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였나. 저녁을 먹으면서 넷플릭스를 켰다. 음식을 먹으면서 ‘영화’를 보기엔 부적절해서 그냥저냥 켜놔도 좋을 프로그램으로 <블랙 미러>를 선택했다. 이 시리즈가 어느덧 6시즌을 하고 있더라. “그냥 아무거나 켜놔.” 해놓고도 정작 프로그램이 시작하면 무섭게 몰입하는 나는 이날의 방송에도 또 금세 엄청나게 집중하게 되었는데……. 내가 빠져든 에피소드는 시즌 6의 3화 <저 바다 너머 어딘가 Beyond the Sea>였다. 어라 쟤 어디서 많이 봤지? 싶었던 배우가 나오고 있었으니 조쉬 하트넷(Josh Hartnett)이 아닌가. 조쉬 하트넷은 소싯적의 내가 “어이구 우리 조쉬 잘도 생겼다” 하면서 꽤 좋아하던 배우였다. 그런데 세월 앞에서 저 남자는 과연 누구인가…… 했지만 그래도 계속 보니 나름 그 미모는 아직 살아 있었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고.





<저 바다 너머 어딘가>는 <매트릭스>, <블레이드러너>와 같은 영화들의 주요 개념을 차용한 SF이다. 배경은 가상의 1960년대 미국의 어느 마을인데, 공교롭게도 이 현실의 지구를 살아가는 이들은 저 멀리 우주 탐사를 떠난 비행사 데이비드와 클리프의 복제인간- 즉 레플리카이다. 여기서 잠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우주로 레플리카를 보내면 되지 않을까? 왜 인간이 우주로 가고, 레플리카가 여기서 생활하지 싶은데, 우주에서 인간의 생존력을 알아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설정이라고 하니 그렇게 받아들이자. 암튼 우주에 있는 인간 데이비드와 클리프는 ‘링크’(두뇌를 연결하는 가상현실 체험)를 통해 이 지구에 있는 자신들의 복제인간인 레플리카(기계)와 접속하면서 가족과의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



늙어버린 조쉬..... -_-



그런데 1960년대 후반 미국 사회에서 일반적인 사람들 대다수는 이 레플리카의 존재를 기이하게 여긴다. 기이하게 여기면서 뒤에서 수군거리면 그만일 텐데 그 시절에도 혐오자는 당연히 있어서 어느 날 데이비드(조쉬 하트넷)의 집에 네 명의 히피, 광신도가 침입한다. 침입자를 느낀 데이비드는 잠에서 깨어나 그들에게 맞서지만, 그 미치광이 광신도 네 명을 혼자서 제압하기는 역부족(기계인데 이게 왜 안 될까 하는 의문이 잠깐 스치는 순간)이다. 히피들은 데이비드를 욕하고 조롱하고 혐오 발언을 쏟아내다가 급기야는 집단적으로 그에게 린치를 가하다가 인간인지 아닌지 알아봐야겠다면서 그의 팔을 썰어버린다.

그런데 데이비드는 레플리카이므로, 붉은 피가 나올 리가 없다. 잘린 팔도 여전히 꿈틀거리고 그 내부 모습도 인간의 팔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 모습을 본 광신도들은 더 날뛰면서 역겨운 레플리카 운운하며 그를 처단코자 하는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데이비드의 아내와 아들까지 데려와서는 심한 모욕과 조롱을 가한다는 것이다. 특히 데이비드의 아내에게 어떻게 이런 역겨운 존재와 같이 살을 섞고 사느냐, 자연스럽지 않다,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 등 일장 연설을 늘어놓다가 결국 아내와 아들을 데이비드가 보는 앞에서 잔혹하게 살해한다. 죽었으나 죽지 않은 데이비드- 이 끔찍한 장면을 모두 지켜본 그는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궁금하신 분은 넷플릭스를 보시라)



레플리카와 함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하는 여자.....



데이비드 일가가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당하다가 끝내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장면, 맨슨 패밀리 같은 그 광신자 집단의 우두머리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 운운하면서 혐오의 발언을 쏟아낼 때 나는 그 모습에서 동성애자들을 탄압하는 목사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굳이 개신교 목사가 아니더라도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발언을 하는 자들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게다가 그 이미지- 레플리카인 데이비드의 팔을 잘라버리고 그의 몸에서 나온 인간의 피와는 다른 기괴한 즙(액체)을 보며 역겨운 표정을 짓는 광신자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얼마 전 읽은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에서 인류애로-성적 지향과 헌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의학적으로 봤을 때 동성애자들의 전형적 성행위는 공포물이이나 마찬가지다. 침, 배설물, 정액 때로는 피를 매년 서로 다른 사람과 섞는다고 상상해보라. 주기적으로 오줌을 마시고 배설물을 삼키며 직장이 파열된다고 상상해보라. 이러한 접촉은 종종 참여자들이 술이나 마약에 취해 있는 상태에서 집단 난교 형태로 이루어진다. 게다가 이런 행동 중 다수는 극도로 비위생적인 장소, 예를 들면 화장실이나 더러운 핍쇼룸에서 일어나며 동성애자들이 해외여행을 매우 빈번히 하는 만큼 해외 여러 곳에서도 일어난다.
매년 동성애자들은 떼를 지어 외국을 방문한다. 미국의 신종 세균이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로 번져 나간다. 그리고 그 대륙에서 발생한 신종 병원균은 미국으로 유입된다. 외국의 동성애자들은 주기적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이 생물학적 벼룩시장에 참가한다. - 폴 캐머런 <동성애자들이 하는 행위의 의학적 결과들>(팸플릿에서 발췌) (<혐오에서 인류애로>, 36쪽)



누스바움은 혐오 발언의 전형성을 보여주고자 폴 캐머런의 글을 먼저 인용한다. 폴 캐머런은 미국 가족연구소의 창립자이자 수장으로, ‘미국 가족연구소’는 동성애에 관한 출판물을 활발히 간행하고 동성애자의 권리와 관련된 몇몇 중요한 소송에 의견을 제출하는 단체라고 한다. ‘가족연구소’이면 가족을 연구할 것이지 왜 동성애를 타깃으로 삼는지 잠깐 의아하지만 미국의(아니 대다수 전 세계의) 게이 혐오자들은 동성애자들이 정상적인 가정을 일구어 생식에 충실한 섹스를 하지 않는다고 혐오 발언을 하므로 역시나 싶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이 연구소의 수장인 캐머런은 오늘날 미국 내 동성애자 운동에 대한 가장 활발하고도 영향력 있는 반대자로 동성애자 인권보호에 반대하는 글을 쓰거나 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누스바움은 먼저 그의 이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자신의 논리를 펼쳐나간다. 예컨대 캐머런이 말하는 “비위생적인 장소-즉 화장실은 본질적으로 더러운 공간이 아니”며, “핍쇼룸은 더럽다고 해도 상징적인 차원에서 더럽지 말 그대로 더럽지 않다,” “외국에서 들어온 세균을 언급하는데, 이 대목에서 캐머런이 도용한 여행자의 이미지는 사실 오랫동안 동성애자의 것이 아니라 유대인에 대한 것이다. 유대인은 집 없는 떠돌이, ‘세계시민’으로 이러한 고정관념은 혐오를 작동시키는 정치적 동기로서 혐오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가 그토록 줄기차게 혐오스러운 장면으로 묘사하는 구강성교와 항문성교의 경우 이성애자들 사이에서도 빈번히 이루어진다(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침을 보자. 침이 그의 주장대로 그렇게 더럽다면 “인간의 성행위 중 가장 낭만화된 행위인 키스가 비정상적으로 혐오스럽고 위험한 행위”(40쪽)라고 그는 말하는 것이다 다름없다 등등.

누스바움의 이 반박이 평범하게 여겨지는 까닭은 그 내용들이 극히 자연스러워서 특별한 사례로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캐머런의 저 팸플릿 문구에서 ‘동성애자’라고 쓰인 부분을 ‘이성애자’로만 바꾸어 보라. 크게 다를 바 없이 말이 되지 않는가? 대다수 이성애자들이 주기적으로 오줌을 마시고 배설물을 삼키며 직장이 파열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면 이 또한 게이들의 섹스에서도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캐머런이라는 사람은 게이들이 주기적으로 오줌을 마시고 배설물을 삼키고 직장이 파열되는 것을 대체 어디서 봤을까?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주기적으로 게이들이 그러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면 그 자신부터가 좀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그런데도 캐머런과 같은 동성애 혐오자들이 체액이나, 배설물, 혈액 등 타액의 더러움과(<바다 너머 저 어딘가>의 레플리카 몸에서 나온 기묘해서 역겨운 즙의 이미지) 배설물 섹스(항문 성교와 배설물의 더러움)를 결합시킨 뒤 이때 발생하는 혐오스러움을 동성애자 특유의 것으로 이질화하는 이유는, 이런 특징, 즉 체액, 배설물, 몸에서 풍기는 냄새, 혈액 등은 모두 인간 신체의 동물적 본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캐머런의 주장이 일말의 지지를 받는 것이라고 누스바움은 말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동물적 신체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편히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때 캐머런 같은 이들은 저기 바로 게이(동성애자)의 신체 안에 혐오스러운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불러일으킨 불편감을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이성애자의 섹스는 이런 동성애자들의 섹스와는 “전혀 달라”서 “내 성생활은 이런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라고 느낌으로서 그들(타자)에게 혐오를 느끼는 동시에 본인 스스로는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다. 타자를 비정상화함으로써 자신을 정상에 놓고 안심하는 인간의 심리를 혐오자들은 노리는 것이다. 또한 캐머런의 수사는 게이에 대한 역겨움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그들의 행위를 질병이나 위험과 연관 짓는다. 동성애 자체가 혐오스러운 벌레인 것처럼 묘사하면서 “동성애는 개인과 사회에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는 전염성 높은 욕구”로 못 박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광신자 집단이 레플리카와 그의 가족에게 쏟아내는 혐오발언도 이와 유사하다.

누스바움은 사회는 구성원들 중 몇몇을 이른바 ‘오염원‘으로 규정하도록 가르친다고 지적한다. 투사적 혐오는 사회적 기준에 의해 형성되고, 이때 최소한 몇몇 사람들(성소수자, 난민, 유색인, 장애인 등등)을 혐오스러운 존재로 간주하는 건 모든 사회의 공통된 특성이다. 누스바움은  이러한 전략은 지배집단과 그들이 두려워하는 그들 자신의 동물성 사이에 안전한 저지선을 설치할 목적으로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혐오스러운 동물성의 세계와 ‘나‘ 사이에 준準-인간이 존재한다면, ‘나‘는 필멸하는/부패하는/냄새나는/진액이 흘러나오는 것들로부터 그만큼 떨어져 있게 되는 셈이다. 진짜 위험과 신뢰할 만한 연관관계가 거의 없는 이 투사적 혐오는 망상을 먹고 자라며 예속을 만들어낸다. 혐오가 자신을 순수한 것으로, 타자를 더러운 것으로 표상하려는 뿌리 깊은 인간적 필요에 봉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필요가 사회를 공정하게 만드는지는 대단히 의심스럽다. 오히려 이러한 전략은 사회의 공정성을 해친다.”(55쪽)

이렇듯 혐오는 다른 사람의 완전한 인간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점에서 끔찍하다. 그렇기에 혐오는 민주사회의 입법 기준으로 부적절하지만 오늘날 미국 법조계의 명망 높고 영향력 있는 몇몇 인사들은 혐오를 옹호하고 이를 근거로 법률을 제정하거나 법 해석을 하기도 한다(한국도 별반 바를 바 없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국가 전체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것이 분명한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다수의 이익이 개인의 기본권에 우선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동성 간에 합의된 섹스가 타인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가? 단지 그게 부자연스럽고 역겹기 때문에,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이렇게 상상해보자. 애초에 인간의 섹스는 동성애가 디폴트였고 이성애는 비정상이라서, 어떻게 서로 다른 형태의 성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지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역겹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고 한다면?

누스바움에 따르면 “혐오는 도덕적 둔감성에 의지”한다. “다른 인간을 끈적거리는 민달팽이나 역겨운 쓰레기 조각으로 보는 일은, 그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고 그 사람의 느낌을 경험해보고자 하는 진지하고도 선의에 찬 시도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 때에나 가능하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를 인간으로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누스바움은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 “동료 시민에 대한 평등한 존중과 그들이 추구하는 이익이 무엇인지 상상하는 진지하고도 공감적인 시도의 조합이야말로 ‘인류애의 정치’ 바로 그 자체”라고 말한다. 평등한 존재로서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단순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물체가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누스바움의 주장에는 구구절절 공감하지만, 책에서 벗어나 이 세계로 눈을 돌려 그녀의 제안이 과연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지 상상해본다면 내 대답은 좀 회의적이다. 이 지구에 사는 대다수 인간들은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그토록 상상을 잘하면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지닌 타인의 인간성을, 그 또한 나와 똑같이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상상하는 능력은 결핍된 모양이다. 상상과 공감- 이토록 쉬운 게 그렇게 어렵다면 타인의 성생활에 대해 상상하기를 그만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그조차 못한다면 당신은 저 광신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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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7-18 1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괭님 일단 좋아요부터 누르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3-07-18 11:48   좋아요 2 | URL
뭐라고요? 그럼 나도 일단 눌러!!

잠자냥 2023-07-18 11:49   좋아요 4 | URL
얘들아 내 영혼 사랑하는 건 알지만 읽고 눌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07-18 11:53   좋아요 5 | URL
일단 누르고 정독한다가 답입니다.

거리의화가 2023-07-18 12: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로 표현이 부족한 글입니다. 정독했네요^^ 이 책은 꼭 읽어야겠다는!

잠자냥 2023-07-18 22:07   좋아요 1 | URL
화가 님 이 책 좋아하시리라 믿습니다~~

건수하 2023-07-18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지사지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냥 남의 섹스 상상하기 싫거든요… 공감하지 않고 그냥 인정하고 싶어요.

마지막 줄은 공감!

잠자냥 2023-07-18 22:08   좋아요 1 | URL
그니까요. 오지랖들도 진짜….

다락방 2023-07-18 22: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공감은 곧 상상력이죠. 내가 저 상황이라면, 부터 시작해서 모르는 것에 대해 더 생각하고 들여다 보는 일이요. 그리고 저는 상상해본다면, 머리를 쓴다면, 알게 된다면 혐오와 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여성혐오도 물론이도 세상의 수많은 혐오와 비하는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상상하지 않는 사람은 멍청하다고 생각하고요, 멍청함은 그래서 결국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나 아렌트도 그랬지요. 사유하지 읺는 건 악이라고요.

잠자냥 2023-07-18 22:23   좋아요 1 | URL
공감이 상상력이라는 다부장님 말에 100번 공감합니다. 상상력 좋은 잠자냥 올림 ㅋㅋㅋㅋㅋ -소설 읽기가 주는 미덕도 공감과 상상의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건수하 2023-07-18 22:2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말씀이 맞는데.. 섹스라는 개인적인 영역까지 굳이 상상을 하고 공감을 해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동성애 싫어하는 사람들은 동성애 하면 섹스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성애에도 섹스 말고 다른 것이 있는데.

잠자냥 2023-07-18 22:40   좋아요 1 | URL
타인의 섹스를 상상하거나 공감할 필요는 없죠. ㅋㅋㅋㅋ 이성애=섹스라고 생각하지 않듯이 동성애도 똑같이 생각하면 될 텐데 굳이 섹스로 환원해서 생각하니까 이상한 거죠. 그들의 처지가 이성애자들이 누구 좋아하는 마음과 똑같겠구나 생각하면 될 거 같습니다.

건수하 2023-07-18 22:41   좋아요 1 | URL
제 말 그 말이요!

달자 2023-07-18 22: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의 마지막 글에 깊은 공감을 하며 제 맘 속에서 형관펜으로 밑줄을 쫙 그었습니다. 누스바움의 주장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회의감이 드는 것 조차도 잠자냥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누스바움처럼 저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소위 혐오론자 of 혐오론자들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 보면 어떤 이유가 있어서 혐오론자가 되어 버린 그 단계를 지나쳐서, 그 혐오 자체에 일종의 페티쉬를 갖는다고 해야할까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혐오함으로써, 타인을 상대화, 심지어 도구화해서, 인간성을 완전히 짓밟는걸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는... 근데 이런 생각(그들의 혐오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도 결국 혐오에 스토리를,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에 일조하는 걸까요? 하... 혐오하는 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떠들고 까불어대는데 우리는... 맞아요 공부를 해야죠. 더 해야죠. 공부는 여러모로 참 힘이 드는 것입니다

잠자냥 2023-07-18 23:34   좋아요 2 | URL
누스바움은 읽을수록 인간에 대해서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점에서 인간 혐오자인 저에게는 오히려 필요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더 열심히 읽어보려고 합니다. 혐오자들은 혐오만 할뿐(심지어 목소리도 커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달자 님 말씀대로 누스바움이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이들은 대체 왜 혐오하는지 공부까지 하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지만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드네요. ㅎㅎ

2023-07-19 0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9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19 1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목련 2023-07-19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

잠자냥 2023-07-19 10:51   좋아요 0 | URL
서재에 하트가 넘쳐납니다.
은오의 힘인가요? ㅋㅋㅋㅋ

자목련 2023-07-22 11:40   좋아요 0 | URL
네, 은오 님의 힘입니다 ❤️

독서괭 2023-07-19 1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혐오는 도덕적 둔감성에 의지”한다. -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동성애=동성섹스 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대체 ‘애‘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쩝. 상상력,공감력 키우기 위해서는 역시 소설을 많이 읽는 게 답일까요. <도둑맞은 집중력>에서 소설 읽는 게 좋다고 나오던데 아 소설 읽고 싶다..(요즘 별로 못 읽었어요ㅠ)
누스바움 저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하.. 읽을 책 너무 많네요 ㅠㅠ

잠자냥 2023-07-21 10:03   좋아요 1 | URL
mbti 페이퍼에 댓글이 어마어마하게 달려서 이 댓글을 이제야 제대로 봤네요.
동성애=섹스로 치환하는 뇌구조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 이성애자들도 섹스에 미친 사람은 미친 거고 동성애자도 그런 사람 있고 아닌 사람도 있겠지 아니 무슨 진짜 ㅋㅋㅋㅋ 저는 동성연애자라는 말도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따지면 이성연애자도 있어야죠.
아무튼 괭님의 소설라이프도 다시 시작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