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페스트>를 다시 읽은 이유는 순전히 요즘 상황 때문이다. 오래 전 읽은 이 책을 사실 또 읽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민음사에서 나온, 선명하게 쥐가 새겨진 리커버판은 그 상징적인 이미지 때문에 소장용으로 간직하려고 사둔 책이었다. 그런데 요즘 문득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놀랐다. 페스트가 창궐한 오랑시와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이 땅이, 아니 이 지구가 어쩌면 이토록 똑같단 말인가. 카뮈에게 또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라 <페스트>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내가 이번에 주목해서 읽은 부분은 전염병이 창궐하고, 그에 따른 한 도시 공동체의 변화이다. 애초에 중국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불길한 전조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페스트>의 오랑시처럼 말이다. 이 작품은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자기의 진찰실을 나서다가 층계참 한복판에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로 시작한다. 죽은 쥐 한 마리.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리유 또한 당장에는 특별한 주의도 하지 않은 채 죽은 쥐를 발로 밀어 치우고 층계를 내려간다. 그럼에도 쥐가 나올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수위인 미셸 영감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그런데  미셸 영감의 반응을 보자 예삿일이 아닌 것 같다. 쥐가 여러 마리 보였다는 것이다.

같은 날 저녁 집으로 올라오다가 리유는 복도의 어두침침한 곳에서 또 다시 큰 쥐 한 마리를 발견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쥐가 그를 향해 달려오다가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는 게 아닌가. 리유는 기이하다고 생각한다. 쥐가 ‘피를 토하고’ 죽어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그 다음 날부터 죽은 쥐는 곳곳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발견된다. 쥐들이 쓰레기통에 쌓인 채, 아니면 도랑 속에 길게 열을 지은 채 기다리는 판국이다. 사람들도 조금씩 동요한다.

석간신문에서도 기사를 다루고, 과연 시 당국은 행동을 개시할 용의가 있는가 없는가, 구역질나는 쥐 떼들의 침해로부터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는가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 당국은 아무런 제안도, 대책도 마련한 것이 없었지만 우선은 회의를 열기로 한다. 그러는 사이 사태는 점점 더 심각해진다. 라디오방송을 통해 4월 25일 단 하루 동안에 쥐 6,231마리가 수거, 소각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 도시에서 매일같이 눈으로 보고 있는 광경의 분명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그 숫자는 사람들 마음속 혼란을 더욱 가중한다. 이제까지만 해도 그저 좀 불쾌한 사건이라고 투덜거릴 정도였는데, 원인을 알 수 없는 그 현상에는 왠지 무시무시한 구석이 있어 보인다.

4월 28일 약 8,000마리의 쥐를 수거했다는 뉴스가 발표되자 도시의 불안은 절정에 이른다. 사람들은 근본 대책을 세우라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고, 바닷가에 집을 가진 몇몇 사람들은 그곳으로 피난 갈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튿날 언론은 그 현상이 갑자기 멎었고, 죽은 쥐 숫자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감소했다고 보도한다. 석간신문을 파는 판매원들이 쥐들의 침해는 완전히 끝났다고 외치기 시작한다. 마침내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바로 그날 의사 리유는 수위 미셸의 죽음을 목도한다. 그는 고통스럽게 죽어가며 “쥐들!”하고 내뱉는다.

쥐가 죽어나가는 일이 멈추자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헛소리를 해대더니 아무 데서나 구토를 했다. 그런 이들은 온 몸이 멍울투성이고, 그 멍울은 곪기 시작하다가 이내 썩은 과일처럼 갈라졌다. 이런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은 하나같이 피를 흘리며 사지를 비틀었다. 배와 다리에 반점이 돋아나면서 멍울들은 곪지 않게 되었다가 곧 다시 부어올랐다. 대부분의 경우 환자들은 끔찍한 악취를 풍기며 죽어간다.


쥐들의 사건을 가지고 그렇게 떠들어 대던 신문이 이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쥐들은 눈에 띄는 거리에 나와 죽었지만 사람들은 방 안에서 죽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문은 오직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62쪽)


언론과 달리 도청과 시청에서는 의문을 느끼기 시작한다. 불과 며칠 동안에 사망 건수가 몇 배로 불어났고 의사들은 믿기지 않지만 그것이 ‘페스트’라고 추측한다. 역사상 알려진 약 서른 차례의 대규모 페스트가 일억에 가까운 인명을 빼앗아 갔다. 그러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양에서는 ‘그것’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증상은 페스트가 틀림없다. 그러나 의사들도 시당국도 그 ‘유행병’을 섣불리 ‘페스트’라 부르지 못한다. 그만큼 꺼림칙한 것이다.


“솔직하게 당신 생각을 말해 주시오. 당신은 이것이 페스트라고 확신합니까?”
“질문을 잘못하셨습니다. 이건 어휘 문제가 아니고 시간문제입니다.” (87쪽)


다행스럽게도 유행병은 수그러져 가는 듯싶었다. 며칠 동안 사망자 수는 불과 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당국도 안도하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 또한 불길한 전조였을 뿐이다. 갑자기 병이 급속도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고, 사망자 수가 다시 서른 명으로 늘어난 날, 의사  리유는 “저들이 겁을 먹었소.”하며 지사가 내미는 전보 공문을 받아 읽는다. 전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

불길한 전조가 보이고, 몇몇 의사는 그 전조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왠지 꺼림칙한 현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언론이 호도하고, 당국은 그 전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다가, 또는 섣불리 낙관하다가 사태를 키우고, 결국 오랑이라는 한 도시를 봉쇄하는 극단 조치를 취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중국 우한이나 요즈음 이 땅의 사태와 놀랍도록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카뮈의 <페스트>가 이런 사태를 나열하는 데 그쳤다면 이 작품은 하나의 르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페스트>가 오늘날까지 손에 꼽히는 명작으로 남은 까닭은 그 안에 갇힌 ‘사람들’에 주목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써 나가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과정들은 이 작품의 시작 부분에 속한다. 페스트로 봉쇄된 도시에 남은 인간 군상들, 의사인 ‘리유’를 비롯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지만 오랑에 머물고 있는 ‘장 타루’, 사랑하는 이와 갑자기 생이별을 당하게 된 신문기자 ‘랑베르’, 시의 말단 공무원 ‘그랑’, 신부 ‘파늘루’, 페스트가 일어나기 전 자살을 시도했다가, 페스트가 번지자 오히려 평온을 되찾은 기이한 사나이 ‘코타르’까지. 이 인물들이 서로 얽히면서 빚어내는 이야기들이 이 작품을 하나의 명작으로 만들어낸다.

요즘 우리나라 사태와 견주어서 <페스트>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신부 ‘파늘루’의 존재이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꼭 그것을 종교와 연관 지으려는 이들은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는가 보다. <페스트>에서 파늘루 신부가 그런 존재이다. 페스트가 속수무책으로 번지자 오랑시의 고위 성직자 측에서는 집단 기도 주간을 설정함으로써 그들 특유의 방법으로 페스트와 싸우기로 한다. 그 기회에 파늘루 신부는 설교를 위촉받고 예배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 형제들, 여러분은 불행을 겪고 계십니다. 여러 형제들, 여러분은 그 불행을 겪어 마땅합니다.” 출애굽기 한 구절을 인용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 재앙이 처음으로 역사상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신에게 대적한 자들을 쳐부수기 위해서였습니다. 에굽왕은 하느님의 영원한 뜻을 거역하였는지라 페스트가 그를 굴복시켰습니다. 태초부터 신의 재앙은 오만한 자들과 눈먼 자들을 그 발아래 꿇어앉혔습니다.”(154쪽) 이 얼마나 ‘신천지’스러운가! 역병이 죄 많은 인간에게 내려진 형벌이라고, 그런 이들은 죄받아 마땅하다고 외치던 이 신부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폐쇄 이후의 오랑시, 페스트의 지배 아래 들어간 이 도시에서는 이제는 누구도 거창한 감정을 품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이 단조로운 감정만 느끼게 된다. 그들이 느끼는 공통 감정은 ‘생이별과 귀양살이’이다. 거기에는 일종의 공포와 반항이 깃들어 있다. ‘항상 나보다 더 부자유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무렵에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페스트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심지어 우정을 나눌 힘조차도 빼앗아가 버린다. 연애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미래가 요구되어야 하는데, 이들에게는 ‘현재의 순간 이외에는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제 꿈속에서밖에는 희망을 품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놈의 멍울, 이젠 좀 끝장이 났으면!’하고 생각할 정도로 페스트에 온통 자신을 맡겨 버린 상태가 된다. 이 질병의 무지막지한 침범은, 그 첫 결과로서 시민들을 마치 사적인 감정 같은 것은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112쪽)

의사인 리유조차 페스트 생각을 할 때마다 매번 일어나는 가벼운 현기증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 또한 자신이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카페에  두 번이나 들어간 것을 상기하고 후회하곤 한다. 그럼에도 그가 카페를 찾아갔던 이유는 오직 하나이다. 접촉이 거의 불가능한 그 시기에 ‘인간의 훈훈한 체온’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인간의 훈훈한 체온’에 <페스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도시는 폐쇄당하고 사람들은 격리된 채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려하게 되고, 벼룩을 옮긴다는 이유로 개와 고양이를 총으로 쏴 죽이는 지경. 그럼에도 그들 중에는 분명 이 도시에서, 페스트라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이곳에서 누군가를 위해 행동한다. 스스로 ‘보건대’를 만들어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이 무너지는 공동체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싸움을 시작한다. 자신은 이 도시 사람이 아니라고, 저 바깥에 사랑하는 이가 있다고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던 랑베르조차 어느 순간 자기만 행복하기는 부끄럽다며 오랑시에 남기를 선택한다. 그 누구라도 인간에게는 그러한 면이 있다. 있다고 믿는다. 파늘루 신부가 말한 것처럼 죄받아 마땅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나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한 면은 하나쯤 있다고 믿는다. <페스트>에서는 그런 진실을 전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 싸움에서 인간은 쉽게 지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지구 곳곳에서 혐오가 넘치고 있다. 그 혐오가 페스트보다도, 코로나바이러스보다도 더 심한 독이 아닐까. 이 작품 끝 무렵에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만다”는 말은 그래서 더 마음에 남는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일반적인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261쪽)

자기는 죽음의 세계 한가운데서도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 죽음은 하늘로부터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그와 같은 것이니 페스트와 완전히 격리된 섬이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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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4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4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0-03-05 08:39   좋아요 0 | URL
결과적으로 땡투 했습니다. 고양이 낸시도 했는데. 히히.

잠자냥 2020-03-05 10: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ㅎㅎ

2020-03-11 1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12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자책] 가랑비 속의 외침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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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상처에 관한 이야기. 웃다가 분노했다가 쓸쓸했다가 한없이 연민이 드는 인간 군상들. 책장이 어떻게 넘어가는지 모를 만큼 흡인력 있다. 중국 소설을 딱히 좋아하지 않아서 위화 작품도 이제야 처음 읽는데, 그의 모든 작품이 다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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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20-03-04 1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잠자냥님 표현은 최고네요. 이 책은 정말 읽는 내내 웃기다가 화났다가 쓸쓸했다가 슬펐다가 근데 또 재밌기까지 해요.

잠자냥 2020-03-04 13:35   좋아요 1 | URL
케이 님 덕분에 좋은 책 읽었어요. ㅎㅎ

잠자냥 2020-03-04 14:41   좋아요 1 | URL
그런데 정말 쑨광차이..... 정말!!!!! 휴... 그런 인간도 있겠지요? 있을 거예요..... -_-

케이 2020-03-04 15:57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엔 쑨광차이보다 더한 개자식도 수백 수천명 있다고 봅니다. -_-;;;;
 
고양이 낸시 (스티커 포함)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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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첫째 고양이를 만나게 된 이후로 나는 완전히 고양이 덕후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쁜 존재가 고양이라고 말하는 지경이다. 얼마 전에는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이 지구가 너무 심심하고 못난 것들로만 가득해서 단 하나 예쁘고 재미난 녀석들을 창조해야겠다, 결심하고 만든 녀석들이 바로 고양이’일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지금 나는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우고 있다. 아니 세 마리와 함께 지낸다. 모두 길에서 데려온 아이들. 엄마에게 버림당해 빽빽 울고 있던 녀석들이 지금은 내 집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늑한 곳을 찾아 한낮의 게으른 잠을 즐기고, 지들끼리 우다다 뛰놀기도 하고, 집사에게 예뻐해 달라고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세 마리가 모두 어느 날 문득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마치 <고양이 낸시>의 ‘낸시’처럼 말이다. 그런데 아기 고양이 낸시는 나와 같은 인간 집사의 집 앞에 버려진 것이 아니다. 낸시가 버려진 집 앞은 무려 평범한 쥐 가족의 집이다!

쥐의 천적이라는 고양이! 바로 그 고양이의 새끼가 집 앞에 버려져 있다니, 쥐들이 얼마나 놀랬으랴. 그럼에도 낸시를 처음 본 더거 씨는 가여운 아기 고양이 낸시의 귀여움에 홀딱 반해 낸시를 덜컥 집 안으로 들이고 만다. 아들 지미도 낸시를 보고는 완전히 반하고 만다. 너무 너무 귀여운 것이 아닌가! 사실 아기 때부터 우리 고양이들을 키워온 나로서는 아기냥의 그 귀여움을 공감하고도 남는다. 우주 최강의 귀여움이랄까. 그렇지만 나는 고양이보다 훨씬 덩치 큰 인간 집사, 그에 비해 더거 씨와 그의 아들 지미는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고양이 낸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다니 정말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다.

낸시의 귀여움에 반한 더거 씨 가족이야 그렇다 쳐도, 산 넘어 산. 마을 사람들의 눈은 어찌 피할 수 있을까? 자기들 마을에 아기 고양이가, 그렇지만 무럭무럭 성장해 언젠가는 큰 고양이가 되어 자신들을 위협할 그런 존재가 나타났다고 하면 그 누가 반길 수 있을까. 당장 목숨이 위협을 받는데 말이다. 더거 씨는 이런 염려 때문에 낸시에게 줄 우유를 살 때도 남몰래 비밀에 부친다. 하지만 이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마을 사람들은 곧 낸시의 존재를 알아차리는데! 와우, 놀라워라. 더거 씨의 걱정과는 달리 모두가 낸시의 귀여움에 반해 스르르 두려움도 공포도 잊은 채 낸시를 받아들이게 된다. 물론 그 와중에도 걱정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존재하지만....... 이런 틈바구니에서 낸시는 무사히 쥐들과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쥐들이 낸시와 아무 일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런 과정을 잔잔하고 귀여운 에피소드들로 그려나간다.

<고양이 낸시>의 주인공은 어떻게 보면 ‘낸시’라기보다는 낸시를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대해주는 더거 씨와 지미, 그리고 마을 쥐들이 아닐까. 그들의 따뜻한 이해와 환대, 사랑이 없었다면 낸시가 그토록 귀엽고 다정하고 섬세한 고양이로 자랄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아끼고 사랑해주는 존재들을 ‘본능’이라는 이유로 ‘사냥감’으로 생각해서 쫓아다니고 괴롭히거나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이해’와 ‘사랑’, ‘존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쥐’가 아닌 ‘인간’이다. 그럼에도 낸시처럼 귀엽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살고 있다. 더거 씨와 지미에게 소중한 가족이 된 ‘낸시’처럼 내 고양이들도 내겐 세상 둘도 없는 사랑하는 가족이다. 그러나 쥐와 고양이처럼, 인간과 고양이도 엄연히 종(種)이 다르다. 얼핏 생각해서, 고양이 기준으로 봤을 땐 인간이 쥐에 비해 덩치도 크고 뭔가 도구도 잘 쓰니까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인간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읽기로 고양이들은 인간 집사를 털도 나지 않은, 아직 덜 자란 덩치만 큰 아기 고양이라 생각해서 자신들이 돌봐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지 않는가. 실제로 그래서 서열이 높은 고양이가 낮은 고양이에게 주로 해주는 그루밍을, 고양이가 인간에게 해주는 일도 드물지 않다. 나만 해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우리 둘째 고양이에게 그루밍당해서 침범벅이 되곤 한다. 그럴 때 나는 녀석에게 “엄마! 회사 갔다 올게요.”하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러니 종을 뛰어넘어서 인간과 고양이가 애정을 나누듯이, 쥐와 고양이 또한 그런 관계가 가능하고도 남지 않을까.

<고양이 낸시>는 이렇게 남들이 보기엔 서로 적이라고 생각되는 대상인 고양이와 쥐의 우정과 사랑을, 그것도 돌보는 고양이, 돌봄당하는 쥐가 아닌, 작은 쥐들이 덩치 큰 고양이를 돌본다는 설정을 통해 ‘나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차별 없이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소중한 관계가 되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나간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따뜻하고 인정 넘치는 쥐 마을의 쥐들과 같다면, 이 지구에 폭력과 혐오라는 단어는 몽땅 사라질 텐데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우리 고양이들에게도 분홍색 리본 머리핀 꽂아주고 공주님놀이를 하자고 해볼까 싶은데, 녀석들은 우다다 뛰기를 더 좋아하는 철부지들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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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3-02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땡투땡투!! >.<

잠자냥 2020-03-02 22:28   좋아요 0 | URL
아마 이 책은 다 읽고 조카에게 주셔도 괜찮을 거 같아요. ^_^

다락방 2020-03-03 11:58   좋아요 0 | URL
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구매하려는 것입니다! >.<
 

요즘 뉴스를 보면 몇 년 뒤에는 ‘기레기’라는 단어가 정식으로 국어사전에 오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나라 언론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했지만, 코로나 관련 쏟아지는 기사만 보면 언론사는 물론 이 땅의 기자들도 진심으로 그 자질이 의심스럽다. 한국 언론인 중에 ‘기레기’라는 단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기자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더 저널리스트> 시리즈를 읽다 보면 이 시대에 우리나라에 이런 기자들은 왜 없는 걸까 싶어져 한숨이 밀려온다. 이 시리즈가 지금까지 다룬 인물로는 헤밍웨이, 조지 오웰, 마르크스가 있다. 처음 나왔을 때부터 이 시리즈를  좋아하고 아꼈던 나로서는, 시리즈가 새로 발간될 때마다 다음에는 어떤 작가가 기자로서의 모습이 부각될까 기대하곤 했다. 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이들이 누가 있지? 생각하며 다음 권에 소개될 이를 마음속으로 점찍어 보기도 했다. 이 시리즈의 3권이자 마지막으로(여기서 멈춘다니 안타깝다!) 소개된 이는 ‘카를 마르크스’이다.

세 번째 주인공이 마르크스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조금 놀랐다. 헤밍웨이나 조지 오웰에 비해 뜻밖이었다고나 할까. 물론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에서 일한 이력도 있고, <뉴욕 데일리 트리뷴> 유럽 특파원 자격으로 10여 동안 유럽 정세에 관한 보고를 미국에 보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저널리스트’로서 마르크스의 모습이 조금 낯선 까닭은 아마도 그가 사상가로서 아주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탓일 것이다. 실제로 이 책, <더 저널리스트:카를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이념 편향적으로만 소비되어 온 마르크스의 이미지가 아닌 저널리스트의 모습을 소개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에 따라 마르크스가 언론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물질적 이해관계에 눈을 뜨고 현실 문제들을 인식, 저널리즘 같은 결과물을 통해 어떤 과정으로 그의 사상을 구체화해 나갔는지를 좇는다.

이 책에 실린 17편의 기사들을 읽노라면 자본주의의 폐해와 자본가 계급의 이중성을 고발하며 노동자 계층과 서민의 삶을 다루고 알리는 데 주력한 마르크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마르크스는 ‘팩트’에 매우 충실한 기사를 썼다는 점이다. 그가 쓴 기사들은 하나 같이 책, 보고서, 통계 수치를 바탕으로 한다. 주요 사건을 경제, 법철학 관점에서 논박하는데, 자기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에 알맞은 통계와 자료를 열거하고 분석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나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데, 그가 쓴 기사들에서는 근거 없는 주장을 찾기 어렵다. 이른바 망상처럼 휘갈긴 기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실에 입각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풍자와 비판을 잃지 않는다. 때로는 날카롭고도 해학적인 비유에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 번지기도 한다.


소위 객관적이라는 부르주아 통계전문가들이 남들에게 이상주의자다 뭐다 떠드는 데, 따지고 보면 이 부르주아 낙천주의자들보다 더한 이상주의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25쪽)

노동자들이 ‘생활필수품’ 이상을 요구하거나 근면으로 얻은 수익을 ‘공유’하려 들 때,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적 경향을 띤다는 혐의를 받곤 한다. 식료품 가격이 정말로 ‘영원하고 완벽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과 관계있는 걸까? 1839년부터 1842년까지 계속해서 식료품 가격이 오르는 동안 임금은 기아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런데도 공장주들은 “임금은 식료품 가격과 연동되는 게 아니다. 불변의 수요공급법칙을 따른다”고 말한다. <선데이타임스>는 “노동자들이 공손한 태도로 요청해야 그 요구가 수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공손한 태도가 대체 ‘불변의 수요공급법칙’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무역 도매상들이 커피 값을 올리겠다고 “공손한 태도로 요청”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노동자의 피와 땀이 여느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거래될 거라면 최소한 다른 상품과 동일한 기회라도 주여야 하는 게 아닐까? (83쪽)

공장주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노동자의 목숨이나 팔다리를 지켜주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일하다 잃은 팔과 다리에 대한 보상금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이 ‘움직이는 기계’들의 ‘마모 비용’을 어떻게 남에게 떠넘길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119쪽)


이런 논조의 기사들은 오늘날 한국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다. 기자 자신도 노동자일 텐데 그 누구도 노동자 편에서 기사를 쓰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기득권이나 권력층에 맞설만한 저항 정신을 지닌 기자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러니 하나 같이 언론사에서, 윗선에서 내려주는 지침에 따라 받아쓰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것도 모자라 조회수에 눈이 먼 자극적인 헤드라인 뽑기, 사실 검증도 하지 않은 채 ‘아님 말고’식의 저질 기사들이 난무한다. <더 저널리스트> 시리즈에서 다룬 인물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마르크스는 적어도 기득권의 편이 아니라 약자의 편에 서서 진실을 좇고 그것을 폭로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라인신문> 편집장 시절 마르크스는 정부 검열과 싸워가며 비판을 실었으나, 주주들의 안일한 대처에 실망해 편집장 자리를 내려놓았다. 그때 그는 “정부의 위선과 어리석음, 원칙 없음에 질렸고, 신문사가 아첨하고 몸을 사리면서 단어 하나하나에 조심을 떠는 데 질렸다”고 말했다. 오늘날 이 땅에 이런 저널리스트가 있을까?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착각하는 기자들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추종하는 권력이나 이념에 부응하는 쓰레기 같은 기사나 양산할 뿐이지 않은가. <더 저널리스트> 시리즈는 이 나라 ‘기레기’ 책상마다 3권 세트를 모두 놓아주고 싶은 심정인데, 솔직히 이 책을 읽고 무언가를 느낄만한 언론인이 얼마나 될까,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다.


어떤 사회가 계층 간 반목의 토대 위에 서 있는데, 그 사회에서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로 착취 구조를 몰아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전쟁을 치러야 한다. 파업과 연대의 진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파업과 연대를 통한 경제적 이득이 겉보기에 그리 크지 않다는 점에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정신적 정치적 성과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현대 산업은 주기적으로 불경기와 호황, 경기 과열, 위기 빈곤기의 큰 흐름을 반복한다. 그 결과 임금이 오르내리고, 임금과 이윤의 변동에 따라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계속된 투쟁이 벌어진다. 이렇게 큰 흐름이 반복되는 과정이 없다면 영국과 유럽 전역의 노동 계층은 기력이나 의지를 잃고 저항할 줄 모르는 집단이 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자기 해방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노예의 경우처럼 불가능해질 것이다. (6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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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퍼센트 2020-02-29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런 시리즈도 있었군요, 읽어봐야겠습니다, 잠자냥님 늘 감사드립니다^^

잠자냥 2020-02-29 17:14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이 시리즈 중에 헤밍웨이와 조지 오웰이 마르크스보다는 좀 더 좋았습니다. ^^

2020-03-11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12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코틀로반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9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김철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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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수록 반하게 되는 플라토노프. 이 작품은 정말 압권이다. 살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데, 그 구덩이는 그야말로 무덤이 되는 현실. 문장 하나하나가 허투루 쓰이지 않았다. 이 세계와 삶에 대한 보셰프의 질문과 그에 따른 절망감이 마음을 울린다. “진실은 결코 망각될 수 없는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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