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 당신들의 대한민국 세 번째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창피해서 도저히 남들 앞에서 말하지 못하는 것, 내가 입 밖에 내는 순간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나나 같이 민망해져 버릴 것 같은 대화의 주제, 나는 알고 있지만 당신은 알지 못해서 꽁꽁 감추고 싶었던 비밀, 알지만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불공정함과 부족함, 불편함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학연, 지연, 혈연을 중요시하고 이의 ‘구속’을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개인으로서 누구과 어떻게든 연결될지 모르거나, 연결이 되어 있는 단체와 소속 인사들을 비판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죠. 그렇다고 하면 개선의 여지는 없습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어떤 방향으로 나아져야 할지에 대한 논의나 토론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저 살아온 대로 관행과 관습, 관례를 중시 여기다 보면 인간관계도 원만하고 자신의 비즈니스도 평탄하게 나아갈 것이 뻔 한데 누가 위험을 무릅쓰고 ‘내부 고발자’가 되겠냐구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은 이 사회에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인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곳저곳 부딪히거나 남들이 겪는 고통과 아픔을 보고 자연스럽게 온몸으로 습득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사회입니다.


예컨대, 비록 다른 사람이 ‘부정’이나 ‘비리’로 걸려서 패가망신까지 가는 일이 생겨도 그가 그저 재수가 없었을 뿐, 내가 그가 받은 ‘심판’을 똑같이 받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자녀나 남편을 취직시키기 위해 ‘높은 분’에게 돈봉투나 선물박스를 안기고, 심지어 몸을 바쳐야 하는 전근대적인 사회구조, 남을 죽음으로 몰수도 있는 음주운전을 하다가 걸린 것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하고 군대에서 폭력을 가하거나 당한 경험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이사회는 불법과 비리, 폭력이 이미 생활화 되어 있으며, 오히려 부정을 통해야 스스로가 성장하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대중의 마음에 확고하게 박히게 된지 오랩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근원적인 가치인 ‘자유’와 ‘평등’은 그냥 여름 복날 탕으로 끓여질 개에게나 던져줘야 할 것들이고, 비록 자유롭지 못하거나 평등하지 못해도 ‘돈’을 섬기면 나와 내 가족에 복이 올 것이라는 사회적 믿음만이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돈’이 가장 중요하며 나와 내 가족의 영달을 위해서만 몸 바치며 이를 지켜주고 북돋아주는 일을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내가 잘 살게 됨으로서 누군가가 다치게 되거나 망하는 것에 대한 것을 정당한 희생으로 치부하는 법을 배워갑니다. 공평하게 잘 사는 것이 선(善)이라는 이야기는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말이 되버립니다.

교회나 절, 성당에서도 모두가 자신과 가족의 부와 행복, 성공을 기도하고 이루어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나라의 평안과 진보, 세계평화와 남북의 화해와 협력에 대한 내용으로 기도하는 일은 ‘행사’때나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니 그 전지전능한 신조차도 밀려드는 개인적 소원을 어떻게 들어주어야 할지 의문스럽습니다.


수천 년 역사라고 일컫는 ‘우리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습니다. 그것이 가진 영역과 가치는 누구도 건드려서 흔들 수 없는 성역의 것이 되어서 예컨대 누가 ‘독도’만 외쳐도 ‘쪽발이‘하며 일본을 향해 으르렁 거리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한민족‘이라는 불안하고 배타적인 논리로 우리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외국동포와 외국인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반말‘정도는 아주 일상화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고, 흰얼굴의 외국인에게는 꼼짝못하고 살살거리고 함께 어울리는 것을 ’자랑‘으로 삼을수 있으면서 검은 얼굴의 외국인은 경멸과 무시, 조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대다수의 국민들입니다. 길을 물어보는 외국인에 대한 반응의 비교, 이에 대한 실험을 한 모방송국의 다큐도 충격을 주었습니다.

조작된 ’정보‘와 이의 일방적 유통이 원인이겠지만 대한민국의 ’건국‘과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굳건하게 다져온 이승만, 박정희가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대접받는 것을 보면 구지 역사적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식함’만이 지탄받을 일이 아니라 오늘의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의 평등과 자유를 갈망하기 보다는 나, 내 마음의 고요와 평안을 찾는 데에 힘쓰다 보니 느슨한 ‘연대’와 함께 걷기는 커녕 눈을 맞추기조차 힘이 들고, 올해의 가계를 고민하고 집구하기, 투자, 주식, 부동산, 예금은 얼마 하는 것들로도 충분히 힘든데다가 결혼과 아이 갖기, 아이 기르기와 교육 등에 ‘투자’해야 할 금전적 정신적인 부분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공동의 가치는 ‘사치’에 가까워져 버립니다. 앞에서는 조아리고 등 돌리면 까는(?)것이 당연한 계급관계에서 욕하면서도 상층을 동경하는 하층민들은 어떻게 하든 한 계단이라도 오르기 위해 상처투성이인 온 몸을 바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오르면 자연스럽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굳어지는 이 땅의 계급구조에서 평등과 자유가 설 자리는 없나봅니다.


자본주의를 뒤집어 쓴 ‘시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곳에서 ‘복지’가 설 자리는 없습니다. 기업이 늘리면 늘리는 데로 자르면 자르는 대로 노동자는 자신의 생계를 맏긴 채 눈감고 기도나 할 뿐입니다. 정부가 주도한다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4대강을 ‘죽이는’ 토목공사에 30조원이 들어가는 동안 방학 때에도 문제풀기에 열중해야만 하는 학생들과 등록금을 내지 못해서 배움을 그만두거나 심지어 자살하는 학생들의 문제, 박사가 되어서도 월 백만원의 시간강사 자리를 근근이 유지하며 불안에 떠는 지식인들, 뉴타운이 들어서는 곳에서 쫓겨나서 살 곳을 잃어버린 도시 난민들, 늘어가고 갈 곳 없고 할 일 없는 노인들의 문제는 등한시 되고 가치 절하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그들과 손잡아야 할 ‘나’ 역시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생각들은 아등바등 ‘돈’과 ‘이윤’, ‘효율’로 채워야 할 머리만 복잡하게 할 뿐입니다.


또, ‘양심’의 사전적인 의미도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는 모든 남성 젊은이가 총을 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심지어 군대를 가지 않았던 사람들까지도 이에 편승해 이 땅에 소수 ‘양심’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데에 일조합니다. 과연 ‘평화’의 가치를 실현해야 할 이곳에 60만 대군이, 정작 그들조차 있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 오로지 ‘적’으로 정해놓은 우리 동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눌 것을 강요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에만 빠져있어도 아까운 시기의 젊음을 폭력과 강요에 의한 무조건적인 복종의 규율만을 온 몸으로 습득하는 곳에서 2년을 보내는 것이 온전한 인격과 자아형성에 도움이 된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기업이 돈으로 사회전반을 널리 주무르고 있으며 배움의 성전이 되어야 할 대학은 이미 돈 놀음에 맛이 들어서 등록금을 차곡차곡 모으고 투기하는데 에만 혈안입니다.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것들은 기업에 충성하느라 서로 바쁩니다. 노조가 없음을 세계에 자랑하는 기업의 기부금으로 지은 건물이 버젓이 들어선 캠퍼스엔 비리로 구속된 기업 인사의 이름을 딴 강의실과 현재 하한가를 거듭하는 행보를 하고 있는 대통령의 이름을 딴 라운지를 자랑스럽게 내어 놓고 있습니다. 그들의 명예를 드높이지도 못할 국회의원배출을 ‘서울대 합격’처럼 홍보하는 대학 관계자의 머릿속에는 이미 대학이 ‘상아탑’으로서의 기능은 끝났음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공’을 위해, 좀 더 벌고 서울의 좋은 아파트를 장만하기 위해 ‘명문대’가 필요한 것이라면 순수와 알맹이는 가버린 껍데기가 바로 대한민국인 것입니다.


생각하고 움직이며 달라져야 할 ‘당신들의 대한민국’의 저자는 너무나 오른쪽으로만 치우친 사회를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움직이길 기대합니다. 한국인 박노자가 바라보는 슬픈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여태 나열한 것들 보다 훨씬 더 불행하게도 어둠과 암울함으로 칠해집니다. 과연 빠져나올 구멍이나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 ‘촛불’든 이들 덕분에, 혹은 기어코 지금 가지고 있는 ‘시스템’이 가진 치명적 문제 때문에 바뀌어갈 기회가 올 것이라고 위로합니다. 러시아 태생의 귀화 한국인일 뿐이라고, 그는 우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를 잘 알지 못한다고 애써 무시하려 해도 정작 그가 말하는 폭넓고 깊이 있는 ‘현상’에 대한 이해의 수준은 ‘토종’ 학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세련된 분석과 전망을 내어 놓습니다.


‘병’이 깊은 환자에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조곤조곤 병의 원인과 진행을 설명하지만 정작 처방을 하지 못하는 의사도 있고, 병의 유래와 관계없이 직관적인 처방을 행사하는 의사도 있습니다. 어떤 의사이던 간에 환자가 스스로의 병을 인정하는 것이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야 병이 낫던지 병세가 호전되어 나을 기미를 보이던지 할 것이지요.

모쪼록 이 나라보다 좀 더 편안하고 자유로운 탐구의 분위기가 주어지는 노르웨이의 오슬로발 ‘편지’로 좀 더 세심하고 깊이 있는 ‘처방’을 ‘우리 대한민국‘의 여럿과 공유할 수 있기를 앞으로도 기대해 봅니다. 저자는 자신이 던지는 토론의 거리가 토론과 학습이 활발해져서 공감과 공유가 곧 연대로 이어지고, 힘찬 발걸음의 ’움직임‘으로 나아가길 기대합니다.

   
 


'선진화' 되어 간다는 대한민국에서

과중한 학습과 시험 부담, 학교와 부대 안에서의 폭력.

과로와 생계곤란, 경찰의 단속과 과잉 진압으로

목숨을 빼앗기거나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국내외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그가 ‘우리’를 향해 던지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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