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 좋은 방」 을 읽고
전망 좋은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8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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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문학 작품을 읽다보면 좀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다. 너무 길다 싶을 정도로 불필요한 세부 묘사라든지 시대적 배경이 현대와 동떨어지기 때문에 소설에 몰입이 덜 된다든지 하는 것들. 그런데 E.M 포스터의 작품은 그 배경이 현대와 살짝 동떨어져 있어도 흥미진진하고 무척 재미있다. <전망 좋은 방> 역시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의 시대 배경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무척이나 흥미롭다.

이 책은 ‘로맨스’ 소설이다. 책 표지에 있는 남녀를 보면(1985년 제임스 아이보리의 동명 영화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루시 허니처치’와 어떤 남자가 나중에 잘 될 것인지 뻔히 보인다. ‘행복한’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뻔한(?) 결말의 로맨스 소설인데도 흥미롭게 읽히는 것은 포스터의 아이러니컬한 문장이 큰 역할을 한다. 비꼬는 듯, 비아냥대는 듯, 곳곳에서 키득키득 웃음을 유발한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포스터의 소설이 거의 대부분 영화로 만들어진 이유는 아마도 생동감 있는 캐릭터, 마치 실제로 어떤 전경을 바라보는 듯한 생생하고도 아름다운 ‘묘사’가 아닐까. 특히 이탈리아의 제비꽃 밭에서 루시와 조지가 키스를 하게 되는 장면 묘사는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답고 로맨틱한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전망 좋은 방’은 여러 가지로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 루시와 샬롯이 묵게 된 펜션의 방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좋지 않은 전망’을 갖고 있다. 창을 열고 이탈리아 풍경을 한껏 바라보기를 꿈꿨던 루시에게 ‘좋지 않은 전망’의 방은 얼마나 청천벽력인가! 낙담하고 있던 그녀에게 펜션의 또 다른 손님인 애머슨 부자가 나타나 자신들은 남자이니 ‘전망’ 따위는 필요 없다며 ‘전망이 좋은’ 자신들의 방을 사용하라며 루시와 샬롯에게 방을 바꾸기를 권한다. 이때 루시는 처음으로 어딘지 우울해 보이는 ‘조지 애머슨’을 처음 알게 된다. ‘전망 ’좋은 방’은 첫 번째로 루시와 조지가 서로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원래 사귀던 사람인 ‘세실’과 결혼을 약속한 뒤 루시와 세실이 나누는 ‘전망’에 관한 대화에서 ‘전망 좋은 방’이 갖는 두 번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고 나서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죠? 정말 그래요. 아무래도 제가 시인인가 보네요. 당신을 생각하면 배경은 언제나 방 안이에요. 재미있는 일이네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응접실입니까? 바깥 전망이 보이지 않는?" "네, 전망이 없는 방이에요. 그게 뭐 문제인가요?" "나는 당신이 나를 생각할 때 이런 넓은 야외를 떠올렸으면 좋겠어요." 그가 질책하듯 말했다. "세실,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p.156)

루시는 세실을 생각하면 ‘전망 없는 방’을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대부분의 독자는 아마도 이 구절을 읽으면 루시에게 걸맞은 상대는 역시 루시가 좋은 ‘전망’을 떠올릴 수 있는 ‘조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열려 있는 공간, 다른 모든 것들을 꿈꿀 수 있는 사람, 자신에게 주어진 교양, 인습,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 즉 ‘좋은 전망’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전망 좋은 방’을 포기했던 남자 ‘조지’가 ‘루시’가 찾고 있는 그 ‘남자’라는 것을 이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은 ‘루시’뿐.

품격을 내세우는 영국 귀족들이 보기에 한없이 모자란 조지와 그의 아버지 ‘애머슨 부자’를 내세워 포스터는 케케묵은 인습과 고루한 예의범절에 갇혀 사는 ‘중세 시대’ 사람들을 꼬집는다. 그러면서 인간의 자유,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과 몸이 원하는 진실한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찬양한다. 100여 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이 지금도 여전히 많은 공감을 얻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좋은 전망’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보다는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사람을 선택하는 수많은 ‘중세 시대’의 사람들이 아직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열정이란 저항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예의범절이라든가 심사숙고라든가 그 밖에 교양이라는 이름의 각종 족쇄를 잊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통행권이 있는 곳에서 허락을 구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p.158)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루시가 조지 에머슨을 사랑한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의 입장에 선다면 그게 그렇게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정리하기는 간단하지만 실제로 살기는 혼돈스러우며, 우리는 언제나 <신경>이라든가 다른 피상적인 말들로 내면의 욕망을 가려 덮으려고 한다. 그녀는 세실을 사랑했다. 조지는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누가 그녀에게 두 문장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해 줄 것 인가? (p.206)

이런 식으로 갑자기 포스터(작가)가 개입하는 장면 너무 웃기다. ㅋㅋ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보다는 제 사랑의 방식이 더 낫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맞아요. 제 방식이 더 낫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품에 안겨서도 당신 자신의 생각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루시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루시, 머뭇거리지 마요……. 이렇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요……. 지난봄에 그랬던 것처럼 그냥 나한테 달려와요. 그런 뒤에 내가 예의를 갖추고 모든 걸 설명할게요. 나는 그 남자가 죽은 뒤로 계속 당신을 좋아했어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 <부질없는 일이야. 다른 사람하고 결혼할 여자인걸>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이 세상이 온통 물과 햇빛에 감싸여 눈부시게 반짝일 때 다시 당신을 만났어요. 당신이 숲에 들어왔을 때 나는 달리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외쳤어요. 살고 싶어서, 내 인생에 기쁨을 줄 기회를 잡고 싶어서." (p.241)

꺄.. >_< 멋있는 조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헤어질 수 없어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요. 사랑을 비틀고 무시하고 혼탁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걸 떨쳐 버릴 수는 없어요. 경험을 통해서 나는 시인들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아요. 사랑은 영원합니다." 루시의 눈에 분노의 눈물이 솟구쳤다. 분노는 곧 사라졌지만 눈물은 남았다. "다만 시인들이 이걸 좀 말해줬으면 좋겠어. 사랑은 몸에 속하는 일이라는 걸 말이야. 몸 자체는 아니지만, 몸에 속하는 일이라는 걸. 아! 우리가 그걸 인정한다면 얼마나 많은 이 세상의 고통이 줄어들까! 그런 작은 솔직함이 우리 영혼을 해방시킬 텐데! 아가씨의 영혼 말이에요, 루시양! 나는 영혼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이 말을 둘러싸고 퍼부어지는 미신들 때문에 말이오. 하지만 우리에겐 영혼이 있어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있어. 그리고 아가씨는 지금 그 영혼을 억누르고 있어요. 그걸 가만 두고 볼 수가 없구려. (중략) 하지만 우리 아들놈이랑 결혼해요.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또 사랑이 서로 응답하는 일이 얼마나 드문지를 생각해보면……. 아들놈하고 결혼해요. 이세상은 다 그런 일들을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요." (293-294)




이탈리아 제비꽃 밭에서의 키스신 (상상했던 것과 비슷했다! 상상이 더 낭만적인가;)



꺄.. 이 장면 정말 낭만적이다; (루시 머리가 좀 웃기지만;;)



두근 두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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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9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19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7-09-21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에 오스카 수상식에서
이 영화의 제목을 보고서 참 제목 한 번
기가 막히구나 싶었는데 포스터의 책이
었군요.

아쉽게도 영화나 책 모두 만나 보진 못
했지만, 그 시절의 기억을 안고 있네요.

잠자냥 2017-09-21 15:07   좋아요 0 | URL
영화와 책 모두 좋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신다면 꼭 한 번 만나보시길! ㅎㅎ
 


내용에 걸맞은 표지는 내 말이 세상을 걸어가는 동안, 독자들과 만나러 가는 동안 내 말을 감싸주는 우아하고 따뜻하며 예쁜 외투 같다. 잘못된 표지는 거추장스럽고 숨 막히는 옷이다. 아니면 너무 작아 몸에 맞지 않는 스웨터다. 아름다운 표지는 기쁨을 준다. 내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이해해주는 느낌이다. 보기 흉한 표지는 날 싫어하는 적 같다.
- 줌파 라히리, <책이 입은 옷>, 25쪽




진짜 아작 내고 싶은 책 표지네;;;



책을 사서 실물을 받아보면, 진짜 표지 디자인이 너무한다 싶은 책들이 종종 있다. 최근에 본 책 표지 가운데 단연코 압도적인(나쁜 의미에서) 책 표지는 레이 브래드버리 단편선일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가 있지? 책 표지 디자이너나, 이걸 또 컨펌한 출판사 관계자나 모두 하나 같이 레이 브래드버리에 대한 정보나 이해가 전혀!!!! 없었던 게 아닐까???!!!


저 이상한 꽃은 뭐며? 저 음울한 소녀는 또 뭐란 말인가?! 무덤에 있는 레이 브래드버리가 벌떡 일어나서 한국까지 와서는 책 표지를 '화씨 451'도로 모두 불태워버릴지도 모르겠다. 책 표지 디자인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디자인 하는 책을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작가라든지 그 작품에 대한 정보라도 좀 수집하고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럴 거면 그냥 표지 디자인을 하지 말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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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7-09-19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덤에 있는 레이 브래드버리가 벌떡 일어나서 한국까지 와서는 책 표지를 ‘화씨 451‘도로 모두 불태워버릴지도 모르겠다.‘
잠자냥님 이 문장 너무 웃겨서 지금 사무실에서 웃음 참고 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이 책 내용 뭔지 모르지만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봐도 표지 너무너무 구리네요. 무슨 문구점에서 파는 싸구려 연습장 표지 같아요. ‘화씨 451‘은 제5공화국 시절에 출판됐다고 해도 믿을만한 디자인인데요? 세상에나.....
전 소설 책표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검정색에 금박으로 글자만 써 있었음 좋겠단 생각 많이 해요. 그 디자인으로 쭉가면 차라리 더 소장하고 싶은 맘이 들 것 같은데, 우리나라 책 중에는 그런 디자인 흔치 않죠. 괜히 디자인 바꿔서 개정판 내놓고 예전에 한권이었던거 두권으로 내놓고 그렇게 가격만 올리고.. ㅜㅜ

잠자냥 2017-09-19 15:11   좋아요 0 | URL
흐흐흐. 사무실에서 웃음 참으면 더 웃기는데;; 하하하-
레이 브래드버리는 거의 전설처럼 꼽히는 SF작가인데요, 저도 이 책은 읽어보려고 사서 아직 시작도 못했지만 전에 읽은 레이 브래드버리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을 보면 절대 저 표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작품을 쓴 작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저 표지에는 정말 분개하는 레이 브래드버리 팬들이 많더라고요.

맞아요. 정말 우리나라 책 표지 가운데 디자인 너무 엉뚱한 게 많아서 차라리 검은 장정에 금박으로만 만드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아요. ㅠ_ㅠ

레삭매냐 2017-09-2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쌈 대로 이럴 거면
그냥 백지에 제목만 달아서 낼 것이지
싶네요.

출판사 사정이 어려운 걸까요.

잠자냥 2017-09-21 15:00   좋아요 0 | URL
널~~리~ 이해해서 SF장르 이미지를 파격적으로 벗어나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하하하하하.

이박사 2017-09-2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사는 것이 망설여지네요... 너무나 기다린 책인데...

잠자냥 2017-09-27 17:23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럼에도 저는 샀습니다. 표지는 아쉽지만 내용은 래이 브래드버리가 쓴 것이니까요.

2019-08-05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5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포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그것>을 손꼽아 기다린 까닭은 순전히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는 <그것> 예고편에 나 또한 홀딱 반했고, 그 예고편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믿음, 그러니까 아무리 영화를 못(?) 만들어도 웬만큼은 하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이 원작자이니까. 지난 주말, 매우 늦은 시각, 고작해야 열 명 남짓한 관객들이 띄엄띄엄 앉아서 공포를 더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극장으로 향했다. 마침내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스티븐 킹의 <그것>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사실 나는 이른바 장르 소설에 크게 재미를 못 느낀다. 내가 소설을, 문학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스토리, 그러니까 이야기를 즐기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야기가 흥미진진해도 이야기 밖의 것들이 엉망이면 그런 작품에는 도무지 재미를 못 느낀다. 그래서 나는 로맨스라든지, 추리라든지, 공포라든지 SF라든지 특정한 장르에 ‘충실’한 소설들을 (끝까지) 잘 읽지 못한다. 물론 그런 장르를 쓰는 이들 가운데 빼어난 작품으로 대중성과 문학성을 두루 갖춘 작가로 꼽히는 사람도 있다. 또 그런 작가들 가운데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들도 꽤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장르 작가’ 또는 ‘대중 작가’ 쯤으로 치부되어온 스티븐 킹도 아마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현재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 나은 평가를 받을 그런 작가. 대중문학,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의 ‘장르’ 구분 자체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몸소 보여준 작가. 물론 나는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내 주제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다.

그런데도 생각해보면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참 많이도 봤다. 공포 영화를 잘 보지 못하는 심약한(?) 성격임에도 스티븐 킹 원작이라는 이유만으로 <캐리>와 <샤이닝>을 봤으며(심지어 몇 번이나!), 지금 그냥 떠오르는 영화들만으로도 <스탠 바이 미>,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 <미저리>, <돌로레스 클레이본> 등등 엄청난 작품들이 많다.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이 작품 리스트를 보고 아니, 이게 다 스티븐 킹 원작이란 말이야? 놀랄 수도 있다. 공포 영화 계열인 <캐리>와 <샤이닝>은 일단 제외하고서라도 <쇼생크 탈출>은 이제까지 몇 번이나 봤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신기한 점은 이 영화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걸 보면 마치 처음 보듯이 또 빠져든다는 것이다.

<캐리>와 <샤이닝>에 압도되었던 나는 <그것>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드디어 극장에 갔다. 중간 중간 으악! 소리를 지르고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영화는 대체로 슬프고 매혹적인 성장영화였다. 말더듬이, 책벌레, 바이러스를 두려워하는 천식 환자, 유대인 소년, 소문이 좋지 않게 난 소녀 등 학교에서 ‘왕따’에 속하는 아이들, 루저라고 서슴없이 불리는 그 아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무시무시한 공포 영화를 기대하고 간 이들이라면(공포 장르에 충실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은 무척 시시할 것이다. 영화를 본 뒤 인터넷 관객 평을 보니 이게 무슨 공포 영화냐고 불만을 쏟아내는 평도 많았다. 하지만 나처럼 ‘성장영화’에 방점을 두고 좋은 평을 내린 사람도 보였다. 나는 공포영화로서도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이 영화를 ‘무시무시하게 매혹적인 성장영화’라고 부르고 싶다. 나처럼 공포 영화를 잘 못 보는 친구들에게 ‘공포 때문에 <그것>을 보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영화를 놓치는 것’이라며 꼭 보라고 권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 말은 영화 <그것>의 주제와도 어떤 면에서는 통한다. 두려움, 공포 등을 극복해야만 인간은 한 단계 나아갈 수 있다는, 한 걸음 성장할 수 있다는. 그럼으로써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느끼지 못했던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인생의 또 다른 아름다움(물론 이 아름다움은 ‘미(美)’적인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 자체를 알게 되고 느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움 일 수 있다)을 만날 수 있다는….

영화 <그것>에서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저마다 다르다. 읽어버린 동생(에 대한 죄책감)이기도 하고, 아버지로부터 성추행을 당하는 게 틀림없는 소녀에게는 성적 성숙을 의미하는 모든 징후들-이를테면 초경 등-이 공포 그 자체이다. 이 소녀가 목욕탕에서 피를 뒤집어쓰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며, 한편으로는 돼지 피가 담긴 양동이를 뒤집어썼던 ‘캐리’가 떠오르기도 한다. 엄마의 과보호 속에서 이 세상의 온갖 바이러스가 위험하다고 배워온 아이에게는 문둥이가 가장 두려운 대상이고, 책벌레인 아이에게는 책에서 읽은 어떤 내용이 공포로 다가온다. 공포를 느끼는 대상은 이렇게 각각 다르지만, 그 공포의 근원에는 모두 ‘광대’가 자리한다. 아이들은 왜 ‘광대’가 무서울까? 어른들에게는 우스꽝스러운 존재인 ‘광대’가 아이들에겐 가장 큰 공포의 대상 중 하나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이 세상에는 아이들에게 ‘만’ 보이는 공포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광대’로 상징화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두려움을, 공포를 이겨낼 때 인간은 왠지 ‘슬프지만’ 어른의 세계로 나아간다.

영화 <그것>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아이들 캐릭터의 생생함이다. 어디서 그런 아이들을 캐스팅 했는지 궁금할 만큼 하나 같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영화 속에서는 다들 ‘루저’에 ‘왕따’로 그려지지만, 다들 마음이 약하고 소심하고 악하지 못한 아이들일 뿐이다. 스티븐 킹이 창조한 아이들은 주로 이렇게 왕따를 당하는 루저인 경우가 많은데,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캐리’처럼 초능력을 가진 아이도 있다. 영화 내내 루저 아이들을 못살게 굴며 괴롭히던 ‘헨리’조차 실은 나름의 사정이 있다. 이렇게 나약한 아이들 하나하나 아픈 사연이 있고 그 사연을 풀어가는 연민어린 시선도 무척 좋다.

충격적이게도(?) 이 영화가 끝날 즈음 이런 자막이 나온다. ‘그것: 1장 (IT: Chapter 1)’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 단 한편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원작은 국내 판본으로 총 3권 장장 1800페이지에 달하지 않는가. 어쨌든 다음편이 나온다니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그러는 한편 속편에서는 이 사랑스러운 꼬마들이 어떤 모습으로든 달리질 테니, 그 사실이 벌써부터 안타깝다. 기대보다 더 좋았던 영화 <그것>- 영화도 이 정도인데, 원작은 또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매혹적일까? 다가오는 추석에는 스티븐 킹의 <그것>을 완독해야지. 드디어 마침내, 스티븐 킹을 제대로 읽어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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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9-18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쇼생크는 채널 돌리다 나오면 무조건 끝까지 보게 되는 마력의 영화죠. ㅎㅎ

잠자냥 2017-09-18 13:47   좋아요 1 | URL
공감합니다. 정말이지 볼 때마다 그 자리에 그냥 앉아서 끝까지 보게 만드는 대단한 영화입니다.

cyrus 2017-09-18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씩 헌책방에 가면 절판된 (고려원출판사의) 스티븐 킹 번역본을 만납니다. 그런데 낱권만 있는 경우가 많아서 포기합니다.. ㅎㅎㅎ

잠자냥 2017-09-18 22:1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헌책방에서는 시리즈 제대로 모으기 참 힘들죠. ㅎㅎ 그래서 저도 그냥 포기하고 온 책이 종종 있어요.

레삭매냐 2017-09-21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전에 <언더 더 돔> 보면서 스티븐 킹의 실력을
좀 짐작해 봤었는데 <그것>이 다시 영화화되면서
새로운 표지로 나온 모양이네요.

영화가 아쉽게도 소설의 전반부만 다루고 있다니
우선 책부터 읽어야 싶네요.

잠자냥 2017-09-21 15:01   좋아요 0 | URL
영화 한 편에 모두 담기에는 아무래도 원작이 훨씬 방대한 것 같더군요.

지지 2017-09-2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를 먼저 보고 너무 매혹되어서 이번에 원작으로 읽고있는데 스티븐 킹 필력이 어마무시하네요 ,,

잠자냥 2017-09-27 17:07   좋아요 0 | URL
네, 영화가 참 좋았죠. 전 아직 원작은 시작 못했는데 기대됩니다! ㅎㅎ
 
슈베르트 : 피아노 소나타 20번 D.959 & 21번 D.960 [디지팩]
슈베르트 (Franz Schubert) 작곡, 짐머만 (Krystian Zimerman) / 유니버설(Universal)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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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짐머만과 슈베르트의 조합이라니 그저 행복할 뿐. 맑고 깨끗하고 그러면서도 서정적인 연주. 이 가을과 완벽하게 어울린다. 짐머만은 진정 이 시대의 클래식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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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7-11-19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정말 고급스럽게 궁상맞은 명곡이지요?
저도 자주 듣는 곡인데 주로 캠프, 리히테르, 브렌델로 듣습니다.
가끔 들어야지 자주 들으면 우울증 돋는지라 가을엔 조금만 찾으세요. ^^

잠자냥 2017-11-20 09:31   좋아요 0 | URL
네! ㅎㅎ 말씀하신 것처럼 캠프와 리히테르 연주는 전설의 명연주에 속하는 것 같고요. 짐머만의 이 연주도 좋더라고요. ㅎㅎㅎ
 
더 저널리스트 : 어니스트 헤밍웨이 더 저널리스트 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영진 엮고 옮김 / 한빛비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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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헤밍웨이를 만날 수 있는 보물 같은 책이다. 헤밍웨이 작품은 좋아해도 작가로서 그를 좋아한 적은 없다. 그런데 이 책에 담긴 글들로 만난 ‘기자‘ 헤밍웨이는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글도 빼어나고 아름답지만 끊임없이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태도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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