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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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한 권으로 된 개정판이 나오기 전에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1권 <비밀노트> 2권 <타인의 증거> 3권 <50년간의 고독>으로 나눠 읽었는데 굉장히 우울했다. 책 읽으면서 이렇게 우울하고 고통스럽기도 참 오랜만이었다. 무척 슬프고 산다는 게 뭔지, 인생이 뭔지 책장을 덮고서도 한동안 먹먹하다. 이 작품은 놀랍도록 흡인력이 강하기 때문에 다음 장을 읽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다.

이 책은 1993년에 출간 후 절판되었다가 다시 나왔는데, 그동안 많은 사람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수집대상이었다고 한다. 나부터도 이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빌려 읽을 수도 있었는데 사보고 싶어서 도서관에서는 일부러 읽지 않았다. 게다가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두고두고 세월이 흐를 때마다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것.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문장이 아름다워서 계속 음미할 책도 아니다. 오히려 문장은 거의 수식이 없고 거칠고 건조하고 투박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아고타 크리스토프를 알게 되었고, 그 뒤로 그녀의 작품은 할 수 있는 한 모두 찾아 읽었다.

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말투로 작가는 한 형제의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라는 알파벳 철자의 순서만 다른 쌍둥이 형제. 이 아이들은 전쟁 때문에 시골의 한 노파에게 맡겨진다. 이 노파는 이 아이들을 ‘개자식’들이라고 부르며 사랑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런 생활을 겪게 한다. 전쟁 전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보낸 세계는 따스한 보살핌으로 가득한 생활이었다면 전쟁 후 시골에서 겪는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그 자체다.

그들은 어른에게 구타당할 때 아프지 않으려고 서로 때리면서 신체를 단련한다. 배고픔, 추위, 학대 등등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서 자유롭고자 어린아이 둘이 스스로 온갖 훈련을 하는 모습부터가 충격적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앞선 충격은 비할 바가 못 된다. 폭력, 살인, 강간, 매춘 등등 불편한 이야기가 내리 등장한다. 그런데도 책을 덮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그런 고통스러움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시작될 때 루카스와 클라우스는 엄마의 따뜻한 사랑으로 충만했던 모습이다. 그랬던 아이들이 고작 몇 주 만에 철저하게 파괴된다. 그리고 그 파괴는 결국 먼저 인생을 살아간 ‘어른’들로 인한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인생을 배워나간다. 삶의 쓰라림을 익혀나간다. 그런데 이 아이들의 세계를 파괴한 어른들, 작품 속에 나오는 온갖 어른들을 미워할 수만은 없던 건 왜일까. 그들의 악행이, 그들의 비뚤어진 정신이 아이들의 세계를 파괴했는데도 결국에는 모두에게 연민이 생긴다.

단순히 전쟁 때문에, 어른들 때문에 파괴된 아이들의 이야기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책을 집어 들고 계속 읽어가다 보면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고독한 존재인지, 타인의 사랑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지 깨닫게 된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어느 것이 거짓인지 모든 것이 혼돈인 상태로 책을 덮으면서도 뚜렷하게 알게 되는 것 하나. 인생은 고독하고 슬프다는 것- 그나마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철저한 고독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그 어떤 소설보다도 아프고, 아프다.



    그래요, 제일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죠. 책이야, 아무리 슬프다고 해도, 인생만큼 슬플 수는 없지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50년간의 고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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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12-13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친구가 선물해줘서 읽게 됐는데,
완전 좋았지만,
너무 슬프고 아파서 다시는 읽고 싶지 않아요.

님의 리뷰를 다시 읽으니,
그 먹먹함이 살아나는듯 하네요~--;

잠자냥 2017-12-13 11:42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심정적으로 몹시 힘들어지는 책입니다;; ㅠ_ㅠ
 

나는 책 편식이 심한지라, 살아있는 일본 여성 작가들이 쓴 책은 잘 읽지 않는다. 그런 작가들 중 한 사람이 에쿠니 가오리이다. 내 취향에 그녀의 글은 너무 오그라든달까. 그런데 어느날 그냥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고, 책의 서문에 이 문장을 보고 책을 그냥 샀다. 단지 그날 이 문장이 확 눈에 들어왔다. 아니 마음에 들어왔다는 표현이 맞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사랑을 하거나 서로를 믿는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용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것을 하고마는 많은 무모한 사람들에게....    

-에쿠니 가오리


다른 날 다른 장소라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문구가 어떤 날은 그냥 확 가슴에 와닿기도 한다. 그날이 그랬다. 서점에 서서 한두시간이면 훌쩍 읽을 수 있을 만큼의 분량과 행간 글자 크기- 그런 책인데도 그냥 사서 들고 나왔다. 밤에 누워서 읽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쇼코 / 무츠키 / 곤 이라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쇼코와 무츠키는 부부이다. 그런데 무츠키는 곤이라는 남자와 오랜 세월동안 연인 사이다. 그러니까 쇼코는 무츠키를 사랑하지만, 무츠키는 여자를 사랑하기 보다는 남자를 사랑하는 그런 사람.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게이인 남편을 사랑하는 여자라니. 게다가 그 여자는 우울증에 알콜 중독까지 앓는다. 겉으로 보기엔 참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들 셋은 그다지 불행하지 않다. 쇼코는 쇼코대로, 무츠키는 무츠키대로 또 곤은 곤대로 '살아진다'. 건조하고 담담한 일상. 그런데 그들 셋의 마음은 따뜻해 보인다. 남들 눈에는 참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 살아? 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와 상황이지만, 그들 셋은 나름대로 행복하다.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그냥 받아들여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만 쇼코가 무츠키에게 욕심을 내기는 한다. 그러나 무츠키는 무츠키 나름의 방식으로 쇼코를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사랑이 육체적인 접촉을 동반하고 연인처럼 사랑해야지만 사랑인 것이 아닌 것처럼. 한 사람의 상처입은 가여운 영혼을 편안하게 감싸 안아주는 무츠키만의 방식으로 우울증과 알콜중독 증상을 앓는 '아내'를 사랑해주는 것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있는 상처와 치명적인 약점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쇼코와 무츠키 혹은 곤. 그런 그들의 마음이 맑고 투명한 관계를 이룰 수 있게 한 것은 아닐까.

에쿠니 가오리의 저 서문에 그저 답을 한다면, 사랑을 하거나, 서로를 믿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무모한 일이고 만용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 무모한 일을 끝내 벌이고 마는 까닭은 그 안에서 쇼코나 무츠키, 곤처럼 서로의 아픈 구석을 보듬어 주고 감싸 안아주고 그러면서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은 뜻밖에도 겨울 새벽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별같은 느낌의 소설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일본 현대 작가 중 무라카미 류의 글도 읽긴 읽는데, 읽고 나서 썩 좋았던 적이 없다. 결국 살아 있는 일본 현대 작가의 글에서 크게 감흥 받는 일이 없다는 표현이 맞는 걸까? 아, 물론 오에 겐자부로 같은 작가는 예외다.

무라카미 류 소설은 예전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읽고 엄청 질려서, 나와는 맞지 않는 작가라는 생각에 다시는 읽지 않았다. 일본에서 아무리 잘 나가고 우리나라에서 또 잘 팔린다 해도 나랑은 너무 코드가 안 맞는 그런 작가랄까.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읽고 나서 한동안 그 우울함과 충격에 허우적거렸던 기억이란....

그런데 뭔 바람인지 <마이 퍼니 발렌타인> 이라는 책 또한 어느 날 사서 읽었다. 지금 이 책은 절판되었다.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ㅎㅎ 19개의 단편이 모인 '연애 소설' 이라는데 읽으면서 계속 질렸다. 아, 역시 무라카미 류는 나랑 안 맞아, 하는 마음. 여전히 변태 섹스가 난무하고 SM적이고 우울하고 고독하고 외롭다. 마약에 취한 인간들이 나오고 등등. 이 책에 그려진 이런 모습들이 연애며 사랑이라면 연애 같은 거 안 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다. '연애 소설'이라는 문구에 속아서 산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

<마이 퍼니 발렌타인>이라는 달콤한 제목보다 원제인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곁에 있어 줘> 이 제목이 훨씬 이 책의 내용들과 맞아 떨어진다. "자유에 대하여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모순된 감정을 품게 된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늘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갈망하지만, 이내 답답함을 느끼고 불안에 사로잡혀 멀리 떠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라는 류의 서문에 따르자면, 그리고 저런 모순된 감정을 느낄지라도 연애하는 사람들이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게 "곁에 있어도 멀리 떨어져 있어 줘"라고 말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곁에 있어 줘"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연애나 사랑의 속성은 결국 모순된 감정 속에서도 어떤 희망을 품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19개의 단편 속에 그려진 상처받고 그래서 남에게 가학적인 상처를 주고 서로 할퀴는 뜯는 인간들의 '연애'를 보고 있노라면 신물날 정도로 괴롭다. 그러면서도 어느 한편으로는 공감이 간다. 결국 인간은 혼자 있으면 너무 외로우니까, 그런 식으로라도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가학하면서, 혹은 그 반대로 상처를 받으면서도 누군가의 존재를 느끼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무엇보다 이토록 질리면서도 계속 끝까지 읽은 이유는 드문드문 보이는 아래와 같은 문장들 때문이다.




  너에게는 리얼한 사랑일지 몰라도, 난 잘 모르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누구와도 다른 아주 특별한 사랑을 했다고 생각하는 건 좋지않아. 마음을 가볍게 갖도록 해. 그렇지 않으면 다음 연애를 할 수 없게 돼     - '무스 쇼콜라' 중


   그런데 왜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의문이 교차했지만, 이미 나 스스로 그 해답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잊을 수 없는 것은, 이제 다시 만나지 말자고 서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공백이 스토리를 만들고, 스토리가 감상을 낳는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약속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서로를 진정하게 갈구한다면 전화를 해서, 만나고 싶다고 고백하게 되어있다.      -'마르세유의 부야베스' 중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고 헤어지는, 그런 만남이 반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우리는 묘한 초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애정이 이 상태에서 퇴색해버리지는 않을까, 서로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그냥 친구 사이로 끝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초초감이었다. 남녀 관계는 끊임없이 출렁이는 법이다. 진전이 없으면, 어느 상태에서 퇴행하고 마는 것이다.     - '그녀는 가버렸다' 중


  우리는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맛있는 것을 먹었기 때문에 인생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야.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었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먹었느냐지. 맛있는 것을 먹는 것보다는 누구와 알고 지내느냐가 중요해. 처음 만나서 지금까지, 네게서는 그런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어.......     - '크리스마스 이브' 중


이 책은 내가 한 10년 전에 읽은 책이다. 얼마 전에 서재 이웃인 폴스타프 님이 리뷰를 쓰셔서 반가운 마음에 다시 펼쳐보았다(그렇다. 난 이 책이 집에 아직 있다...). 


보통의 영화들을 보면 바람둥이 남자와 순정파 여자가 만나서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바람둥이가 순정파 여자때문에 바람둥이 기질을 벗고 진짜 사랑에 빠지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비단 영화뿐만이 아니라 소설이나 드라마 기타 등등 연애를 다룬 이야기들에서 바람둥이(남자 혹은 여자)가 등장하면, 결국 개과천선(?)하는 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어쩌면 사람들이 그런 엔딩을 바라기 때문에 끊임없이 재생산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스크린이나 브라운관, 혹은 책장에서 보기를 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역설적이게도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이 아닌 공간에서나마 그런 판타지를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

플로리앙 젤러의 <누구나의 연인>에는 이 여자, 저 여자로 옮겨다니면서 인생을 즐기는 바람둥이 남자(트리스탕)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에게 순정을 바치는 여자(아멜리) 역시 등장하고. 이 책을 펼쳐 든 사람이라면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그런 결말을 기대할 듯하다. 이 바람둥이 트리스탕이 아멜리의 순정에 감격받아 바람둥이를 벗어나는가 보구나! 하는. 

그런데 잔인(!)하지만 사실(!)적이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아멜리에 대한 연민이나 사랑. 이라고 생각하는 감정들 때문에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결국 트리스탕은 그녀를 혼자 호텔에 두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온다.'한 사람만의 연인'에서 '누구나의 연인'으로 돌아간다. 


 대체로 그는 길을 바꿀 때마다 사랑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그를 여자들에게로 내모는 충동은 사실 단순한 쾌락의 추구와는 아무상관이 없었다. 그보다는 마치 더 많은 곳을 보려고 안달하는 관광객 같은 초조함으로, 가능성들을 끊임없이 집요하게 추구하며 자신만의 제국을 확장하는 데서 환희를 맛보고자 하는 행위에 더 가까웠다.


트리스탕이 이 여자, 저 여자에게로 옮겨다니는 심리를 적절하게 묘사한 장면이다. 그러니까 트리스탕은 진짜 바람둥이라기 보다는,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로 자신 밖에는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어떻게 보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사랑'이라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이런 장면은 아멜리가 자신과의 첫날밤 이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감격하지만 사실 알고보면 그건 아멜리가 콘택트 렌즈때문에 그랬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에피소드에서 드러난다(이런 장면에서는 홍상수의 영화의 한 단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보면, 자신이 만든 사랑이라는 환상, 그 환상이 만들어 놓는 수많은 오해들!).

그러니 트리스탕은 자신이 만든 사랑의 환상이 깨어지기 전에, 그 환상이 깨어지고 난 후의 파편들을 보기 무서워서 계속 도망 다니는 게 아닐까. 이 소설을 읽노라면 아멜리에게 연민을 품는 사람은 트리스탕이지만, 트리스탕 그가 더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바람둥이 트리스탕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까닭은 누구나가 트리스탕과 같은 면모를 다들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또는 아멜리처럼 상대의 바람기를 알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집착하게 되는 면을 갖고 있기도 하고.

<반짝반짝 빛나는>이 사랑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책이라면, <마이 퍼니 발렌타인>과 <누구나의 연인>은 그와 반대되는 사랑의 쓰디쓴 단면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것이 사랑의 진짜 모습일지는 그 누구도 속단할 수는 없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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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8-01-08 1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오랜만에 소개하신 책들 다 읽은 거예요! 이런 영광이 다 있네요. ㅋㅋㅋ

잠자냥 2018-01-08 12:12   좋아요 0 | URL
제가 다 영광입니다! ㅋㅋㅋㅋㅋ
 
존 치버의 일기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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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동안 아껴가며 읽었다. 자신의 치부마저 숨김없이 드러낸 치버의 일기. 외로움, 절망,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과 평가에 대한 두려움 등. 작가이자 인간 존 치버를 아주 가까이서 느껴본다. 외로움 속에서도 끝까지 문학의 힘을 믿고 글쓰기에 노력한 그의 삶이 묵직한 감동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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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서재 활동을 하면서 느낀 점 중 하나- 뭐 비단 알라딘뿐만이 아니다. 블로그 같은 곳에서 즐겁게 도서 리뷰, 서평을 읽다가 맨 끝에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리뷰'라고 밝히는 문장을 읽으면 김이 팍 세는 느낌, 나뿐인가. 차라리 처음부터 그런 문장을 맨 앞에 적어둔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세상에 정말 공짜는 없다. 공짜로 받은 책을 읽고 쓴 리뷰에 비판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정말 자유로운 리뷰가 될까?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값 부담없이 신간 도서를 읽고자 하는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출판사 제공 책 리뷰'라는 그 사실을 글 맨 뒤가 아니라 맨 앞에 적어놓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난 그런 글을 읽느라 헛된 시간을 쓰지는 않을 텐데..... 아니면 그런 사실을 감안해서 읽어보던가 하겠지. 에휴, 아침부터 낚였다. 앞으로는 낚이고 싶지 않다. 정말.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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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2-08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오히려 그런 걸 왜 적는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런 글귀가 있으면 오히려 신뢰도가 더 떨어진다는 걸 출판사에서 모르는 걸까요? 제가 출판사라면 제공 받아서 썼다는 사실을 특별히 언급하지 말아달라고 할 것 같은데요....

잠자냥 2017-12-08 10:25   좋아요 0 | URL
ㅎㅎ 그게 아마 제가 잘은 몰라도, 밝혀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법적으로 문제가 된다거나 하는?). 비단 책뿐만이 아니라 블로그 같은 곳 보면 어떤 제품이나, 여행기 등등 읽다 보면 꼭 마지막에 ‘어디서 제공 받은 상품으로 블라블라‘ 이런 문장이 요즘 많이 보이더라고요. 그런 사실을 밝히면 그 순간, 신뢰도가 팍 떨어지는데, 굳이 밝히는 건 분명 이유가 있겠죠.... 근데 맨 처음부터 그런 문장을 넣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지 않거나, 읽더라도 100% 신뢰하지 못하니까 맨 끝에 ‘교묘‘하게 적어두는 것 같습니다. -_-;;

잠자냥 2017-12-08 10:47   좋아요 0 | URL
궁금해서 혹시 하고 찾아보니,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추천, 보증 등에 관한 표시. 광고 심사지침‘ 개정으로 블로그 등에서 대가성 리뷰에 대한 지침을 마련해서 권고한지 꽤 되었군요(2011년부터 시행한 듯합니다).

아래와 같이 밝혀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예)

경제적 대가 받은 사실을 표시하라는데 표시수준이 어느 정도이어야 하는지요?

ㅇ 공개문구를 보고 소비자들이 광고임을 알 수 있도록 대가 받은 사실을 객관적․직접적으로 표시하시면 됩니다.

- 또한,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 용어보다는 소비자들이 쉽게 알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여 공개문구를 작성하시기 바랍니다.

< 공개문구 예시 >
․이 추천글은 A(상품)사의 광고이다.
․B사로부터 대가를 받은 추천글이다.
․C사로부터 해당제품을 무료로 받았다.
․D사로부터 원고료를 받았다.
․E사로부터 해당제품 공동구매 주선 대가로 일정금액을 받았다.


출처는

http://www.ftc.go.kr/solution/skin/doc.html?fn=5b08a1d6feecb30c5546d5a1960d1916e2ccfd6c66600ce389a1ba9510048270&rs=/fileupload/data/result/news/ann/2011/

syo 2017-12-08 10:46   좋아요 0 | URL
이런 일이 있었군요... 어쩐지 손해날 일을 왜 하고 있나 했더니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네요 ㅎㅎㅎ 번거롭게 해드렸네요;;

잠자냥 2017-12-08 10:47   좋아요 0 | URL
아니요, 저도 덕분에 궁금했던 점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ㅎㅎ

cyrus 2017-12-08 12: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출판사 제공 사실’을 숨기는 리뷰보다 낫다고 생각해요. 어떤 출판사는 저에게 ‘출판사 제공 사실’을 알리지 않는 조건으로 리뷰를 써달라고 제안한 적 있어요. 출판사의 부탁이 탐탁지 않아서 리뷰 쓰는 것을 포기했어요.

잠자냥 2017-12-08 12:19   좋아요 0 | URL
오 그런 일도 있군요! 그런 경우에 비하면 제공 사실을 알리는 건 양심적이네요....

2017-12-08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8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8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8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8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8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 개정판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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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 제목만 봐도 아, 이 책은 경제성장을 비판하는 책이겠구나, 추측해 볼 수 있다. 맞다. 비판한다. 그런데 그 비판을 조목조목 집어가는 내용들이 어떤 면에서는 꽤(?) 충격적이다. 이 책 자체가 전복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을 듯하다. 읽다보면, 어쩐지 과거 불온 서적이라고 명명되었던 어떤 사회과학서적의 이론들과 맞물려져 있는 듯 하잖아? 하는 생각이 드는 구절도 있고, 어떤 지점은 그래서 모두 ‘아나키스트’가 되자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게 정말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그런데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 자체에 대해서도 이 책은 처음부터 이렇게 지적한다.



근본적인 해결을 구하는 사람들은 유토피아주의자, 꿈을 꾸고 있는 사람, 낭만주의, 상아탑 속의 사람이라고 불려지고, 현상을 그대로 계속할 것을 말하는 사람이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될수록 무시하고 목전의 돈벌이에 전념한다는, 그러한 사람들이 ‘현실주의자’ ‘상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상식’이라고 생각해온 상당수의 개념들이 절대로 ‘상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그 생각들 때문에 ‘도저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상식’적이지 않은 세상이구나. 하는 '앎' 때문에 괴로움이 고개를 쳐들게 된다. 저자는 그런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책의 작은 소명 중 하나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엄청 ‘괴롭고’ 있으니 이 책은 내게는 소명을 다한 셈인가?

20세기에도 그렇고, 21세기도 그렇고 경제발전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공고화 되어서 전 세계적인 헤게모니로 군림하고 있다.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나 파시스트 나치나 레닌주의자나 스탈린주의자 등이 모두 공유하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중 어느것이 경제발전을 가장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느냐 하는 점에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경제발전이 필요하다고 하는 점에는 20세기의 이들 주요한 이데올로기 간에 의견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 ‘경제발전 이데올로기’가 21세기에도 계속된다면, 모두가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 이 책의 큰 줄기다.

‘발전’이라는 말, ‘세계화’라는 말의 등 뒤에서 교묘히 감춰진 채 자행되는 ‘착취’를 사회 구성원들 자체가 스스로 ‘착취’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갈수록 무감각해져서. ‘착취’의 대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노동력의 대가로 돈을 받아 별로 쓸모도 없는, 오히려 환경을 파괴하고 정신을 갉아먹는 물건들을 소비하는데 쓰여지고 있는 악순환의 고리.

돈을 벌지않으면 가난뱅이가 될지 모른다. 집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공포. 또는 병이라도 나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 병원비를 지불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공포가 기본적으로 사회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 저자는 이러한 공포가 사회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의 안전구조가 취약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 어쩌라고? 대안이 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책이 제안한 대안은 생각해 보면 지금이라도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소비와 노동력 착취의 대상인 ‘인재(人材)’에서 보통의 ‘인간’으로 돌아오면 된다는 것이다. 돈을 벌고, 소비하면서 즐거움을 얻는 경제인간에서 값이 매겨져 있지 않은 즐거움, 사고파는 일과 관계없는 즐거움을 찾으라는 것이다. 정작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물건들은 상업광고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텔레비전에서 사라, 사라, 외치는 물건들만이라도 사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것 자체도 큰 결심이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지름신’이나 ‘뽐뿌질’ 같은 인터넷 용어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확실히 SNS나 블로그 등등 남에게 보여주는 삶이 지배적인 생활이 되면서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지르는 것’ ‘지른 항목’ 등등의 폴더까지 만들어 가면서서 무의미한 소비, 사지 않아도 될 것들을 산다. 그러면서 타인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기를 멈추지 못한다. 그런 ‘지름’을 더욱 활발하게 하기 위해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이 일해야 하는 -그럼으로써 상층 지배계급에게 노동력은 더욱 더 착취 당하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나 또한 이 지점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가장 충격 받았던 것은 원주민들이 일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가져야 할 것이 없었기에, 기본적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먹을 것 등등만 있으면 되었기에, 그들은 돈이 필요 없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한들 하루 서너 시간 이상, 아니 열 시간 일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삶은 견디지도 못했다(그러니 총과 칼,무기를 앞세워 강제로 노예를 삼아 노동력 착취를 자행한 것이다).


그럼 그들은 남는 시간을 무엇을 했느냐고? 춤추고 노래하고, 그림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고 등등. 자유롭고 창의적인, 상상력 넘치는 하루 하루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배고프면 사냥하고 고기 잡아 먹고. 남는 시간은 다시 ‘유희’와 함께 하루를 만들어가고. 그랬던 원주민이 거의 씨가 마른 까닭은 하지 않았던 일을 강제노역 당하면서 스스로 그런 삶을 견디지 못해 병들어 죽은 경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면서 대체 뭘 위해 일하는지도 모르는 채,그렇게 살지 않으면 남에게 뒤떨어지고, 타인에게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을까 두려워서 그런 공포감 때문에 계속 일한다. 그러고 나서 그 일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타인과 보조 맞추기 위해 사고, 지르고, 소비하고. 분에 넘치는 소비를 다시 메우기 위해 또 일하고, 일한다. 그것이 모두 파이가 커지면 나눠먹는 조각도 커질 것이라고, 그러니 이 모든 것들이 다 같이 경제성장, 발전하고 있는 과정이라는 ‘환상’을 계속 부추키고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진실로 풍요로운 삶이란 어떤 삶일까, 돌아보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조금 덜 쓰고, 나 스스로를 위해 즐거워질 수 있는 시간을 조금만 더 갖도록 하자. 그게 진짜 ‘성장’이고 ‘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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