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 잇 - 회의적 환경주의자의 지구 온난화 충격보고
비외른 롬보르 지음, 김기응 옮김 / 살림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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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요란한 경고와 관련서적을 많이 읽은 탓에 ‘세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밥을 먹고, 차를 운행하고, 전자제품과 조명의 전원을 켜며, 물품을 택배로 구매하면서 까지도 항상 조바심과 불안감에 시달린다. 평범한 내가 이럴 진데 특히 ‘환경운동’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더 할 것인가. 환자라구?


내가 이산화탄소 줄이기에 전혀 도움을 주고 있지 못하다는 것일까. 아님 나와 같이 행동하거나 더 심한 탄소배출원이 가득한 이 지구의 앞날을 걱정하는가. 도덕적이지 못한 나의 행동에 대한 자책을 느끼는가. 자연이 주는 것만 얌체같이 받아서 날름 먹고는 다시 돌려주는 것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으니, 이런 불균형이 마침내 인간에 대한 자연(신)의 앙갚음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수많은 예언과 경고를 근거로 한 불길한 느낌일뿐인가.


나는, 오늘도 별일 없이 잘 산다. 하지만 후세와 당장 나의 가까운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일부러 생각을 안하려 한다. 그깟 미래쯤, 지금 이 순간 내가 행복해야 할 것 아닌가.


조각난 얼음위로 걸을 곳조차 없어서 차가운 물위로 떠다니다 죽음을 맞는 북금곰, 이미 잠기기 시작한 낮은 섬나라를 탈출해서 이주할 곳을 부지런히 찾고 다니는 몰디브의 대통령, 천적이 없어 득세하는 모기떼와 이로 인한 말라리아 창궐, 물과 식량의 부족해서 죽어가는 검은 대륙의 아이들, 잦아지며 그 위력을 더해가는 태풍과 장마, 베어지는 나무들과 드러나는 벌건 흙, 중장비의 굉음 속에서 삶의 터전을 잃고 사라져가는 사냥감으로 굶는 피그미족.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아마존이 사라지는 속도와 지구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비례할 것이고, 항공기의 운항횟수가 잦아지면 대기권내 생성된 구름들로 지구 온난화가 심해지고, 석유(주요 구성원이 탄소이므로)의 이용도가 높을수록 탄소배출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벌목업자도 아니요. 이산화탄소를 엄청나게 배출하는 공장주도 아니고, 비행기도 신혼 여행 때 한번 타봤을 뿐이고. 그러니 나와는 관계없는 것이 아닌가. 비록 나의 행동이 탄소를 배출하여 발자국을 남기지만 그것은 극히 미미하여 지구에 끼치는 영향으로 포함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곧 나의 가족. 가족이 우리 주변, 우리 동네, 우리 지역, 종래로 대한민국 정도만 되더라도 이야기는 완전히 틀려진다. 하나가 모여 여럿 되는 힘은 얼마 전 촛불시위나 축구하나로 뭉쳤던 2002년 월드컵 때를 머리에 떠올려도 된다. 어차피 2013년이면 의무감축국에 해당되어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해야 할 일. 지금부터 배출가스 감축에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지금 경제도 안 좋은 이때에 이 비용 너무 아깝지 않은가. 심지어 우리의 영원한 우방 미국도 참여를 거부했다는데. 우리는 왜 해야 하나.


스스로를 ‘회의적 환경주의자’라고 부르는 저자는 이런 인간적 갈등의 ‘틈새’를 공략한다. 엄청난 비용의 투자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미치는 것이 극히 미미하여 경제적 관념으로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것이라고 말한다. 교토의정서를 수정 또는 폐기하여(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결론으로 미루어 보건데) 새롭게 협약하고 이를 통해 ‘돈’을 다른 시급한 사업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물론 지구를 구하는 일이 제일 중하니, 지구를 구하고 사람을 구하는 일에 써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한다.


북금곰을 0.06마리 살릴 수 있는 고비용 온실감축보다 규제를 통해서 사냥당하는 49마리를 구하는 것이 능률이며, 태풍과 홍수로 인한 피해는 근원적 ‘토목사업’을 통해 처방하며, 창궐하는 말라리아모기는 모기장의 보급과 DDT(나는 이 부분에서 정말 뒤로 넘어갔다. 자신의 집에는 한 방울도 못 뿌릴 거면서 불쌍한 아프리카인들은 괜찮다는 논리인가)로 손쉽고 빠르게 해결 할 수 있다는 것.


물 부족에 대한 수리시설 확충과 식량공급. 그 외 사회 기반시설 확충으로 인류에게 다가오는 재앙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빙하가 녹아서 올라가는 해수면의 수준은 미미하며 대륙위의 빙하가 완전히 녹아야 환경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수위만큼 올라가는데, 지금의 근거 자료로 보아서는 어림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느껴지는가. 위의 ‘처방’은 약점이 있다. 그것도 치명적인. 근원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각종 리포트와 기사, 학술자료들을 총 동원하여 교토의정서의 비경제성과 ‘불편한 진실’의 미국 정치인 ‘앨 고어’를 겨냥한다. 잘 정돈된 주장의 흐름은 누구도 거역하기 힘들만한 힘이 있다. 특히 내가 명확한 논거를 가지지 못할 경우엔 더 하다. 저자는 각주만 백 페이지에 달할 만큼 방대한 자료를 근거로 서서히 읽는 이의 마음을 파고든다.


그리고, ‘완전한’반대가 아닌 상대에 대한 인정과 새로운 방향제시는 급진(?) 환경주의자들의 전적인 반대를 차단하는 효과를 지닌다. 이 책을 읽고 동감하는 이들의 결집력을 약하게 하긴 해도 말이다.


경제, 기후학, 정치 전반의 자료. 특히, 자신의 전공인 통계를 통해서 주장을 꿋꿋이 펼쳐 간다. 그의 주장은 옳다. 돈 ’적게’ 많은 사람을 ‘당장’ 구해내는 것이 왜 중요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근원적 처방’이 아니라는 약점 외에도 미래의 1인당 국민소득의 상승과 같은 부가 현재의 소외되어 있는 제3국의 약자들을 치유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같은, 무리한 그의 주장에 대한 논란은 있다.


당장 2013년부터 온실가스감축에 대한 의무를 지게 되는 우리는 이에 대한 고민은 아직(?) 별로 없는 듯하다. 강바닥을 긁어내고 보를 쌓고, 제방에 ‘공구리’를 처바르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냥 놔두는 게 훨씬 낫다는 근거자료가 설득력을 얻고 있고 이에 대다수의 국민들이 반대하고 있으니 그만 두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좀, 그럴듯한 논거와 자료를 가진 ‘학자’는 우리 정부엔 없는가. 그렇다면 배웠으면 좋겠다. 공부라도 해야 ‘설득’을 할 거 아닌가. 그냥 삽만 들이대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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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를 기다리지 말자
로버트 마셀로 지음, 김명이 옮김, 홍기영 사진 / 천년의시작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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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모사이트에서 ‘개나 소나 작가가 될 수 있다’라는 글을 읽었다. 비약이 심한 주장에 동의할 수 없지만, 글을 쓴 다는 것이 대중적으로 ‘유행’을 타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서점 한쪽에 버젓이 차지하는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너도 쓸 수 있다’를 외치며 망설이는 당신에게 당장 집어가기를 종용한다. 이러한 ‘유행’은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인터넷이라는 소통환경이 가지는 특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몇 년 전 유행하던 ‘미니홈피’는 글과는 거의 상관이 없었다. 사진을 주로 하고 있었고, 그야 말로 ‘적은’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상에서 주고받은 ‘사진들로 교류하는 법’이 최근에 자신이의 생각이나 생활의 노하우, 정통하고 있는 고급정보들을 소개하는 ‘블로그’로 옮겨 오면서 이를 읽는 대 다수의 독자들이 자신도 대중에게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음이다. 이를 위해 대중이 호응할만한 기술이 필요한데 포토샵과 편집기술은 부가적인 것이고 가장 고급에 속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사진과 정보는 잘 다듬어진 글을 바탕으로 효력을 얻게 된다. 소위 ‘잘 나가는’ 블로거들의 편집, 디자인도 화려하지만 숨겨진 ‘글발’도 한 몫하게 된다. ‘미니홈피’나 ‘블로그’나 방문자수에 연연하게 되는 것은 자신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당연한 마음이다. 이를 위해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뭐? 그렇다. ‘글쓰기’의 기술이 되는 것이다.


‘글쓰기’는 과거엔 없다가 생긴 ‘유행’은 아니다. 엄연히 조선시대 선비들은 ‘글발’로 먹고 사는 것 아니었는가. 서신부터 서책까지 두루 그 세계에서 교류하기 위한 방법으로 글씨체까지 신경써가며 썼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쓴 다기 보다 ‘두들기는’ 행위를 지칭하게 되었으니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활동이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글’이라는 것은 '말‘과 달라서 잘만 보관하면 영구히 보관할 수 있고, 후세에 길이 남아 조상의 ’얼‘을 되새길 수 있는 역사로 활용되는 것이었다. 한편 써서 보관하기 전에 온전하게 다듬을 수 있고 지우거나 찢어서 폐기할 수 도 있으니 말보다 더 편안한 의사소통수단이 되는 것이겠다.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사는 것은 어렵다. 이 시대가 자랑하는 대작가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는 몇 명만이 글로 밥을 먹고, 대부분은 다른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자아발현’을 위한 고상한 활동으로서 ‘쓰기’를 택하게 된다.


한편, 글쓰기는 ‘배설’의 수단으로 훌륭한 역할을 한다. 내가 이야기 하지 못한 것, 가족이나 친구, 주변인이나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유명인에게도 말을 걸 수 있는 대화의 창이기도 하다. 물론, 꼭 응답이 있거나 하지는 않아도 쌓였던 울분을 토하듯 글을 쓰면 마음이 후련해 질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유명한 작가들의 일부는 그렇게 자신의 한(恨)을 내쏟는 글로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포털의 이야기 방에는 불우하거나, 불운한 자신의 처지를 주변에 내 쏟는 글에 대중의 반응이 좋은 것도 사실이다. 위로하고 싶고, 격려하고 싶은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자신보다 못한 상황에 있는 이들을 통해 위로받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


극도로 흥분해 있거나 울분이 가득할 때 밖으로 배출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배출하지 못하고 쌓게 된다면 그 답답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갈대밭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친 신하의 이야기를 생각해봐도, 속에 가진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으로서 필요한 일인지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쓸 수가 없다. 그냥 막 쓰자니 두서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내가 봐도 무슨 내용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기도 한다. 위로나 칭찬의 말을 듣고 싶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맞춤법과 접속사에 대한 지적들뿐이라면 그 상처가 얼마나 클 것인가.


일기를 쓴다.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누가 들으라고 또는 보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저자는 일기를 쓰지 말라고 단호히 이야기한다.


   
  ‘일기를 쓰는 것은 단순한 핑계 혹은 실제로는 일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것처럼 자기 스스로를 위한하는 방편 중 하나이다. 종이만 낭비하고 있으면서 뭔가 작가로서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일기를 쓰지도 않고, 작가도 아니다. 고로 책의 저자가 첫 번째로 이야기하는 행동의 변화를 피해가며 느긋하게 읽을 수 있다. 일기를 쓰는 대신에 편지를 쓰라고 한다. ‘생각을 하게 만들고 편집, 수정, 그리고 보완을 하게끔 유도하는‘ 편지가 일기에 쓰는 ’웅얼거림‘ 보다 훨씬 낫다고 한다.


그 외의 조언은 작가가 되고 싶거나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유용할지도 모르는 조언들이다. 동의어 사전을 버리고 작업 중의 작품을 입 밖으로 내지 말며, 스타벅스를 그냥 지나치라는( 가끔 스타벅스에 가면 노트북을 펴놓고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저자가 지양하는 스타일의 작가이거나 학생일 거다) 조언들이 있다.


영민한 출판사의 의도에 따라 딱딱한 원제(Robert's Rules of Writing)를 바꾼 제목은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의 저작에서 가져온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이는 글쓰기는 ‘노동’을 통해서 영감이 떠오른다는 ‘시간’과 ‘노력’을 이야기한다.


   
  ‘뮤즈를 기다리지 말자. 뮤즈는 워낙 고집센 친구라서 우리가 아무리 안달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날마다 아홉시부터 정오까지, 또는 일곱시부터 세시까지 반드시 작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뮤즈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중
 
   



열심히 계속 쓰면 ‘그 분’이 오신다? 흠 과연 한번 작가들에게 물어볼 일이다.


이밖에 책이나 글을 쓰기 위한 자세, 행동양식, 습관, 글감과 주제, 인물, 스토리텔링 기법, 위기극복 등 작가로서 저자가 경험한 총체의 경험을 나름 유머러스하면서 거부감을 최소화 하는 방법으로 설파하고 있다. 작가 지망생보다는 오히려 ‘현업작가’에게 도움이 될 만한 노하우들인데 작가가 아닌 일반인들은 작가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겠다.


   
 

‘피가 끓고 있다. 노여움이 머리끝까지 뻗친다. 글쓰기를 시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이다. 단 일초도 더 기다릴 수 없다! 불꽃처럼 핏줄을 타고 흐르는 불후의 단어들을, 끝없이 흐르는 생각들을, 그 열정이 단 한 줌이라도 빠져 나가기 전에- 하느님, 이것을 다 쏟아내면 기분이 좋지 않겠습니까!― 책상에 앉아 휘갈겨 쓰려는 참이다. 이것이 모든 창작 관련 책과 교수법이 항상 말하는 것인가: 열정을 쏟아내라고?


좋을 대로 하라- 당신이 조절할 모든 열정을 총동원하여 글을 써라-그러나 글 글이 훌륭한 글이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말자.


노여움이나 분개, 사랑이나 욕정, 슬픔이나 증오 같은 열정은 뜨겁게 활활 타오를 멋진 연료이지만 불꽃 조절이 쉽지 않다. 이런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때는 생각을 똑바로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쓰는 것도 힘들다. 그것은 날 것 그대로이며, 심사숙고 되지 않은 것을 종이 위에 쏟아 놓는 것과 같다. ‘

 
   




흥분과 긴장은 글을 쓰게 해주는 추진력을 준다. 하지만, 좋은 글은 글쓴이의 흥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는 이가 흥분하게 만드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글스기는 작가든 지망생이든 또는,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한번 쯤 들어둘만한 글쓰기에 대한 이해와 고민들을 압축해 놓았다. 물론, 뼈아픈 창작의 고통은 가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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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의 혁명 - 개정판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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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왜 필요한가.


우선 다양한 정보와 소식을 제공, 구체적인 판단이나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돕는 기능이 있다. 그리고 독자들이 사건의 전후 사정을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 일도 한다. 이는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는 기능이다. 또 의식주 생활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여러 가지 일들에 관해 필요한 정보와 자료들을 제공하는 일도 한다. 물론 가십도 흥미를 위해 필요하다.


그럼, 우리는 신문을 왜 읽는가.


“신문을 읽지 않으면서부터 실로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다. 사람들은 남이 하는 일들에만 관심을 갖고 자신의 중요한 의무는 아주 쉽게 잊는다.” 라고 말한 이도 있는데, 우리는 구지 왜 신문을 읽으려고 하는가. 요즈음은 온라인으로 보는 인터넷신문들도 많아서 뉴스를 주기적으로 보는 이들은 보통 하루 예닐곱 개의 신문매체를 접하는 것이 사실이다.


괴테가 한 말에 비해 데이빗 소로우가 한 말은 더 나아간다. "신문을 보지 않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에 눈을 돌려 그것을 통해서 신을 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다. 읽지 않으면 더 행복할 것에 왜 오늘도 눈을 들이대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우리는 매일 신문을 읽는다. 저자는 ‘제대로’ 읽기를 주문하면서 그렇지 않은 독자가 되느니 차라리 읽지 않는 것이 낫다고 까지 말한다. ‘성숙한 독자’되기 위해서 신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과정을 꿰뚫어보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까지 잘 알고 지면을 ‘입체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러기 위해 ‘신문 읽기’는 행간읽기나 기사읽기를 넘어선 ‘편집 보기’를 해야 한다. 좀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입체적으로 편집을 읽어낼 때만이 그 신문이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가 정말 올바른 것인지 곧이곧대로 내가 취해도 될 만한 것인지의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


   
  ‘흔히 언론계에서 편집부를 ’편집국의 심장‘에 비유한다. 사람 몸속의 모든 피가 심장에 모인 다음 다시 모든 기관에 보내지듯이, 모든 기사가 편집부로 모아져 편집된 다음 인쇄 과정에 들어가 모든 독자에게 보내지는 까닭이다.……중략……따라서 각 지면별 편집기자가 자기 지면에 무한책임을 지게 된다. 표제의 착오나 잘못은 물론이고 심지어 인쇄되어 나오기 까지 일어나는 모든 과정이 편집기자의 책임이다.……권한은 무엇일까. 기사의 취사선택권, 원고 첨삭권, 기사 배정권, 제목결정권, 조판권, 강판권, 개판권, 호외발행권이 그것이다.’
 
   



편집에 대한 중요성을 모른다면 신문을 모르는 것이나 다름 아니다. 편집부에서는 뉴스가치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잘 판단해야 하고, 이를 놓치는 것은 명백한 실패가 된다. 표제와 사진, 기사의 배치와 크기 결정도 다 가치와 비중의 판단을 통해서 지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를 각 신문별로 비교해보는 것이 ‘신문 공부‘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책에선 여러 사례를 들어 비교해 놓았으니 편안하게 보면서 읽기만 하면 된다. 동시에 오늘 신문을 비교해보는 것이 한발 더 나아가는 것이 되겠다.


구지 성향을 따지자면 조중동과 한경오로 나눈다. 이를 우(右)와 좌(左)로 나누기도 하는데 여기에 여러 인터넷 매체들을 포함하면 그래프로 위치 잡는 것도 볼만해 진다. 하지만 그렇게 놓았을 때 위치가 그 신문의 ‘좋고’, ‘나쁨’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저 성향이고 이도 다양성으로 인정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신문의 편집이 지향하는 이념과 사상이 대중 다수에 있지 않고 일부 기득권세력과 편협한 이념논쟁으로 사회적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드는 일부와 최상위의 부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이 책은 - 물론 읽지 않겠지만- 조․중․동을 애독하거나 요즘 득세하고 있는 뉴라이트 계열(?)의 독자들은 읽지 않는 것이 좋겠다. 5년이 넘은 개정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역시도 그들 입장에서 애독하는 신문의 과거가 심하게 편중된 논리의 증명들과 편집실패의 사례들이 가득하니 악의적인 모욕이 아니냐며 치를 떨 수 있음이 예상된다.


다소 기사의 배치와 표제어가 실재 사건을 작위적으로 해석함을 명백히 드러내는 사례는 우리가 일간신문을 대충 훑어보는 ‘습관’을 버려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1면에서 쓰인 기사 중 주요기사들은 다른 면으로 이어지는데 이때에도 1면의 기사내용을 배반하는 후면기사가 있을 수 있다는 증거가 보인다. 섬뜩하기까지 하다. 모르면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언론이 의도하는 대도 독자는 따라줄 뿐이다.


‘입체적 읽기‘란 어떤 기사가 한 면에 실렸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문전체와 심지어 전에 발행된 신문의 내용까지 유추하여 찾을 수 있는 슬기를 갖추어야 한다. 이에 다른 신문의 관련기사들을 비교하면 좀 더 정보의 핵심으로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아마, 높으신 분들이 십 여권의 신문들을 아침마다 스크랩하는 것도 다 이와 같은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 어떻게 보는 것이 입체적인건가. 신문의 성향을 알고, 신문 소유주가 어떤 기업인지, 종교단체인지, 혹은 개인인지 등을 아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사주의 성향과 신문의 편집은 거의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신문전체 면과 기사의 표제(제목)와 기사의 상관성, 1면과 이어지는 후면 기사의 연속성 등을 다 따질 수 있어야 한다.


언론을 정부권력이 완전히 통제했던 보도지침 이후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는 요즈음이다. KBS, YTN이후 MBC까지 권력의 손이 뻗고 있다. 자전거와 상품권, 심지어 현금을 동원해서 구독수를 늘려온 신문들. 돈벌이를 위해 소외받는 국민과 평화통일을 외면하고 가난과 질병은 그들을 포장하는 화장품정도로나 취급하는 언론권력의 태도는 독자가 아니고서는 심판할 방법이 없다.


언소주가 벌이고 있는 광고주불매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왜 그런 운동이 지금 필요하며 우리가 동참해야 하는지 스스로가 진정으로 깨닫지 못한다면 한낱 한때의 소동으로 밖에 남지 않는다. 왜 우리가 조중동을 비판하고, 그들이 뭘 그리 ‘잘못’을 해 왔는지를 알아야 할 것 아니겠는가.


혹자는 편협한 사고에서 비롯된 ‘운동’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스스로가 보이는 것 뒤에 있는 어두운 곳의 진실을 알려는 ‘수고’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에 대해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언론이 가져야 할 사명임을 안다면, 본인의 신문읽기도 좀 더 날카로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신문은 결코 독자를 능가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물이 원천 보다 높이 올라갈 수 없다는 비유도 잇따른다. 한 나라 한 시대의 언론 수준이 그 나라 그 시대의 독자 수준이자 국민 수준을 반영한 것이라는 이 말은 신문의 왜곡 편집을 독자들의 책임으로 돌리자는 데 뜻이 있지 않다. 오히려 독자인 국민들이 적극 나서서 신문을 올바르게 만들어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독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신문 편집자가 되어 신문을 읽을 때 비로소 신문편집이 바로 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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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 기다려지는 숲속 걷기여행 - 행복한 산소충전 여행 52 주말이 기다려지는 여행
이천용 지음 / 터치아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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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로망’은 무엇인가.


회사에서 승진하거나, 상사에게 인정받거나, 일하는 분야에서 최고의 지위에 오르거나 하는 것을 '로망'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사의 감시를 벗어나 모니터의 각도를 돌려놓고, 키보드의 단축키와 마우스의 위치조정을 통해서 은밀하게 진행하는 그 무엇이 가까울지 모른다.


자아실현을 위해서 직장에서 일하는 것 보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서 책상위에 앉거나, 혹은 강변으로 인라인이나 자전거를 타러 나가거나, 아니면 혹은 몸을 키우기 위해 헬스장으로 나갈 때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 사람들이다.


당신, 주말에 뭐해.


누가 갑자기 이렇게 묻는다면 당신은 무엇을 답할 것인가.


출판사가 내놓은 '주말이 기다려지는'시리즈는 그에 부합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획상품이다. 내가 읽은 것은 숲속 걷기여행이었고 이것은 적절히 내 기대에 부합하는 상품이었다.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내가 숲에서 살고, 숲에서 근무하기 때문 일수도 있다. 저자의 숲을 소개하는 태도가 딱 나의 것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즘 산으로, 들로, 바다로, 강으로 텐트와 화로를 기본으로 하는 캠핑족이 늘고 있다. 외국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장면들이 국내에서도 곳곳에서 연출되고 있다. 돌모아서 장작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삼발이에 매달려 있는 화로에 까맣게 정제된(?) 숯을 태우고 그위에 작은 포트를 얹어서 김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편안하고 안정되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야외용 접이의자도 그 ‘배경’엔 필수. 해먹하나 주면 나무에다 매달아 놓으면 잡지사에서 나와 사진 찍겠다고 할런지도 모른다. 왜 이리 캠핑족이 느는 걸까. 경제여파 때문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오히려 수 백 만원을 호가하는 고급 장비들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꼭 돈 때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자연과 가까이'


텐트 안에서 자본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 '내츄럴'한 느낌. 흙바닥에 작은 돌조차도 등에 와서 박힐 땐 몸을 비비 꼬아야 하고 정 힘들면 텐트를 들어서 돌부리를 캐내어야 편히 잠을 들 수 있다. 밤에 들리는 익숙하지 않은 소리들은 어떠한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물소리에 혹시 텐트가 물에 떠있지는 않는 건가 확인하는 사람도 있고, 바람소리, 새소리, 짐승들의 소리에 놀라기도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숲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자연의 총체이다. 국토의 67%같은 통계는 치우더라도 우리가 사는 곳 어디에나 산은 보이고, 그 산은 숲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우리에게 청량함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전국 곳곳에 위치한 숲. 저자의 공무원생활을 통해서 전국에 다녀본 잘 가꾸어지거나 훌륭하게 자란 나무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을 안내한다. 전국 방방곡곡의 52곳의 숲을 다 다니려면 일 년을 꼬박 주말마다 다녀야 한다. 그러기 힘들면 몇 년 걸릴 테니 책을 끼고 드라이브 하는 일도 즐거울 일이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 막히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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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 기념시선집 창비시선 300
박형준 외 엮음 / 창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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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좋았다. 어린 시절, 내가 흥미로워 하는 것들을 너무 아름답게 표현한 시의 어구를 노래하곤 했다. 시와 노래는 나를 어찌 표현할 줄 모르던 때에 부르던 노래였다. 학교를 다니고 시가 ‘분석’ 되면서 시랑 멀어졌다. 시인의 마음이 그렇게 편협하게 해석 되는 데에 대한 반감이었을까. 나는 꾸준히 4개의 보기 중에 하나만을 고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시집을 왜 읽을까. 시는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고모가 나에게 시집을 생일선물로 주었을 때 나는 고맙다고 가만히 받아다가 책장 구석에 깊숙이 묻어 두었다. 이후로 이사하면서 한번 만져 보았을 뿐 켜켜이 쌓인 먼지는 책장을 정리하는 대청소날이나 들려 치워지곤 했다.


이름도 모르던 새들의 지저귐이 어느덧 노랑머리할미새, 뻐꾸기, 쏙독새, 곤줄박이, 물까지 하며 멀리 보이는 그네들의 노랑, 파랑 색과 실루엣으로 제법 구분하여 부르게 되고, 마트에서 포장지에 써있는줄만 알았던 나물들의 푸르고 싱싱한 본모습을 보며 그들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그때 쯤, 시가 읽고 싶어졌다. 그들의 마음이 어떤 건지 와 닿는 듯 한 느낌이었고, 나도 내 감정과 주변의 작은 일렁임을 언어로 그리고 싶어졌다. 그렇게 시를 읽고, 써 보았다.


책을 구입한 것, 나의 호기심이자 작은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많은 시들이 가득한 작고 가벼운 시집은 우리 대중과는 멀어져 있는 그들의 세계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나에게 있는 ‘마음’과 ‘일’을 그린다.


답답하고 어둡기만 한 오늘의 이 땅을 보며 읽는 시는 쾌감을 불러온다.



적막/ 박남준


눈 덮인 숲에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겨울을 건너는 몸이 자주 주저앉는다

대체로 눈에 샇인 겨울 속에서는

땅을 치고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

어쩌자고 나는 쪽문의 창을 다시 내달았을까

오늘도 안으로 밖으로 잠긴 마음이 작은 창에 머문다

딱새 한 마리가 긴 무료를 뚫고 기웃거렸으며

한쪽 발목이 잘린 고양이가 눈을 마주치며 뒤돌아갔다

한쪽으로만 발자국을 찍으며 나 또한 어느 눈길 속을 떠돈다

흰 빛에 갇힌 것들

언제나 길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 이어져 왔으나

들끓는 길 밖에 몸을 부린 지 오래

쪽문의 창에 비틀거리듯 해가 지고 있다


내가 기인하는 모체, 부모님. ‘피붙이’라 불리는 형제자매. 옆집 이웃보다 더 멀기도 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그리움의 원인이기도 한 가족.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나과 내 가족의 관계만큼이나 설명하기 힘든 것이 또 있을까.



서창, 해장국집/ 전성호


비 오다 그친 날, 슬레이트 집을 지나다가

얼굴에 검버섯 핀 아버지의 냄새를 맡는다


양철 바께쓰에 조개탄을 담아 양손에 쥐고 오르던 길

잘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언 손으로 얼굴 감싸쥐어도

겨울 새벽은 쉬 밝아오지 않고,

막 피워낸 난로 속 불꽃은 왜 그리 눈을 맵게 하던지

닫힌 문 작은 구멍마다 차가운 열쇠를 들이밀면

낡은 내복 속 등줄기 따라 식은 땀 뜨겁게 흘러내렸다


한달치 봉급을 들고 아들이 돌아오면

아버지는 마른 정강이를 이끌고 해장국집으로 갔다

푹 들어간 눈 속으로 탕 한 그릇씩 퍼담던 오후

길 끝 당산나무에 하늘 높이 가슴치는 매미 울음소리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껴안을수록 멀어지는 세상


우산도 없이 젖은 머리칼을 털며

서창 해장국집 문을 열고 들어서면

습기 찬 구름 한덩이 닫힌 창 밖으로 빠르게 흘러가고

검버섯 핀 손등 위로 까맣게 아버지 홀로 걸어가신다


살다 허기지면 찾아가는 그 집

금빛 바늘처럼 날렵한 울음 사이로

까마귀 한 마리 잎을 흔들며 날아간다


‘사람과 대화를 꿈꾸는 독자’를 위한 시집이라는 엮은 이의 말이 없더라도 시를 읽으면 ‘사람’을 느끼게 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은 농촌이 나이들고 소외받고 있고, 도시에 쌓이는 빈부의 격차가 날로 커져 계급화 되고 있으며, 가진자들이 더 가지기 위해 ‘물’을 파헤치고 ‘공구리’를 처 바르고 있다. 노동자는 ‘인권’이 아니라 ‘부품’으로 취급받기 일쑤고, 그들의 이야기를 해볼라치면 그들과 동지가 되어야 할 우리는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거나 심지어 욕을 한다.


‘고독’을 통해서 마음의 ‘고향’을 그리는 시를 통해서 마음을 위로받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자 한다는 것이 엮은이의 소박한 기대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가 아닌 네가 울때 나도 울고 네가 웃을때 나도 웃을 수 있는 ’연결‘을 꿈꾸는 시집이다. 2000년도부터 발간된 창비시선 201부터 299까지의 관련 시들을 모아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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