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자신의 쾌락을 꿈꾸기 

1. 아르테미도로스의 방법
아르테미도로스의 <<해몽의 열쇠>>는 독자에게 어떻게 한 편의 꿈을 여러 요소들로 분해하고 그 꿈의 진단적 의미를 확립하는지, 또 어떻게 그러한 요소들에 입각하여 전체를 해석하며, 각 부분을 해독함에 있어서 이 전체를 어떻게 고려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가르쳐 주는 책이다. 그리고 아르테미도로스가 이 책에서 대상으로 삼는 꿈꾸는 사람의 전형은 일개 평범한 개인으로서 대부분의 경우 가정과 재산, 또 대부분 직업을 가진 남자이며, 종종 하인과 노예들을 거느리기도 한다. 이처럼 아르테미도로스의 책은 하나의 생활방식과 보통 사람들이 지닌 관심사들의 한 유형을 드러내는 ‘일상적 삶을 위한 개설서’이다.
한편 아르테미도로스는 이 책을 통해 몽복술의 반대자들을 논박하고, 어떠한 형태의 점술도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는 회의주의자들을 설득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구체적인 설명보다는 신중한 조사방식과 방법적 논쟁을 통해 꿈을 밝히고 있다. 즉 이전 문헌의 광범위한 조사와 그 속에 있는 풍부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경험과 대조해 보고, 추론과 증명 작업을 통해 꿈을 검토하였다. 우리는 성적인 꿈의 분석 밑에 감춰진 도덕적 원칙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먼저 아르테미도로스가 적용한 분석방법에 잠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르테미도로스는 꿈을 “에누프니아”와 “오네이로이스”의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한다. “에누프니아”는 상태, 즉 욕망에 대한 꿈으로 개인에 관해 말하며, 육체와 영혼의 상태로부터 파생되고, 욕망과 혐오감의 영역에서 너무 과도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결핍된 것의 작용을 드러내어 현재 상태에서의 마음의 현실을 드러낸다. “오네이로이스”는 사건, 즉 존재에 대한 꿈으로 세상사와 시간의 사슬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미리 말해 주며, 영혼에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영혼을 형성하고, 세계의 질서 속에서 사건의 미래를 말해 준다. 아르테미도로스는 꿈의 두 가지 범주마다 또 다른 형태의 구분을 시도한다. 즉 해독이나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스스로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과, 비유적 방식으로 처음과 다른 이미지들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의 구분이다. 또한 두 가지 구분 사이의 작용은 꿈을 꾸는 주체의 존재양상들(덕성스러운 영혼과 평범한 영혼)에 따라 구별된다. 아르테미도로스가 꿈의 유형, 의미 방식, 그리고 주체의 존재양상 사이에 설정한 관계는 다음 표와 같다.   




 


상태에 대한 꿈


사건들에 대한 꿈


직접적으로


징조에 의해


정리적


우의적


덕성스런 영혼의 경우


 


결코 일어나지 않음

(비이성적인 충동을 다스릴 줄 알고 자신의 육체도 균형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


대개의 경우

(신이 직접 이야기한다는 것은 전통)


 


평범한 영혼의 경우


전문가


 


대개의 경우


 


대개의 경우


비전문가


대개의 경우


 


 


결국, 아르테미도로스가 <<해몽의 열쇠>>에서 해몽 작업의 영역으로 규정한 것은 평범한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우의적인 꿈이다.

한편 꿈의 알레고리에 대한 해독은 유추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아르테미도로스는 이러한 유추를 두 가지 차원에서 작동시킨다. 하나는 꿈의 이미지와 그것이 예고하는 미래의 요소들 사이의 성질상의 유추이며, 다른 하나는 해몽술이 일어날 사건이 길한 것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가치상의 유추이다. 따라서 해몽의 두 가지 큰 규칙인 꿈은 존재를 말하되 유추의 형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꿈은 현실 속에서 주체의 존재양식을 특징짓게 될 사건이나 행운 혹은 불운, 번영 혹은 불행을 말하되, 꿈속 성행위 장면의 행위자로서의 주체의 존재양상(좋거나 나쁘거나, 길하거나 흉하거나)과의 유추관계를 통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문헌 속에서 주체의 윤리학을 계시해 줄 것을 찾자.

2. 분석
아르테미도로스는 성적인 꿈을 법률에 부합하는 행위,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 자연에 위배되는 행위라는 세 가지 행위유형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명료하지 않으며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다.

“법률에 부합되는” 행위에 관한 장에서 아르테미도로스는 꿈의 예측적 의미, 즉 일정한 방식으로 꿈에 나타난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의 형태가 아니라 남자가 됐건 여자가 됐건 파트너의 조건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이때의 조건이라는 말은 “상대방”의 사회적 신분이다. 따라서 법률에 부합하는 행위에는 부부관계나 애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창녀와의 관계, 지나가는 여성과의 관계, 하인과 노예와의 관계, 다른 남자와 맺는 능동적․수동적 관계, 심지어 수음행위까지도 광범위하게 포함되어 있으며 이러한 성적 파트너와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길흉의 징조를 파악한다.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로는 근본적으로 근친상간,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로 한정한다. 먼저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 맺는 꿈의 경우, 그 꿈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을 언제나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에 반해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은 종종 길조의 조짐으로 파악한다. 왜냐하면 어머니를 무수한 사회적 관계와 활동형태에 대한 일종의 모델이자 원형으로 만듦으로써 그것에 종종 길조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때문이다.

“자연에 위배되는” 행위로는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자연이 정해 준 위치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 즉 정해진 체위(인간의 경우 정상위)를 벗어나는 것이며, 아르테미도로스는 오랄 에로티시즘에 특별히 중점을 둔다. 또 다른 하나는 파트너가 지닌 고유한 “특성” 자체를 위배하는 것으로 아르테미도로스는 신들과의 성 관계, 수간, 시간, 자기 자신과의 관계, 두 여자와 맺는 관계를 들고 있다. 그리고 자연에 위배되는 이러한 행위는 대부분 흉조를 의미한다.

3. 꿈의 행위
아르테미도로스의 꿈 분석에는 항상 두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먼저 꿈꾸는 주체와 꿈에서 보여 지는 행위주체가 정확히 일치한다. 한편 성행위와 성적 쾌락은 꿈의 구성요소 및 사건을 예측하게 하는 요소로서 분석되고 재분류된다. 따라서 그의 해석 작업은 성행위와 꿈속에서의 주체의 역할에서 출발하여 꿈에서 깨어난 이후 그에게 일어날 일을 해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래서인지 아르테미도로스의 점술은 성적인 꿈들에서 어떤 사회적 의미를 매우 일정하게 해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이유는 첫째, 언어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즉, 그리스어에는 성적 의미와 경제적 의미가 거의 같이 쓰여 진다. 둘째, 그의 저술이 갖는 특수한 형식과 목적에서 기인한다. 즉, 그의 책은 남성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남자들에게 바쳐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꿈의 이미지들을 통해 밝혀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가족적, 경제적, 사회적 삶의 짜임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성적인 꿈이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장면처럼 지각․가공․분석된다는 점도 중요하다. 따라서 아르테미도로스가 사용하는 분석방법을 따라가 보면, 성공 또는 실패, 사회적 출세 혹은 불운의 용어로 표현되는 “아프로디지아”의 꿈들에 대한 해석이 꿈과 사회의 사이에 일종의 동질성을 가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분석을 위한 재료로서 취해진 꿈의 요소들의 차원과 그 요소들에 의미(예측적 ‘가치’)를 부여해 주는 원칙들이 차원으로 나타난다.

아르테미도로스가 자기 분석의 타당성을 제시하는 성적인 꿈의 양상은 등장인물과 파트너를 사회적 특징을 고려한 사회적 윤곽으로서만 나타낸다. 그리고 등장인물들과 꿈꾸는 사람 사이의 관계는 단지 삽입이라는 본질적 형태를 중심으로 매우 단순하게 구성된다. 삽입행위는 몇몇 체위의 변화, 특히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그것의 양극과 함께 성행위의 질을 규정짓는 요소로 나타난다. 이러한 삽입행위는 사회적 배경 내부에서 즉각 감지된다. 그는 삽입행위와 관련된 요소들을 통해 성행위를 우선 지배와 복종의 “전략적” 게임으로, 또한 손실과 이득의 “경제적” 게임으로 본다. 주목해야 할 것은 성행위의 질을 규정하는 요소들이 사회적으로 표명되는 요소들에 대한 분석을 사전에 충족시킨다는 사실이다.

아르테미도로스는 분석의 타당성을 위해 성적인 꿈의 “가치”를 세우는데, 그 가치는 예고되는 사건의 유형뿐만 아니라 그것의 “질”을 의미한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긍정적 가치”를 지닌 성행위는 법에 의해 허용되고 여론에 의해 존중되며 관습에 의해 인정되는 성행위와 대부분 일치한다. 그러나 차이(어머니와 근친상간)도 있으며 이 차이는 중요하다. 결국, 꿈에 나타난 성 관계의 질(가치)을 규정하는 것은 “깨어있을 때의” 사회적 관계와의 합치여부이다. 이 원칙은 “위치의 유사성”의 원칙, 즉 성관계를 맺는 꿈꾸는 주체와 꿈속 파트너가 실제 현실 속에서 맺고 있는 위치의 부합관계와 “경제적 합당성”의 원칙, 즉 성행위에 내포된 “지출”과 “이득”이 적절하게 조정되어야 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이상과 같이 아르테미도로스는 <<해몽의 열쇠>>를 통해 개인을 성 관계 속에서 능동적 주체로 구성하는 것과 사회적 활동 영역 속에 위치시키는 것 사이의 소통을 잘 보여준다. 책의 또 다른 한 단락에서는 꿈에 나타난 다양한 신체 부위들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문제가 된다. 남근은 도시국가 및 세계 속에 개인의 지위를 고정시키는 모든 관계와 활동에 대한 기표이다. 남근은 이 모든 지배 게임의 갈림길에서 모습을 나타낸다. 먼저 자기 절제의 게임으로, 그 다음 성행위 파트너에 대한 우월성의 게임으로, 또한 출생의 특전과 지위의 게임으로 말이다.
한편, 성적인 꿈에 할애된 아르테미도로스의 장들은 고대에서는 친숙한 정경이다. 우선, 남성적 인물이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와 성 관계에서 남성 역할에 부여된 주요성이 매우 강하게 부각되는 세계이며, 결혼이 성적 쾌락을 위한 최상의 환경으로서 간주되기에 충분한 가치를 부여받은 세계이다. 그리고 규약의 여러 요소가 존재하지만 극히 적을 뿐 아니라 매우 불분명하고 성행위의 질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이러한 규약의 요소들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반면 우리는 해석의 절차 자체를 통하여 성행위를 판단하는 또 다른 방식과 평가원칙을 볼 수 있다. 하나의 자연적 구조와 실제적 규제에 대한 행위의 적합성여부보다는 주체가 자신의 가족적, 사회적, 경제적 생활의 다른 측면들과 성행위 사이에 설정한 관계, 즉 주체의 “행위양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기울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성행위자로서의 주체로부터 그 주체가 활동하는 삶의 다른 영역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아프로디지아”에 대한 도덕적 경험의 기본 특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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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주권, 즉 전지구적 통제 사회의 관리 
 

자본과 주권은 모순적인 결합으로 보일 수 있음. 주권은 주권자의 초월성에 근거하며 특히 근대 주권은 영토, 주민, 사회적 기능 등등의 사이에 고정된 경계들을 만들고 유지함으로써 작동함. 즉, 주권은 사회적 장의 홈패임을 통해 작동함.
이에 반해, 자본은 초월적 권력 중심에 의거하지 않고 지배 관계의 연계와 네트워크를 통해 내재성의 구도 위에서 작동함. 자본은 역사적으로 전통적인 사회적 경계들을 파괴하고, 영토를 가로질러 확장하고, 그러한 과정들 안에서 새로운 주민들을 감싸 안는 경향이 있음. 즉, 자본은 탈코드화된 흐름들, 유연성, 계속적인 조율, 균등화 경향에 의해 규정되는 매끄러운 공간을 향하는 경향이 있음.
따라서 근대적 주권의 초월성은 자본의 내재성과 충돌하며, 역사적으로 근대적 주권 패러다임들은 특정한 역사 시기 동안 자본의 작동을 지지하지만, 결국은 극복해야 할 자본 발전의 장애물들임.
한편 시민사회는 어떤 역사 시기 동안 자본의 내재적인 힘들과 근대적 주권의 초월적 권력 사이의 매개자로 복무함. 그러나 현재 시민사회는 더 이상 이러한 매개지점에 복무하지 않음(노동조합의 예). 이러한 시민사회의 소멸은 또한 훈육 사회에서 통제 사회로의 이행과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음. 이처럼 제도들의 붕괴, 시민사회의 소멸, 훈육 사회의 쇠퇴는 모두 근대적인 사회적 공간의 홈패임을 매끄럽게 하는 것을 포함함. 여기서 통제 사회의 네트워크들이 발생.
훈육 사회 및 시민사회와 관련하여 볼 때, 통제 사회는 내재성의 구도를 향해 더 나아감. 먼저 훈육 제도는 그 자체가 주권이 아니라, 주체성 생산의 사회적 장으로부터의 훈육 제도의 추상화나 그 장을 넘어선 훈육 제도의 초월성이 훈육 사회의 주권 실행에서 핵심 요소를 구성. 따라서 주권은 가상적이고 현실적임. 언제 어디서나 훈육의 실행을 통해 실현됨. 통제 사회는 훈육의 내재적인 실행을 더 일반적으로 확장시킴. 즉 통제 사회로의 이행에서 훈육 사회의 초월적인 요소들이 쇠퇴하는 반면, 내재적인 측면들은 강조되고 일반화됨.
통제 사회에서 주체성의 내재적 생산은 공리계적인 자본의 논리와 일치하고, 그것들의 유사성은 주권과 자본 사이의 새롭고 보다 완벽한 양립 가능성을 가리킴. 통제 사회로의 이행은 정체성에 고정되지 않는, 잡종적이고 변화하는 주체성 생산을 포함하며, 이러한 잡종적 주체성은 어떤 정체성에도 속하지 않고 모든 정체성에 속하여 제도 바깥에 있지만 제도들의 훈육 논리에 훨씬 더 강하게 지배당함. 바로 제국적 주권처럼, 통제 사회의 주체성들은 혼합된 구성을 지님.

매끄러운 공간
국민 국가 경계의 홈패임을 매끄럽게 하는 전지구적 통제 사회의 확립은 세계 시장의 실현과 자본 아래 전지국적 사회의 실질적 포섭과 함께 진행됨.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제국주의는 자본의 생존과 팽창에 기여하였지만 효과적으로 자본, 노동, 상품의 자유로운 흐름과 세계 시장의 완전한 실현을 막으면서 내외부의 경직된 관념들을 만들어 내고 강화시킨 전지구적인 홈패임 기계임. 그러나 세계 시장은 코드화되지 않고 탈영토화된 흐름으로 이루어진 매끄러운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제국주의는 극복되지 않으면 자본의 죽음일 것’이며, 따라서 세계 시장의 완전한 실현은 필연적으로 제국주의의 종말임.
국민 국가 권력의 쇠퇴와 국제 질서의 해체는 “제3세계”라는 용어의 효과도 결정적으로 제거함. 제3세계는 자본의 측면에서 제1세계의 잠재적 자본확대와 자본의 미래정복의 가능성을 가진 지형, 즉 열린 공간이었으며, 이러한 잠재적 포섭이라는 입장에서 제3세계는 실제로 하나였음.
또한 자본주의 영역 안에서 중심, 주변 그리고 반주변 국가들을 구별하는 이론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국제적 대립의 잠재적 통일성, 즉 반자본주의 국가들과 세력들의 잠재적 합류를 지칭함.
그러나 국민 국가들 사이의 혹은 심지어 국민 국가들의 중심과 주변, 북과 남 사이의 지리적 구분은 더 이상 생산, 축적, 그리고 사회적 형태들의 전지구적 분할과 배분을 파악하는데 충분치 않으며, 생산의 탈중심화와 세계 시장의 공고화를 통해 노동과 자본의 국제적 분업과 흐름은 깨지고 다양화하여서, 거대한 지리적 지대들을 중심과 주변, 북과 남으로 구분할 수 없음. 또한 차이가 있더라도 분성의 차이는 없고 오직 정도의 차이만 존재.
물론, 국제 질서의 보증자였으며 제국주의적 정복과 제국주의 주권에 핵심이었던 국민 국가는 반제국주의 세력의 성장과 조직화 시기 내내 국제 질서를 가장 위협하였음. 그러나 국민 국가의 쇠퇴는 구조적이고 불가역적임. 국민의 사법적-경제적 구조를 대체하는 GATT, WTO, IMF 등 전지구적인 사법적-경제적 기구들의 진화현상과 좀 더 중요하게는, 비록 국민이 여전히 효과적인 무기일 수 있을지라도, 국민은 완전하게 억압적인 구조들과 이데올로기들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국민에 의거하는 모든 전략을 거부해야 함.

새로운 분할
시민사회의 소멸과 국가 경계의 쇠퇴 속에서 사회적 불평등과 분할은 더욱 심해져 제국은 이를 특징짓고, 이 때문에 영구적인 사회적 위험 상황을 만들어 내며, 분리를 유지하고 사회적 공간의 새로운 관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통제 사회의 강력한 장치들을 필요로 함. 새로운 분리와 분할은 컴퓨터 및 정보혁명을 통한 노동자들의 사이의 격렬하고 무제한적인 경쟁이라는 노동의 정치에 의해 더욱 분명하게 정의됨. 이곳이 제국의 행정 행위론의 중심. 제국의 노동 정치는 사실상 본원적 축적 과정, 재프롤레타리아화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을 더욱 분화시키고 분할시킴. 또한 화폐 정책은 노동 정책이 명령한 분할을 강화함.
소통 정치를 통한 폭력, 빈곤 그리고 실업에 대한 공포는 새로운 분할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힘이며,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노동을 위한 투쟁을 만들어 내고 제국적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갈등을 유지하는 데 핵심 열쇠이며, 새로운 분할을 궁극적으로 보장하는 것임.

제국적 행정
제국적 행정을 규정하는 첫 번째 원리는 제국적 행정 안에서 정치적 목적의 관리가 관료적 수단의 관리와 분리되는 경향이 있음. 행정 문제는 통일성의 문제가 아니라 도구적인 다기능성의 문제. 제국 체제에서 근본적인 것은 특별한 목적을 위한 행위들이 지닌 특이성과 적합성임.
두 번째 원리는 사회적 통합에 기여하는 대신 제국적 행정은 오히려 분산시키고 분화시키는 메커니즘의 역할을 함. 각자를 다르게 다루는 절차들의 차별화와 특이화가 모든 것을 동등하게 다루는 보편성이라는 낡은 행정 원리를 대체하는 것임.
세 번째 원리는 행정 행위는 근본적으로 비전략적이므로, 이질적이고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 정당화함. 행정 행위의 자율성과 통일성은 경찰과 군대의 논리, 경제 논리,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이고 소통적인 논리와 같은 제국을 구성하는 데 능동적인 구조적 논리들에 순응함으로써 만들어짐. 이상이 제국적 행정 행위에 관한 세 가지 “소극적인” 원리들(도구적인 특성, 절차적인 자율성, 그리고 이질성)임.
폭력적인 사회적 적대를 지속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제국적 행정 행위를 기능하게 하는 제국적 행정이 지닌 “적극적인” 특징인 네 번째 원리는 국지적 효율성임. 중세 봉건적인 영토 조직과 군주 권력 구조 사이의 예와 근대 마피아 조직과 국가 구조 사이의 예에서처럼, 국지화된 행정 기구들이 지닌 자율성은 제국적 행정과 모순되지 않고 반대로, 전지국적 효율성을 돕고 확대함. 따라서 제국 체제의 발전에 국지적 자율성은 필수 조건임. 또한 제국 체제에 대한 동의는 체제의 국지적 효율성을 통해 형성됨.
하지만 제국 행정은 최후의 위협, 폭동, 전복, 봉기에 맞서, 또한 심지어 행정의 국지적 분파들 사이에서의 정상적인 갈등에 맞서 체계를 지킬 수 없음. 우리는 여기서 행정문제가 명령 문제로 변형됨.

제국적 명령
제국적 명령은 근대 국가와 달리 생체 정치적 통제의 양태들을 통해서 실행됨. 그리고 명령 체계의 조직된 주체는 인민이 아니라 대중이 지닌 이동성, 유연성 그리고 영구적 분화에 의해 대체됨. 대중은 탈근대적 자본주의 체계의 도구로 지배되고, 실질적으로 포섭된 사회관계 안에서 지배됨. 그러나 대중은 자신의 탈영토화된 자율성 속에서 생체 정치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자율적인 많은 지적 생산성으로, 절대적 민주 권력으로 변형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지배의 전복도 가능함. 결국 제국 정부[통치]의 첫 번째이자 주요한 임무가 이를 막는 것임. 하지만 제국의 구성은 또한 이런 위협을 제기하는 생산적 협동을 하는 자율적 세력들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세력들의 역능은 통제되어야지 파괴되어서는 안됨.
제국적 통제는 세 가지 전지구적이고 절대적인 수단들, 즉 폭탄, 화폐 그리고 에테르를 통해서 작동. 제국의 꼭대기에 있는 수소 폭탄 무기는 삶 자체를 지속적으로 파괴할 가능성을 나타냄. 핵 기술의 발전과 제국적 집중이 주권에 대한 전통적 정의의 주요한 요소인 전쟁과 평화에 관한 결정권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제거하는 한, 이것은 그러한 나라들의 주권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모든 전쟁을 제한된 갈등, 내전, 추한 전쟁 등으로 축소하며, 모든 전쟁을 행정력과 경찰력의 독점하는 영역으로 만듦.
화폐는 두 번째 전지구적인 절대적 통제 수단임. 세계 시장은 구축은 무엇보다 먼저 국내 시장의 화폐적 파괴, 일국적 그리고/또는 지역적 화폐 조절 체제의 해체, 그리고 국내 시장들의 금융 권력의 욕구에의 종속으로 이루어짐. 화폐 메카니즘은 시장을 통제하는 제1의 수단임.
에테르는 제국적 통제의 세 번째이자 최종적인 근본적 매개체. 소통의 관리, 교육 체계의 구조화 그리고 문화의 조절은 오늘날에는 전보다 더 최고 대권으로 나타남.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에테르 속에 용해됨. 소통 공간은 완전히 탈영토화됨, 소통 공간은 잔여의 문제가 아니라 변형의 문제임. 소통은 자본이 자신의 체제에 사회를 전체적으로, 전지구적으로 복종하게 하여 모든 대안적인 길을 억압하는 데 성공한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임. 따라서 대안은 실질적 포섭사회 안에서 생겨나며, 실질적 포섭 사회의 핵심에 있는 모든 모순을 드러내야 할 것임.
이런 세 가지 통제 수단을 제국적 권력 피라미드의 세 층을 참고하여 보면, 이런 메커니즘들이 통제력을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모든 영토적인 제국 공간 개념은 제국 장치의 핵심에서의 근본적인 유연성, 이동성 그리고 탈영토화에 의해 지속적으로 동요함.

거대 정부는 끝났다!
“거대 정부는 끝났다”는 제국 전역에 있는 보수주의자와 신자유주의자의 전투 구호임. 그러나 탈근대적인 정보 혁명의 발전이 자신의 노력을 지지하기 위해 거대 정부를 매우 필요로 하는 바로 그 때에, 보수 진영의 대표자들이 거대 정부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는 것은 최종적이고 잔인한 아이러니였음. 소련의 붕괴 이후 바로 이 시기에 미국정부가 직면한 제국적 임무는 매우 긴급했고, 거대 정부가 매우 필요했음.
이제 우리가 “거대 정부는 끝났다!”라고 외칠 차례임. 제국적 탈근대에서 거대 정부는 단지 전제적 지배 수단이며 전체주의적 주체성을 생산할 뿐이며 욕망의 한계를 규정함. 그러나 욕망은 한계가 없고 누구나 삶을 지속적으로, 자유롭게, 동등하게 즐길 수 있고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투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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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합된 구성 

생산 패러다임의 네트워크 모델로의 전환은 국민 국가의 전통적 경계를 넘어 초국적 기업의 권력을 증대시킴. 이러한 새로운 관계는 자본가와 국가 간의 오랜 권력 투쟁의 측면에서 인식되어야 하는데, 즉 국가는 자본의 집합적 이해 속에서 개별 자본가들의 이해를 증대․조절하는 신중함을 요구받고, 자본가는 국가가 자신들의 집합적 이해를 위해 행동하고 있는 동안에도 국가 권력에 맞서 싸울 것임. 이러한 갈등은 실제 사회적 총자본의 관점에서는 행복하고 효력 있는 변증법임.

거인들이 지구를 지배할 때
국가와 자본 간의 변증법은 자본주의 발전의 서로 다른 국면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임. 18세기와 19세기의 유럽의 개별 자본가들은 유럽 국민 국가들 안에서는 큰 갈등 없이 식민지를 지배하였고, 식민지 영토들에서는 실제로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서 국가의 경계를 넘어 확장하는 특정한 산업들 및 일단의 산업들을 지배하는 준독점체들은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침식에 의한 자본주의 번영에 직접적 위협을 가하는 한편 국가의 관리 능력도 훼손시킴. 따라서 산업에 대한 국가 규제의 확장과 기업에 대한 자신의 지배[명령]의 확립이라는 일련의 투쟁이 발생함. 또한 식민지 영토들에서도 행정 기관들과 사법권 아래에서 식민지의 경제적, 사회적 활동을 효율적으로 회수[포획]하여 사회적 총자본의 이해를 보장함.
오늘날은 거대 초국적 기업이 국민 국가의 사법권과 권위를 효율적으로 넘어선 것을 보고 ‘국가는 패배했고 기업들이 이제 지구를 지배한다!’라고 파악할 수 있음. 그러나 국가 없이 사회적 자본은 자신의 집합적 이해를 계획하고 실현시킬 수 없음. 초국적 기업과 생산 및 유통의 전지구적 네트워크가 국민 국가의 역능을 침식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기능과 헌법적 요소는 효율적으로 다른 수준들 및 차원들로 대체되어 옴.
먼저 정치적 관계의 위기로 국민 주권이라는 개념이 효율성을 잃어 가고 있는 만큼 정치적인 것(정부와 정치, 정치적 매개 메커니즘)의 자율성도 효율성을 잃어 가고 있음. 모든 자율적 정치 국면의 쇠퇴는 혁명의 장소인 모든 독립 공간의 쇠퇴를 나타내는 전조가 되어, 전통적인 대항 권력과 근대 주권 일반에 대항하는 저항이라는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해져 다시 한 번 새로운 저항형태를 발명해야 함. 또한 민주 국가의 기능은 전통적인 정치 및 저항 국면의 쇠퇴를 보완하는 측면으로 변형. 일련의 독립 기구들(전통적인 독립 기구들 외에 은행, 국제적 계획 기관들 등)이 정당성을 권력의 초국적 수준에서 찾음.
그러나 국민 국가의 입헌적 메커니즘과 통제가 쇠퇴해 왔고, 국민 국가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초국적 기업이 자유롭게 경쟁하고 스스로를 관리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음. 따라서 어떻게 권력이 초국가적 수준으로 이루어지는가를 탐색해야 함

전지구적 구성의 피라미드
전지구적 권력의 모습을 그 권력의 다양한 기구들과 조직들 속에서 분석할 때, 각각 몇 가지 수준을 지닌, 점점 더 넓어지는 세 층으로 이루어진 피라미드 구조를 인식할 수 있음.
피라미드의 좁은 정점에는 전지구적 무력 사용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최강 권력인 미국이 위치. 그 정점의 두 번째 수준으로, 전지구적 통화 수단을 통제하며 국제 거래의 조절능력을 가진 일련의 조직체들(G7, 파리와 런던클럽, 다보스 등)이 존재. 다음 세 번째 수준으로, 문화권력과 생체 정치권력을 전개하는 군사적, 재정적 수준에서 헤게모니를 발휘하는 다소 동일한 능력의 이질적인 단체들이 위치.
다음 두 번째 층에는 세계 시장을 통해 확장해온 초국적인 자본주의 기업들의 네트워크들(자본 흐름, 기술 흐름, 인구 흐름의 네트워크들 등)이 구축되어 있음. 또한 초국적 기업들의 힘에 종속되는 수준에서 국민 국가들의 일반적 틀도 존재. 이 국민 국가들은 전지구적 권력으로부터 부의 흐름을 포획하여 전지구적 권력에 부의 흐름을 분배하며, 가능한 많은 주민들을 훈육시킴.
마지막 세 번째 층에는 전지국적 권력의 배치에서 인민의 이해를 대표하는 집단들로 구성. 대중[다중]은 전지구적 권력의 구조들 속에 직접적으로 편입될 수 없고, 대의제를 통한 국민 국가로, 매체로, 종교 조직으로, 그리고 전지구적 시민사회에서 가장 새롭고 가장 중요한 세력인 비정부기구(NGO)로 걸려져 제국의 토대가 됨.

폴리비우스와 제국적 통치
폴리비우스가 분석한 로마제국의 세 가지 “좋은” 권력 형태(황제, 원로 회의, 그리고 인민적 의회의 이름들로 구현된 군주제, 귀족제, 민주주의)는 오늘날 직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제국과 사회․정치 세력과 매우 다르다 할지라도, 형식적으로 양립 가능한 관계임. 그러나 폴리비우스의 해석의 계보학에 서있지만 마키아벨리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통해 이어진 해석에서는 폴리비우스의 고전적인 삼자 모델을 삼기능적인 헌법 구축 모델로 변형시킴.
어떤 점에서는 당초의 폴리비우스의 고대적인 제국 구성 모델이 근대 자유주의적 전통이 변형시킨 모델보다 오히려 우리의 현실에 더 가까운 것 같음.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한 제국의 (형태상) 구성은 실제로 전통이 내세우는 “좋은” 정부[통치] 형태들보다는 “나쁜” 정부[통치] 형태들의 전개와 공존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임.

잡종적 구성
오늘날 등장하고 있는 제국(사법적 형식화의 틀, 입헌적인 보증 메커니즘, 그리고 균형 도식)은 근대적 지형에서 탈근대적 지형으로 넘어가는 이행 속에서 두 가지 주요 축을 따라 변형됨.
변형의 첫 번째 축은 혼합된 구성(독립 기구들이나 기능들의 혼합이라는 고대적이면서 근대적인 모델)에서 현 상황에서의 통치[정부] 기능의 잡종적 구성(탈근대적 군주제와 귀족제, 그리고 민주주의적 기능들 자체의 잡종화)으로의 이행.
구성 이론의 대체와 구성 자체가 지닌 새로운 특성 둘 다를 드러내는 구성적 변형의 두 번째 축은, 현 국면에서 명령은 사회의 시간적 차원(주체성 차원)에 대해서 더욱더 커다란 정도로 실행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에서 드러남. 이러한 변형의 핵심은 시간적 차원에서 대중과 관련한 민주주의적 계기에 존재. 이곳이 가장 중요한 질적 도약, 즉 통치의 훈육적 패러다임에서 통제적 패러다임으로의 도약을 인식해야만 하는 곳. 규칙[지배]은 생산적이고 협동하는 주체성들의 운동에 대해 직접 실행되고, 제도들은 이러한 운동의 리듬에 따라 지속적으로 형성되고 재규정되며, 권력의 지형학은 더 이상 공간적인 관계와 일차적으로 관계하지 않고, 주체성들의 시간적 전위[대체] 속에 각인됨, 즉 제국의 잡종적 통제 기능은 무-장소(잡종적 공간)에서 실행됨.
이러한 제국적 무-장소(잡종적 공간)에서 구성 과정을 항상 규정하는,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정치적인 것 및 사법적인 것으로의 움직임이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며, 입헌과정에서 형식적인 인정을 요구하는 사회 세력과 정치 세력 간의 호혜적인 관계가 등장하기 시작하며, 다양한 기능들은 자신들을 구성하고 자신들의 구성 과정의 단편들을 포획하려는 주체성들이 지닌 힘을 가늠함.

구성을 둘러싼 투쟁
제국의 구성을 둘러싼 투쟁은 모호하고 변화하는 영역에서 전개되어야 함. 이러한 투쟁을 규정할 세 가지 핵심 변수, 즉 공통적인 것과 특이한 것 사이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변수, 명령의 공리계와 주체의 자기 동일시 사이에서 작동하는 변수, 권력에 의한 주체성 생산과 주체 자신의 자율적 저항 사이에서 작동하는 변수임.
이러한 변수에 따라 각각의 주체성은 일반적인 통제 네트워크 속에서 지배받는 주체가 되어야 하면서도, 동시에 또한 네트워크 안에서 독립적인 생산 및 소비의 대행자[담지자]이어야만 함. 여기서 정치적 주체는 덧없고 수동적이지만, 생산하고 소비하는 대행자는 현존하며 능동적임을 알고 있고, 새로운 혼합된 구성의 형성은 기존 행위자들 간의 근본적인 불균형을 가져오고, 따라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를 정치적 메커니즘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새로운 사회적 원동력이 되게 한다는 것을 의미. 여기가 바로 제1의 투쟁 장소가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곳임. 주체성의 생산 및 조절의 영역에서 그리고 정치적 주체와 경제적 주체 간의 분리 속에서, 우리는 모든 구성 책략과 세력 균형을 재개할 수 있는 실제적인 투쟁의 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임.

구성의 스펙터클
그러나 이러한 열린 투쟁의 장도 스펙터클이라고 하는 공적담론과 여론을 생산하고 조절하는, 통합하고 확산적인 이미지 및 관념 장치에 의해 사라짐. 스펙터클은 모든 집합적인 사회성[사교] 형태를 파괴하며 동시에 새로운 대량 사회성, 행동과 사고의 새로운 획일성을 부여하여 구성을 둘러싼 전통적 투쟁 형태들을 상상할 수 없게 함. 스펙터클은 여론과 정치 행동에 대한 매체 조작을 통하여 마치 매체, 군대, 정부, 초국적 기업, 전지구적 금융 제도 등이 단일한 권력에 의해 의식적이고 분명하게 지도받는 것처럼 기능하며, 또한 구시대의 무기인 공포(구시대와 차이는 공포를 소통시키는 미신의 형태와 메커니즘)를 통하여 일차적으로 사회를 통제하며 공포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욕망과 쾌락의 형태를 창조함.
탈근대적․잡종적 구성과 공적인 것 및 정치에 대한 매체 조작을 결합하는 공포의 스펙터클은 제국적 구성을 둘러싼 투쟁에서 그 근거를 빼앗음. 그러나 낡은 투쟁 장소들과 투쟁 형태들이 쇠퇴해감에 따라 새롭고 더욱 강력한 투쟁 장소들과 투쟁 형태들이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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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정리는 헤이든 화이트의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 - 메타역사>> 중 니체부분를 정리한 것이다. 현재 문학과 지성사에 나온 책은 절판되었고 알라딘에서 찾아지는 책은 부분 번역된 두 번째 책이다. 이 책에는 니체부분이 없고 전체 중 4편(미슐레-로망스, 랑케-희극, 토크빌-비극, 부르크하르트-풍자)만이 번역되어 있다. 전부가 다시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니체 : 은유 형식의 역사에 대한 시적 변호

서론
니체는 1830년대 이래 역사가들이 이용해온 역사 분석의 근본 개념과 그 개념들이 지향할 수 있는 역사 과정과 같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사학 사상에서도 하나의 전환을 마련하였다. 니체의 역사에 대한 고찰 목적은 역사적 과거를 믿는 신념과 역사적 과거에서 어떤 특정한 실체적 진리를 배울 수 있다고 믿는 신념을 분쇄하는 데 있었다. 니체는 인간이 역사를 보는 방법을 삶을 부정하는 형태와 삶을 긍정하는 형태로 구분하고 영원히 진실한 “타당한” 역사 개념이 있다고 믿으려는 욕망을 유일신을 믿으려는 그리스도교적 욕구의 또 다른 형태이거나 하나의 완전하고도 진정한 자연 법칙의 실체를 믿으려는 욕망을 지닌, 그리스도교의 세속화된 대응물인 실증주의 과학으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니체가 역사를 성찰했을 때, 그는 언제나 역사 자체가 어떻게 유사한 창조적인 꿈의 형태로 변할 수 있는가, 요컨대 역사가 어떻게 비극의 예술 형태로 바꾸어질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 결국 역사에 대한 니체의 성찰은 비극에 대한 성찰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신화와 역사
니체의 사상은 “영겁 회귀”와 인간의 디오니소스적 능력과 아폴로적 능력과의 끝없는 교체라는 이원론적 철학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영겁 회귀나 디오니소스적-아폴로적 이원론은 역사 지식에 대한 과거의 비판이 낳은 산물이며,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를 예술로 해석하고,이어서 심미적인 시각을 비극적 조건과 희극적 조건에서의 동시적인 삶을 이해하고 파악하려는 니체의 노력이 낳은 결과이다.
철학자로서의 니체의 목적은 세계에 대해 기계적 인과론이나 비인간화된 과학을 배태시킨 모든 환유적 이해와 세계에 대해 “고귀한” 동인, 신․정신․도덕에 관한 이론을 배태시킨 모든 제유적 승화로부터 인간 의식을 해방시킴으로써 아이러니를 초월하고 의식의 은유적 능력, 즉 “이미지의 유희”를 즐길 수 있는 능력을 향유하도록 의식을 복원하며, 세계를 순수한 현상으로 보고 그에 의해서 원시인의 소박한 은유보다도 훨씬 더 자의식적이며 순수한 존재로서의 활동으로 인간의 시적 의식을 해방시키는 데 있었다. 따라서 『비극의 탄생』을 통해 비극에 대해 성찰하고자 하였다.
니체는 비극을 디오니소스적 통찰과 아폴로적 통찰과의 결합으로서, 그리고 세계에 대한 희극적 이해로부터 벗어나 세계 존재에 대한 비극적 이해로서 또한 그와 상반되는 경우를 재해석하는 수단으로 제시하였다. 니체가 파악한 그리스의 고전적인 비극 정신(예술)은 현실적으로는 환상론적이지만, 창조적으로는 예술 자체의 환상을 파괴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근본적인 공허감에 대한 공포를 인간의 고위한 삶에 대한 아름다운 이미지(은유)로 전환시킨 다음, 다시 그 이미지를 파괴함(비극)으로써 새로운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꿈(희극)을 구성하는 토대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이처럼 비극 예술은 본질적으로 변증법적 예술이고 그것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과의 영웅적인 대결로 이끌거나, 이러한 투쟁 이후의 삶을 개척하게 할 수 있다고 니체는 주장하였다.
니체는 한편, 인간 존재가 단순한 존재에서 소외를 거쳐 세계와의 화해에 이르는 변증법적 과정이 명백한 심미적 충동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니체는 그릇된 낙관론과 그릇된 비관론을 비판하며, 비극 정신이 본질적으로 혼란한 존재의 성격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자신이 만든 환상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인간의 능력과의 갈등을 초래했다는 팽배한 의식에서 비극 정신의 본질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혼란에서 형식으로, 그리고 다시 혼란으로 되돌아가는 반사 운동이 바로 비극을 시가나 그 밖의 다른 모든 지식이나 신념 체계를 구분하도록 만든다. 오직 비극만인 삶을 위한 형식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혼란에 대한 의식의 끊임없는 변혁을 필요로 하였다. 니체에 따르면, 가장 파괴적인 형태의 환상론은 이미지를 개념으로 전환시켜, 그 개념이 제시한 조건 속에서 상상력을 얼어붙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분명히 디오니소스나 아폴로가 최후로 승리하는 예술이 아니라, 그것들의 상호 의존성을 전제로 한 예술을 옹호하였다. 즉 형식과 운동, 구조와 과정의 생생한 종합이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성은 두 신의 영역을 구분하는 한계선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에서의 비극적 감정의 소멸은, 한편으로는 “아폴로적인 정관”에 대한 아이러니의 승리와 다른 한편으로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에 대한 낭만적인 “격정”의 승리가 낳은 결과였다. 비극 정신의 이러한 왜곡은 소크라테스를 통해서 “아폴로적인 경향은 논리적인 체계로” 굳어지고, 유리피데스를 통해서는 디오니소스적 정서가 자연주의적 정서로 바꾸어지는 것과도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왜곡은 그릇된 낙관론을 고취했기 때문에 치명적이었고 플라톤과 이를 이은 그리스도교로 말미암아 그리스 시대 이래로, 서구인의 역사는 자기 도입적인 질병의 역사가 되었고 자기 기만의 막대 끝에 매달린 도살된 황소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한쪽 끝에는 그리스도교가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에게 삶의 요구를 부정하도록 인간의 종말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내세에서의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다른 한 쪽 끝에는 실증주의 과학이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을 동물의 상태로 변모시켜 비인간화함으로써 만족을 느끼며, 어떤 통제력도 행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구원도 발견할 수 없는 기계적인 요소의 단순한 수단으로서 인간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비극 정신이 쇠퇴한 이래 서구인의 역사는, 삶의 부정이라는 이 두 경향의 변모 과정, 즉 처음에는 그리스도교가, 다음에는 실증주의 과학이 인간을 타락시켰다는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다. 니체에 의하면, 삶을 즐기려는 인간의 능력을 파괴한 바로 그 요소들이 이제는 요소 그 자체를 파괴하는 데 적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의 플롯이 아이러닉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자신이 신화와 비판의 빈곤을 충분히 자각한 의식 속에서 아이러니컬하게 살고 있으므로 그 결과는 특수한 의미에서 아이러닉하다.
그러나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과정과 아폴로적 과정의 교체라고 하는 낙관적인 시각으로 미래를 대하였다. “그리스도교적”인 내세에서, 로마의 군국주의나 “헬레니즘적” 비판으로, 그리고 새로운 비극의 시대나 그 결과로 나타난 본래의 야만상태와는 다른 새로운 야만상태로의 이행을 통해서 말이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순환의 개념이라면, 그 개념은 매우 기묘한 “순환”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원시 시대 이후의 서구인의 전역사는, 무대에서의 비극의 아곤처럼 단순한 존재로부터 소외를 거쳐 자기와의 화해에 이르는 하나의 위대한 진보의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를 지향하는 운동이 아니다. 니체가 인식한 유일한 “절대”는 자유로운 개인, 모든 정신적-초월적 충동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자신을 초월하려는 능력에서 목적을 발견하며, 자신에게 새로운 과업을 부여함으로써 삶에 변증법적 긴장을 가져다주며, 그리스인들이 신들만이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 형태의 인간적인 삶의 모형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는 자유인이었다.

기억과 역사
니체의 「역사의 선용과 남용」은 동물성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독특한 성격으로 이해할 수 있는 회상과 망각의 역학관계에 관한 글이다. 인간의 문제는 모든 것을 너무도 잘 기억한다. 특히 과거를 회상하는 이 능력으로부터 인간적인 모든 건조물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역사 속에서 살아야 하며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숙명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영광이며 파멸이기고 하다. 그렇다면 그 문제는, 역사를 망각하는 적절한 시기가 언제인가를 배우는 것이다.
니체는 회상이 창조적으로 행동하려는 의지를 봉쇄하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역사 지식으로 하여금 인간의 개혁 능력과 자기 초월의 능력에 기여할 수 있게 한다고 파악하였다. 그렇다면 니체의 마지막 목적은 역사 지식을 인간의 욕구라는 한계 속으로 끌어들여 욕구의 지배자가 아니라 욕구의 노예로 만드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의 행동과 투쟁이라는 면에서 보수적이며 경건한 능력에 도움이 되고, 인간의 고통을 달래는 위안으로서, 그리고 구원에의 열망에 도움이 되는” 기념적, 골동수집적, 비판적 역사가 형성한다고 하였다. 이 세 거지 형태의 역사가 인간의 능력을 촉진시킨다고 하였다.
기념적 역사(환유적 형식)는 창조적으로는 과거의 위대성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하여 미래를 지향하도록 인간을 이끌지만, 파괴적으로는 위대한 것에 대한 충동의 토대를 무너뜨린다. 골동 수집적인 역사(제유적 형식)는 창조적으로는 기원에 대한 경건한 외경심을 불러일으키고, 파괴적으로는 현재의 욕구와 갈망에 저항한다. 비판적 역사(아이러니 형식)는 창조적으로는 과거의 위대성과 가치의 신화를 통찰하고, 외경심을 짓밟으며, 과거가 현재를 구속한다는 주장을 거부하는 힘을 가지지만, 파괴적으로는 궐석 재판에 의해서 고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선고함으로써 결국 현재의 범속성을 떠받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처럼 니체에 의하면 역사 의식의 위험성은, 골동 수집적․비판적․기념적 역사의 극단, 다시 말하면 의고주의․현실주의․미래주의의 극단에서 각기 발견된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과거는 피할 수 없으므로 과거를 읽는 이 세 가지 방법을 종합하는 데 있다. 극단적이거나 파괴적인 특징을 지닌 이 세 가지 형태의 모든 역사 의식에 대해서 니체가 제시한 해독제는 은유 형식으로 작용하는 역사 의식이다. 예술 형식으로서의 니체의 역사 개념은 비극 예술로서뿐 아니라, 특히 순수한 비극 예술로서의 역사 개념이다.
니체는 역사가 일종의 예술 형식이 됨으로써 삶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삶에 기여하는 예술 형식으로 인식된 역사는 진리와 정의에 기여하지 않고 오히려 “객관성”을 지향하게 될 것이고 니체는 객관성을 최고의 형식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이것은 역사적 지혜가 바로 극작가의 통찰 내지 설화화나 헤이든 화이트가 “플롯 구성”이라고 부른 것과 같은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니체는 객관성의 개념을 조심스럽게 이용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한편, 역사 의식이 지향해야 할 원리는 무엇인가. 니체는 대체로 유럽, 특히 독일에 고통을 안겨준 그러한 형태의 역사 의식은 헤겔 철학과 다윈주의, 그리고 하르트만으로 대표되는 무의식의 철학이라는 세 가지 형태를 취한다고 하였다. 무의식의 지배권을 인정한 하르트만의 이론이나 헤겔의 “세계정신”이나 다윈의 신격화된 자연에 대한 이론은 형식에의 의지가 삶에의 의지에 더욱 유해하게 작용하는 것임으로 위험한 것이다. 역사가 살아 있는 인간의 욕구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모든 보편적인 체계는 마땅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니체는 강조하였다. 결국 니체는 “역사의 질병”에 대한 해독제는 역사 자체에 있다는 결론(아이러니)을 내렸다. 왜냐하면 역사 자체가 역사 문화의 역사적 기원임을 드러내고 있을 때, 그 방향은 “비역사적”(예술의 힘) 또는 “초역사적”(예술과 종교에 시야를 돌리는 힘)인 것으로 알려진 관점을 지향하게 될 것이며, 또 그러한 관점에서 예술의 신화 창조적인 능력이 작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도덕과 역사
니체의 『도덕의 계보』는 도덕, 인간의 도덕 의식, 인간의 양심 그리고 “선”이나 “악”과 같은 특성에 대한 인간적인 신념의 기원과 본질을 밝히려고 한다. 니체는 루소와 달리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선과 악 그 어느 속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니체는 멀지 않아 인간이 제한된 “선”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케 하는 방법을 통해서 서구의 도덕사를 구성하기 위한 도식을 제시하였다. 이 해방은 마르크스와 같이 “사회적” 조건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마르크스와 달리 타인과의 모든 필요한 유대로부터의 해방, 기초가 된다고 여겨지는 모든 “가치들”을 해체함으로써 형성된 무정부 상태와 다를 바 없는 개인의 자기 만족에 대한 기대로 이해하였다.
『도덕의 계보』에 실린 첫 에세이는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두 가지 형태를 고찰한 것이다. 여기에서 고귀한 인간과 비천한 인간과의 구분은 은유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인간과 개념적으로 사고하도록 강요당한 인간과의 구분으로서 인식된다. 고귀한 인간은 예술의 언어를 사용하며, 비천한 인간은 과학․철학․종교의 언어를 사용한다. 고귀한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선”으로 부르고 자신과 다른 행동을 “악”으로 부르는 반면, 약자는 자신보다 우월한 자들의 행동을 “악”으로 부르고 자신의 행동을 “선”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이분법(완전히 비도덕적이며 개인이 느끼는 쾌락과 고통의 경험을 표현한 것)은 “선악”의 이분법(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이며 도덕적일 뿐 아니라 질적으로 악한 실체가 개인이나 집단이 규정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행동에 귀속되는 그런 형태의 것)으로 대체된다. 니체 스스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도덕과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언어의 비유법을 이용했으며 은유적 언어의 본질적인 창조성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인간의 자제력에 나타난 은유 그 자체가 수행한 역할의 문제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것은 의식의 전개에 대한 그의 순환 개념이, 은유에서 환유와 제유를 거쳐 아이러니에 이르는 언의 순화에 대한 그의 개념에 반영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순수한 의식으로의 복귀는 필연적으로 은유적인 언어 단계로의 복귀로 인식되었다.
“죄”와 “나쁜 의식”과 “그와 연관된 문제들”에 대해서 쓴 『도덕의 계보』 두 번째 에세이는 인간의 독특한 회상 능력에 관한 재고찰에서 출발하고 있다. 니체는 기억을 인간이 고정된 과거나 특정한 미래에 자신을 결합시키는 나쁜 형태의 성향으로서 설명하였다. 회상하는 능력은 과거에 이루어진 약속에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을 결정하는 힘을 부여한다. 반면에 망각하는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에 살도록 만든다. 따라서 과거와 미래를 “망각”할 때 우리는 명확하게 현재를 “볼” 수 있다. 망각이 회상 때문에 중단될 때, “특히 회상이 약속의 문제가 될 경우에”, 의지는 과거의 조건과 욕구에 얽매이게 되고 건전한 회상을 제물로 바치고서라도 과거의 조건과 욕구를 계속 강화하려고 한다. 따라서 니체는 나쁜 의식은 과거의 행동을 자신의 행동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무능, 과거의 행동을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어떤 동인이나 섭리의 산물로 보려는 충동, 그리고 과거의 행동을 자신보다 우위에 있거나 초월하는 어떤 “능력”의 표현으로 보려는 충동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파악했다. 반대로 양심은 이미 일어났거나 미래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내 자신의 특성을 나타낸 나의 힘에 의해서 일어났거나 일어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창조적인 망각이 동시에 창조적인 회상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도덕의 계보』 나머지 부분은 억압과 순화에 관한 심리학의 이론에 의해서 문화․사회․도덕의 역사를 논구한다. 여기서 돌이킬 수 없는 특정한 과거와 공포에 대한 의식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한 것으로 다루어진다. 기억의 창조는 고통에 의해서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며 개인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문화의 기억도 쾌락이 아니라 고통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니체는 나쁜 의식의 기원을 죄에서 찾는다. 니체에 의하면, 죄의 개념은 보상의 개념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손실과 고통의 관계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계약 관계에서” 발생했다(계급 제도의 토대). 나아가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에서 국가의 기원을 찾는다. 그러나 니체의 실제 목적은 정의의 개념이 본질에 있어서 비도덕적인 인간 존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통의 자본화라는 개념을 이용하였다. 니체에 의하면 정의는 강자가 약자의 원한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이용한 수단이었다. 즉, 법률의 설정은 개인적으로 멸시를 받거나, 특수한 사정 때문에 행해지는 복수를 방지하고 그것을 객관적인 관계로 바꾸어놓았다. 요컨대, 정의는 “옳고” “그른” 행동에 대한 자의적인 구분에 그 기원이 있으며, 그 결과는 이기적인 감정을 제거화하기 위해서 가해자나 피해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지각을 재조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니체는 사물의 기원이 어디에 있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새로운 의도에 따라 권력에 내포된 요소에 의해서 주기적으로 재해석되고 재정비된다는 역사 방법에 따라 고통과 양심과의 관계를 다시 분석하였다. 니체는 처벌이 공포와 경계와 본능의 제어를 증대시키고, 문명화된 존재의 토대가 될 뿐 아니라, 시초부터 문명의 토대로서 존속해왔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니체에게 “나쁜 의식이란 인간이 이제까지 경험한 가장 심각한 변화-인간을 다만 사회적․평화적인 존재로 만든 변화의 압력에 굴복한 뿌리깊은 질병이었다.” 이 나쁜 의식을 형성하는 배후에는, 본능의 조직적인 억제와 “후에는 인간의 영혼으로 불린 발전의 토양만을 제공하는 ‘내면화’가 놓여 있다.” 여기에 종교의 기원이 있다.
사회, 양심, 종교의 기원에 관한 니체의 설명은 『독일 이데올로기』에 나타난 마르크스의 설명과 근접해 있지만 차이점이 있다. 마르크스는 이 모든 것을 인간의 절박한 생존에 근거하여, 분업을 필요로 하며 생산된 재화의 불평등한 분배를 초래한 사회 조건으로 설명한 데 반해, 니체는 주요 원리를 심리적 요소, 권력에의 의지, 삶에의 의지보다 더 강하고 타인에 대한 지배와 착취뿐 아니라 인간 자신을 파괴하는 능력을 설명하는 요소에서 찾았다. 인간성에 내재한 양심의 기원에 대해 니체는 양심이 형성되는 토대를 강자에게 내재한 순수한 심미적 충동(권력에의 의지에 굴복)과 이러한 충동에 대한 약자의 심리적 반응(권력에의 의지의 억압과 감추어진 본능적인 충동)에서 찾았으며, 이 두 가지 충동은 모두 인류가 지닌 독특하고도 공통적인 권력에의 의지를 포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진.선.미의 “개념”은 지배자들의 자연스런 권력에의 열망이나 삶의 즐거움과는 대비되는 피지배자들인 개인의 실질적인 격하를 통해서 존재하는 것과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것과의 차이를 발견하는 좌절된 개인의 의지가 낳은 산물이다. 또한 니체는 사회적 양심의 기원을 단순한 권력 관계에서 찾았다. 개인의 책임에 대한 관념이 부채자의 정심에 조직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고취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도덕적인 연속성도 세대 사이에, 그리고 현존하는 인간과 조상 사이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채무자와 채권자와의 관계에 나타나는 작용으로 보았다. 그리고 인간이 원시적인 조상으로부터 종고 나쁜 것에 대한 개념을 물려받은 것처럼, “인간은 종족의 신과 결합한, 현저한 부담과 최후의 보상을 받으려는 욕망을 종족으로부터 불려받았다.” 이것이 바로 모든 구원의 종교가 발생하는 기원인데, 그 종교는 개인의 책임과 죄를 인간에게 귀속시킴으로써 조상들과의 관계를 고르디오식의 일도양단의 방법으로 해결하지만, 그 과정에서는 지상에서의 열매를 구원 때문에 영원히 단념해야 한다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따라서 니체는 그리스도교란 은혜와 죄를 영원히 의식하는 가장 고귀한 의식의 승리를 대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니체는 또한 그리스도교의 완성을 환희의 한 경우로 보았다.
그럼 세대가 짊어진 의무감과 “역사 의식”은 결국 동일하다. “회상”의 능력은 이 두 의식의 중심부에 놓여 있다. 그리고 세대가 짊어진 의무로부터의 도피는 역사 의식으로부터의 도피를 수반한다. 인간이 자신만을 위한 삶을 억제하는 채무자의 심성 때문에 괴로워지 않는다면, 회상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망각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진리와 역사
니체는 인간이 지닌 자기 단절의 능력이 초래한 결과의 역사를 인류의 관점에서 개관한다. 그는 금욕주의적 이상의 발전을 인간 의지의 한 충동, 즉 의지의 “허무에의 공포”로서 파악하였다. 인간이 동물적 열정을 충분히 발산시킬 수 없을 때 인간은 미덕을 필요로 하며 순결을 하나의 목표와 목적 또는 이상적인 가치로 바꿀 수도 있다. 그리하여 금욕주의적 이상이나 고통과 단절을 신성시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니체에 의하면 고급 문화의 모든 영역은 이러한 금욕적인 충동의 순화가 낳은 산물이다. 니체는 금욕적인 이 문화는 철학자들이 자신의 권력, 전도된 권력 의지를 표현한 하나의 기만이라고 주장하였다. 철학자는 본질에 있어 성직자의 적이지만, 애초부터 철학자에게는 성직자의 위신이 없었으므로 성직자처럼 위장할 수밖에 없었다. 불행하게도 그 위장은 행위자를 사로잡고, 종교로부터 벗어나려는 철학적 충동을, 본래 종교가 발생한 본질과는 다른 금욕적인 새로운 형태의 종교로 바꾸어놓았다. 그 결과 삶에 기여하는 순수한 철학은 소멸되어버렸다. 니체는 당시의 철학적 이상은 “순수이성․절대지식․절대적 사고력”이 이른다는 목적을 지닌, “순수하며 의지가 결여된 고통 없는 영업한 知者”를 동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니체는 근대의 역사가들을 바로 의지를 갖지 않은 知者의 이상을 구현한 존재로 파악하였다. 근대의 사가들은 역사적 과거 앞에 자신들을 의지와 사고력을 지니지 않은 사건의 “거울”로서 설정하였다. 그들은 다만 검증하고 기술할 따름이었다. 따라서 니체에 의하면, 이 “객관적”인 역사가들은 “위선적인 무기력의 ‘공정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유럽 문화를 문화 자체가 초래한 소외의 외면적 한계에 도달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비록 허무 때문이기는 했지만 의지도 구제되었다. 오직 허무에의 의지를 자의식으로까지 고양하고, 의지를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계획으로 바꾸며, 금욕적으로 인도된 감성이 인간에게 부과한 모든 짐 가운데서도 지나치게 세련된 이지의 능력을 분쇄하고 파괴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이것과 그리고 이것만이 적극적인 욕구에의 의지를 발산시킬 것이다. 니체는 이와 같은 파괴와 창조의 작용을 통해서 역사도 초역사적인 예술이 됨으로써 어떤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니체는 공동의 과업을 통해서 인간을 서로 결합시키는 마지막 유대를 끊기 위해서 역사 의식을 이용하였다. 그는 마르크스보다도 더 급진적으로 역사 자체의 궁극적인 해체를 추구하였다. 마르크스처럼 그는 그와 같은 해체가 남긴 조각들의 피안에서 새로운 인간성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자율적인 개인을 창조하기 위해서 과거와 미래의 개념에 따라 사회와 문화의 개념을 해체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나 순화된 문화를 위해 역사 의식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니체에게는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었다. 인간은 그 속에 외로이 존재하며, 그의 영원성처럼 모든 현재의 삶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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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리바르는 “보편적인 것들”을 모호한 보편성 또는 보편적인 것의 다의성으로 보낸데 왜냐하면 그것의 “대립물들”(특수한 것, 차이, 독특성)에 관한 우리의 논쟁이 어떤 일의적 준거에 기초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보편적인 것의 다의성을 있는 그대로, 보편적인 것에 구성적인 것으로 사고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이러한 기획은 우리로 하여금 한 양태에서 다른 양태로 이행하도록, 부분적으로나마 인지가능한 경로들을 구성하도록 해 주는 언표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게 이끌 것이며, 최종 분석에서는 이러한 질서들 가운데 하나 또는 다른 하나에 대응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선택들을 행하게 도와 줄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그는 라캉에게 영감을 얻어 3가지 용어법으로 구별하여 보편적인 것의 아포리아적 성격의 탐구에 기여하고자 한다. 먼저 세계의 통일성과 다양성의 표상을 문제시하도록 이끌 현재[실재]로서의 보편적인 것,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의념들이 대칭적으로 대립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논쟁의 고유한 장소로서 허구로서의 보편적인 것, 그리고 상징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의 곤란들에 대한 검토로써 이상성으로서의 보편적인 것이라고 부를 세 가지 보편적인 것을 구별한다.

Ⅰ. 현실로서의 보편적인 것
현실로서의 보편적인 것은 발리바르에 의하면 ‘세계화’(또는 지구화)로 읽혀지는데 그는 이것을 세계라 불리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들 내지 단위들의 실제적 상호의존성이라는 관념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상호의존성은 외연적 측면(제도와 기술의 전세계적 확장)뿐만 아니라 내포적 측면(개인에게의 직접적인 침투) 또한 갖는다. 따라서 “현실적” 보편성은 적어도 “근대 세계”의 출현 이후 이러한 현실은 현존하며, 아주 단순하게 우리가 근대성이라 부르는 것의 지평을 이룬다고 한다. 나아가 그는 그렇다면 세계국가의 창설을 기획하거나 인류를 인간 해방과 관계 맺게 하는 동시에, 자연적이며 동시에 도덕적 형상으로서의 인류 자신과 관계 맺게 만드는 일을 기획하는, 보편성과 세계성의 유토피아적 형상들은 돌연 시대에 뒤진 것, 대상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이것이 곧 “역사의 종언”를 표시하지는 않으며 다만 “유토피아적 세계시민주의”의 종언, 즉 특정한 이론적 휴머니즘의 종언을 표시할 뿐이며 세계화가 달성시킨 것과 같은 인류의 통일은, 또한 현실적 보편성의 도래는, 유토피아가 자신의 전제나 즉각적 결과물로 표상하는 도덕적, 문화적 가치들의 작동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점을 우리가 인정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다시 그는 질문을 던진다. 이제 더 이상 세계를 통일시키는 것 또는 세계를 현실적으로 실존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 문제인가? 발리바르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즉, “세계를 변혁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맑스적 도식(적대)과 홉스적 도식(“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통제)이 존재하나 현실적 보편성은 그렇게 적대와 통제가 가능한 단순하고 단일한 구조가 아니라고 한다. 즉 현실적 보편성이 경제 구조들의 단일한 세계화로 환원되지 않아서, 그리고 사회적 갈등들에 대한 세계적 규모에서의 규제의 중심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요원한 것처럼 보이며 그러한 갈등들이 보여주는 복잡성에 대해 장악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둘 다 현실적 보편성을 극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현실적 보편성(세계화, 지구화)은 새로운 복잡성(다의성)의 형상을 특징으로 하는데 주변부, 외부 지역들이 종속, 통합되어 구성되는 “중심”이 존재하며 정치적 지배도 불평등도 폐지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와 빈곤, 권력과 무권력의 양극화가 전례 없이 수위에 도달하고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문제는 더 이상 유일한 중심도, “중심적 지역”도 없이 오히려 하나의 네트워크가 있을 뿐이며 신식민지적 팽창과 중심 사회들의 조직 내로의 주변의 현상들과 집단들의 역침투의 불안정한 균형이 있을 뿐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 그는 소수자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소수자라는 개념은 법적 준거(미성년자)와 사회정치적 준거(약소자)를 동시에 포함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문제는 현실적 보편성이 소수자에 대해 상당히 양가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다. 즉 현실적 보편성은 소수자들이 전통적으로 지역에 들어와 살던 자들과 전 세계로부터 새롭게 도착한 자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소수자”의 지위를 일반화시키지만 동시에 이 때문에 바로 소수자와 다수자 간의 구별 자체가 모호해지는 경향을 지닌다는 점이다. 따라서 점점 더 많은 수의 개인들과 집단들이 일의적인 종족적, 문화적, 언어적, 심지어 종교적 동일성들로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소수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소수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가 점점 더 곤란해진다고 한다. 더 나아가 특정한 “다수자들”이 역으로 “소수자들”로 나타날 위험이 있다는 점이 강조되며 이들의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동일성의 특징들은 절대적 특권을 갖지 않는다고도 주장된다.
이제 발리바르는 한계가 있다고 할지라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소수자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반면, 안정적이거나 이론의 여지없는 다수자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나는 현실적 보편성을 특징짓는 가장 폭발적인 모순에 이를 직접 연결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내적 배제의 독특한 체계의 틀 속에서 종족적 차이들과 사회적 불평등이 결합되는 것에 관해 논하고 싶다고 말이다. 발리바르는 이제 내적 배제가 외적 배제를 대체하고 있다고 본다. 즉, 세계는 신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할 수 없는 “하류계급”이 세계적 규모로 구성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반면, 또 다른 극단에서는 관민족적인 특권 계급이 공통 언어와 이해의 형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인종주의의 새로운 형태는 외적 배제가 아니라 내적 배제에 준거한 것으로 파악한다. 결국 현실적 보편성은 모든 개인이 적어도 잠재적으로 다른 모든 개인들과 교통하게 되는 상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계적 통신망들이 각 개인에게 다른 모든 개인들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와 고정관념을 제공해주는 상황, 다른 모든 개인들을 자기와 “유사한” 개인들과 “다른” 개인들, 심지어 “다른 종에 속하는” 개인들의 이분법으로 투영시키는 상황이며 이제 점점 덜 분리되어 있는 동일성들이 또한 점점 더 화해불가능하게 되며, 덜 일의적인 동시에 더 적대적이 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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