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 - 행복을 일구는 사람들 이야기 박원순의 희망 찾기 1
박원순 지음 / 검둥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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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변호사. 약자와 소외받고 있는 사람을 위해 발로 뛰고 목소리를 높이는 인권변호사에서 변신했다. 이제 그는 변호사로 불리기보다 ‘소셜 디자이너’로 불리길 원한다. 참여연대, 아름다운재단, 희망제작소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 사회가 가진 가능성을 키우는 일에 열중해 왔다. 박원순의 희망 찾기 1탄. 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는 그가 최근 3년간 찾아다닌 ‘희망’의 증거이다.


그는 전국을 다니면서 ‘지역’과 ‘농촌’이야 말로 21세기 한국이 가진 블루오션임을 깨달았다 한다. 스러져 가는 농촌에 무슨 희망이 있단 말인가. 혹 그가 너무 ‘낭만적’이라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귀농 5년째에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았던 나로서는 의혹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발견했단다. 2006년 4월 희망제작소의 창립과 함께 다닌 전국 구석구석에서 ‘답’을 얻었다고 한다.


   
  모두가 떠나간 농촌의 폐교에서 그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기 위해 ‘위장 전입’을 할 정도로 교육 부흥을 이룩한 교사들, 거듭된 농정의 실패로 빚더미에 올라선 농민 가운데서도 창의적 발상과 남다른 노력으로 농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농민들, 개인의 고난과 마을의 갈등을 극복하고 화합으로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이끈 이장들, 활동가들, 지역주민과 지역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일부 지방 자치 단체의 장과 지역 관리들이 바로 그런 희망의 제작자들이었다.-서문 중
 
   

 


과연 그러한가. 진안군 마을 간사를 하면서 마을 사업 운영 사례에 대한 모범사례들을 보기위해 숱한 견학을 다녀 봤지만 그곳에서 내가 봤던 것은 한없는 불투명성이었다.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는 싸움. 혼자 온 짐을 떠안고 파탄나는 가정과 이웃과의 관계. 아무리 들여다 봐도 곧 펼쳐질 환한 신세계나 유토피아 속에 활짝 핀 꽃동산은 떠오르지 않았다. 같이 다닌 동료들의 반응도 좋지 못했다. 실상 마을에서 ‘마을만들기’의 주체가 되면서 겪는 시련과 갈등의 해결이 너무나 높고 두꺼운 벽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내‘절망’의 실마리는 마을에 있었다. 마을의 구성원인 농민들, 그들의 평생 직업인 농업에 대한 태도였다. 그들은 ‘농약’의 해로움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농약을 사용하였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항변이었다. 그럼 돈을 지불하고 그들의 약을 사서 먹는 소비자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더욱 어두운 것은 젊은 농민들의 경영이었다. 대부분 수천 만원은 기본이고 몇 억씩 되는 가계부채를 떠안고 매년 그 빛을 탕감하는 데에 그들의 젊음을 다 보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생태와 먹을거리에 대한 고민을 할 겨를은 없는 것이다.


그들에겐 그나마 땅을 늘리고 기계화하는 것이 그 해답이었다. 그래야 자식들 공부시킬 만큼의 수입이 유지되는 것이 농사다. 하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었다. 좁은 땅과 경사지를 개간해서 땅을 넓히고 기껏 트랙터를 이용해 경작한들 그들의 ‘땅’과 ‘기계화’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수입개방화로 우리 농업은 결국 경쟁불가로 판명될 것은 뻔 한 일이다.


비판적인 마음으로 글을 읽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한다. 과연 ‘희망’이라 할 것도 있고 이걸 희망이라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농촌마을의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더러 ‘회사’도 있고, 도시의 마을도 있다. 그들 모두는 모두 주변의 편견과 무시를 딛고 일어서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고 얼마간의 성과를 통해서 주변에 알려진 곳이었다.


그들 중에 내 마음을 울린 -저자가 먼저 감동했을- 몇 이야기가 내 ‘가슴’에 남는다.


   
  결국 소농을 없애고 규모화 하느냐, 아니면 잔뿌리들을 키워 강화시킬 것이냐가 문제다. 규모화는 미국이 키워놓은 시장에 똑같은 방법으로, 미국이 바라는 방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김의열 총무는 미국이 아니라 독일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경상도 고추장과 전라도 고추장 맛이 다른 걸 보면 소시지 강국 독일처럼 고추장 강국은 만들 수 있지 않겠냐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농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제도적, 행정적으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덧붙인다._충북 괴산 솔뫼농장  
   

 


이게 답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쿠오카 마사노부와 같이 이웃 일본에서 수십 년에 걸쳐 실행해온 선지자들이 있고, 미국과 같은 농업선진국의 곁에서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쿠바의 도시농업이 그 증거다. 이것을 주변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실천하는 이 땅의 농장이 있다. 바로 그 곳에서 멀고 험하지만 우리의 ‘희망’이 싹트고 있다.


   
  사실 유기농이면서도 맛도 좋고 크기도 크고 때깔도 나야한다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추다 보니 에너지가 투입되고 가격도 올라가게 되었다. 원래 유기농은 에너지가 투입하지 않고 생산해야 한다. 그래서 생산 농가도 중요하지만 유기농을 받아들이는 소비자도 중요하다. 둘 사이에 협력이 이루어지면 다국적기업이 주로 생산하는 종자들 대신 토종 종자를 써도 될 것이다._충북 괴산 ‘흙살림  
   

 


농업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어려움 속에서 유기농자재를 생산하고 우리 땅에서 이루어지는 지속가능한 농업을 이야기하는 흙살림도 어려움 속에서 묵묵히 올바름의 가치를 실천하는 농부들 곁을 지킨다. 수입자재밖에 없던 효소를 최초로 만든 것도 그곳의 대표였다.


   
  두부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전통 방식으로 맛있는 두부를 만들어 냈다. ‘무엇을 할지’를 해결하고 나니 판로가 걱정이었다. 조촐하게나마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처음에는 여성농민회 회원들끼리 스스로 두부를 만들어 먹는 걸로 만족할까 했는데, 원주 한 살림에서 구매해주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왓다. 이에 자극을 받아 내친김에 좀 더 규모 있게 해보자고 의기투합해 ‘영농조합법인 텃밭’을 만들어버렸다._강원 횡성 ‘텃밭’  
   

 


농민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자급자족이 이미 불가능한 오늘날의 삶 속에서 채소, 곡물을 생산해서 ‘삶’을 유지하기가 힘들 때 그 가치를 높이는 방법이 가공이다. 가공품을 혼자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고 지역 공동체의 힘이 필요하다. 손과 발을 잘 맞추어 생산한 농산물을 가공해서 소비자들에 직접 전하는 방법이 가장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여러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생산한 농산물을 가공할 수 있는 시설이야 기본이지만 운영주체와 주민 스스로 각자의 역할을 맡아 주는 체계가 선행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조성, 올해로 16년째 마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마을장학회가 있다. 1991년 7월 뜻있는 주민 10여명이 2천 390만 원의 기금을 모아 출범한 이 장학회는, 설립 다음 해인 1992년부터 지난해까지 기금의 이자를 이용해 성적이 우수한 73명의 마을 학생들에게 4천 165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_충북 청주 금천동 마을 장학회  
   

 


이런 일이 있다고 읽는 우리는 매우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와 대단하다' 그리고 그게 끝이다. 지금 나와 우리가 그런 흐뭇한 일을 할 수는 없는 걸까. 뜻이 모이면 ‘일’이 난다. 내가 즐겁고 너도 즐겁고 그래서 ‘우리’가 흥이 나는 곳. 신명나게 한 판 벌일 수 있는 곳. 바로 ‘마을’이다. 작년 봄에 마을 중앙에서 피어올랐던 불길, 달집태우기가 내가 경험했던 그것이었다.


마을에서 희망을 만나다/박원순/검둥소/12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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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나눔 그리고 새로운 마을 희망제작소 뿌리총서 5
가와나 가즈미 외 지음 / 아르케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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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가는 농촌을 살리고자 지자체와 중앙 정부가 애를 쓰고는 있지만, 과거 새마을 운동이 결국 농민들을 더 피폐하게 만들고 아름답던 돌담을 허물고, 회색 시멘트 블록에 페인트칠로 마을 경관에 커다란 상흔을 남긴 것과 마찬가지로 정부 주도의 사업들을 결국 실패할 가능성이 짙다. 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주민이 자발적으로 사업을 계획하고 그들이 기획과 실천해서 지역 공동체를 살린다는 움직임이 있다. 

 

바로 단어의 개념만 일본에서 가져온 ‘마을 만들기’다. 정부 사업이나 지자체의 ‘살기 좋은 마을’을 이루려는 노력들은 모두 이름을 달리하고 있지만 그 큰 의미로서 지역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운동으로서 그들이 지향하는 바는 하나다. 더 이상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고 공동화되는 지역의 공동체 단위인 ‘마을’을 중심으로 일어서 보자는 것. 마을 구성원 하나하나가 모여서 조직을 이루고 이 조직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서 굴러갈 때 앞으로의 지역에도 희망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힘의 근원인 것이다.


‘창발 마을만들기’는 일본 지역과학 연구소의 소장인 와다 다카시가 히로시마 지방에서 각기 다른 주체에 의해 싹을 터서 훌륭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각기 다른 사업들의 진행상황과 어려움, 극복한 노하우등을 기술한 글들을 모아서 엮은 책이다.

   
 


창발 마을 만들기에서 창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능력을 지닌 사람이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과 아이디어를 창(創)조하는 동시에 구체적인 활동을 유발(發)하는 마을 만들기를 뜻하는 새로운 말이다.

 
   



히로시마의 인재들이 썼다. 사상 최초의 원자폭탄의 투하로 시 전체가 초토화되었고 20만여 명의 희생자를 내었으나, 전후에 국제평화 문화도시로 발전하여 주고쿠(中国) 지방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해안 쪽에는 마쓰다, 미쓰비시중공업 등 많은 중공업 외에 경공업도 발달했다. 또, 시내에는 원폭 돔을 중심으로 원폭위령비 ·원자폭탄자료관, 평화기념자료관 등이 있는 평화기념공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과거의 상흔을 씻고 미래를 지향한다는 쪽에서 바라보면 유의미한 곳이다. 저자는 과거 ‘마을만들기’의 이론과 실제는 도쿄와 오사카 등에서 활약하는 전문가들이 집필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 책이 담은 젊은이들의 새로운 도전을 소개하는 의미를 높이 사고 있다.


내용은 각기 일곱 명의 필자가 쓴 글을 모았다. 마을 만들기의 젊은이들을 육성하는 일, 의식 수준이 높은 소호 사업자에게 시스템과 사무실을 제공하는 일, 주민 주도의 활동을 지원하기, 마을 만들기의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방향성을 제시하기, 지자체의 경계를 넘어서 ‘사람’들을 연결하고 ‘마을’들을 이어가기, 언론을 통해 마을만들기 활동을 지원하는 일, 마을 만들기를 위해 행정이 가져야 할 자세 등을 각 운동의 주체가 되는 이들이 썼다.


각 사례의 필자들은 모두 마을만들기 현장에 있으며 상호 작용의 추진자로서 활동한다.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해하고 있는 시설과 건물을 짓는 일 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시스템과 이를 통해 활동의 힘을 키우는 프로그램의 개발 등을 이야기 하는데 중점을 둔다. 그러나 각 입장과 보는 시각을 틀리다. 

 

국내에도 신종 직업이 되어 많이 생기고 있는 마을만들기 컨설턴트와 학교와 마을이 연개 해 활동하는 곳에서 대학 조교수, 소호 사업자들을 연대하고 이를 통해서 하나의 사회사업을 이루어 낸 여성 경영자, 취재와 기사를 통해 마을만들기에 힘을 불어넣는 신문 기자, NPO(Non-Profit Organization)에 참여하며 스스로 마을만들기를 조직한 지자체 공무원이 바로 이 책의 저자들이다.


지역의 힘이 되고 지역을 위해 헌신하는 인력이야 말로 공동화되고 허물어져 가는 지역사회의 밑거름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어떻게든 사람과 돈을 끌어들이려고 노력하는 지자체 단체장들의 행보도 마찬가지 각 지역의 주민들의 민의와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 상호 작용을 통해 창조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상호 작용의 '장이' 필요하다. 장이 마련됨으로써 개개인은 잠재된 가치관과 능력을 표출하고 다른 사람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창조적 활동을 끌어낼 수 있게 된다. 단 그저 막연히 주어지기보다 무언가 의도와 아이디어가 보태졌을 때 좀 더 쉽게 창조적인 활동을 끌어낼 수 있고 내용도 더욱 풍부해진다  
   

 


애쓰는 사람들을 위해 힘을 돋아주고 밀어 줄 수 있는 제도와 지원이 필요하다.

바다를 메우고 큰 산을 깍고 물을 막아서 운용하는 새로운 도시와 그곳에 기생하는 위락시설의 건설이 지역 원주민들의 삶과 희망에 직접적으로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한 자본의 운용으로 지방 토호들과 기득권세력의 주머니만 불어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토목’으로 다져온 국토위에 새겨진 수십 년의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다.


토목, 건축 등의 ‘하드웨어’에 반대에 서는 ‘소프트웨어’는 돈으로만 되지 않는다. 그런 열정을 키우는 지방의 인재를 위해 투자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과거 전래되던 영농사업에 무차별 선착순 투자로 빛에 쓰러지는 젊은 농부들을 양산하지 말고, 기왕 벌어진 귀농운동에 발맞추어 그들이 서로 교류하고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소통의 창 역할을 지금의 정부가 해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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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더 마인호프 - The Baader Meinhof Complex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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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헐리우드 영화들 덕택에 어느 나라나 자국어 외에 영어까지는 스크린을 통한 대화 음성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반면 그 외 제 3국의 언어는 비록 많이 쓰이고 많은 사람이 쓰고 있다고 해도 익숙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중국영화도 대사음 때문에 못보겠다는 사람도 봤다.

 



블록버스터라 해서 극장에 갔는데 귀에 몹시도 거슬리고 낯선 언어가 나온다면 어떻겠는가. 아마 비위가 약한 이들은 극장을 뛰쳐나올는지도 모른다. 그럼, <노킹 온 어 해븐스 도어>라는 독일영화를 무난히 잘 소화하신 분, 그리고 감명을 받으신 분들에게 추천할 만한 영화를 소개한다. 만약, 독일어 대사가 귀 간지럽고 집중이 안 되어 몸이 꼬이는 분들은 적당히 예고편으로 만족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다.


독일 적군파의 발생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바더 마인호프‘는 <해운대>같은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해리 포터>와 싸움 속에서 살아남기 힘든 영화다. 서두에 이야기 했던 대사의 언어문제도 그렇고, 기껏 홍보타이틀로 내세우는 감독의 20년 된 영화,<부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조차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일뿐더러 유명배우들이라고 하지만 죄다 접해보지 못했던 독일배우들로 가득한 탓이다.


한 걸음 양보해서, 유럽과 남미, 중동 등의 영화를 두루 편식 없이 섭렵한 이들이라도 영화가 이야기하는 지금은 설득력을 거의 얻지 못하는 ‘적군파’에 관한 이야기라니, 그냥 누가 현란하게 써 놓은 리뷰만으로 적당히 머릿속에나 구겨 넣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볼만 하다. 장장 15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견디게(?) 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바로 우리가 처한 상황 때문이다. 혹 우리가 ‘적군파’라도 결성해서 국가권력에 대항하자라는 이야기 아니냐는 분도 있겠지만 나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속’은 천천히 들여다보고 ‘껍질’만 보자면, 무려 이천만 유로의 제작비(독일영화 사상 최고)가 들었고 52여명의 대사 출연진(오히려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과 쉴 새 없이 터지는 각종 액션 장면들이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국적인, 마치 이 세상이 아닌듯한 도입부의 장면은 눈을 스크린으로 집중하게 만든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이들을 뒤로, 남녀노소 할 것 없는 나신(裸身)들이 아주 자유분방하게 해변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다. ‘그래 바캉스란 바로 저런 것이라고’라고 외칠 이도 있겠지만, 영화의 주제로 볼 때 이는 당시의 그네들이 얼마나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 속에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의 일부다. 취조와 재판중의 담배나 이슬람국가에서 옷벗은 일광욕 등 그들은 거침없고 자유분방하며 누구에게나 당당했다.


누드비치에서 처음 등장하는 주인공인 ‘울리케 마인호프’는 당시의 독일에서 잘 나가는 글쟁이였다. 진보적인 시각에서 기사를 써서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고 있었는데 그녀가 느닷없이 ‘테러리즘’에 몸을 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RAF (Rote Armee Fraktion) 독일 적군파의 시작은 지식인과 행동파인 ‘안드레아즈 바더’와 그녀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이 바로 적군파의 1세대다.


바더 마인호프 그룹의 흥망성쇠를 담담하고 냉정하게 보여주는 카메라는 ‘나는 적군파 지지자도 아니고 비판도 하지 않아’는 감독의 말을 전하는 듯하다. 오히려, 훈련받으러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조직으로 간 그네들의 망나니 같은 행동(그곳의 동지들을 무시하는 일광욕이나 전술적 유격 훈련거부, 사격훈련 태도)에 이르면 보는 이들은 과연 저것들이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놈들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반면 ‘호르스트 헤롤드’(당시 독일 연방 경찰국장)의 신중한 이해심이 영화 전반부에서 빛을 발하는 것은 그들과 달리 폭력과 억압만을 강조하지 않고 이해를 통해서 부드럽게 상황을 진정시키려는 마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라는 대사는 지금 우리의 가슴에 와 닫는다. 이해가 필요한 ‘고위층’들이 눈여겨봐야 할 인물이다.


1967년에서 1977년까지의 바더 마인호프 그룹과 연관한 무수히 많은 살육과 폭력이 영화속에서 줄을 선다. 67년 이란 팔레비 국왕의 방문을 항의하는 시위대를 경찰이 과잉 진압하는 과정에서 한 학생을 경찰이 총으로 쏘는 사건으로 시작해 적군파를 다루는 영화의 곁가지이긴 하지만 이를 계기로 독일의 68혁명이 발발하게 된다. 백화점 폭파로 주목 받게 된 이들은 독일 우익신문인 Bild 지 공장의 배달차량에 방화하고, 이어지는 정부 고위 인사들의 암살과 자신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신문사에 대한 폭탄테러, 은행 강도, 동지 석방을 위한 비행기 납치와 장관 납치, 해외 독일 대사관 점거 및 인질극 등이 차례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보는 것은 폭력으로 얼룩진 그들의 과거 뿐이다. 우리도 있었고 어느 나라에나 있었던 일이다. 이를 보고 누가 옳고 그르기를 따지기를 떠나 수없이 희생되는 생명을 보면서 과연 폭력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 분명 경찰국가 속에서 인권이 희생되고 우로 우로 향하는 국가 기관의 보수적 행태를 국민으로서 견디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이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의 결과가 무엇인지 신랄하게 보여준다.


영화 전반을 통해 가장 충격적인 것은 우습게도 ‘감옥’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의 차이다. 현재와 과거, 무려 40년의 격차 속에서도, 과거의 독일과 지금 대한민국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 영화를 보며 내가 대한민국 사람임을 슬프게 한다.


대중적으로 큰 인기가 없고 극악한 테러리스트로서 갇힌 그들의 감방 안에는 버젓이 책장과 책상, 타자기, 라디오, 티브이가 존재하고 있다. 담배도 자유스럽고 그들끼리 모여서 토론하고 이야기할 기회도 충분히 주어진다.


죄 없는 외국 관광객을 폭행하고 미란다원칙의 낭독도 없이 무자비한 연행을 자행하는 지금의 우리 경찰권과, 전 대통령을 압박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고 개인의 사적 편지를 임의로 편집해서 공개해버리는 사법권 앞에서 내 몸이 한 없이 작아지게 만들었다.


검색을 통해 이미 이 영화를 보았던 블로거들의 대부분이 국내 개봉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점친 이유도 위와 같은 영화내의 묘사 때문이었다. 물론 폭력적인 정부대항의 방식이 더 큰 이유겠지만 말이다. 사십 년 전 당시 독일 중죄수보다 못한 작금의 대한민국 국민인권의 비교. 마음이 아플 뿐이다.


그런데, 국민 대다수가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법안통과가 날치기로 이루어지는 오늘의 국회에 대한 연대저항의 방법은 무엇일까. 하긴 촛불만큼 대단한 효과를 본 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요즘 경찰이 광장을 봉쇄하고 사람들이 조금만 모이는 것에도 벌벌 떠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영화 초반 빌트지 운반차량 방화사건을 기술하는 ‘마인호프’의 기사엔 다음과 같은 어구가 있다.

   
  ‘하나의 돌을 던지는 것은 범죄지만 천개의 돌을 던지는 것은 정치적 행위이다. 차 한 대를 불태우면 범죄이지만 천대의 차를 불태우는 것은 정치적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폭력에 대한 당위성일 것이다.


물과 가스 없이 최루액을 뿌리는 헬기 아래서 기껏 볼트와 너트를 무기로 한 새총으로 무장한 쌍용자동차의 직원들이 특히 대부분 백수인 젊은이들의 대중적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것 같아서 슬퍼진다. 마취총을 발사하고 최루탄을 쏘고, 물대포를 쏴도 그냥 맞고만 있어야 하나. 방어를 위한 소극적 공격에도 연일 무뢰배나 폭도로 포장되는 덩치 큰 신문들이 뉴스방송까지 진출하는 것은 또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가.


그나저나 극장을 찾기도 쉽지 않다. 전국에서 서울의 두 군데 개봉관이다. 대기업이 장악한 극장가의 문제를 들추자면 또 한 꼭지를 쓰고도 남겠지만, 명색이 블록버스터인데 서울의 일부 예술영화 상영관에서나 관람이 가능하니 말이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인가. 개봉관이 앞으로 확대될 일도 없겠지. 또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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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푸드네이션
브루스 윌리스 외, 리차드 링클레이터 / 대경DVD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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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의 도살장 풍경

"햄버거를 먹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고기를 주워 먹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 “


미국의 한 음식비평가가 한 말이다. 이 말은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그 위험성은 널리 알려져 있고 선택의 귀로에 있는 당신은 선택한다.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어른은 이제 햄버거의 지나친 풍미에 입맛이 맞지 않아서 정갈한 된장찌개와 채소류를 곁들인 밥상을 원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아니다.


방과 후 학원으로 향하는 길, 저녁 한 끼를 때우기 위해 빌딩들 사이에 커다란 사인을 밝히고 환하게 주변을 비추는 패스트 푸드점. 즐겁게 이야기 나누는 아이들, 혹은 책을 끼고 혼자 앉아서 한손에 들고 있는 것은 ‘먹기 좋고 맛도 좋은‘ 햄버거다. 무엇보다도 햄버거는 싸기도 하지만, 그 기름진 풍부한 향과 입안에서 부드럽게 씹히는 풍요를 한번이라도 경험한 아이들이라면 결코 거부하기 쉽지 않은 음식이다.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혹에 이기지 못하는 이면에는 업체의 홍보와 대중의 눈가림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개되지 않은 정보에 있다. 우리에게 그 숨겨진 이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산업전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보여준 영화 ‘패스트푸드 네이션’을 소개한다.


가장 강력하면서도 조직적인, 그래서 세계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패스트푸드 업체의 대표주자는 미국의 맥도널드다. 왜 얼마 전까지 ‘빅 맥 지수’로 각 나라의 물가를 비교하지 않았던가. 우린 햄버거가 물가지수의 지표로 활용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영화는 ‘햄버거’를 중심에 둔다.


빵을 살짝 굽고, 상추를 깔고, 그 위에 토마토나 양파를 얹고 마요네즈를 뿌린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잘 구워진 ‘패티’를 얹는 것과 빵의 한쪽을 덮는 것으로 햄버거 요리 과정은 완성이 된다. 쉽고도 빠른 처리를 거쳐 식탁에 오르는 햄버거는 간편하면서도 고단백의 영양식품이다. 그런데 왜 나쁘지?

문제는 빵이나 채소류가 아닌 그 고깃덩어리, ‘패티’에 있었다.


가상의 브랜드 ‘미키’ 버거의 새로운 히트 상품 ‘더 빅 원’에 이물질로 일부 지역에서 식중독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은 사장이 이에 대한 원인파악을 위해 마케팅 담당 이사 돈 앤더슨(그렉 키니어 분).에게 출장을 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사실 원인은 밝혀져 있었다. 같은 회사 직원에게 조차 이야기하기 불편한 ‘소똥’이 패티에 지나치게 함유되어 있었던 것. 도대체 소똥이 어떻게 소고기를 갈아 만든 파티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이를 찾기 위해 돈은 패티 제조사인 공장이 위치한 콜로라도로 떠난다.


수많은 소떼들이 갇혀 있는 거대한 농장(직사각형의 정렬된 울타리와 그 안에 들어찬 엄청난 소들의 양에 놀란다), 그 근처에는 ‘더 빅 원’의 냉동 패티가 생산되는 대규모 공장과 도살장이 있다. 그 곳의 주요 산업은 그 공장과 목장이며 공장을 돌리는 것은 대규모의 멕시코 불법이민자들이다. 꿈을 위해서 사막을 밤새 걷고 미국인들의 횡포에도 꼼짝할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오직 돈을 벌어 행복해질 꿈을 안고 수모와 두려움을 버텨낸다. 도살장과 가공공장으로 이어지는 생산라인은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한 사람당 60마리의 소를 죽여야 하는 도살장은 물론이거니와 빠른 컨베이어벨트 위로 지나가는 소의 내장 해체과정에서 소의 똥이 고기와 섞이게 된다.


돈이 공장관계자와 공장견학을 통해서 본 것은 최첨단의 시설과 하얀 작업복으로 온몸을 감싼 청결한 시스템뿐이지만, 이면에 숨은 저급 노동자들을 부리며 빠른 생산을 종용하는 회사의 시스템은 결국 이윤을 위해서 소비자에게 위험한 음식을 제공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정면의 비판이기도 하다.


그 시스템은 너무도 굳건하고 단단해서 도무지 해체할 틈을 찾기 힘들다. 공정을 개선하고 싶지만 ‘시스템’과 마찰해 잘릴 것을 걱정하는 회사의 중역 돈은 사장에게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눈감게 하며, 멕시코에서 몸 하나로 온 직원들의 팔과 다리가 연일 잘려 나가는 데도 회사는 불리한 그들의 신분조건과 위험하고 힘든 일과에서 위로를 위해 쓰는 마약을 근거로 일절 보상도 하지 않는다. 다량의 소 사육시스템과 이와 직결된 햄버거 패티 생산 공장의 비도덕성과 몰 인간화를 겨냥한 또 다른 주인공, 앰버와 대학생들의 위험을 무릅쓴 ‘울타리 끊기’도 이미 길들여진 소들의 무력함으로 인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영화는 햄버거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듯한 주인공이 외치는 당위의 대사 한마디 없는 영화지만 햄버거 산업의 조직과 관계의 부당성을 담담하게 구석구석 비추는 것으로 보는 이들에게 생각의 기회을 준다. 당장 햄버거를 먹는 이는 입맛을 잃게 될 것이고, 먹은 이들은 속이 쓰릴 것이며, 애초에 별 이유없이 패스트 푸드를 좋아하지 않는 이는 커다란 당위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역시 우리에겐 광우병과 맞물린 미국소고기에 대한 의심의 확대에도 크게 기여할 영화이기도 하다.


‘슈퍼 사이즈 미’는 모건 스펄록 감독 자신이 맥도날드 음식만으로 생활하는 생체실험을 낱낱이 기록해 맥도날드의 해로움을 밝혔다면 ‘패스트푸드 네이션’은 햄버거 산업이 가진 문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가진 극복하기 힘든 어려움의 속옷을 비추어 준다.

아마 글머리의 이미지때문에 보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런 비위로는 이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이 좋다.^^




   
 

동명의 책(국내엔 ‘패스트푸드의 제국’이란 제목이다)이 영화의 원작이며 저자인 에릭 슐로서가 제작에도 참여했다.

감독 : 리차드 링클레이터

제작국 : 미국

제작사 : BBC 필름스


부르스 윌리스, 패트리샤 아퀘드, 에단 호크, 루이스 구즈먼, 에이브릴 라빈 등의 화려한 출연진 또한 이 영화의 볼거리이다. 그들은 영화 구석구석에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며 영화의 풍미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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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리포치도로씨 2009-07-22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햄버거 패티에 그렇게 좋은 질의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똥과 섞여있다니 ㅠㅠ 영화가 백퍼센트 현실과 같지는 않겠지만 어느정도는 사실이겠지요. 햄버거 먹기가 꺼려지네요. 이 영화 한 번 봐야겠습니다. 좋은 리뷰 잘보았습니다!

소일 2009-07-23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똥은 예사일듯 합니다. 동명의 책을 읽으면 더 적나라한 묘사도 나온다죠. 패스트 푸드는 뭐든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것 같아요.
 
마을 만들기 어떻게 할 것인가 - 민속연구 제18집
안동대학교 한국학연구원 민속학 엮음 / 민속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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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공동체(Community)로서의 사회기능은 유효한가. 단호하게 이야기하건데 그렇지 않다. 기껏 자신만의 자본획득을 위한 경제행위가 서로의 살을 깎아 먹을 뿐이고, 국가 구성원인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할 법과 제도는 소수, 아주 조금에 대한 다량의 이익을 향하고 있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 한없는 희생만 강요당하는 것이 이 땅의 민중이고 보면 이에 대한 해결을 더 이상 국가나 정치에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민중이 스스로의 연대로 자신의 삶과 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사례를 찾기 어렵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지자체를 중심으로 농촌에서 벌이는 주민 자치운동인 ‘마을 만들기’는 주목할 만하다. 마을 만들기. 일본의 1930년 대공황기를 맞으며 시작된 농촌의 자력갱생운동에 기인한다. 이 용어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만들기와 일으키기와 마을이 결합하여 사용되었다. 오늘날은 전국 각지에서 쓰일 만큼 보편화된 용어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각 지자체의 활력사업에 사용되거나 농촌사업에 사용된 것이 불과 5년 정도이다.


주민 스스로가 마을이 가진 환경적, 생태적, 자연적, 인문적 가치를 깨닫고 이를 개발하여 활용하는 것이 그 운동의 주요 목표인데, 지금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 농촌에서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에 대한 의문을 풀어 가는데 좋은 실마리를 던져주는 글이 있다. 안동대 민속학자인 임재해 교수의 ‘다문화주의로 보는 농촌의 혼입여성 문제와 마을 만들기 구상’ 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도시 농촌의 시스템이 도무지 터무니없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데 가장 큰 부분은 대중의 농촌이라는 가치에 대한 이해의 수준이다. 그저 비전 없는 곳, 그냥 향수의 마음 한구석에나 담아 두어야 할 곳, 아이들 체험학습때나 방문하는 곳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떠나고, 땅값오르기나 기대하며, 개발의 손길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곳일 뿐이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탈이고, 시골에는 사람들이 너무 적어서 탈인 지경에 이르렀다. 공룡에 견줄 만한 거대한 도시사회는 끊임없이 인구가 집중되고 있는데, 낡은 경로당처럼 노인들만 사록 있는 쭉정이 시골마을에는 인력충원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아이들이 잉태되지 않는 불임의 사회가 지금의 시골마을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서울이 더 잘 살아야 하고 인구가 더 집중되어야 하며 그 규모도 더욱 비대해 져야 수도답고 중앙답게 된다고 여긴다.  
   

 


버려진 곳, 도무지 ‘돈’되는 것이 없는 곳. 죽지 못해서 농사짓고 있는 노인들. 용돈이라도 벌려고 농사짓고 자식들에게 꼬박꼬박 택배로 곡물 등의 수확을 보내고 있는 역할로 존재하는 늙은 농민들. 그들은 자조 섞인 말로 자신의 고향을 버리고 대도시로 떠난 자식들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마음의 한쪽에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었다.


   
  시골어른 들은 아예 자신들을 가족들에게서 버려진 ‘고려장’ 신세로 여기고 있다.  
   

 


다만 환경이 바뀌었을 뿐, 석면 가득한 구식 ‘쓰레트’ 지붕에 시멘트 블록으로 구옥을 리모델링한 허름한 집에서 자신의 몸을 뉘이는 오늘의 ‘농업’이 지향하는 곳은 과연 어디인가. 그리고 시들고 죽어가는 농촌을 살려낼 방법은 무엇인가. 얼마 남지 않은 소수의 젊은이 (40~50대가 청년으로 분류되는 곳이 농촌이다)들만 가지고 농촌의 미래를 이야기 하고, 마을을 가꾸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지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마을조사를 하여 마을문화의 이모저모를 기록하고 디지털 자료로 담아두는 일이다. 둘은 마을을 지속 가능한 우리시대의 새로운 마을로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어떻게 해야 한 다는 말인가.

이제 생산능력이 없는 현재의 시골은 인구 생산이 가능한 인력들이 충원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공동의 이익과 선을 위한 행동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늙고 쭈그러든’ 촌(村)에 활력이 되는 인구의 유입이 있어야 한다. 일시적인 관람, 관광객들이 아닌 자신의 삶을 가꾸고 터전으로서 마을을 선택한 사람들과 그들을 통해서 생산되는 유아들이 유일한 희망이다.


지금 유입되는 인구. 귀농귀촌인들이 하나,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는 자원으로서 외국에서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자 ‘나이든 신랑’을 택해서 생전 처음 밟아보는 한국의 농촌에서 기꺼이 거주하는 이주여성들이다.


적어도 귀농인을 위한 지원정책은 존재하고 전략화 하는데 비해 이주여성들은 자원으로 고려하고 있지 않는 것이 현 농촌의 실정이다. 그들은 각 농가의 ‘부속’으로 그 가정 내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물론 시골에 대한 복지정책의 하나로 주민자치센터등에 한글반을 운영한다던지 하는 배려가 있지만 정작 그들의 주체적 삶을 위한 지원은 볼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는 도시에서 거주한 이주 남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문제는 더 이상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개인이나 회사는 물론, 국가가 신경 써야 할 경지에 이르렀다. 연일 보도되는 이주여성의 사기, 협박, 폭력에 얼룩진 뉴스와 기획물들을 보면 감히 입을 다물지 못하는 평범한 시민들이라도 만약, 자신이 그 가정에 속하게 될 경우엔 백팔십도 달라지는 그녀에 대한 시선, 관점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그것이 바로 백인에게 지나치게 배려하고 흑인 등의 유색인종을 괄시하는 우리들의 의식화된 선입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돈’으로 굽히고 들어오는 저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기보다 이용하려는 못된 자만심에 근원이 있지는 않을까.



   
  마을에 젊은 외국인 여성들이 혼입되는 상황을 바람직한 가능성으로 유리하게 받아들이고, 그러한 가능성을 더 합리적으로 더 폭 넓게 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다문화주의적 마을 만들기의 기본 발상이다. 그러므로 다문화주의 마을 만들기는 농촌에 남아 있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 구상이라기보다, 오히려 농촌에 끊임없이 수혈되고 있는 제3세계의 젊은 여성들의 모험적 열정과 진취적 자질을 더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그 문화적 역량을 활짝 꽃피우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둔 구상이라 하겠다.  
   

 



아이 없는 촌에서 유일한 희망. 40이 넘어서야 외국에 결혼여행을 통해서 신부를 수입하는 ‘젊은’농민. 필리핀, 베트남, 중국, 일본 여성들로 구성된 다문화사회. 이것이 현재의 농촌이며 이 다문화 세대는 점점 확장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매주 시사프로나 뉴스 한 꼭지에 소개되는 그들이 멀쩡하게 아이를 빼앗긴 채 자국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당하고, 남편이 사고로 죽게 되면 꼭 그 식구들에 의해 남편의 재산이 빼앗겨 분배되는 이야기는 이제 우리 사회의 단면이 되었다. 모든 다문화가정이 문제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4일 이내에 선택되는 결혼이라는 위험천만한 근원적 요소를 포함해 혼혈의 자녀들에 대한 ‘토종’의 괄시와 무시의 태도나 대화와 소통을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마치 노비를 부리는 듯 한 나이든 어른들이 가진 사대주의 또한 문제의 근원이다.


   
  문화에 대한 세 가지 편견을 버려야 한다. 하나는 자문화중심주의이고, 둘은 문화의 우열관념이며, 셋은 문화의 완전성에 관한 편견이다. 앞의 두 가지 문제는 문화상대주의로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문화의 완전성 문제는 생태학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모든 생명체는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상호 의존하여 생존한다. 따라서 생물종 다양성이 풍부할수록 생태계는 건강하다. 문화종도 생물종과 마찬가지이다. 그 자체로 완전한 문화종은 없다. 그러므로 문화종 다양성이 풍부할수록 문화생태계도 건강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다수의 이주여성 가족들은 행복한 생활을 하고 시부모와 같이 살면서도 서로 이해하려 노력하며 적응하는 경우가 많다. 촌을 떠난 젊은 여성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도시에서 시골로 오는 경우 또한 전무하다. 이런 상황에 농촌사회가 가진 가장 큰 인구수와 초고령화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따로 있지 않다.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려고 낮선땅에 기꺼이 ‘나이든 총각’과 결혼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들은 대한민국의 미래이자 희망인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고, 더 이상 소모만 일으키는 ‘단일민족’의 신화를 우리 안에서 지워야 한다. 이주 노동자가 우리 제조업의 유일한 희망이고, 인구생산에 기여하고 젊음의 활력으로 촌에 활기를 주는 이주여성들이 농촌의 하나뿐인 ‘기대‘인 지금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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