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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세트 - 전12권 - 완역 결정본
풍몽룡 지음, 김구용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삼국지와 열국지의 관계를 비유하자면 마치 [반지의 제왕]과 [실마릴리온]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후자가 전자의 앞 역사를 다룬 것이라는 점에서도, 후자가 다루는 기간이 전자보다 훨씬 길다는 점에서도, 그리하여 전자는 몇몇 주요 영웅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데 반해 후자는 길디 긴 역사 그 자체가 주인공 노릇을 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꼽아보자면 차이점이 훨씬 더 많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를 비교한다는 것은 중국과 영국, 혹은 동양과 서양을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흥미롭고 호사롭다.
그렇듯 열국지는 삼국지의 앞에도 있고 위에도 있다. 이실직고하건대 더 재미있는 쪽은 삼국지다. 천변만화하는 책략과 술법에 있어서도, 그로부터 배워갈 수 있는 갖가지 지혜에 있어서도 삼국지가 뒤처지는 것은 아니다. 반면 열국지는 무려 550년이라는 세월을 다루고 있으니만큼 끝도 없이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과 나라 사이에 얼키고 설켜 전개되는 이야기에 우선 질리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어느 한 구절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관중에서 공자를 거쳐 진시황에 이르기까지, 관포지교에서 결초보은을 거쳐 와신상담에 이르기까지 어느 인물 어느 고사 하나 가벼이 여길 대목이 없는 탓이다.
이렇듯 도도한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정신 없이 떠내려가다 보면 어느 순간인가 '경지'에 이르게 된다. 더 이상 허우적대지 않고 둥둥 떠서 유유자적 물놀이를 즐길 줄 아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쯤 되었다면 아마도 1/3은 넘어 읽은 후일 것이고, 나머지 분량의 독파는 물론 이제는 어느 소설의 대하에 몸을 맡기더라도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역사를 읽는 안목을 얻게 되었달까. 이것이 바로 열국지만이 비장하고 있는 보배이자 삼국지의 위에 있다는 이유인 것이다.
강으로부터 무엇을 얻어갈지는 그러나 헤엄에 익숙한 이라도 제각각이게 마련이다. 어떤 이는 물을, 어떤 이는 물고기를, 또 어떤 이는 헤엄치는 재미를 얻어갈 것이다. 열국지라는 대하 또한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역사 상식이 있으며 치세의 비술이 있고 더하여 읽는 재미 또한 있다. 나의 경우 남은 것은 공허한 감상이었다. 결국에는 모두 죽고 모두 망하더라는 것이다.(책은 진나라의 이른 몰락까지를 다룬다.) 혹은 달랑 몇 줄 등장할 뿐이고 혹은 두 권에 걸쳐 활약상이 서술되지만, 혹은 아무 한 일 없이 비명횡사하고 혹은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편안한 여생을 누리지만, 그래도 결국에 가서 죽기는 매일반이더라는 어설픈 독후감은 100년을 못 사는 필부가 550년에 달하는 난세의 호걸들을 과분히 만나 얻은 배탈이리라.
김구용 선생의 열국지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정역正譯으로 이미 공증을 받아놓았다. 번역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거 참 유려하더라는 한 마디 뿐이다. 연변대학의 교수진이 공동으로 달려들었던 연변판 삼국지 등의 성과에 버금가는 일개인의 위업이다. 편집 또한 못지 않은 정성을 쏟아 또 하나의 공훈을 세웠다. 매권마다 첨부된 원고지 총 2700매 분량의 부록은 그것만을 모아 단행본으로 내놓아도 칭찬을 받을 법하다. 유일하게 헐뜯어볼 구석이라면 알록달록 촌스러운 표지 디자인 정도랄까. 삼국지라는 봉우리를 딛고 오르면 비로소 아득히 펼쳐지는 산맥, 열국지다. 둘의 순서를 거꾸로 밟는 무모함만 주의한다면 필시 귀한 얻음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