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30% 이상의 시청률을 획득한 드라마는 '대박' 드라마로 취급된다. 예전에 <허준>이나 <사랑이 뭐길래>의 경우는 시청률이 50~60%까지도 나왔다고 하는데, 그건 아직 케이블 채널이 활성화되기 이전의 일이다. 오늘날처럼 케이블TV 뿐 아니라 IPTV까지 TV채널 시장에 진출한 시기에는 30%대의 시청률을 얻은 드라마만 해도 엄청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30% 이상의 드라마는 다시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오늘은 일단 첫번째 유형에 대해서만 얘기해 보기로 한다. 그 첫번째 유형이란 어제 종영한 <솔약국집 아들들>로 대표되는 '안온감'을 주는 '주부 선호적' 드라마들이다.
<솔약국집 아들들>은 제목을 듣는 순간 예상할 수 있듯 "아들들의 장가 보내기 프로젝트"를 줄거리로 하는 드라마이다. 큰아들이 하는 '솔약국'을 위시로 네 명의 아들들이 장가도 안 가고 엄마 등골만 빼먹으며 살다가, 드라마 마지막회에는 짝짓기에 성공하면서 끝나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유형의 드라마이다. 드라마 홈페이지를 가보라. 처음 홈페이지를 만들면서부터 이미 어떻게 짝짓기가 될지를 '첫째 커플' '둘째 커플' 식으로 이미 명명해 놓고 있다.
http://www.kbs.co.kr/drama/sol/index.html
그런데 이 드라마의 종영날 시청률은? TNS의 경우 48.6% 좀 짜게 나오는 닐슨의 경우도 44.2%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시청률인지는, 최근 이승기 신드롬과 한효주의 광고시장 점유 등 스타배출로 화제 속에 종영한 <찬란한 유산>의 최종회 시청률이 TNS 47.1%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건 2009년 드라마중 최고치이다. 현재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선덕여왕>도 아직까지 넘어서지 못한 벽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는 분들은 알 것이다. 이게 <찬란한 유산>이나, <선덕여왕>, <태양을 삼켜라>같은 드라마랑 비교해서 얼마나 '저렴한' 드라마인지.
저렴하다는 건, 그야말로 저예산이라는 뜻이다. 이 드라마의 대부분은 세트 촬영이라서 시간도 돈도 많이 절약했을 것이고, 나오는 배우들도 초호화 스타는 없다. 약간 한물 갔거나, 이제 겨우 뜨기 시작했거나. 대신에 연기력은 누구 하나 거슬리지 않는 '중견', 또는 '똘똘한 신인' 배우들이다. 내용은 앞서 말한 대로 너~~~무 뻔하다.(사실, 그래서 나도 매회 챙겨볼 의지도, 이유도 없었다. 가끔씩 봐도, 아니, 예고편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다 알 수 있는 그런 드라마이다.)
그런데 어떻게 최고의 스타들을 데려다 쓰고, 예쁜 화면들로 시청자를 사로잡으며 화제를 몰고 다녔던 <찬란한 유산>이나, 스케일 면에서 <솔약국집 아들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거창한 <선덕여왕>, 해외로케를 해가며 찍은 블로버스터 드라마 <태양을 삼켜라>보다도 높은 시청률을 얻을 수 있었을까?
일단은 편성 시간대도 좋았다. 주말8시 드라마는 전형적인 가족시청 시간대다. 그리고 가족들이 다같이 보기에 부담없어야 하며, 내용도 복잡하지 않은 편이 가족들이 '노가리를 까며' 보기에 좋다. 딴 짓하며 봐도 다 이해되고, 적당히 씹을 거리와, 가끔 몰입할 흠잡을 데 없는 짠한 감동의 연기, 전혀 마음 불편함 없이 볼 수 있는 '해피엔딩'에 대한 기대가 이러한 드라마로 채널을 고정하게끔 한다. 부모형제아들손자며느리 다 같이 모여 보아도 아무런 부담이 없다.
한편 여러가지 설정들은 걱정 없이 보게 만드는 요소들로 가득 찼다. 청춘남녀들은 신체건강하고 건전한(?) 정신을 소유한 처녀총각들로, 손 한번 잡는 것에 부끄럽고 설레하는 순진둥이들이다. 엄마아빠는 가정을 지키며 전통적 성역할을 잘 분담한다. 가계는 딱히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아서 보면서 불편하거나 걱정스럽지 않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평범한 소시민의 이야기인 듯 보이지만, 사실 네 명의 아들들 중 재수를 하는 막내를 제외한 셋은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들이며, 그들의 아내도 최상위 계급의 여성들이다. 이건, 사실 매우 기분 묘해지는 대목이다.
첫째 아들은 제목의 주인공 답게 약사로, 혜화동에 약국을 운영한다. 둘째 아들은 소아과 의사로 서울대 의대를 수석으로 입학했다고 한다. 셋째 아들은 방송국 기자로 7개국어를 자유자재로 하고 교양과 지식이 넘치는 전도유망한 기자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흔치 않은 초엘리트들인 것이다.
그럼 그들의 '짝꿍'들은 어떠한가? 첫째의 짝은 미국에서 로스클을 나온 국제변호사이고, 둘째의 짝은 처음엔 미련한 간호사인척 하더니 알고보니 굴지의 종합병원 원장 딸이자 존스홉킨스 의대를 나온 신경외과 전문의였다. 셋째는 잘나가는 탤런트인 방송국 국장의 딸이다. 제목과 주요 무대가 되는 혜화동 어느 골목의 단독주택집의 '소시민적' 이미지와 비교할 때, 좀, 배신감 들지 않는가?
우리는 이러한 이력을 가진 인물들과 비슷한 사람을 한 명이라도 알고있나 떠올려 보자. 서울대 의대 수석한 친구? 탤런트 친척? 약사 선배? 국제변호사 언니? 한 명을 알고 있기도 힘든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무더기로 나오는, 사실 '트렌디 드라마'들보다 더한 '그들만의 리그'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드라마는 이러한 이들의 이력을 함부로 부각시키지 않는다. 평소 그들이 만나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과정에서는 이들의 화려한 스펙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연애와 결혼으로 일관한다. 김밥을 싸온 여자에게 감동하고, 공기놀이를 하며 사랑을 싹틔우고, 곰인형 하나에 감동하는...'소시민'스러운 척 살아간다.
또한 이 네 아들의 부모가 보여주는 소박함, 평범함, 단순무식함으로 그러한 부모의 모습이 곧 이들의 모습인 듯 위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드라마를 우리들의 삶과 비슷하다 착.각.한.다.
불쾌하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속는' 다는게. 그러나 아마 이 드라마를 즐겨 본 시청자들에게 물으면, 이 세쌍의 커플 주인공들이 이런 대단한 스펙을 가진 인물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답을 듣게 될 것이다. 이 드라마의 시청자들은 그 사실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왜? 그들의 '스펙'은 매우 중요한 거니까.
이게 '드라마 매혹'의 한 축이다. 이렇게 '잘난' 인물들이 나오는 것. 주위에선 보기도 힘든 이런 엘리트들을 떼거지로 등장시키면서, 한편으론 그들의 엘리트성을 전면에 부각시키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론 '결정적인' 순간에 그 스펙을 들이밀어 이들의 짝짓기에서 초래되는 갈등 해결을 손쉽게 한다.
이 짝짓기에서 초래되는 갈등이 이 드라마 매혹의 두 번째 요소이다. 사실 이 드라마의'아들들'은 자신의 스펙은 매우 훌륭하지만, 집안은 '소시민'인 게 맞다. 그런데 이들이 결혼한 세 여성은 또 좀 다르다. 첫째의 부인은 그나마 평범한 미국 이민1.5세대 출신이고, 둘째의 부인은 앞서 말했듯 종합병원 원장의 딸이며, 셋째는 방송국 국장의 딸이다. 이런 대단한 집안의 딸들과 평범한 집안의 남성들이 짝을 짓는 게 쉽게 가능한 이유는 이들이 '비룡클럽'(개천에서 용난 자식들)엘리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이란 그런 것이다. 이 계급의 차이로 생길 수 있는 결혼 과정의 잡음을 이들의 스펙은 일소해 버린다는 것. 그래서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는 시청자들은 조마조마한 마음 없이 짝짓기 과정의 알콩달콩한 스토리를 즐길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또 하나의 '매혹'적 요소. 그것은 이들 '짝' 여성들이 사실 계급만 높았지, 모두 '결핍'된 가정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이 '아들들'이 채워준다는 데 있다. 이게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성공요인 중 하나이다. 첫째의 아내 수진(박선영분)에게는 사고뭉치 오빠가 있다. 오빠는 암으로 요절한 올케언니 대신 혼자 두 명의 자녀를 키우고 있다. 그래서 수진은 결혼후에도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오빠와 조카들을 위해 이리저리 고군분투하다가, '너그러운' 시어머니 덕에 조카들이 좀더 클때까지만 오빠네 집에 들어가 살며 조카들을 돌볼 수 있게 된다.
둘째의 아내 복실(유선 분)은 시부모님과 함께 살긴 하지만, 둘째아들 대풍은 오랜 앙금으로 화해하지 못했던 복실의 부녀지간과 이복자매간을 화해시켜 복실의 가정에 행복을 가져다 준 사람이다. 또한 딸의 결혼으로 적적해진 대풍의 장인에게 대풍의 아버지는 주기적인 술친구가 되어 준다.
셋째의 아내 은지(유하나)는 외동딸이어서 은지가 시집간 뒤 은지의 부모는 우울증에 시달린다. 이러한 은지 부모를 위해 선풍(한상진 분)의 부모는 선풍을 데릴사위로 보내버린다. 자신들에겐 아들이 넷이나 있다는 게 이유이다. 연애나 결혼을 하는 관계로 발전하진 않았지만, 넷째마저도 자신의 친구 애인이자 오갈 데 없는 미혼모 모녀를 집에 불러들여 거둬준다.
이처럼 이 드라마는 (알고 보면) '딱한' 사정이 있는 여성들이, '솔약국집 아들들'에 의해 '구원'을 받는 스토리를 갖고 있다. 특히 그 '구원'의 내용이 여성들의 가족을 위한 것들이어서, 이 드라마를 보는 여성들은 흐뭇하고 뿌듯했을 것이다. 그러니...이 드라마가 30~40대 여성들에게 가장 선호되었던 것은 당연하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한국의 가부장제 내에서 어떤 '상실감'을 맛볼 수밖에 없는 여성들에게 이 드라마는 사실 엄청난 '판타지'이다. 재투성이 아가씨가 왕자님을 만나는 <찬란한 유산>류의 트렌디 드라마보다 훨씬 더 탐나는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드라마들이 주는 '열심히 안 봐도 해피엔딩'일 거라는 안온함, 안도감, 그리고 이 드라마들에 '티 안나게' 들어있는 계급상승의 욕망, (사실은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말도 안되고 거추장스럽기까지 한-미련곰퉁이 '김간' 복실이가 사실 존스홉킨스 대를 나온 신경외과 전문의인 닥터 제니퍼 킴이라는 설정은 그 최고봉이다.-)엘리트주의, 그리고 여성들이 보기에 곱씹을 수록 뿌듯한 '개량된 가부장제'의 판타지는 '주부선호형' 드라마로서의 미덕이다. 여기에 고루 안정적인 연기자들의 연기로 말도 안되는 내용이 나와도 시청자들을 몰입하게 만들었던 점도 크게 한 몫 했다.
<솔약국집 아들들>의 성공은 매우 단순하고 정공법적인 드라마 제작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일깨워준다. 드라마는, 사실 꿈이고 만화고 판타지고 거짓말이다. (대부분의) 드라마와 같은 세상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어차피 판타지라면 요즘의 시청자들이 원하는 판타지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그 시청자들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솔약국집 아들들>은 하나도 새로울 것 없는 짝짓기 이야기에. 주부여성들의 꿈-시집'가지' 않고 친정'가고' 싶은-을 가미하여 새로움을 만들어 낸 드라마이다. 이런 드라마이기만 하면, 초호화 스타가 나오지 않아도(괜히 그러면서 연기 못하는 애들은 드라마를 말아먹을 수 있으므로 금물), 해외로케를 하지 않아도,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붓지 않아도, 거대한 서사를 다루지 않아도 2009년(현재) 최고 시청률의 드라마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