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대 후반의 내게 수전 손택은 하나의 본보기였다. 그이처럼 많이 읽고 보고 느끼며 쓰고 싶었다. 심지어 그 말년의 새하얀 머리칼조차 닮고 싶을 정도였다. 요즘 거울 앞에서 검은 머리칼 속에서 가끔 흰머리를 찾으면 그걸 골라내며 생각하곤 한다. ‘하이고, 손택 닮고 싶다 하더니 다른 것도 아니고 흰머리가 나나!’ 예전처럼 100% 그이를 닮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흰머리조차도 달갑지 않다).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아직 할 일이 남았다며 죽기를 거부한 그 열정 넘친 삶의 자세, 문학의 뜨거운 추종자이자, 대중문화를 열렬히 사랑하고 옹호함으로써 대중문화와 고급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린 손택의 찬란히 빛나는 글솜씨는 여전히 본받고 싶다. 평생 지성의 세계에 머물기를 바랐고, 그 세계에서 자기만의 성(城)을 쌓는 데 성공한 그의 삶도 닮고 싶다.
손택의 일기인 <다시 태어나다>와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를 이미 읽은 터라 손택의 전기 <수전 손택 - 영혼과 매혹>이 출간되었을 때, 살짝 고민했다. 읽을까 말까. 손택의 일기를 읽은 마당에 전기를 읽는 게 어떤 소용이 있을까? 과연 손택 그 자신이 원하는 전기일까? 그럼에도 결국 이 책을 선택한 까닭은 결국 그 누구도 아닌 ‘수전 손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내가 본 ‘나’와 타인이 바라본 ‘나’는 미세하게라도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 슈라이버의 <수전 손택 - 영혼과 매혹>은 손택의 일대기를 중요 분기점에 따라 연대순으로 그리면서 손택이 되고자 했던 문학가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하나의 ‘프로젝트’로서 조명한다. 손택은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는 탐독을 통해 자기 것으로 만든 판타지로 구성된 새로운 정체성을 얻고, 평생 신조로 삼은 자기창조를 시작, 온갖 이상과 관심사, 품행과 야망을 아우르는 ‘수전 손택 프로젝트’에 자기의 열정을 쏟아 부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내가 손택의 삶을 일일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손택의 저작에 관해서는 언급할 필요를 느끼는데, 이 저작들은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손택이 죽기 전까지 남기고 간 작품은 널리 알려진 에세이집 아홉 권, 논쟁을 불러일으킨 소설 네 편,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영화 시나리오 두 편,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채 남아있던 희곡 한편으로 그의 작품들은 당시 32개 언어로 번역된 상태였다. 대부분의 유럽인은 손택을 에세이 작가이자, 미국인 비평가로 기억할 텐데,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재미있는 점은 손택 그 스스로는 에세이스트나 비평가이기보다는 작가, 그러니까 소설가이기를 갈망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어린 시절 탐닉했던 <마의 산>의 토마스 만 같은 작가가 되기를 꿈꿨던 게 아닐까.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논쟁을 불러일으킨 소설’이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에세이스트로서의 명성에 비해 손택의 소설가로서의 자질은 그의 팬임을 자처하는 내가 보기에도 좀 부족해보이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 <타인의 고통>, <사진에 관하여>와 같은 에세이들은 얼마나 찬란히 빛나는가. 이 책은 이렇게 지성의 세계에 평생 머물기를 바랐던 어린 소녀 손택이 세계 최고의 에세이스트이자 비평가, 문화예술계 시대의 아이콘이자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우뚝 서기까지의 모습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수전 손택의 십대 시절부터 30세까지의 일기를 다룬 <다시 태어나다>에서 손택은 일찍이 ‘난 글을 쓰고 싶다. 나는 지적인 환경에서 살고 싶다. 음악을 많이 들을 수 있는 문화의 중심에서 살고 싶다. 이 모든 것과 그 이상을 원한다.’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렇게 살았다. 언제나 진지하고 열정적이며 사색하기를 좋아했던 아이 수전은 여덟아홉 살 무렵부터 글을 엄청나게 써댔다. 1985년 인터뷰에선 심지어 처음 글쓰기를 시도한 때가 일고여덟 살이라고도 했다. 1987년에는 예닐곱 살이라고 말하며 “희극, 시, 소설”을 썼다고 덧붙였다. 종종 자신을 극적으로 포장하려는 유혹에 사로잡힌 손택이라 어떤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찍부터 읽고 쓰는 삶에 빠진 것만은 틀림없다. 어린 시절 손택은 어머니와 불화했고(일기 <다시 태어나다>에서도 이 사실은 또렷하게 드러난다), 가족 안에서 “체류하는 이방인”이라 생각했으며 유년기라는 “장기 복역”에서 석방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손택에게 ‘손택’이라는 멋진 성(姓)을 남겨준 양아버지는 수전에게 “그렇게 책만 읽다가 남편감 찾기는 그를 거다”라고 훈계했지만 수전은 십대의 치기로 응수한다. ‘이 얼간이는 바깥세상에 지적인 남성들이 있다는 걸 모르는군. 다른 남자들이 다 자기 같은 줄 아나 봐.’
열여섯 살에 대학에 입학, 드디어 새로운 지성의 세계에 진입한 손택은 열일곱 살에 결혼, 열아홉에는 엄마가 된다. <수전 손택 - 영혼과 매혹>의 저자 다니엘 슈라이버는 이를 ‘너무나 맹렬하게 스스로를 밀어 붙여가며 성년기에 진입한 나머지 마치 청소년기에서 되도록 빨리 벗어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긴 것처럼 보일 정도’라고 했는데, 어느 정도 동의한다. ‘삶이라는 프로젝트를 위한 기준이 확고했기에 여느 10대 청소년처럼 질문과 체험, 시행착오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70쪽)는 평가 또한 그렇다. 나이 많은 남자 필립 리프와의 이른 결혼에는 할 말이 많다. 손택은 어린 나이에 자기의 학문적 우상과 결혼했지만 그 시절 보수적인 남자답게 필립 리프는 수전에게 그리 좋은 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단 그는 젊은 아내가 스스로 정체성을 찾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자기의 연구 활동을 위해 손택이 삶과 자아실현을 희생하기를 바랐다. 프로이트에 관한 중요 논문을 쓰면서 손택과 나눈 수없는 대화와 심지어 손택이 조사하고 작성한 내용을 가져다 썼다. 실제로 당시 비평가와 학계 동료들은 <프로이트: 도덕주의자의 정신>은 두 사람의 공동저작이라고 했을 정도였으나 리프는 학계의 인정을 손택과 나누려 하지 않았다. 이혼 합의서에는 손택이 리프와 함께 심혈을 기울여 작업한 책 <프로이트: 도덕주의자의 정신>을 리프의 단독 저작물로 한다는 조항까지 덧붙였다. 이런 두 사람의 차이는 ‘리프의 머릿속엔 대가족이, 손택의 머릿속엔 대도서관이 있었다’(88쪽)는 구절로도 명확히 드러난다.
손택은 훗날 리프와의 관계를 미화하는 말을 종종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동성애자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숨기기 위한 일종의 트릭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이 책에서 그려진 두 사람의 불화는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는 않는데, 이와 달리 손택의 일기인 <다시 태어나다>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통해 결혼에 관한 신랄한 그이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결혼을 발명한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 사람은 천재적인 고문 기술자였다. 결혼은 감정을 무디게 만들려고 작정한 관습이다. 결혼의 핵심은 반복이다. 그 최상의 목적은 강한 상호 의존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결혼에 관하여: 그게 전부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끝없이 다시 복제되는 말다툼과 부드러운 애정. 그저 말다툼의 농도가 점점 더 짙어져 애정을 줄 능력을 묽게 할 뿐이다.’ ‘결혼 생활을 하며 내 개성은 일정 부분 사라졌다. 처음에는 그 상실이 유쾌하고 쉬웠다. 이제는 그 상실이 아프고, 쉽게 불만을 느끼는 내 기질을 새로 맹렬하게 자극한다.’ 1975년 왜 리프와 이혼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손택은 여러 삶을 살고 싶었는데 남편과의 공생관계에서는 그게 불가능해 보였다고 말했다. 손택의 삶 중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 리프와의 이혼이 아니었을까.
손택은 자존심과 초기 페미니스트적 의식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위자로 받기를 거부한다. 게다가 무직 상태였음에도 아들을 위해 양육비를 청구하자는 변호사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다. 그리고 이 스물여섯 살 싱글맘은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로 이주해 작가, 영화감독 지식인으로 살고자 한다. 그리고 혼자 힘으로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마침내 꿈을 이룬다. 1959년 말, 손택은 자신이 남성뿐만이 아니라 여성도 욕망한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데 동성 연인 포네스와 함께 하는 동안 손택은 전에 몰랐던 성적 만족을 경험하고 이것을 글쓰기와 연관시키며 말한다. “나는 글쓰기를 욕망한다.” 글쓰기와 성적 욕구와 밀접히 연관된다는 사실은 점점 뚜렷해졌고 손택은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필요한 이유를 일기에 쓴다. “글을 쓰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내 동성애와 연관이 있다. 내게는 무기가 될 만한 정체성이 필요하다. 사회가 나를 향해 겨누고 있는 무기에 대항하기 위한 정체성. 이것으로 내 동성애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다만-내 느낌이지만-일종의 면허를 발급받는 거다.”(123쪽). 이 구절은 <다시 태어나다>에서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손택은 평생 자신의 성정체성을 명확히 밝히는 일을 꺼렸는데, 이는 “레즈비언 작가” “페미니스트 작가” 등 꼬리표를 피했던 것처럼 자기 작품이 정체성 정치라는 프리즘을 통해 읽히기를 원치 않았고 커밍아웃을 했다면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렇게 될 게 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958년, 필립 리프와의 결혼 생활 청산은 곧 아카데미에 갇힌 삶과의 결별을 뜻하기도 했다. 손택은 문학과 영화학, 문화사 같은 분야의 논문에 정통했지만, 그의 에세이적인 글쓰기는 학술적 글쓰기와 상반되었고 손택은 작가의 삶과 학자의 삶이 서로 배타적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학문적 삶이 우리 세대 최고의 작가들을 파괴하는 것”을 목격했으며 결국 엄청나게 가부장적인 대학 세계에 속한 여성이기를 스스로 거부한다. 이후 손택은 1962년 <파르티잔 리뷰>에 에세이를 발표하고 이듬해 첫 소설 <은인>을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수전 손택 프로젝트’에 들어간다. 이 시기는 1964년부터 1980년까지, 손택의 30~40대, 정확히는 31세부터 47세까지의 일기와 메모를 담고 있는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에서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이 무렵의 손택은 작가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절정기를 누렸다. <해석에 반대한다>, <은유로서의 질병>을 비롯한 평생의 걸작들이 이때 탄생했다.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는 그 무렵 손택의 기록으로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등등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수전 손택과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로서의 위대한 성공 과정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시절 어울렸던 각계각층의 작가, 예술가, 지식인과의 만남을 보여준다. 또한 어린 시절 꿈꾼 그대로, 마음만 먹으면 어디로든 여행할 수 있는 여력, 이 모든 걸 얻었음에도 ‘여전히 열렬히 배우는 학도’로서의 모습을 담담하지만 열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손택의 일기 3권은 아직 출간이 되지 않아 그 말년의 기록을 읽을 수는 없었는데 <수전 손택 - 영혼과 매혹>에서 그 갈증을 조금 채울 수 있었다.
내 독서는 탐욕스러운 사재기. 축적. 미래를 위한 비축. 현재의 빈 구멍을 채우려는 노력이다. -<다시 태어나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내 옷장에 걸려 있는 옷가지처럼 바로 곁에서 낡은 감수성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새로운 감수성을 포기하지 않기. -<의식은 육체의 굴레에 묶여>
“하루는 24시간이지만 저는 하루가 48시간인 것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수전 손택-영혼과 매혹>
어린 시절에는 탐욕스러운 독서로 자기만의 지성의 세계를 쌓아가고, 작가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에도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 하던 수전 손택. 손택은 암과 투병하고 백혈병으로 싸우면서도 하루가 48시간인 것처럼 살고자 노력했고 실제로 또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그 열정은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영향력을 발휘해, 삶을 긍정하는 충동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손택은 ‘세계문학에 새 생명을 불어놓고 문학의 우수성을 열정적으로 옹호’함으로써 손택이 아니었다면 파묻히고 말았을 작가들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손택이 읽은 다음, 그 특유의 ‘주제가 되는 작가와 작품의 특징을 적절히 물 흐르듯 전기를 그려’냄으로써 세계에 그 이름을 알린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니엘 슈라이버는 손택의 그러한 행위가 그 자신이 꿈꾼 “위대한 도서관을 위한 프로젝트”를 실질적으로 확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면서 손택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더라면 후안 룰포와 같은 작가의 책이 영어로 번역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그러한 평에 나 또한 크게 공감한다. 어디 후안 룰포만 그러할까. 제발트를 비롯해 로베르트 발저, 레오니드 치프킨 등등 위대한 작가를 나 또한 손택을 통해 알게 되지 않았던가.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난 ‘모든 걸’ 바꿔 놓을 사람이나 예술 작품과 조우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던 수전 손택. 손택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여러 책을 남겼다. 그는 “책을 많이 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뒤에도 읽을 탁월한 책을 몇 권 쓰고 싶어요.”라고 말했는데, 그의 빛나는 에세이 <은유로서의 질병>, <타인의 고통>, <사진에 관하여>, <해석에 반대한다> 등은 틀림없이 100년 뒤에도 읽히며 여전히 사람들에게 놀라운 영감을 줄 것이다. 손택과 가까이 지낸 출판 에이전트 앤드루 와일리는 일흔을 앞두고도 손택은 나이든 여성처럼 행동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만년에도 손택은 여전히 스물한 살 같았습니다. 언제나 모르는 것에 관심이 있었죠. 많은 사람이 만년에 이르면 자기가 아는 것에 의존하죠. 하지만 수전은 어제 태어나서 여전히 온 세상이 신세계인 것처럼 살았습니다.”(399쪽) 언제나 온 세상이 신세계인 것처럼 뜨겁게 살았던 수전 손택. 손택은 여전히 나에게 자신처럼 갈망하고 읽고 보고 생각하고 쓰고, 또 쓰라고, 그렇게 뜨겁게 살라고 외친다.

내 책꽂이의 손택 코너- 저 빛나는 에세이들! 정녕 지성의 전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