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세상을 뜬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신촌의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하직하셨다.  

 

워낙 노령인지라 입원과 퇴원을 반복할 때만 해도, 혹시나 돌아가시려나 하고 긴장을 하긴 했지만, 그의 죽음이 임박했으리라는 실감은 갖지 못했었다.  

 

좀더 버틸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고, 노인들은 으레 그러니까, 하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이 된 올해 7월의 입원 소식은 이전과는 달랐다. 입원한 지 일주일만에 그가 '기관절개수술을 받았다'는 것이다.  

 

병원측 말은 "장기간의 치료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인데, 그가 기관절개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생각했다. '이제 더는 못 버티시겠구나', '곧 가시겠구나'.  

 

장기치료에 대비한다고는 했지만, 기관절개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이미 되돌아오기 힘든 길을 가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관절개란, 입을 통해 관을 넣어(삽관) 인공호흡기를 부착하는 대신 목을 절개하여 구멍을 낸 뒤 직접 기도로 기계를 꽂아 인공호흡을 시도하는 것을 말한다.  

 

정말로 장기간의 치료가 필요할 경우 입을 통해 관을 넣어 놓는 것은 환자에게도 고통이고 관리도 불편하기에 흔하게 이루어지는 시술인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병원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노령의 중환자에게 그 시술이 필요했는지는 의문이다.  

 

한번 절개한 기관을 다시 봉합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자가호흡이 가능해져야 하는데, 장기 입원환자 또는 중환자의 경우 그런 호전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알 수 없는 할아버지가 기관절개를 받아야 했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호흡이 점점 나빠지는 상황, 우선 입을 통해 삽관을 해 놓은 상황에서 의사들의 권고가 있었을 것이다. 기관절개가 불가피하다고.  

 

가족들은 갈등했을 것이다. 그것이 꼭 필요한 조치인지 어떤 것인지 판단할 능력도 여력도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의사 앞에서 무지하고 약한 가족들은 의사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물론 기관절개를 통해 정말 효율적인 치료가 이루어져 상태가 호전될 수 있는 상황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 장기전으로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왜 없겠는가. 의사들의 전문성과 경험 그리고 오랫동안 축적된 노하우를 깡그리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답답한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환자 또는 환자의 가족이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애초에 없다.  

 

의사가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할 뿐이다. 의사가 검사 받으라면 받고, 먹으라면 먹고, 째라면 째야 한다. 

 

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가 입원 중에 중환자실에 가야하는 상황이 생긴 적이 있었다.  

 

역시 기관절개를 권유받은 우리 가족들은 심하게 갈등했지만 결국 의사의 말에 ‘복종했다’.  

 

기관절개를 하지 않을 경우 중환자실에 보낼 수 없다는 둥, 절개를 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는 다 우리들 책임이라는 둥의 협박(?)도 등장했고, 나중에 반드시 다시 원상복구될 수 있으니 걱정 말라는 회유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어떤 선택이 옳은지 판단할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 몸은 그 순간 신참 레지던트의 수련을 위해 쓰여졌다. 그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몇 년을 목에 구멍을 낸 채로 지내셔야 했다.

 

이는 과잉진료문제와 연결된다.  

 

세상이 꼭 필요한 일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의료 현장에서도 종종 불필요하거나 잉여인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잉여의 부분들이 지나치게 많거나 꼭 필요한 일인 양 둔갑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자면, 임산부가 매달 초음파 검사를 해야 하는 건 무엇 때문인가? 매달 병원에 올 것을 요구받고, 태아에게 매달 초음파를 쏘아 주며, 그에 매번 수만 원씩을 지불하는 것과 같은 일을 모든 임산부가 치러야 한다면 이를 과잉진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내 아버지가 당한 일, DJ가 당한 일을 내 판단에는 과잉진료라고 본다.  

 

그때 왜 거부하지 못했을까, 수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그 때 일이 잊히지 않는다.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어야 한다고 지금껏 생각한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니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그런 순간들을 왜 우리는 계속 반복해서 겪어야 하는 걸까. 

 

아니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말하지 못했던, 그래서 앞으로는 아니라고 말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일들에 대해 앞으로 써보려고 한다. (tbc)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인 2009-09-18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되는 주제이네요. 정말 이는 몸에 와닿는, 아프면 고민될 수 밖에 없는 주제인 것 같아요. 현대의학을 고발하는 관련 책들도 함께 소개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