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투쟁입니까, 포스트모더니즘입니까? 예, 부탁드립니다!  

(슬라보예 지젝)

지젝은 바디우를 인용하며 오늘날의 문제는 "어떤 종류의 정치가 진정 자본이 요구하는 것에 이질적인가?"에 있다고 한다. 따라서 지젝이 보기에 중요한 것은 자본이며 자본에 이질적인 ‘민주주의의 창안’을 기획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젝은 현재 우리에게 부과하고 있는 '계급투쟁'이냐 '포스트모더니즘'이냐는 그릇된 양자택일에 선택의 거부(예, 부탁드립니다!)로 응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단 지젝, 버틀러, 라클라우는 이 점에서 유사하며 다시 버틀러와 라클라우 모두 불가능하지만 필연적인, 그리고 부인되는 동시에 불가피한 하나의 항(적대와/거나 보편성, 반성성과/이거나 '열정적 애착')을 다룬다. 이들 셋의 차이를 굳이 드러내는 이유는 지젝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려는 ‘절박한 시도’이며 지젝 스스로 오늘날의 급진적인 정치적 사유와 실천의 (불)가능성과 싸우기 위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젝과 버틀러/라클라우는 보편성과 주체를 둘러싼 시각에서 차이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차이는 보편성의 층위를 하나 또는 단일한 것으로 보느냐 둘 또는 중층적으로 보느냐의 차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한데 보편성의 층위를 하나 또는 단일한 것으로 본다고 생각하는 지젝의 입장에서 라클라우와 버틀러는 불가능한/비어있는 보편성을 전제하며 그 안에서의 헤게모니 투쟁 또는 수행적 모순을 밀고나갈 것을 정치적 실천과제로 삼고 있다. 이에 반해 지젝은 불가능한/비어있는 보편성 장에서의 헤게모니 투쟁과 수행성은 반유토피아적인 점진주의적 ‘개량주의’ 정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다른 층위/장/좌표로의 비약 또는 전환을 정치적 실천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재미있는 것은 지젝이 스스로 말하듯이 친구의 논리로 친구의 주장을 반박한다는 점이다. 즉, 라클라우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버틀러가 강조하는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 개념을 가지고 반박하며 그와 반대로 버틀러의 라캉적 주체(‘빗금 그어지 주체’)에 대한 비판에 관해서는 라클라우의 적대 개념을 가지고 반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더 눈여겨 봐야할 것은 '근대적 주체'에 대한 버틀러와 지젝의 차이다. 알튀세르의 '호명된 주체' 개념와 라캉의 '빗금친 주체' 개념으로 대별되는 이들의 주체개념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은 계속해서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제 지젝의 논의를 충실히 따라가 보자.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개념의 주요 특징은 사회내적 차이들이 사회와 비사회를 분리하는 한계와 우연적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여기에 근본적 적대를 상정하는데 이 적대는 체계에 내적인 특수한 차이를 통해 오직 왜곡된 방식으로만 표상될 수 있기 때문에 외적 차이는 항상 이미 내적이며 나아가 이 둘의 결합은 결국 우연적이며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개념이 급진 혁명적인 등가 논리와 '수정주의적' 환원 사이에서 동요하며 '불가능한 총체'를 대표하는 특수한 요소들 사이의 끝없는 투쟁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점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헤게모니 개념은 '불가능한' 거대 목표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지만 부분적 문제 해결에는 참여할 수 있다고 하거나 '불가능한' 사회의 충만함의 달성과 '다양한 부분적 문제들'의 해결 사이의 양자택일로 제한된다고 문제제기당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원리를 바꾼 '민주주의의 창안'은 제3의 길이 존재함을 보여주며 단지 '다양한 부분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 이상을 해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창안'은 이전에 '정상적' 권력작용의 장애물로 여겨졌던 것이 이제는 그것의 긍정적 조건이 된다는 점을 하나의 가능한 반론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의사소통의 궁극적 실패가 끊임없이 우리를 말하도록 강제하듯 권력 작용의 궁극적 불확실성과 변덕스러움(우연성)은 우리가 합법적인 민주적 권력을 다루고 있다는 유일한 보증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바로 그 보편적 개념에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단절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의 유의 상이한 종들은 한편으로 정치적 민주주의의 바로 그 보편적 개념에 내속적인 긴장을 설명하며 나아가 이 긴장은 단지 민주주의 개념에 내적인/내속적인 게 아니라 민주주의가 자신의 타자와 관계하는 방식에 의해 정의된다. 그 타자는 일차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바로 그 정의가 '비정치적인' 것으로 배제하려는 것이다. 나는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의 분명한 구분선을 긋고, 어떤 영역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정립하는 바로 그 몸짓이 탁월한 정치적 몸짓임을 승인하면서 그것이 정치적인 것에서 어떤 영역을 배제하는 몸짓이기에 이를 뒤집고만 싶다.  
  

 

  

고유한 역사적 주체, 경제적 계급투쟁의 특권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본질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서 후근대적인 환원될 수 없는 복수의 투쟁으로 이행한다는 이 표준적인 후근대적 좌파의 서사(라클라우의 서사도 포함)는 분명 현실의 역사적 과정을 서술하는 한편, 그것의 핵심에 있는 '체념' 즉,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체제를 극복하려고 하는 모든 실질적 시도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을 시야에서 지워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계급이 변함없이 명명되지만",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라는 다문화주의적 주문 속에서 거의 이론화되지도 발전되지도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후근대적 정치가 실질적으로 일종의 '경제의 정치화'를 촉진한다 하더라도 이 정치화는 일종의 대체물로서의 '유사 생산의 스펙터클'(수퍼마켓의 식품코너 등의 예)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후근대적 정치는 자본주의 내 지배의 문제에서 이론적으로 물러남을 의미하며 결국 후근대적 정체성 정치의 담화는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등의 공포를 다소 '과도'하게 고집함으로써 그 크기를 인정받지 못하는 계급투쟁의 잉여 투여를 이 여타의 '주의들'이 짊어져야 한다.  

라클라우의 발전도 '본질주의의 마지막 잔여물'인 '경제(생산, 계급)'를 제거하는 점진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결국 '상부구조적' 헤게모니 투쟁을 경제적 '하부구조'에 객관적으로 정초하기를 포기하면서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 투쟁을 특권화했다. 물론 후근대적 정치는 이전에 '비정치적'이거나 '사적'이라 여겨졌던 일련의 영역들을 '재정치화'하는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후근대적 정치가 작용하는 '정치적인 것'의 바로 그 개념과 형식이 경제의 '탈정치화'에 근거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재정치화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더불어 새로운 다양한 정치적 주체성의 후근대적 출현은 본연의 정치적 행위인 '계급투쟁과 자본주의의 전복'과 같은 근본적 층위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헤겔적인 '구체적 보편성'의 교훈을 '급진민주주의'에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개념과 '구체적 보편성'이라는 헤겔적 개념은 근접해 있다. 물론 라클라우는 보편자와 특수자의 악명 높은 헤결적 '화해'는 기각한다. 그러나 헤겔을 자세히 보면, 그 악명 높은 '화해'를 '상이한 보편자들의 교차, 두 보편자의 부분적 겹침'으로 볼 수 있다. 즉, 보편자의 모든 특수한 것이 자신의 보편자에 '부합하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 그 보편자에 완전히 부합하는 특수한 종에 도달하게 될 때 바로 그 보편자는 다른 유로 변환한다. 이를 '급진 민주주의'에 대입하면 경제의 영역을 정치화한다는 의미에서 실제로 '급진적'인 '급진 민주주의'는 정확히 더 이상 '(정치적) 민주주의'가 아니게 된다. 즉 사회의 '불가능한 충만함'이 실현되는 걸 의미하지 않고 다만 불가능한 것의 한계가 또 다른 층위로 이항되는 걸 의미한다. 그럼 우리가 '그 개념의 층위에서' 정치적인 것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면, 결코 자신의 우연성을 온전히 인정하는 정치적 행위자들을 다루고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여기서 나는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개념에서 작용하는 불가능성이 이중적임을 강조한다. '근본적 적대'는 훨씬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사회가 자신의 온전한 존재론적 실현을 성취하는 걸 가로막는 바로 그 적대/부정성을 합당하게 표상/접합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단순히 사회의 불가능한 충만함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사회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 불가능성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장 내에서 왜곡되고 표상-설정화된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역할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기본적 작용은 경험적 장애물을 항구적 조건으로 변형시키는 탈역사화의 몸짓일 뿐만 아니라 장의 선험적 종결/불가능성을 경험적 장애로 이항시키는 반대의 몸짓이기도 하다. 라클라우도 예를 들어 성공적인 혁명 후에는 비적대적인 '사회의 충만함'이 도래할 것이라는 바로 그 관념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기각하기에 이런 역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정당한 거부'가 모든 전면적 사회변혁의 '체념'으로 이어지고 부분적 문제의 해결로 귀결되는 것, 즉 '현존의 형이상학' 비판에서 반유토피아적인 점진주의적 '개량주의' 정치로의 도약은 부당한 단락이다.
 

 

Ⅲ 

 버틀러 또한 라클라우와 마찬가지로 보편성을 '허위적'인 것으로 본다. 그리고 보편성은 불가피하며 보편성의 규정된 역사적 형태 각각이 포함/배제의 집합을 수반하는 동시에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의 일부로서 이 포함/배제를 의문시하는 공간을, 포함/배제의 한계를 '재협상하는' 공간을 개방하고 지탱한다고 여기고 있다. 따라서 '허위적 보편성'에 대한 본연의 비판은 보편성이 '현실화'되고 근거하는 배제를 주제로 삼아 계속해서 그 배제를 의문시하고 재협상하고 전치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즉 보편성의 형식과 내용 사이의 간극을 떠안고 스스로 자신의 개념 속에서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이것이 '수행적 모순'이라는 정치적으로 매우 유용한 버틀러의 개념이 목표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우선, 배제의 논리는 항상 즉자적으로 이중화된다는 점이다. 종속된 타자가 배제/억압될 뿐만 아니라 헤게모니적 보편성 역시 자신의 부인되는 '외설적인' 특수한 내용에 의존한다. 우리는 이를 '탈동일시의 이데올로기적 실천'으로 부르고 싶은데 이데올로기는 바로 허위적 탈동일시의 공간을 구성할 때만, 즉 그 주체들의 사회적 존재가 놓인 실제적 좌표와 허위적으로 떨어져 있는 공간을 구성할 때만 유효하다. 사이버 공간을 통한 다양한 정체성의 유희나 그 반대인 자기 탐구의 태도는 모두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체제를 실질적으로 위협하기는커녕 궁극적으로 그것을 '살아갈 만한'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이론적 과업은 단지 '후근대적' 게임에 내포한 포함/배제의 특수한 내용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의 공간 그 자체가 출현하는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것이며 보편성이 사회-상징적 공간 속에서 작용하는 방식의 논리에서 일어난 근본적 전환을 탐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보편성이라고 하는 바로 그 기저의 개념은 어떤 식으로든 각각의 시기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또한 보편성의 구체적인, 실질적인 존재 상태는 전체 구조물 내에 본연의 자리가 없는 개인이다. 따라서 추상적 보편성이 나타나는 방식, 그것의 실제적 존재로의 진입은 이전의 유기적 균형을 파괴하는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운동이다. 그렇다면 버틀러가 허위적 보편성의 수행적 모순을 밀어붙이고 라클라우가 끝없는 헤게모니 투쟁을 제안할 때 문제는 이들의 '보편적' 지위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주의 자체를 역사화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본질주의에서 우연성의 자각으로 나아가는 이 이행을 설명할 일종의 메사서사(존재의 역사적 운명-신기원, 지배적 에피스테메의 전환, 근대화, 자본주의의 동학을 따른다는 보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설명)가 필요하다.  
 

    

  

헤게모니 개념의 '보편적' 전망 또는 '타당성'은 그것이 최근에 출현한 오늘날의 특수한 사회적 배치에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과 결부시킬 수 있다. 사회-정치적 삶과 그 구조가 항상 이미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물이지만 정치적 과정의 근본적으로 우연적이고 헤게모니적인 본성이 최종적으로 '나타날/자신에게 회귀할'수 있는 건, 그리고 스스로를 '본질주의적' 짐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건 오직 우연성이 전면화된 '후근대적'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오히려 전환하는-분산되는-우연적인-아이러니한-기타 등등의 정치적 주체성이 출현하는 바로 그 배경과 영역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라클라우와 버틀러가 (적어도 잠재적으로) 혼동하고 있는 두 층위 즉, 주어진 어떤 역사적 지평 내의 우연성/대체가능성의 층위와 바로 이 지평을 정초하는 보다 근본적인 배제/배척의 층위를 보다 분명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버틀러가 주장하는 라캉 비평에 대응할 수 있다. 버틀러는 라캉의 '빗금 그어진 주체' 개념이 주체 구성의 모든 과정이 구성적이며 필연적으로 불가피하게 불완전하여 결국 실패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인정하지만 바로 그 '빗금'이 모든 정치적 투쟁을 사전에 제한하는 비역사적인 선험적 금지 또는 제약으로 고양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성차 개념에서 라캉의 "성차는 실재적"이라는 명제를 성차는 비역사적이고 응결된 대립으로 단언하거나 성차의 대립은 헤게모니 투쟁 속에 낄 자리가 없는 타협할 수 없는 준거틀로 고정시켰다고 독해한다. 그러나 요점은 바로 그 보편성의 형식이 언제나 자신의 보편성 속에서 마치 탯줄처럼 특수한 내용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며 이 때문에 문제는 보편성의 바로 그 비어있는 형식이 헤게모니의 '전장'으로 출현하기 위해 어떤 특수한 내용이 배제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성차' 개념의 예를 통해 볼 때, 그 결과가 우연적인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과 '비역사적' 빗금 또는 불가능성은 엄밀히 상관적이다. 헤게모니 투쟁이 존재하는 건 바로 어떤 선행하는 불가능성의 '빗금'이 헤게모니 투쟁에서 내기에 걸린 공백(‘영역’)을 지탱하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공간이 존재하는 건 오직 이 공간이 모종의 보다 근본적인 배제(또는 배척)에 의해 지탱되는 한에서다. 그렇다면 두 층위, 즉 특수한 내용이 비어 있는 보편적 개념을 헤게모니화하는 헤게모니 투쟁과 보편자를 비어 있게 하는, 따라서 헤게모니 투쟁의 영역이 되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버틀러와 라클라우는 모두 온전한 우연성을 내포한 추상적인 선험적 형식 모델을 제시하며 이는 '거짓 무한'의 논리를 수반한다. 즉, 최종적 해결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복잡한 부분적 전치의 끝없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역사주의와 역사성의 구별이 필요하다. 역사주의의 모든 판본은 우연적 포함/배제, 대체, 재협상, 전치 등의 끝없이 열린 게임이 벌어지는 영역을 정의하는 최소한의 '비역사적' 형식적 준거틀에 의존한다. 진정으로 근본적인 역사적 우연성의 단언은 역사적 변동 자체의 영역과 그것의 (불)가능성 조건으로서의 외상적인 '비역사적' 핵심 간의 변증법적 긴장을 포함해야만 한다. 따라서 역사주의는 (불)가능성의 동일한 근본적 장 내에서의 끝없는 대체의 놀이를 다루는 반면, 본연의 역사성은 바로 이 (불)가능성의 상이한 구조적 원리를 주제로 삼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비역사적' 지위를 인식할 수 있는가? 레비-스트로스의 '영[零]제도' 즉, 의미의 부재에 대립해 오직 의미의 현존 자체만을 의미화하기 때문에 어떤 규정된 의미도 지니지 않는 비어 있는 기표를 통해 인식할 수 있다. 영제도 또는 비어 있는 기표는 어떤 실정적, 규정적 기능도 지니지 않은 특유한 것이면서 사회적인 것의 부재, 전사회적 혼돈에 대립해서 그것의 현존과 현실성 그 자체를 알려주는 순전히 부정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장 순수한 이데올로기, 즉 사회적 적대가 폐지되고 사회의 모든 성원이 스스로를 인지할 수 있는 중립적인 포괄적 공간을 제공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의 직접적 체현이며 더군다나 헤게모니 투쟁은 바로 이것이 어떻게 규정될지를 둘러싼, 어떤 특수한 의미화로 채색될지를 둘러싼 투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의 동일한 논리가 사회의 통일뿐만 아니라 그것의 적대적 분열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버틀러에 대한 비판과 그녀의 반비판은 알튀세르의 '주체를 구성하는 호명'이라는 문제틀과 관련되며 이를 통해 버틀러가 라캉을 받아들일 수 없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다. 믈라덴 돌라르는 주체를 알튀세르와 같이 호명의 결과 출현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기커녕 오직 호명이 문턱을 넘지 못하고 실패할 때,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만 출현한다고 주장하며 호명에 대한 상징적 정체성의 저항(실패)이 주체라고 한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상징화에 저항하는 이 대상적 잔여/과잉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물질적' 지위를 주장함으로써 궁극적 제도로서 상징적 질서 자체가 갖는 '관념적' 지위를 오인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도리어 돌라르가 물질적 잔여로서의 실재를 주장하는 외관 속에서 알튀세르에 반해 주체성의 내적 (자기) 경험은 외적인 물질적 실천과/이나 의례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고전적인 관념론적 몸짓을 반복하여 결국 실재로서의 라캉적 '대상a'는 물질적 실천이 미치지 못하는 관념적인 심리적 대상의 암호명으로 판명난다고 한다. 더불어 돌라르가 큰 타자를 관념화하여 물질적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와 그 의례에서 비물질적/관념적인 상징적 질서의 개념으로 나아가는 (라캉적) 전환을 승인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큰 타자의 (비)물질성에 대한 돌라르의 논점은 전적으로 유물론적이다. 돌라르는 단지 호명(과 인지)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물질적 실천과/이나 현실적인 사회적 제도(학교, 법 등)의 의례로는 충분하지 않는다는, 즉 주체는 상징적 제도, 차이의 관념적 구조를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상상적 동일시인) 이상적 자아에 대립하는 (상징적 동일시의) 자아 이상으로서의 이 '큰 타자'의 '관념적' 기능은 또한 상호수동성의 개념, 즉 나의 수동적 경험을 타자에게 이항한다는 개념을 통해 식별된다. 여기서 상호수동성은 응시가 이중화되고, 내(예의 농구선수)가 '나 자신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는 것(예의 절음발이 청년의 응시를 통해 보이는 것)을 보는' 반성적 구조를 낳는다. 그러나 돌라르가 말하는 '잔여'는 외부성에 대립하는 관념적-비물질적-내적 대상이기는커녕 모든 내면화/관념화의 움직임 속에서 지속하고 '내부'와 '외부'의 분명한 구분선을 전복하는 우연적 외부성의 잔여다. 그렇다면 이 잔여는 바로 '내부성' 한 가운데 있는 환원될 수 없는 외부성의 흔적이며 그것의 가능성 조건인 동시에 그것의 불가능성 조건이다. 그리고 이 잔여의 '물질성'은 상징화에 저항하는 외상의 그것이다. 여기서 '물질성'과 소위 '외적 현실' 간의 등가를 거부하며 대상a를 심리적 삶 자체의 '관념적' 영역 안에 있는 관통할 수 없는/고밀도의 얼룩이라는 의미에서 '물질적'으로 보아야 하며 진정한 유물론은 '심리적 삶' 자체의 핵심에서 '물질적인' 외상적 중핵/잔여를 추출해내는 것이다.  

다시 버틀러는 의례와 믿음 사이의 관계에서 돌라르를 비판한다. 즉, 돌라르는 무릎 꿇고 의례를 따르기 위해서 주체는 이미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형적인 이데올로기적 악순환(주체화의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주체가 이미 그곳에 있어야 한다)에 사로 잡혀 일튀세르의 요점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버틀러는 비트겐슈타인을 참조하며 "우리는 무릎을 꿇기 이전에 먼저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말하기 이전에 단어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반대로 양자는 의미가 표출 그 자체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도래하리라는 '신념 위에서' 수행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례를 수행할 때 그 곳에 있어야 하는 믿음은 바로 '비어 있는' 믿음, 우리가 '신념 위에서' 행위를 수행할 때 작용하는 믿음이다. 이후에 의미가 발생할 것이라는 이 믿음과 신뢰가 바로 라캉을 따라 돌라르가 말하는 전제다. 그렇다면 우리를 상징적 과정에 참여하게 만드는 이 신념의 행위에 대한 반대는 부정이 아니라 보다 원초적인 배척, 참여의 거부다. 그렇다면 이 원초적 '예!'는 '예!'가 아니라 '아니오!'를 말하는 주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해 부정적인 방식으로 증명된다. 이 모든 오해의 기저에 놓인 건 주체 개념을 인식하는 방식의 근본적 차이다. 라캉에게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호명의 부름 속에서의 상상적 인지(오인)가 채우고자 애쓰는 바로 그 간극이며 여기서 주체와 실패의 밀접한 연계는 '주체' 자체가 상징화의 실패, 상징적 표상 그 자체의 실패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 즉, 주체는 이 실패의 '너머'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며, 이 실패를 통해서 출현한다. 그리고 대상a는 이 실패의 실정화/체현에 불과하다.  
 

 

  

'실재의 응답'으로서의 주체라는 이 개념을 통해 라캉의 실재와 상징계의 관계에 관한 버틀러의 비판과 직면한다. 버틀러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것으로서의 실재라는 규정은 그 자체로 상징적 규정이라고 하며 실재의 외적 한계를 지적하지만 여기서 라캉적 실재가 상징계에 엄밀히 내적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 실재는 단지 상징계의 내속적 제한이며, 상징계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따라서 실재는 사실 상징계에 내적/내속적이지 그것의 외적 한계는 아니며 바로 이 때문에 상징화될 수 없다. 즉, 외적인 것으로서의 실재, 상징계에서 배제된 것으로서의 실재가 사실 상징적 규정이다. 따라서 상징화를 벗어나는 건 바로 상징화의 내속적 실패의 지점으로서의 실패다.  

이제 상징계를 통해 실재와 접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분석적 ‘행위’라는 라캉의 개념과 관계한다. 정의상 행위는 어떤 불가능한 실재의 차원과 접촉하는 몸짓이다. 이 행위의 개념은 주어진 장 내에서 '다양한 부분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에 불과한 것과 다름 아닌 이 장의 구조화 원리를 전복하려는 보다 근원적인 몸짓을 구별하는 바탕 위에서 인식되어야 한다. 행위는 주어진 상징적 세계 내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것을 성취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가능성 조건을 소급적으로 창조할 수 있도록 자신의 조건들을 변화시킨다. 구체적으로 행위는 어떤 점에서 스스로를 쓰러뜨리는, 즉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쓰러뜨리는 '미친', 불가능한 선택을 행하는 것이며 그 때문에 이 행위는 주체가 스스로를 발견하는 상황의 좌표를 변화시킨다. 결국 '스스로를 쓰러뜨리는' 그런 극단적 몸짓(각종의 영화 예와 라캉 자신의 예)이 주체성 그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행위자)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진정한 행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다름 아닌 나의 정체성의 핵심을 재정의한다. 그리고 진정한 행위는 우리 존재의 부인되는 환상적 토대의 좌표를 전환시킨다. 행위는 단지 우리의 공적인 상징적 정체성의 윤곽을 다시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자기 정체성의 명시적인 상징적 직물의 결여와 왜곡을 통해 이 정체성을 지탱하는 유령적 차원, 살아있는 주체를 괴롭히는 산죽은 유령, '행간에서' 전달되는 외상적 환상의 은밀한 역사를 전환시킨다.  

여기서 '환상의 횡단'이라는 개념과 (다른 층위에서는) 사회적 증상을 발생시키는 좌표를 전환시킨다는 개념이 결정적인데 그렇지 않다면 '허위적 행위'인 나치즘 또한 탁월한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위는 기저에 놓인 환상을 교란하고, '사회적 증상'의 지점에서 그것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 행위는 난데없이 나타나 그것이 개입하는 상징적 장을 교란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것의 숨겨진, 부인되는 구조화 원리인 이 내속적 불가능성, 걸림돌의 관점에서 그렇게 한다. 즉, 진정한 행위는 구성적 공백, 실패의 지점, 또는 주어진 배치의 '증상적 비틀림'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개입한다. 더 나아가 행위는 구조의 '증상적 비틀림'에 개입해야 한다는 이런 개념의 한 가지 명확한 정치적 귀결은 각각의 구체적 배치 속에서 우리가 '진정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결정하는 하나의 민감한 투쟁의 결절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의 몸짓이 행위로 여겨지려면 그것은 '환상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두 번째 특징은 '불가능한 것을 행하기', '소급적으로 자기 자신의 조건을 다시 쓰기'의 첫 번째 특징에 덧붙여진 또 하나의 부가적 기준이 아니라 이 두 번째 기준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첫 번째의 기준 역시 실로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실제로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행하는‘ 것이 실재에 대한 환상을 가로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철학-정치적 정세의 문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행위/과업은 '아무리 선의에서 그러더라도, 이것은 반드시 새로운 굴락(홀로코스트)으로 끝날 것이라!'라고 공유된 전제의 영역과 단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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