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의 남작 - 칼비노 선집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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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단어 자체부터가 무척 환상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따져보면 낯설 것은 사실 하나도 없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다수의 과거 서사문학들은 어느 정도씩 비현실적인 부분들을 담고 있었으니까.(예를 들면 심청이가 인당수에 뛰어들었다가 용궁 답사를 거쳐 연꽃에서 튀어나왔다든가.) 단 한 구절도 '자연과학적 상식'에 위배되지 않는 소설들이야말로 오히려 문학사적으로는 드물고 새로운 축이 아닐까.

마르께스와 보르헤스에 뒤이어 관심을 가져봐야 할 인물로 많은 사람들이 이탈로 깔비노를 꼽는다. 책을 읽어보면 과연 그럴 만하구나 싶을 만큼 만만치 않은 내공이다. <백년동안의 고독>같은 희대의 걸작까지는 아니라지만, 딴은 그만한 작품이 줄줄이 쏟아진다면 '희대'라고 할 수도 없을 터이므로,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쯤으로 절충을 보기로 하자.

본작은 그렇게까지 환상적이거나 마술적이지는 않다. 한 남자(이자 남작)가 열두 살때부터 죽을 때까지 나무 위에서만 산다는 게 전부다. 그나마 한 그루도 아니고, 나무가 아주 많은 고장인지라 행동반경도 꽤 넓다. 이 정도라면 마술보다는 기술에 가까울 테니 '기술적 리얼리즘'으로 개명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동계열의 여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설정이 의미하는 바다. 꼬마 남작이 '무엇'을 '왜' 거부하고 '무얼' 위해 '어디'로 향했느냐에 고루고루 비중이 분산배치되어있는 반면, '어떻게'--즉, 얼마나 대단한 마술을 부렸느냐--는 그야말로 기술적인 장치에 불과하다.

이런 맥락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괴짜들이 씨줄로, 프랑스 대혁명을 비롯한 근대초 유럽의 역사가 날줄로 짜이면서 생각할 거리를 하나가득 벌여놓는 것이다.(이 '벌여만 놓는' 것도 환상적 리얼리즘 특유의 방식이자 매력포인트겠다.) 계몽주의의 허와 실, 변질된 대혁명, 산업화와 자연파괴, 사회적 포용성의 문제 등등... 열거할수록 원래의 빛과 색을 잃는 것 같아 계속하지는 못하겠지만.

남미, 동유럽 등 거의 제3세계 고유의 것으로 인식되어온 환상적 리얼리즘 계열의 대가 한 사람을 이탈리아라는 제1세계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도 부가적인 기쁨이다. 반면 그의 수다한 작품들이 거의 1쇄 이상을 넘기지 못하고 절판되어가는 상황은 적잖은 아쉬움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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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브르 - 1,2권 합본 (양장) 비앤비 유럽만화 컬렉션 3
발락 지음, 이슬레르 그림, 이재형 옮김 / 비앤비(B&B)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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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중요한 사실 한 가지: 이 만화는 2003년 4월말 현재 완간되지 않았다. 1/2권 합본이 2000년 9월에, 3/4권 합본이 같은 해 12월에 나온 후로 소식이 없다. 책 끝엔 분명 '5권에서 계속...'이라고 쓰여있다. 해적판도 아닌 자칭 '유럽 예술만화'가 나오다가 마는 이 해괴한 경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가능한 해석 하나는 '유럽만화 붐 일으키기 실패'라는 가설일 것 같다. 2000년 즈음에 한창 시도되었다가 별 재미를 못보고 만 이 작전은 그만큼 일본만화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해준 셈이 아니었나 싶다. 유럽산 예술만화라고 해서 달랑 100쪽짜리에 1만원씩이나 주고 사봤더니, 단돈 500원이면 빌려볼 수 있는 일본만화보다 내용으로나 그림으로나 별 대단할 게 없더라는 것이다.

물론 개중엔 걸작도 있고 평작도 있게 마련이겠지만, 그거야 일본만화도 마찬가지더라는 것이다. 내용에 있어서의 질적 차이가 뒷받침되지 못한 '껍데기의 차별화'(올컬러 호화양장) 작전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마찬가지로 겉치장만 요란한 뮤지컬들에 가족관객들이 몰리는 것을 떠올려보면 그만큼 만화독자들의 수준이 높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법하고.

또 하나의 가능한 해석은 작품 수준 자체로부터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1권에서만 해도 제법 그럴싸하게 조성되었던 열기와 긴장감, 미스테리는 뒤로 갈수록 단순한 고열과 편두통, 아리송함으로 흐지부지되어버린다. 장작더미같이 온통 검붉은 색조로 뒤덮힌 색채감이나 역사적 배경, 시적인 대사들은 뚜렷한 장점이지만 한편으로 꿰지 못한 서말 구슬같은 인상도 남긴다. 한 마디로 감정과잉이라는 느낌이다. '낭만주의의 걸작' 운운하더니 그게 좋은 뜻이 아니었나보다. 스토리 전개는 상당히 산만하고, 그림체는 결코 노련하다고 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별로 대단한 소재나 기법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책장을 덮은 뒤에 남는 기억은 이런 것들이다; 하여간 시종일관 불그르죽죽하구나, 이런 사랑 이런 감정 20대 초반만 됐어도 가산점 줬을지 모르겠다, 유럽에서야 이 정도 수준으로도 통할지 몰라도 숱한 걸작으로 한껏 눈을 단련시켜놓은 한일 독자들에게는 쉽지 않을텐데, 근데 5권이 뒤늦게라도 나오면 그걸 또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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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미래사 한국대표시인 100인선 100
미래사 / 199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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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본으로 다시 나온 신판에 대해서는 모르겠고, 구판은 미래사의 '한국대표시인 100인 선집'의 제1탄으로 발간되어 상당히 팔려나갔다. 지금은 거의 아무도 이렇게 쓰지 않는 시, 그런데 여전히 제일 많이 읽히는 시, 누가 잘못된 걸까? 각설하고, 책은 총3부로 구성되어있다. 그중 1,2부가 원래의 <진달래꽃>에서 선별된 것이고, 3부는 그외의 작품들에서 선별된 것이다. 어지간히 유명한 작품들은 원판 <진달래꽃> 수록작이든 아니든 다 들어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야말로 무난한 선집, 무난한 편집이다. 윤동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명짜한 대표작들과 여타 작품들 사이의 수준차이가 적지 않은 것은 늘 아쉬운 대목이다. 그들의 대표작들이 워낙 높아서인 건지, 아니면 대다수 시인들의 작품이 낮게 평평해서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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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 경전 조사어록 시리즈 4
영남불교대학교재편찬회 지음 / 좋은인연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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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술은 중국 선종의 6대조인 혜능의 생전 설법들을 제자들이 기록해놓은 것이다. 석가모니 자신의 가르침이 아니므로 원칙대로 하면 '경'이라고 불러서는 안되지만, 이런 경우가 이밖에도 몇몇 더 있다.([유마경], [승만경] 등.) 특히 혜능으로부터 파생된 '남종선'이 고려 이후 한국불교의 주류로 자리했기 때문에 [육조단경]은 [금강경]과 더불어 특히 중시되어왔다.

영남불교대학의 교재편찬회에서 낸 것이라더니 정말로 교재용으로만 만든 책인 것 같다. 즉, 해설이나 주석같은 것이 전혀 없다. 매쪽마다 위 1/3 가량은 한문 원문이 큼지막한 글자로 실려있고, 아래쪽 2/3 가량은 한글 번역문이 역시 큼지막한 글자로 실려있다.(이렇게 큰 한글 활자를 책에서 보기도 오랜만이다.)

번역은 모범적인 것 같다. 이미 수도 없이 읽혀졌을 책이거니와 인도경전들과 달리 이 한문본이 원서이니만큼, 참신한 새 해석이 나오기도 힘들 것이다. 문장도 요즘 쓰이는 어투로 잘 다듬어져있다. 원본은 '덕이본'이 사용되었다. 해설이 필요한 분은 다른 책을, 그렇지 않은 분은 이 책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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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 헌터 City Hunter 1 - 완전판
츠카사 호조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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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농담이다. 색조도 곱게 바랜 추억을 더듬어 어릴 적의 명작만화를 다시 들추었더니 이건 그야말로 유치찬연의 수준이더라는 경우도 다반사임을 감안할 때, 투니버스의 애니판으로 다시 봐도 여전히 낄낄댈 수 있을 만큼 본작은 썩 양호한 수준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루팡 3세]를 떠올려도 큰 실례가 안될 만한 '잘 만들어진 상품'이다.(예술성은 다른 우물에서 찾으시도록.)

해적판으로 처음 소개될 당시의 인기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것이었다. 거짓말 안보태고, 신권이 나오면 적어도 3명은 기다려야 간신히 차례가 돌아오곤 했다. 그냥 기다리기가 지루한 덕에 '이삭줍기'로 읽혀진 만화도 꽤 될 것이다. 방의표(당시 해적판의 주인공 이름)는 마흥식과 함께 남학생들의 장래희망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런 열광적 호응은 당시까지 성적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만화나 영화를 대하기가 그만큼 어려웠던 형편의 반증이었을 것이다. 요즘이야 히히덕거릴 만한 것들이 원산지를 막론하고 넘쳐나지만 그때의 텍스트 세상은 콘텍스트만큼이나 양극 아니면 음극이었다.([소나기]거나 '세운상가'거나.)

그런 엄숙한 이분법에 가위눌려 살던 남학교 앞 만화방에 운석처럼 떨어진 방의표가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켰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닌가. 이런 비비꼬인 추억 탓에 요즘도 이 만화의 표지를 흘낏거리는 나의 표정은 회상과 신물이 묘하게 배합된 그 어떤 것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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