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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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오늘 교통방송에서 오늘은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이라는 책을 소개했다. 사실 이 책은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내용만을 담고 있다. 만약 이중섭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최열 선생님의 <이중섭 평전>(돌베개)를 추천한다. 최열 선생께서는 죽기 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이 책을 쓰셨다고 하는데,  만약 이 책이 너무 두껍고 힘겹다면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하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도록도 참고할 만하다. 이 책에는 최열 선생이 정리한 이중섭 연보가 소상히 적혀 있고, 서울대 권영민 교수가 이중섭의 절우였던 구상의 시를 비평해두신 글도 실려 있고, 이중섭과 마사코가 주고 받은 편지화도 많이 실려 있다. 편지화 자체도 하나의 작품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는데, 오늘 소개한 책에는 편지 내용만 번역하여 실려 있어 아쉬움이 크다. 또 마사코와 이중섭의 대화를 주고 받는 형식으로 묶은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편지를 다른 장으로 묶어 대화의 맥락을 따라가기 어려운 것도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이 책에 미덕이 있다. 일단은 앞의 두 책보다 가볍고 가격도 훨씬 싼데다 이중섭의 주요한 작품이 모두 컬러로 실려 있어 '가족'이라는 관점으로 이중섭의 작품을 온전히 바라보는 경험을 갖도록 도와준다. 나는 특히 이중섭이 장남 태성에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몇 번을 약속하는 장면에서 몇 번이나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가볍게 읽기 시작해도, 책을 내려 놓을 때는 여운이 오래 남는다.

아래 은지화는 방송할 때는 마치 제주에서 그린 것처럼 이야기하긴 했지만, 은지화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고, 최열 선생에 따르면 가장 유력한 것은 서귀포 생활을 마친 직후 정착한 부산일 것이라고 한다. 마사코의 증언이 있고, 양담배 종이를 구하기도 아마 부산이 더 쉬웠을 것이다. 대구 전시를 실패하고 정신분열증이 발병한 이중섭이 한 말이 귀에 맴돈다.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 이 말은 진실일까? 이중섭은 세상을 속였는가? 조선의 정직한 화공이라 스스로를 불렀던 그는 전시 실패 후 자신이 세상을 속였다고 생각하자 스스로 곡기를 끊었다. 누가 누구를 속이고 있는 것일까. 나는 또 누구를 속이고 오늘도 공밥을 먹고 있는 것일까.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가져오셨나요?


네, 이번 주에 제가 가져온 책은 출판사 다빈치에서 만들고, 이중섭이 쓴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이라는 책입니다. 


2. 이중섭이라면 우리가 아는 그 화가 이중섭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오늘 제가 소개해드리는 책은 화가 이중섭이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와 또 그의 그림을 엮은 책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이중섭은 일본인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1945년에 결혼해서 1946년에 첫 아들 태성을, 1948년 태현을 얻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지고 1951년에 제주도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해 서귀포로 가게 되는데요, 그 때 아이들이 여섯 살, 네 살 때였으니까 한참 귀였을 때지요. 그런데 가족이 함께 오래 살지 못합니다. 가족들이 떨어져 지내게 되면서 이중섭은 아내 마사코와 편지를 주고 받게 되는데요, 그 때 쓴 편지들을 엮은 것이 바로 오늘 소개해드리는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이라는 책입니다. 저도 이제 일곱 살 짜리 아들의 아빠이고, 또 얼마 있지 않으면 둘째도 태어나게 되는데요, 이중섭의 편지를 읽으며 여러 번 감정이 올라와 힘들었습니다. 


3. 이중섭이 가족들과 떨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어요. 왜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을까요?


 일단은 가난이 가장 컸습니다. 이중섭이 1916년 생인데요, 사실 1951년은 전쟁시기로 주변은 아주 어려웠던 때이지만 이중섭의 일생으로 봤을 때는 가장 행복했던 일 년이 바로 이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도쿄에서 유학하던 시절인 1941년 역시 문화학원이라는 자유로운 학교에서 인정도 받았고, 일본에서도 미술창작가협회의 회원 자격을 받는 등 좋은 시기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중섭이 식민지 현실이라는 상황을 아주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냥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는 청년기를 보냈어요. 그렇지만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정확히 일 년을 제주 서귀포에서 머무는데, 이중섭이 이 시기에 아이들이 해변가에서 자유롭게 노는 모습을 주제로 한 작품을 무수히 그리고, 작품들 속에서 어두운 기색도 찾아 보기 힘듭니다. 엉덩이를 쳐들어올린 까까머리 아이들이 물고기를 잡고, 게를 잡으며 노는 작품들이 많이 있는데 모두 이 시기동안 그려진 작품입니다. 

 그런데요, 이런 재밌는 작품들 대부분은 은지화 위에 그려집니다. 은지화라는게요, 이중섭의 독창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피난 시절에 재료가 부족해서 하는 수 없이 사용하게 된 게 은지화에요. 은지화는 양담뱃갑 속에 있는 은박지 종이를 반듯하게 편 다음에 날카로운 철촉으로 된 펜으로 종이가 뚤어지지 않을만큼 눌러서 윤곽선을 그리고 색칠을 해서 효과를 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요, 그래서인지 작품의 크기가 대부분 작고 질감이 독특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보관상태가 좋지는 않아요. 양담배 속 은박지 종이라 보니까 작품을 유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거죠.




4. 그만큼 가난했던 거군요. 종이를 구하기 힘들었을만큼..


 혹시 잭슨 폴록이라는 미국 화가 아시나요? 많은 분들이 들어 보셨을 수 있는데, 잭슨 폴록은 커다란 캔버스 위에 유화 물감을 떨어뜨리는 방식의 액션 패인팅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사실 이런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물감도, 캔버스도, 그 뿐 아니라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풍부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이중섭의 은지화는 그에 비하면 정말 열악한 환경 속에서 나온 거지요. 이중섭은 본래 아주 부잣집 자제였는데요, 이런 가정은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만 시대를 잘 만났다면 아마 더 좋은 여건에서 더 재밌는 작품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겁니다. 사실 은지화는 가난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 표현 방식 자체는 그럼에도 정말 독창적이니까요. 

 이중섭의 아내인 마사코씨는 서귀포 시절을 추억하면서 정말 그 때는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정말 반찬은 구경도 못했고, 겨우 밥만 먹는 것도 다행이었다고 해요. 이중섭이 이 시기 그린 작품에 ‘게’가 많이 등장하는데요, 게를 잡아서 반찬으로 쓰고는 했다고 합니다. 지금 서귀포에 가면 이중섭 미술관 아래 이중섭 가족이 살았던 생가가 있는데, 가보면 집이 꽤나 커 보이지만 그 집 전체가 이중섭 가족의 집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초가의 아궁이 뒤편으로 있는 사람 두 명이 겨우 몸을 누일 공간이 있는 방 한칸에서 네 가족이 함께 지냈던 거지요. 




5. 이중섭에게 가장 행복했던 때가 서귀포 시절이라고 하셨는데, 지금 말씀을 들어보면 전혀 행복했을 것 같지 않아요. 밥도 못 먹을 정도로, 아이도 밥도 못 먹일 정도로 가난했잖아요.


 네, 맞습니다. 그래도 이중섭이 가족과 온전히 함께 지냈던 시기는 오직 서귀포 시절 뿐이었어요.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중섭의 권유에 따라 마사코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나게 됩니다. 마사코가 한국에 온지 7년만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는데요, 처음에는 마사코는 가지 않으려 했다고 해요. 가난을 이기지 못한 것이지요. 마사코가 일본으로 떠난 후부터 이중섭과 마사코, 이중섭과 두 아들 사이의 편지가 오고 가게 됩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책도 이 시기에 이중섭이 가족에게 쓴 편지를 담은 책입니다.

 

6. 이중섭은 어째서 가족들을 일본으로 보낼 생각을 한 것일까요? 전쟁 중이라 위험해서였을까요?


 아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자신도 곧 일본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컸던 것 같습니다. 작업에 집중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금방 가족들을 다시 부르거나 자신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일단 사기를 당했습니다. 마사코가 조금이라도 가계에 보탬이 되려고 일본 서적을 한국으로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했는데요, 그 일을 대행해 준 사람이 이중섭의 오산학교 후배인 마영일이었는데, 이 사람이 이중섭에게 전해줄 돈을 전해주지 않고 27만엔이나 되는 돈을 횡령하고 결국 부도를 냅니다. 이 때 27만엔이면 2,3인 가족의 일년 생활비에 해당하는 액수였다고 해요. 그 빚을 전부 마사코가 떠안게 되었고 이걸 해결하려다가 마사코가 무리하여 건강도 나빠지게 됩니다. 이 무역 때문에 두 부부가 아주 많이 괴로웠는데요, 편지에도 이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그런 와중에도 편지를 읽어보면 이중섭의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느낄 수 있습니다. 편지 하나의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아고리는 마음으로부터 만족하고 있소. 제발 돈에 대해서나 다른 일체의 일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말고 하루빨리 건강해주기만 바라오. (중략) 부산에 가서 광석형을 만나지 못하면 서울까지 가서라도 마씨의 건, 확실히 받을 수 있도록 법적 수속을 하고 돌아올 것이니 오직 건강회복에만 정성을 다해주시오. 요즘 매일 야외로 나가 봄 경치를 그리고 있소. 그저 그대들을 만나는 희망 하나로 안간 힘으로 팽팽히 버티고 있소. 발가락 군의 일은 어째서 써 보내지 않는 거요. 태현, 태성에게 뽀뽀를 하나씩 나누어주구려. 


7. 아, 따뜻한 편지네요. 뽀뽀를 나눠준다는 말도 재밌습니다. 그런데, 편지 중에 나오는 아고리, 발가락 군은 누구인가요?


 아고리는 턱이 길다고 해서 붙인 이중섭의 애칭이고, 발가락 군은 발가락이 예쁘다고 하여 붙인 마사코의 애칭이었다고 해요. 두 사람의 사랑이 묻어 나는 애칭이죠. 이 책에 실린 이중섭의 편지의 주제는 어쩌면 아주 단순합니다. 가족을 만나러 가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고자 했던 이중섭과 마사코의 끊임 없는 노력, 그리고 서로를 향한 애타는 그리움이 편지 전체에서 흐르고 있어요. 이런 글도 있습니다.

 

  11월 8일에 부친 편지 이후, 통 소식이 없어 몹시 궁금하오. 이렇게 소식이 뜸해지면 맥이 풀리오. 아고리 군은 그저 편하게 지내면서 제작을 하는 것 아니오. 오직 하나의 즐거움, 매일 기다리는 즐거움은 당신에게서 오는 살뜰한 편지 뿐이오. 당신의 편지를 받은 날은 그림이 한결 더 잘 그려지오. 정말 외롭구려. SOS, SOS, SOS, 하루 빨리 건강하고 다사로운 기쁨의 편지 보내주기 바라오. 내일은 태현 태성에게 재미있는 그림을 그려 이 편지와 함께 보내겠소. 나만의 사람, 나의 보배, 남덕 군, 자 살뜰하고 긴 뽀뽀를, 당신과 함께 잇는 꿈을 꾸면서 잠자리에 들려 하오. 푹 자고 내일은 걸작을 그릴 예정이오. 자나 깨나 소중한 당신만을 사랑하고, 열렬히 사랑하고, 무한히 사랑하고...




8. 아마 그 때는 전화도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고, 편지 뿐이었으니 기다림이 얼마나 컸을까요? 함께 있을 때는 너무 가난하고, 떨어져 있을 때는 이토록 그립고.. 이중섭은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큰 아들인 태성의 안부를 물으며 도쿄 가서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몇 번의 약속을 반복해서 쓰는데 태성이는 그 편지에 얼마나 설레였고,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이 당시에 편지를 쓰면서 이중섭은 아들 태현, 태성이 물고기와 게하고 놀고 있는 그림을 자주 그리고, 또 어떤 그림은 보내기도 하는데요, 시간이 3~4년이 흘러 가는데도 여전히 서귀포 시절을 잊지 못합니다. 

 이 당시 그림을 보면요, 재밌는 점이 발견되는데 화면 속에 긴 줄을 아이들이 가지고 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아마 이 긴 줄은 이중섭이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이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 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사용했던 것 같아요. 또 한가지, 게의 집게발이 아이들의 고추를 집으려는 장면도 자주 나오는데요, 아마 이중섭 스스로가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어 생겨나는 일종의 거세불안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사주지 못하고, 곧 가겠다고 하면서 몇 년을 가지 못하고, 기다리라고 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아버지로서의 무력한 자기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9. 결국은 가족이 다시 재회하지는 못했지요?


 네, 이중섭은 1955년에 서울에서 전시를 성공하면 드디어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도 그림을 사갈 정도로 실제로 많은 인정도 받았고, 자신이 대작을 그릴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전시는 호평을 받았지만 그림값을 상당히 많이 떼였다고 합니다. 서울에서의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해 시인 구상의 소개로 대구 미국문화원에서 다시 전시를 하게 되는데요, 작품이 거의 팔리지 않으면서 실망과 분노에 영양실조까지 겹쳐 정신분열증세를 이 시기부터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편지도 더 이상 쓰지 않았다고 해요. 결국 그 다음해인 1956년 9월에 간염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가족을 다시 보지 못하고 말이죠. 




10. 네, 이제 정리해주시지요.


 사실 오늘 제가 소개해 드리는 이 책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은 이중섭 예술 세계의 전반에 대한 이해를 얻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하지만 이중섭의 편지와 작품을 나란히 두고 읽다보면 한 인간의 고뇌와 역사가 만들어내는 비극이 보여 이중섭의 작품을 그의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중섭 개인의 삶으로서는 고통이었지만 어쩌면 이중섭 작품이 지금의 수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이유는 가족을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가 그를 끝없이 작품을 생산하도록 자극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보시면 우리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이중섭에 대해서도 새로이 알게 되지만, 무엇보다 우리 가족, 내 남편, 내 아내가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이중섭, 백년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요, 꼭 한번 가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고흐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중섭의 경우도 결국 가난 때문에 죽었습니다. 대구에서 전시가 실패하면서 이중섭은 미친거지요. 온 정성을 다해 작품을 만들었니까요. 그런데 이중섭은 대구 전시를 실패하고 나서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무슨 대단한 예술가가 될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고 자책하는 말을 남깁니다. 이중섭의 말은 사실일까요? 수준 있는 우리 청취자분들, 행여나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꼭 한 점 정도 사주셔요.  많은 청춘들이 이중섭처럼 목숨을 걸고 붓을 들고 있으니까요.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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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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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에서 한 주에 한 권 책을 소개해드리고 있지만 항상 책 소개가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책을 소개한다는 것이 뭘까, 책을 제대로 소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좋을까,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까..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쩌면 제가 그동안 소개했던 책 중에 가장 소개하기 힘든 책 중에 하나였어요.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책인데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책이라 짧은 소개가 오히려 책의 가치를 훼손시킨다는 느낌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어떻게 소개해도 소개를 잘할 수가 없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애청자분들에게 꼭 추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읽어봐야지만 그 가치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책이니까요." - 대본 중 일부

 

멀고도 가까운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1.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떤 책을 가지고 오셨나요?

 

네, 오늘 제가 가져온 책은 출판사 반비에서 만들고, 리베카 솔닛이 쓴 <멀고도 가까운>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혹시 ‘멘스플레인’이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대답) 멘스플레인이란 말을 뉴스에서 들어보신 분들이 계실 텐데요, 이 말은 남자(man)와 설명하다라는 뜻의 영어표현인 explain을 결합한 단어인데요, 흔히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경우를 의미할 때 쓰는 말입니다. 일부 남성들이 여성들이 자신들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가르치려 하는 것을 꼬집는 신조어에요. 오늘 제가 소개해드리는 <멀고도 가까운>이라는 책을 쓴 리베카 솔닛이 이 단어를 만든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2. ‘멘스플레인’이라는 말을 이 책의 저자가 만들었다고요?

 

사실 멘스플레인은 여러 곳에서 동시에 사용된 말이라 리베카 솔닛이 만든 말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좀 있습니다. 그런데 리베카 솔닛이 쓴 책 중에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책이 있는데요, 이 말이 힘을 얻게 된 발단이 이 책이 된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솔닛이 어느 파티에서 한 남성을 만나게 되었다고 해요. 이 남자가 리베카 솔닛이 책을 썼다는 것을 들었다고 하면서 말을 걸어오자, 그녀는 자신이 최근에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에 관한 책을 썼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솔닛의 말을 뚝 끊어 버리고 “머이브리지에 대한 중요한 책이 올해 출간된 걸 아느냐”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 중요한 책을 쓴 사람이 바로 리베카 솔닛이었던 거죠.

 

3. 남자가 가르치려 했던 여자가 정작 그 책의 저자였던 거네요.

 

멘스플레인이라는 말을 듣고 솔직히 말해서 저는 크게 공감을 하지는 못했었습니다. 제가 정말, 특별히 여성들에게만 가르치고 더 아는 척을 했던가,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데 농담입니다만 저는 사실 직업탓에 모든 사람을 가르치려는 듯한 태도가 있어서 남성, 여성 모두에게 그런 태도가 있는 것 같더라구요.(웃음) 그런데 수많은 여성분들이 이 말을 공감해서 뉴욕타임즈에서는 2010년 올해의 단어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미국언어연구회의 2012년 가장 창조적인 단어 후보에도 올랐고요, 심지어 옥스퍼드 사전에도 등재된 말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분들이 공감했다는 뜻이겠죠.

그래도 이 말에 공감이 안되는 분들이 있다면 아마 주로 남성 청취자분들이실 것 같은데요, 인터넷에서 운전을 정말 이상하게 하는 사람들을 보고 ‘김여사’라고 하죠? 사실 그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고, 또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성이 김씨인지 이씨인지 모르는데요, 아무렇지 않게 우스개 소리랍시고 이상하게 운전하는 사람을 보고 ‘김여사’라고 부릅니다. ‘김여사’라는 말 속에는 이미 여자는 남자보다 운전이 미숙하고, 여자들은 운전을 더 배워야 한다는 ‘멘스플레인’적인 태도가 담겨 있는거죠.

 

4.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김여사’라는 농담에 그런 비하의 의미가 있을 수 있네요. 그 외에도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 유독 많기는 한 것 같아요. 된장녀, 김치녀라는 말도 그런 것 중 하나죠.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요즘 커피전문점에서 커피 한잔 5000원 하는데 그걸 여성분들만 특별히 더 마시는게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그런 구매 행위는 생각이 없다고 남성들이 여성들을 비판하면서 ‘된장녀’라고 부르는데 사실 굉장히 모욕적인 말이지요. 그러니까 멘스플레인은 생각보다 대단히 광범위하게, 남성들도 별로 의식하지 않지만 어디서나 일어나고 있는 현상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리는 책의 저자 리베카 솔닛이 이 말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리베카 솔닛이 얼마나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저자인지, 또 뛰어난 언어 감각의 소유자인지를 짐작하게금 합니다. 오늘 소개해드리는 <멀고도 가까운>이란 책 역시 리베카 솔닛의 정말 놀라울 정도의 감수성과 아름다운 언어가 직조된 책인데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 묵은 저의 상처를 용기를 내어 다시 끄집어 내어 바라보고, 어루만지고, 치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멀고도 가까운>, 이 책은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책입니다만, 굳이 정리하자면 ‘치유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5.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라, 어떤 이야기일일까요?

 

제목부터 말씀을 드려보고 싶은데요, 이 책 제목이 <멀고도 가까운>이잖아요? 혹시 진행자님께서는 멀고도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분이 계신가요? (대답)

네, 다들 그런 관계들이 조금씩은 있으실텐데, 레베카 솔닛에게는 바로 그녀의 어머니가 그런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모든 것을 질투했다고 해요. 딸의 눈부신 금발도, 글쓰기 재능까지도 질투했지만 정작 나이가 들어서는 다른 자녀들을 다 제쳐두고 오직 리베카 솔닛에게 의지하고, 부르고, 청을 했다고 합니다. 이 책의 작가 역시 어머니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책에서 솔닛은 자신이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쓰기도 하니까요. 이 책에서 작가인 리베카 솔닛과 어머니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을 이루는 중심 이야기 중 하나에 해당됩니다.

이 책은 어머니와 작가 사이의 멀고도 가까운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점점 더 멀어져 가는 의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리베카 솔닛의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병, 그러니까 치매를 앓고 있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이 생기면 어린 아이와 비슷해진다고 하지만 사실 기억은 어린 아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점점 더 기억을 쌓아가고 점점 더 멀리가지만, 알츠하이머를 앓는 이들은 그동안 쌓아뒀던 기억을 하나씩 허물어가고 점점 더 자기 안으로만 들어가게 되죠. <멀고도 가까운> 이라는 제목은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6.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어머니와 그녀의 딸인 작가의 이야기라 할 수 있겠네요. <멀고도 가까운>이라는 제목이 이해가 됩니다. 치매를 앓고 있는 내 어머니는 자신의 딸도 알아볼 수 없을만큼 기억이 손상되어버리면 자녀 입장에서는 ‘멀고도 가까운’ 존재로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네, 그렇지요. 그런 이야기도 이 책에 나오는데요, 리베카 솔닛이 말하는 알츠하이머병 환자 가족에게 가장 짜증나는 질문은 “어머니가 당신을 알아보나요?”라고 해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알아본다는 말에는 다양한 뜻이 있고, 어떤 의미에서 어머니는 나를 단 한번도 알아보지 못했다. 나중에는 어머니가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우리 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았다”고 해요.

 

7. 아, 왜요? 너무 슬픈 일일 것만 같은데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가 나를 알아본다는 게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 무렵에, 내 목소리나 다른 특징이 어머니에게 익숙한 무엇이 되어서 당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어머니를 나를 더 진실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나 역시 어머니를 더 진실하게 알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피상적인 것이 벗겨져 나가자, 어머니라는 인간성의 핵심, 그리고 그 연약함이 날것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8. 그러니까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게 되면서 오히려 어머니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거군요.

 

그런 것 같아요. 어머니 역시 자신의 딸을 알아볼 수 없게 되자, 딸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자신에게 익숙한 대상으로 여기게 된 것 같아요. 딸에 대한 기대, 자신의 거울로 살아줬으면 하는 욕심,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딸이 가졌다는 것에 대한 분노를 모두 내려 놓자, 비록 자신의 딸이라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리베카 솔닛이라는 한 인간을 그대로 바라보게 되는 거죠. 리베카 솔닛 역시 자신이 가진 어머니에 대한 기대, 분노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겁니다. 알츠하이머병이 두 사람의 관계를 ‘멀지만’, 그러면서도 ‘가까운’ 관계로 만들어준거지요.

 

이 책의 제목은 지금 말씀 드린 이야기 외에도 정말 다양하고도 많은 은유를 담고 있습니다. 금방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책은 어머니와 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리베카 솔닛 본인의 아이슬란드 여행기이기도 하구요, 또 작가가 힘든 병을 얻고 치유하는 과정을 쓴 책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이야기가 중첩적으로, 몇 겹으로 짜여져 진행이 됩니다. 보통의 책들처럼 하나의 이야기에 하나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와 겹쳐지고, 처음 나온 이야기가 가장 마지막에 나오기도 합니다.

 

이 책의 목차가 재밌는데요, 이 책은 1장부터 13장까지 모두 13개의 이야기가 있는데요, 1장과 13장, 2장과 12장, 3장과 11장, 이런 식으로 5장과 9장이 제목이 같습니다. 1장 제목이 살구인데 13장도 살구에요. 마치 책 전체가 실을 감았다가 중간부터는 다시 감은 실을 푸는 것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9. 정말 특이한 구조네요. 책의 목차를 보니까 6장은 감다, 7장은 매듭, 8장은 풀다네요.

 

네, 그리고 다시 9장에는 5장과 같은 제목이 붙습니다. 두 이야기가 하나의 쌍을 이루는 건데요, 작가는 6장까지는 이야기로 기억을 감아올리고, 9장부터는 이야기를 기억을 자신에게서 떠나 보내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책의 구조 역시 <멀고도 가까운>이라는 제목처럼 이뤄져 있는거죠. 이 책은 작가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면서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이야기하고, 체게바라의 혁명을 이야기하고, 아이슬란드의 늑대를 이야기하고, 프랑켄슈타인, 어릴적 읽었던 나니아 연대기를 끄집어 내어 다시 읽고 풀어내며 작가가 어머니와 화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제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와 어떻게 대화할 수 있었을까요? 작가가 여러 ‘이야기’를 가져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프랑켄슈타인, 체게바라, 안데르센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말이 가진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에게 공감할 수 있게 된다는 거지요. 작가는 여러 이야기를 통해 이제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10.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것을 통해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임을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정리해주시지요.

 

제가 늘 이 방송에서 한 주에 한권 책을 소개해드리고 있지만 항상 책 소개가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책을 소개한다는 것이 뭘까, 책을 제대로 소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좋을까,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까..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쩌면 제가 그동안 소개했던 책 중에 가장 소개하기 힘든 책 중에 하나였어요.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인 책인데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책이라 짧은 소개가 오히려 책의 가치를 훼손시킨다는 느낌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어떻게 소개해도 소개를 잘할 수가 없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애청자분들에게 꼭 추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읽어봐야지만 그 가치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책이니까요.

 

한가지 더. 최근에 있었던 강남역 살인사건이라는 초유의 여성혐오 범죄가 있었죠? 이 책을 읽으면 여성의 삶에 대해, 고통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인간에 대한 성찰이 있는 문학이자, 철학적이며 치유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통해 한 여성의 삶을,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의 삶의 이야기도 감아 올리게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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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개정판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매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이번 주에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현실문화에서 만들고, 매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가 쓴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는 책입니다. 저는 서양미술사에 관심은 있지만 아직 이해가 부족한 분들이 미술에 관련된 책을 소개해달라고 하면 먼저 이 책을 소개해드립니다. 왜냐하면요, 서양미술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도 이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서양미술에 대해서 아는 척하기 정말 좋거든요. 물론 단지 ‘아는 척’ 하는 수준을 넘어서 서양미술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주는 좋은 책이라 오늘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2. 보통 서양미술사 관련 서적은 너무 두껍잖아요. 유럽 여행을 가기 전에 서양미술사를 한번 봐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고대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는 긴 내용을 보면 읽다가 질려 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네, 저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요, 사실 서양미술사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접근하는 분이시라면 유명한 책이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라는 책을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사실 곰브리치 책은 고전에 해당하는 책이고, 많은 분들이 갖고 계신 책이지만 정작 읽은 분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말씀하신대로 책이 너무 두껍거든요. 모두가 읽은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읽은 사람이 몇 없는 책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책입니다. 제가 얼마 전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오신 선생님과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 분께서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로 미술사를 공부하셨다고 하더라구요. 곰브리치는 사실 고등학생들에게 서양미술의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서문에 밝히고 있을 만큼 쉬운 필치로 이 책을 썼지만 거장이 들려주는 미술 이야기는 미술사에 대한 가장 균형잡힌 서술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제가 소개해드린 책인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를 보면 곰브리치 뿐 아니라 보통의 서양미술사에서 다루는 많은 작품에 대해서 ‘미술이 아니었다’라고 합니다. 심지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03년 경에 그린 <모나리자>도 미술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3.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미술이 아니었다구요? 뭔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데요, 왜 <모나리자>가 미술이 아니었다고 하는 거죠?


 <모나리자> 뿐만이 아닙니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라는 작품도 많은 분들이 아실 겁니다. 아담과 신이 서로 팔을 벌려 손가락을 내밀고 있는 위대한 작품 중 하나인데요, 이 책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에서는 이 작품도 미술이 아니었다고 해요. 아마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가보신 분은 2층 회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 있는 머리가 잘려나간 여신을 조각한 석상을 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사모트라키의 니케 상>이라는 미술사에서 빠지지 않는 위대한 걸작 중에 하나인데, 심지어 이 작품도 미술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4. 도대체 왜 그 모든 작품들이 미술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거죠? 


네, 아마 이 방송을 듣고 계신 청취자분들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것 같은데요, 이 책을 처음 펼치면 나오는 내용이 바로 이겁니다. 작품 하나를 보여주고 ‘이것은 미술이 아니었다’, 또 다른 작품 하나를 보여주고 ‘이것은 미술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30페이지가 지나갑니다. 저도 읽고 무척 당혹스러웠는데요, 왜 우리가 모두 미술이라고 알고 있는 작품들에 대해서 ‘미술이 아니었다’고 단언하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어가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요, 이 책의 저자인 매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에 따르면 ‘미술’은 근대, 그러니까 지난 200년 간의 발명품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모나리자>, <아담의 창조>는 모두 200년도 훨씬 전에, 근대가 시작되기 전에 만들어진 그림들인데요, 근대 이전의 사람들이 만든 이렇게 훌륭하고 뛰어난 그림과 물품, 건물들이 근대가 시작되면서 ‘차용’되어 미술로 변형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 따르면 우리가 아는 미술은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2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거지요. 


5. 아, 그러면 ‘미술’이라는 것이 발견된 것이 200년 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 이전에 그려진 작품은 원래는 미술이 아니었다는 말인 거지요? 그런데 저는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요,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고, 건축하는 모든 것이 ‘미술’이고, 그런 거라면 기원전부터 이뤄져왔는데요, 왜 미술이 200년 전에 나타난 발명품이라고 말하는건가요?


네, 정확한 지적이신데요, 이 책에서는 미술을 단지 그리고, 조각하고, 건축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리는 책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에서 말하는 미술은 “미술관에 전시되고, 박물관에 보존되며, 수집가들이 구매하고, 대중매체 내에서 복제되는 그 무엇”을 말합니다. 그래서 미술가가 미술작품을 창조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소용이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미술작품들은 미술의 여러 제도들, 그러니까 말씀드린 대로 갤러리나 미술사, 미술출판, 박물관, 미술관 등에서 순환하면서 현대 세계의 다른 무엇보다 상대적으로 더 깊은 의미와 중요성을 획득하게 되는 거죠. 한 마디로 말해서 어떤 작품을 미술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전시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데요, 아시다시피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니까 미술관에 걸려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미술관이 없었기 때문인데요, 사실 최초의 공공박물관은 베를린에서 1822년에 만들어진 알테스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정말 200년 밖에 되지 않았죠? <모나리자>도 마찬가지인데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하구요, 루브르 박물관이 생기고 나서 전시되기 시작했으니까 애초부터 미술관에서 전시되거나 보존된 것이 아니니 원래는 미술이었다고 할 수 없는 거지요.


6. 미술관에 전시되거나 복제되는 것을 미술이라고 한다는 책의 메시지는 이해가 되는데요, 그래도 뭔가 좀 찜찜한데요. 보통 자신이 직접 그리거나 조각한 작품이라면 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네, 그런 찜찜함을 충분히 이해하는데요, 문제는 자신이 직접 그리거나 조각한 작품 모두를 미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자신이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면 미술이 아니게 되는 거지요? 자신이 직접 그리거나 조각한 것이 아닌데도 우리 모두가 미술 작품으로 알고 있는 작품이 있는데요, 바로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모르는 분들은 아마 인터넷 검색을 해보시면 바로 이미지를 보실 수 있을텐데요, 이 작품은 1913년에 뒤샹이 만든 작품인데, 이게 뒤샹이 만들었다고 말하기는 좀 애매한 구석이 많아요. 왜냐하면 뒤샹이 <샘>이라고 이름 붙인 이건 그냥 시중에 파는 남성용 소변기거든요. 뒤샹이 한 일이라고는 뉴욕의 어느 화장실 용품 매장에서 남성용 변기를 사서 거기다 서명을 하고, 작품을 출품한 것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뒤샹이 직접 만든 작품이 아니죠.

 심지어 뒤샹이 했다고 하는 서명도 자기 서명이 아니에요. 이 작품에서 서명을 자세히 보면 '뒤샹‘이라고 되어 있지 않고 ’머트‘라고 되어 있습니다. 머트는 변기회사 이름이었습니다. 심지어 지금 미술관에 전시된 <샘>은 뒤샹이 1913년에 출품했던 그 변기가 아닙니다. 뒤샹이 전시회를 마친 후 바로 폐기해버렸는데, 그걸 1960년대에 다시 사진을 보고 복제해서 지금 전시되고 있는 거죠. 그러면 뒤샹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 보기 힘든 이 작품 <샘>은 미술일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7. 그렇게 보면 단지 직접 그리고 만든 모든 것을 미술이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되는 거겠네요. 뒤샹이 그러면 미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변기에다가 <샘>이라는 제목을 붙인 걸까요? 뒤샹 정말 그렇게까지 생각했을까요?


뒤샹은 분명히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했습니다. <샘>이라는 작품으로 뒤샹은 현재의 우리 것이 아닌 다른 문화와 시대의 사물들을 미술로 취급하고 이해하려는 것을 꼬집었다고 할 수 있어요. 뒤샤이 화장실의 변기를 미술 전시회의 좌대 위에 올려두고 ‘샘’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변기를 미술로 바꾼 것은, 미술사가들이 기원전 190년 경에 만들어진 <사모트라케의 니케상>을 좌대에 올려두고 미술관에 전시해서 ‘미술’이라는 세례명을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거죠. 뒤샹은 아프리카 제사용품에 대해서 ‘원시미술’로 부르는 미술계 문화에 대해서 이런 말까지 한 적이 있습니다. “종교적 물건들에 ‘미술’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우리들이며, 사실 그러한 단어는 원시인들에게 존재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다만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해 이 개념을 창조했으며, 사실상 우리 자신만의 용도를 위해 이를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8. 미술사에 다뤄지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원래는 미술이 아니었다는 생각은 그동안 별로 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사실 이 책의 생각이 아주 새로운 것 같아 보이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에서도 많이 경험하는 것인데요, 아주 영리한 학생이 있다고 해도 그 학생이 성적이 잘 나오지 않으면 학교에서는 영리하다는 말을 못 듣습니다. 영리하더라도 영리한 게 아닌거죠. 우리나라 많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가 없으면 교수로 임용하지 않는데요, 음악이나 미술을 전공하신 분들 중에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학위는 없는 분들이 많이 있거든요. 그런 분들도 학위라는 제도에서 벗어나 있으면 대학 사회는 그 분들의 실력이 있더라도 교수로 임용하지 못하게 되는 거에요. 분명히 불합리한 면이 있지만, 미술이라는 것 역시 이런 제도와 무관한 게 아닙니다. 

 사실 오늘은 미술관과 미술에 대해서 주로 말씀을 드리게 되었지만 어떤 작품을 미술로 규정하는 것에는 다른 요소도 많이 있습니다. 서양미술사에서 사실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거의 소개되지 않습니다. 주로 여성들은 그림에 벗은 몸으로 나오는 등장인물이 될 뿐 그림을 그리는 주체로 묘사되는 경우는 잘 없거든요. 무엇이 미술인지를 규정하는 것에 가부장적 가치관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책은 서양미술사가 말해주지 않는 서양미술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그 어떤 책보다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책입니다. 왜 미술사에는 여성이 없는지, 예술이라는 것은 무엇인지, 미술창작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풍부한 그림과 함께 쉽고 재밌게 알려주는 책이에요.


10. 끝으로, 이 책 소개해주시는 이유 말씀해주시죠.


최근에 조영남씨의 작품들이 대작이다 아니다를 두고 논란이 되었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저는 대작인지 아닌지 말할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저는 이번 논란이 우리에게 “무엇이 미술인가”를 두고 생각할 기회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분들은 현대미술에서는 마치 뒤샹처럼 직접 그리거나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대작이 나쁜 것만도 아니라고 하시지만, 또 많은 분들은 조영남씨의 작품처럼 회화 작품이라면 작가의 개성이 직접 그리는 중에 나타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작은 사기였다고 합니다. 어느 쪽으로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 전에, 조영남씨의 그림을 구매한 분들이 아니라면, 좀 거리를 두고 이런 주제의 문제를 생각하는 일이 아주 재밌는 일입니다. 과연 조영남씨의 작품이 대작일까? 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작이라도 미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회화에서는 왜 대작이 어려울까? 


이런 문제를 스스로 고민하고 주변의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는 것이 많은 미술지식을 배우는 것만큼이나 가치 있는 일일 겁니다. 저는 이 책이 이런 문제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해서 여러분께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의 제목대로 조영남씨의 작품을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을 통해 이런 질문에 답을 찾아보시는 한 주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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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 - 후쿠시마와 식민주의, 후쿠시마와 연대, 후쿠시마와 예술
서경식.정주하 외 지음, 형진의 옮김 / 반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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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교통방송에서는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 한다는 것>을 소개했다. 지난 주에는 대구에서 상화문학제가 있었고, 그 때문에 이 책을 소개했다. 이 책은 정주하 작가의 사진전을 중심으로 이뤄진 대담을 모은 것인데, 정작가의 사진전 제목이 바로 이상화의 시 제목이기도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기 때문이다. 최근 평화박물관 사태로 말이 많은데 이 제목을 제안한 이는 한홍구 선생이었다고 한다. 최근 사태의 진실은 잘 모르겠지만 깊은 생각을 길러내는 제목이었다고 책을 보며 새삼 느낀다. 그리고 나 역시 마루키미술관에서 이 전시를 본 적이 있는데, 사진전에 직접 갔을 때보다 이 책을 읽은 것이 사진을 두고 생각하기에는 더 좋았던 것 같다. 좋은 책인데 더 많은 분들이 읽으시면 한다.


아마 정주하 작가나 서경식 선생님은 불편하실 수도 있었겠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은 역시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에서 있었던 대담을 담은 부분이었다. 거기서 히가 도요미쓰는 오키나와 출신의 사진작가인데, 정주하 작가의 사진에 뼈와 피가 없는 것에 대해서 묻는다. 왜 그런 건 찍지 않는가. 서경식 선생이 오키나와와 후쿠시마가 연대할 수 있다고 하자 오키나와는 침탈된 것이고, 후쿠시마는 자기 욕심에 스스로 그런 피해를 입은 것인데 이제와 원전 피해를 입었으니 연대하자는 건가 하고 되묻는다. 그리고 이런 질문이 이어진다. 모두가 원전 피해를 입어야 연대할 수 있다는 건가? 아마 책 전체에서 정주하 작가의 사진전 제목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어두운 대답이 아니었나 한다. 정희진 선생은 히가 도요미쓰의 마지막 질문에 대해 무어라고 대답할까. 아마 정희진의 <피해를 공유하는 방법>에서 쓰고 있는 이 말이 아닐지.


"원전 자체를 없애야 하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므로 일시적인 ‘해결’은 피해를 보편화하는 것이다. 행하는 사람(주체)과 당하는 사람(대상)의 구분을 없애고 타자(他者)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실험이다."

후쿠시마라면 이런 방법도 있겠지만, 오키나와의 피해는 어떻게 보편화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결국은 빼앗긴 들에 대한 기억으로 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

  • 서경식 정주하 외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이번 주에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반비에서 만들고, 서경식과 정주하 외 여러분들이 함께 나눈 대화를 정리한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정주하 선생은 사진작가인데요,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후쿠시마 지역에 있던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는 중대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정주하 작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2011년 11월에 후쿠시마를 방문해 후쿠시마와 피해가 컸던 미나미소마를 촬영하여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 만들어진 작품을 2012년 3월에 한달간 서울의 평화박물관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고, 2013년 3월부터 2014년 5월까지 일본 전역을 도는 순회전시가 열리게 됩니다. 후쿠시마 미나미소마 중앙도서관을 시작으로, 사이타마의 마루키미술관, 도쿄의 신주쿠 어느 갤러리,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 나가노의 우에다 시나노데생관, 교토의 리츠메이칸대학 뮤지엄까지 모두 여섯 곳에서 전시가 있었는데요, 그 때마다 진행되었던 정주하 선생과 여러 학자, 청중들의 대담을 엮어서 만든 책이 바로 오늘 소개해드릴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이라는 책입니다.


2. 그러면 이 책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정주하 작가의 사진에 관한 대담집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서는 일본인 사진작가들도 얼마든지 기록할 수 있었을텐데요, 한국의 정주하 작가가 일본에까지 가서 일본의 사고 현장을 촬영한다는 것이 언뜻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네, 아마 그렇게 여기시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 한국 작가가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대한 기록을 하는가? 일본인들도 얼마든지 기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 책을 읽어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제목의 시 아시나요?


3. 그럼요. 이상화 시인의 시죠.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하고 시작되는.. 게다가 이상화 시인은 대구 출신이라 대구 시민분들에게는 익숙한 시인이죠.


네, 아마 우리 청취자분들께서도 이상화 시인을 많이 아실텐데요, 제가 이 시를 말씀드린 이유는 정주하 작가가 후쿠시마를 촬영해 만든 이번 사진 전시의 제목이 바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였습니다. 이상화 시인의 시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거에요. 


4. 아 그래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는 일제 식민지 치하의 우리나라의 현실을 노래한 내용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것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 책 전체는 방금 말씀하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의 내용을 후쿠시마에 대해서도 읽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일텐데요, 원전 사고 이후에 후쿠시마라는 지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방사능에 땅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고, 거기서 목축을 하거나 감나무를 재배하거나 농사를 짓고 어업을 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의 고향에 살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들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일본 제국에 의해 우리 고향을 빼앗겨 버린 것과 비슷합니다. 일제의 수탈과 징용으로 더 이상 고향의 들에서 살 수 없게 되어 버린 조선 사람의 처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제까지는 내 고향이었지만 지금은 “남의 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죠. 정주하 작가는 사진전의 제목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붙여 후쿠시마를 빼앗겨 버린 후쿠시마 지역의 사람들과 조국을 빼앗겼던 한국 사람들의 고통과 기억을 연대하려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진전의 제목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제목을 붙여 일본인들이 후쿠시마 사고로 인해 생긴 고통으로  식민지 통치를 기억하도록 하고, 한국인들에게는 일제 때의 수모와 고통을 기억하게 해서 후쿠시마 사고로 들을 잃은 자들의 고통을 상상하도록 하고 싶다는 것이죠.


5. 제가 방송 전에 잠깐 책을 봤는데요, 책 표지를 열자마자 정주하 작가가 전시한 사진이 컬러로 실려 있더라구요. 마치 사진집처럼요. 그런데 사진을 봤을 때는 이게 원전사고가 난 지역을 찍은 것인지 바로 알아채기 어려웠어요. 그냥 일상적인 풍경 사진처럼 보였거든요. 


 저는 이상화 시인이 대구의 시인이라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운데요, 제가 왜 이상화 시인 말씀을 드리냐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 시에서 한 사람은 빼앗긴 들을 걸으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 가구요,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고 웃습니다. “혼자라도 기쁘게 가자 /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그러니까 이 시를 언뜻 보면 조금도 슬프지 않습니다. 식민지 현실의 고통을 바로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돌아와 걷고 있는 이 땅은 이렇게나 아름다운 내 고향이지만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내가 땀을 흘려 일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고, 아주까리 기름을 바르고 지심 매던 사람들도 보고 싶어도 다 흩어져 더 이상 볼 수 없는 땅입니다.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 이 들판은 이제는 빼앗겨 버려 더 이상 우리 땅이 아닌거지요. 

 방사능 유출 사고가 후쿠시마에서 있었는데요, 방사능 사고가 났다고 해서 눈으로 봤을 때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방사능은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방사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살인마이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위험하지만 곧장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요, 후쿠시마는 청도처럼 일본에서는 가장 유명한 감 산지입니다. 그래서 곶감 생산이 후쿠시마 지역 사람들의 수입원 중 하나였는데요, 정주하 작가의 사진을 보면 감나무에 주렁주렁 감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을 따지 않아서 감이 나무에 매달린 채 홍시가 되어 축 늘어져 있습니다. 그냥 감을 따도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감 수확을 할 수 없는 이유가 많은 과일 중에서도 유독 감이 방사능에 취약하다고 해요. 보통 1킬로그램 당 100베크렐 이상의 방사성 물질이 들어 있는 식품은 출하할 수 없는데, 일단 감에서 그 이하로 검출되었다고 해도 이걸 곶감으로 만들면 수분은 빠져 나가고 방사성 물질은 남기 때문에 방사성 물질이 수백배로 농축된 제품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곶감을 만들어도 출하할 수 없는 거죠. 어제의 곶감이 더 이상 그 곶감이 아닌 겁니다. 


6. 아무리 식민지가 되었다고 해도 어제나 오늘이나 산과 들은 그대로인 것처럼 보여도 같은 들일 수가 없는 거네요. 


 후쿠시마에는 료젠이라는 아주 아름다운 산이 있는데요, 정주하 작가가 후쿠시마를 찾아간 11월에는 단풍이 곱게 들어 마치 우리나라 설악산처럼 장관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걸 보면 그저 아름답다는 느낌을 일단 받게 되는데요, 후쿠시마의 미나미소마 중앙도서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이 작품들을 본 후쿠시마 지역민들은 우리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감나무가 열린 아름다운 고향, 단풍이 아름다운 내 고향, 밤바다 위 하늘에서 빛나는 별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내 고향, 저 고향에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느낌에 큰 슬픔을 느낀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방사능의 위험은 10년 20년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수백년에서 수만년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한 인간이 80년을 산다고 할 때 인간의 척도로는 측정 자체가 불가능한 엄청난 피해지요. 이제는 내 고향의 아름다운 들을 이렇게 측정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방사능에게 빼앗겨 버린 겁니다.


7. 그러고보니 정주하 작가의 사진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어요. 풍경사진을 찍으려 사람을 일부러 찍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고향과 들을 떠나버려 아무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없었던 것이라 봐야겠군요.


 네, 맞습니다. 본래 예술은 뭐든지 직접적으로 잘 표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정주하 작가가 찍은 사진을 보면 돌인형인 귀여운 곰 한 마리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게 있습니다. 이 사진에서 무엇이 찍혀 있냐라는 물음에 대해 ‘바다입니다’, ‘곰입니다’는 제대로 된 답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여기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의 바다를 생각하고, 어떤 분은 작은 희망이라도 볼려고 하는거죠. 

 이 책에서 대담자 중 한 사람으로 사사키 다카시라는 분이 나옵니다. 사사키 선생은 현재 치매를 앓고 있는 자신의 아내와 함께 원전 사고 이후에도 후쿠시마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사사키 선생은 스페인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는데 사고 이후에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후쿠시마의 모습을 기록해 그것을 책으로 내기도 했어요.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는 책인데요, 사사키 선생은 정주하 작가의 사진과 이상화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해요. 자신이 어릴 적 살던 미나미소마에 200미터에 이르는 아주 높은 탑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딘가에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기차 창 밖으로 이 탑이 보이면 안심하기도 했다고 하고, 일본에서도 가장 높은 탑이라 자랑스럽기도 했다고 합니다. 마치 일본 도쿄에 있는 스카이트리처럼 콘크리트로 만든 이 탑도 일본의 국위를 드러내기 위한 용도였던 거죠. 그런데요, 이 탑이 언제 만들어졌냐면요, 1923년, 관동대지진이 있기 2년 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육중한 탑을 만들기 위해 사형수와 조선인들이 위험한 작업에 동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 사진전을 보면서 관동대지진 때 있었던 조선인 학살, 우리의 자랑이라고만 생각했던 200미터 탑의 역사,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원전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일본 정부의 이야기가 얼마나 허구에 가득찬 이야기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주하 작가의 의도대로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 고통 받았던 기억에 의한 연대가 이뤄지게 되는 것이지요.


8. 우리나라에도 여러 곳에 원전이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 지역에도 멀지 않은 곳에 원전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우리 청취자들께 마지막으로 이 책을 추천해주시는 이유 정리해 주시죠.


 지금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 시설과 위험은 정부의 통제 하에 완벽히 컨트롤 되고 있다고 하고, 결국 도쿄 올림픽까지 유치했습니다. 일본 정부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구요, 문제는 일본 정부의 이런 말이 명백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본 시민들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원전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고, 이 사고로 경기가 더 나빠지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에요. 정부와 기업과 일반 시민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후쿠시마 원전 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후쿠시마 지역 사람들의 고통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 책을 소개하고 추천드리고 싶었던 이유는요, 우리나라에도 원전이 많고 그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도 있지만 사실 가습기 살균제 사고 때문입니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우리 집 앞 원전의 노심이 녹아내려 내가 살던 고향을 빼앗아 가 버린 것처럼 정부와 대학의 교수와 글로벌 기업과 대형마트가 안전하다고 했던 가습기 살균제가 많은 이들, 특히나 어린 아이들의 목숨을 수도 없이 앗아가버렸습니다. 가습기 살균제의 피해는 방사능 물질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집계도 되지 않습니다. 가까운 분들 중에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직접 입은 분들이 없다고 해도 내가 가는 식당이나 회사 사무실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는지 일일이 확인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나도 그로 인해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후쿠시마 사고 이후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진 적이 없다는 것 아시나요? 우리나라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해서도 기업들은 모두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그것을 감독할 책임이 있던 정부도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사람들은 이제 자주 가는 식당과 커피샵도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여러분들에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질문을 드리면서 이 책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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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자 한국일보에 실리는 글. <다시 살충제를 뿌리며>.
며칠 전에 에프킬러를 뿌리면서 문득 든 생각을 글로 썼다. 일상은 평온한 듯 보일 뿐 사실은 조금씩은 불안하다. 

이런 호들갑과 유난스러움이 "연대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나저나 우리나라에서 육아하는 것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로.


다시 살충제를 뿌리며


 아이 엄마가 유난을 떠는게 싫었다. 몇 달 전에는 샴푸 성분이 체내로 흡수된다는 신문 기사를 읽더니 아직 반이나 남아 있던 샴푸를 버리고 친환경 샴푸로 바꿨다. 대형마트에서 파는 샴푸보다 족히 세 배나 되는 가격이었다. 며칠 전에는 작은 다툼도 있었다. 날씨가 더워지니 날벌레가 많아져 집안 곳곳에 살충제를 뿌려 뒀더니 모기보다 더 위험한 것이 살충제라며 구박을 하기에 그만 참지 못하고 “유난 좀 그만 떨어”라고 했던 것이 빌미였다. 별 해가 없으니까 이렇게 팔고 있는 것일텐데, 전문가들이 검증했다고 해도 믿지 않는 아내가 솔직히 가끔은 피곤했다.


 아내의 호들갑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난 연말에는 방사선량을 측정하는 선량계까지 구해왔다. 그리고는 일본에서 온 것으로 생각되는 집안 살림 하나 하나에 선량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우리 정부가 괜찮다고 했기 때문에 통관이 된 것이라고 해도 아내의 호들갑을 돌려 세울 수는 없었다. 일본산 피아노부터 측정을 시작해 일본에서 가져온 내 책까지 모두 검사대상이었다. 물론 기준치 이상은커녕 조금의 방사선도 검출해낼 수 없었다. 


 얼마 전부터는 식탁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어묵 볶음도 사라졌다. 어묵 제조 과정에서 사용되는 전분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만들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마트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어묵 한봉지를 그대로 버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아까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이 엄마가 불필요하고 비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것 같았다. 전분생산 공장이 그렇게 비위생적이라면 벌써 문을 닫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의심하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하나도 없지 않을까?   


 위험한 물질을 생산하고 판매해도 공장과 마트는 문닫지 않는다는 것을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사망한 사람이 200명이 훨씬 넘고, 피해자도 1500명이 넘는다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아마 집계가 되지 않은 피해 규모도 상당할 것이다. 내가 일하는 회사에서, 자주 가는 식당은 물론, 아이와 자주 가는 소아과, 아이가 다녔던 어린이집, 지금 다니는 유치원, 아파트 실내 놀이터와 트렘폴린이 있어 아이가 좋아했던 키즈 카페에도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을지 모른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보도가 한창이던 어느 날에는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 전화를 해볼까 하다 말았다. “그동안 유치원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쓴 적 있나요?”. 유난스럽다고, 호들갑 떤다고 비웃을까봐 그만 두기로 했다.


 서경식과 정주하 외 여러 사람이 참여한 대담을 엮은 책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을 보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서 그 누구도 책임 지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후쿠시마는 정부의 주도 하에 완벽하게 컨트롤되고 있다’는 정부의 공공연한 거짓말에 보통의 시민들까지 호응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이 중대사고가 경제 상황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어른들의 이기심’이 작동하고 있다. 나라와 전문가와 기업은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기는커녕 사실상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렇게 일상은 계속되고, 아무 일 없는 듯, 유난스럽지 않게, 호들갑 떨지 않고 사람들은 살아가지만 태연한 표정 뒤에는 ‘두려움’이 생겨났다. 


 다시 살충제를 뿌리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와 샤워를 하고, 로션을 발라 주고, 함께 사과를 먹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살충제를 뿌렸지만 예전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다. 설거지를 하는 중에 뒤편의 성분표시를 꼼꼼하게 읽어봤고 아이 입으로 들어가는 사과를 보며 미처 씻겨 내려가지 않은 농약에 대해 생각했다. 늘 하던대로 아이 몸에 로션을 바르며 TV에서는 내일 미세먼지농도가 높다는 뉴스를 듣는다. 울리히 벡이 현대사회를 “위험 사회”로 부른 것도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유난스러워진 것일까.

아내는 오랜 투병 생활을 하던 아버지를 간호하며 정부도, 의사도, 회사도 우리를 지켜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안전을 위해 국가와 사회계약을 맺는다는 말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가습기 살균제로 피해를 입은 가족의 인터뷰를 보며 아내는 몸을 떨며 울었다. 때로는 유난과 호들갑도 피해자들의 고통과 연대하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지 않을까.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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