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맥주를 한잔 하면서 영화를 볼 요량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뭘 볼까 요리조리 영화를 찾다가 고른 영화는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Les Glaneurs Et La Glaneuse>(2000). 바르다의 영화를 좋아한다. 바르다 감독을 좋아한다. 지혜롭고 명민하며 유쾌하고 윤리적인 그의 카메라.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감독이라면 대부분 고다르나 트뤼포를 떠올린다. 그렇지만 여기 바르다가 있다. 누벨바그의 대모? 훗. 웃기지 마시라. 아녜스 바르다는 누벨바그의 왕이다. 여성이라 오랫동안 고다르나 트뤼포에게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을 뿐.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를 보라, 그녀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창작한 영화이다. 그리고 나는 서울의 어느 한 구석에서 금요일 저녁 이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줄줄 흘린다.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울게 될 줄이야.

내가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이 영화가 감상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다큐멘터리이므로 카메라는 매우 건조하고 담담하다. 그런데도 왜 나는 여러 차례 울컥하다 마지막에 폭풍 눈물을 흘렸을까.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본 한국 영화 <사람과 고기>에도 폐지 줍는 노인들이 등장한다. 그때도 나는 그들의 삶을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눈물을 흘렸다. 바르다의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또한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쓰레기 줍는 사람들을 보면서 동정이나 연민 때문에 울었느냐고? 아니다, 결코 아니다. 두 영화 모두 쓰레기 줍는 사람들에게 섣불리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런 이유로 울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두 영화는 나를 울렸다. 물론 운 지점은 조금 달랐지만.
프랑스에도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많다. 어디 프랑스뿐만 그러할까 어느 영화에선가 부유하기 짝이 없다는 미국에서도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사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한국, 프랑스, 미국만이 아닐 것이다. 쓰레기를 줍고 사는 사람들, 버려진 음식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세계 도처에 있다.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는 프랑스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사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떻게 보면 제목이 참 아름답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Des glaneuses>이 떠오른다. 당연하다. 바르다는 밀레의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말>에서 바르다는 “장터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뭔가를 줍고 있던 사람들, 그들의 그 동작”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는 거리에서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을 봤을 때, 밀레의 그림 속 몸짓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밀레가 묘사한 그 시대의 이삭줍기는 집단적인 행위였죠. 여성들은 한데 모여 일했고, 나름 즐기면서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오늘날의 줍기는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아요. 남성들이 홀로 움직이고, 사회는 대량으로 음식을 생산하고, 대량으로 쓰레기를 만들어내죠.”(<아녜스 바르다의 말>)
바르다의 카메라는 프랑스 도시나 시골에서 생존하기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한다. 바르다는 몇 개월에 걸쳐 프랑스 전역을 여행하면서 현대의 이삭 줍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그들의 모습을 디지털카메라에 담는다. 쓰레기 더미에서 먹을 것을 찾는 사람들도 있지만 수확이 끝난 시골 들판에서 곡식을 줍는 사람, 감자를 줍는 사람, 바닷가에서 굴을 줍는 사람, 버려진 가구들로 예술 활동을 하는 사람 등등 사람들이 줍는 이유와 버려진 쓰레기들의 용도는 각양각색이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끈, 인상 깊은 두 남자가 있다. 한 사람은 기다란 장화를 신고 바르다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나타난다. 그는 바르다와 어느 카페에서 만나는데 에스프레소 한잔을 들이켜더니 이윽고 자신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10년 동안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고사는 데 아무런 탈이 없다고. 자연스레 쓰레기통 뒤지는 모습도 보여준다. “직업이 있나요?” 바르다의 질문에 그는 “네 있어요.”라고 대답한다. 그 대답에 나는 놀란다. 그런데도 쓰레기 더미에서 찾아낸 것들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주워 먹는 게 아니군요?” 바르다는 묻는다. 왜일까? 그는 답한다. 이것은 “나의 윤리”라고. 쓰레기가 너무 넘쳐나고 그것들의 대부분은 멀쩡한데 사람들은 길바닥에 마구 버린다고. 낭비라고 “이렇게 가다간 에리카 기름유출 같은 재난이 닥칠 것”이라고. “이것은 나의 윤리”라고 말하는 이 남자의 말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든다. 울컥 한 번.





이윽고 시장에서 채소 위주로 주워 먹는 남자도 등장한다. 커다란 가방을 멘 이 남자는 시장에 버려진 채소나 과일들을 씻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서 입으로 가져간다. 상태가 좋은 것들로 골라 가방에 넣기도 한다. 바르다가 그를 인터뷰한다. 그는 방금 그가 주워 먹은 파슬리에 담긴 영양소를 줄줄 말한다. 바르다가 신기한 듯 영양성분을 잘 아는군요? 물으니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네.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거든요.”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는 더 충격이다. 그는 석사 학위까지 있으며 쉼터에서 말리와 세네갈 등지에서 온 이주민을 대상으로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였다. 그러나 그는 돈을 받지 않으므로 정식교사는 아닌 보조교사이다. 그를 보면서 또 한 번 울컥한다.
그가 프랑스어가 서툰 말리나 세네갈 이주민들에게 이런저런 단어를 가르치다가 묻는다. “성공이 뭐죠?” 학생들은 이런저런 뻔한 대답을 한다. 잘되는 거, 부자가 되는 거, 유명해지는 거 아닌가요? 그러나 이 교사는 다른 대답을 원하는 것 같다. 뭔가 좀 더 자기의 노력이.... 그렇다. 성취. 자기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것. 그것을 그는 성공이라 말한다. 결국 나는 이 남자를 보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왜 눈물이 솟구치는지 모르겠다. 바르다는 이 남자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말한다. 나에게도 그렇다. 쓰레기를 주워 먹는 이 두 남자가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아름답게 느껴진다.










영화를 본 후 <아녜스 바르다의 말>을 펼쳐서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와 관련된 부분들을 다시 읽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구절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10년째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사는 저 청년의 이름은 ‘프랑수아’이다. 이 책에 따르면 그는 쓰레기 속에서 음식을 찾아 먹을뿐만 아니라 어떤 것도 사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찾는 건 옷을 포함해서 모두 거리 위에 있다. 폐기물을 생각하면 어떤 것도 사고 싶지 않다는 그. 프랑수아는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한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에게 최고의 시기는 6월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엑상프로방스대학교 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가면서 냉장고에 들어 있는 것들을 전부 내다 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음식들이 넘쳐나요. 제 냉장고로 가져와 채우면 3개월 동안 잘 먹을 수 있죠.” 그의 표현대로 ‘성수기’이다.
이 사내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요. 촬영을 마치고 하루를 마무리 지을 즈음 조감독이 그에게 말했어요. “출연료를 좀 드릴까 하는데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죠. “아뇨, 돈은 됐어요.” 그는 꽤 언짢은 듯 보였어요. 대신 책으로 받으면 좋겠다고 했죠. 그래서 정리를 마치고 같이 대형 서점으로 갔어요. 프랑수아는 화집이 있는 쪽으로 가서 책들을 둘러보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가 어떤 그림을 좋아하는지 궁금해하면서 이렇게 말했죠. “어떤 책이든 원하는 대로 골라요.” 그런데 이 친구가 어떤 책을 골랐는지 아세요? 부유한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아주 고상하고 세련된 18세기 소묘화집이었어요. 그가 제게 말했죠. “저는 이 시기를 참 좋아해요.” 그래서 저는 대저택에 살면서 연회를 즐기던 부자들의 모습이 담긴 커다랗고 값비싼 책을 그에게 사줬죠. -<아녜스 바르다의 말>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는 이렇게 쓰레기라고 버려진 것들을 주워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다양하게 그려진다. 실제로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도 있고 저 두 남자들처럼 자기만의 신념이나 윤리 때문에 줍는 사람들도 있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기 때문에 줍는 사람들도 있다.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 예술 작품을 만드는 이들도 있다. 이럴 때 바르다의 카메라는 프랑스의 계급 격차를 은연 중 보여주기도 한다. 재활용 물품들을 활용해 예술 실습을 하는 어린 학생들을 촬영하며 바르다는 궁금해한다. “이 아이들 중에 과연 쓰레기 수거인과 악수를 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바르다 또한 거리에서 버려진 의자와 바늘 없는 시계를 주워 오기도 한다. 바르다가 주워온 바늘 없는 시계는 그의 손끝에서, 집안에서, 하나의 오브제처럼 보인다. 그의 카메라를 통해 예술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또 바르다는 이 영화를 찍은 디지털카메라로 자신의 희끗한 머리칼이나 손등의 검버섯 같은 노화의 흔적을 영상에 담기도 한다. 이 영화를 만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일흔을 넘겼다. 그의 이 예술적 줍기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제가 비록 줍는 사람은 아니지만—가난하지도 않고, 먹을 것도 충분하지만—세상에는 또 다른 종류의 줍기가 있어요. 말하자면 예술적 줍기죠. 아이디어를 집어 올리고, 이미지를 집어 올리고, 감정들을 집어 올리죠. 그것들을 활용해 영화를 만들어요. 또한 당시 저는 일종의 삶의 전환기를 맞고 있었기 때문에. -<아녜스 바르다의 말>



최근 <피날레>를 읽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챕터, 한 여성씩 읽고 있다. 서문에서 바르다의 이름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노년까지 살아남아 창조성을 보여준 영미권 여성 문인 중 다수는 백인이며, 경제적 특권을 누린 이들이었다. (....) 어슐러 K. 르 귄, 루스 스톤, 존 디디온, 에이드리언 리치 같은 인물들이 기나긴 경력을 이어가게 해준 물질적 이점을 생각해보라. 긴 경력은 그들에게 미적 야망에 대한 수치심이나 불안감을 극복할 힘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창조적 천재의 요절이라는 신화에서 힘을 빼기도 했다. (.....) 이 작가들 모두 이 책에 포함할 만한 사람들이고, 노년에 창의성을 유지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을 말년의 사명으로 삼았던 메이 사턴 역시 그렇다. (.....) 다른 예술 분야나 다른 나라로 범위를 확장하면 더 많은 이름이 떠오른다. (.....)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 (.....) (-수전 구바, <피날레>)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너무 많이 사고 먹고 마시며 낭비한다. 저 세 사람, 프랑수아, 보조교사, 그리고 바르다의 신념과 윤리 앞에 한없이 먹먹해지는 금요일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