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둔지는 꽤 됐는데 이제야 읽었다. 몇 년 전, 도서정가제 시행을 앞두고 온라인 서점에서 폭탄 세일하던 그때. 현대문학세계단편선을
싸게 구입할 수 있던 그 시기에 1권부터 10권까지 세트로 사두었다. 그 시리즈 안에는 러브크래프트의 단편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나는 이른바 장르소설을 크게 좋아하지는 않아서 러브크래프트의 유명세는 익히 들었어도 여태까지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다.
요즘 날이 몹시 무더워서 그런가, 뭔가 흥미진진하면서도 오싹한 공포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책이 필요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러브크래프트 단편선에 자연스레 손이 간 것이다. 두둥!
이 책을 읽기 시작했던 그날, 공교롭게도
집에는 고양이들과 나만 있었다. 고양이들은 이미 쿨쿨 잠든 시간이었고, 나는 방마다 불은 다 끄고 에어컨 때문에 방문은 닫지 않은
채, 이 책을 읽고 있었다. 물론 책을 읽던 방은 불을 켰지만 불이 켜진 곳에서 방문 밖을 바라보면 어둠에 잠긴 집안 풍경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아니, 왜 이 글을 쓰면서도 책상에서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것인지?! 하하하하 - 아! 생각만으로도 무서워.
앞쪽에 실린 두 작품 ‘랜돌프 카터의 진술’과 ‘에리히 잔의 연주’만 읽었는데 난 자꾸 방문 밖을 힐끗힐끗 쳐다보게 되었다.
왠지 문 밖에 뭔가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양이 녀석들이 모두 다른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어쩐지 내가 있는 방으로 데려오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침이 바짝 말라왔다. 세 번째 작품 ‘시체를 되살리는
허버트 웨스트’를 읽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가 스윽 내게 다가왔다. 진심으로 깜짝 놀라 앗! 소리를 질렀더니 나보다 더 놀란
고양이가 꺄옹 거린다. 아! 녀석, 언제 이렇게 소리도 없이 다가와서는 날 깜짝 놀라게 하는 거야! 그날 밤 나는 고양이 세
마리를 모두 방 안으로 불러와서 몽땅 끌어안고 잤다. 그런 밤, 새벽녘에 문득 고양이가 일어나 저 방문 너머를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없는데! 하염없이 냐옹 거린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공포였으리라.
어릴 적에 나는 무서운 걸 잘 보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은 생겨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빼꼼 고개를 내밀고 공포 영화나 귀신 나오는 드라마를 보곤 했다. 납량특집 같은
것들. 그런 밤에는 한여름에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잤다. 발가락 하나라도 이불 밖으로 나가면 그 발가락을 귀신이
스윽 만질 것만 같았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이불을 절대 벗어 던지지 못했다. 말 그대로 ‘이불 밖은 위험해’였던 것이다.
러브크래프트의
단편들은 그 어린 시절의 이불 밖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 내 머릿속에 이불 바깥은 온통 공포로 가득한 세계였다. 무언가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으로, 어떤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공포의 실체가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존재는 내가 이불 밖으로 발가락이나 손가락 하나만이라도 내놓는 순간 낚아챌 것만 같았다. 러브크래프트의 단편을
읽노라면 정말로 어디선가 그런 존재가 나를 줄곧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으스스하다. 한밤중에 읽는다면 꿈자리가
뒤숭숭할 수도 있다.
삶의 가장자리 너머에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으며, 가끔 사악한 인간이 그 공포를 우리의 삶 안으로 불러들이기도 한다. -<현관 앞에 있는 것>, 277쪽
공포가
반드시 어둠, 정적, 고독에서 비롯된다는 통념은 오해에 불과하다. 나는 백주 대낮에, 시끌벅적한 도심 한복판에서, 그것도
흔하디흔한 어느 허름한 하숙집 안에서 평범한 주인아주머니와 일꾼 남자 두 명과 함께 있는 도중에 공포를 경험했다.
-<냉기>, 209쪽
러브크래프트는 일찍이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감정은 공포다. 그리고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다.’ 이렇게
정의 내렸다. 이처럼 공포에 대해 탁월한 통찰력을 지녔기 때문인지, 그의 작품은 기분 나쁠 만큼 자극적인 묘사가 없는데도 분위기
하나만으로도 섬뜩한 두려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공포의 대상은 주로 우리가 딱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 그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인 경우가 많다. 도무지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이성적으로 과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기에
두렵고 무서운 것들이다.
분광기로 분석할 수 없는 기묘한 색깔일 수도 있으며(‘우주에서 온 색채’), 기하학으로
측정이 불가능한 어떤 공간이기도 하다(‘크툴루의 부름’), 또 때로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기묘한 소리(‘에리히 잔의 연주’)이기도
하고,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리(‘그 남자’)이기도 하다. 알 수 없기에 두렵고, 그 존재를 마주하거나 인식하게 되더라도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불가능한 현상이거나 존재이기에 그 존재를 알게 되더라도, 여전히 두려운 대상으로 남고 만다.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 즉 영원한 앎의 미해결 상태인 것이다.
러브크래프트는 사람의 심리를 옥죄이는데도
빼어나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하지만, 차츰 뭔가 이상한 전조가 보이고, 그런 전조에 따라서 조금씩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인간의 호기심은 늘 그 기이한 일을 무시하지 못해서 다가가서는 안 될 그 대상에 점점 접근한다.
등장인물이 그렇게 행동할수록 독자의 심장 박동 수는 점차 빨라진다. 또한 마을이나 집처럼 어떤 장소를 설명할 때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한 묘사와 함께 신화와 과학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기에 러브크래프트의 이야기는 한결 더 설득력을 지닌다. 그렇기에
오늘날까지 문학을 넘어서서 온갖 대중문화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게 아닐까.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단순한 읽는 재미를
넘어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알지 못하는 것, 미지의 것을 인간이 두려워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미지의 것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끔찍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공포를 불러일으킬 만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두려움의 근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묵직한 질문.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니 세상 저 너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공포란 영원히 더불어 살아야 할 감정이리라. 러브크래프트는 인간의 그 근원적
감정을 집요하게 두드린다. 지금, 당신의 현관 밖에 무엇인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