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 편식이 심한지라, 살아있는 일본 여성 작가들이 쓴 책은 잘 읽지 않는다. 그런 작가들 중 한 사람이 에쿠니 가오리이다. 내 취향에 그녀의 글은 너무 오그라든달까. 그런데 어느날 그냥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고, 책의 서문에 이 문장을 보고 책을 그냥 샀다. 단지 그날 이 문장이 확 눈에 들어왔다. 아니 마음에 들어왔다는 표현이 맞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사랑을 하거나 서로를 믿는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용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것을 하고마는 많은 무모한 사람들에게....    

-에쿠니 가오리


다른 날 다른 장소라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문구가 어떤 날은 그냥 확 가슴에 와닿기도 한다. 그날이 그랬다. 서점에 서서 한두시간이면 훌쩍 읽을 수 있을 만큼의 분량과 행간 글자 크기- 그런 책인데도 그냥 사서 들고 나왔다. 밤에 누워서 읽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쇼코 / 무츠키 / 곤 이라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쇼코와 무츠키는 부부이다. 그런데 무츠키는 곤이라는 남자와 오랜 세월동안 연인 사이다. 그러니까 쇼코는 무츠키를 사랑하지만, 무츠키는 여자를 사랑하기 보다는 남자를 사랑하는 그런 사람.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게이인 남편을 사랑하는 여자라니. 게다가 그 여자는 우울증에 알콜 중독까지 앓는다. 겉으로 보기엔 참 최악의 상황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들 셋은 그다지 불행하지 않다. 쇼코는 쇼코대로, 무츠키는 무츠키대로 또 곤은 곤대로 '살아진다'. 건조하고 담담한 일상. 그런데 그들 셋의 마음은 따뜻해 보인다. 남들 눈에는 참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 살아? 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와 상황이지만, 그들 셋은 나름대로 행복하다. 서로의 "있는 그대로"를 그냥 받아들여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다만 쇼코가 무츠키에게 욕심을 내기는 한다. 그러나 무츠키는 무츠키 나름의 방식으로 쇼코를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사랑이 육체적인 접촉을 동반하고 연인처럼 사랑해야지만 사랑인 것이 아닌 것처럼. 한 사람의 상처입은 가여운 영혼을 편안하게 감싸 안아주는 무츠키만의 방식으로 우울증과 알콜중독 증상을 앓는 '아내'를 사랑해주는 것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있는 상처와 치명적인 약점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쇼코와 무츠키 혹은 곤. 그런 그들의 마음이 맑고 투명한 관계를 이룰 수 있게 한 것은 아닐까.

에쿠니 가오리의 저 서문에 그저 답을 한다면, 사랑을 하거나, 서로를 믿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무모한 일이고 만용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 무모한 일을 끝내 벌이고 마는 까닭은 그 안에서 쇼코나 무츠키, 곤처럼 서로의 아픈 구석을 보듬어 주고 감싸 안아주고 그러면서 행복해지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은 뜻밖에도 겨울 새벽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별같은 느낌의 소설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일본 현대 작가 중 무라카미 류의 글도 읽긴 읽는데, 읽고 나서 썩 좋았던 적이 없다. 결국 살아 있는 일본 현대 작가의 글에서 크게 감흥 받는 일이 없다는 표현이 맞는 걸까? 아, 물론 오에 겐자부로 같은 작가는 예외다.

무라카미 류 소설은 예전에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읽고 엄청 질려서, 나와는 맞지 않는 작가라는 생각에 다시는 읽지 않았다. 일본에서 아무리 잘 나가고 우리나라에서 또 잘 팔린다 해도 나랑은 너무 코드가 안 맞는 그런 작가랄까.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읽고 나서 한동안 그 우울함과 충격에 허우적거렸던 기억이란....

그런데 뭔 바람인지 <마이 퍼니 발렌타인> 이라는 책 또한 어느 날 사서 읽었다. 지금 이 책은 절판되었다. 왠지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ㅎㅎ 19개의 단편이 모인 '연애 소설' 이라는데 읽으면서 계속 질렸다. 아, 역시 무라카미 류는 나랑 안 맞아, 하는 마음. 여전히 변태 섹스가 난무하고 SM적이고 우울하고 고독하고 외롭다. 마약에 취한 인간들이 나오고 등등. 이 책에 그려진 이런 모습들이 연애며 사랑이라면 연애 같은 거 안 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다. '연애 소설'이라는 문구에 속아서 산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

<마이 퍼니 발렌타인>이라는 달콤한 제목보다 원제인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곁에 있어 줘> 이 제목이 훨씬 이 책의 내용들과 맞아 떨어진다. "자유에 대하여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모순된 감정을 품게 된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늘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갈망하지만, 이내 답답함을 느끼고 불안에 사로잡혀 멀리 떠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라는 류의 서문에 따르자면, 그리고 저런 모순된 감정을 느낄지라도 연애하는 사람들이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게 "곁에 있어도 멀리 떨어져 있어 줘"라고 말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곁에 있어 줘"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연애나 사랑의 속성은 결국 모순된 감정 속에서도 어떤 희망을 품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19개의 단편 속에 그려진 상처받고 그래서 남에게 가학적인 상처를 주고 서로 할퀴는 뜯는 인간들의 '연애'를 보고 있노라면 신물날 정도로 괴롭다. 그러면서도 어느 한편으로는 공감이 간다. 결국 인간은 혼자 있으면 너무 외로우니까, 그런 식으로라도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가학하면서, 혹은 그 반대로 상처를 받으면서도 누군가의 존재를 느끼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진다.

무엇보다 이토록 질리면서도 계속 끝까지 읽은 이유는 드문드문 보이는 아래와 같은 문장들 때문이다.




  너에게는 리얼한 사랑일지 몰라도, 난 잘 모르겠어, 하고 나는 말했다. 누구와도 다른 아주 특별한 사랑을 했다고 생각하는 건 좋지않아. 마음을 가볍게 갖도록 해. 그렇지 않으면 다음 연애를 할 수 없게 돼     - '무스 쇼콜라' 중


   그런데 왜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을까? 이런저런 의문이 교차했지만, 이미 나 스스로 그 해답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잊을 수 없는 것은, 이제 다시 만나지 말자고 서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공백이 스토리를 만들고, 스토리가 감상을 낳는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약속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서로를 진정하게 갈구한다면 전화를 해서, 만나고 싶다고 고백하게 되어있다.      -'마르세유의 부야베스' 중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고 헤어지는, 그런 만남이 반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우리는 묘한 초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애정이 이 상태에서 퇴색해버리지는 않을까, 서로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그냥 친구 사이로 끝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그런 초초감이었다. 남녀 관계는 끊임없이 출렁이는 법이다. 진전이 없으면, 어느 상태에서 퇴행하고 마는 것이다.     - '그녀는 가버렸다' 중


  우리는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맛있는 것을 먹었기 때문에 인생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야.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었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먹었느냐지. 맛있는 것을 먹는 것보다는 누구와 알고 지내느냐가 중요해. 처음 만나서 지금까지, 네게서는 그런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어.......     - '크리스마스 이브' 중


이 책은 내가 한 10년 전에 읽은 책이다. 얼마 전에 서재 이웃인 폴스타프 님이 리뷰를 쓰셔서 반가운 마음에 다시 펼쳐보았다(그렇다. 난 이 책이 집에 아직 있다...). 


보통의 영화들을 보면 바람둥이 남자와 순정파 여자가 만나서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바람둥이가 순정파 여자때문에 바람둥이 기질을 벗고 진짜 사랑에 빠지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비단 영화뿐만이 아니라 소설이나 드라마 기타 등등 연애를 다룬 이야기들에서 바람둥이(남자 혹은 여자)가 등장하면, 결국 개과천선(?)하는 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어쩌면 사람들이 그런 엔딩을 바라기 때문에 끊임없이 재생산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스크린이나 브라운관, 혹은 책장에서 보기를 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역설적이게도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이 아닌 공간에서나마 그런 판타지를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

플로리앙 젤러의 <누구나의 연인>에는 이 여자, 저 여자로 옮겨다니면서 인생을 즐기는 바람둥이 남자(트리스탕)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에게 순정을 바치는 여자(아멜리) 역시 등장하고. 이 책을 펼쳐 든 사람이라면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그런 결말을 기대할 듯하다. 이 바람둥이 트리스탕이 아멜리의 순정에 감격받아 바람둥이를 벗어나는가 보구나! 하는. 

그런데 잔인(!)하지만 사실(!)적이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아멜리에 대한 연민이나 사랑. 이라고 생각하는 감정들 때문에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결국 트리스탕은 그녀를 혼자 호텔에 두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온다.'한 사람만의 연인'에서 '누구나의 연인'으로 돌아간다. 


 대체로 그는 길을 바꿀 때마다 사랑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그를 여자들에게로 내모는 충동은 사실 단순한 쾌락의 추구와는 아무상관이 없었다. 그보다는 마치 더 많은 곳을 보려고 안달하는 관광객 같은 초조함으로, 가능성들을 끊임없이 집요하게 추구하며 자신만의 제국을 확장하는 데서 환희를 맛보고자 하는 행위에 더 가까웠다.


트리스탕이 이 여자, 저 여자에게로 옮겨다니는 심리를 적절하게 묘사한 장면이다. 그러니까 트리스탕은 진짜 바람둥이라기 보다는,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로 자신 밖에는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어떻게 보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사랑'이라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이런 장면은 아멜리가 자신과의 첫날밤 이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감격하지만 사실 알고보면 그건 아멜리가 콘택트 렌즈때문에 그랬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에피소드에서 드러난다(이런 장면에서는 홍상수의 영화의 한 단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보면, 자신이 만든 사랑이라는 환상, 그 환상이 만들어 놓는 수많은 오해들!).

그러니 트리스탕은 자신이 만든 사랑의 환상이 깨어지기 전에, 그 환상이 깨어지고 난 후의 파편들을 보기 무서워서 계속 도망 다니는 게 아닐까. 이 소설을 읽노라면 아멜리에게 연민을 품는 사람은 트리스탕이지만, 트리스탕 그가 더 안쓰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바람둥이 트리스탕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까닭은 누구나가 트리스탕과 같은 면모를 다들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또는 아멜리처럼 상대의 바람기를 알면서도 떠나지 못하고 집착하게 되는 면을 갖고 있기도 하고.

<반짝반짝 빛나는>이 사랑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책이라면, <마이 퍼니 발렌타인>과 <누구나의 연인>은 그와 반대되는 사랑의 쓰디쓴 단면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것이 사랑의 진짜 모습일지는 그 누구도 속단할 수는 없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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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8-01-08 1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오랜만에 소개하신 책들 다 읽은 거예요! 이런 영광이 다 있네요. ㅋㅋㅋ

잠자냥 2018-01-08 12:12   좋아요 0 | URL
제가 다 영광입니다!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