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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보다>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안녕하세요? 이번 주에 제가 소개해 드릴 책은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만들고 김영하가 쓴 <보다>라는 책입니다. 앞서 제가 소개해드렸던 <내 서재 속 고전>이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의미심장한 내용이긴 했지만 읽어 내기는 쉽지 않은 면이 있는데요, 오늘 소개해드릴 <보다>는 읽는 맛이 아주 좋은 책이라고 먼저 소개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김영하 작가는 소설가로 알려지신 분이잖아요? 얼마 전에 <살인자의 기억법>이란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적도 있었죠?

 

네, 김영하 작가는 <살인자의 기억법> 뿐 아니라 <퀴즈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등 많은 소설을 쓰고 있구요, 최근에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기도 하셨어요. 그 뿐만 아니라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이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진행하기도 하는 등 문학 영역 전반에서 전방위적으로 활동하시는 소위 ‘스타작가’죠. 오늘 소개해드리는 <보다>는 소설이나 번역 작품은 아니구요,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입니다.

 

3. 재밌는 소설을 쓰는 스타 작가의 산문집이라... 어떤 내용일지 기대가 되는데요. 어떤 책일까요?

 

김영하 작가는 대략 4년 간을 해외에서 체류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보니 우리나라 사회가 너무 빨리 변해서 변한 것이 무엇인지 기록조차 하기 힘들었다고 해요. 해외에서도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 이를테면 숭례문 화재나 천안함 격침, 세월호 침몰 소식을 영상으로 보고 들을 수도 있었지만 우리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보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다는 거죠. 일상에서 보고 경험하는 것을 충분히 숙고하고 그것을 정연하게 써내려가려고 노력하면서 여러 매체에 김영하 자신이 경험한 일상에 대해 생각하고 글로 표현한 것을 싣게 되었다고 합니다.

 

좀 더 말씀드리자면, 이 책 제목의 ‘보다’는 그저 ‘see’, 어떤 대상을 그냥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보다’입니다. 오히려 ‘look’에 더 가깝습니다. 어떤 대상을 집중해서 주시하고 그 대상을 깊이 숙고하는 것이죠. 우리는 뉴스에서 본 것, 일상에서 경험한 것이라면 내가 보았다고, 겪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데요, 사실 ‘보는 것’은 쉬워도 ‘제대로 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잔과 같은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거장조차도 제대로 보기 위해 그렸던 사과를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해서 그리잖습니까? 이 책 ‘보다’는 김영하 작가가 일상과 사회를 제대로 보고자 노력했던 기록, 그리고 제대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그런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보는 것은 쉬워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김영하 작가가 어떻게 자신의 일상을 제대로 보고자 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 책 <보다>에는 재밌는 글이 너무도 많지만 제가 재밌게 읽었던 한 부분을 한번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택시라는 연옥’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췌해서 읽어드리겠습니다.

 

가정을 해보자. 술을 마시지 않는 나라의 택시는 어떨까. 밤이 늦기 전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아주 바쁜 사람들이거나 응급한 일이 있는 사람들만 심야의 택시를 이용할 것이다. 손님들은 모두 제정신이니 얌전할 것이고 기사들도 취객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라의 택시는 어떨까. 승객들은 시트에 밴 담배냄새가 자기 옷에 밸까 걱정할 일이 없이 쾌적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대중교통이 완벽한 나라의 택시는 어떨까. 늘 앉아서 이용할 수 있는 버스나 지하철이 그물망처럼 도시를 연결하는 나라의 택시는 부유충이나 이용하는 사치재일 것이다.

(중략)

 

택시 기사가 대기업의 정규직만큼의 수입을 올리는 나라는 어떨까. 난폭 운전이나 과속은 시켜도 안할 것이다. 자칫 사고라도 나면 좋은 일자리를 잃을 테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나라에 살고 있지 않다. 주류 소비량이 세계 최고 수준인데다 모여 마시기를 좋아하니 밤늦은 시각의 승객들은 거의 술에 취해 있다. 높은 흡연률로 많은 택시가 담배 냄새에 절어 있고, 대중 교통은 자리 잡기 전쟁이고, 기사들의 벌이는 최저 생계비를 겨우 넘기는 정도다. (중략)

 

아침에 일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기사가 딸린 회사 차를 타고 출근했다가, 그 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회사 임원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택시에 큰 관심이 없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마을 버스와 시내 버스를 갈아타고 시내 빌딩으로 출근해 하루종일 청소를 하고 밤에 집으로 돌아오는 가난한 여성에게도 택시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사물일 것이다. 택시는 엄청나게 부유하지도,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은 사람들과 관련이 깊다. 애매하다.

 

지금까지 읽어드린 부분은 김영하가 본 택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연옥처럼 ‘애매하다’는 것인데요, 작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이런 애매함이 2013년에 문제가 되었던 택시법 논쟁을 낳았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작가의 시선에서 보자면, 택시는 대중교통이 완벽하면 불황, 대중교통이 실패하면 호황을 누리는데, 2013년 택시법 문제의 진짜 원인은 대중교통의 성공이라는 거죠. 그렇니까 택시의 미래는 대중교통의 미래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수동적이고, 또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라는 성찰을 이끌어 냅니다.

 

5.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택시를 두고 이런 식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니 흥미롭네요.

 

택시 뿐 아니라 이 책에는 김영하 작가가 일상을 바라보는 재밌는 소재가 참 많아요. 예를 들면, 스마트폰, 신문사 식자공, 여행, 유니클로 티셔츠 등 일상에서 우리가 늘 자주 만나는 사물과 인물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 소설가가 풀어내는 재밌는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또 작가만의 깊이 있는 성찰이 더해져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하면 손에 내려 놓기 힘들 정도입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친구에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냈어요. “김영하가 쓴 산문은 달다. 아주 기분 좋고 깊은 맛이 나는 단맛이 난다”. 이렇게요.

 

6. 기분 좋고 깊은 맛이 나는 단맛이 어떤 맛일지 궁금해집니다. (웃음)

제가 그렇게 표현한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데요, 이 책의 많은 글이 김영하 작가의 개인적 일상, 그러니까 작가가 부산에 살게 된 이유, 대학 시절 유럽 여행에서 잠깐 마음이 갔던 부다페스트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 가정 방문 영어테잎 세일즈를 하다가 돈을 때일 뻔한 일 등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니까 타자의 삶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을 들여다 보는 재미가 읽는 이를 아주 기분 좋게 해요.

 

그런데 제가 그것을 또 깊은 맛이 난다고 한 이유는요, 김영하 작가는 말하려는 바를 직접적으로, 단도 직입적으로 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우회적으로, 많은 경로를 둘러서 전합니다. 한 예로 여기에 실린 거의 모든 글에는 김영하 작가가 읽은 책과 본 영화의 내용이 함께 결부되어 있어요. 40대가 된 작가가 부산의 어느 극장에서 <비포 미드나잇>을 보고 영화의 배경이 그리스인 것과 주인공의 직업이 작가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20대에 잠깐 함께 여행을 하다 그리스에서 헤어진 부다페스트의 여인을 떠올리고는 20대는 몸으로 살았고 40대는 머리로 살지만 모두 그 나름대로 좋았다며 인생의 의미를 숙고하는 식이죠.

7.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직접 하지 않는다는 지점이 재밌습니다. 바쁜 현대인들은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는 것을 답답하고 비효율적으로 느끼기 쉬운데요.

 

그래서 책이 팔리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말해야 하고, 말하고 있는 세상은 사실 굉장히 재미없는 세상이에요. 네비게이션 켜 두고 출발지와 목적지만 있는 여행이 재미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무미건조한 효율성만이 지배하는 세상이니까요. 문학이란 것은 바로 그런 흐름에 근본적으로 저항하는 겁니다. 20대는 몸으로 산다는 이야기를 그냥 하는 것보다, 내가 20대 유럽여행 당시 피렌체로 이동하던 중 열차에서 잠깐 본 부다페스트로 간다는 여자를 보기 위해, 피렌체로 도착해서 다시 가방 싸들고 무턱대고 부다페스트행 열차를 타서 그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됐다는 식의 이야기는 비록 길고 비효율적인 방식이지만 훨씬 더 설득력 있지 않나요? 우리는 모든 것을 효율성이라는 하나의 가치로만 바라보는 관습에 지배되어 ‘진정성’과 ‘감동’은 놓치고 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김영하 작가가 ‘빈부격차 문제’를 자주 쓰는 것도 그런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영하 작가의 말인데요,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그게 이 세상에 아직도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저는 이 책이 작가의 말대로 아주 잘 설계된 우회로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 <보다>외에 <말하다> <읽다> 3부작이 모두 완간되었습니다. 여러분들게 일독을 권합니다.

 

 

   ( 대구교통방송 라디오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책을 소개하는 코너에 나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소개해드리는 책을 이 곳에도 소개해드릴 생각입니다. 라디오에 나가는 대본 그대로 옮겨 둡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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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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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1. 안녕하세요? 지난 주 서경식 작가의 책에 이어 이번 주에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안녕하세요? 제가 이번 주에 소개해드릴 책은 자음과 모음 출판사에 만들고 사사키 아타루가 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책입니다. 제목이 좀 섬뜩하죠?

 

2.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라... 제목이 좀 무섭게 느껴지는데 어떤 책이죠?

 

그렇죠? 책 제목이 저도 무섭게 느껴지는데요, 책 제목은 파울 첼란이라는 시인의 <빛의 강박>에 실린 시구를 인용한 것이라고 합니다만, 책 제목에 대해서 작가가 어디에서도 직접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는 고민을 좀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남의 멀쩡한 손을 잘라 버리라고 하는 것일까요? 기도하는 소녀를 표현한 아름다운 그림들을 떠올려 보세요. 사사키 아타루는 바로 곱게 모아진 아름답고 가녀린 그 소녀의 손을 잘라라고 하는 거에요.

 

3. 설마. 기도하는 손을 정말로 잘라 버리라는 내용은 아니겠죠? 손을 잘라버리는 다양한 방법을 알려주는 잔혹동화 같은 책을 소개해 주실리는 없을 것 같은데요.

 

네, 맞습니다. 책의 제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책이 어떤 책인지를 좀 봐야 합니다. 이 책도 부제가 있는데요,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 바로 이 책의 부제에요.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이 책은 ‘책’에 대한 책이구요, 또 ‘혁명’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작가의 주장은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혁명이다”라는 거에요. 작가가 책을 읽는 것이 왜 혁명이 되는지를 두 주에 한번씩 5회에 걸쳐 2010년 강연한 내용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4. 그렇다면 일종의 강연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책을 읽는 것이 혁명이다라는 작가의 주장은 쉽게 와닿지 않는데요, 책 읽기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내용으로 보면 될까요?

 

아, 이 책이 책 읽기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것은 맞긴 합니다만, 사사키 아타루라는 작가가 이야기하는 ‘책을 읽는다’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책 읽기와 상당히 다릅니다. 편하게 안락의자에 앉아서 혹은 열차 안에서 좋아하는 책을 편안한 마음으로 읽으며 즐기는 책 읽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교수나 연구하는 사람들이 책상 머리에 앉아 논문을 읽는 식의 책 읽기와도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런 식으로 읽는 책 읽기가 우리에게 혁명이라 부를 만큼의 영향력은 가져다 주지 않잖아요? 즐거움을 주고, 지식을 주지만 ‘혁명’이라고 부를 만큼의 변화는 아니죠. 말하자면 사사키 아타루가 생각하기에 그런 것은 책 읽기가 아닙니다. 그건 그냥 정보를 얻는 행위이지, 책 읽기가 아니라는 거죠. 제가 이 책의 한 부분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는 다양한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미술관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영화보는 것도 그만두었습니다. 듣는 것을 그만두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만, 음악활동도 그만두었습니다. 텔레비전 보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잡지 보는 것도 그만두었습니다. 스포츠 관람도 그만두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담배도 끊었습니다. (중략)

 

그리고 다양한 정보를 차단하기로 했습니다. 친구가 하는 말밖에 듣지 않고, 친구가 권하는 것밖에 보지 않습니다. 그것도 이따금 있는 일입니다. (중략)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5. 세상과 완전히 차단하고 살아가고 있네요.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요? 책도, 영화도, 미술관도 가지 않으면서... 그렇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뒤처지게 되지 않을까요?

 

이 책의 작가인 사사키 아타루도 자기가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게 조금은 힘들다고 해요. 하지만 자신은 무식해지기로 했다, 어리석게 살기로 했다고 하면서 소위 온갖 정보들을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정보를 모으고 정보가 말해주는 대로 행동하는 식으로 살기 싫다는 거에요.

사실 우리도 정보를 끊임 없이 모으고 정보에 따라 살아가려고 악착 같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한 예로 인터넷 SNS 상에서 자주 공유되는 소위 ‘꿀팁’이라고 있지요? 어느 사이트에 가면 스마트폰을 좀 더 싸게 살 수 있다더라, 내지 사진을 어떤 각도로 찍을 때 가장 멋지게 보이는지, 부동산 투자를 통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팁이 있는지, 주식 투자를 할만한 회사는 어딘지.. 인터넷은 어떤 물건을 가장 싸게, 그리고 쉽고 편하게 살 수 있는지를 소개해주는 각축장 같아요.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요즘 출판시장이 어렵다고 해도 그건 문학이 그렇구요, 지식을 쉬운 말로 편하게 알게 해준다거나 직장 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시간 관리법에 대한 책들처럼 실용적인 정보를 담은 책들은 또 잘 팔리거든요. 책을 읽는다고 하지만 사실 ‘꿀팁’을 인터넷 대신 책으로 끌어 모으는 것과 다르지 않은거죠.

 

6. 그러니까 이 책의 작가는 우리가 책을 읽는 방식이 ‘꿀팁’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보는 거군요. 미술관에 가는 것이나 영화관에 가는 것,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모두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작가는 어떤 철학자의 말을 인용해서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라고 까지 하는데요. 모든 정보가 타락했다고 하는 것이니까, 아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라디오 방송도 작가의 관점에서는 타락한 것일 겁니다. (웃음)

 

7. 좀 극단적이라고 할까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지나치다고 느끼실 수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만 다른 쪽으로 생각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예를 들면 공부를 할 때 ‘배움’ 보다 ‘입시정보’가 중요해지거나, 집을 살 때 ‘내가 살고 싶은 곳’ 보다 ‘부동산 정보’가 더 중요해진 상황, 또 결혼을 할 때 ‘사랑’보다는 결혼정보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면 이건 타락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정보들을 긁어 모으는 것과는 다르다는 거죠.

 

8. 그러면 도대체 작가가 생각하는 책읽기란 뭔가요?

 

인지심리학 연구에서 본 내용입니다만 연구자가 실험참가자들에게 책을 읽으면서 줄을 치도록 했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모르는 내용 보다는 자신이 아는 내용에 줄을 치는 경향이 있었고, 아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 책을 읽을 때 책읽기가 즐거웠다는 반응이 더 많았다고 해요. 변화하기 위해 책읽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책읽기를 한다는 건데요, 사사키 아타루의 책 읽기도 이런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이 작가에게 책 읽기란 ‘책을 읽어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쉽게 말씀 드려서 그냥 책을 읽었다가 아니라, ‘오 맙소사, 책을 읽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느낌이에요.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이 책에 마틴 루터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요, 루터가 종교개혁을 불러온 혁명가이지 않습니까? 그런데요, 이 종교개혁이라는 대혁명이 ‘성서를 읽는 운동’이었다는 겁니다. 루터가 철저하게 성서를 읽었다고 하는데요, 성서를 읽어버리는 바람에 평범한 농민의 아들인 루터가 교황의 권위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또 다른 예는 마호메트인데요, 마호메트는 글을 읽을 수 없던 문맹이었는데 천사로부터 어떤 책을 ‘읽어라’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계시가 바로 이슬람 세계의 시작이라는 거죠. 그런 변화의 예가 이 책에 계속 소개되고 있어요. 앞서 제가 말씀 드렸던 실험에서 피험자들이 책을 읽는 것과 루터나 마호메트가 책을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인거죠.

 

9. 책을 읽는 것이 혁명이라는 말의 뜻이 바로 그런 것이군요. 책을 제대로 읽어버리면 세계가 바뀐다.. 책읽기에 그런 큰 힘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키 아타루는 책을 읽어버리면 사람이 미쳐 버린다고 합니다. 꿀팁을 얻는다고 해서는 미치지 않죠. 그런데 책을 제대로 읽어버리면 루터나 마호메트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미치던지, 세상이 미치던지 둘 중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기도를 할 필요가 없는거죠. 그 대신 책을 읽어버리면 되는 겁니다.

 

10.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제목이 바로 그런 뜻이군요.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혁명을 일으키기에는 기도보다는 책 읽기를 하는 것이 중요한데요, 이런 말을 작가가 합니다.

 

“대혁명이란 책을 읽는 겁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반복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은 시간상 루터의 예를 가져왔지만 책에는 오늘 말씀 드렸던 종교의 사례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11.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요?

 

글쎄요, 저자는 책을 반복해서 읽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 번 읽고 다시 고쳐 쓰면서 읽어라고 해요. 하지만 어떤 책을 읽으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건 작가의 관점에서 정보에 불과하니까요. 반복해서 읽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 반복해서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야 하겠죠? 오늘 소개해드린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구요,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는데도 책은 참 쉽게 술술 읽힙니다. 복잡한 일이 많은 요즘인데요, 이 책을 한번 읽어버리시길 추천드립니다.

    

 

   ( 대구교통방송 라디오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책을 소개하는 코너에 나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소개해드리는 책을 이 곳에도 소개해드릴 생각입니다. 라디오에 나가는 대본 그대로 옮겨 둡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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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 속 고전 - 나를 견디게 해준 책들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나무연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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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재 속 고전>

나를 견디게 해준 책들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안녕하세요? 제가 이번 주에 산 책은 나무연필 출판사에서 만들고 서경식이 쓴 <내 서재 속 고전>이라는 책입니다. 일종의 서경식의 독서기인데요, 그가 인상 깊게 읽었던 열 여덟 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서경식 작가와 이 책에 대해서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2. 저자인 서경식 작가는 저도 들어본 적이 있는데요, 혹시라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서경식 작가는 재일조선인으로 도쿄케이자이대학에서 인권과 예술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작가는 1971년에 발생한 유학생 형제 간첩단 사건으로 체포된 서승, 서준식 선생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68년에 재일조선인이라면 가능했던 북한을 방문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거지요. 그동안 일본 사회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고 거부를 받으며 살아왔는데, 형제들이 정치범으로 잡히게 되면서 한국에서까지도 거부를 당한 거지요. 그러니까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디아스포라가 된 겁니다. 서경식 작가는 디아스포라 즉,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라는 자기 처지에서 꾸준한 글쓰기를 해오고 있습니다. 이 책 역시 거부당하고 배척당한 한 사람으로 자신에게 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힘이 되어준 책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서재 속 고전>의 부제가 ‘나를 견디게 해 준 책’이지요.

 

3. ‘나를 견디게 해준 책’ 이라.. 그럼 서경식 작가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견디도록 도와준 책들은 책 제목대로 모두 ‘고전’들인가요? 고전은 뭔가 어렵다는 느낌이 있는데요..

 

일반적으로 ‘고전’이라고 하면 헤로도투스, 호메로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와 같은 그리스 로마의 위대한 고전이나 마키아벨리나 단테와 같은 르네상스 거장들의 저서를 떠올리고는 하는데요, <내 서재 속 고전>에는 소위 우리가 생각하는 이런 종류의 고전들은 한 권도 소개되고 있지 않습니다. 책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서경식이라는 한 개인의 서재 속에서, 서경식이 자기 처지에서 읽은 책들이지요.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지식인의 표상>이라는 책이 소개되는데요, 에드워드 사이드는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로 살았지만 사실 서경식과 마찬가지로 그도 실향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에드워드 사이드 역시 팔레스타인 출신이라 고향을 잃어 버렸거든요. 서경식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처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세상과 맞서 싸울 지적 기반을 얻게 됩니다. 서경식은 이 책에서 자신이 1990년대에 만일 사이들을 읽지 않았다면 자신의 정신적 방황은 지금보다 훨씬 더 의지할 데 없고 더 혼란스러웠을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4.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책을 ‘내 서재 속 고전’의 목록으로 삼았던 거군요. 그런데요, 고전이라고 하면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누구에게나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책을 말하지 않나요? 자기 자신에게 의미가 있었던 책이라고 해서 그것을 ‘고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고전은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는 보편성을 가지는 책을 말하는 것이지요. 서경식 작가도 그 점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다만 서경식 작가는 이 책에서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 누구에게나 울림을 줄 수 있는 책이라는 고전을 누가 결정하는 것인지, 고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현재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서양의 고전은 다수자의 관점에서 뽑힌 것들이 많습니다. 청소년들이 읽는 세계문학전집의 목록의 경우 서양의 백인 대학 교수들이 뽑아 놓은 것들이라 거기에는 흑인의 시선, 비서양의 시선, 교수가 아닌 비주류의 시선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아요. 서경식은 비주류의 시선에서 자신이 읽은 책을 시대와 지역을 넘어 스스로를 비주류로 여기는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려는 것이지요.

 

5. 그러니까 비주류들을 위한 고전이라는 뜻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서경식 작가는 늘 소위 잘 나가는 주류의 관점이 아니라 비주류의 관점에서 역사와 세계를 다시 써 내려오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 드리고 있는 <내 서재 속 고전>이 주류가 읽는 고전이 아니라 나라와 고향을 잃은 비주류의 관점에서 읽은 고전의 목록을 뽑아낸 것이라면, 서경식 작가가 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의 경우는 언뜻 보면 위인전처럼 보이지만 자세하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과 위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를 잃고 방황하고 싸웠던 사람들, 주류의 관습과 세계관이라는 큰 바위를 깨뜨려 보려 도전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요. 또 서경식이 쓴 첫 책이 <나의 서양 미술 순례>라는 책 역시 미술사에서 말하는 걸작들이 일방적으로 소개하는 식이 아니라 정치범의 가족으로, 또 고향을 상실한 사람으로 자기 자신에게 다가온 작품들을 소개하는 책이지요. 그러니까 서경식의 관심은 늘 이기고 승리한 사람들의 이야기 보다는 패배가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끊임 없이 싸웠던 사람들, 그래서 패배해버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6. 설명을 듣다 보니 저도 관심이 가는데요,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고전 중에 선생님께서 가장 인상 깊게 읽으신 부분은 어떤 부분인가요?

 

루쉰의 <망각을 위한 기념>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서경식 작가가 쓴 부분을 제가 조금 발췌해서 읽어보겠습니다.

 

“생각건대,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원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소설 『고향』의 말미에 있는 이 말을, 나카노 시게하루도 지적하듯이, 많은 사람들이 “밝은 얘기로, 앞길에 광명이 있음을 깨닫고 나아가는 이들의 구호로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읽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얘기가 아니다. 나카노는 “여기에서 희망이라기에는 너무 깊은 어둠과, 어둠 그 자체를 통해 필연적인 힘으로 솟구쳐 오르는 실천적 희망과의 생생한 교착”을 본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나카노는 루쉰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한다. “나 또한 좋은 인간이 돼야지, 나도 어떤 일이 있어도 올곧은 인간이 돼야지, (………) 일신의 이해, 이기라는 걸 떨쳐버리고 압박과 곤란, 음모가들의 간계와 맞닥뜨리더라도 그것을 참아내고 끝까지 나아가야지, 고립되고 포위당하더라도 싸워야지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그쪽으로 향하게 된다.”

 

생각건대, 이것이 시의 힘이다. 즉 승산이 있든 없든 그것을 넘어선 곳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런 루쉰의 정치와 문학의 결합을 나카노 시게하루는 “서정시 형태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라고 불렀다. 루쉰이라는 중국의 시인을 만나 일본의 시인 나카노 시게하루가 감동을 받았다.

 

여기에서 동아시아 근대의 만남이 빚어낸 어렴풋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렴풋한 가능성’조차 지금은 야비하고 천박한 소리들에 눌려 소멸의 위기에 처해 있다.

나도 젊은 시절 루쉰의 어두운 말에서 절망과 같은 모습을 한 ‘희망’을 발견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제 나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그게 어렵다.

 

서경식은 늘 가짜 희망을 경계합니다. 그저 잘 될 것이다, 대박이 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다라는 식의 말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라는 거지요. 오히려 진정한 희망은 루쉰이 그랬던 것처럼 절망 속에 깊이 침잠할 때, 그리고 희망을 향해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야 비로서 생겨난다고 봤어요. 서경식 작가는 젊었을 때는 두 형의 투옥으로 인해 깊은 절망을 느꼈고, 지금은 점점 더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과 아시아 정세에 절망하고 있기에 희망이란 원래부터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는 루쉰의 말이 더 무겁게 느껴졌을 겁니다.

 

7. <내 서재 속 고전>, 이 책을 지금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책을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주류가 아니다, 힘이 없다, 외롭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이 책이 그런 분들이 어려운 현실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거에요. 요즘 청년들이 금수저, 흙수저라고 수저계급론을 이야기하고, 우리나라를 헬조선, 지옥불 반도라고까지 표현하는 경우들이 있지 않습니까? 또 자영업 하시는 분들은 경기가 어느 때보다 어렵다고 많이들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이 책이 절망을 직시하고 희망을 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요, 이 책 마지막 장에는 서경식 선생이 젊은 인문학 연구자들과 함께 한 우리 시대의 고전 읽기에 대한 대담이 실려 있습니다. 저도 대담자로 참가해 함께 대화를 나눴었는데요, 그것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보시고,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고전도 읽어보시고, 서경식이 했던 것처럼 나만의 ‘내 서재 속 고전’을 꼽아 보시는 것은 어떠실까 합니다. 이상입니다.

   ( 대구교통방송 라디오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책을 소개하는 코너에 나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소개해드리는 책을 이 곳에도 소개해드릴 생각입니다. 라디오에 나가는 대본 그대로 옮겨 둡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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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
서경식, 김상봉 지음 / 돌베개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만남'은 언제나 외부와 내부의 만남이다. 대화가 대화이고자 한다면 나 아닌 다른 누군가와의 '소통'이어야만 대화이지 그렇지 않으면 독백(monologue)일 따름이다. 이 책 '만남'은 그런 의미에서 '소통'에 대한 열망, 곧 내가 아닌 '외부'를-서로 '서로'를- '주체'로서 정립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서경식은 그 자신을 '우리' 외부에 있는 사람이라 인식하는 디아스포라이다. 그런 탓에 김상봉은 그를 '디아스포라적 주체'의 현실태이자 역사적 표상이라 칭한다. 김상봉은 서경식에 대하여 스스로 '내부자'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꼭 '내부'일 수만은 없는 '내부의 외부'를 지향하는 자라고 자기인식한다. 이에 서경식은 그러한 김상봉 역시 '디아스포라'일 수 밖에 없다하고 이에 그들을 넘어선 '서로주체성'의 가능성이 깊이 있게 모색된다.

이 책 '만남'은 80년 광주, 6월항쟁, 8.15와 같은 우리 사회의 역사적 계기를 전유해 나가면서도 '지금-여기'의 우리가 사는 현 사태를 현상적으로(-서경식의 태도), 또 한편으로는 구조적으로(-김상봉의 태도) 파악해 나간다는 점에서 대담자들 스스로의 언급과 같이 '사건'이자 '역사적'이라 할만한 훌륭한 성취를 보여준다. '인간'과 '소통'을 의례적으로 둘러대는 결코-空談이 아닌 현사태 속에서 '인간은 무엇인가'-'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진면목으로부터 고찰하고자 노력하는 본 대화는 그런 의미에서 '소중한 통찰을 주는 것'과 더불어 '문제와 상황을 만나는 태도에 있어서 '각성'까지도 불러' 일으킨다. 그러한 태도의 각성이라 함은 곧 사유에 있어서의 근면함(김상봉)이며, 상황에 있어서의 감수성(서경식)이다. 대담자들의 '대화'는 나태함과 둔감함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새로운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그들을 내부와 외부의 소통 문제, 언어의 문제, 이념의 문제로 이끌어 갔고, 그것을 어떻게 이뤄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고민은 예술과 교양, 운동의 문제로 이끌어 갔다. 서로가 '외부-외부' 혹은 '내부-내부'로 만나는 몇몇의 지점이 아니고서야 그들은 대부분 '내부-외부' 혹은 '외부-내부'의 문맥에서 '만나기에' 목소리가 커지고 흥분하고, 감정이 상하고 긴장감이 형성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 독자들을 불편/불쾌하게 함과 동시에 책을 읽는 자신의 '내부성', '외부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므로 환영할만하다. '서로의 주체됨'은 리쾨르식으로 말하자면 해석학적인 긴 우회로로 정립된 것이기에 긴장이 없을 수 없지 않은가. 나는 그들이 주체로 정립되는 대화/대화의 내용을 통해 주체를 또한 확인/획득한다.

본서를 읽기 전에, 귀로 먼저 듣고 대담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이 대화에 얼마나 진지하고 열정적인 자세로 임했는지, 그들이 더 큰 '우리'를 고민하기 위해 어색함-감정상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모종의 단합으로 '우리-됨'에 천착하는 것을 피해가고자 했는지를 전하는 바다. '만남'의 성취가 큰 만큼 '만남'이 절실하고, 또 '만남'이 힘들고 어려운 만큼 '만남'이 더욱 소중함을 깨우치기에 책의 무거운 주제들만큼이나 불편한 세상에서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하게 하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서경식이 '책을 펴내며'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녹취를 하면서도 많이 느꼈던 김상봉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어법'은 이번 대담의 긴장을 상징하기도 하거니와, 녹취 당시에 녹취자에게 조차 불편함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이유인즉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도무지 논리적인 접속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논리적 도약 내지 완전한 역접을 의미하기에 때로는 김상봉의 주장이 다소 정연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의 끝으로 향하는 이 사회에서 '희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전복의 논리이며, 어둠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마땅히 지녀야 할 '실존적 주체'의 필수적 표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내부-외부의 그들은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남'이 가능했다는 것. 힘겨운 시대를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새로운 사회, 공동체를 향하게 하는 힘찬 전복의 논리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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