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레이디
윌라 캐더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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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잊기 어려운 시절이 있다. 순수하고 밝은, 찬란하게 빛나서 좀처럼 잊기 어려운 그런 시절. 그러나 대개 그런 시절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어떻게든 빛이 바래고 어두운 색으로 물들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잠깐일지라도 자기에게 주어졌던 그 찬란한 시절을, 순간을 기억 속에 담고 살아간다. 다시 돌아오지 못해 더 안타까운 그 아름다운 순간을……. 열두 살 소년 에게도 그런 시절이 분명 있었다. ‘포레스터 부인을 처음 본 그 순간이었을까? 아니면 포레스터 부인과 함께 아무런 걱정 없이 환하게 웃고 떠들던 날들이었을까? 아니면 포레스터 부인으로 말미암아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던 그 모든 날들까지일까? <로스트 레이디>는 한 소년의 첫사랑이었던 어느 여성의 삶을 따라가면서 잃어버린 시절의 아름다움과 그 쓸쓸함을 그려나간다.

 

서부 개척시대가 끝날 무렵 네브래스카의 작은 마을 스위트워터’-이곳에는 지나가는 이들을 융숭하게 대접하며 환대하는 것으로 유명한 특별한 집이 있다. 모두가 포레스터 플레이스라고 부른 그 집은 사실 전혀 특출 나지 않다. 오히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이 집을 실제보다 웅장하고 아름다워 보이게 만들었다. 철도 건설업자로 부를 쌓은 대니얼 포레스터 대령과 그의 아내 포레스터 부인이 그곳을 특별하게 만드는 이들이다. 일 년 중 몇 달밖에 이곳에서 지내지 않는데도, 그들 부부는 이곳에 머무는 손님들을 환대하며 특별한 인상을 심어주었고, 특히 포레스터 부인은 자신들의 사유지에 무단으로 들어와 노는 동네 소년들에게도 너그럽기 짝이 없다. 그런 소년들 중 하나였던 닐은 포레스터 부인을 흠모하고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이 대령 부부와 좀 더 가깝게 지내게 된다.

 

엄마 나이뻘 여성을 흠모하는 것일까 싶은데, 사실 포레스터 부인은 대령보다 스물다섯 살이나 어리다. 대령이 재혼한 두 번째 아내로, 오히려 이 십대 소년들과 가까운 나이이다. 그렇기에 포레스터 부인, 메리언은 이 소년들과 허물없이 지내며 그녀가 가진 우아함, 화사함, 젊음, 따스함, 발랄함 등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발산하고, 닐과 같은 소년들은 귀부인답지 않게 자기들을 허물없이 대하는 그녀를 남다른 존재로 받아들이고, 얼마쯤은 우상처럼 받든다.

 

부유하면서도 강직한 마음을 지닌 포레스터 대령은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 인물이다. 자신의 두 번째 아내를 아가씨라 부르며 귀여워하고, 나름 존중하며 사랑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아무래도 쉽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스물다섯 나이 차이가 그렇다. 서부 개척시대, 스위트워터가 유망한 타운이던 시절에는 이 저택에서 파티가 곧잘 열렸고, 그런 파티에서 메리언은 주위의 찬사를 받으며 파티의 주인공으로 눈부신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한다. 세상은 변하고 나이든 대령도 그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이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가는 닐의 시선으로 섬세하게 그려진다.

 

닐에게 메리언은 첫사랑이자 자기 인생의 아름다운 시절 그 전부였다. 그러나 닐이 메리언을 처음 본 것은 열두 살 때로, 이 어린 소년의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가 분명 존재한다. 닐뿐만이 아니라 대령과 대령의 집을 찾아오는 중년 남성들에게 아름다운 꽃과 같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여겨진 포레스터 부인은, 그들의 생각, 아니 기대처럼 불멸하는 예술작품이 아니다. 살아 숨 쉬고 욕망하고 꿈꾸고, 때로는 그 욕망 때문에 부서지는 인간이다. 때문에 당연히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메리언이 지닌 결함은 그녀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녀의 욕망은 어쩔 수 없이 소년 닐을 비롯해, 남편인 포레스터 대령을 상처 줄 수밖에 없다. 사실 닐이 좋아하는 메리언의 모습은 포레스터 대령의 아내일 때가 많다. 닐은 대령의 아내로서 그녀에게 가장 큰 흥미를 느꼈으며 남편과의 관계에 비추어 본 그녀의 모습을 가장 흠모한다(93). 그러나 메리언은 스물다섯이나 많은 남편과 사는 젊고 발랄한 여성으로, 네브래스카에서의 삶을 좌초된 삶이라고 부른다. 포레스터 대령이 경제적으로 쪼들리면서 여행을 떠나지 못하게 되고, 스위트워터에 내내 머무는 신세가 되었을 때 메리언은 절망한다. “내년 겨울에도 내후년 겨울에도 계속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해 봐! 내가 어떻게 되겠니, ?”하고 묻는 메리언의 목소리에는 공포가, 두려움이 배어 있다. 이곳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할 게 없다. 캘리포니아 출신인 그녀는 스케이트를 타지 않는다. 콜로라도스프링스에서 끊임없이 열리는 댄스파티에서 겨울에도 늘 춤을 췄다. “난 여든 살이 될 때까지 춤출 거야. 왈츠를 추는 할머니가 될 거라고!”(92) 외치는 메리언에게 대령과 그와 함께 보내는 네브라스카에서의 삶은 좌초가 아닌 절망 그 자체일 것이다.

 

닐은 성장하고, 메리언은 나이 들어간다. 서부 개척시대 끝자락, 닐이 본 것은 이미 찬란한 빛을 소진한 황혼의 여운’(193)이다. 대령의 몰락과 함께 메리언은 스스로 살아남고자 안간힘을 쓴다. 닐이 사랑했으나 좀처럼 이해할 수는 없었던 여인 메리언은 자기 안에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직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기에 그걸 되찾고자, 그것 때문에 이 구덩이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그런데 그 방법은 닐이 사랑했던 그녀의 모습과 많이, 너무도 많이 어긋나 있기에 닐은 상처받고 당혹해한다. 그런 메리언의 모습을 보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하나를 잃었다고, 이슬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아침이 망가졌다고, 그리고 앞으로 맞이할 모든 아침도 망가졌다고 그는 씁쓸하게 되뇐다. “썩은 백합은 잡초보다 악취가 역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메리언이 썩은 백합인지, 잘못 이식된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고자 온갖 방법으로 애를 쓴 강인한 잡초였는지 판단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이의 몫이리라.

 

<로스트 레이디>에서는 닐과 포레스터 부인의 이야기 외에 뜻밖으로 묘한 감동을 주는 인물들이 있다. 닐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 메리언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존재로 여겨진 포레스터 대령의 인간다운 면모(특히 마지막 후반부에 밝혀지는), 소년들 가운데 제 나름으로 포레스터 부인에게 존경심과 충성심을 표현한 그 인물이 그렇다. 특히 끝부분에 장례식에 참석하지는 못해도 풍성한 노랑 장미를 갖고 온 그 소년. 온종일 창백한 얼굴로 침착함을 유지하던 포레스터 부인이 그 꽃다발을 보고는 와르르 무너졌듯이 나 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그 옛날 메리언의 비밀을 목격하고도 침묵을 지켰던 소년이 아니었던가. 아마도 그 소년에게도 포레스터 부인과 포레스터 대령은 삶에서 꽃처럼 피어난 존경심과 충성심을 바칠 드문 사람들이었을 테고, 그는 그것을 제 나름대로 지켜간 것이었으리라. 언젠가 꽃은 시들고, 그 아름다운 모습도 향기도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지라도, 아침에만 느낄 수 있는 꽃의 신선함처럼 영영 사라질 지라도 마음속으로는 그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히 박제해 두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닐이 눈부신 나날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전부 사라졌다고 회한에 찬 말을 하더라도, 한때 그가 사랑했던, 매혹 당했던 우아함, 다채로움, 사랑스러운 목소리, 검은 눈동자 속에서 빛나던 즐거움과 환상. 이 모든 것들은 영원히 잊히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마음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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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2-02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달에 살까말까 망설였는데...

도서관에 신착도서로 누군가 신청해
두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순서를 기
다리고 있는 중이랍니다.

빨랑 만나 보고 싶습니다.

잠자냥 2021-02-02 14:08   좋아요 0 | URL
윌라 캐더 <우리 중 하나>를 사 읽어보려던 참에, 폴스타프 님의 리뷰(번역 관련) 읽고 그 책은 안 읽기로 했거든요. 그러던 중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레샥매냐 님께 빨리 순서가 오길~ ㅎㅎ

단발머리 2021-02-02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근사한대요. 잠자냥님 리뷰 읽고 나니까 마음이 막 조급해지네요.
사실, <티끝 같은 나> 대기하고 있거든요. 잠자냥님과 공쟝쟝님의 그러니까, 잠자쟝님들의 2020 최고의 책이요.
이거 읽어야 다음책 읽는데, 우아! 포레스터 부인, 저도 만나고 싶어요 @@

잠자냥 2021-02-02 14:11   좋아요 1 | URL
하지만 그러나 저는 <티끌 같은 나>부터 읽으시라고 하고 싶습니닷!! 잠자쟝들의 최고의 책!

다락방 2021-02-02 14:20   좋아요 0 | URL
단발님 일단 티끌 같은 나 먼저 읽으세요. 왜냐하면 저 아직 이 책 안샀으니까, 이건 제가 책을 산 다음에...(왜?)

잠자냥 2021-02-02 14:23   좋아요 0 | URL
그럼 단발머리 님은 3월 이후에 이 책을 사셔야 하네요. 또르르.. T.T

다락방 2021-02-02 14:25   좋아요 0 | URL
그건... 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흠흠..

잠자냥 2021-02-02 14:26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망설이는 동안에 <그녀들의 이야기> 절판 됐어요!!!! 아니, 작년에 나온 책이 이게 무슨 일이지?? 판권 때문인가....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0539628

단발머리 2021-02-02 14:37   좋아요 0 | URL
어머나 이를 어째 ㅠㅠㅠ
일단 저는 티끌부터 시작해야할텐데요🥺

유부만두 2021-02-02 18:26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맘이 막 급해져요. 아, 내가 정말 서재 끊든지 해야지, ...

Falstaff 2021-02-0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달 말이나 담 달 초에 예정 잡혀 있는 책이라, 내용은 걍 휘리릭 날려 읽고 마지막 문단은 잘 읽었습니다.
캐더 책들에서 볼 수 있는 선량하고 곧은 사람들 이야기인 것 같아 안심이 되는군요.
아, 난 울면 안 되는데.... ㅋㅋㅋㅋ

잠자냥 2021-02-02 15:19   좋아요 0 | URL
그럼요, 읽을 책은 줄거리 휘리릭~ 넘어가는 게 현명하지요.
네, 딱히 악한 인물은 없다고 봅니다. ㅎㅎ

blanca 2021-02-02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너무너무 좋죠! 잠자냥님, 헉 저는 대충 읽었나 봐요. 그 비밀 지켜줬던 소년이랑 마지막에 부인 죽음 전달해 준 사람이 동일인이군요!! 세상에나...

아, 윌라 캐더 너무 좋아요. 지금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 대기중이랍니다. 잘 읽고 갑니다.

2021-02-02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1-02-02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 리뷰 읽으니 핏츠제럴드 생각이 너무 나네요. 그의 단편 중에 <겨울 꿈> 이요. 그 단편이 너무 겹쳐져요!!

잠자냥 2021-02-02 23:07   좋아요 1 | URL
오, 놀라우신 분! 안 그래도 이 작품을 읽고 피츠제럴드가 윌라 캐더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아무래도 자기 작품이 당신의 작품 몇몇 구절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거 같다, 표절처럼 보일 거 같아서 설명하려고 한다 뭐 그런 편지요. 윌라 캐더는 너그러운 답장을 보냈는데 이 책 말미에 그 둘이 주고받은 편지도 실려 있습니다. ㅎㅎ

다락방 2021-02-03 05:47   좋아요 0 | URL
그 단편에 그런 문장 나오거든요. ‘꿈이 사라진 것이었다’ 이 문장이 완전 겹쳐요!!

2021-02-10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0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6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6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