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으로는 명리名利를 추구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성취할 수 있기를 갈구한다.” 옌롄커의 《캄캄한 낮, 환한 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50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옌롄커에게는 문득 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래,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글쓰기의 적막과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세계 영화예술의 거장이 돼보자!’하는 생각이다. 세계적 작가가 ‘가난’ 운운하니 사뭇 의아하기도 하지만 문학이 처한 현실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이 작품에서도 여러 차례 말하듯이 아무리 유명한 작가라고 할지라도 어디 영화만큼 큰돈을 벌 수 있으랴. 옌롄커는 영화를 “예술이 돈과 명성, 정신, 영혼을 하나로 뒤섞어 분명하게 구분되지 못하게 하는 마술 상자”(14쪽)라고 말하고는 자신의 작품을 직접 영화로 만들어 돈과 명성을 한꺼번에 얻고자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아니, 그런데 이 사람 참 욕심도 많지. 시나리오와 감독은 물론 자신이 직접 주연까지 맡아 명예와 부를 얻겠노라 참으로 야무진 꿈을 꾼다. 이쯤에서 잠깐 옌롄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그건 그렇다 치고. 그가 야심차게 영화로 만들 계획을 세운 이야기는 무엇인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과 한 고향 사람인 ‘리좡’의 삶과 사랑을 영화를 만들고자 생각한다. 리좡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데? 아니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 즈음, 그는 리좡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 <캄캄한 낮, 환한 밤>을 들고 이 영화를 함께 찍고 싶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먼저 그 단편을 읽게 한다. 그런데 이 단편은 좀 맥이 빠진다. 리좡이란 인물도 딱히 호감 가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싫어할 만한 인물이다. 영화 <캄캄한 낮, 환한 밤>의 바탕이 될 단편의 주된 내용은 이 리좡이란 인물이 십대 시절 한 소녀를 강간한 사건에서 출발한다. 단편을 읽은 이들은 심히 어두운 얼굴로 옌롄커에게 되묻는다. 정말 이 시시한 작품으로 영화를 만들겠다고? 당신 제정신이야? 덩달아 나도 그렇게 묻고 싶다.
곧 옌롄커가 대답한다. 다행이다. 당연히 아니란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캄캄한 낮, 환한 밤>에 나오는 먀오쥐안을 강간한 리좡이 지금 베이징대학교 교정의 북쪽에서 일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중에 누구도 그런 사실을 미처 생각지도 못했겠지요. 저와 같은 고향 사람인 이 농민공은 이미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베이징에서 몇 년 째 막일을 하고 있어요. 줄곧 건축공사팀을 따라다니며 베이징대학교와 칭화대학교, 인민대학교 교정에서 보수공사를 하기도 하고 건물을 올리거나 담을 쌓는 일을 해왔지요. 학교에서 막노동을 하다 보니 뜻밖에도 우연히 베이징대학교의 뛰어난 재원인 한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나이 차가 스무 살이 넘는 데도 말이지요. 제 고향에서는 글씨도 몇 자밖에 쓸 줄 모르던 농민공이 재색을 겸비한 베이징대학의 한 대학원생을 좋아하게 된 거예요. 베이징에서 벌어진 리좡의 이런 이야기를 영화로 각색하는 데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가장 촌스럽고 지식수준도 가장 낮을 뿐만 아니라 가장 가난하고 못생긴 북방의 중년 남자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대학교에서 가장 아름답고 전도유망한 남방 여자 대학원생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105~106쪽)
사람들은 그 시시한 단편을 영화로 만들 계획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지만, 그러면서도 의혹을 뿌리 뽑지는 못한다. 아니 50대 농민공과 20대의 베이징대학원생이 사랑에 빠진다고? 그게 가능해? 그래서 옌롄커는 자신의 고향 사람과 그의 ‘신기한 사랑’을 영화로 만들 것이라고 애초부터 밝혔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런데 ‘신기한 사랑’이라면, 그 둘이 정말 사랑했다는 말이야? 자못 호기심이 동한다. 그게 정말 사실이야? 허구가 아니고? 궁금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그런데 앞의 강간 사건을 담은 단편은 왜 보여준 것일까? 이 단편과 영화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이 점 또한 궁금해진다. 이 책은 이렇게 유명 작가 옌롄커가 직접 화자로 나서서 자신의 고향 인물인 리좡과 그의 사랑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옌롄커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리좡을 비롯해 그 주변 인물들을 한 사람씩 인터뷰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인터뷰 과정이 꽤 흥미롭다. 강간범 리좡의 면모도 인터뷰를 할수록 달라지고, 20대의 대학원생 ‘리징’ 또한 그렇다. 이 작품은 이렇게 장편과 단편, 인터뷰, 시나리오 네 개의 장르를 한 번에 다 볼 수 있는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단편에서는 강간범임이 확실했던 리좡이 본인을 비롯해 여타 인물들을 만날 때마다 그의 범죄 행위가 아리송해진다는 점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단편’에서부터 그의 범죄가 아리송하기는 하다. 목격자가 있기는 한데 하필이면 그 목격자가 동네에서 누구나 다 인정하는, 알아주는 ‘바보’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화자가 강간 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바보의 증언은 정말 믿지 못할 말인가 독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리좡이 먀오쥐안을 강간한 사건이 아리송해질 무렵 독자는 또 하나의 사건이 허구인지 진실인지 헷갈리게 된다. 그 사건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50대에 접어든 리좡이 20대의 리징이라는 여성을 사랑하게 된, 만나게 된 사연이 바로 그것이다. 인물마다 각자의 관점과 처지, 생각에 따라 서술하기 때문에 과연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과장이며,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내내 머리를 굴리게 된다.
이 장편 속의 옌롄커는 시나리오 <캄캄한 낮, 환한 밤>을 쓰기 전에 “이 이야기는 중국 빈부 격차와 각 계층의 문화 수준 차이, 남방과 북방의 지역 차이, 농촌과 도시의 차이 및 갈등을 날카롭게 반영”할 것이라 포부를 밝힌다. 한술 더 떠서 작가는 이 시나리오가 “지난 40년에 걸친 중국의 개혁 개방과 이에 따른 인민의 정신분열과 천지개벽 같은 관념의 변화를 반영”할 것이며 “베이징과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최고 학부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중국의 사회 제도와 교육 상황, 권력의 영향,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옛 베이징 문화의 침식과 자양을 표현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신적 변화가 각 개인의 몸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도 표현”(123~124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야심차게 기대한다.
정말 그의 시나리오는 그가 밝힌 포부를 모두 아우르는 작품이 되었을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참 이상하게도 이 책에 담긴 여러 이야기, 그러니까 단편 <캄캄한 낮, 환한 밤>을 비롯해 각 인물들을 만나서 기록한 인터뷰 등등보다도 그가 야심차게 기획한 이 시나리오가 가장 맥빠져 보인다. 지나치게 작위적이어서 사실이라기보다는 지어낸 이야기라고 절로 생각하게 된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었는지 시나리오를 읽은 다른 이들의 반응도 떨떠름하긴 마찬가지이다. 그중 누군가는 이렇게 묻는다. 리좡과 리징 두 사람의 왜곡된 사랑 이야기를 쓰기로 결정하지 않았느냐고. 거기에 옌롄커 “생활의 진실이 쓰지 못하게 막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반문했던 이가 다시 묻는다. “예술이란 생활의 진실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요?”(379쪽) 이 두 사람의 대화처럼 진정한 예술은 생활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생활의 밑바닥이나 내부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어 가야 하는 것일까?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 장편 속의 인터뷰들이 비허구, 그러니까 진실이라면 그 진실이, 즉 생활의 진실이 예술(이 작품 속의 ‘단편’이나 ‘시나리오’)보다도 강력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옌롄커는 생활의 진실이 쓰지 못하게 막았다고 자조적으로 말한 게 아니었을까.
또 다른 의문도 든다.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인물들은 어디까지가 작가의 창작을 통해 재탄생한 인물일까? 실제 리좡은 정말 강간범인가? 그리고 그는 그런 과거가 있으면서도 이제는 오십대에 이십대의 여성을 스토킹하는 인물이 된 것인가? 만일 이게 진실(비허구)이라면 그는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 변명하고 꾸며대기에만 급급한 참으로 나쁜 인간이다. 그러나 만일 그게 아니라면? 리좡이 자기의 목소리를 냈듯이 옌롄커 그 자신이 작가라는 명분 아래 주변 인물을 나쁘게 묘사하고, 또 자기의 고향(크게는 중국)을 나쁘게만 그리는 데 전력을 기울여 온 작가라면? 그렇다면 그의 마을을 비롯해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란 대부분의 인물들은 옌롄커의 붓(글)에 희생당한 소시민들일 뿐이다. 이런 의심이 합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은 그가 그린 이십대의 여성 ‘리징’의 캐릭터가 참으로 단순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리징도 이 책에서 옌롄커를 조롱하고 있는 게 아닐까. 리징뿐만 아니라 배움이 없는 막노동꾼 ‘뤄마이쯔’ 같은 인물도 “아저씨처럼 마구잡이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걸로 돈을 버는 직업은 정말 이상”한 것 같다고 말한다. “매일 되는대로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뭐든지 진짜처럼 꾸며”내고 “이런 유언비어에 의지해서 밥을 먹고” 살지 않느냐고, 그런데도 “아저씨 같은 사람들은 유언비어를 책으로 만들어도 정부로부터 격려를 받고 상장과 상금을 받”는다고 “유언비어가 입에서 나오면 범죄가 되고 책으로 나오면 학문”(185쪽)이 되는 세상이 참 이상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아마도 이런 자조석인 질문과 의혹들을 통해 작가는 스스로 내가 지금 나 ‘자신의 내면을 만족’ 시키고 있는 작품을 쓰고 있는지, 되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