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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잠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0월
평점 :
이제 알라딘 서평없이는 책 한 권 선택하기가 쉽지 않네요. 언제부터인가 알라딘 별점평가를 보고 책을 구입할지 말지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으니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불행이라고 여겨야 할지 모르겠네요. 사건과 뉴스는 물론이고 영화 평점까지 조작하는 이 시점에 알라딘의 별표 역시 악용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급작스럽게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자신의 주관이 중요한 시점이 온 것일 텐데 그 주관 역시 주변에서 보고 듣는 것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보니 이것이 나의 생각인지 남의 생각인지조차 이제는 모르겠네요, 원. 결국은 ‘나는 누구인가’, ‘나의 생각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라는 생각으로 돌어가야 하는 시점이 온 모양입니다. 사설은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오래간만에 읽은 책에 대한 저의(?) 생각을 써 보려고 합니다. 정말 오랜간만이네요.
‘최제훈’은 저에게 혜성처럼 다가온 작가입니다. 처음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었을 때, 이 작가가 정녕 우리 나라의 작가가 맞나 싶을 만큼 그에게서 새롭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냥 좋은 것이 진짜 좋은 것이라는데 저는 최제훈 작가의 글이 그냥, 마냥 좋았습니다. ‘퀴르발 남작’이라는 영 생소한 소재를 가지고 나와서 이렇게 사람을 후려치다니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단편과 단편 속의 인물들이 튀어나와 대화를 나누는 부분에서는 그냥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습니다. 인상 깊은 단편이었는데 뒷부분에서 주고 받는 등장 인물의 대화 때문에 작품을 다시 훑어봐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하나도 짜증나지 않을 정도로 좋더이다. 책에 빠지면 늘 그렇듯이 머리에 꽃 꽂은 처자인 양 이 책을 마구마구 추천하고, 선물하고 댕겼지요. 그리고 ‘일곱 개의 고양이 눈’도 전작만큼은 아니지만 좋았고, ‘헬로, 미스터 디킨스’에 실린 여러 작품 중에서도 뚜렷하게 기억이 나는 건 ‘최제훈’ 작가의 글이었습니다. 그의 글에는 하나가 아니라 수십 개의 글이 담겨 있어 좋았습니다. 그가 말한, 인형 속에 인형이 끝없이 들어 있는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글 속에 또 다른 글이, 그 속에 또 다른 글이 들어 있어서 꼭 ‘천일야화’를 읽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습니다. 한 권의 책을 샀는데 그 속에 수십 개의 책이 들어있는 기분이랄까요? 그런데 이번 작품은 장바구니에 담아 놓고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장바구니에서 쌓인 책값이 만만치 않을수록 고민은 깊어지기 마련이고, 그렇게 그의 작품을 유보할 만큼 그의 작품에 대한 리뷰는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래도 만나게 될 책은 어떻게든 만나게 됩디다.
그래서 그의 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비잠’, 아기가 팔을 위로 벌리고 자는 모양을 일컫는 말이라는데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제목이 왜 그런지 의문입니다. 마지막 장면 때문인지, 주인공의 모든 행동이 결국 어린이의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
소설의 첫 장면을 읽어나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왜 이 소설에 실망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습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과 저주받아 마땅한 더러운 현실에 대한 묘사, 윗것들이라고 불리는 사회 지도층의 행태를 어찌나 사실적이고 전문적으로 묘사하는지 매일 신문기사나 뉴스에서 보는 것을 자세히 풀어쓴 듯한 내용에서 살풋 머리가 띵해지더라구요. 기존의 동화를 꼬고 돌리고 뒤집어 새로운 이야기로 해석하는 그의 솜씨를 기대한 저로서는 현실을 비판하는 리얼리즘에 흠뻑 빠진 듯한 이야기가 낯설고 지루해졌습니다. 이런 사실적인 비판은 ‘최제훈’이 아니라 다른 작가도 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인 묘사와 어려운 내용이 앞을 가로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속에는 제가 책을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뭔가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꾸준히 책장을 넘기다가 전체 내용의 중반을 넘어갈 즈음에 ‘최제훈’만의 장기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껏 참고 읽어온 것에 보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소설 속의 인물들이, 동화 속의 인물들이 새로운 옷을 덧입고 재기 발랄하게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리데기가 부모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고난을 겪으면서 자신의 목적에 도달한 것처럼 우리의 주인공은 메달을 나영이에게 돌려주겠다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바리데기 못지않는 고난을 겪게 되지요. 빠삐용의 도움으로 탈출을 하고 피노키오의 거짓말에 도움을 받고 빨간 두건 소녀의 도발까지.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인물들의 활약이 펼쳐졌습니다. 더이상의 이야기는 직접 확인해 볼 것을 권하는 바입니다.
정말 놀라웠던 것은 주인공을 엄청난 고통의 구덩이로 패대기친 것이 어이없게도 치기어린 행동으로 치부된 주인공 자신의 선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선의의 행동이 결국은 이 모든 고난을 초래한 동시에 이겨낼 수 있게 한 힘이 아닌가 합니다. 바리데기가 심부름을 해 주고 불사약을 얻게 된 것처럼, 주인공이-어떤 불순한 생각을 품고 있었든지 간에- 한 선의의 행동은 인해 새콤달콤한 ‘카라멜’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었고 이 새콤달콤한 존재가 다른 이들의 도움을 가능하게 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어린 아이가 첫 걸음을 뗄 때 그것을 지켜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벽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 없답니다. 그걸 보기가 안쓰러워 아이를 번쩍 안아 한 걸음이 아닌 수십 걸음 떨어진 목적지에 순식간에 데려다 주면 아이는 꺄르르 웃는 것이 아니라 자지러지게 울더이다. 인간은 그런 것인 모양입니다. 순순하게 평탄한 길을 놔 두고 굳이 구덩이로 들어가서 올라오겠다고 난리를 치고, 도와달라고 난리를 치다가, 도와주면 손길을 뿌리치고 째려 보면서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소리치는 그런 불가사의한 존재. 그런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싶어집니다. 이 글을 다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불현듯 듭디다. 내가 부여안고 있는 고통은 모두 내 자신이 초래한 것이므로 내가 열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래서 저는 이 글 역시 재미있다고 여겨집니다. 꿈과 현실이 묘하게 조우하게 만든 그의 솜씨를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글을 읽고 나를 돌아보게 해 주었으니 말입니다. 인간은 모두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지루한 첫 부분만 참아낸다면 여러분도 최제훈 작가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