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 제목만
봐도 아, 이 책은 경제성장을 비판하는 책이겠구나, 추측해 볼 수 있다. 맞다. 비판한다. 그런데
그 비판을 조목조목 집어가는 내용들이 어떤 면에서는 꽤(?) 충격적이다. 이 책 자체가 전복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을
듯하다. 읽다보면, 어쩐지 과거 불온 서적이라고 명명되었던 어떤 사회과학서적의 이론들과 맞물려져 있는 듯 하잖아? 하는
생각이 드는 구절도 있고, 어떤 지점은 그래서 모두 ‘아나키스트’가 되자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이게 정말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하고. 그런데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 자체에 대해서도 이 책은
처음부터 이렇게 지적한다.
근본적인 해결을 구하는 사람들은 유토피아주의자, 꿈을 꾸고 있는 사람, 낭만주의, 상아탑 속의 사람이라고 불려지고, 현상을 그대로 계속할 것을 말하는 사람이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될수록 무시하고 목전의 돈벌이에 전념한다는, 그러한 사람들이 ‘현실주의자’ ‘상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상식’이라고 생각해온 상당수의 개념들이 절대로
‘상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그 생각들 때문에 ‘도저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상식’적이지 않은
세상이구나. 하는 '앎' 때문에 괴로움이 고개를 쳐들게 된다. 저자는 그런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책의 작은 소명 중
하나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엄청 ‘괴롭고’ 있으니 이 책은 내게는 소명을 다한 셈인가?
20세기에도 그렇고,
21세기도 그렇고 경제발전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공고화 되어서 전 세계적인
헤게모니로 군림하고 있다.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나 파시스트 나치나 레닌주의자나 스탈린주의자 등이 모두 공유하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중 어느것이 경제발전을 가장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느냐 하는 점에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경제발전이
필요하다고 하는 점에는 20세기의 이들 주요한 이데올로기 간에 의견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 ‘경제발전
이데올로기’가 21세기에도 계속된다면, 모두가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 이 책의 큰 줄기다.
‘발전’이라는
말, ‘세계화’라는 말의 등 뒤에서 교묘히 감춰진 채 자행되는 ‘착취’를 사회 구성원들 자체가 스스로 ‘착취’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갈수록 무감각해져서. ‘착취’의 대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노동력의 대가로 돈을 받아 별로 쓸모도 없는, 오히려
환경을 파괴하고 정신을 갉아먹는 물건들을 소비하는데 쓰여지고 있는 악순환의 고리.
돈을 벌지않으면 가난뱅이가 될지
모른다. 집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공포. 또는 병이라도 나면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그 병원비를 지불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공포가 기본적으로 사회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 저자는 이러한 공포가 사회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의 안전구조가 취약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 어쩌라고? 대안이
있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책이 제안한 대안은 생각해 보면 지금이라도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소비와
노동력 착취의 대상인 ‘인재(人材)’에서 보통의 ‘인간’으로 돌아오면 된다는 것이다. 돈을 벌고, 소비하면서 즐거움을 얻는
경제인간에서 값이 매겨져 있지 않은 즐거움, 사고파는 일과 관계없는 즐거움을 찾으라는 것이다. 정작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물건들은
상업광고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텔레비전에서 사라, 사라, 외치는 물건들만이라도 사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것
자체도 큰 결심이라고 말한다.
이쯤에서 ‘지름신’이나 ‘뽐뿌질’ 같은 인터넷 용어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확실히 SNS나 블로그 등등 남에게 보여주는 삶이 지배적인 생활이 되면서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지르는 것’ ‘지른
항목’ 등등의 폴더까지 만들어 가면서서 무의미한 소비, 사지 않아도 될 것들을 산다. 그러면서 타인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기를 멈추지 못한다. 그런
‘지름’을 더욱 활발하게 하기 위해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이 일해야 하는 -그럼으로써 상층 지배계급에게 노동력은 더욱 더
착취 당하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나 또한 이 지점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가장 충격 받았던 것은 원주민들이 일하지 않고도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가져야 할 것이 없었기에, 기본적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먹을 것 등등만 있으면 되었기에, 그들은 돈이 필요
없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한들 하루 서너 시간 이상, 아니 열 시간 일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삶은 견디지도 못했다(그러니 총과 칼,무기를 앞세워 강제로 노예를 삼아 노동력 착취를 자행한 것이다).
그럼 그들은
남는 시간을 무엇을 했느냐고? 춤추고 노래하고, 그림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고 등등. 자유롭고 창의적인, 상상력 넘치는 하루 하루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배고프면 사냥하고 고기 잡아 먹고. 남는 시간은 다시 ‘유희’와 함께 하루를 만들어가고. 그랬던 원주민이
거의 씨가 마른 까닭은 하지 않았던 일을 강제노역 당하면서 스스로 그런 삶을 견디지 못해 병들어 죽은 경우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면서 대체 뭘 위해 일하는지도 모르는 채,그렇게 살지 않으면 남에게 뒤떨어지고, 타인에게
무능력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을까 두려워서 그런 공포감 때문에 계속 일한다. 그러고 나서 그 일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타인과 보조 맞추기 위해 사고, 지르고, 소비하고. 분에 넘치는 소비를 다시 메우기 위해 또 일하고, 일한다. 그것이 모두 파이가
커지면 나눠먹는 조각도 커질 것이라고, 그러니 이 모든 것들이 다 같이 경제성장, 발전하고 있는 과정이라는 ‘환상’을 계속
부추키고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떠나 진실로 풍요로운 삶이란 어떤 삶일까, 돌아보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조금 덜 쓰고, 나 스스로를 위해 즐거워질 수 있는 시간을 조금만 더 갖도록 하자. 그게 진짜
‘성장’이고 ‘발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