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좋았던 책들을 이미 골랐으므로 이제 와서 2019년에 좋았던 책 리스트를 다시 뽑는 게 무의미한 것 같다. 얼마 전, K문고에서 ‘통곡의 리스트’라고 ‘인문MD가 반드시 팔아야 했지만 실패하고만, 못 판 게 천추의 한이 되어 매일 밤 꿈에 나타나는’ 책 리스트를 골라서 불씨 살리기에 힘쓴 것 같던데, 그래서 나도 나만의 ‘소설 통곡의 리스트’를 골라 보았다. 2018년~2019년 사이에 출간된, 좋은 작품임이 틀림없는데, 잠깐 반짝하거나, 그마저도 되지 않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아까운 책이라고나 할까. 물론 내가 교보문고 ‘통곡의 리스트’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 책이 있었던 것만큼, 내 리스트를 보고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외르케니 이슈트반, <장미 박람회>
2019년에 내가 주목하게 된 출판사 중 한 곳이 ‘프시케의숲’이다. 이 출판사는 서보 머그더의 <도어>를 냈는데, 주로 이렇게 우리에게 덜 알려진 동유럽 문학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장미 박람회>도 그중 하나. 재미도 있고, 나름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져준다. 인간의 죽어가는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다면 어떨까? 이 작품은 지식인, 노동자, 예술가 세 사람의 죽음을 다큐멘터리로 찍어 방송하는 내용을 소재로 삶과 죽음, 예술의 문제를 질문한다. 중간중간 웃음 터지는 부분도 많은 블랙코미디. 죽음은 단 하나의 진실인데 그걸 담은 예술도 진실일까? <도어>와 <장미 박람회> 말고도 이 출판사의 모리츠 지그몬드, <내 이름은 미시>도 도서관에 신청해서 조금 읽다가(반납기간 다 되어서 일단 반납했는데, 다시 완독할 예정이다). ‘프시케의숲’의 동유럽 소설들, 문학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놓치지 마시길!
케이트 쇼팽, <셀레스틴 부인의 이혼>
20세기 페미니스트 소설의 선구자로 불리는 케이트 쇼팽의 작품이 속속 다시 나오고 있다. 얼마 전에는 열린책들에서 <각성>도 나왔다. 이 책에는 웬만한 그이의 단편이 한 권에 실려 있다. 이 책 속 그녀들은 꿈꾸고 사랑하고 관습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관습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마는 일도 잦지만 그럼에도 여기 실린 작품들이 19세기에 쓰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상당히 급진적이다. 비단 여성 문제뿐만 아니라 인종, 계층, 전쟁 문제까지 두루 다루고 있다.
젤다 세이어 피츠제럴드, <젤다- 그녀의 알려지지 않은 소설과 산문>
이 책! 정말 이대로 이렇게 묻힐 책이 아니다. 그건 젤다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여러분들아, 이 책 읽고 젤다와 그녀의 남편 스콧 피츠제럴드를 다시 보는 계기를 마련하시라! 표지에서 ‘피츠제럴드‘ 이름을 지워버린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가 젤다를 정신병으로 몰아갔을까? 피츠제럴드는 전혀, 정말 아무 상관이 없을까? 젤다의 이 작품들, 그녀의 억눌린 삶 때문에 앞으로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을 예전처럼 온전히 즐길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사랑한다.
글렌웨이 웨스콧, <순례자 매-어느 사랑 이야기>
읽을 때는 잘 모르겠는데, 읽고 나서 더 생각나는 작품이 있다. 이 책이 그렇다. 사랑과 부부 및 인간 관계에 대해 곱씹게 되면서 묘하게 여운이 남는다. 어느 부부와 그들 사이에 끼어든 아름다운 매 한 마리. 이 기묘한 삼각관계를 통해 사랑의 한계와 비극성, 결혼 제도의 불합리함, 인간 관계의 모순 등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은유와 상징이 넘치는 문장들, 그 깊이를 헤아리는 것은 모두 독자의 몫. 장담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질 것이다.
토베 얀손, <여름의 책>
이 책은 사실 나만의 ‘통곡의 리스트’에 들어갈 정도는 아닌데(잘 팔리고 있는 듯), 2019년 하반기에 좋았던 책 리스트를 작성하고 난 뒤에 읽는 바람에, ‘하반기에 좋았던 리스트’에 끼지 못한 불행한 책이다. 충분히 그 리스트에 들어가고도 남을 책이다. ‘무민’의 동화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토베 얀손이 더 궁금해지는 책. 너무나도 맑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와 손녀 소피아가 툭툭 무심하게 나누는 대화들이 정말 압권이다. 큭큭 웃다가도 그 철학적 깊이에 감탄하게 된다. 읽는 내내 얼굴 가득 미소가 지어지는데, 어느 순간 슬픔이 차오른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듯, 할머니도 언젠가는 떠나야 하니까.
진 리스, <어둠 속의 항해>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애나를 비롯해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남자와 결혼하려고 노력하거나 로리처럼 사실상 매춘을 하는 것, 또는 서른을 넘긴 애설이 그러하듯 손톱 손질을 내세운 간접적인 매춘 사업을 하는 것으로 삶을 연명한다. 가난한 하층 계급 여성에게 그 밖의 선택은 없다. 이 척박한 삶이라는 ‘어둠 속의 항해’에서 애나를 그 무엇보다 무섭게 만드는 것은 돈의 힘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자본주의가 팽배한 이 사회에서 하층계급 여성으로서 살아가기란 그리 쉽지 않다. 애나는 ‘괜찮아질 거야.’ 스스로 위로하고, 내일은 다를 것이라고 기대도 해보고 다짐도 해보지만 그녀가 어둠 속을 항해하는 일은 끝없이 암울해 보이기만 한다. 진 리스가 살았던 세상은 여자에게 곧 ‘어둠’이자 ‘한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그렇게 살아간다. 가진 것 없는 젊은 여성이 처절하게 버티고 견디는 가혹한 삶, 그 기록이 너무나도 절절하다.
베시 헤드, <권력의 문제>
읽기 수월하지는 않다. 그런데 읽고 나면 다 읽었다는 쾌감과 함께 아, 이래서 책을 읽지! 하는 기쁨이 동시에 느껴지는 작품. 베시 헤드의 자전적 이야기. 그녀의 실제 삶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 작품이 그저 소설로만 읽히지는 않는다. 이토록 절망적인 아프리카 땅에 산다면 그 누구라도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섣불리 단정할 수 없는 선과 악, 거기서 비롯되는 모든 권력들. 신은 과연 그곳에 존재하는가? 이토록 묵직한 질문을 아주 독특한 화법으로 질문한다.
아시아 제바르, <프랑스어의 실종>
이 책은 서재 이웃인 폴스타프 님이 극찬하기도 해서 몇몇 분이 읽어보려고 도전하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지배자의 언어인 프랑스어와 모국어인 아랍어 두 경계에 놓인 ‘베르칸’- 프랑스여인 ‘마리즈’와 프랑스어를 말할 줄 아는 아랍여인 ‘나지아’ 두 여인과의 사랑을 통해 언어와 여성의 문제, 알제리 근현대사를 조명한다. 일본 식민 지배를 받았던 우리로서는 이 작품에 더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을 듯. 이 책을 읽고 나면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 과연 진정한 소통, 사랑이 가능할까 의문이 든다.
조지 기싱, <이브의 몸값>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그리 새롭지 않다. 너무나도 익숙한 주제와 결말이다. 그럼에도 기싱의 산문이 아닌,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쁜 작품이다. 이 책을 읽는 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힐리아드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또 누군가는 이브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상대를 나쁜 남자라고 또는 나쁜 여자라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 모두 436파운드라는 그리 많지 않은 돈으로 ‘인간의 자유를 살 수 있다’고, 아니 한때나마 그럴 수 있다고 믿은 가엾은 청춘들일 뿐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궁핍한 생활로 늘 전전긍긍하며 고통받았던 조지 기싱, 그의 초상을 엿볼 수 있다. 인간에게 돈은 과연 무엇인가, 돈으로 인간의 완전한 자유를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후안 마요르가, <맨 끝줄 소년>
‘맨 끝줄’이란 ‘아무도 거기는 보지 못하는데, 거기서는 모두를 볼 수 있는’ 장소이다.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클라우디오와 헤르만은 둘 다 그 자리에서 앉아본 경험이 있고 글쓰기를 좋아하거나, 작가가 되기를 꿈꿔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다. 짧은 이야기이지만 굉장히 풍부한 해석의 여지를 담고 있다. 글쓰기와 실제 삶, 현실과 상상, 작가와 독자, 예술과 현실 등등 미로를 헤매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작품. 동명의 연극이나 오종의 영화 <인 더 하우스>와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글 쓰기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
애니 프루, <시핑 뉴스>
예전에 한번 출간된 적이 있어서 이 책은 조용히 묻힌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예상 가능한 결말이라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데, 애니 프루, 정말 글 잘 쓴다. 인생 실패자, ‘코일’. 그가 어쩌다 보니 척박한 자연환경이 전부인 ‘뉴펀들랜드’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이 남자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읽다 보면 온갖 실패와 상처 속에서도 천천히 나아가, 마침내 자기만의 행복을 찾게 되는 이야기에 미소 짓게 된다. 서정적이면서도 우아한 문체가 아름답다. 특히 앞부분에서 코일을 묘사하는 문장은 압권.
E. L. 닥터로 <빌리 배스게이트>
이 책은 내가 여러 번 언급했다. 재미있고 잘 썼는데, 이상하게 주목 받지 못하는 저주받은 작품이다. E. L. 닥터로, 작가 자체가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무지하게 없는 것 같기도. 범죄와 부패를 먹고 성장하는 소년 빌리를 통해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을 고발한다. “훨씬 더 큰 갱들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빌리의 깨달음이 이 작품의 핵심이 아닐까. 그저 흥미진진한 느와르 소설로만 읽기에는 너무나도 고급진 작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대부’ ‘아이리시맨’ 등 느와르 영화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번 도전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