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추리 소설에 푹 빠지는 때가 있는 것 같다(물론 그렇지 않은 이도 있고, 특정 시기랄 것 없이 내내 미스터리 장르에 열광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여전히 종종 추리 소설을 읽기는 하지만, 어린 시절, 청소년기에 비하면 이제는 미스터리 장르에 크게 열광하지는 않는다. 어느 순간, 그토록 매력적으로 느껴지던 것들- 도저히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맞히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게 꼬인 사건, 그러나 해결사처럼 탐정이나 수사관이 나타나 머리를 굴려 문제를 해결하고 이러저러해서 범인은 당신이야! 하는 점들이 식상하게 느껴졌고 더 이상 흥미롭지 않게 된 것이다. 추리 소설의 매력으로 작용했던 미스터리의 ‘공식’이 어느 날부터는 그 장르에 식상함을 느끼게 하는 요소가 된 것이다.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닌지, 열혈 추리 소설 마니아임을 일찌감치 밝혔던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도 어느 날 문득, 이 장르의 식상함을 털어놓는다. 사실, 그들은 미스터리 장르의 열렬한 애호가로서 오래전부터 추리소설을 쓰고 싶어 했다. 그들은 “정교하고 플롯이 복잡하면서도 결말이 독창적인 작품을 한번 써 보면 좋을 텐데…”라는 주제로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지만 이렇다 할 소득도 없이 그 대화는 무위로 끝나고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 형제가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은 작품은 물론, 대부분의 추리 소설에 내재된 근본적인, 태생적인 흠결이 그들 눈에는 너무나 훤히 보였던 것이다. 형제 생각하기에 추리 소설의 식상함은 범죄를 일으키는 동기가 빈약한 데다 아무리 뛰어난 서술도 그 빛을 바래게 하고 지루하고 실망스럽고 권태롭고 어설픈 설명이 따라온다는 점이다. 그들이 보기에 추리 소설에서 생각해 낼 수 있는 범죄 동기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금전 문제, 질투, 비밀 폭로의 두려움, 복수, 사이코패스 등등. 그러다 보니 결국 묘사된 수사 장면이 아무리 매력적이라고 해도 누가 왜, 무엇을 위해 범죄를 저질렀는지가 뚜렷해지는 순간 그들은 추리 소설에 흥미를 확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투르가츠키 형제는 모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끝까지 흥미를 느꼈던, 모범으로 삼고 싶었던 작품으로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추리 소설인 <약속>을 꼽는다. 그리고 이 두 형제는 그와 비슷한 작품, 즉, ‘역설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면서 추리 소설의 모든 법칙에 따라 추리 독자의 흥미가 뚝 떨어지는 결말 부분에서 예기치 않은 비극적인 반전이 가미된 소설’을 쓰고자 한다. 뒤렌마트의 <약속>에는 ‘추리 소설에 부치는 진혼곡’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는데, 이에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약속>을 본보기 삼아 ‘추리 장르에 바치는 또 하나의 임종 기도’를 쓰자고 한 것이다. <죽은 등산가의 호텔>은 바로 이런 배경 아래 탄생했다.

때문에 나는 <죽은 등산가의 호텔>을 읽기 전에 뒤렌마트의 <약속>을 먼저 읽었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 작가인 ‘화자’와 ‘H박사’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H박사는 화자에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나는 추리소설이라는 것을 대단하게 여긴 적이 없습니다.”라며 추리 장르를 비판하는 말로 운을 뗀다. H박사의 말은 잘 보면 스투르가츠키 형제의 추리 장르에 관한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H박사는 이어서 “그 갖가지 추리 소설들 안에서 한술 더 뜨는 엉뚱한 사기극이 연출된다.” 지적하는데 이어지는 말은 더 가혹하다. 그는 추리 소설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진행 방식은 ‘사기극’에 가까우며 ‘언어도단에 파렴치하기까지’하다고 말한다. “당신네들은 사건 진행을 논리적으로 설정하지요, 마치 장기를 두듯 진행합니다. 여기엔 범죄자 저기엔 희생자, 또 이곳엔 공모자 저곳엔 부당 이득자,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수사관은 이 규칙을 알고 반복해서 판을 벌이는 것으로 족하지요. 그럼 어느 틈엔가 범죄자를 체포하게 되고 정의는 승리를 도와주는 겁니다. 이런 식의 픽션이 나를 참을 수 없이 격분시킨단 말입니다.”(<약속>, 19쪽) H박사는 이런 식으로 당신네들, 즉 추리소설 작가들이 만든 세계에서 범죄자들이 어김없이 처벌받게 되는 상황은 윤리적으로 볼 때 꼭 필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럴싸한 동화’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왜냐하면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증거로 한 사건을 털어놓는다. 한 마을에서 어린 소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 사건을 두고 여러 차례 수사가 진행된다. 그러나 추리 소설처럼 잘 짜인 도식대로 수사는 진행되지 않고, 실패가 이어지면서 그 때문에 인생을 망치다시피한 한 수사관까지 등장한다. 현실은(비록 H박사가 사례로 제시한 이야기 또한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픽션이기는 하지만), 추리 소설과 달리 온갖 ‘우연’이 끼어듦으로써 설계도처럼 잘 짜인 도식을 풀어내고 마침내 정의가 승리하는 그런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뒤렌마트는 전통 추리소설이 내포한 이 같은 ‘허구적 동화’를 깨부수고 비판하고자 시도한다.

<약속>을 본보기 삼아 쓴 <죽은 등산가의 호텔> 또한 처음에는 아주 흥미로운 추리 소설로 읽힌다.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경찰 ‘페테르 글렙스키’는 공직자 범죄, 횡령, 사기, 국채 위조 등 지루하기 짝이 없는 분야에서 성실하게 오랫동안 임무를 수행해왔고, 그러다 보니 몹시 지쳐 2주간의 휴가를 얻어 깊은 산속의 ‘죽은 등산가 호텔’에 찾아온다. 이 호텔은 예전에 한 등산가가 조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적이 있는데, 그 후로 주인과 같이 왔던 개 세인트 버나드 ‘렐’은 줄곧 이 호텔에서 살고 있다. 호텔 주인 ‘스네바르’는 투숙객들이 찾아올 때마다 죽은 등산가의 전설을 들려주면서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는 것을 즐긴다. 호텔에는 투숙객으로 국제적으로 유명한 마술사 ‘듀 바른스토크르’와 그의 조카 ‘브륜’이 머물고 있는데, 바른스토크르는 최면술 묘기에 뛰어나고, 브륜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이 모호해 글렙스키를 비롯해 다른 투숙객들도 그의 성별을 알아내려고 무진장 애를 쓰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거기에 어마어마한 부를 소유한 상인 ‘모제스’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물리학자 ‘시모네’ 등이 머물고 있다. 그런데 이 호텔에는 죽은 등산가의 유령이 떠돌고 있는 것인지, 최근 기이한 일들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다. 이틀 전에는 바른스토크르의 실내화과 사라졌다가 저녁 무렵에야 객실 박물관에서 발견되지를 않나, 전문서적이 압도적으로 많은 시모네의 책을 누군가가 이것저것 읽고 있으며 거기에 메모를 달아놓는데, 문법이 압도적으로 엉망진창이다. 게다가 브륜을 비롯한 투숙객들의 침대는 말끔하게 치워놓아도 곧 사람이 누웠다가 일어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다가 샤워장에서는 그 안에서 누군가가 노래까지 부르며 샤워 중인 게 틀림없는데, 문을 열면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든가 등등 기묘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여기에 새로운 투숙객들이 찾아오고 그들이 온 뒤로 호텔은 완벽하게 고립상태가 된다. 하나의 거대한 ‘밀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던 중에 모제스의 금시계 도난 사건이 일어나고, 휴가 중임에도 경찰이라는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건을 수사하게 된 글렙스키는 익명의 메모를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위험천만한 악당이자 미치광이에 사디스트이며 범죄의 세계에서 필린이란 별명으로 악명 높은 자가 ***이라는 이름으로 현재 이 호텔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글렙스키 경위님에게 알립니다. 그는 무장하고 있으며 이 호텔의 투숙객들 가운데 한 명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길한 예고대로 호텔 방에서 한 투숙객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그런데 시체가 발견된 방 창문 아래로도 위로도 눈 위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고, 사건 당시 방을 나선 사람도 들어간 사람도 없다. 게다가 투숙객은 하나같이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하며 수상쩍다. 고립된 호텔, 뜻밖의 살인 사건, 하나 같이 의심스러운 인물들, 우연히 그곳에 있었기에 수사를 할 수밖에 없는 경찰 글렙스키! 완벽하게 밀실 미스터리 도식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약속>을 본보기 삼아 ‘추리 장르를 위한 또 하나의 임종 기도’를 쓰겠노라 선언한 바 있다. 그렇기에 완벽하게 고전 밀실 미스터리를 따라가는 듯한 전개를 보이던 <죽은 등산가의 호텔>은 어느 순간 비틀기가 일어나면서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사건이 진행된다. 처음에 사건을 수사하던 글렙스키는 가장 뻔한 방식으로 수사를 진행하는데,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호텔 주인 스네바르는 그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당신은 알리바이를 조사하고, 단서를 모으고, 동기를 찾고 있죠. 이런 사건에서는 당신이 알고 있는 수사기법 같은 평범한 개념은 의미가 없어요. 빛의 속도를 뛰어넘는 속도에서는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죠.”(<죽은 등산가의 호텔>, 232쪽) 그리고 실제로 사건은 그렇게 진행된다. 글렙스키는 평범하고 진부한 방식을 떠나서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리고 스투르가츠키 형제는 자신들이 추리 소설에서 느꼈던 그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리는, 뻔하고 도식적인 결말을 뛰어넘는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을까? 뒤렌마트의 <약속>에서는 ‘우연’이 그런 역할을 했다면 <죽은 등산가의 호텔>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기존 추리 소설의 단조로움을 극복했을까? 확실한 것은 이 두 작품 모두 추리 소설의 인습적인 공식을 깨뜨리면서도 전혀 색다른 추리 소설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추리 장르에 임종 기도를, 진혼곡을 바치는 대신 역설적이게도 추리 소설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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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9-23 13: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흠. 한 번 더 낚여야겠군. 아르카디와 보리스의 전작 노변의 피크닉 같은 분위기를 깔아놓은 건 아닌가...는 생각을 번쩍 했습니다만, 설마, 그럴리는 없고, 천생 읽어봐야 알겠구먼요. 하여튼 못 말리는 형제라니까요. 장가는 들었는지 몰라....

잠자냥 2021-09-23 13:22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ㅋㅋ 장가 이야기에 빵 터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추석연휴라 뭔가 더 절절하게 다가오는 스투르가츠키 형제 장가 걱정 ㅋㅋㅋㅋㅋㅋ

mini74 2021-09-23 13: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낚였습니다. 고민하다가 폴스타프님 장가 이야기에 ㅠㅠ 한 권이라도 더 팔리면 장가가는데 도움이 될까요 ㅎㅎ

잠자냥 2021-09-23 14:10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 때아닌 스투르가츠키 형제 장가 보내기 운동! 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09-23 13: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때문에 <약속>을 먼저 읽으신 거였군요! 아휴 리뷰보고 결정하라고 하셨는데 무지 궁금해지는 리뷰네요😫😫😫
폴님의 명절에 만난 8촌숙부님 같은 말씀에 웃고 갑니다 ㅎㅎ

잠자냥 2021-09-23 14:17   좋아요 4 | URL
네, <약속>은 전에 폴스타프 님 리뷰 보고 사둔 건데, 이제야 읽었습니다만, 지금 읽길 잘한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폴스타프 님 알라딘 서재 공식 지정 8촌숙부 등극 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9-23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뒤렌마트<약속>을 읽어야겠네요. <판사와 형리> 읽고 제가 기대한 추리물이 아니라 약속은 나중에 읽자 했거든요.

8촌 숙부! ㅍㅎㅎㅎ

잠자냥 2021-09-23 22:58   좋아요 2 | URL
아 그러면 <약속>도 기대하신 추리물과는 거리가 멀 거예요! ㅎㅎ

coolcat329 2021-09-24 07:00   좋아요 1 | URL
그쵸?ㅋㅋ 그래도 70프로는 읽을 생각이 있습니다. ㅋ

행복한책읽기 2021-09-24 0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죽은 등산가는 제목이 지를 완전 끌어당깁니다. 읽고픕니다. 언능. 시간 좀 떼어주세요^^

잠자냥 2021-09-24 09:34   좋아요 0 | URL
끌어당겨지면 몸을 맡겨보아요. ㅋㅋㅋ

공쟝쟝 2021-09-24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추리소설에 푹 빠질때가 오지 않은 초보독서러는 구미가 동하는 데... (밀실 살인은 아마도 무서워서 못 읽을 것 같긴 하지만 ㅜ_ㅜ)

잠자냥 2021-09-24 10:45   좋아요 0 | URL
이거 하나도 안 무서워요. ㅋㅋㅋㅋ 오히려 좀 웃김 ㅋㅋㅋㅋㅋ 이 형제들 책 쟝쟝 님 취향에 맞을 거 같은데...?

그러나 <제2의 성>부터 다 읽고 생각해 보시오.

공쟝쟝 2021-09-24 10:49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은 회사에서 자꾸 서재 기웃거려도 되는겁니까? 엉? 점심시간까지 리뷰타임 가질겁니까?...!!! 저 이 개미지옥 못 빠져 나가게 계속 글올리껍니까? (행복...)

잠자냥 2021-09-24 11:07   좋아요 0 | URL
네~ 전 됩니다. 케케켘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