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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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 사건은 21세기의 타락한 남성성, 남성들의 독재, 흉측한 부성, 좀처럼 죽지 않는 가부장제의 유령을 드러냈다. (<레티시아>, 448쪽)


새해 들어 처음으로 읽기를 마친 책, <레티시아>가 꽤 마음을 무겁게 한다. 물론 이 책은 지난해 말에 읽기 시작했던 터라 굳이 새해에 읽고자 집어 들었던 책은 아니다. 새해 첫 책으로 골랐다면 아마 조금은 밝고 희망적인 책을 읽지 않았을까. 그런데 <레티시아>는 어둡고 암담하며 마음이 아프다. 그럼에도 <레티시아>는 좋은 책이다. 지난해 여름에 사두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2017년에 읽었다면 2017년의 좋은 책 목록에 올리고도 남았을 것 같다.


<레티시아>는 2011년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이른바 ‘레티시아 사건’을 소재로 한 르포 문학이다. 열여덟 살 소녀가 실종되었고 잔인하게 죽임 당했다. 범인은 곧 잡혔지만 죽은 소녀의 시체를 찾는 일은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레티시아>는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이반 자블론카’가 그 사건을 치밀하게 조사하고 온갖 관련자를 인터뷰하여 사건과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삶을 재구성하여 완성해냈고 이 책으로 2016년에 프랑스 메디치상, 르몽드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레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가 떠오른다. 그 작품 또한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인터뷰하고 기록하면서 써낸 르포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티시아>가 카포티의 그것과 다른 점은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죽임을 당한 소녀 ‘레티시아’와 더불어 그녀의 쌍둥이 언니 ‘제시카’의 삶을 그리는데 더욱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어떤 잔혹한 범죄가 일어나면 미디어는 범죄와 그 범죄를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중심으로 그/그녀가 얼마나 흉악한 인물인지 보도하기에 바쁘다. 요즘 이 땅을 뒤흔든 몇 건의 끔찍한 사건들- 십대가 유치원생 아이를 납치해 잔혹하게 살인한 사건, 이영학 사건, 자신의 아이를 친부가 죽여 놓고도 마치 살아있는 듯 연기를 하며 급기야 실종 신고까지 한 사건을 보라. 피해자는 사라지고 범죄를 저지른 이의 가정환경, 생활형편, 평소의 취미 생활 등등이 낱낱이 까발려지면서 그들이 얼마나 엽기적이고 잔혹하며 흉악한지 보도하기에 바쁘다. 그래야만 대중의 분노와 함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전율하면서 읽었지만 솔직히 어떤 부분에서는 불쾌감이 들기도 했다. 카포티는 범죄자들의 인간 내면을 묘사하는데 놀랍도록 치밀했다. 그들을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자 했고 그러다 보니 어떤 면에서는 그들을 미화하기도 한다. 특히 ‘페리 스미스’에게는 카포티가 틀림없이 개인적 감정(그것이 연민이든 사랑이든)을 가졌으리라 짐작되고, 바로 그 때문에 그 잔혹한 범죄자가 때로는 불행하고 불쌍한 인간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레티시아>에도 레티시아를 죽인 끔찍한 범죄자 ‘토니 멜롱’의 이야기가 나온다. 토니 멜롱 또한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청소년기에 작은 범죄를 저지른다. 그로 말미암아 감옥을 드나들게 되고, 점점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악순환을 거듭한다. 그렇게 범죄와 술, 마약으로 이어지는 생활에 젖어들면서 정상인의 삶의 궤도를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끝내 한 소녀를 잔혹하게 납치하고 살인하게 된다. 그런데 그 시선은 감정을 배제한 기록에 가깝다. <레티시아>의 주인공은 절대로 가해자 ‘토니 멜롱’이 아니라 피해자 ‘레티시아’임을 이 책을 읽는 내내 알 수 있다.


이반 자블론카는 ‘내 책에는 단 한 명의 주인공, 레티시아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녀에게 갖는 관심은 마치 은총으로의 복귀처럼, 그녀의 본모습과 존엄성과 자유를 그녀에게 되돌려 줄 것’(9쪽)이라면서 이 책이 ‘토니 멜롱’이 아니라 ‘레티시아’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그녀가 죽은 뒤에도 미디어의 희생자로서 남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에 드는 곳에 처박혀서 마치 없는 듯이 지내는 레티시아’(11쪽)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자의 이런 태도 때문에 독자는 <레티시아>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한 소녀의 안타까운 삶에 더 주목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레티시아 사건을 ‘21세기의 타락한 남성성, 남성들의 독재, 흉측한 부성, 좀처럼 죽지 않는 가부장제의 유령을 드러’낸 사건으로 정의 내린다. 남성(들)에 의해 삶이 무너지고 파괴되다가 끝내 잔혹하게 죽임 당한 전형적인 ‘여성 혐오 범죄’라고 말한다. 이반 자블론카의 이러한 주장은 ‘레티시아’와 ‘제시카’ 쌍둥이 자매의 삶을 들여다보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레티시아(그리고 제시카)의 삶에는 ‘세 가지 부당함이 있었다. 하나는 폭력적인 친아버지와 기만적인 위탁가정 양부 사이에서 보낸 유년기, 다른 하나는 18세의 나이에 맞은 잔혹한 죽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건사고 기사, 즉 죽음의 구경거리로의 전락이 그것’(193쪽)이다.


레티시아와 제시카는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친아버지인 ‘프랑크 페레’는 술에 취해 툭하면 아이들과 아내를 학대하는 매우 폭력적인 아버지였다. 때로는 레티시아와 제시카를 던져버리기(!)도 하고, 아내를 협박할 용도로 아이들을 이용한다. 그런데다가 아내에게는 잦은 폭력과 강간이 이어졌다. 결국 레티시아와 제시카의 엄마인 ‘실비 라르셰’는 심리적인 죽음을 맞이하고는 우울증 등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프랑크 페레는 감옥까지 드나들고 엄마는 아이들을 돌볼 상태가 전혀 되지 못하고…. 이런 상태에서 쌍둥이 자매는 위탁가정에 맡겨진다.


그런데, 그 위탁가정에서도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물론 그 가정은 평화로웠고, 좋은 추억도 많았다. 하지만 그 평온함 아래는 또 하나의 끔직한 비극이 숨어 있었다. 위탁가정의 양부로부터 두 자매는 온갖 성추행을 당한 것이다. 제시카의 경우가 특히 더 심했다. 제시카는 이 가정에 완전히 입양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양부의 성추행을 묵묵히 견딘다. 하지만 끝내 자신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동생은 살해당하고, 위탁가정은 해체되고, 양부의 범죄를 털어놓은 죄 아닌 죄로 위탁가정의 ‘가족’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제시카,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동생, 입양가정, 순결, 삶의 기쁨, 익명성 그리고 평온을. 그녀는 동생이 죽었을 때가 아니라, 자신이 파트롱 씨의 노리개였다는 걸 알게 된 가족이 위기를 맞은 후에야 침묵을 깨기로 결정했다. 청소년기 내내 그녀는 가족의 사랑과 안정적인 생활, 그리고 어딘가 있을 곳에 대한 바람의대가로 위탁가정 아버지의 추행을 견뎠다. 약간의 애정과 자신의 몸을 맞바꾼 것이다. (398쪽)


<레티시아>를 읽다보면 레티시아의 가정뿐만이 아니라, 범죄자인 토니 멜롱의 가정, 그리고 레티시아의 아버지였던 프랑크 페레의 가정 등 거의 모든 집안에서 폭력적인 아버지와 학대 받는 어머니 구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가장 정상적으로 보였던 레티시아의 위탁가정 또한 결국 그 집안의 가장인 ‘질 파트롱’의 지속적인 성추행(위탁가정으로 왔던 소녀들은 레티시아와 제시카만이 아니었다. 질 파트롱은 나머지 다른 소녀들에게도 성추행을 지속적으로 해왔음이 밝혀졌다)이 있었다. 이반 자블론카는 이렇게 프랑스의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학대받고 죽임 당하는 여성들의 삶을 폭로하기도 한다.



부부 사이에 있어서 폭력은 반복되는 모욕, 위협적인 행동, 희롱, 정서적인 협박, 심리적 압박, 아이들에 대한 위협, 강제적인 성관계, 따귀 때리기, 구타, 가혹 행위 등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그 목적은 상대를 지배하고 자신에게 예속시키는 것이다. (.......) 프랑스에서는 교살되거나 총에 맞아 죽은 가정주부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수십 통의 욕설 문자메시지의 표적이 되었다가 끝내 맞아 죽은 전처들, 성관계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칼에 찔려 죽은 여성들이 해마다 100명 이상이나 나온다. (36쪽)


레티시아는 유년기 때부터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 내에서 친부와 양부에게 구타와 학대 성추행 등 온갖 폭력을 당하다가 끝내 사회에서 만난 남자에게 납치되어 잔혹하게 살해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반 자블론카는 명백히 레티시아의 죽음이 남성들의 폭력에 시달리다 끝내 죽임까지 당하고 마는 전형적인 ‘여성 혐오 범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레티시아는 구타당하고, 칼에 찔리고, 목이 졸렸다. 그녀의 시신은 금속 톱에 의해 토막이 났고, 쓰레기통에 담겨 있다가 물에 던져져서 물고기 밥이 되었다. 레티시아는 ‘과잉 살해’를 당했다. 몇 시간 만에 생기발랄한 소녀가 살덩어리, 피투성이가 된 사지, 잘린 머리, 시멘트 블록이 달린 몸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소멸이, 중단된 구강성교로부터 시작된 시퀀스를 매듭지었다. 그녀의 내면에 굴복해야 할 여성이, 깔아뭉개고 파괴되어야 할 여성이 있다는 점에서 레티시아는 여성으로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처벌이자 동시에 복수이기도 한 레티시아 살해는 여성 혐오 범죄이다. (429쪽)


<레티시아>를 읽노라면 그녀의 죽음이 단순히 저 먼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일뿐이라고 치부할 수 없어진다. 이런 사건은 전 세계 여성,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비극임을 알기 때문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라고 말하는 것을 도무지 이해 못하는 남자들이 있다. 그들은 그게 어떻게 여성 혐오 범죄이냐고 묻는다. 정말 이해를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범인은 그 화장실에 들락거린 수많은 남성들은 그냥 둔 채 한 여성만을 죽였다. 더더군다나 그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레티시아를 죽인 토니 멜롱 또한 레티시아가 자신에게 ‘No’라고 말한 순간 분노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욕망이 레티시아의 거절과 함께 좌절되자 더 이상 그 소녀를 지배할 수 없음에 분노하여 살인을 저질렀다. 토니 멜롱의 어머니가 만일 자신이 아들에게 ‘No'라고 했다면 아들은 자신조차 죽였을지 모른다고 말하는 점은 그러므로 의미심장하다. 이런 남성들의 폭력성에 이반 자블론카는 크게 분노하고 개탄한다.


남성적인 의미로서의 인간은 더 나쁜 존재다. 가끔 내가 제시카의 곁에서 거북함을 느끼는 것은 내가 남자이기 때문이고, 그녀가 살아오는 내내 남자들이 그녀에게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다. 남자들, 분란이 생기면 커터 칼로 해결하는 것도 남자이고, 당신 앞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남자이고, 당신이 들고 있어야 하는 키친타월에 정액을 쏟는 것도 남자이고, 당신을 칼로 찌르는 것도 닭의 목을 자르듯 당신의 목을 자르는 것도 남자이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당신은 쾌락의 대상, 노리개일 뿐이다. 또한 장관들, 지도자들, 텔레비전에 나와서 떠드는 사람들, 알고, 명령을 내리고, 옳은 사람들, 당신에 대해, 당신의 위에서, 당신의 속에서, 당신을 통해 말하는 사람들도 남자들이다. 결국 언제나 남자들이 이긴다. 그들은 당신을 자기들이 원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까닭이다. 처음으로 나는 나의 성이 수치스러워졌다. (445쪽)


책을 덮고 나서도 ‘레티시아’나 ‘제시카’ 쌍둥이 자매의 사진을 찾아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범죄자인 ‘토니 멜롱’이나 ‘질 파트롱’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알라딘에서 이 책과 관련한 리뷰들을 보다가 그만 ‘레티시아’의 사진을 보고 말았다. 정말 앳된, 평범한 소녀의 웃는 얼굴에 더 마음이 시렸다. 열여덟 짧은 생을 남성들의 온갖 폭력에 시달리다가 결국 참혹하게 죽은 소녀. 그녀가 이제는 정말 평온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남겨진 쌍둥이 제시카의 앞으로의 인생은 부디 폭력에 더 이상 희생되지 않기를. 그저 행복하기를 바라게 된다. <레티시아>는 이렇게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의 삶과 죽음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피해자를 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가진 존재로 바로 세운다. <레티시아>의 힘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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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번역한 외국 책들만 읽어서 요며칠 한국문학을 읽기 시작했다. 2017년에 나온 책 가운데 반가운 마음에 사두었던 <한국현대희곡선>과 저렴한 가격에다가 굿즈에 끌려서 사두었던 <웃는 남자> 이 두 권이다. <한국현대희곡선>은 매일 희곡 한 편씩 읽고 있다. 지금까지 4편을 읽었다.

'토막'_유치진 / '산허구리'_함세덕 / '살아 있는 이중생 각하'_오영진 / '불모지'_차범석 이렇게 4편.

수록 작품들은 뭐, 하나 같이 우리나라 현대 대표 희곡인지라 역시 잘 썼다, 감탄하면서 읽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읽은 작품들이 모두 묘한 공통점이 있다. 시대 배경이 그래서 그런 탓일지도 모르는데 몇 가지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가난/가족/밑바닥 삶/부재하거나 제 능력을 상실한 장남/ 가족의 몰락' 거의 이렇다.

가난에 허덕이거나 가난하지 않더라도 결국 몰락하는 집안과 그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그 집안의 맏이는 거의 아들인데, 이 장남들은 끌려갔거나 유학 갔거나 소식을 알 수 없거나 등등 가족 내에서 사라진 상태이고, 그 어머니들은(또는 가족은) 장남의 부재를 고통으로 여기고 이제나저제나 소식을 들을까 기다린다. 이런 상태가 아니라 장남이 가족과 함께 있더라도 전쟁터에서 돌아와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제 구실을 못한다('불모지'). 그러다 결국 가족을 파멸로 몰아간다.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는 아버지- 돌아오지 않는 장남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머니, 또는 제 구실을 못하는 장남을 안쓰러워하는 어머니-그리고 주변인과도 같은 나머지 자식들. 아버지와 장남의 가부장제가 어떻게 표현을 달리하느냐의 차이지 거의 희곡 4편의 중심을 이룬다.

하루에 한 편씩 읽으니까 망정이지 만일 앉은 자리에서 계속 이 책을 다 읽으라면 숨이 막힐 것 같다.

어젯밤 집어든 <웃는 남자>도 한몫한다. 늦은 밤에 읽기 시작했던 터라, 좀 긴 편인 황정은의 '웃는 남자' 대신 김숨의 '이혼'부터 읽었다. 하...... 새벽 1시 넘어서 이 작품 읽다가 가슴을 턱턱 쳤다. 하 답답하다.

이혼을 준비중인 여자의 관점으로 이혼을 했거나, 하려고 하거나, 할 뻔했던 여자들의 삶이 묘사된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남자들이- 특히 주인공의 아버지- 하나 같이 개썅놈인 거라.......... -_- 아 욕나와. 너무나도 폭력적인 아버지는 주인공의 엄마를 하루가 멀다하고 두들겨패고, 그런 엄마를 대신해 이혼 서류까지 만들어 오지만, 엄마는 이미 뭔가를 잃어버려서 자신이 이혼을 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조차 판단을 못한다. 그 주인공은 이제 자신의 남편과 이혼을 준비 중인데, 이 쌍놈이 하는 말이 가관이다. 주인공은 시인인데, 그런 그녀에게 이 따위 말을 한다.



"네가 날 버리는 건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므로 앞으로 네가 쓰는 시는 거짓이고, 쓰레기야."



하....... 뭐 이런 ㅂ ㅅ 같은 놈이 다 있지?



'이혼'의 주인공은 부모에 이어서 자신 또한 이혼을 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문제는 남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 세계가 정말 그럴까? 정말 그렇게 단순할까? (왠지 모든 작품이 다 이럴 것 같아서 <현남 오빠에게>는 읽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새벽 1시 40분이 다 되어서 다음 작품은 읽지 않고 책을 덮었다. 아니, 더 못 읽겠어서 덮었다.

아, 한국문학........ 가족, 가족, 가족, 가부장, 가부장, 가부장....... 가족 안에 갇힌 세계.....

한없는 답답함을 느끼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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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마술적 리얼리즘'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나는,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도 아직 읽지 않았다.

내 주위 친구들은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하면, 깜짝 놀란다.

그도 그럴 것이, 책 좀 읽는다는 사람 치고 이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근데 바로 내가 그렇다.......

그만큼 중남미 마술적리얼리즘과 잘 맞지 않았던 나.....


그러데 드디어 <백년의 고독>을 읽을 때가 된 것 같다.


얼마 전 리커버 한정판이 발매된 것이 아닌가..... 그것도 표지가 꽤 이쁘다?!



민음사에서 나온 <백년의 고독> 리커버 한정판.



안타깝게도 이 리커버 한정판은 알라딘에서는 구매할 수 없...; 다.

저쪽 다른 동네에서만 판매중이다.

표지도 예쁘지만 합본이라 더 좋다....


사실 이 책을 사기 전까지 여러 번 망설였다.

친구가 다 읽고 준 <백년 동안의 고독>이 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있는 걸 읽으라구!!!



"집에 있는 걸 읽어!" "집에 있는 걸 읽으라구!!" 여러 번 나를 다그쳤다.........

하지만 난 리커버 특별판을 사고야 말았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역자가 '안정효'이던데 그렇다면 영어 중역??

아, 그래, 그래 스페인어 전공자가 옮긴 책으로 읽어야지..... 암, 그래 그래-

이딴 생각(핑계)으로 리커버 판을 주문한 것이다.


책을 받아보니 그 만듦새에 일단 만족했다.


자, 이제 드디어 <백년의 고독>을 읽어야지-


어쨌든;; 새해에는 책을 한동안 사지 않겠다던 결심은 작심삼일은 넘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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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1-06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르케스의 소설 꼭 완독하길 바랍니다. ^^

잠자냥 2018-01-06 15:49   좋아요 0 | URL
네, cyrus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꼭 완독하고 리뷰도 쓰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18-01-08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년의 고독>은 탁월한 선택입니다.
저도 안정효 번역을 읽었고, 다시 읽어볼까 말까 고민중입니다. ㅎㅎㅎ

잠자냥 2018-01-08 12:14   좋아요 0 | URL
네, 보통 제 주변에서 이 책 읽은 친구들은 10대나 20대 때 읽었다던데, 전 이렇게 완전한 성인이 되어서 읽으면 더 좋을 것이라고 ㅋㅋㅋㅋ 믿고(위로하고?) 있습니다. ㅋㅋㅋ
 
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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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와 제시카 쌍둥이 자매의 삶이 남성들로 인해 어떻게 산산이 파괴되어 가는지 낱낱이 해부한 책. ‘레티시아 사건은 21세기의 타락한 남성성, 남성들의 독재, 흉측한 부성, 좀처럼 죽지 않는 가부장제의 유령을 드러냈다’(448쪽). 여성혐오 범죄의 본질을 집요하게 추적한, 가슴 아픈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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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접한 악마 창비세계문학 27
표도르 솔로구프 지음, 조혜경 옮김 / 창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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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라는 바다에서는 끊임없이 보물이 나온다. 물론 보물을 건지는 일은 전적으로 탐험가의 손에 달렸다. 탐험가가 보물이 파묻힌 곳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그는 보물을 건질 확률이 다른 이들보다 더 높을 것이다. 문학의 영역에서 보물이 있을 만한 지역을 골라본다면 러시아는 절대 어느 지역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널리 알려진 수많은 러시아 작가의 이름을 나열하는 일이 지금 의미가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생각나는 러시아 작가 이름을 대보라고 한다면 당신 또한 적지 않은 이름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표도르 솔로구프. 이번에는 이 이름을 그 바다에서 건졌다. 사둔지는 꽤 되었는데, 미루다가 이제야 읽었다. 가장 큰 소감은 ‘러시아라는 바다, 문학의 보물창고’ 와도 같은 그곳에 대한 감탄이었다. 이런 작가가 숨어(?) 있었다니! 아니, 숨었다는 말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내가 미처 몰랐을 테니까. 이 새로운 작가를 읽게 된 계기는 순전히 뒤표지에 쓰인 문구 때문이었다. ‘인간 내면의 비열한 악마성과 추악한 현실 속, 악의 형상화 도스토예프스키를 잇는 가장 완벽한 러시아 소설’


책장을 펼치자마자 의미심장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난 사악한 여자 마법사를 불에 태우고 싶었다.’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착한 소설, 감동으로 독자를 감화할 작품은 아니라는 느낌이 확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1장부터 <허접한 악마>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굉장히 ‘고약한 소설’이다. 시작부터 인간의 온갖 비열하고 추접한 근성이 여과 없이 폭로된다. 아니, 폭로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일상생활 속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어떤 장소에 이런 인간들만 모여 있다면 정말 단 한 시간이라도 그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뛰쳐나올 것만 같다. 그런데 사실 잘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런 속성을 지니지 않았던가? 단지 그러지 않은 척, 잘 포장하고 있을 뿐.


그런데 <허접한 악마>의 인물들은 그런 포장을 모른다. 악하고 못된 모습 비열하고 야비하고 저속하고 이기적인 온갖 모습을 ‘그냥’ 드러낸다. 주인공인 중학교 교사 ‘뻬레도노프’는 그중 단연 독보적이다. 이 인간은 장학사가 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꿈이다. ‘그는 어찌 되었든 간에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았고 사람들을 싫어했으며 자신의 이익 및 만족과 연관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19~20쪽)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자유사상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책이 보이도록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어떠한 견해도 없었고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88쪽)은 그런 인간이다. 다음과 같은구절을 읽노라면 그의 인간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뻬레도노프는 천상에서 전해지는 이런 낯선 풍경 가운데 더럽고 무기력한 지상의 거리들과 집들이 풍기는 나른함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 때문에 지쳐갔다. 그는 숭고함도 지상에서의 어떤 위로도 찾지 못했다. 지상의 고독 가운데에서 두려움과 애수에 지친 악마처럼 죽은 자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감정은 무뎌졌고 그의 인식은 타락과 파멸의 수단이 되었다. 그가 인식하기 이전에 그에게 도달하는 모든 것은 비열하고 더러운 것으로 바뀌었다. (.....) 그는 깨끗하고 곧은 기둥 옆을 지나갈 때면 그것을 구부리고 더럽히고 싶어졌다. 사람들이 그 기둥을 뭔가로 더럽힌 것을 발견할 때면 기뻐서 웃음이 나왔다. 그는 깨끗하게 씻은 중학생들을 증오했고 그들을 괴롭히고 싶어 했다. 그는 더러운 것을 더 잘 이해했다. 좋아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물건도 없었다. (143쪽)


뻬레도노프는 자기 능력으로 장학사 자리를 차지하려는 게 아니라,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꾼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비열한 인간은 생긴 건 또 반반한지 여자들이 줄을 선다.  늙고 못생긴 ‘바르바라’ 또한 그런 여자 중 하나이다. 바르바라는 뻬레도노프의 장학사 자리를 꿰차고 싶어 하는 그 속물근성을 훤히 꿰고 있다. 공작부인과의 확인되지 않은 친분을 이용해 ‘공작부인이 자신과 결혼하면 당신에게 장학사 자리를 약속’하셨다고 뻬레도노프를 흘린다. 뻬레도노프는 그 이야기에 물론 솔깃하고, 바르바라와 결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에 빠진다. 이런 그들 사이에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는 보통 다음과 같다.



“주근깨 아가씨요? 개구리가 친구 하자고 할 정도로 입이 큰 아가씨죠.”
바르바라는 점점 악의에 가득 차서 말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너보다 아름답지. 그 여자를 택해서 결혼할 수도 있어.”
뻬레도노프가 말했다.
“그 여자와 결혼한다면 그년의 눈깔에 염산을 확 뿌려버릴 거야!”
바르바라는 분노에 가득 차서 얼굴을 붉히고 몸을 떨면서 말했다.
“네게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데.”
뻬레도노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뱉지 마!”
바르바라가 소리쳤다.
“뱉을 건데.” (33쪽)


문학 작품 속에서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연인(?)의 모습은 거의 처음인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은 작품 속에서 내내 거의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를 결혼 상대자로서 1순위에 놓고 있는 것이다. 물론 뻬레도노프는 장학사 자리를 노리는 게 가장 크고, 바르바라는 늙고 못생긴 외모로 누구 하나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는 처지에 뻬레도노프 정도의 남자를 ‘장학사’ 카드로 낚을 수 있다는 욕심 때문에 쉽사리 그를 포기하지 못한. 뻬레도노프와 바르바라는 과연 서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뻬레도노프라는 인물 그 자체에 있다. 이 인간은 교사라는 직분을 그저 중학생들을 괴롭히는데 쏟는다. 가정 방문까지 하면서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부모 앞에서 해당 학생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그 학생이 부모에게 혼나는 광경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즐긴다! 게다가 바르바라 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서 집에 있는 고양이도 곧잘 학대한다. 이렇게 혐오스러운 캐릭터도 정말 오랜만이다.

그러면서도 이 인간은 바르바라가 자신을 독살할지 모른다는 망상, 동료가 자신의 지위를 노려 자기의 치부를 밀고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날마다 시달린다. 가학과 피학 성향은 물론 비루한 속물근성에 병적일 정도의 피해의식까지! 정말 인간의 온갖 나쁜 습속은 그 안에 모두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기괴한 모습을 두루 갖춘 뻬레도노프는 문학 작품 속에서 쉽사리 만날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하고 <허접한 악마>에 생생함을 불어넣는데 큰 역할을 한다. 온갖 악랄함을 사랑하는 뻬레도노프 그 자신이 바로 ‘허접한 악마’일 텐데, 만일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작품을 읽었더라면 이 인물에 크게 감탄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이다.
 
한편 <허접한 악마>는 뻬레도노프와 바르바라로 대변되는 온갖 저열한 세계와 상반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뻬레도노프의 제자인 중학생 소년 싸샤와 자유분방한 아가씨 류드밀라의 사랑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류드밀라는 한때 뻬레도노프와 혼담이 오가기도 했는데, 청순한 미소년 싸샤를 보고는 반해버려 그를 타락의 길로 이끈다. 싸샤는 처음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타락한 인간 뻬레도노프와 반대되는 인물로 순수함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그도 시간이 갈수록 류드밀라와의 유희 속에서 점차 그 순수함을 잃어간다.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엇갈리듯 교차하다가 막판에 가면무도회라는 ‘난장판’속에서 마침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인다. 그러면서 인간 세계에서 순수함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속되고 허망한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사건으로 귀결된다. 이 두 개의 이야기를 각자 전개해나가다가 하나로 모아서 폭발시키는 작가의 능력 또한 대단하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허접한 악마’인 뻬레도노프를 그저 미워할 수많은 없는, 독특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실제로 이런 인물이 곁에 있다면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싫을 것 같은데, 작품으로 그의 행동을 엿보고 있노라면, 이 가련하고 허접한, ‘악마’조차 되지 못하는 비루한 인간에게 묘한 연민이 들기도 한다. 인간이라면, 이 세계를 살아가노라면 한두 번쯤은 그렇게 행동하거나 생각했을 수밖에 없는 속물적인 보통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그가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 누구에게 돌을 던지랴,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하랴, 누구에게 혀를 끌끌 차랴….

도스토예프스키가 창조한 병적인 인물들과 함께, 이반 곤차로프 <오블로모프>의 침대를 떠날 줄 모르는 남자 ‘오블로모프’- 그리고 표도르 솔로구프의 허접한 악마 ‘뻬레도노프’는 문학 작품이 창조한 가장 잊기 힘든 주인공일 것이다. 이렇게 독특한 인물을 발견하고, 그런 인물들이 엮어나가는 온갖 사건 속에서 생의 진실을 마주하는 행운이 끊임없이 이어지기에 러시아 문학을 읽는 일은 무척이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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