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전장의 기억
국민의 이야기가 상상의 공동체를 창출할 때, 거기에는 그 수다스러운 이야기와는 정반대로 침묵해 가는 별개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침묵해 가는 것은 산 자만이 아니다. '죽은 자를 대신해서 말한다'고 하는 권위주의적인 이야기 속에서 죽은 자들이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게 됨으로써 침묵한다. 침묵하고 있음을 빌미로 '아무도 모른다'고 수다스레 지껄여대는 국민의 이야기. 그 속에서 산 자와 죽은 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내뱉는 장을 증언의 영역이라고 하자.
국민의 이야기 아래에는 이 증언의 영역이 항상 감춰져 있다. 이 증언의 영역은 망각의 문제와 연관된다. 하지만 그저 망각에 대항해서 기억해야만 하는 영역은 아니다. 한국전쟁처럼 학살이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자연스럽게 상기되면서도 잊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이 일련의 상기와 망각의 기법이야말로 국민의 이야기를 구성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엇을 기억하고 망각해야 할지를 '대신해서 말하는', 그 이야기의 위치인 것이다. 전사자에 관한 국민의 이야기는 말하는 주체와 죽은 자 사이의 그 어떤 실천적 관계도 부인한 채 죽은 자를 인식의 대상으로 회수하고, 그 결과 죽은 자는 바로 이야기의 대상이 됨으로써 말 못하는 유골(관찰대상)이 되는 것이다.
죽은 자를 '대신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와 함께 어떤 시간성 속에서 대화해 나갈 수 있게 됨으로써 짜여지는 이야기를 증언이라고 한다면 이런 실천적 관계와 그 속에 이어지는 시간성을 부인하고 죽은 자를 국민의 분류대상으로 회수해 나가는 과정이야말로 자기동일성을 보증하고 우리의 시간을 표출하는 것이다. 여기에 정치라는 영역을 설정하자. 국민의 이야기로 완전히 회수될 수 없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증언의 영역에서 산 자와 죽은 자는 실천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은 파농에 의하면 어떤 이야기건 '대신해서 말하는' 행위를 끝까지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증언의 영역은 호미 바바가 말하듯이 '상상의 공동체'에 존재하는 '균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으로 회수되지 않을, 불확정적이고 반복적인 '수행적 시간'을 발견해내는 그런 이야기의 가능성이 드러나는 공간이다.

전쟁 체험 중 전장 체험은 전장에서의 죽음이라는 문제와 연관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독자적인 영역을 구성한다. 특히 전장 기억을 체험의 특권화로 연결시키지 말고 분절화하여야 하는데 이는 국민적 기억으로는 회수될 수 없는 흔적, 즉 증언의 영역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전장의 기억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事象에 집착하는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체험으로서는 존립하지 않는다. 즉 체험으로 말할 수 없는 '공백'이 드러난다. 이 '공백'은 아무런 전제 없이 말할 수 없는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고 하는 실천 속에서 설정된다. 따라서 체험을 말하면 말할수록 그 구체적 체험이 구성되는 의미의 연관을 모두 소멸시켜 버리는 영역이 그 배후에 다가오는데 이 영역이 '공백'이다. 결국 전장의 구체적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말하면 말할수록 개별적 영역이 해체되고 마는 불안정한 발화를 통해 혼란스러운 시간의식을 창출하는 공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전장 체험이라는 불안정한 이야기의 영역은 전사자 '대신에' 의미를 확정하려고 하는 역사주의적 국민의 이야기를 갖고서는 독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리고 전장 체험이라는 불안정한 이야기를 말하는 실천이란 증언의 영역에서 개인을 해체시켜 나가는 작업인 동시에, 이 증언의 영역이 국민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강렬한 비판과 재정의라는 극히 정치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전장 체험 이야기 속에서 전후의 일본 좌익적 담론이 민족으로 재정의되어 가는 과정에서 오키나와는 중요한 지점이다. 좌익의 오키나와 '귀환'운동처럼 오키나와는 전후 일본의 영토의식 속에 있어야 할 본래의 영토를 끊임없이 일깨우는 '역사지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키나와를 반환하라'고 하는 주장은 전후 일본 내셔널리즘의 중요한 요소이다. 오키나와 전투라고 하는 전장의 기억을 통해 성립된 이 내셔널리즘은 바로 '순국한' 사자들에 의해 구성된 영토 획득운동이었다. 특히 '히메유리'로 대표되는 오키나와 전투 이야기는 순국한 '일본인'을 칭송하는 일종의 야스쿠니신사임에도 불구하고, 전후 사회에서는 반전 평화의 슬로건으로 등장한다. 여기에 '희생자' 담론이라고 하는 전후 일본 내셔널리즘의 재구축 논리가 존재한다. 전후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전범이라는 외부를 만들어 내어 가해자를 일부분으로 한정시키고, 천황을 포함한 모두가 스스로를 전쟁의 희생자로 연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더불어 오키나와의 비극을 자기 일처럼 애통해하는 가운데 자신을 희생자로 구성해 냈던 것이다. 이러한 피해자 의식의 강조는 평화주의로 연결되고 가해자 의식의 망각은 전전 대동아의 꿈을 연명시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시아라는 타자를 망각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내부에 있으면서도 '일본'으로 확정할 수 없는 이질적 존재까지도 망각하고 있는 점이다. 즉 희생자 공동체로서 다시 '일본인'이 구성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증언의 영역을 망각하는 것이다. 이 증언의 영역은 단순히 전쟁 가해자라는 자각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생겨난 불협화음을 상기하고 국민의 이야기로 포섭되지 않을 이질적인 존재를 불러들이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아시아를 상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발화의 가능성, 새로운 분절화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전장 동원의 장에서 살펴본 오키나와처럼 생활개선을 추진하고 일본군에 적극 협력했던 '지도자' 데루야 다다히데는 오키나와 전투 중에 일본군의 '스파이'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이 사건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일본군의 군율로부터 이탈하게 만들었으며 단순히 도주만이 아니라 반군의지까지 야기시킨 촉진제였다. 여기서 일관되게 '일본인'이고자 했던 한 인간이 타자(=적)로서 살해된 죽음을 어떻게 상기될 수 있는지가 중요한 지점이다. 알다시피 전장에서의 죽음과 그 기억은 두말할 나위 없이 내셔널리즘의 가공할 원천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인'으로서의 죽음으로의 동원과 '스파이'(=적)으로서의 학살이라는 두 가지 죽음으로 찢겨진 주체의 잔여 부분이다. 이 잔여야말로 오키나와 전투의 기억을 상기할 때 내셔널리즘에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잡음의 근원이며, 역으로 내셔널리즘은 이 잔여의 망각과 회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일본인'으로서 동원되면서 타자(=적)로서 살해당한 오키나와 전투의 기억은 '조국 복귀'가 정치 일정으로 가까워짐에 따라서 일본군에 대한 원한에서 '핵도 기지도 없는 평화로운 오키나와 현'이라는 반전 복귀의 운동방침과 공명하며 상기되고 이야기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학살사건이 르낭이 말한 '동포 살해'로서 상기된다는 점이다. 일본군에 대한 원한이 '동포 살해' 속에 갇히면 갇할수록 조국을 위해 죽었다고 하는 기억이 각인된다. 결국 반전과 내셔널리즘이 일체화되는 가운데서, 즉 반전 복귀의 깃발 아래서 학살이 이야기된다. '일본군'에 대한 증오라는 기억은 반전 복귀라는 정치 주체의 헤게모니로, 또 조국을 위해 죽는다고 하는 강렬한 내셔널리즘으로 이어졌지만, '일본인임을 잊었던' 기억(오키나와인을 재정의한 기억)은 정치 주체로서는 발설되지 않는 기억으로 방치되었다. 그렇다면 '복귀'를 기점으로 해서 오키나와 전투의 기억은 축소되어 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쟁이라는 극한상태'라고 하는 전장의 표상에 의해서 일상의 진부한 정경과 전장은 드디어 단절되었다. 이제 망각과 침묵의 시작이다.

데루야 다다히데의 죽음은 죽은 지 30여 년이 지난 뒤에 내셔널리스트로 상기되면서 선양의 대상이 되었다. 이 상기와 선양은 보상을 요구하고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정치적 주장과 맞물려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데루야가 '스파이'로 학살당했다고 하는 전장의 기억을 일상과는 무관한 전장으로 봉인하여 상기를 금지하고 망각을 강요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망각할 수 없는 기억은 스스로를 봉인하고 침묵해 간다. 그렇더라도 내셔널리즘은 과거를 발명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대신 '절멸 전쟁'의 '망각'이야말로 '국민 창조의 본질적 인자'다. 그렇다면 국민의 이야기 속에서 전장의 기억은 끊임없이 잔여를 산출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전장이란 결코 담론에 의해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비약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비약에는 폭력이라는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결국 전장이란 사후적으로밖에 상기될 수 없는 것이다.
오키나와 전투의 기억은 '조국 복귀'를 하나의 매듭으로 해서 전개된 정치적 헤게모니 속에서 상기되고 이야기되었다. 헤게모니를 구축하려면 담론 공간을 재편성하는 작업이 불가피하며, 그 작업은 과거의 기억의 상기라는 영역에서 진행된다. 또 상기라는 과거의 기억의 담론 공간에 대한 반역은 새로운 헤게모니의 가능성을 창출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기한다고 하는 것은 새로운 '분절화'를 불러일으키는 정치적 행위인 셈이다. 결국 오키나와 전투의 기억은 국민의 이야기 속에서 상기되는 가운데 그 잔여는 축소되고 혼란을 겪으면서 침묵해 갔다. '자신이 일본인임을 잊어'버리고 만 오키나와 전투의 기억은 국민의 이야기가 성립하는 가운데 봉인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잔여의 기억의 봉인이야말로 정치적 행위의 문제로서 다시금 발견되어야 한다. 이 봉인되어 간 침묵이 깨질 때, 죽은 자들의 목소리는 새로운 이야기와 함께 부활할 것이다.

4장 기억의 정치학
전장과 분리된 일상은 여전히 전장과 연결하는 매개를 이미-항상 지니고 있다. 예의 하얼빈 할아버지의 의미화되지 못한 일본어 발화는 발화한다는 실천 가운데 관동군의 만행이나 731부대로 이어지고 전장은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또 다른 예인 오쿠자키의 집요한 개입은 스스로 아직 전장에 있다는 것과 상대방 역시 그래야 마땅하다는 것을 끝까지 들이대며 전우관계를 오싹하게 하고 해체시키며 재구성한다. 이처럼 하얼빈의 할아버지이건 오쿠자키이건 모두 전후 일본 사회 속에서 너무도 당연한 듯이 진부한 일상으로 구성되어 있던 실천을 되풀이하면서 그것이 전장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진부한 일상을 다시 재구성하려고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익숙해져 있는 신체의 도식이 지금도 아직 전장에 있음을 상기하는 것은 그 신체의 도식이 싫든 좋든 변용되어 버릴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이다. 프란츠 파농이 묘사한 식민지 공간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이나 여기서 줄곧 살펴본 오키나와의 사례는 모두 이러한 신체 변용의 실천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불안정한 정체성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전장을 상기하는 것, 즉 일상 속에서 계속 전장을 상기하는 것은 이런 나날의 실천(신체 변용의 실천)이 전장의 몸짓임을 확인하는 일이며 신체화된 실천을 전장이라는 장에서 재구성해 나가는 일인 것이다. 구축된 실천으로부터 다른 구축의 가능성이 부상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전장을 상기한다고 하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이 상기한다고 하는 작업은 신체적 변용으로서 시작되는 것이다. 기억은 담론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신체와 실천을 구성하는 정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장. 전장 동원
오키나와 전투에 이르는, 즉 '일본인'이 되는 도정을 여기서는 평시의 규율이 전쟁 동원의 규율로, 그리고 전장을 지배하는 군율로 전환되어 나가는 과정으로 파악한다. 이렇게 규율이라는 문제에 주목하는 이유는 전장과 나날의 진부한 일상에서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연결되지 않게 되는 순간, 즉 오키나와 전투에서 제일 마지막에 군율을 이탈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서 발견해야 할 그 무엇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다. 더불어 중요한 점은 오키나와로부터 남양군도로의 이민인데 이 또한 사이판에 '자살절벽'이니 '만세절벽'이니 하는 지명을 새겨놓는 '일본인'이 되는 도정이었기 때문이다.

오키나와도 조선이나 타이완과 같이 황민화정책에 따른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이 전개되고 이는 '생활개선'에 편중되어 진행되었다. 생활개선의 대상은 오키나와어, 오키나와 전통 장례인 센코쓰(洗骨), 오키나와식 이름, 오키나와식 복장과 음주, 젊은 남녀의 교제풍속인 모아소비(毛幼), 자비센 반주노래 등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세부적인 사항들에 미쳤다. 이러한 항목들은 시기별 차이는 있었지만 오키나와의 근대에서 언제나 개선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생활개선이 이처럼 일상생활에까지 침투하게 된 이유는 오키나와 노동력의 외부유출을 가져왔던 1930년대 소철지옥과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생활개선운동은 일상생활의 당위적인 도덕으로서 수용되었다. 오키나와에서 생활개선을 도덕으로 수용해 간 사람들의 논리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표준어 장려운동을 둘러싼 '오키나와 방언논쟁'이 중요하다. 특히 "올바른 것,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 건강한 것"이라는 가치판단적인 '문화'를 주장하며 오키나와어 폐지운동을 비판하는 일본민예협회과 달리 '문화적 의미와는 별개'로 일본 또는 외지와/에서의 차별 극복을 위한 생활상의 '필요'를 주장하며 오키나와어 폐지운동을 주도하는 오키나와 출신자들의 논리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표준어 장려운동 등 생활개선에서 주장된 생활도덕을 수용해서 감시와 규율의 그물망 속으로 들어가는 그 배후에 현 외부 유출과 관련된 생활의 '필요'라고 하는 사적인 의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사적 의도가 '일본'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가치합리성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활개선은 현 외부 유출을 매개로 하면서 오키나와의 운동뿐만 아니라 오사카, 남양군도라는 지리적으로 확장된 범위에서 동시에 전개되었다. 우선 오사카의 생활개선운동은 멸시의 대상이 되어 있던 밀집지역의 일상생활에 대한 세밀한 개선항목들이, 불식되어야 할 '오키나와' '오키나와인'을 구성했다. 개선항목들은 '뒤쳐진' '낮은 수준'의 것으로서 부정적 가치를 부여받고 불식의 대상이 되는 반면, 지향해야 할 긍정적 가치로서 '일본인'이 설정되었다. 여기서 근면성이 중요한 도덕적 표지로 떠올랐고 근면성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생활개선운동이 전개되었다. 여기서 다시 전환이 일어나는데 근면성을 나타내는 증거를 제시하려던 생활개선운동이 근면성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오사카의 생활개선운동은 차별로부터 벗어나려는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도덕적 주체로서 자기를 구성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오키나와 출신자가 훌륭한 노동자로 규율화된 주체로서 스스로 구성해 나간다고 하는, 프롤레타리아화와 밀접하게 관련된 실천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런 실천은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침투해 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한편 남양군도로의 유출과 그 속에서 전개된 생활개선운동은 식민지 경영의 민족별 차별적 노무관리로 인하여 자기 생활과 관련되는 오키나와 문화를 뒤쳐진 것으로 불식할 뿐만 아니라, '낮은 문화수준'을 체현하고 있는 존재로서 선주민을 설정하고 그들 위에 자리를 잡는 운동이었다. 또한 이 생활개선운동이 식민사회에서 민족별로 서열을 가르는 가운데 전개되었고, 그 서열을 뛰어넘고자 하는 오키나와 출신자의 운동 자체가 '일본인'과 선주민의 서열을 유지하고 고정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따라서 생활개선운동에서 '도덕적 주체로서 자기를 구성한다는 것'은 오키나와 출신자가 노동자로서 규율화된 주체로 스스로를 구성해 나갈 뿐 아니라, 선주민을 지도하는 통치자로서 주체를 형성해 나가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예로부터 해양민족이었고 남양의 지도자로서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오키나와 문화의 재평가로, 즉 '전통의 창조'로 이어졌다. 이것은 남양으로의 유출과 관련된 생활개선이 전통문화의 억압이 아니라 문화의 쇄신, 나아가 창조로서 전개되었던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저팬 카나카'로부터의 탈출(일본인이 되는 것)이란 지도자 '일본인'을 지향하는 운동인 동시에, 남양군도의 식민지 경영을 뒷받침했던 차별적 노무관리로부터의 탈출이기도 했다. 여기서 성공을 추구하는 오키나와 사람들과 남양의 지도자가 되게 하려 한 남양청 사이에 존재했던 사고의 틈새가 존재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꿈과 제국주의적 침략은 틈새가 생기면서도 서로 유착되어 있었다. 그래서 생활개선은 관제 운동이라기 보다는 오키나와 사람들 자신의 운동으로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일상생활의 향상을 염원하는 마음 속으로 제국의식(일본적 오리엔탈리즘)이 스며들어왔고 지도받아야 할 타자를 계속해서 구성해 갔다. 불식해야 할 내부적 타자인 자신을 비롯하여 남양군도의 선주민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의 사람들을 타자로 삼음으로써 '일본인'은 그렇게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주체화는 본토의 노동시장과 남양군도의 유출이라는 '필요'와 연관되었다. 그리고 차별에서 탈출하려는 생활개선운동은 주체화를 두 가지 방향으로 이끄는데, 하나는 '자유롭지 않은 노동'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노동'의 세계로 이행하려는, 즉 본토의 노동자화 즉 프롤레타리아화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롭지 않은 노동'의 세계 속에서 향상을 추구하려는, 즉 남양군도의 통치자가 되려고 하는 방향이다. 이 두 가지 방향은 모두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것에 놀랍도록 서로 공명하면서 일체가 된다. 그렇다면 근대사회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결정적 계기인 프롤레타리아화 속에서 제국의식이 함께 양성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두 가지 방향이 전자로부터 후자로 진행/창출해 나가는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자기를 '이화(異化)'시켜 '도덕적 주체'로서 구성하는 것과 '이화'의 내용을 타자에게 실체화시키는 것은 일련의 작업이었던 것이다.
한편 '자유로운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를 '도덕적 주체'로 구성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도덕적 범죄자(=일탈자)'라는 위협 아래 매일 감시받고 규율화되는 것을 뜻한다. 반면 '자유롭지 않은 노동자'는 자기를 구성하는 방식과 상관없이 지배당할 수 있음을 뜻하며 이것은 곧 강제이며 이를 실현시키는 것은 폭력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과정 속에서 노동자가 된다는 것과 통치자가 된다는 것의 일체화는 감시를 받는 주체와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라는 두 가지 방향의 일체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주체화는 국가의 안과 밖이라는 문제로도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감시를 받는 국내의 주체는 자신이 폭력을 행사하고 또 폭력이 자신을 유린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게 보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시를 받는 주체에 의해서 형성된 시민사회와 제국이 공존할 수 있으며, 제국으로의 참여가 시민사회로의 참여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국가의 두 얼굴이 한 인간의 주체화라는 문제로 합치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바로 병사다.
그렇다면 감시를 받는 주체는 과연 국가의 폭력을 행사하거나 거꾸로 그 폭력에 의해 유린되는 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 특히 국내가 전장이 되는 오키나와 전투와 같은 상황에서 말이다. 군율이 주민에게 확대되고 급기야 파탄에 이르는 문제를 살펴볼 영역이 여기에 존재한다.

이제 일상생활의 규율이 전장의 군율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자. 이를 위해 오키나와 전투에 돌입하기 직전에 전개된 생활개선이 전장 동원에 필요한 군사적 요청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군은 우선 생활개선운동과 동일하게 오키나와 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이를 전장 동원상의 '필요'와 결부시켰다. 특히 방첩과 관련해서 '저급한 문화'의 사례인 오키나와어 같은 것들이 군사능력의 표지로 이용되었다. 대표적으로 '스파이'라고 하는 일탈에 대한 공갈이 집단 내부의 규율을 군율로 이행하도록 하였다. 더불어 전장 동원이 지향됨에 따라 지도자도 도덕적 지도자와 함께 재향군인이 방첩활동의 지도자로 새롭게 포함되었다. 이처럼 전장 동원은 군사적 요청에 입각하여 군에 의해 위로부터 강제적으로 추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시의 심성과 서로 공명하면서 진행되었다. 그렇다고 일상생활의 규율이 그대로 군율로 전환된 것은 아니다. 일상세계를 전장으로 변모시켜 나가는 데에는 병사 경험이 있는 재향군인을 지도자로 영입하고 '도덕적 범죄자'를 '스파이'로 탈바꿈시키다고 하는 비약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반대로 군율뿐 아니라 그 기반이 된 일상생활에서의 규율로부터도 이탈하는 주체를 창출하게 된다. 전장이란 군율이 지향되는 장인 동시에 주체의 결정적 이탈을 낳는 장이기도 했다.

오키나와 전투가 본격화 되는 전장에서 지도자가 감시 지도한 '도덕적 범죄'가 '스파이'로 이어지고 그 '스파이'가 도리어 이민 경험이나 미군과의 접촉 때문에 이번에는 지도자 자신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규율 또는 군율에 복무하는 주민의 참여도 엿보였으며 그들은 이 과정 속에서 고뇌하였다. 여기서 군율은 평시의 규율과 공명하면서 확실하게 주민에게 확대되어 갔으며 동시에 규율로부터의 이탈(오키나와어의 세계, 지도자층의 이탈)을 창출하였다. 나아가 군율로부터의 이탈은 스스로의 과거와 직면하면서 생기는 타자에 대한 분노와 함께 과거의 자신에 대한 격렬한 내적 성찰인 '원한'과 직면한다. 내적 성찰이 마주하는 과거란 현존했던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에 발견되고 구성된 과거다. 따라서 과거를 어떻게 떠올리는가 하는 것은 현재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이처럼 오키나와 전투에서 군율이 붕괴되어 나가는 과정은 군율로부터 사람들이 이탈해 갔을 뿐만 아니라 이런 '원한'을 수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장에서는 새로운 주체가 발견되었으며 '원한'과 함께 과거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 획득된 것은 오키나와어이며 '오키나와 민족'이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지금까지의 실천이 전장에서 '원한'을 갖고 반추되고 과거를 돌이켜보는 그 마음속에서 오키나와어가 갑자기 등장했다는 점이다. 전장에서의 원한과 오키나와어는 근대의 감시와 폭력을 거부하는 주체로서 발견된다. 이것은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공동성'으로부터 이탈한 새로운 '공동성'의 사상적인 내용 규정 그 자체을 말한다. 새로운 공동성은 근대를 염원해 왔기 때문에 발견되고 구성된 과거이며 과거의 기억이다. 또한 그것은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것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만들어낸 폭력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과의 공동성을 확보하는 사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미야마 이치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이 책의 주제는 "군사적 폭력에 대항할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그것도 "과거의 전장에 한정하여 모색하는 대항의 가능성이 아니라, 일상이 전장으로 만들어져 가는 현실세계 속에서 모색하는 반군투쟁의 가능성"이라고. 따라서 도미야마는 "이 가능성을 말로 사고하려 할 때 직면하게 될 안개이자 개입해야 할 상황"인 전장의 기억에 집중한다. 그러나 기억 자체는 가능성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능성은 전장이 된 일상의 폭력을 예감하는 신체이며, 폭력의 예감을 어떻게든 기술하는 말(언어)이며, 말하는 기술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 부분은 책 제목과 같이 <전장의 기억>을 다룬다. 이 때의 전장은 일상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현실세계 또한 직조하고 있는 그런 공간이다. 두 번째 부분은 전장과 그와 연결된 일상의 폭력으로부터 우리가 지각하는 신체와 말을 문제 삼아 폭력의 예감을 확인하고 그 폭력의 예감으로부터 어떤 반응/말들이 나타나며/만들어지며 이를 어떻게 밀고가야 그 폭력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날 뿐만 아니라 대항할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 이러한 과정은 특별히 근대 일본의 '유일한' 전장이었던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그리고 그 오키나와의 지식인인 이하 유후의 '말'을 중심으로 추적한다. 책의 두 번째 부분인 <폭력의 예감>은 도미야마의 또 다른 책의 제목이기도 하니 그 책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전장의 기억>에만 집중하여 그의 논의를 따라가도록 하자.

1장. 전장을 사고하는 것
관동군 731부대의 인체실험의 이유는 '동아의 평화'라는 낯익은 슬로건만이 아니라 '출세'라는 근대 일본이 줄곧 유지해 온 가치관이 뒤켠에 도사리고 있다. 이처럼 전장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지극히 당연한 일상세계에서 시작되고 있다. 따라서 전장이 비정상적인 상태도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광기도 아니며 나날의 진부한 삶 속에서 준비되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전장에 일상을 갖고 들어감으로써 일상과 동떨어진 위치에서 전장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말투를 추궁하고, 거꾸로 일상 속에서 전장을 발견해 내는 왕복운동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오키나와 전투를 주제삼아 전장의 광경을 분석적으로 이야기하고 전장의 기억을 말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묻고자 한다.
류큐는 1879년 '류큐 처분'과 1898년 징병제의 시행 등의 제도적 동일화에 의해 타이완이나 조선과 달리 완전히 일본의 오키나와 현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제도적 동일화가 곧바로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일본인'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오키나와 전투를 둘러싼 전장이 중요한데, 오키나와인의 '일본인'되기는 일상생활과 전장 '동원'이라는 신체적 실천이 하나로 연출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진행된다. 결과적으로 오키나와인들의 '일본인'되기는 대동아전쟁의 패배와 오키나와출신 황군 병사의 전사로 실패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상생활의 죽음이다. 하지만 생활은 8월 15일로 단절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이 연속성은 생활의 죽음 가운데서 도출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따라서 평시에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일상적인 삶과 맞닿아 있는 오키나와 전투를 그려내는 작업과 이 작업에 의해서 전후에 생겨난 오키나와 전투 이야기를 되묻는 일은 중요하다.
덧붙여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자기 내부로 침투해 오는 타자에게 가위눌림을 당하면서 그 타자를 의식세계나 의미세계의 임계영역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타자성을 배제함으로써 일상을 구성하는 신체적 실천이 '일본인'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본인'이 된다는 것은 전장과 이어져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임계영역으로 밀려나간 타자의 행방(배제된 타자성)인데 이를 통해 균질적인 내셔널리즘으로 수렴/회수되지 않을 새로운 이야기가 가능한지 탐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총력전'으로서의 근대 전쟁은 전장이 일상화되고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분이 사라져 모든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 전장 동원이 진행된다. 이때 전쟁 '동원'이란 항상 전장 동원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으로의 동원을 가능케 하는 군율은 평시의 규율과 서로 공명할 것이며 이 규율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변화모습이 검토되어야 한다. 즉, 군율이 평시의 규율과 서로 공명하면서도 차츰 틈새를 벌리면서, 규율을 성립시키는 요인이 일상적 감시에서 노골적인 폭력으로 작동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의지와 군율이 결정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게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해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순간은 죽음이 꿈을 가로막는 순간 즉, 오키나와인의 '일본인'되기가 중지되는 순간이므로 결코 죽은 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아 돌아온 자들은 죽은 자와 함께 죽음이 가로막는 순간에 발견했어야 했던 것을 아직도 계속 찾고 있고 대부분 여전히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들을 다시금 과거의 시간, 죽은 자가 본 것으로 고착화시킨다. 이 점에서 전장을 둘러싼 기억/이야기는 중요하다.
전장은 진부한 일상 속에서 준비되었고 그 일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런 일상에서 전장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바로 진부한 일상의 심연에 내부의 적으로서 죽임을 당했던 타자가 발화를 봉쇄당한 채 방치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상기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진부한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의미세계를 뒤흔들어 다른 공간과 시간을 발견해 나가는 작업이며,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영위 속에서 압살당해 온 타자가 의미를 갖고 말문을 여는 일이다. 그렇기에 전장의 이야기는 일종의 정치적 장으로서 발견되지 않으면 안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계급투쟁입니까, 포스트모더니즘입니까? 예, 부탁드립니다!  

(슬라보예 지젝)

지젝은 바디우를 인용하며 오늘날의 문제는 "어떤 종류의 정치가 진정 자본이 요구하는 것에 이질적인가?"에 있다고 한다. 따라서 지젝이 보기에 중요한 것은 자본이며 자본에 이질적인 ‘민주주의의 창안’을 기획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젝은 현재 우리에게 부과하고 있는 '계급투쟁'이냐 '포스트모더니즘'이냐는 그릇된 양자택일에 선택의 거부(예, 부탁드립니다!)로 응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단 지젝, 버틀러, 라클라우는 이 점에서 유사하며 다시 버틀러와 라클라우 모두 불가능하지만 필연적인, 그리고 부인되는 동시에 불가피한 하나의 항(적대와/거나 보편성, 반성성과/이거나 '열정적 애착')을 다룬다. 이들 셋의 차이를 굳이 드러내는 이유는 지젝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려는 ‘절박한 시도’이며 지젝 스스로 오늘날의 급진적인 정치적 사유와 실천의 (불)가능성과 싸우기 위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젝과 버틀러/라클라우는 보편성과 주체를 둘러싼 시각에서 차이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차이는 보편성의 층위를 하나 또는 단일한 것으로 보느냐 둘 또는 중층적으로 보느냐의 차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한데 보편성의 층위를 하나 또는 단일한 것으로 본다고 생각하는 지젝의 입장에서 라클라우와 버틀러는 불가능한/비어있는 보편성을 전제하며 그 안에서의 헤게모니 투쟁 또는 수행적 모순을 밀고나갈 것을 정치적 실천과제로 삼고 있다. 이에 반해 지젝은 불가능한/비어있는 보편성 장에서의 헤게모니 투쟁과 수행성은 반유토피아적인 점진주의적 ‘개량주의’ 정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다른 층위/장/좌표로의 비약 또는 전환을 정치적 실천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재미있는 것은 지젝이 스스로 말하듯이 친구의 논리로 친구의 주장을 반박한다는 점이다. 즉, 라클라우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버틀러가 강조하는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 개념을 가지고 반박하며 그와 반대로 버틀러의 라캉적 주체(‘빗금 그어지 주체’)에 대한 비판에 관해서는 라클라우의 적대 개념을 가지고 반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더 눈여겨 봐야할 것은 '근대적 주체'에 대한 버틀러와 지젝의 차이다. 알튀세르의 '호명된 주체' 개념와 라캉의 '빗금친 주체' 개념으로 대별되는 이들의 주체개념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은 계속해서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제 지젝의 논의를 충실히 따라가 보자.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개념의 주요 특징은 사회내적 차이들이 사회와 비사회를 분리하는 한계와 우연적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여기에 근본적 적대를 상정하는데 이 적대는 체계에 내적인 특수한 차이를 통해 오직 왜곡된 방식으로만 표상될 수 있기 때문에 외적 차이는 항상 이미 내적이며 나아가 이 둘의 결합은 결국 우연적이며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개념이 급진 혁명적인 등가 논리와 '수정주의적' 환원 사이에서 동요하며 '불가능한 총체'를 대표하는 특수한 요소들 사이의 끝없는 투쟁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점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헤게모니 개념은 '불가능한' 거대 목표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지만 부분적 문제 해결에는 참여할 수 있다고 하거나 '불가능한' 사회의 충만함의 달성과 '다양한 부분적 문제들'의 해결 사이의 양자택일로 제한된다고 문제제기당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원리를 바꾼 '민주주의의 창안'은 제3의 길이 존재함을 보여주며 단지 '다양한 부분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 이상을 해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창안'은 이전에 '정상적' 권력작용의 장애물로 여겨졌던 것이 이제는 그것의 긍정적 조건이 된다는 점을 하나의 가능한 반론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의사소통의 궁극적 실패가 끊임없이 우리를 말하도록 강제하듯 권력 작용의 궁극적 불확실성과 변덕스러움(우연성)은 우리가 합법적인 민주적 권력을 다루고 있다는 유일한 보증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바로 그 보편적 개념에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단절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의 유의 상이한 종들은 한편으로 정치적 민주주의의 바로 그 보편적 개념에 내속적인 긴장을 설명하며 나아가 이 긴장은 단지 민주주의 개념에 내적인/내속적인 게 아니라 민주주의가 자신의 타자와 관계하는 방식에 의해 정의된다. 그 타자는 일차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바로 그 정의가 '비정치적인' 것으로 배제하려는 것이다. 나는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의 분명한 구분선을 긋고, 어떤 영역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정립하는 바로 그 몸짓이 탁월한 정치적 몸짓임을 승인하면서 그것이 정치적인 것에서 어떤 영역을 배제하는 몸짓이기에 이를 뒤집고만 싶다.  
  

 

  

고유한 역사적 주체, 경제적 계급투쟁의 특권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본질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서 후근대적인 환원될 수 없는 복수의 투쟁으로 이행한다는 이 표준적인 후근대적 좌파의 서사(라클라우의 서사도 포함)는 분명 현실의 역사적 과정을 서술하는 한편, 그것의 핵심에 있는 '체념' 즉,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체제를 극복하려고 하는 모든 실질적 시도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을 시야에서 지워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계급이 변함없이 명명되지만",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라는 다문화주의적 주문 속에서 거의 이론화되지도 발전되지도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후근대적 정치가 실질적으로 일종의 '경제의 정치화'를 촉진한다 하더라도 이 정치화는 일종의 대체물로서의 '유사 생산의 스펙터클'(수퍼마켓의 식품코너 등의 예)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후근대적 정치는 자본주의 내 지배의 문제에서 이론적으로 물러남을 의미하며 결국 후근대적 정체성 정치의 담화는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등의 공포를 다소 '과도'하게 고집함으로써 그 크기를 인정받지 못하는 계급투쟁의 잉여 투여를 이 여타의 '주의들'이 짊어져야 한다.  

라클라우의 발전도 '본질주의의 마지막 잔여물'인 '경제(생산, 계급)'를 제거하는 점진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결국 '상부구조적' 헤게모니 투쟁을 경제적 '하부구조'에 객관적으로 정초하기를 포기하면서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 투쟁을 특권화했다. 물론 후근대적 정치는 이전에 '비정치적'이거나 '사적'이라 여겨졌던 일련의 영역들을 '재정치화'하는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후근대적 정치가 작용하는 '정치적인 것'의 바로 그 개념과 형식이 경제의 '탈정치화'에 근거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재정치화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더불어 새로운 다양한 정치적 주체성의 후근대적 출현은 본연의 정치적 행위인 '계급투쟁과 자본주의의 전복'과 같은 근본적 층위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헤겔적인 '구체적 보편성'의 교훈을 '급진민주주의'에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개념과 '구체적 보편성'이라는 헤겔적 개념은 근접해 있다. 물론 라클라우는 보편자와 특수자의 악명 높은 헤결적 '화해'는 기각한다. 그러나 헤겔을 자세히 보면, 그 악명 높은 '화해'를 '상이한 보편자들의 교차, 두 보편자의 부분적 겹침'으로 볼 수 있다. 즉, 보편자의 모든 특수한 것이 자신의 보편자에 '부합하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 그 보편자에 완전히 부합하는 특수한 종에 도달하게 될 때 바로 그 보편자는 다른 유로 변환한다. 이를 '급진 민주주의'에 대입하면 경제의 영역을 정치화한다는 의미에서 실제로 '급진적'인 '급진 민주주의'는 정확히 더 이상 '(정치적) 민주주의'가 아니게 된다. 즉 사회의 '불가능한 충만함'이 실현되는 걸 의미하지 않고 다만 불가능한 것의 한계가 또 다른 층위로 이항되는 걸 의미한다. 그럼 우리가 '그 개념의 층위에서' 정치적인 것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면, 결코 자신의 우연성을 온전히 인정하는 정치적 행위자들을 다루고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여기서 나는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개념에서 작용하는 불가능성이 이중적임을 강조한다. '근본적 적대'는 훨씬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사회가 자신의 온전한 존재론적 실현을 성취하는 걸 가로막는 바로 그 적대/부정성을 합당하게 표상/접합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단순히 사회의 불가능한 충만함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사회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 불가능성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장 내에서 왜곡되고 표상-설정화된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역할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기본적 작용은 경험적 장애물을 항구적 조건으로 변형시키는 탈역사화의 몸짓일 뿐만 아니라 장의 선험적 종결/불가능성을 경험적 장애로 이항시키는 반대의 몸짓이기도 하다. 라클라우도 예를 들어 성공적인 혁명 후에는 비적대적인 '사회의 충만함'이 도래할 것이라는 바로 그 관념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기각하기에 이런 역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정당한 거부'가 모든 전면적 사회변혁의 '체념'으로 이어지고 부분적 문제의 해결로 귀결되는 것, 즉 '현존의 형이상학' 비판에서 반유토피아적인 점진주의적 '개량주의' 정치로의 도약은 부당한 단락이다.
 

 

Ⅲ 

 버틀러 또한 라클라우와 마찬가지로 보편성을 '허위적'인 것으로 본다. 그리고 보편성은 불가피하며 보편성의 규정된 역사적 형태 각각이 포함/배제의 집합을 수반하는 동시에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의 일부로서 이 포함/배제를 의문시하는 공간을, 포함/배제의 한계를 '재협상하는' 공간을 개방하고 지탱한다고 여기고 있다. 따라서 '허위적 보편성'에 대한 본연의 비판은 보편성이 '현실화'되고 근거하는 배제를 주제로 삼아 계속해서 그 배제를 의문시하고 재협상하고 전치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즉 보편성의 형식과 내용 사이의 간극을 떠안고 스스로 자신의 개념 속에서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이것이 '수행적 모순'이라는 정치적으로 매우 유용한 버틀러의 개념이 목표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우선, 배제의 논리는 항상 즉자적으로 이중화된다는 점이다. 종속된 타자가 배제/억압될 뿐만 아니라 헤게모니적 보편성 역시 자신의 부인되는 '외설적인' 특수한 내용에 의존한다. 우리는 이를 '탈동일시의 이데올로기적 실천'으로 부르고 싶은데 이데올로기는 바로 허위적 탈동일시의 공간을 구성할 때만, 즉 그 주체들의 사회적 존재가 놓인 실제적 좌표와 허위적으로 떨어져 있는 공간을 구성할 때만 유효하다. 사이버 공간을 통한 다양한 정체성의 유희나 그 반대인 자기 탐구의 태도는 모두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체제를 실질적으로 위협하기는커녕 궁극적으로 그것을 '살아갈 만한'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이론적 과업은 단지 '후근대적' 게임에 내포한 포함/배제의 특수한 내용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의 공간 그 자체가 출현하는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것이며 보편성이 사회-상징적 공간 속에서 작용하는 방식의 논리에서 일어난 근본적 전환을 탐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보편성이라고 하는 바로 그 기저의 개념은 어떤 식으로든 각각의 시기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또한 보편성의 구체적인, 실질적인 존재 상태는 전체 구조물 내에 본연의 자리가 없는 개인이다. 따라서 추상적 보편성이 나타나는 방식, 그것의 실제적 존재로의 진입은 이전의 유기적 균형을 파괴하는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운동이다. 그렇다면 버틀러가 허위적 보편성의 수행적 모순을 밀어붙이고 라클라우가 끝없는 헤게모니 투쟁을 제안할 때 문제는 이들의 '보편적' 지위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주의 자체를 역사화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본질주의에서 우연성의 자각으로 나아가는 이 이행을 설명할 일종의 메사서사(존재의 역사적 운명-신기원, 지배적 에피스테메의 전환, 근대화, 자본주의의 동학을 따른다는 보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설명)가 필요하다.  
 

    

  

헤게모니 개념의 '보편적' 전망 또는 '타당성'은 그것이 최근에 출현한 오늘날의 특수한 사회적 배치에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과 결부시킬 수 있다. 사회-정치적 삶과 그 구조가 항상 이미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물이지만 정치적 과정의 근본적으로 우연적이고 헤게모니적인 본성이 최종적으로 '나타날/자신에게 회귀할'수 있는 건, 그리고 스스로를 '본질주의적' 짐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건 오직 우연성이 전면화된 '후근대적'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오히려 전환하는-분산되는-우연적인-아이러니한-기타 등등의 정치적 주체성이 출현하는 바로 그 배경과 영역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라클라우와 버틀러가 (적어도 잠재적으로) 혼동하고 있는 두 층위 즉, 주어진 어떤 역사적 지평 내의 우연성/대체가능성의 층위와 바로 이 지평을 정초하는 보다 근본적인 배제/배척의 층위를 보다 분명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버틀러가 주장하는 라캉 비평에 대응할 수 있다. 버틀러는 라캉의 '빗금 그어진 주체' 개념이 주체 구성의 모든 과정이 구성적이며 필연적으로 불가피하게 불완전하여 결국 실패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인정하지만 바로 그 '빗금'이 모든 정치적 투쟁을 사전에 제한하는 비역사적인 선험적 금지 또는 제약으로 고양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성차 개념에서 라캉의 "성차는 실재적"이라는 명제를 성차는 비역사적이고 응결된 대립으로 단언하거나 성차의 대립은 헤게모니 투쟁 속에 낄 자리가 없는 타협할 수 없는 준거틀로 고정시켰다고 독해한다. 그러나 요점은 바로 그 보편성의 형식이 언제나 자신의 보편성 속에서 마치 탯줄처럼 특수한 내용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며 이 때문에 문제는 보편성의 바로 그 비어있는 형식이 헤게모니의 '전장'으로 출현하기 위해 어떤 특수한 내용이 배제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성차' 개념의 예를 통해 볼 때, 그 결과가 우연적인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과 '비역사적' 빗금 또는 불가능성은 엄밀히 상관적이다. 헤게모니 투쟁이 존재하는 건 바로 어떤 선행하는 불가능성의 '빗금'이 헤게모니 투쟁에서 내기에 걸린 공백(‘영역’)을 지탱하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공간이 존재하는 건 오직 이 공간이 모종의 보다 근본적인 배제(또는 배척)에 의해 지탱되는 한에서다. 그렇다면 두 층위, 즉 특수한 내용이 비어 있는 보편적 개념을 헤게모니화하는 헤게모니 투쟁과 보편자를 비어 있게 하는, 따라서 헤게모니 투쟁의 영역이 되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버틀러와 라클라우는 모두 온전한 우연성을 내포한 추상적인 선험적 형식 모델을 제시하며 이는 '거짓 무한'의 논리를 수반한다. 즉, 최종적 해결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복잡한 부분적 전치의 끝없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역사주의와 역사성의 구별이 필요하다. 역사주의의 모든 판본은 우연적 포함/배제, 대체, 재협상, 전치 등의 끝없이 열린 게임이 벌어지는 영역을 정의하는 최소한의 '비역사적' 형식적 준거틀에 의존한다. 진정으로 근본적인 역사적 우연성의 단언은 역사적 변동 자체의 영역과 그것의 (불)가능성 조건으로서의 외상적인 '비역사적' 핵심 간의 변증법적 긴장을 포함해야만 한다. 따라서 역사주의는 (불)가능성의 동일한 근본적 장 내에서의 끝없는 대체의 놀이를 다루는 반면, 본연의 역사성은 바로 이 (불)가능성의 상이한 구조적 원리를 주제로 삼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비역사적' 지위를 인식할 수 있는가? 레비-스트로스의 '영[零]제도' 즉, 의미의 부재에 대립해 오직 의미의 현존 자체만을 의미화하기 때문에 어떤 규정된 의미도 지니지 않는 비어 있는 기표를 통해 인식할 수 있다. 영제도 또는 비어 있는 기표는 어떤 실정적, 규정적 기능도 지니지 않은 특유한 것이면서 사회적인 것의 부재, 전사회적 혼돈에 대립해서 그것의 현존과 현실성 그 자체를 알려주는 순전히 부정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장 순수한 이데올로기, 즉 사회적 적대가 폐지되고 사회의 모든 성원이 스스로를 인지할 수 있는 중립적인 포괄적 공간을 제공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의 직접적 체현이며 더군다나 헤게모니 투쟁은 바로 이것이 어떻게 규정될지를 둘러싼, 어떤 특수한 의미화로 채색될지를 둘러싼 투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의 동일한 논리가 사회의 통일뿐만 아니라 그것의 적대적 분열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버틀러에 대한 비판과 그녀의 반비판은 알튀세르의 '주체를 구성하는 호명'이라는 문제틀과 관련되며 이를 통해 버틀러가 라캉을 받아들일 수 없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다. 믈라덴 돌라르는 주체를 알튀세르와 같이 호명의 결과 출현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기커녕 오직 호명이 문턱을 넘지 못하고 실패할 때,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만 출현한다고 주장하며 호명에 대한 상징적 정체성의 저항(실패)이 주체라고 한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상징화에 저항하는 이 대상적 잔여/과잉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물질적' 지위를 주장함으로써 궁극적 제도로서 상징적 질서 자체가 갖는 '관념적' 지위를 오인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도리어 돌라르가 물질적 잔여로서의 실재를 주장하는 외관 속에서 알튀세르에 반해 주체성의 내적 (자기) 경험은 외적인 물질적 실천과/이나 의례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고전적인 관념론적 몸짓을 반복하여 결국 실재로서의 라캉적 '대상a'는 물질적 실천이 미치지 못하는 관념적인 심리적 대상의 암호명으로 판명난다고 한다. 더불어 돌라르가 큰 타자를 관념화하여 물질적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와 그 의례에서 비물질적/관념적인 상징적 질서의 개념으로 나아가는 (라캉적) 전환을 승인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큰 타자의 (비)물질성에 대한 돌라르의 논점은 전적으로 유물론적이다. 돌라르는 단지 호명(과 인지)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물질적 실천과/이나 현실적인 사회적 제도(학교, 법 등)의 의례로는 충분하지 않는다는, 즉 주체는 상징적 제도, 차이의 관념적 구조를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상상적 동일시인) 이상적 자아에 대립하는 (상징적 동일시의) 자아 이상으로서의 이 '큰 타자'의 '관념적' 기능은 또한 상호수동성의 개념, 즉 나의 수동적 경험을 타자에게 이항한다는 개념을 통해 식별된다. 여기서 상호수동성은 응시가 이중화되고, 내(예의 농구선수)가 '나 자신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는 것(예의 절음발이 청년의 응시를 통해 보이는 것)을 보는' 반성적 구조를 낳는다. 그러나 돌라르가 말하는 '잔여'는 외부성에 대립하는 관념적-비물질적-내적 대상이기는커녕 모든 내면화/관념화의 움직임 속에서 지속하고 '내부'와 '외부'의 분명한 구분선을 전복하는 우연적 외부성의 잔여다. 그렇다면 이 잔여는 바로 '내부성' 한 가운데 있는 환원될 수 없는 외부성의 흔적이며 그것의 가능성 조건인 동시에 그것의 불가능성 조건이다. 그리고 이 잔여의 '물질성'은 상징화에 저항하는 외상의 그것이다. 여기서 '물질성'과 소위 '외적 현실' 간의 등가를 거부하며 대상a를 심리적 삶 자체의 '관념적' 영역 안에 있는 관통할 수 없는/고밀도의 얼룩이라는 의미에서 '물질적'으로 보아야 하며 진정한 유물론은 '심리적 삶' 자체의 핵심에서 '물질적인' 외상적 중핵/잔여를 추출해내는 것이다.  

다시 버틀러는 의례와 믿음 사이의 관계에서 돌라르를 비판한다. 즉, 돌라르는 무릎 꿇고 의례를 따르기 위해서 주체는 이미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형적인 이데올로기적 악순환(주체화의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주체가 이미 그곳에 있어야 한다)에 사로 잡혀 일튀세르의 요점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버틀러는 비트겐슈타인을 참조하며 "우리는 무릎을 꿇기 이전에 먼저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말하기 이전에 단어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반대로 양자는 의미가 표출 그 자체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도래하리라는 '신념 위에서' 수행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례를 수행할 때 그 곳에 있어야 하는 믿음은 바로 '비어 있는' 믿음, 우리가 '신념 위에서' 행위를 수행할 때 작용하는 믿음이다. 이후에 의미가 발생할 것이라는 이 믿음과 신뢰가 바로 라캉을 따라 돌라르가 말하는 전제다. 그렇다면 우리를 상징적 과정에 참여하게 만드는 이 신념의 행위에 대한 반대는 부정이 아니라 보다 원초적인 배척, 참여의 거부다. 그렇다면 이 원초적 '예!'는 '예!'가 아니라 '아니오!'를 말하는 주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해 부정적인 방식으로 증명된다. 이 모든 오해의 기저에 놓인 건 주체 개념을 인식하는 방식의 근본적 차이다. 라캉에게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호명의 부름 속에서의 상상적 인지(오인)가 채우고자 애쓰는 바로 그 간극이며 여기서 주체와 실패의 밀접한 연계는 '주체' 자체가 상징화의 실패, 상징적 표상 그 자체의 실패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 즉, 주체는 이 실패의 '너머'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며, 이 실패를 통해서 출현한다. 그리고 대상a는 이 실패의 실정화/체현에 불과하다.  
 

 

  

'실재의 응답'으로서의 주체라는 이 개념을 통해 라캉의 실재와 상징계의 관계에 관한 버틀러의 비판과 직면한다. 버틀러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것으로서의 실재라는 규정은 그 자체로 상징적 규정이라고 하며 실재의 외적 한계를 지적하지만 여기서 라캉적 실재가 상징계에 엄밀히 내적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 실재는 단지 상징계의 내속적 제한이며, 상징계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따라서 실재는 사실 상징계에 내적/내속적이지 그것의 외적 한계는 아니며 바로 이 때문에 상징화될 수 없다. 즉, 외적인 것으로서의 실재, 상징계에서 배제된 것으로서의 실재가 사실 상징적 규정이다. 따라서 상징화를 벗어나는 건 바로 상징화의 내속적 실패의 지점으로서의 실패다.  

이제 상징계를 통해 실재와 접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분석적 ‘행위’라는 라캉의 개념과 관계한다. 정의상 행위는 어떤 불가능한 실재의 차원과 접촉하는 몸짓이다. 이 행위의 개념은 주어진 장 내에서 '다양한 부분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에 불과한 것과 다름 아닌 이 장의 구조화 원리를 전복하려는 보다 근원적인 몸짓을 구별하는 바탕 위에서 인식되어야 한다. 행위는 주어진 상징적 세계 내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것을 성취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가능성 조건을 소급적으로 창조할 수 있도록 자신의 조건들을 변화시킨다. 구체적으로 행위는 어떤 점에서 스스로를 쓰러뜨리는, 즉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쓰러뜨리는 '미친', 불가능한 선택을 행하는 것이며 그 때문에 이 행위는 주체가 스스로를 발견하는 상황의 좌표를 변화시킨다. 결국 '스스로를 쓰러뜨리는' 그런 극단적 몸짓(각종의 영화 예와 라캉 자신의 예)이 주체성 그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행위자)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진정한 행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다름 아닌 나의 정체성의 핵심을 재정의한다. 그리고 진정한 행위는 우리 존재의 부인되는 환상적 토대의 좌표를 전환시킨다. 행위는 단지 우리의 공적인 상징적 정체성의 윤곽을 다시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자기 정체성의 명시적인 상징적 직물의 결여와 왜곡을 통해 이 정체성을 지탱하는 유령적 차원, 살아있는 주체를 괴롭히는 산죽은 유령, '행간에서' 전달되는 외상적 환상의 은밀한 역사를 전환시킨다.  

여기서 '환상의 횡단'이라는 개념과 (다른 층위에서는) 사회적 증상을 발생시키는 좌표를 전환시킨다는 개념이 결정적인데 그렇지 않다면 '허위적 행위'인 나치즘 또한 탁월한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위는 기저에 놓인 환상을 교란하고, '사회적 증상'의 지점에서 그것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 행위는 난데없이 나타나 그것이 개입하는 상징적 장을 교란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것의 숨겨진, 부인되는 구조화 원리인 이 내속적 불가능성, 걸림돌의 관점에서 그렇게 한다. 즉, 진정한 행위는 구성적 공백, 실패의 지점, 또는 주어진 배치의 '증상적 비틀림'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개입한다. 더 나아가 행위는 구조의 '증상적 비틀림'에 개입해야 한다는 이런 개념의 한 가지 명확한 정치적 귀결은 각각의 구체적 배치 속에서 우리가 '진정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결정하는 하나의 민감한 투쟁의 결절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의 몸짓이 행위로 여겨지려면 그것은 '환상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두 번째 특징은 '불가능한 것을 행하기', '소급적으로 자기 자신의 조건을 다시 쓰기'의 첫 번째 특징에 덧붙여진 또 하나의 부가적 기준이 아니라 이 두 번째 기준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첫 번째의 기준 역시 실로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실제로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행하는‘ 것이 실재에 대한 환상을 가로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철학-정치적 정세의 문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행위/과업은 '아무리 선의에서 그러더라도, 이것은 반드시 새로운 굴락(홀로코스트)으로 끝날 것이라!'라고 공유된 전제의 영역과 단절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동에 대한 비판적 이해가 가능하도록 하는 책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열강이 싸우고 있는 테러야 말로 스스로가 만들어서 싸우고 있는 유령이며 그 테러에 대항하는 자들이야 말로 테러의 온상이며 테러리스트들이라는 도발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역시 시작은 개념에서 출발하는데 어쩌면 그 개념 또는 법적 조항이 틈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틈새를 무섭게 비집고 들어가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하는 것이 실천과 긴밀한 것처럼 보인다.

 

촘스키와 아슈카르, 중동을 이야기하다
노엄 촘스키·질베르 아슈카르 대담, 강주헌 옮김, 사계절 펴냄, 2만2천원

미국이 기획하고 탄생시킨 중동의 유럽

어떤 개념을 빈틈없이 정의하는 것보다, 그 개념을 식별하는 게 중요한 법이다. 그 개념이 쉽게 식별된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다. 우리가 테러를 식별하는 기준에 합의하더라도 강대국의 행위가 그 정의에 해당된다면, 그 정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노엄 촘스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5년 7월 25일, 영국 런던에서 ‘특별한 회의’가 열렸다. 전쟁 기간에 벌어진 인권유린과 전쟁범죄를 단죄하기 위한 군사재판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를 두고 세계 각국의 국제법 전문가들이 마주 앉았다. 당시 회의에서 미국 대표단 쪽은 전쟁범죄의 뿌리가 되는 ‘침략행위’를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눠 정의했다.
첫째, 다른 나라에 대한 선전포고 행위다. 둘째, 선전포고를 했는지와 상관없이 다른 나라의 영토를 무력을 동원해 침범하는 행위다. 셋째, 선전포고를 했는지와 상관없이 육군, 해군, 또는 공군을 동원해 다른 나라의 영토나 함정, 항공기를 공격하는 행위다. 미국 대표단은 이어 “정치·군사·경제적 또는 기타 여하한 이유도 이런 행위에 대한 변명이나 정당화의 수단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 회의는 그해 8월 8일 나치 전범재판의 사법적 기초가 된 ‘국제군사재판소를 위한 런던헌장’ 체결로 이어졌다. 헌장을 기초로 그해 11월 21일엔 독일 땅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주요 전범자를 피고로 한 첫 전범재판이 열렸다. 런던회의에서 미국 대표단을 이끌었던 로버트 잭슨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검찰 쪽 수석고문으로 참여했다. 잭슨은 재판 기간에 “전쟁범죄를 처단하지 않으면 인류의 문명 자체가 위태로워진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잭슨이 정의한 ‘침략행위’는 1974년 12월 14일 열린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관련 결의안에서 거의 수정 없이 재차 인용됐다. 국제법적 근거가 제법 탄탄한 셈이다.

테러의 개념이 수용될 수 없는 까닭

‘빈틈없는 정의’는 얼마나 무게를 지닐 수 있을까? 현실은 초라하기만 하다. 촘스키의 지적처럼 강대국의 행위가 그 ‘정의’에 해당된다면, 받아들여지지 않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실제 잭슨의 정의에 따르자면 미국 역대 대통령 절대다수가 침략행위를 자행한 전범으로 기소를 당해야 하는 처지다. 굳이 베트남전쟁과 이라크전쟁을 들먹일 필요도 없겠다. 냉전 시절 세계 곳곳에서 미국이 벌인 숱한 ‘저강도 전쟁’이 모두 ‘침략행위’에 해당한다. 미국이 “해당 국가의 동의를 받지 않고, 그 국가의 영토 내에서, 폭력행위를 수행할 목적으로 무장집단을 지원한 행위”는 그 사례를 하나하나 입에 올리기조차 버겁다.


세기는 바뀌어도, 세계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9·11 동시테러가 촉발한 ‘테러와의 전쟁’ 시대, 중동의 오늘은 한 치도 바뀌지 않은 지구촌의 현실을 상기시키는 주무대다. 그래서다. 중동 분쟁과 미국 대외정책의 위험천만한 관계를 논한 <촘스키와 아슈카르, 중동을 이야기하다>는 우리 시대를 읽어나가는 작은 나침반으로 삼을 만하다. 이 책은 세계적인 언어학자이자 반전운동가인 노엄 촘스키 미 매사추세츠공과대 교수와 레바논계 프랑스인으로 유럽에서 손꼽히는 중동 전문가인 질베르 아슈카르 런던대 교수가 2006년 1월 초 사흘간 총 14시간에 걸쳐 나눈 대화를 세밀하게 정리한 대담집이다.

‘테러와 음모론, 이슬람 근본주의와 민주주의, 미국의 중동정책을 좌우하는 요인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 대담의 주제는 폭이 넓고, 두 대담자가 쏟아내는 정보는 가히 ‘백과사전적’이다. 시대와 인물을 종과 횡으로 갈라 중동 각국의 어제와 오늘을 하나로 모아낸다. 중동에 관한 책이기는 하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부 세력’의 이해관계가 대화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를 돌아보지 않고는 오늘의 중동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테러와의 전쟁’은 조지 부시 전 미 대통령이 고안해낸 게 아니다. 촘스키 교수는 레이건 행정부가 발족한 1981년을 테러와의 전쟁 ‘원년’으로 꼽는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조지 슐츠 국무장관을 비롯해 (당시 미) 행정부 고위 관료들은 ‘현대의 역병,’ ‘우리 시대에 닥친 야만의 회귀’, ‘테러라는 사회악’ 등 온갖 수사적 표현을 동원해 테러를 비난했다”고 지적했다. 부시 행정부가 즐겨 쓴 표현과 엇비슷해 보인다. 다만 당시 레이건 행정부가 집중한 테러는 ‘국가 주도의 국제 테러’였다. ‘테러와의 전쟁’이 테러범과 벌이는 전쟁으로 바뀐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란다.

이슬람 근본주의 지원하고 이용

본격적으로 ‘테러’를 논하기 앞서, 두 사람은 ‘개념 정의’에 초점을 맞춘다. 촘스키 교수는 “미국의 공식적인 법체계이고, 상당히 합리적인” 미 형법에서 테러의 정의를 취했다. 미 형법은 ‘테러’를 “협박, 강압, 공포 조성 등을 통해… 정치적·종교적·이념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폭력이나 폭력을 사용하겠다는 위협을 계산적으로 사용하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합당해 보인다. 촘스키 교수는 지체 없이 “바로 미국 정부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고발한다. 그러니 다시, ‘빈틈없는 개념’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현실이 부른 개념의 혼란이다. 촘스키 교수는 이렇게 지적한다.

“법을 다루는 학술지에서조차 ‘테러’를 수십 가지로 정의하고 분석한다. 누구도 확실하게 ‘테러는 이런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우리’가 ‘그들’에게 행한 테러는 배제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행한 테러는 포함시키는 정의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렇게 정의하기가 쉽겠는가. 학자들은 테러를 국가 단위 이하의 조직에만 국한하려 애썼지만, 테러 국가들을 배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미국을 배제하면서 테러 국가는 포함시키는 테러의 정의를 찾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개념의 혼란’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를테면 아무도 사우디아라비아의 ‘민주화’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아슈카르 교수의 지적이 아니어도 “지구상에서 가장 근본주의적 색채를 띤 왕국”이자 “전체주의 국가가 있다면 사우디가 바로 그곳”이다. “가장 반계몽적이고, 가장 수구적이며, 여성을 가장 억압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아슈카르 교수는 “사우디에서 여성에 대한 대우는 그야말로 소름이 돋을 지경”이라며 “사우디와 비교하면, 이란은 여성 해방의 횃불”이라고 꼬집는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란을 광적인 종교국가로 매도하는 반면, 사우디를 ‘우리의 친구’로 부른다.

사례를 찾기 위해 멀리 갈 것도 없다. 지난 2005년 2월부터 4월까지 사우디에선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지방선거가 실시됐다. 지역별로 세 차례 나눠 치러진 당시 선거에서 투표권은 남성에게만 주어졌다. 입후보 자격도 당국의 허가를 받은 남성에게만 주어졌다. 당시 사우디 내무장관인 나이크 압드 아지즈 왕자는 쿠웨이트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여성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여성 전용 투표소를 따로 마련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어렵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아예 신분증이 없기 때문이란다. 더구나 당시 선거를 통해 배출한 지방의원은 전체 의석의 절반뿐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군주가 지명했다. 그런데도 부시 행정부는 “민주주의를 향한 의미 있는 첫걸음을 뗐다”고 치켜세웠다. 촘스키 교수의 표현처럼 “한마디로 코미디”였다.

모든 ‘테러’의 배후로 지목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도 기실 이런 개념의 혼란, 인식의 착종이 불러온 괴물이다. 아슈카르 교수는 “지금 이슬람 근본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 것은 미국 정책의 직접적 산물”이라며 “(특히) 비정부 테러에 이슬람 근본주의란 이름을 붙이는 경향도 최근에야 눈에 띄는 현상”이라고 강조한다. 실제 1960년대까지만 해도 무슬림 세계를 전반적으로 지배하던 분위기는 세속적 민족주의였고, 아랍 세계에는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구현한 아랍 민족주의가 있었다. 이 세속적 민족주의자들은 석유자원을 국유화해 지역 발전을 위해 사용하려 했다. 미국 처지에선 세속적 민족주의자들이 ‘주적’으로 떠오른 셈이다. 아슈카르 교수는 “미국은 사우디 왕정이 시행하고 선전하던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가장 복고적이고 보수적인 민족주의를 분쇄했다”며 “세속적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등 중동 지역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던 좌파 사상이나 진보적 사상에 맞서기 위해 이슬람 근본주의를 계획적으로 이용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오바마에 건설적인 변화 기대 힘들어”

아프가니스탄이 소련과 전쟁을 벌일 때도 이런 정책은 계속됐다. 그 전쟁에서 미국은 소련에 맞서 싸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무자헤딘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80년대 미국이 파키스탄에서 군부독재자 무하마드 지아울하크 정권을 지지한 것도 세속적 민족주의를 꺾기 위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지원한 사례다. 그러니 1996년 무자헤딘의 후예인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정권을 잡았을 때, 미국이 처음부터 이들을 지지하고 나선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테러와의 전쟁’은 결국 오랜 세월 스스로 키운 유령과 벌이는 허망한 싸움인 게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다를까? 촘스키 교수는 “건설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말을 잘랐다. 미 중동정책의 가늠자가 되는 팔레스타인 문제만 놓고 봐도 그렇단다. 지난 2006년 팔레스타인 자치의회 선거에서 이슬람주의 정치단체 하마스가 승리하자, 당시 상원의원이던 오바마 대통령은 선거 결과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잘못 투표한 벌’이라도 주겠다는 심산이었을까? 그는 하마스가 집권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어떤 조직에 대해서도 직접적 지원을 금지하는 것을 뼈대로 한 ‘팔레스타인 반테러법’을 공동 발의하기도 했다. 촘스키 교수는 오바마 대통령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폭력행위를 포기하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이스라엘 간에 맺어진 과거의 협정을 인정할 때까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응징은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정작 미국과 이스라엘이 하마스에 강요해온 조건들을 자신들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촘스키 교수가 ‘암울한 진단’을 내린 시점은 대담집 개정판이 나온 2008년 3월 말이다. 당시 민주당 경선 주자였던 오바마 대통령은 결국 민주당 후보로 대선에서 승리했다. 취임을 앞두고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20여 일간 유린했을 때, 오바마 대통령은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지난 5월 18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첫 정상회담을 했을 땐, 이스라엘을 “중동에서 유일한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치켜세웠다. 예상은 들어맞고 마는가? 조짐이 좋지 않다.

정인환 국제 부편집장 inhwan@ilemonde.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