서 서경식 선생님 강연이 있었고, 그 날 패널로 나서게 되어 말씀을 나눴다. 우문들을 선생님은 이번에도 너무도 아름답고도 정교한 언어로 답해주셨다. 사전에 아래의 질문 목록을 만들어 갔는데, 대부분의 질문을 드렸다. 선생님의 강연과 대담 내용은 아르코미술관에서 나중에 책으로 묶어낼 계획도 있다고 하신다. 일단 내가 준비해갔던 질문 목록을 올려둔다.


아르코미술관 난민포럼5. 서경식 선생님의 강연 후 드리게 될 질문들. (패널. 권영민)


(강연을 듣고)

1.한국에서도 혐오 발언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재특회에서는 재일조선인을 바퀴벌레로 부른다고 하셨는데, 여기에서는 파키스탄 사람들을 바퀴벌레를 연상시키는 말로 ‘파퀴벌레’, 중국 사람을 ‘짜장’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일본에서 헤이트스피치가 이렇게 증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최근에 위안부 문제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한 일본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는 일본에서 ‘혐한’ 감정이 커지는 이유를 이렇게 썼습니다. “혐한 감정은 특히 이 10년동안 서서히 커져왔다. 그리고 그들의 혐한은 1990년대 초 이후의 역사 문제 갈등에서 한국인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언제까지고 비난만 한다는 생각에서 오는 부분이 크다”. 이런 생각은 타당한 것일까요?


(난민에 대한 책임의 문제)

 3.  우리나라의 난민 인정률은 3.8%입니다. 세계 평균의 1/10. 얼마되지 않는 숫자인데, 일부에서는 우리가 너무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지금 난민이 대거 발생하게 된 책임은 미국과 유럽 세계에 있는데 그 책임을 왜 우리가 함께 져야 하냐는 거죠. 그리고는 옆 나라 일본은 난민 안받는다며 진정한 주권국가라고 치켜 세웁니다.

 

 선생님께서도 9.11 이후 “대테러의 시대”가 발생한 근원으로 돌아가 사고하고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식민지주의’에 있다고 하신 적이 있고, 유럽, 미국,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마이너스 유산이라고 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 마이너스 유산을 왜 우리 같은 식민지 경험이 있는 나라가 져야 하냐고 묻는 겁니다. 식민지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과 미국, 일본에게 난민을 더 받으라 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한국 상황에 대해서) 

4.  우리문화사랑국민연대와 같은 오프라인 조직을 포함해 우리나라에는 현재 다문화주의를 반대하는 온라인 커뮤니트만 20개 정도가 있습니다.

 이들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는 혐오하지 않지만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에 대한 지원은 강력히 반대한다’고 하는데, 언뜻 들으면 인종주의적 혐오와 선을 그으려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하자면, 난민을 포함해 한국에 있는 외국인을 지원하는데 예산만 해마다 2000억 이상 쓰이고, 지원단체까지 포함하면 수조원을 쓰고 있다며 외국인에게 지나친 특권을 주면서 정작 정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헌법은 위반하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보면 쉽고 명확한 논리인데요, 외국인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는 것과 외국인을 혐오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5.  일본에서는 헤이트스피치 금지 법안이 통과되었고, 이 나라에서도 ‘차별금지법’이 이미 2007년에 입법이 예고되었는데 10년동안 통과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요, 최근에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문제는 헤이트스피치 금지법안이나 차별금지법이 마련되더라도 혐오와 차별을 근본적으로 막지는 못할 것 같다는 것에 있습니다. 


(전시에 대해서)

 6.  선생님께서 지금 아르코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전시를 보셨는데요, 선생님께는 어떤 작품이 인상적이셨나요?


 저는 차지량 작가의 코리언세일이라는 작품이 재미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다문화 반대운동, 외국인 혐오 발언을 하는 이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마치 난민을 환경오염 물질처럼 취급하는 것 같습니다. 탄소는 미국이 가장 많이 배출했는데 왜 우리가 탄소로 인한 피해를 받아야 하냐는 거지요. 그래서 탄소배출권을 거래하듯 언젠가는 난민을 거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지량 작가가 코리언세일이라는 작품에서 그런 상상력을 발휘한게 아닐까 해서 저는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브렉시트에 대해서)

8.  최근에 마이클 무어가 이탈리아를 휴가도 많고 낙관적인 나라인양 그린 영화를 만들어 공개했는데요, 사실 이탈리아 해변에 몇 년전부터 난민들이 떠밀려 오고 있다고 합니다. 한 쪽에는 일광욕을 하고 물놀이를 하는데 옆에서 바다를 건너기 위해 튜브를 사는 난민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입국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에서 샤를리 앱도 테러 이후 외국인에 대한 보복테러가 잇따라 일어났구요 르펜과 같은 극우정치인의 등장에는 그런 배경이 있는 것 같구요, 영국의 브렉시트, EU 탈퇴 결정을 두고도 난민 문제와 결부시켜 분석하려는 시도가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자유, 평등, 인권과 같은 가치를 여지껏 유럽 세계가 내세워 왔는데 최근 분위기는 명백히 이런 인도주의적 입장이 후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베리안 반도 최후의 이슬람교 나라 그라나다가 함락, 그리스도교에 의한 레콩키스타가 완성되었을 때 유럽의 다원적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불관용적인 일원적 지배의 시대로 돌입했고 그것이 결국 홀로코스트로 귀결되었다고 쓰신 적이 있습니다. 영국의 EU 탈퇴 결정이 새로운 불관용의 시대로 돌입하는 것은 아닐까요?


(보편주의에 대해서)

9.  세계자본주의가 국가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 것이라는 전망이 그동안 우세했었습니다. EU도 애초부터 경제적 이익을 위해 각 국가들이 월경을 쉽게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경계가 약해졌지만, 지금 양상은 흐릿한 경계 때문에 부의 편중이 일어나자 다시 국민주의로 회귀하는 상황처럼 보입니다. 다시 국경의 벽을 더 높게 만드는 것인데요, 세계적인 현상처럼 보입니다. 


(보편주의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10. 선생님께 늘 여쭤보고 싶었지만 그동안 여쭤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시라 생각도 됩니다만, 선생님, 난민들 내지 소수 민족 커뮤니티 중심주의와 보편주의 사이에는 긴장이 있을텐데요, 말씀하신대로 이 양자의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 ‘새로운 보편주의’ 혹은 ‘보편적 보편주의’에 대한 모색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리고 보편주의와 또 다른 보편주의 사이의 갈등도 있을 겁니다. 새로운 보편주의를 구상하기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하고, 연대가 가능하려면 새로운 이념이 필요할텐데, 반식민주의가 그런 이념의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예비질문1. (모순과 갈등을 견디는 것에 대해서)  

  보편주의와 보편주의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갈등을 견디고 갈등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논리적으로 딱 맞아 떨어지지 않더라도, 모순적인 것들을 견디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예비질문 2. (에스니시티와 내셔널의 관계에 대해서)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헤이트스피치는 인종주의적인 것일까요, 내셔널리즘적인 것일까요?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까닭은 선생님의 글에서 네이션과 에스니시티가 가끔 구분되지 않을 때처럼 읽힐 때가 있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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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 <제국의 위안부>의 반역사성
정영환 지음, 임경화 옮김, 박노자 해제 / 푸른역사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누구를 위한 오독인가


지금 보니 박유하 교수 본인이 자기 책을 오독하고 있는 것 같다. 업자만이 법적 책임이 있다고 <제국의 위안부>에 분명히 적혀 있는데도 박유하 교수는 어제 기자회견에서 업자도 책임이 있다고 썼다고 한다. 자신의 책을 오독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센다 가코가 하지도 않은 주장을 주장이라고 써놓고선 이제와 자신의 해석이었다고 한다. 센다가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고 비판하는 이들에게 오독이라고 일갈해놓고선 그건 자신의 해석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나 오독한 사람이 많았던 것은 역시나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길윤형 기자가 쓴 글처럼 나도 누구보다 한일화해를 바라고,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고, 위안부에게는 소녀상민으로 표현되지 않는 다양한 모습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모두 제국의 위안부의 논점에 대한 부분이고 공감하는 편이다. 심지어 법적 책임 묻기 곤란하다는 주장도 왜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 이해한다. 아마 박교수 책을 지지하는 많은 지식인들은 그런 취지에 공감하는 쪽일 것이다. 이들은 박교수 비판자들이 1) 책도 읽지 않고 선입견에 근거하고 있거나 2) 읽었더라도 '동지적 관계'와 같은 오해가 많을 수 있는 말들을 오해 내지 오독했거나 3) 박교수가 재판 중인데도 비판하는 것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박교수의 책을 옹호한다. 문제는 이들이 2)에 해당되지 않는 이들을 1)이라고 비판하고, 설령 2)에 해당되지 않은 이들에 대해서도 자기와 다르게 읽은 사람이 있다면 2)라고 비판하는 것에 있다. 나는 책도 읽었고, 고진을 번역한 박유하 교수에게 오히려 호감이 있었던 편이었고, 동지적 관계도 맥락상 나올 수 있다는 생각도 했었다. 


박교수의 책을 지지하는 이들은 이런 종류의 비판 대신 박교수의 책과 박교수의 독해를 문제삼는 부분들에 대해서 좀 더 응답해야 한다. 정영환 선생이 제기하는 문제들과 같은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불확실한 논거와 다양한 오류가 해명되지 않으면, 특히나 '동족으로서의 군인'과 같은 표현에 대해서와 같은 부분들, 어쩌면 의도적인 곡해로 읽히는, 만약 무의식적인 오독이라면 더 무서운 부분들에 대한 해명이 없다면 주장의 진정성이 훼손되고 정영환 선생이 제기하는 질문,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업자만이' 법적 책임이 있다고 썼다가 이제와서 '업자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말을 바꾸면, 제국의 위안부가 누구를 위한 화해를 말하는 책인지 분명하지 않게 되지 않겠는가.(아래의 포스팅 참고) 잘못된 근거로 화해를 하면 피해자는 2차 가해를 입게 된다. 할머니들은 바로 그 점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 아닐까?


박유하교수의 기자간담회(7월11일)에서의 반박에 대하여 (정영환 교수의 응답)

https://www.facebook.com/notes/%EC%A0%95%EC%98%81%ED%99%98/%EB%B0%95%EC%9C%A0%ED%95%98%EA%B5%90%EC%88%98%EC%9D%98-%EA%B8%B0%EC%9E%90%EA%B0%84%EB%8B%B4%ED%9A%8C7%EC%9B%9411%EC%9D%BC%EC%97%90%EC%84%9C%EC%9D%98-%EB%B0%98%EB%B0%95%EC%97%90-%EB%8C%80%ED%95%98%EC%97%AC/1731933963744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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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타는 날은 온다


 “놀부는 왜 이렇게 심술이 난 걸까?”. <흥부전>을 읽으며 물었더니 아이는 “흥부가 자꾸 밥을 달라고 하잖아”라고 했다. 그리고는 “밥은 어차피 놀부꺼니까 놀부 마음대로 하면 돼”라고 했다. 일곱 살 아이의 영악한 대답이다. 잠자코 있던 아이 엄마도 맞장구를 쳤다. “맞네, 놀부가 가진 것은 놀부 마음대로 하는 게 맞지”. 그러니까 그 누구도 놀부의 재산처분권을 제한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나도 질 수 없었다. “놀부가 부모님 재산을 독차지해서 부자가 된 거잖아. 그러니까 흥부도 밥을 달라고 할 권리가 있어”. 그러자 아이는 “아니야. 원래 흥부가 태어나기 전에는 놀부 밖에 없었어. 그러니까 전부 다 놀부거야”라고 했다. “무슨 말이야?”. “아빠, 내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 아빠가 사준 장난감은 다 내꺼라고 했지? 아빠가 내 장난감은 동생한테 안줘도 된다고 했지? 놀부도 그런거야”.




 그러니까 나는 흥부의 관점에서, 아이는 놀부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읽은 것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육아서에는 늦둥이가 태어나면 큰 아이가 소외감을 느끼기 쉽기 때문에 큰 아이만의 영역을 만들어 주라고 한다. 내 경우에는 동생과 나이차가 한 살 밖에 나지 않아서인지 그런 소외감을 느꼈던 적은 없었는데, 내 아이는 동생과 여섯 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시차(視差)가 생기게 된다. 즉 동생에게 형은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항상 있어온 존재이지만, 큰 아이는 동생을 전에 없었다 나타나서 자기 영역을 침범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놀부 심보란 형의 초조함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놀부는 대책 없이 아이만 많이 낳은 흥부에 비해 경제적 합리성이 있었고, 흥부가 자기 주제도 모른 채 제비의 부러진 다리를 고쳐주는 수고를 하는 것에 비해 놀부는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된다면 제비 다리까지도 부러뜨릴만큼 과감함도 갖춘 인물이었다. 교육부 공무원이란 자가 “민중은 개돼지라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되고, 신분 격차가 존재하는 사회가 합리적인 사회”라 했다는데, 이런 합리성과 과감함은 제 집에 찾아온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정부와 개인, 국민과 난민, 부자와 빈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갑과 을 사이에 시차가 없을 수야 없겠지만 시차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사회는 ‘합리성’이라는 이름의 놀부 심보가 보편화되게 된다. 하지만 다리 부러진 제비도 날아오를 날이 있고, 입에 박씨를 물고 돌아올 날이 있다. 좁은 자기 중심주의를 넘어 내 형제를, 가난한 자를, 심지어 동물까지도 환대하라는 <흥부전>의 정신을 망각한 개인과 사회에게 남은 것은 실렁실렁 박 타는 날 맛보게 될 호된 몽둥이 뿐일지도 모른다. 박 타는 날은 온다.


내일 자 매일신문에 쓴 글이다. 아이에게 동생이 생긴지 이제 3주가 되었다. 나와 내 여동생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아이는 동생과 여섯 살 차이가 난다. 나이 차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이와 <흥부전>을 읽으며 놀부와 흥부의 갈등은 나이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내 기억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동생이 내 의식에서 없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동생 없이 일 년을 먼저 살았던 것이 분명하지만 내 의식 속에서 동생은 언제나 나와 함께였다. 그러니 동생을 배제하고 온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결혼 전까지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내 어머니, 아버지 뿐 아니라 장난감, 책, 방까지도 모두 동생과 나눠 써야 한다는 당위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독차지하려는 놀부가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내 아이는 이미 소유 관념을 가지고 있다. 내 아이는 자기만의 장난감, 엄마, 아빠, 방, 악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동생은 자기 세계의 침범자가 되는 것이다. 나와 내 동생 사이에는 없었던 시차가 아이와 동생 사이에는 발생하게 된다. 내 아이는 흥부전을 읽으며 흥부는 놀부에 비해 나이가 많이 어릴 것이라 예상했다. 아이 관점에서는 그러니 흥부가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나는 흥부전을 읽으며 흥부와 놀부는 나이차가 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왔기 때문에 서로 다른 방식의 읽기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두 아이를 보면서 든 생각이 발단이 되었지만, 놀부와 흥부는 강자와 약자의 은유일 것이다. 부자들, 엘리트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서민들이 자기 세계의 침범자로 여겨 자신들의 세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들에게 서민들은 내 세계를 끝없이 위협하고, 밥을 달라고 하고, 울고 떼쓰는 존재, 개돼지 같은 존재로 보일 것이다. 요컨대 놀부의 관점에서 흥부는 아이만 무식하게 낳는 동물적인 삶을 사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흥부전은 아주 정치적인 이야기가 된다. 제비가 물고온 박씨는 놀부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민초들이 꿈꾸는 희망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제비가 물고 온 박씨는 놀부의 질서와 놀부 세계의 구조 밖의 어떤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구조 바깥을 구조 내부로 기입하는 것이 데리다에게는 '글쓰기'(in-scription)라면 흥부전에서의 기입 방식은 명주실로 부러진 제비의 다리를 묶어주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흥부전에서 제비의 다리가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도 하는데 일단 그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자. 여하간 제비, 인간 아닌 것, 동물의 세계, 질서와 구조 밖의 것이 박으로 표상되는 어떤 새로운 것을 가져온다. 그리고 (흥부와 가난한 자의 표상으로서의) 제비는 제 다리를 부러뜨린 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흥부전>은 그런 점에서 종말론적인 이야기고, 혁명에 대한 고대가 있는 이야기고, 동물이든 동생이든 가난한 자든 타자를 환대하라는 무거운 요구를 담은 이야기이지, 단지 착한 사람 복 받는다는 소위 '착한 이야기'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과 자연은 모두 평등하다는 존재론적 진실을 담고 있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둘째를 낳은 후 큰 아이가 겪을 심리적 상황에 대한 배려가 필요할 것 같아 육아서들을 찾아 보았다. 대부분 큰 아이만의 독자적인 공간, 소유물을 제공해주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걸 읽으며 아마 놀부 부모가 흥부에게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재산은 모두 놀부 네 것이야. 흥부는 침범할 수 없어'. 지혜로운 대처 방식인 줄 몰라도 그 때문에 놀부는 그 때문에 동생을 짐으로 여기고, 제비를 재산증식의 수단으로만 삼았던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여하간, 박 타는 날은 온다. 실렁실렁 박을 타며 잭팟을 기대하는 이들도 예기치 못한 것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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