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먼즈의 재생 - 공공, 환대, 관용은 어떻게 회복되는가
우치다 다쓰루 지음, 박동섭 옮김 / 유유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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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 제일주의/테크 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요동치는 이때 공공/공동체의 중요성과 회복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글들. 일본을 향한 비판이자 경고이지만 대부분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공공의 의미에서 “학술 연구란 본질적으로 타인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말이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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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7-31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빈부는 개인을 놓고 말할 문제가 아니다. 공동체에 관한 문제다. 우리에게 정말 절실한 것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부유한 개인이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얼마나 풍부한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있는가이다. 한 사회가 부유한지 가난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자원의 절대량이 아니라 그 집단이 소유한 부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이 ‘커먼즈’로서 전원에게 개방되어 있는가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일본뿐 아니라 오늘날 세계는 형편없이 가난하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8명의 자산 총액이 하위 소득자 37억 명, 즉 세계 인구의 절반의 자산 총액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세계를 ‘풍요롭다’고 일컫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집단이든 ‘마이너 멤버’를 포함한다. 영유아, 노인, 병든 사람, 장애인 같은 이들은 집단 내에서 도움을 주기보다는 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이너 멤버’를 돌보는 일을 두고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공동체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모든 인간은 한때 유아였고 나중에는 노인이 된다. 언젠가는 병이 들거나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힘들어질 확률이 높다. 따라서 집단의 모든 구성원은 시차를 두고 나타나는 ‘나의 또 다른 형태’이다. 집단에서 타인을 돕는다는 것은 ‘그랬을 나, 앞으로 그렇게 될 나, 그렇게 됐을 수도 있는 나’를 돕는 일이나 다름없기에 ‘과거의 나, 미래의 나, 평행우주 속의 나’를 기쁜 마음으로 도와야 한다. 이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은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교육의 목적은 단 하나, 사람을 성숙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데 타인이 누군가를 강제로 성숙하게 만들 수는 없다. 인간을 성숙으로 이끄는 것은 자기 자신이며, 그러려면 ‘성숙해야 한다’는 강한 결의가 필요하다. 인간이 ‘나는 성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성숙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에, 그것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