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 초엘리트 - 영국을 지배하는 이너서클의 습관, 약점, 그리고 악행
사이먼 쿠퍼 지음, 김양욱.최형우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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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80년대 옥스퍼드 대학의 풍경을 주로 묘사한다. 사이먼 쿠퍼에 따르면 80년대 옥스퍼드는 중세적 분위기 속에서 수학과 과학을 경시하는 분위기의 얕은 지식으로 ‘수사학’이 주를 이루고, 이튼 출신의 특권의식에 절어있는 ’교만한 학생들’로 가득차 있는 공간이었다. 화이트헤드를 배출했고, 9대 사립학교에 해당하는 슈루즈베리의 교장은 ‘자연과학은 교육의 기반이 될 수 없다’고 했을 정도로 사립학교들이나 옥스퍼드나 자연과학보다는 라틴어와 문학을 더 중시하는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의 어떤 부분은 ‘황색언론적인 편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이건 당시 영국의 분위기이기도 했던 것 같다.


“나는 얕은 지식으로도 글을 쓰고 이야기하며 밥을 벌어 먹고사는 방법을 옥스퍼드에서 너무 잘 배웠다”(35쪽)


사이먼 쿠퍼의 이 책은 옥스퍼드를 ‘삐딱하게 보기’를 통해 이튼을 거친 옥스퍼드 출신의 엘리트들이 얼마나 ‘모자라고 교활하며, 특권의식에 젖어 있는지’를 그들의 대학생활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면서 폭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책의 전반부는 주로 보리스 존슨에 관한 것이다. 그가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했던 협잡들, 상대를 비꼬는 데 능숙한 화법들. 이후에는 데이비드 캐머런, 리즈 트러스, 리시 슈낙 등 옥스퍼드대학 출신들의 ’별 것 없음‘을 파헤치고, 브렉시트가 어떻게 옥스퍼드적 전통에서 비롯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영국을 통치하는 것은 그들의 계급이 가진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럽연합 정부에 있는 외부인이 이러한 특권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렇게 보수당의 유럽 회의론은 어떤 면에서는 우버 택시에 맞서 싸우는 개인택시 기사들의 투쟁처럼 일자리 보호를 위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사립학교 출신 옥스퍼드 학새들은 그들이 통치할 나라를 그들 자신의 계급과 동일시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의 국력이 약해졌다고는 해도, 누군가 영국에게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은 여전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132쪽) 


80년대 중반 옥스퍼드의 분위기, 엘리트 집단의 사고가 한 국가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읽고 있노라면, 브렉시트가 유럽연합의 ’분담금‘ 때문이라던가, 난민 수용에 대한 부당한 요구 때문이라던가, 독일과의 경쟁심 때문이라던가, 영국 내 노동계급의 일자리 부족 때문이라던가 하는 분석은 조금은 피상적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브렉시트와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은 ‘영국 귀족과 그들이 다닌 학교들에서 그들에게 심겨진 심성’이 만들어 낸 것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166쪽에는 이런 말도 있다. “작가 존 스칼지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은 난도가 ‘쉬움’으로 설정된 현실 세계라는 타이틀의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성인이 되면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들은 보리스 존슨을 위시한 이튼 출신의 옥스퍼드 졸업생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기자 출신의 작가는 ‘인신공격적’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옥스퍼드 초엘리트를 비판하지만, 사실 이 책의 제목이 이 책을 오해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이 책의 원제는 ‘Chums'로 번역하자면 ’끼리끼리‘, 혹은 ’계-꾼들“ 혹은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는 ‘카르텔’ 같은 것이다. 작가가 옥스포드 카르텔로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에는 이들의 카르텔이 단순한 이해관계에 입각한 ‘이익공동체’라기 보다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러니까 프렙스쿨을 거치고 세컨더리 사립학교를 거치며 만들어진 ’친구들끼리‘, 혹은 귀족 집단의 농담과 말을 이해하는 집단들끼리의 관계를 강조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로 치면 정치인들이 치열하게 정책과 이념 등으로 모이고 싸우는 것처럼 ’겉으로‘ 보이더라도 알고 보면 경기고등학교에서부터 대학을 거치면서 이념/정책 따위와는 무관하게 서로 서로 어릴 때부터 친구로서 밀어주고 끌어주고 있는 관계를 만들고 있는 그런 관계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옥스퍼드 초엘리트’라는 제목으로 읽게 되면 ’chums'가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원리보다 보리스 존스나 데이비드 캐머런 같은 인물들의 보잘 것 없음에 지나치게 관심이 쏠리는 식의 독해를 하게 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인물들이 어떻게 그런 ‘끼리 끼리’ 집단에 들어가서 정치 거물로 성장하고, 그 집단이 어떤 위험한 국가적 결정을 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음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사이먼 쿠퍼는 옥스퍼드의 개혁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더이상 옥스퍼드 대학은 수사학적 토론 기술만 가르치는 대학도 아니고, 과학, 수학을 경시하는 얕은 지식인을 만들어 내는 대학도 아니고, 학생에게 직장 생활에 준하는 40시간의 학습을 요구하는 ‘학술적으로 성장한 대학’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공립학교 비율을 높이고, 노동계급 출신을 우대한다는 점에서 ’공정한 대학‘으로 변하고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런 노력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단언한다. 옥스브릿지대학에서 학부를 폐지하자는 것이다. 학부제 폐지 주장은 옥스브릿지가 ’chums'를 형성하는 플랫폼으로 작동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지, 초엘리트들에 대한 개인적 반감 때문이 아닌 것이다. 1억에 육박하는 이튼 등록금을 내고도 옥스브릿지에 가지 못한다면, 옥스브릿지에 가는 것이 오히려 그 등록금이 방해한다면 'chums'는 만들어질 수 있을까? 


이 책의 분석과 제안, 서술방식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이 이뤄지는 공식적 입장이 아닌 비공식적, 사적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훔쳐 보는 것이 주는 즐거움을 준다. 정말로 재밌는 책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보리스 존슨과 이튼, 옥스퍼드의 힘은 비슷한 수준에 라이벌 구도를 그린다고 알려진 리시 슈낙, 해로우, 캠브리지의 힘보다 훨씬 더 강하고 무서운 것이라 쉽게 해체하기도 힘들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옥스퍼드대학 출신이 쓴 이 책은 ‘끼리끼리’ 문화에 대한 일종의 내부 폭로다. 이 책은 서울대 출신, 검사 출신, 의대 출신의 ‘chums'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물론 내게는 영국 교육에 대해서, 영국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성찰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옥스퍼드 유니언을 연구한 피오나 그레이엄은 ”영국적인 관념에서 괴짜는 사회를 비판하며 사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산이 사회의 필수적인 부분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녀는 괴짜는 일반적으로 신념에 순응하며, ‘태도, 옷차림, 언행, 눈치 같은 외형적인 방식’에서만 괴팍할 뿐이라고 이야기한다”(119쪽)


이 책의 이해를 위해.

1) 영국의 세컨더리 스쿨은 우리로 치면 중고등학교를 통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건 퍼블릭스쿨, 그래머스쿨, 스테이트스쿨로 분류해서 이해하면 쉽다. 스테이트 스쿨이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가 운영하는 공립학교이다. 퍼블릭스쿨은 공립학교로 번역되지만, 국가가 비용을 내는 학교가 아니다. 그래머스쿨은 스테이트스쿨의 하나이지만 퍼블릭스쿨에 못지 않은 교육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교로 우리로 치면 공립 특목고에 해당한다. 퍼블릭스쿨은 이튼, 해로우, 윈체스터 같은 곳들로 우리로 치면 민사고 같은 곳이다. 등록금과 기부 등으로 학교가 운영되는 영국의 사립학교들로 영국 내 수백 곳이 있고, 국내에 있는 덜위치 같은 곳이 이런 학교들의 프랜차이즈 브랜치이다. 퍼블릭은 개인 튜터링 학습과 반대된다는 의미에서 퍼블릭을 의미하는 것이지, 공공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2) 책 속에 소개되는 벌링던 클럽은 영화 ’라이엇 클럽‘을 보면 실상을 좀더 실감있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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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다시 읽기 2 - 회상과 대화 / 최종 강의 서경식 다시 읽기 2
하야오 다카노리.리행리.도베 히데아키 엮음 / 연립서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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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다시 읽기2>, 연립서가

연립서가 최재혁 선생님으로부터 서경식의 정년 퇴임을 기념하는 의미로 <서경식 다시 읽기>라는 책을 기획하신다는 메일을 처음 받았을 때 솔직한 생각은 ’좀 이르지 않나‘.. 그런 생각이었다. 이제 서경식은 대학에서 은퇴하고, 더 왕성한 글쓰기를 할텐데 움직이는 과녁에 활을 쏘는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예상은 완전히 틀리고 말았다. 예기치 않게 서경식은 일찍 세상과 등졌다. 연립서가에서도 예상한 일은 물론 아니었겠지만, 최재혁, 박현정 두 대표의 기획 덕분에 서경식의 사상을 한국과 일본에서 나름대로 조망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서경식의 텍스트로만은 다가가기 힘들었던 서경식을 둘러싼 컨텍스트, 이를테면 서경식을 만든 역사적 사건, 사람들,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고, 또 그 서경식이 한국에서 여러 층위에 어떤 컨텍스트가 되었는지 그려낼 수 있었다.
특히 <서경식 다시 읽기2>는 서경식이 일본에서 만난 동료들과의 대담과 에세이를 실은 우정의 기록이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서경식을 나름 읽어온 나로서도 이 책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정말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70-80년대를 규정지은 형제 구원활동, 90년대 책임 논쟁, 자이니치 그룹을 지배했던 민족 논쟁, 2000년 즈음 대학 교수로 활동하며 본격화된 프리모 레비에 관한 연구, 고립을 감내한 리버벌의 허위의식에 대한 투쟁 등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디아스포라‘나 ‘월경’이 지닌 낭만적 느낌으로 서경식을 읽는 것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정말로 잘 보여준다.
특히 모토하시 데쓰야 선생은 서경식의 재일조선인사를 대략 서기 1000년 경부터 시작된 식민주의에 대한 반식민주의 투쟁의 서사에 기입한다. 시부야 도모미 선생은 서경식이 인간의 추악함, 사실은 우리 자신의 추악함을 들여다보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우리 안의 식민주의를 발견하도록 도와주었다고 고백한다. NHK PD였던 가마쿠라 히데야는 서경식과 방송을 만들며 쌓아온 우정을 통해 ‘친절한 서경식’을 보여준다. 사키마 미술관장인 사키마 미치오씨와 서경식의 대화는 서경식이 일본 사회 내에서 소외된, 내부식민지화된 이들과 어떤 연대를 펼치려고 했었는지를 그려낸다. 그밖에도 최덕효, 리행리, 조경희 등 여러 젊은 연구자들과의 대화는 서경식 본인이 그토록 하려고 했던 일, 즉 서경식을 분절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저는 에세이를 통해 스스로를 관찰하고 이야기합니다. ’자명한 자신‘ 혹은 ’나란 이런 사람이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분절화해서 관찰하며 그것을 이야기하는 작업 방식을 언젠가부터 갖고 있습니다“(330쪽) 그래서 우리는 <서경식 다시 읽기2>를 통해 역설적으로 서경식은 자명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되고, 그것이 서경식임을 이해하게 된다.

”나 자신을 규정하고 나누고 있는 여러 개의 구분선을 바라보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향해 가는지, 왜 이런 상황인지, 그런 맥락을 가능하면 지적으로 분절화해서 자기 이해를 하려고 애써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 나갈 작정입니다“. (334쪽)

어쩌면 서경식이 일생동안 해오려 했던 일과 이 책의 서술방식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서경식은 이런 이해를 자신에게만 했던 것이 아닌다. 여러 개의 구분선으로 분절하여 민족을, 일본을, 예술을 이해하려고 했다. (분절적이란, 단지 분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민족이라는 단일선, 젠더라는 단일한 구분선만으로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이항대립적일 수밖에 없음을 조선반도와 일본을 걸쳐서 살아애했던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인식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 내부에 침투하는 일본을 대상화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해부하는 것과 같은 작업“이라고 했던 말의 의미이기도 하다.
얼마 전 춘천에 가서 이종찬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
어느 단체에서 이종찬 선생께 서경식에 관한 연속 강좌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 부탁에 대해 이종찬 선생은 ”서경식을 잘 이해하기 위한 목표라면 제 강의를 들을 필요가 있으실까요? <서경식 다시 읽기2>를 읽어보시면 됩니다“라고 답하셨다고 한다. 그 강의가 성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종찬 선생의 강의라면 물론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서경식을 촘촘하게 읽고 이해하려한다면, 어쩌면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자이니치에 대해서, 우리가 외부화했던 그들에 대해서, 우리 안의 식민주의에 대해서 살펴보고 싶다면, 서경식의 책들과 함께 <서경식 다시 읽기2>는 꼭 읽어봐야 하는 것이라 권한다. 특히 우카이 사토시 선생의 글과 서경식의 응답, 시부야 도모미의 글은 짧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서경식을 입문하는 최적의 글이라 생각한다.
[추가]
내가 깜박 놓친 것도 있어서 내용을 좀 더 보태고자 한다. 서경식이 교수직 은퇴 후 집중하려 했던 일 중 하나는 '소설쓰기'였다. 이는 소명출판에서 나온 <대담집>에도 실려 있다. 그리고 그가 소설쓰기의 전범으로 여긴 작품은 프리모 레비가 쓴 '아르곤', 또 <릴리트>였다. 이 작품은 일종의 인물전이라고 할 수 있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만나 함께 귀환했던 이들을 포함해 아우슈비츠라는 독특한 공간, 단적으로 '디아스포라적이라는 의미에서의 국제적 유대인 집합소'에서 만난 다양한 인물들을 조형했고, 그 때의 인물 탐구를 자신의 소설 내지 에세이에 담았다. 서경식 역시 그런 인물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확신할 순 없지만 서경식은 아사히 신문에서 출판한 <20세기 천 명의 인물>에서 대략 마흔 명의 사람들에 대한 인물전을 썼던 것이(국내에는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프리모 레비와 같은 형식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뜻과 만났을 것이다. 특히 <대담집>에서 소개한 자신의 이모부, 서경식은 그야말로 '디아스포라적이죠'라고 한 적이 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이토록 길게 쓰는 것에는 <서경식 다시 읽기2>에서 일종의 인물전이 등장하고, 마치 소설 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인터뷰 '서경식, 저작을 말하다'에 담긴 내용으로 153쪽부터 이후 시작되는 내용은 한편의 소설로 봐도 무방하다. 야스에 료스케, 고자이 요시시게, 히다카 로쿠로, 이바라키 노리코와 같은 전후 지식인에 대한 선생의 스케치는 그의 표현을 약간 활용해서 말하자면 <선한 일본 혹은 일본인>을 보여준다. 나는 이 책에서 네 명에 대한 서경식의 글을 서경식의 소설 초안처럼 읽었다.

"야구에 비유한다면 야스에 선생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몰린 팀의 포수 같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포수는 팀이 위기에 내몰리더라도 냉정함을 유지하며 "지금은 어떻게 해도 한점 줄 수밖에 없나, 이러다가는 지겠구나."라는 식으로 누구보다 빨리 상황을 파악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괜찮아, 괜찮아!"하며 팀원의 용기를 복돋아야 하죠.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함께 갖추지 않으면 안됩니다. 야스에 선생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166쪽)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참여한 <서경식 다시 읽기1>이 서경식이 한국 사회에 다소 문화적인 관점에서 수용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조금은 소프트한 책이라면, <서경식 다시 읽기2>는 일본에서 서경식이 뼈를 깎으며 싸우면 조탁한 운동론, 디아스포라론을 보여준다.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서경식을 만날 수 있는 책인 것이다.
서경식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도, 소외된 자들의 싸움에 관심이 있는 이들 누구에게라도 도움이 되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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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집 : 재일 디아스포라의 목소리
김용규 외 엮음, 김석범 외 인터뷰이 / 소명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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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출판에서 나온 <대담집-디아스포라의 목소리>를 읽었다.
최덕효, 정영환 선생의 대담에서는 오랜만에 정말로 큰 지적 도전을 느꼈다. 책에서 3세대로 분류한 이 역사학자들이 벌이는 ‘대담한 기획’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최덕효 선생의 박사 논문은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에 대한 일종의 카운터 내러티브라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됐다. 나는 이 책이 일종의 일본의 자기기만이라고 느꼈는데, 어쩌면 역사상 단 한번도 가난해본 적이 없는 나라의 가난 서사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최덕효 선생의 논문 작업에 대한 부분을 읽으며 내가 존 다우어의 책에 느낀 불편함의 이유를 알아챘다. 이 책에는 ‘재일조선인’이 빠져 있었다. 패배가 아니라, 패배의 패배를 껴안고 살았던 이들의 목소리는 배제되었다. 최덕효 선생의 기획은 한편으로 서준식의 ‘옥중서신’에 대한 카운터 내러티브기도 했다. 서준식은 옥중 소감에서 한반도가 본류, 자이니치는 지류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최덕효는 자이니치 중심의 역사 서술을 기획한다. 실로 대담하고 놀라운 기획이 아닐 수 없다.
정영환 선생의 논문에 대해서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는 재일조선인사를 자이니치의 시각에서 새롭게 서술하고자 한다. E.P 톰슨과 에드워드 사이드를 계승하며 제3세계와 재일조선인을 연결하고, 유럽중심주의자인 에릭 홉스봄과 대결하려 한다. 김용규 선생님의 잘 준비된 질문과 풍부한 사전 조사, 이재봉 선생님의 예리한 질문이 돋보였다. 특히 김용규 선생님의 질문은 두 학자의 작업 세계를 이해하는 큰 얼개를 그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서경식 선생님과의 인터뷰는, 3세대 학자들과의 대담보다는 훨씬 더 어두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2023년에 있었던 두 번째 대담은 선생의 악화된 건강 탓인지 몰라도 다른 인터뷰나 강의에서 느끼기 어려웠던 냉소적 분위기도 감지된다. 그리고 인터뷰는 늘 그런 것이라 해도, 서경식의 답변은 질문을 조금씩 빗겨 가기도 하고, 질문의 의도를 되묻는 방식으로 우회하기도 한다. 질문과 답 사이의 묘한 어긋남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것이 불편하기 보다는 흥미로웠던 이유는, 인터뷰어들과 친밀한 관계였다는 점을 되새겨볼 때 선생님의 사적 대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읽을 때보다 두 번째 읽을 때 의미가 좀 더 다가왔는데, 다시 읽었을 때 선생님의 발언에 선생님의 억양과 말의 스타일이 비로소 더해졌기 때문이다. 이 책에 또 다른 인터뷰어인 서민정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책이 만들어지기 전에 선생님의 발언을 검토하시겠냐는 물음에 서경식 선생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고 한다. 즉 두 편의 대담에 대해서 다시 읽거나 고쳐쓰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김상봉 선생님과 대담을 하셨던 <만남>에서 자신의 발언을 되짚고, 혹시나 실수를 하실까봐 나 같은 사람에게 녹취를 맡기자고 제안하셨던 것에 비하면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선생님은 대담해지신 것일까, 아니면 조금은 지쳐계셨던 것일까.
물론 그 때문에 가장 서경식의 목소리에 가까운, 그래서 책의 제목인 재일조선인의 목소리를 실현하고, 또 서경식의 목소리를 귀에서 재생시키는 그런 대담이 되었다. 단, 높은 수준의 주의력이 독해에 요구된다는 것도 그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22쪽 이후의 서경식 선생이 말하는 ‘조국’-론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론으로 읽힌다. 정말로 흥미롭다. 특히 144쪽.
“그런데 그것만 보면 안 되죠. 이 사람이 서양을, 서양 르네상스를 우리와는 다른 어떤 시점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를 보게 되면, 이 사람의 독창성이라고 할까, 특징을 볼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앞으로 재일조선인에 대한 연구도 그런 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를 연구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재일 조선인이 어떻게 세상을 보고 있는지를 자신에 비추어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서양이 그런 경향성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재일조선인에 대한 연구도 그렇게 돼야 한다고 봅니다”
나로서는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서경식이 유럽과 아메리카를 다니며 인문기행과 미술관 다니며 음악회를 다닌 또 하나의 이유를 알게 되는 지점이자, 여러 선생님들과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어떤 방향으로 꾸려가야 할지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구절이었다. 서경식 선생님과의 2부 대담은 나로서는 너무나 값진 대화의 기록이었다.
책을 읽으며 발견한,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남겨둔다. 아무래도 대화를 녹취로 풀다보니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맥락상 이상한 것들이 꽤 있다. 내가 가장 이상했던 부분은 90쪽이다.
”아까 얘기했던 귀화 안 해서 반갑다든지 하는 그런 이야기라기보다, 저는 문제적인 발언일 수 있지만,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디보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였으면 귀화를 거부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 것 같아요“.‘
내가 충분한 주의력을 기울이지 않아서인지, 나는 인용한 부분의 마지막 문장을 몇 번을 곱씹어 읽었다. 대화의 맥락상, 일본이라는 나라가 재일조선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였다면 귀화를 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문제적인 발언을 예고했다면 더더욱이 그렇다. 그런데 이 구절만 보면, 귀화를 거부하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는 귀화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가 된다. 즉 일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라면 귀화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는 거다. 논리적이지 않은 연결인데, 서경식 선생님이 이렇게 실제로 말씀하신 것이면 앞서 말했듯이 수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편집 과정에서 이런 부분은 확인이 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잘못 독해했을 가능성도 물론 있다. 다른 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외에도 271쪽, 김용규 선생님의 발언에도 모호한 점이 있었다.
”디아스포라라든지 ‘제3의 길’, 이런 것은 서경식 선생님도 별로 좋아하시지는 않는 것 같던데, 그래도 한편으로는 2세대, 3세대의 경우, 재일조선인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있는 디아스포라의 경험들과의 공통성 등도 함께 고민하면서 자신들만의 특성들을 구축하려는 움직임도 있는 것 같습니다.“
디아스포라를 서경식 선생님이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역시 녹취과정의 실수일 수도 있고, 많은 부분이 생략되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서경식 선생님은 9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디아스포라 담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셨고, 이 개념을 해체해 서경식이 다시 재발명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서경식은 디아스포라의 경험들과 공통성을 중심으로 연대를 추구했는데 그가 이를 싫어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역시 편집 과정에서 좀 더 살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책의 자잘한 실수들.
사실 녹취를 풀어낸 책의 특성상 굉장히 많을 수밖에 없긴 한데, 몇 가지만.
1) 262쪽 ”정체성을 대신 증명하고나“-> ”정체성을 대신 증명하거나“
2) 263쪽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n"- > "Eric Hobsbawm'
어마어마한 품이 들어간 책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부록으로 실린 최덕효 선생의 ’월경하는 재일‘은 꼭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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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가난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











1. 찰스 디킨스가 쓴 <황폐한 집>에는 불쌍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분명 ‘조’다. 조는 고아고, 심각한 병에 걸려 있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인 조, 그는 결국 천연두로 죽게 된다. 디킨스는 조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한다.

“‘조, 내 말을 따라 할 수 있니?”
‘선생님 말씀이라면 뭐든 따라 할 거예요. 좋은 말이라는 걸 아니까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네, 이거 정말 좋아요, 선생님’
‘빛이 오고 있나요, 선생님?’
‘거의 다 왔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이름이...’
“빛이 밤이 되어 어두워진 길로 왔다. 죽음이다! 죽었습니다, 전하 죽었습니다, 여러분. 죽었습니다, 모든 교단의 좋은 목사님과 나쁜 목사님. 죽었습니다, 가슴에 천상의 측은지심을 품은 남녀여. 죽음은 이렇게 매일 우리 곁에 있습니다.”

조가 ‘아버지’란 말을 정말 좋다고 한 데에는 그가 살면서 이 말을 한번도 써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고아고, 병이 들었고, 이제 죽은 자가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 조는 ‘가난한 자’다.


2. 조의 죽음을 묘사하는 디킨스의 글을 읽다가 나도 가만히 주기도문 전체를 암송해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가 특별하고도, 배타적인 의미에서 ‘가난한 자’를 위한 기도임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기도는 ‘먹고 살아가는 것’이 삶의 문제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매일 같이 드려야 할 기도의 내용은 아닐 것이다.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고 살아가는 방법이 자녀 세대에서 대를 잇거나, 세금과 정치, 호사스런 치장, 관념에 더 몰두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일용할 양식을 쌓아달라는 기도가 어울릴지언정, 매일 매일을 이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어울리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 내게 닥쳤던 가난은 나를 늘 움츠려들게 했다. 그리고 정말로, 나 역시 매일 같이 내게 일용할 양식이 있길 기도했다. 그리고 오늘은 걸어서 1시간 거리인 학교를 부디 버스타고 갈 수 있도록, 학교에 가져가야 할 교재를 하나님이 예비해주시도록, 그렇게 기도했다.


3. 대학을 마치고 생활이 안정되고 나서부터는 나는 내가 가난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 주기도문의 기도가 더 이상 간절한 것으로 다가오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 섭섭했다기 보다 내게 승리감을 주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노골적으로 말할 순 없었지만, 가난한 자들은 가난할만한 이유가 있다고, 가난에서 벗어난 자들은 가난에서 벗어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는 식의 가치판단을 당연한 것으로 승인하고, 여기에 완전히 동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자와 빈자와 같은 ‘위계’는 불가피하고, 가치판단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나는 누구에게도 말로 표현하지 않았을 뿐,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는 결코 잘 쓰지 않는 회의와 의심이라는 철학적 방법을 ‘가난한 자’의 존재에 대해선 철저하리만큼 적용했다. 가난한 사람은 누구일까? 얼마나 가난해야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가난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가난’과 ‘가짜 가난’을 구분하는 것은 지혜라고 여겼다. 간혹 해외토픽에 나오는 백만장자 앵벌이는 ‘가난’을 이용하는 이 세상의 수많은 사기꾼을 판별해야 한다는 판단의 근거가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기꾼들과 구분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과 구분해야 한다는 생각의 결론은 진짜 가난한 사람을 돕게 되는 결론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은 도울 수도 없고, 도와서도 안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좀 종교적 색채를 가미해 말하자면, 사실 나는 신앙인이니까 이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회의, 의심, 구분, 분석은 (감히 말하건대) 사탄이 내게 준 생각이었음을 깨닫는다.


4. 디킨스의 작품에서도 ‘가난한 사기꾼’이 등장한다. 조와 대비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스킴폴’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을 코스프레하고, 어린이를 흉내 내는 어른이다. 악마의 성격은 노골적이지 않고, 은밀하다는 것은 스킴폴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천진난만한 것과 동시에 교활하다. 인간의 악마성에 대한 디킨스의 묘사에 놀라게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킴폴을 친구로 받아주는 잔다이스는 내게 더 큰 놀라움을 줬다. 잔다이스의 미덕은 ‘가난한 자’를 돕는다는 것에는 ‘속을 수 있음’, ‘상처 받을 수 있음’, ‘바보가 될 수 있음’ 등을 각오한다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얼마나 가난해야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는지, 가난한 사람은 누구인지, 저 사람은 가난한지, 가난을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그는 묻지 않는다.

어쩌면 잔다이스도 묻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도 회의, 의심, 분석을 했겠지만 그의 결론은 나와 달랐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도울 수 없거나 도와서 안된다’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보가 될 수 있고, 속을 수도 있고, 상처 받을 수 있지만 도와야 한다’로.


5. 이런 이야기를 파트너와 어제 밤 함께 하면서 나와 내 파트너가 가난으로 힘겨울 때 우리의 ‘가난’이 의심 받은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 둘은 모두 어려운 10대 시절을 보냈다. “저 아이는 도와 줄 필요 없어. 저 아이 아버지가 부도날 때 돈을 많은 숨겨뒀어”, 내 이모 중 한 사람이 한 말이다. 물론 아버지가 돈을 숨겨뒀을 리 없다. “저 아이는 도와 줄 필요 없어. 저 아이의 고모부가 굉장한 부자야”. 교회 장로 중에 한 사람이 한 말이다. 그 고모부는 부자이긴 했지만 나를 도와주지는 않았다. ‘가난’은 가난한 것만으로도 힘든데, 언제나 의심받고, 도전받고, 내 가난을 증명하라는 청구서 앞에서 시달린다. 우리는 그 때의 서러움을 나누면서, 비로서 바로 그 때 우리도 그 때 그 이모와 장로가 한 ‘가난에 대한 의심’을 우리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성범죄 피해자에게 도식적인 ‘피해자상’을 강요하는 법정처럼, 나는 내가 생각하는 ‘가난한 사람의 이미지’를 기준으로 가난한 자가 누구인지 판단해왔다. 부끄럽지만 가난함에 대한 나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사람은 여태 없었다. 아니, 어떻게든 통과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정치, 정책, 이론을 말할 때 ‘가난한 사람’은 오직 내 생각 속에만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관념에 치우친 것이다.


6. 성서는 많은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서는 관념이 아니니까.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라는 구절도 해석이 필요하지 않은 말이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예수에게 하는 것이라면,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은 사기를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상처를 받고, 바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가 되는 일을 말하기도 한다. 예수는 제자에게 사기를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바보가 되기를 자처했다. 가난한 자에게 하는 것이 예수에게 하는 것이라면, 복음은 ‘가난’에 대한 메시지이며, 가난이야말로 복음의 본질에 해당한다. 누가복음이 말하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을 마태복음처럼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로 교묘하게 해석하지 않는 자세는 우리를 복음의 중심에 더 가까이 가게 만든다. 물론 우리는 마태복음의 해석을 누가복음의 사실보다 더 선호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교회 뿐 아니라 선량하다고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속을 수도 있고, 상처받을 수 있고 바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언제나 인기가 없다. 영화 <두 교황>에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가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자, 옆에 있던 브라질 상파울로 명예 대주교인 클라우디오 우메스 추기경이 말을 건넨다.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십시오". 교황이 된 이에게 건네기 이보다 더 좋은 인사가 있을까.


7. 디킨스의 작품을 읽다가, 가난한 자들의 친구였고, 가끔은 속기도 했고, 바보처럼 살았던 고 김건호 목사님이 보고 싶었다. 디킨스를 읽으며 떠오른 가난에 대한 생각과 김건호 목사님의 형형한 눈빛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이토록 거친 메모를 남긴다.

“빛이 오고 있나요? 선생님?”
“거의 다 왔어.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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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도 오랜만에 하는 탓일까요, 뭔가 부끄럽고 좀 어색하군요.

음, 볼드저널 15호 부부위기 편에 글을 쓰게 되어, '요즘 부부 공생의 위기'라는 주제로 말할 기회를 얻어 지난 금요일, 헤이그라운드에 다녀왔습니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시는 이혜민 에디터님과 제가 여러 잡지를 통해 글을 접해 온 장근영 박사님과 함께 스피커가 되었어요. 지난 해는 미술관에서만 주로 강의를 했는데, 올해 처음 강의는 헤이그라운드에서 시작했습니다. 뭔가 생각이 신선하게 되는 것 같은 멋진 장소였어요. 

이혜민 에디터님의 강연에선 '요즘 부부' 의 군상이 이토록 다양한지 놀라웠고, 다양한 '결혼' 모형을 만들어가는 아방가르드 부부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제가 왜 '요즘 부부'가 아닌지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장근영 박사님의 강의는 부부 생활은 사회 생활과 달리 자신의 돌아이-근성을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영역이니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깨닫고 고쳐가려는 노력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정돈된 강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정돈되지 않았기에 좀 더 기분좋은 느낌이 있고, 그럼에도 플로어에 계신 분들이 저희 스피커들의 말이 무엇이든 다 들어줄 의향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북토크 장소 사진을 못찍어둔 것이 아쉽습니다. 아마도 그날 다녀가신 분들이 또 올려주시겠죠. 저는 강연 원고를 써놓고도, 강연원고에 맞춰 제대로 말을 하고 왔는지 돌아오는 길에 아쉬움도 많이 남았습니다. 말이 좀 많았나 하는 후회도 남았습니다. 그래도 장근영 박사님과의 만남도, 오랜만에 볼드저널의 여러 분들과 만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기분 좋은 시간을 선물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좀 길지만, 제가 말한 내용의 전문을 올려 보려 합니다. 혹시 공유하신다면 댓글 남겨주시면, 제가 잠을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볼드저널20분 스피치/ 헤이그라운드/ 요즘 부부, 공생의 기술/ 부부관계에서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


저는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철학의 임무는 ‘보는 것’이라기 보다 ‘잘 보는 것’에 있죠. 철학자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결코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 이면에서 이 세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근본적인 원리를 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잘 아실 ‘이데아’ 같은 것이죠.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것은 ‘가상’이라고 했습니다. 눈이 아니라 지성으로 세계를 봐야 한다고 했죠. 그래서 이데아 같은 ‘진짜 세계’는 특별하게 훈련된 사람에게나 보인다고 했습니다. 형이상학이란 말은 영어로 ‘Metaphysics’인데요, 피직스 physics라는 말에 ‘메타’meta라는 말이 붙은 겁니다. 역시 Physics, 즉 물리적 세계 이면의 다른 세계가 있다는 생각이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겁니다. 저는 원래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고 싶었는데요,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학도 철학과 좀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이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만든 ‘눈에 보이지 않는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거죠. 철학자나 신학자 뿐 아니라 수학, 물리학도 어쩌면 좀 비슷합니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보려는 것’이죠.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세계의 ‘원리’를 찾아내려고 했던 겁니다.











저는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좀 웃긴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의 목표도 당시 세 살이던 제 아이를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보는 것’을 돕는 것에 두었죠. 그래서 이 책은 아이가 하는 행동이나 제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원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이가 하는 행동에는 그냥 드러난 이유 말고 ‘진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느끼는 불안은 내 마음의 본질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육아에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책을 찾아보며 공부했죠.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를 키우며, 저는 아이를 최대한 이해해보기 위해 저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아이를 최대한 열심히 관찰하고, 아이 행동의 의미를 섬세하게 이해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니체가 한 말 중에 “사실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니체의 말을 떠올리며 제 아이를 해석하고, 저를 해석하려고 했죠. 저는 그것이 철학자들의 임무이고,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오늘 ‘부부위기’, 공생의 기술이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자리인데요, 저는 부부 관계 전문가도 아니고, 제 파트너와 특별한 위기가 있는 것 역시 아닙니다. 그래서 제게만 국한될 수밖에 없는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저희는 동갑내기, 문과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철학’과 ‘해석’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요, 저는 부부생활에도 서로를 향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런 말씀을 드리려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저는 철학이 이런 식으로 ‘원리’를 밝히기 위해,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을 무시하는 것에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굳이 말하자면, 저는 ‘해석’에 반대하고, 해석이 부부 관계를 늘 힘들게 한다는 말씀을 이제 드리고자 합니다. 세 살 아이처럼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면, 아이에 대한 ‘해석’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 아이와 저, 두 사람 사이의 불행도 지금은 ‘해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파트너, 그러니까 아내를, 제 아이를 해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부부관계에서 해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우선 저는 제 파트너가 하는 행동과 하는 말 이상의 ‘저의’나 ‘의도’에는 가능한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합니다. 물론 서로 하는 농담은 예외죠. 농담은 해석을 해야 재밌습니다만, 제 파트너가 제게 하는 말을 가능한 한 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갈등을 줄이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파트너가 제게 하는 말을 듣고는 저를 무시하는 건가 하고 하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제 파트너가 저를 무시할 의도는 없어요. 그런 식으로 파트너가 별 생각 없이 한 말을 파고 드는 건 같이 사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더군요. 그래서 본의, 저의, 의도 이런 것 묻지 않고, 파트너를 향해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제 내면의 해석과 싸우려고 마음을 먹게 된 겁니다.

이를테면 ‘살 좀 빼’라는 말은 제게는 좀 기분 나쁜 말입니다. 이 말과 함께 이 말이 갖는 진의가 동시에 바로 해석되기 때문이죠. ‘살을 빼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 사람이 내게 이런 말을 하다니 나를 무시하고 있다’, ‘나를 뚱뚱해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구나’, 더 나아가 ‘내가 뚱뚱해서 내 배우자가 나를 부끄러워 하는구나’. 물론 그 반대의 좋은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너를 사랑해서 염려가 되니까 살을 좀 빼자” 라거나, “네 건강을 위해서 살을 빼자” 정도로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죠. 살 빼라는 말을 들으면 보통은 기분이 나쁩니다. 저는 철학 연구자로 정체성을 삼고 있으니 여기에서 한 발자국 정도 더 나간 해석을 하죠. “내 파트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내 존재로 사랑하지 않고, 내 겉모습을 보고 내 행위를 보고 사랑하는구나” 하고요.

아이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식탁에 앉은 아이에게 손 씻고 다시 오라고 하면 아이가 인상을 쓰지요. 인상을 찌푸리는 건 그냥 귀찮아서 그런 겁니다. 다른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크죠. 그런데 저는 저도 모르게 아이의 인상 쓴 얼굴에 대한 ‘관상’ 해석에 들어갑니다. 거의 자동적으로 해석이 이뤄지죠. 저 인상은 ‘아이가 아빠인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의미로 말이죠. 더 나아가 ‘아이는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는 기본적인 습관조차 형성이 안되었다’로 해석되면 불안이 동반됩니다. 지금 제가 한 해석 중에 사실 그 자체보다 더 나은 진실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을까요? 해석은 저와 제 파트너, 아이를 모두 불행하게 만듭니다.

저는 오랫동안 해석을 옹호해왔기 때문에 파트너와 싸울 때마다 항상 제 진심을 강조했습니다. 저는 제 파트너가 제 말이나 행위에 대해 ‘사랑의 마음을 담아 해석해주지 않는 것’에 늘 불만을 가져왔습니다. 예전에 제가 어떤 인터뷰에서 “지금 제 파트너는 미국에 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인터뷰 당시 정말로 제 파트는 미국에 있었죠. 그 인터뷰가 출간되고 그걸 읽은 파트너가 미국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지금 파트너가 미국에 있으면 이전 파트너는 어딨어?”.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어요. 그러면서 “지금 제 파트너라고 하면 옛날 파트너도 있다는 말이잖아?”라면서 저보고 왜 오해가 생기게 말을 하냐는 거에요. 저는 제 말이 그렇게도 이해될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 말의 본래 의도가 그게 아니잖아?”라고 했더니, “네가 그런 의도로 말했는지 다른 의도로 말했는지 다른 사람은 관심이 없어. 애초부터 말을 정확히 해야 하는 거지”라는 말이 되돌아왔습니다. “파트너는 지금 미국에 있어요”라고 말해야 한다는 거였죠.











이번 볼드저널 15호에도 잠깐 썼지만 우리 부부의 갈등 아니면 위기는 가끔은 제 부모님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인데요, 문제는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현이 좀 섬세하지 않다는 거에요. 정교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나면 생각나는대로 말씀하시는 스타일, 좋게 말하면 뒤끝 없고 어떻게 들으면 막말에 가까운 말들도 하시죠죠. 그래서 제 파트너가 받는 충격을 완화하려면 저는 자주 제 부모님의 ‘진심’을 강조해야 합니다. 실제로 부모님은 며느리를 정말로 사랑하시니까요. 하지만 제 파트너는 왜 부모님의 모든 말과 행동을 ‘호의적’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내 아들은 일하고 있는데, 너는 미국도 가고 참 좋겠다’고 어머니께서 제 파트너에게 말한 적이 있어요. 그런 말을 듣고 속상해하는 파트너에게 제 어머님의 진심을 말해도 별로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상처는 상처니까요. ‘진심’을 왜곡하지 말고, 말과 행동 이면에 있는 서로의 말을 긍정적으로 잘 해석해서, 가능한 서로의 진정성을 잘 해석해서 받아주면 좋은데, 일단 해석이 들어가면 긍정적 해석은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조금은 다 불완전하고, 상처가 있고, 콤플렉스가 있는 존재들이라 상대의 진심에 초점을 맞춘 해석보다는 자신의 상처에 초점을 맞춘 해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등감과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한 서로의 말과 행동에 대한 해석을 중지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파트너의 이런 행동에는 ‘이런 이유’가 있고, 언제나 저 사람은 그런 식으로 행동할 것이라 해석하고 나면, 그 해석은 서로 간의 소통과 이해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물로 작용합니다. 저는 파트너가 말하거나 행동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고, 파트너는 제가 늘 자신을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겠죠. 그게 불신이고, 부부위기 자체입니다.

‘진정성’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사실은 이게 상당히 애매한 말입니다. 자주 쓰는 말인데도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잘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저는 제 파트너에게 제 말이나 행위 자체가 아니라 제 진심, 제 진정성을 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 진심, 제 진정성은 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진심, 진정성은 이데아나 신과 비슷한 겁니다. 이데아나 신의 실체가 의심스러운 만큼 진정성과 진심의 존재도 그렇죠. 성서에서는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하지요.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제 진정성을 보실 수 있죠. 하지만 사람은 제 중심을 보기 어려울 겁니다. 신의 영역을 제가 제 파트너에게 강요할 순 없는거죠.

현대철학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자아’는 없다는 견해에 어느정도 합의를 이룬 듯 합니다.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자아란 없다고 합니다. 자아가 있다고 해도 모든 자아는 계속 변하고 있고 운동하고 있습니다. 자아는 여러 겹으로 되어 있고, 끊임 없이 움직입니다. 이걸 애벌레-주체라는 비유로 말하기도 하죠. 들뢰즈라는 철학자는 우리는 모두 다른 ‘-되기’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합니다. 현대 철학이 변하지 않는 하나의 본질적인 자아 대신 ‘분열증적 자아’를 내세우는 것은 진심, 진정성이란 말이 더 이상 우리 내면의 있는 내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하죠. 리처드 세넷이란 사람은 심지어 우리에게 “자아란 외양에 있다”, “우리의 진정성은 우리의 겉모습 자체다”라고 말합니다. 상대의 본심을 이해하기 위해 상대를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오히려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해석’을 그만둬야 합니다. 상대의 말과 행동을, 말과 행동 그 자체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러려면 말은 좀 더 신중하게 해야 하고, 행동은 좀 더 절제해야 합니다.

해석은 상대를 길들이기 위한 것,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형욱 씨는 개들의 행동을 보고 해석합니다. 개들은 어느정도는 본능-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니까 해석을 하면 원리를 발견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배우자는 아닙니다. 배우자들은 우리가 해석해서 원리를 발견해, 내가 길들일 수 없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부부 관계는 해석을 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 해석불가능한 대상이란 점에서 개를 키우는 것보다 훨씬 더 고된 노동이 됩니다. 상대의 말을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죽하면 ‘산은 산이요 물이 물이요’라는 말이 있는 것일까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수행이 필요한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 상대의 말을, 해석 없이 들을 수 있을까요? 자신의 콤플렉스나 상처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상대 말이 ‘의도’가 아니라 ‘말’로 들리게 됩니다. 또 상대가 말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따뜻한 마음으로 만든 ‘서늘한 말’이 필요합니다. 말을 섬세하게 다듬고, 표현을 위한 다양한 양식이 필요한 거죠. 나의 진정성과 진심은 내 말과 행위에 있습니다.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오해할 말을 하고, 오해할 행동을 하면 결국 오해를 삽니다. 그러니까 말을 정교하게 다듬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우리 부모님의 세대에는 말이 거칠어도 남녀의 비대칭적 권력이 부부관계를 유지시켰지만, 우리 세대는 권력으로 유지될 수 있는 부부관계는 없습니다.

부부란 정교한 말의 공동체, 둘만의 섬세하고 은밀한 표현을 나누기로 한 관계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부관계가 유지되기 위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반대합니다. 하지만 해석에 반대한다고 해서 서로를 위해 어떤 노력도 필요 없다는 말에도 반대합니다. 부부 관계가 고된 노동이라면, 서로의 말을 자기 편에 유리하게 해석하지 않으려는 고된 노력, 자신의 진심 그 자체인 말을 가능한 정확하고 동시에 아름다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15호 볼드저널에서 한 인터뷰이께서 남편이 카페에만 가면 쓰는 말, “오브제”, “시그니처”라는 말이 정말 싫다고 해요. 저 역시 “러프하다”던가 “되어지는”이라는 표현을 정말 싫어합니다. 왜 싫은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싫어요. 파트너는 제가 ‘잃어버렸다’를 ‘잊어버렸다’로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렇게 서로의 말을 다듬고, 코드를 맞춰가고, 둘만이 웃을 수 있고, 서로 더 고양될 수 있는 말을 공유하는 것이 부부 공생의 기술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제 배우자를 ‘파트너’로 부르는데, 이것도 좀 유별나 보이지만 말을 좀 정교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아내란 말은 제게는 평등한 언어로 들리지 않아요. 게다가 거기엔 좀 다른 이유도 있는데요, 파트너라는 말로 우리는 서로를 서로의 연기 파트너로 호명합니다. 저와 제 파트너는 서로의 자아가, 행동이, 말이 일관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일관적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아니 그렇게 되기는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 어려운 과제를 나 자신과 배우자에게 요구하지 않기로 한 것이죠. 그래서 제 파트너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너 그 때는 이게 좋다고 해놓고, 왜 지금은 또 아니라고 해?’ 같은 질문은 제게 하지 않습니다. ‘왜 책을 사놓고서 읽지는 않아?’ 같은 질문과 비슷한 말이죠. 제 파트너는 제가 책을 살 때는 그 책을 읽기를 희망했고, 지금은 그 책을 읽기를 간절히 희망하지 않는 존재일 수 있는 가능성을 존중합니다. 책을 읽길 원하는 나와 책을 도무지 읽고 싶지 않는 나, 두 명의 다른 남편을 모두 남편으로 받아들여주죠. 친구들 모임에서 좀 목소리가 커지며 거들먹대는 나와 불안이 올라와 아이처럼 행동하는 나, 두 명의 다른 나도 동시에 받아주죠. 그 때마다 제 파트너는 제 연기의 파트너가 됩니다. “저 인간이 왜 저렇게 이중적으로 행동하나? 왜 이렇게 모순적인가? 이랬다 저랬다하는 이유가 뭘까”.. 하고 저를 해석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냥 모순적이니까요. 그리고 서로가 부부가 되었을 때는 가까운 사이가 된 만큼 서로의 모순을 가장 가까이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지요. 그 모순을 거부할 때 위기는 시작됩니다. 대신 그 모순을 수용하고 부부관계가 성숙하려면 고된 노동이 필요하죠. 제게 그 노동은 제 파트너가 농담할 때 농담 모드가 되기, 고민을 이야기할 때 친구가 되기, 이성적 관계일 때 괜찮은 남자친구가 되기, 감정적으로 힘들 때 아버지 되기 등입니다. 그리고 친구, 남편, 아버지가 된 나 모두 해석할 필요 없이 그냥 ‘나’입니다. 이 중 무엇이 나일지 물을 필요가 없죠.


며칠 전에 파트너가 제게 말하더군요.
“이번 생에 단 한번만이라도 잘생긴 남자와 한번 살아보고 싶다”.
저보고 살을 좀 빼라는 의미로 한 말인 건 나중에 알았습니다. 저는 그 말을 해석 없이 받아들였죠.
“기꺼이 지금 죽어 줄 수 있다”고요. 우리 부부만의 농담 코드입니다.
















눈치 채신 분도 물론 계시겠지만 제가 드린 오늘의 말들은 수잔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영감을 얻은 겁니다. 이 철학자는 ‘해석은 비평가가 예술에 대해 예술가에게 가하는 복수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제 파트너와 아이에 대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비평가처럼 굴지 않을 생각입니다. 제 파트너와 아이들 모두 예술일 뿐 아니라 예술 이상의 존재들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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