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스 워
이완주 지음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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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낚였다. 그리고 발을 뺄 수 없었다. 기왕 잡은 책은 건너뛰더라도 읽어야 성이 풀린다.


농업관련, 마을 만들기, 환경관련 서적들을 검색하여 구매하는 과정에서 ‘검증되지 않은’ 책이 걸려들어 왔다. 마치, 고기잡이 그물에 원하지 않는 엄청난 해파리가 걸린 것처럼. 물론 조선일보 1억 고료의 당선자인 저자의 노력과 땀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전적으로 나와는 완전히 다른 견해와 내가 알고자 하는 정보가 전혀 아닌 데에 있다.


식량전쟁은 앞으로 온난화와 경제공황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적으로 위기에 봉착할 농업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일부 국가는 이로 인한 엄청난 이익을 가져갈 것이고 기아와 공황 속에서 굶어죽는 수백만의 사람들은 대개가 제 3세계의 국가들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식량자급 28%정도의 농업규모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대부분이 60대 이상이라는 점, 그리고 기계를 사용해 광활한 농지를 한사람과 수대의 기계가 관리하기엔 산이 너무 많은 점. 적절한 농지의 경우엔 대부분 개발로 다른 생산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 앞으로의 걱정을 더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식인 쌀을 어떻게 지켜야하고, 앞으로 그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자료’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실상 ‘라이스 워’는 제목이 주는 웅장함과 심각성에 비해 내용은 따분하기 그지없다. 그 이유는 내용의 전반적인 흐름이 과거 박정희시대의 농업발전에 대한 공적을 기리고 있기 때문이다. 뭐 젊은 사람은 들어보기 힘들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겠지만, 30대 중반정도만 하더라도 어린 시절 ‘통일벼’의 위대함은 듣고 자랐을 것이다. 현재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의 경우도 ‘맛이 없어서’ 그렇지 생산량이 대단하여 우리가 이밥에 고깃국 중에 이밥을 실컷 먹게 해준 종자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정도이다. 지금은 ‘쌀’이 천대받고 수입밀로 만든 식품이 우리의 식단을 대신하고 있어서 그 관심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상 지금 우리 쌀농사는 정부가 대부분을 견인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직불금과 수매가 없다면 당장 논을 갈아엎지 않을 농민이 없고, 소득이 많은 작물이나 보조가 많은 작물 등으로 이동할 것이 뻔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명’에 의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오히려 이런 식의 과거 띄우기 보다는 우리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어떻게 꾸려갈지를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낚였다. 어쩔 수 없다. 박정희 때의 식량증산정책과 무지막지한 농업인 교화에 대해 궁금하다면 책을 읽어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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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 당신들의 대한민국 세 번째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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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창피해서 도저히 남들 앞에서 말하지 못하는 것, 내가 입 밖에 내는 순간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나나 같이 민망해져 버릴 것 같은 대화의 주제, 나는 알고 있지만 당신은 알지 못해서 꽁꽁 감추고 싶었던 비밀, 알지만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불공정함과 부족함, 불편함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학연, 지연, 혈연을 중요시하고 이의 ‘구속’을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개인으로서 누구과 어떻게든 연결될지 모르거나, 연결이 되어 있는 단체와 소속 인사들을 비판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죠. 그렇다고 하면 개선의 여지는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어떤 방향으로 나아져야 할지에 대한 논의나 토론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저 살아온 대로 관행과 관습, 관례를 중시 여기다 보면 인간관계도 원만하고 자신의 비즈니스도 평탄하게 나아갈 것이 뻔 한데 누가 위험을 무릅쓰고 ‘내부 고발자’가 되겠냐구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은 이 사회에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인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곳저곳 부딪히거나 남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보고 자연스럽게 온몸으로 습득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사회입니다.


예컨대, 비록 다른 사람이 ‘부정’이나 ‘비리’로 걸려서 패가망신까지 가는 일이 생겨도 그가 그저 재수가 없었을 뿐, 내가 그가 받은 ‘심판’을 똑같이 받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자녀나 남편을 취직시키기 위해 ‘높은 분’에게 돈봉투나 선물박스를 안기고, 심지어 몸을 바쳐야 하는 전근대적인 사회구조, 남을 죽음으로 몰수도 있는 음주운전을 하다가 걸린 것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하고 군대에서 폭력을 가하거나 당한 경험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이사회는 불법과 비리, 폭력이 이미 생활화 되어 있으며, 오히려 부정을 통해야 스스로가 성장하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대중의 마음에 확고하게 박히게 된지 오랩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근원적인 가치인 ‘자유’와 ‘평등’은 그냥 여름 복날 탕으로 끓여질 개에게나 던져줘야 할 것들이고, 비록 자유롭지 못하거나 평등하지 못해도 ‘돈’을 섬기면 나와 내 가족에 복이 올 것이라는 사회적 믿음만이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돈’이 가장 중요하며 나와 내 가족의 영달을 위해서만 몸 바치며 이를 지켜주고 북돋아주는 일을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내가 잘 살게 됨으로서 누군가가 다치게 되거나 망하는 것에 대한 것을 정당한 희생으로 치부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공평하게 잘 사는 것이 선(善)이라는 이야기는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말이 되버립니다.

교회나 절, 성당에서도 모두가 자신과 가족의 부와 행복, 성공을 기도하고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나라의 평안과 진보, 세계평화와 남북의 화해와 협력에 대한 내용으로 기도하는 일은 ‘행사’때나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니 그 전지전능한 신조차도 밀려드는 개인적 소원을 어떻게 들어주어야 할지 의문스럽습니다.


수천 년 역사라고 일컫는 ‘우리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습니다. 그것이 가진 영역과 가치는 누구도 건드려서 흔들 수 없는 성역의 것이 되어서 예컨대 누가 ‘독도’만 외쳐도 ‘쪽발이‘하며 일본을 향해 으르렁 거리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한민족‘이라는 불안하고 배타적인 논리로 우리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외국동포와 외국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반말‘정도는 아주 일상화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고, 흰얼굴의 외국인에게는 꼼짝못하고 살살거리고 함께 어울리는 것을 ’자랑‘으로 삼을수 있으면서 검은 얼굴의 외국인은 경멸과 무시, 조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대다수의 국민들입니다. 길을 물어보는 외국인에 대한 반응의 비교, 이에 대한 실험을 한 모방송국의 다큐도 충격을 주었습니다.

조작된 ’정보‘와 이의 일방적 유통이 원인이겠지만 대한민국의 ’건국‘과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굳건하게 다져온 이승만, 박정희가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대접받는 것을 보면 구지 역사적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식함’만이 지탄받을 일이 아니라 오늘의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의 평등과 자유를 갈망하기 보다는 나, 내 마음의 고요와 평안을 찾는 데에 힘쓰다 보니 느슨한 ‘연대’와 함께 걷기는 커녕 눈을 맞추기조차 힘이 들고, 올해의 가계를 고민하고 집구하기, 투자, 주식, 부동산, 예금은 얼마 하는 것들로도 충분히 힘든데다가 결혼과 아이 갖기, 아이 기르기와 교육 등에 ‘투자’해야 할 금전적 정신적인 부분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공동의 가치는 ‘사치’에 가까워져 버립니다. 앞에서는 조아리고 등 돌리면 까는(?)것이 당연한 계급관계에서 욕하면서도 상층을 동경하는 하층민들은 어떻게 하든 한 계단이라도 오르기 위해 상처투성이인 온 몸을 바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오르면 자연스럽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굳어지는 이 땅의 계급구조에서 평등과 자유가 설 자리는 없나봅니다.


자본주의를 뒤집어 쓴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곳에서 ‘복지’가 설 자리는 없습니다. 기업이 늘리면 늘리는 데로 자르면 자르는 대로 노동자는 자신의 생계를 맏긴 채 눈감고 기도나 할 뿐입니다. 정부가 주도한다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4대강을 ‘죽이는’ 토목공사에 30조원이 들어가는 동안 방학 때에도 문제풀기에 열중해야만 하는 학생들과 등록금을 내지 못해서 배움을 그만두거나 심지어 자살하는 학생들의 문제, 박사가 되어서도 월 백만원의 시간강사 자리를 근근이 유지하며 불안에 떠는 지식인들, 뉴타운이 들어서는 곳에서 쫓겨나서 살 곳을 잃어버린 도시 난민들, 늘어가고 갈 곳 없고 할 일 없는 노인들의 문제는 등한시 되고 가치 절하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그들과 손잡아야 할 ‘나’ 역시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생각들은 아등바등 ‘돈’과 ‘이윤’, ‘효율’로 채워야 할 머리만 복잡하게 할 뿐입니다.


또, ‘양심’의 사전적인 의미도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는 모든 남성 젊은이가 총을 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심지어 군대를 가지 않았던 사람들까지도 이에 편승해 이 땅에 소수 ‘양심’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데에 일조합니다. 과연 ‘평화’의 가치를 실현해야 할 이곳에 60만 대군이, 정작 그들조차 있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 오로지 ‘적’으로 정해놓은 우리 동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눌 것을 강요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에만 빠져있어도 아까운 시기의 젊음을 폭력과 강요에 의한 무조건적인 복종의 규율만을 온 몸으로 습득하는 곳에서 2년을 보내는 것이 온전한 인격과 자아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기업이 돈으로 사회전반을 널리 주무르고 있으며 배움의 성전이 되어야 할 대학은 이미 돈 놀음에 맛이 들어서 등록금을 차곡차곡 모으고 투기하는데 에만 혈안입니다.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것들은 기업에 충성하느라 서로 바쁩니다. 노조가 없음을 세계에 자랑하는 기업의 기부금으로 지은 건물이 버젓이 들어선 캠퍼스엔 비리로 구속된 기업 인사의 이름을 딴 강의실과 현재 하한가를 거듭하는 행보를 하고 있는 대통령의 이름을 딴 라운지를 자랑스럽게 내어 놓고 있습니다. 그들의 명예를 드높이지도 못할 국회의원배출을 ‘서울대 합격’처럼 홍보하는 대학 관계자의 머릿속에는 이미 대학이 ‘상아탑’으로서의 기능은 끝났음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공’을 위해, 좀 더 벌고 서울의 좋은 아파트를 장만하기 위해 ‘명문대’가 필요한 것이라면 순수와 알맹이는 가버린 껍데기가 바로 대한민국인 것입니다.


생각하고 움직이며 달라져야 할 ‘당신들의 대한민국’의 저자는 너무나 오른쪽으로만 치우친 사회를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움직이길 기대합니다. 한국인 박노자가 바라보는 슬픈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여태 나열한 것들 보다 훨씬 더 불행하게도 어둠과 암울함으로 칠해집니다. 과연 빠져나올 구멍이나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촛불’든 이들 덕분에, 혹은 기어코 지금 가지고 있는 ‘시스템’이 가진 치명적 문제 때문에 바뀌어갈 기회가 올 것이라고 위로합니다. 러시아 태생의 귀화 한국인일 뿐이라고, 그는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를 잘 알지 못한다고 애써 무시하려 해도 정작 그가 말하는 폭넓고 깊이 있는 ‘현상’에 대한 이해의 수준은 ‘토종’ 학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세련된 분석과 전망을 내어 놓습니다.


‘병’이 깊은 환자에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조곤조곤 병의 원인과 진행을 설명하지만 정작 처방을 하지 못하는 의사도 있고, 병의 유래와 관계없이 직관적인 처방을 행사하는 의사도 있습니다. 어떤 의사이던 간에 환자가 스스로의 병을 인정하는 것이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야 병이 낫던지 병세가 호전되어 나을 기미를 보이던지 할 것이지요.

모쪼록 이 나라보다 좀 더 편안하고 자유로운 탐구의 분위기가 주어지는 노르웨이의 오슬로발 ‘편지’로 좀 더 세심하고 깊이 있는 ‘처방’을 ‘우리 대한민국‘의 여럿과 공유할 수 있기를 앞으로도 기대해 봅니다. 저자는 자신이 던지는 토론의 거리가 토론과 학습이 활발해져서 공감과 공유가 곧 연대로 이어지고, 힘찬 발걸음의 ’움직임‘으로 나아가길 기대합니다.

   
 


'선진화' 되어 간다는 대한민국에서

과중한 학습과 시험 부담, 학교와 부대 안에서의 폭력.

과로와 생계곤란, 경찰의 단속과 과잉 진압으로

목숨을 빼앗기거나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내외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그가 ‘우리’를 향해 던지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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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물꼬물 갯벌 생물 이야기 - 생태 동화 2 : 우리 갯벌 생태동화 2
황근기 지음, 원성현 그림 / 꿈소담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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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물꼬물 갯벌 생태 이야기/황근기 글, 원성현 그림/소담 주니어/9,800원


철썩이는 파도와 눈부신 하얀 모래가 융단처럼 넓게 깔린 해수욕장. 그곳에 가면 확 트인 수평선과 파도소리, 짠 바다 냄새가 마음속에 ‘바다’를 담게 만듭니다. 풍경과 사람에 취해 바다를 사랑하게 됩니다. 모래에 사는 조개와 자그마한 게라도 나타나면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신기해서 환호성을 지르고, 일부는 먹을 수 있는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바닷가의 생물들은 많지만 정작 우리가 아는 바다가 아닌 진짜 바다는 갯벌일지 모릅니다. 다양한 생물들이 어우러져서 조화로운 모습을 보이고, 인간이 어질러놓은 바다를 ‘청소’하는 몫도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이런 역할을 무시한 채 그저 ‘막아서’ 매우거나 담을 쌓아서 물을 가두는 일을 벌이는 것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개발과 이익에 눈이 먼 사람들일 것입니다.

갯벌이 인간을 이롭게 할 것이라 알려지기도 했지만 많은 수의 인간은 바다와 갯벌의 관계와 그 가치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막아서 산을 깎아 나온 흙을 매워 넓어진 땅을 위락지와 상업시설로 바꾸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니 말이죠. 사실 그들은 인간이 전혀 ‘이용하지 못하는’ 바다를 훌륭한 개발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으니 얼마나 큰 이익과 효율이냐 생각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그런 생각에 의해 무시되는 것들이 있으니 그 곳에서 사는 온갖 자연 생태 자원과 생물일 겁니다. 자연의 오묘한 조화는 관심이 있지 못한 인간들에게는 한낮 그냥 구경거리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나름의 ‘가치’를 지닌 훌륭한 지구 수호대입니다. 한쪽이 무너지면 나머지에 균열이 생기는 자연 생태계에서는 좋은 생물과 나쁜 생물이 없습니다. 다만 인간에 의해서 멸종되거나 위기를 맞는 동식물들의 역할은 그들이 없어진 생태계에 나타나는 ‘균열’로만 알 수 있으니 안타까운 노릇인거죠.

인간의 개발에 그들이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무지막지한 인간의 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마 안타까울 겁니다. 갯벌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생물들.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조개류, 게류, 오징어 같은 갑각류, 해초, 산호초, 바닷가를 근거로 하는 새들이 주인공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진짜 그들의 이야기처럼 이어지는 달팽이, 조개, 방게와 침입자 너구리, 낙지, 두루미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 서해와 남해에 걸쳐서 있는 갯벌들. 영종도, 동막, 천수만, 선재도, 대부도, 용유도, 강화도의 갯벌이 그 배경이지요.

살아있는 듯 생생한 그림과 이야기 끝마다 나오는 친절한 해설과 사진은 갯벌에서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거나 마트에서 거의 죽어서 진열되는 어산물을 보면서 살아있을 때의 그들의 삶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갯벌은 쓸모없는 땅이 아니에요!

그들의 아우성이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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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사과
기무라 아키노리, 이시카와 다쿠지 지음, 이영미 옮김, NHK '프로페셔널-프로의 방식'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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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하게 정리되어 줄줄이 푸른 작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 곳에서 나의 식탁에 오를 식품의 원형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줄줄이 검은 비닐로 둘러져서 주변의 풀이 나는 것을 막고 고랑의 바닥은 반질반질하게 푸른빛으로 풀 한포기 나지 않고 ‘관리된’ 모습을 보면 과연 부지런한 농부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한다. 꾸준히 다니면서 풀을 뽑아주고, 때 되면 비료에 퇴비에 곤충이 피해를 주지 않도록 농약을 뿌리는 일이 바로 오늘날의 농부들이 하는 일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곳도 있다. 풀이 수북이 쌓이고, 나비와 벌들이 잔뜩 날라 다니며 심지어 메뚜기가 뛰어 다니는 곳. 그런 곳이라면 지나다니는 농민들은 혀를 차며 도대체 이 밭의 주인은 어떻게 관리를 하기에 이 꼴로 만들어 놓는가 하며 안타까워 할 것이다.


풀은 제멋대로 자라고, 과연 이곳에 무언가 먹을 것이 심어져 있기는 한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고, 노는 땅인지 농지인지 가늠할 수 없는 곳이 바로 나의 텃밭이다. 오래전부터 일본 후쿠오카 마사노부님의 ‘자연농법’에 관심이 있어서 실천의 방향으로 결정하고는 죽 ‘손대지 않는’것이 바로 농부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땅을 보아 왔다.

때때로 드는 유혹은 바로 주변의 핀잔과 질타의 말들. 한마디도 격려는 없으며 오로지 잘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경험 많은 농부들이 진지하게 이야기하면, 과연 내가 이곳에서 ‘독불장군’이 되어서 설사 농사를 안 짓더라도 살아갈 수 있기는 한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남이 아니라 내가 살기위해 하는 것이라고 위로하곤 한다.

땅을 사고 처음 갈아서 마늘을 심었을 때 땅속에 아무 벌레 한 마리도 나오지 않는 것을 봤다. 과연 이 땅에서 작물이 자라기는 할까라고 의심하는 말을 듣고 밭을 갈아주던 이장님은 거름을 많이 주라고 한다. 거름이라고 불리는 ‘유기질퇴비’는 엄청난 썩는 냄새를 동반한다. 완전 부숙(잘 익은)퇴비가 아니기 때문에 소똥, 닭똥과 각종 썩는 쓰레기를 톱밥에 섞어서 말리는 작업으로 제작된다. 전통적 퇴비는 음식물쓰레기와 사람, 가축의 똥을 모아서 켜켜이 마른 풀이나 톱밥 등을 섞어가면서 발효시키는데, 이에 반해 대량생산체제에서 기계가 인위적으로 섞고 말리는 것과는 차이가 많이 나며 공정을 줄여야 한다.

통풍기, 선풍기 등의 강제건조로 진행되는 작업으로 ‘말리는’ 퇴비. 발효되는 시간이 적어서인지 전혀 삭지 않은 냄새가 퇴비의 온전함을 의심하게 만든다. 퇴비공장을 견학한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본 이후로는 퇴비를 사서 쓰는 것도 애써 자제하고 있다.

그냥 자연 상태의 땅에서 땅의 기운이 살아나고 미생물과 곤충들이 생겨날까 하는 의심이 있었다. 집을 짓느라 땅을 많이 깎아내어 생땅이 드러나고 그곳에서 풀 한포기 자라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인위적인 거름을 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고 자연이 알아서 하지 않을까 하는 게으름이 내가 무언가를 투입하는 손을 막아주었다.

일 년이 지나고 나니 풀이 무성해지고 그곳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다양해지기 시작한다. 손대지 않은 땅의 경우엔 풀이 자라는 속도나 밀도가 다르다. 그곳의 땅속에는 개미를 포함해서 딱정벌레류와 메뚜기, 곤충의 유충들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지렁이는 보이지 않는다. 지렁이가 많아야 땅이 좀 더 부슬부슬해지고 영양분도 많아서 유기농 실천하는 농부들이 가장 좋아하는 벌레가 아닐까 생각된다. 아직 멀었다는 이야기다. 전혀 손대지 않은 땅이 온전한 자연 상태로 돌아가기 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변의 생물이 살기 힘든 넓은 바리케이드들이 내 밭으로의 진입을 막는 역할도 하는 것이 아닐까.

육 년 전에 책에서 읽은 ‘자연농법’을 실천하고 있다는 말은 일부의 나와 같은 부류들 외에는 어디에서도 할 수 없다. (사실, 어떤 부분은 그들조차 이해 못할 때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노동을 전혀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게 무슨 농사냐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그래서 핑계로 둘러대기 일쑤다. 해야죠. 그래야죠 라고 동의하는 척하는 일이 이젠 익숙해져 버렸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으니 그들도 엄청 답답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과일나무를 심고 싶었다. 과일을 직접 따서 먹으면 얼마나 맛이 있을까 라는 상상을 해 본다. 솔직히 방송프로그램에서 농사일 도와주면서 사람들이 그냥 과일을 따 먹는 모습을 보면, 농약 묻은 것을 씻어 내지도 않고 먹는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기까지 한다. 반면 열대 우림의 숲속에 야자수나 바나나를 따서 먹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편안하고 입에 군침을 돌게 한다. 농약이 없는, 야생의 과일. 얼마나 맛이 있을까.

전에 살던 집에 자라던 감나무엔 농약을 하지 않았다. 크지 않은 단감이 주렁주렁 열려서 따먹으면 그렇게 달고 맛이 있었다. 그 많다던 깍지벌레도 몇 마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 그루씩 집 앞에 심어놓은 과일나무는 농약을 할 필요가 없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 이었다. 그런데 과수원을 하면 왜 농약이 필요할까? 엄청난 벌레들의 공격과 툭하면 걸리는 병이 잎을 마르게 하고 나무의 뿌리를 상하게 한다. 이년 안에 수확량 ‘제로’가 되는 것이 공식이라 한다.

특히 사과. 백설 공주의 독약이 묻은 사과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농약으로 범벅이 된 사과의 독성 때문이다. 지금도 엄청난 과일을 수입하고 있지만 개방을 통해서 대부분의 사과가 앞으로 수입이 되면 그 독성은 한층 배가될 것이 뻔하다. 수확 후 보관을 위한 약제처리가 농사지을 때 적절히 조절하는 벌레 죽이는 농약보다 훨씬 많은 양이 투입이 된다고 하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사과를 약 없이 재배한다고? 흠, 말도 안 돼 하며 읽게 된 책은 농업서인가 하다가 어느덧 그의 인생에 빠져드는 평전과 같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내가 눈물을 두 번이나 흘리게 만든 한편의 드라마다. 곳곳의 예쁜 그림과 맛있게(?) 쓰기도 하고 번역도 매끄럽게 잘 되어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인간 기무라 아키노리라는 사과 재배 농의 젊은 인생이 후회와 끝없는 실패로 점철되다가 9년이라는 긴 처절함 끝에 마치, 신이 은총을 내린 것처럼 성공하게 되는 과정이 열편의 감동적인 영화보다 더한 감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글의 주인공이자 현재 기적의 사과 판매자이자 다양한 유기농법 강의로 바쁜 기무라 아키노리씨는 사과농사가 전략인 아오모리 현에서 나고 그곳에서 농사로 평생을 보냈다. 실업고를 졸업하고 도시에 취업하였는데 장남이 가업을 잇지 않아서 차남인 그가 고향으로 불려 내려갔다. 결혼과 함께 데릴사위로 농업을 시작하는데 주력은 옥수수와 사과였다. 당시 최신의 트랙터를 영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할 만큼 기계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복잡한 엔진도 분해해서 수리하고 성능을 높이기 위해 뜯어서 재조립하는 일들을 자유자재로 할 만큼 재주가 있었고 열의도 있었다.

그런 그가 서점에서 책을 사다가 우연히 떨어뜨려서 같이 사게 된 책이 그의 인생을 바꾼다. 표지도 밋밋하고 제목도 딱딱한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자연농법>을 읽다가 신선한 충격에 휩싸인다. 다른 것도 된다면 사과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실험을 시작한다. 13회 주던 약제를 1회까지 줄이다가 결국 무농약을 위해서는 빨리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결심하고는 농약을 끊기에 이른다. 1978년에 무농약으로 시작해 가족의 매일은 벌레와의 전쟁이다.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장인장모, 부인과 본인이 나무에 매달려 한손에 비닐봉지를 꿰고 벌레를 잡아서 넣는 것이다. 평균 한 나무에 세봉지가 잡힐 만큼의 엄청난 ‘해충’과 싸우는 일 외에 병 예방을 위한 식초뿌리기로 몇 년, 나무는 시들어가고 뿌리는 흔들거리고, 잎도 나지 않고, 꽃도 피지 않은 지경에 이르게 된다.

   
  “힘들게 해서 미안합니다. 꽃은 안 피워도 열매를 안 맺어도 좋으니 제발 죽지만 말아주세요”
 
   


일본 만화에서나 봄직한 사물과 대화하는 사람의 모습. 누군가 봤다면 드디어 미쳤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무마다 붙잡고 애원하는 때에는 이미 자신의 할 일을 더 이상 없으며 어처구니 없게도 그저 ‘나무의 의지’만 기대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결국 파산과 빛에 쫒기는 가족의 불행이 모두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기를 여러해, 죽음을 결심하게 되고 한밤중에 산속으로 밧줄 하나 들고 오르다가 눈에 뜨인 도토리나무를 사과나무로 잘 못 보게 된다. 그 잘 익은 도토리 열매를 보고 깨달음을 얻어 ‘흙 가꾸기’에 힘을 쏟는다. 최대한 자연 상태를 잘 유지해 주어서 ‘야생성’과 그 기본이 되는 흙의 힘(땅심)을 기르고, 내버려 두는 것과 피해를 예방하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 여기고 ‘방치’가 시작된다.

결국 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을 때의 감격의 그의 것뿐 아니라 책을 읽는 독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불가능한 것’을 위해 도전하는 인간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그것이 자연속의 인간을 이해하는 한걸음이었을 때 더 진한 감동의 향기가 풍긴다.

실천하는 것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일본 땅 어딘가와 우리 땅 어느 곳에서인가 말없이 묵묵하게, 주변의 핍박을 견뎌내며 '자연속의 농사'를 실천하고 있을 그들에게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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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마르크스 Bye, 자본주의
강상구 지음, 손문상 그림 / 레디앙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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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잘 살기를 원하지만 현실 사회에서 ‘모두’가 잘 살기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잘 사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못하는 사람이 있고, 그럭저럭 사는 이들이 있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지구상에 국가라는 사회에 묶여 있는 인간 집단의 공통적 특성이라 해도 무리가 없는 말이지요. 아주 희귀하게 남아있는 ‘원주민’들은 몇 천 년 전의 생활방식을 고스란히 유지한 덕택에 우리가 가진 ‘돈’에 휘둘리지 않고도 잘 살고 있기는 합니다.

역사적으로 고대 계급사회가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오다가 그들끼리의 싸움으로 세력이 뒤집히고 하던 것과는 다르게 근대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들어오면서 ‘돈’이라는 신적인 존재의 위력이 급속히 세력을 떨치면서 ‘돈’을 가진 자들이 세상을 주무르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현재 돈이 많은 사람이 수세기를 지난 미래에도 돈이 많을지는 별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설립 이후에 기회를 잡은 일부 자본가들이 집안대대로 3대 4대에 이르기 까지 이어졌고 일부는 국가를 주무를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니 말이죠. 그러니 앞으로 3~4대는 지금의 ‘부’를 까먹지 않고 적당하게 쓰는 일만 해주면 나머지는 그들이 소유한 회사가 ‘알아서’ 돈을 벌어다 쌓아 주는 것입니다.

이러다가는 인구비율의 1%가 국가재산의 99%를 소유할 날도 머지않아 보입니다. 기껏 동네 부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그들의 막강한 재산 앞에서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게 되겠지요. 그리고 80%정도는 ‘가난’하게 살겠고 그 가난을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해 머리를 쥐어뜯고 소주를 들이 부으며 자신을 학대하며 살거나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소설을 쓰고 있다구요? 오히려 내 자신의 처지가 온전히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순진한척 하는 그대여.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대학 가느라 공부만하고, 취업하느라 ‘스펙’ 쌓느라 다른데 신경 쓸 일 없고, 안 잘리고 봉급타기위해, 승진해서 아들딸 등록금 대기 위해 갖가지 전략과 술수를 부리느라 정신없으시죠. 열심히 일만하고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우리 노동자들은 갑자기 일방적으로 잘리면 어디다 항변하겠습니까. 수면제를 털어 넣거나 그도 아니면 지금 ‘사태’라 불리는 쌍용의 해고노동자들처럼 ‘죽음’과 취업을 맞바꾸자는 극단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본인은 노동자가 아니라 모르겠다구요? 우리 대부분은 노동자입니다. 가계를 가지고 있어도 마찬가지이고, 대기업에 다닌다해도 마찬가지구요. 선생님도 그렇고, 동사무서 직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차이라고 하면 노동법이라는 법테두리 안에서 보호를 받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계급적 차이일 뿐이죠. 이에 따라 결혼을 위한 중매의 인기도도 달라진다지요?

주변에서 보이는 온갖 불합리와 불편함, 불공정함, 승자독식의 구조가 슬슬 눈에 띈다면 본인의 머리와 가슴이 몹시 답답해 질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꾸기 위한 노력은 안 해보시렵니까.


공부는 어떨까요. 이런 사회 ‘시스템’이 왜, 어떻게 돌아가고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지에 대한 공부를 해서 적어도 무지의 ‘답답함’을 해소 하는 데 달려봅시다. 경제학의 고전, 아담스미스부터 시작할까요. 아니면 근간의 ‘케인즈’의 저서를 읽어야 할까요. 어렵습니다. 역시 자본과 노동에 대한 명확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21세기에도 가장 그 영향력이 막대한 ‘칼 마르크스’를 보는 게 좋겠습니다. ‘공산당선언’, ‘신성가족’, ‘철학의 빈곤’, ‘자본론’ 등의 책들이 쏟아집니다. 그중 우리의 타깃은 ‘자본론’입니다. 두껍습니다. 펼쳐서 보았더니 하품 나오게 생겼습니다. 어렵기도 하고 모르는 단어 투성이라 몇 페이지 보다가 덮습니다. 무식한 노동자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식한 명문대를 다니는 대학생, 대학원생, 박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읽으려다 포기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책 읽어주는 남자’가 있답니다. 글을 모르는 여인에게 책을 읽어주고 사랑을 나누었답니다. 그것과는 다르게 글을 알아도 읽지 못하는 더 슬픈 경우라면, 해설이나 요약이 필요할겁니다. 성경도 어려워서 신자들이 성경읽기를 어려워하니 각종 해설서가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어렵던 책도 눈에 다시보이고 읽는 재미가 생길테니까 말이죠.


‘하이, 마르크스 바이, 자본주의’는 자본론의 해설서입니다.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본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현실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윤’dll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왜 노동자는 항상 가난하고, 왜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 나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왜 파업할 수밖에 없는지도, 공황이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인지도 자본론을 읽고 나면 이해가 갑니다.”  
   




흠, 이쯤 되니 슬슬 겁이 납니다.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하며 ‘가스총’을 들고 돌진하실 노병들이 눈에 아른거리기도 합니다. 그분들을 적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할 뿐입니다. 북한을 찬양하는 것도 아니고 북한과 같은 경제상황을 맞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입니다.


자본론이 어려워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적어도 수십 번, 수번(?)은 읽었을 저자가 어떻게 하면 쉽고, 재미있게 쓰면서 핵심적인 내용들을 전달할 수 있을까를 위한 전력투구로 보입니다. 읽어보면 이 정도를 풀어서 썼을까 하는 부분도 보입니다. ‘스포츠신문’을 경쟁자로 생각한답니다. 스포츠와 섹스로 무장한 그들과 경쟁하겠다는 용기가 가상하지만 무리라는 것이 뻔합니다. 다만 어려워 멀어져가는 대중들이 좀더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한 친근한 대중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일겁니다.


저자는 말미에 우리가 ‘경제학의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결국은 우리가 손에 손잡고, 더 나은 미래를 우리 스스로 개척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모르는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라고, 더 잘 알면 더 잘 보이고 이를 통해서 어떻게 해야 바꿀지를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단계에 이를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세상을 바꿔서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맛있는 것을 실컷 줄 수 있게 되는 게 최곱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충분히 알고 있는지, 알았다면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개인만의 행복을 위한 처세가 아니라 연대가 중요합니다. MB빼고 다 연대합시다. 어차피 MB는《자본론》안 읽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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