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정리는 헤이든 화이트의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 - 메타역사>> 중 니체부분를 정리한 것이다. 현재 문학과 지성사에 나온 책은 절판되었고 알라딘에서 찾아지는 책은 부분 번역된 두 번째 책이다. 이 책에는 니체부분이 없고 전체 중 4편(미슐레-로망스, 랑케-희극, 토크빌-비극, 부르크하르트-풍자)만이 번역되어 있다. 전부가 다시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니체 : 은유 형식의 역사에 대한 시적 변호

서론
니체는 1830년대 이래 역사가들이 이용해온 역사 분석의 근본 개념과 그 개념들이 지향할 수 있는 역사 과정과 같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사학 사상에서도 하나의 전환을 마련하였다. 니체의 역사에 대한 고찰 목적은 역사적 과거를 믿는 신념과 역사적 과거에서 어떤 특정한 실체적 진리를 배울 수 있다고 믿는 신념을 분쇄하는 데 있었다. 니체는 인간이 역사를 보는 방법을 삶을 부정하는 형태와 삶을 긍정하는 형태로 구분하고 영원히 진실한 “타당한” 역사 개념이 있다고 믿으려는 욕망을 유일신을 믿으려는 그리스도교적 욕구의 또 다른 형태이거나 하나의 완전하고도 진정한 자연 법칙의 실체를 믿으려는 욕망을 지닌, 그리스도교의 세속화된 대응물인 실증주의 과학으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니체가 역사를 성찰했을 때, 그는 언제나 역사 자체가 어떻게 유사한 창조적인 꿈의 형태로 변할 수 있는가, 요컨대 역사가 어떻게 비극의 예술 형태로 바꾸어질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 결국 역사에 대한 니체의 성찰은 비극에 대한 성찰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신화와 역사
니체의 사상은 “영겁 회귀”와 인간의 디오니소스적 능력과 아폴로적 능력과의 끝없는 교체라는 이원론적 철학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영겁 회귀나 디오니소스적-아폴로적 이원론은 역사 지식에 대한 과거의 비판이 낳은 산물이며,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를 예술로 해석하고,이어서 심미적인 시각을 비극적 조건과 희극적 조건에서의 동시적인 삶을 이해하고 파악하려는 니체의 노력이 낳은 결과이다.
철학자로서의 니체의 목적은 세계에 대해 기계적 인과론이나 비인간화된 과학을 배태시킨 모든 환유적 이해와 세계에 대해 “고귀한” 동인, 신․정신․도덕에 관한 이론을 배태시킨 모든 제유적 승화로부터 인간 의식을 해방시킴으로써 아이러니를 초월하고 의식의 은유적 능력, 즉 “이미지의 유희”를 즐길 수 있는 능력을 향유하도록 의식을 복원하며, 세계를 순수한 현상으로 보고 그에 의해서 원시인의 소박한 은유보다도 훨씬 더 자의식적이며 순수한 존재로서의 활동으로 인간의 시적 의식을 해방시키는 데 있었다. 따라서 『비극의 탄생』을 통해 비극에 대해 성찰하고자 하였다.
니체는 비극을 디오니소스적 통찰과 아폴로적 통찰과의 결합으로서, 그리고 세계에 대한 희극적 이해로부터 벗어나 세계 존재에 대한 비극적 이해로서 또한 그와 상반되는 경우를 재해석하는 수단으로 제시하였다. 니체가 파악한 그리스의 고전적인 비극 정신(예술)은 현실적으로는 환상론적이지만, 창조적으로는 예술 자체의 환상을 파괴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근본적인 공허감에 대한 공포를 인간의 고위한 삶에 대한 아름다운 이미지(은유)로 전환시킨 다음, 다시 그 이미지를 파괴함(비극)으로써 새로운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꿈(희극)을 구성하는 토대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이처럼 비극 예술은 본질적으로 변증법적 예술이고 그것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과의 영웅적인 대결로 이끌거나, 이러한 투쟁 이후의 삶을 개척하게 할 수 있다고 니체는 주장하였다.
니체는 한편, 인간 존재가 단순한 존재에서 소외를 거쳐 세계와의 화해에 이르는 변증법적 과정이 명백한 심미적 충동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니체는 그릇된 낙관론과 그릇된 비관론을 비판하며, 비극 정신이 본질적으로 혼란한 존재의 성격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자신이 만든 환상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인간의 능력과의 갈등을 초래했다는 팽배한 의식에서 비극 정신의 본질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혼란에서 형식으로, 그리고 다시 혼란으로 되돌아가는 반사 운동이 바로 비극을 시가나 그 밖의 다른 모든 지식이나 신념 체계를 구분하도록 만든다. 오직 비극만인 삶을 위한 형식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혼란에 대한 의식의 끊임없는 변혁을 필요로 하였다. 니체에 따르면, 가장 파괴적인 형태의 환상론은 이미지를 개념으로 전환시켜, 그 개념이 제시한 조건 속에서 상상력을 얼어붙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는 분명히 디오니소스나 아폴로가 최후로 승리하는 예술이 아니라, 그것들의 상호 의존성을 전제로 한 예술을 옹호하였다. 즉 형식과 운동, 구조와 과정의 생생한 종합이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성은 두 신의 영역을 구분하는 한계선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에서의 비극적 감정의 소멸은, 한편으로는 “아폴로적인 정관”에 대한 아이러니의 승리와 다른 한편으로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에 대한 낭만적인 “격정”의 승리가 낳은 결과였다. 비극 정신의 이러한 왜곡은 소크라테스를 통해서 “아폴로적인 경향은 논리적인 체계로” 굳어지고, 유리피데스를 통해서는 디오니소스적 정서가 자연주의적 정서로 바꾸어지는 것과도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왜곡은 그릇된 낙관론을 고취했기 때문에 치명적이었고 플라톤과 이를 이은 그리스도교로 말미암아 그리스 시대 이래로, 서구인의 역사는 자기 도입적인 질병의 역사가 되었고 자기 기만의 막대 끝에 매달린 도살된 황소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한쪽 끝에는 그리스도교가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에게 삶의 요구를 부정하도록 인간의 종말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내세에서의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다. 다른 한 쪽 끝에는 실증주의 과학이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을 동물의 상태로 변모시켜 비인간화함으로써 만족을 느끼며, 어떤 통제력도 행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구원도 발견할 수 없는 기계적인 요소의 단순한 수단으로서 인간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비극 정신이 쇠퇴한 이래 서구인의 역사는, 삶의 부정이라는 이 두 경향의 변모 과정, 즉 처음에는 그리스도교가, 다음에는 실증주의 과학이 인간을 타락시켰다는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다. 니체에 의하면, 삶을 즐기려는 인간의 능력을 파괴한 바로 그 요소들이 이제는 요소 그 자체를 파괴하는 데 적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의 플롯이 아이러닉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자신이 신화와 비판의 빈곤을 충분히 자각한 의식 속에서 아이러니컬하게 살고 있으므로 그 결과는 특수한 의미에서 아이러닉하다.
그러나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과정과 아폴로적 과정의 교체라고 하는 낙관적인 시각으로 미래를 대하였다. “그리스도교적”인 내세에서, 로마의 군국주의나 “헬레니즘적” 비판으로, 그리고 새로운 비극의 시대나 그 결과로 나타난 본래의 야만상태와는 다른 새로운 야만상태로의 이행을 통해서 말이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순환의 개념이라면, 그 개념은 매우 기묘한 “순환”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원시 시대 이후의 서구인의 전역사는, 무대에서의 비극의 아곤처럼 단순한 존재로부터 소외를 거쳐 자기와의 화해에 이르는 하나의 위대한 진보의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를 지향하는 운동이 아니다. 니체가 인식한 유일한 “절대”는 자유로운 개인, 모든 정신적-초월적 충동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자신을 초월하려는 능력에서 목적을 발견하며, 자신에게 새로운 과업을 부여함으로써 삶에 변증법적 긴장을 가져다주며, 그리스인들이 신들만이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 형태의 인간적인 삶의 모형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는 자유인이었다.

기억과 역사
니체의 「역사의 선용과 남용」은 동물성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독특한 성격으로 이해할 수 있는 회상과 망각의 역학관계에 관한 글이다. 인간의 문제는 모든 것을 너무도 잘 기억한다. 특히 과거를 회상하는 이 능력으로부터 인간적인 모든 건조물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역사 속에서 살아야 하며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숙명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영광이며 파멸이기고 하다. 그렇다면 그 문제는, 역사를 망각하는 적절한 시기가 언제인가를 배우는 것이다.
니체는 회상이 창조적으로 행동하려는 의지를 봉쇄하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역사 지식으로 하여금 인간의 개혁 능력과 자기 초월의 능력에 기여할 수 있게 한다고 파악하였다. 그렇다면 니체의 마지막 목적은 역사 지식을 인간의 욕구라는 한계 속으로 끌어들여 욕구의 지배자가 아니라 욕구의 노예로 만드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의 행동과 투쟁이라는 면에서 보수적이며 경건한 능력에 도움이 되고, 인간의 고통을 달래는 위안으로서, 그리고 구원에의 열망에 도움이 되는” 기념적, 골동수집적, 비판적 역사가 형성한다고 하였다. 이 세 거지 형태의 역사가 인간의 능력을 촉진시킨다고 하였다.
기념적 역사(환유적 형식)는 창조적으로는 과거의 위대성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하여 미래를 지향하도록 인간을 이끌지만, 파괴적으로는 위대한 것에 대한 충동의 토대를 무너뜨린다. 골동 수집적인 역사(제유적 형식)는 창조적으로는 기원에 대한 경건한 외경심을 불러일으키고, 파괴적으로는 현재의 욕구와 갈망에 저항한다. 비판적 역사(아이러니 형식)는 창조적으로는 과거의 위대성과 가치의 신화를 통찰하고, 외경심을 짓밟으며, 과거가 현재를 구속한다는 주장을 거부하는 힘을 가지지만, 파괴적으로는 궐석 재판에 의해서 고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선고함으로써 결국 현재의 범속성을 떠받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처럼 니체에 의하면 역사 의식의 위험성은, 골동 수집적․비판적․기념적 역사의 극단, 다시 말하면 의고주의․현실주의․미래주의의 극단에서 각기 발견된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과거는 피할 수 없으므로 과거를 읽는 이 세 가지 방법을 종합하는 데 있다. 극단적이거나 파괴적인 특징을 지닌 이 세 가지 형태의 모든 역사 의식에 대해서 니체가 제시한 해독제는 은유 형식으로 작용하는 역사 의식이다. 예술 형식으로서의 니체의 역사 개념은 비극 예술로서뿐 아니라, 특히 순수한 비극 예술로서의 역사 개념이다.
니체는 역사가 일종의 예술 형식이 됨으로써 삶에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삶에 기여하는 예술 형식으로 인식된 역사는 진리와 정의에 기여하지 않고 오히려 “객관성”을 지향하게 될 것이고 니체는 객관성을 최고의 형식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이것은 역사적 지혜가 바로 극작가의 통찰 내지 설화화나 헤이든 화이트가 “플롯 구성”이라고 부른 것과 같은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니체는 객관성의 개념을 조심스럽게 이용해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한편, 역사 의식이 지향해야 할 원리는 무엇인가. 니체는 대체로 유럽, 특히 독일에 고통을 안겨준 그러한 형태의 역사 의식은 헤겔 철학과 다윈주의, 그리고 하르트만으로 대표되는 무의식의 철학이라는 세 가지 형태를 취한다고 하였다. 무의식의 지배권을 인정한 하르트만의 이론이나 헤겔의 “세계정신”이나 다윈의 신격화된 자연에 대한 이론은 형식에의 의지가 삶에의 의지에 더욱 유해하게 작용하는 것임으로 위험한 것이다. 역사가 살아 있는 인간의 욕구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모든 보편적인 체계는 마땅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니체는 강조하였다. 결국 니체는 “역사의 질병”에 대한 해독제는 역사 자체에 있다는 결론(아이러니)을 내렸다. 왜냐하면 역사 자체가 역사 문화의 역사적 기원임을 드러내고 있을 때, 그 방향은 “비역사적”(예술의 힘) 또는 “초역사적”(예술과 종교에 시야를 돌리는 힘)인 것으로 알려진 관점을 지향하게 될 것이며, 또 그러한 관점에서 예술의 신화 창조적인 능력이 작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도덕과 역사
니체의 『도덕의 계보』는 도덕, 인간의 도덕 의식, 인간의 양심 그리고 “선”이나 “악”과 같은 특성에 대한 인간적인 신념의 기원과 본질을 밝히려고 한다. 니체는 루소와 달리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선과 악 그 어느 속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니체는 멀지 않아 인간이 제한된 “선”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케 하는 방법을 통해서 서구의 도덕사를 구성하기 위한 도식을 제시하였다. 이 해방은 마르크스와 같이 “사회적” 조건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마르크스와 달리 타인과의 모든 필요한 유대로부터의 해방, 기초가 된다고 여겨지는 모든 “가치들”을 해체함으로써 형성된 무정부 상태와 다를 바 없는 개인의 자기 만족에 대한 기대로 이해하였다.
『도덕의 계보』에 실린 첫 에세이는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두 가지 형태를 고찰한 것이다. 여기에서 고귀한 인간과 비천한 인간과의 구분은 은유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인간과 개념적으로 사고하도록 강요당한 인간과의 구분으로서 인식된다. 고귀한 인간은 예술의 언어를 사용하며, 비천한 인간은 과학․철학․종교의 언어를 사용한다. 고귀한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선”으로 부르고 자신과 다른 행동을 “악”으로 부르는 반면, 약자는 자신보다 우월한 자들의 행동을 “악”으로 부르고 자신의 행동을 “선”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이분법(완전히 비도덕적이며 개인이 느끼는 쾌락과 고통의 경험을 표현한 것)은 “선악”의 이분법(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이며 도덕적일 뿐 아니라 질적으로 악한 실체가 개인이나 집단이 규정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행동에 귀속되는 그런 형태의 것)으로 대체된다. 니체 스스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도덕과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언어의 비유법을 이용했으며 은유적 언어의 본질적인 창조성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인간의 자제력에 나타난 은유 그 자체가 수행한 역할의 문제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것은 의식의 전개에 대한 그의 순환 개념이, 은유에서 환유와 제유를 거쳐 아이러니에 이르는 언의 순화에 대한 그의 개념에 반영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순수한 의식으로의 복귀는 필연적으로 은유적인 언어 단계로의 복귀로 인식되었다.
“죄”와 “나쁜 의식”과 “그와 연관된 문제들”에 대해서 쓴 『도덕의 계보』 두 번째 에세이는 인간의 독특한 회상 능력에 관한 재고찰에서 출발하고 있다. 니체는 기억을 인간이 고정된 과거나 특정한 미래에 자신을 결합시키는 나쁜 형태의 성향으로서 설명하였다. 회상하는 능력은 과거에 이루어진 약속에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을 결정하는 힘을 부여한다. 반면에 망각하는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에 살도록 만든다. 따라서 과거와 미래를 “망각”할 때 우리는 명확하게 현재를 “볼” 수 있다. 망각이 회상 때문에 중단될 때, “특히 회상이 약속의 문제가 될 경우에”, 의지는 과거의 조건과 욕구에 얽매이게 되고 건전한 회상을 제물로 바치고서라도 과거의 조건과 욕구를 계속 강화하려고 한다. 따라서 니체는 나쁜 의식은 과거의 행동을 자신의 행동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무능, 과거의 행동을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어떤 동인이나 섭리의 산물로 보려는 충동, 그리고 과거의 행동을 자신보다 우위에 있거나 초월하는 어떤 “능력”의 표현으로 보려는 충동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파악했다. 반대로 양심은 이미 일어났거나 미래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내 자신의 특성을 나타낸 나의 힘에 의해서 일어났거나 일어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창조적인 망각이 동시에 창조적인 회상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도덕의 계보』 나머지 부분은 억압과 순화에 관한 심리학의 이론에 의해서 문화․사회․도덕의 역사를 논구한다. 여기서 돌이킬 수 없는 특정한 과거와 공포에 대한 의식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한 것으로 다루어진다. 기억의 창조는 고통에 의해서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며 개인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문화의 기억도 쾌락이 아니라 고통의 산물이라고 하였다.
니체는 나쁜 의식의 기원을 죄에서 찾는다. 니체에 의하면, 죄의 개념은 보상의 개념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손실과 고통의 관계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계약 관계에서” 발생했다(계급 제도의 토대). 나아가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에서 국가의 기원을 찾는다. 그러나 니체의 실제 목적은 정의의 개념이 본질에 있어서 비도덕적인 인간 존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통의 자본화라는 개념을 이용하였다. 니체에 의하면 정의는 강자가 약자의 원한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이용한 수단이었다. 즉, 법률의 설정은 개인적으로 멸시를 받거나, 특수한 사정 때문에 행해지는 복수를 방지하고 그것을 객관적인 관계로 바꾸어놓았다. 요컨대, 정의는 “옳고” “그른” 행동에 대한 자의적인 구분에 그 기원이 있으며, 그 결과는 이기적인 감정을 제거화하기 위해서 가해자나 피해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의 지각을 재조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니체는 사물의 기원이 어디에 있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새로운 의도에 따라 권력에 내포된 요소에 의해서 주기적으로 재해석되고 재정비된다는 역사 방법에 따라 고통과 양심과의 관계를 다시 분석하였다. 니체는 처벌이 공포와 경계와 본능의 제어를 증대시키고, 문명화된 존재의 토대가 될 뿐 아니라, 시초부터 문명의 토대로서 존속해왔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니체에게 “나쁜 의식이란 인간이 이제까지 경험한 가장 심각한 변화-인간을 다만 사회적․평화적인 존재로 만든 변화의 압력에 굴복한 뿌리깊은 질병이었다.” 이 나쁜 의식을 형성하는 배후에는, 본능의 조직적인 억제와 “후에는 인간의 영혼으로 불린 발전의 토양만을 제공하는 ‘내면화’가 놓여 있다.” 여기에 종교의 기원이 있다.
사회, 양심, 종교의 기원에 관한 니체의 설명은 『독일 이데올로기』에 나타난 마르크스의 설명과 근접해 있지만 차이점이 있다. 마르크스는 이 모든 것을 인간의 절박한 생존에 근거하여, 분업을 필요로 하며 생산된 재화의 불평등한 분배를 초래한 사회 조건으로 설명한 데 반해, 니체는 주요 원리를 심리적 요소, 권력에의 의지, 삶에의 의지보다 더 강하고 타인에 대한 지배와 착취뿐 아니라 인간 자신을 파괴하는 능력을 설명하는 요소에서 찾았다. 인간성에 내재한 양심의 기원에 대해 니체는 양심이 형성되는 토대를 강자에게 내재한 순수한 심미적 충동(권력에의 의지에 굴복)과 이러한 충동에 대한 약자의 심리적 반응(권력에의 의지의 억압과 감추어진 본능적인 충동)에서 찾았으며, 이 두 가지 충동은 모두 인류가 지닌 독특하고도 공통적인 권력에의 의지를 포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진.선.미의 “개념”은 지배자들의 자연스런 권력에의 열망이나 삶의 즐거움과는 대비되는 피지배자들인 개인의 실질적인 격하를 통해서 존재하는 것과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것과의 차이를 발견하는 좌절된 개인의 의지가 낳은 산물이다. 또한 니체는 사회적 양심의 기원을 단순한 권력 관계에서 찾았다. 개인의 책임에 대한 관념이 부채자의 정심에 조직적으로 작용함으로써 고취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도덕적인 연속성도 세대 사이에, 그리고 현존하는 인간과 조상 사이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채무자와 채권자와의 관계에 나타나는 작용으로 보았다. 그리고 인간이 원시적인 조상으로부터 종고 나쁜 것에 대한 개념을 물려받은 것처럼, “인간은 종족의 신과 결합한, 현저한 부담과 최후의 보상을 받으려는 욕망을 종족으로부터 불려받았다.” 이것이 바로 모든 구원의 종교가 발생하는 기원인데, 그 종교는 개인의 책임과 죄를 인간에게 귀속시킴으로써 조상들과의 관계를 고르디오식의 일도양단의 방법으로 해결하지만, 그 과정에서는 지상에서의 열매를 구원 때문에 영원히 단념해야 한다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따라서 니체는 그리스도교란 은혜와 죄를 영원히 의식하는 가장 고귀한 의식의 승리를 대변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니체는 또한 그리스도교의 완성을 환희의 한 경우로 보았다.
그럼 세대가 짊어진 의무감과 “역사 의식”은 결국 동일하다. “회상”의 능력은 이 두 의식의 중심부에 놓여 있다. 그리고 세대가 짊어진 의무로부터의 도피는 역사 의식으로부터의 도피를 수반한다. 인간이 자신만을 위한 삶을 억제하는 채무자의 심성 때문에 괴로워지 않는다면, 회상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망각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진리와 역사
니체는 인간이 지닌 자기 단절의 능력이 초래한 결과의 역사를 인류의 관점에서 개관한다. 그는 금욕주의적 이상의 발전을 인간 의지의 한 충동, 즉 의지의 “허무에의 공포”로서 파악하였다. 인간이 동물적 열정을 충분히 발산시킬 수 없을 때 인간은 미덕을 필요로 하며 순결을 하나의 목표와 목적 또는 이상적인 가치로 바꿀 수도 있다. 그리하여 금욕주의적 이상이나 고통과 단절을 신성시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니체에 의하면 고급 문화의 모든 영역은 이러한 금욕적인 충동의 순화가 낳은 산물이다. 니체는 금욕적인 이 문화는 철학자들이 자신의 권력, 전도된 권력 의지를 표현한 하나의 기만이라고 주장하였다. 철학자는 본질에 있어 성직자의 적이지만, 애초부터 철학자에게는 성직자의 위신이 없었으므로 성직자처럼 위장할 수밖에 없었다. 불행하게도 그 위장은 행위자를 사로잡고, 종교로부터 벗어나려는 철학적 충동을, 본래 종교가 발생한 본질과는 다른 금욕적인 새로운 형태의 종교로 바꾸어놓았다. 그 결과 삶에 기여하는 순수한 철학은 소멸되어버렸다. 니체는 당시의 철학적 이상은 “순수이성․절대지식․절대적 사고력”이 이른다는 목적을 지닌, “순수하며 의지가 결여된 고통 없는 영업한 知者”를 동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니체는 근대의 역사가들을 바로 의지를 갖지 않은 知者의 이상을 구현한 존재로 파악하였다. 근대의 사가들은 역사적 과거 앞에 자신들을 의지와 사고력을 지니지 않은 사건의 “거울”로서 설정하였다. 그들은 다만 검증하고 기술할 따름이었다. 따라서 니체에 의하면, 이 “객관적”인 역사가들은 “위선적인 무기력의 ‘공정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유럽 문화를 문화 자체가 초래한 소외의 외면적 한계에 도달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비록 허무 때문이기는 했지만 의지도 구제되었다. 오직 허무에의 의지를 자의식으로까지 고양하고, 의지를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계획으로 바꾸며, 금욕적으로 인도된 감성이 인간에게 부과한 모든 짐 가운데서도 지나치게 세련된 이지의 능력을 분쇄하고 파괴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이것과 그리고 이것만이 적극적인 욕구에의 의지를 발산시킬 것이다. 니체는 이와 같은 파괴와 창조의 작용을 통해서 역사도 초역사적인 예술이 됨으로써 어떤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니체는 공동의 과업을 통해서 인간을 서로 결합시키는 마지막 유대를 끊기 위해서 역사 의식을 이용하였다. 그는 마르크스보다도 더 급진적으로 역사 자체의 궁극적인 해체를 추구하였다. 마르크스처럼 그는 그와 같은 해체가 남긴 조각들의 피안에서 새로운 인간성을 형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자율적인 개인을 창조하기 위해서 과거와 미래의 개념에 따라 사회와 문화의 개념을 해체했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나 순화된 문화를 위해 역사 의식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니체에게는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었다. 인간은 그 속에 외로이 존재하며, 그의 영원성처럼 모든 현재의 삶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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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리바르는 “보편적인 것들”을 모호한 보편성 또는 보편적인 것의 다의성으로 보낸데 왜냐하면 그것의 “대립물들”(특수한 것, 차이, 독특성)에 관한 우리의 논쟁이 어떤 일의적 준거에 기초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보편적인 것의 다의성을 있는 그대로, 보편적인 것에 구성적인 것으로 사고하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이러한 기획은 우리로 하여금 한 양태에서 다른 양태로 이행하도록, 부분적으로나마 인지가능한 경로들을 구성하도록 해 주는 언표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게 이끌 것이며, 최종 분석에서는 이러한 질서들 가운데 하나 또는 다른 하나에 대응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선택들을 행하게 도와 줄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 그는 라캉에게 영감을 얻어 3가지 용어법으로 구별하여 보편적인 것의 아포리아적 성격의 탐구에 기여하고자 한다. 먼저 세계의 통일성과 다양성의 표상을 문제시하도록 이끌 현재[실재]로서의 보편적인 것,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의념들이 대칭적으로 대립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논쟁의 고유한 장소로서 허구로서의 보편적인 것, 그리고 상징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의 곤란들에 대한 검토로써 이상성으로서의 보편적인 것이라고 부를 세 가지 보편적인 것을 구별한다.

Ⅰ. 현실로서의 보편적인 것
현실로서의 보편적인 것은 발리바르에 의하면 ‘세계화’(또는 지구화)로 읽혀지는데 그는 이것을 세계라 불리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들 내지 단위들의 실제적 상호의존성이라는 관념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상호의존성은 외연적 측면(제도와 기술의 전세계적 확장)뿐만 아니라 내포적 측면(개인에게의 직접적인 침투) 또한 갖는다. 따라서 “현실적” 보편성은 적어도 “근대 세계”의 출현 이후 이러한 현실은 현존하며, 아주 단순하게 우리가 근대성이라 부르는 것의 지평을 이룬다고 한다. 나아가 그는 그렇다면 세계국가의 창설을 기획하거나 인류를 인간 해방과 관계 맺게 하는 동시에, 자연적이며 동시에 도덕적 형상으로서의 인류 자신과 관계 맺게 만드는 일을 기획하는, 보편성과 세계성의 유토피아적 형상들은 돌연 시대에 뒤진 것, 대상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이것이 곧 “역사의 종언”를 표시하지는 않으며 다만 “유토피아적 세계시민주의”의 종언, 즉 특정한 이론적 휴머니즘의 종언을 표시할 뿐이며 세계화가 달성시킨 것과 같은 인류의 통일은, 또한 현실적 보편성의 도래는, 유토피아가 자신의 전제나 즉각적 결과물로 표상하는 도덕적, 문화적 가치들의 작동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점을 우리가 인정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다시 그는 질문을 던진다. 이제 더 이상 세계를 통일시키는 것 또는 세계를 현실적으로 실존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 문제인가? 발리바르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즉, “세계를 변혁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맑스적 도식(적대)과 홉스적 도식(“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통제)이 존재하나 현실적 보편성은 그렇게 적대와 통제가 가능한 단순하고 단일한 구조가 아니라고 한다. 즉 현실적 보편성이 경제 구조들의 단일한 세계화로 환원되지 않아서, 그리고 사회적 갈등들에 대한 세계적 규모에서의 규제의 중심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요원한 것처럼 보이며 그러한 갈등들이 보여주는 복잡성에 대해 장악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둘 다 현실적 보편성을 극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현실적 보편성(세계화, 지구화)은 새로운 복잡성(다의성)의 형상을 특징으로 하는데 주변부, 외부 지역들이 종속, 통합되어 구성되는 “중심”이 존재하며 정치적 지배도 불평등도 폐지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와 빈곤, 권력과 무권력의 양극화가 전례 없이 수위에 도달하고 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문제는 더 이상 유일한 중심도, “중심적 지역”도 없이 오히려 하나의 네트워크가 있을 뿐이며 신식민지적 팽창과 중심 사회들의 조직 내로의 주변의 현상들과 집단들의 역침투의 불안정한 균형이 있을 뿐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 그는 소수자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소수자라는 개념은 법적 준거(미성년자)와 사회정치적 준거(약소자)를 동시에 포함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문제는 현실적 보편성이 소수자에 대해 상당히 양가적인 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이다. 즉 현실적 보편성은 소수자들이 전통적으로 지역에 들어와 살던 자들과 전 세계로부터 새롭게 도착한 자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소수자”의 지위를 일반화시키지만 동시에 이 때문에 바로 소수자와 다수자 간의 구별 자체가 모호해지는 경향을 지닌다는 점이다. 따라서 점점 더 많은 수의 개인들과 집단들이 일의적인 종족적, 문화적, 언어적, 심지어 종교적 동일성들로 쉽게 분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소수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소수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가 점점 더 곤란해진다고 한다. 더 나아가 특정한 “다수자들”이 역으로 “소수자들”로 나타날 위험이 있다는 점이 강조되며 이들의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동일성의 특징들은 절대적 특권을 갖지 않는다고도 주장된다.
이제 발리바르는 한계가 있다고 할지라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소수자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반면, 안정적이거나 이론의 여지없는 다수자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나는 현실적 보편성을 특징짓는 가장 폭발적인 모순에 이를 직접 연결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내적 배제의 독특한 체계의 틀 속에서 종족적 차이들과 사회적 불평등이 결합되는 것에 관해 논하고 싶다고 말이다. 발리바르는 이제 내적 배제가 외적 배제를 대체하고 있다고 본다. 즉, 세계는 신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할 수 없는 “하류계급”이 세계적 규모로 구성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반면, 또 다른 극단에서는 관민족적인 특권 계급이 공통 언어와 이해의 형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인종주의의 새로운 형태는 외적 배제가 아니라 내적 배제에 준거한 것으로 파악한다. 결국 현실적 보편성은 모든 개인이 적어도 잠재적으로 다른 모든 개인들과 교통하게 되는 상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세계적 통신망들이 각 개인에게 다른 모든 개인들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와 고정관념을 제공해주는 상황, 다른 모든 개인들을 자기와 “유사한” 개인들과 “다른” 개인들, 심지어 “다른 종에 속하는” 개인들의 이분법으로 투영시키는 상황이며 이제 점점 덜 분리되어 있는 동일성들이 또한 점점 더 화해불가능하게 되며, 덜 일의적인 동시에 더 적대적이 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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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감벤은 <<목적없는 수단>>의 <이 망명지에서, 이탈리아 일기 1992~4년>에서 이탈리아 사회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는데 이 대목에서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사회를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많은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탈리아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직시하는 글이라 단순한 대입은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아감벤은 패배와 불명예를 구별할 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며 1994년 이탈리아 국회의원 선거의 좌파 패배를 언급한다. 이탈리아 좌파의 패배는 아감벤이 보기에 대립적인 우파와의 입장 싸움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그저 스펙터클, 시장, 기업의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좌파나 우파 중 "누가 실천할지를 결정해준 것"이었기 때문에 불명예라고 강조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이탈리아 국회의원 선거는 좌파나 우파나 모두 스펙터클한 자본, 국가,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실천하고자 하는 입장에 서 치뤄진 선거였고 여기서 좌파가 패배했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아감벤은 지성의 완전한 부패를 주장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진보주의를 기만적이고 보수주의적인 형태에 도달한 것으로 파악한다. 장-클로드 밀네르의 글을 인용하면서 더욱 그 이유를 명시하는데, 밀레르는 '진보주의'를 다음과 같은 타협과정으로 본다는 것이다.  

"혁명은 자본, 권력과 타협해야 하곤 했다. 마치 교회가 근대 세계와 협정을 맺어야 했듯이 말이다.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진보주의의 전략을 이끌던 좌우명이 그런 식으로 조금씩 형태를 갖춰갔다. 모든 것에 양보해야 한다. 반대파와 모든 것을 화해해야 한다. 지성은 텔레비전, 광고와 화해하고, 노동계급은 자본과 화해하며, 언론의 자유는 스펙터클한 국가와 화해하고, 환경은 산업발전과 화해하며, 과학은 의견과 화해하고, 민주주의는 투표기계와 화해하며, 죄의식, 개종은 기억, 충실성과 화해해야 한다."(148쪽)

이상과 같은 타협적인 전략이 좌파를 모든 영역에서 화해의 도구와 합의를 마련하는 데 적극적으로 협력하도록 만들었고 결국 선거에서의 패배와 더불어 우파가 별 어려움 없이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도구와 합의를 그저 사용하면 되도록 했다는 점에서 패배가 아니라 불명예라고 아감벤은 주장한다.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것이지만 우리 사회와 겹쳐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한국의 좌파는 밀네르를 인용한 아감벤의 주장처럼 '진보주의'는 아닌가? 한국의 좌파는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아니 무엇을 할 것인가? 스펙터클, 자본, 권력과의 타협 아니면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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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풀어쓴 글을 참조하여 <<목적없는 수단>> 제2부를 '미학-정치적 실험'으로 붙여본다. 제2부는 아감벤의 사유 중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같은 범부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일단 아감벤은 정치철학자로 소개되고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호모사케르로 표상화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는 그의 정치철학과도 연관되지만 또 다른 측면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해서 의미있을 것 같다. 물론 오독에 의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를 스펙터클의 사회로 보고 그 소통가능성을 몸짓, 언어, 얼굴을 통해 찾는다.

제2부
5. 몸짓에 관한 노트  


아감벤은 19세기 말경 부르주아 사회가 자신의 몸짓을 잃어버렸다고 선언하며 이 장을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짓을 잃어버린 시대는 바로 그 때문에 다시 그 몸짓에 집착하며 잃어버린 것을 영화를 통해 되찾고자 하며, 동시에 영화에 그 상실을 기록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영화는 이미지가 아니라 몸짓이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이율배반적인 극성에 의해 움직이는데 한편으로 몸짓의 사물화이자 말소이며, 다른 한편으로 본디 그대로의 잠재력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이미지에 작동하는 마법인 일종의 ‘구속’ 또는 사물을 마비시키는 힘을 풀어야 하며 이미지를 몸짓 쪽으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이미지를 몸짓으로 되돌아하게 하는 장치임을 강조한다. 더불어 영화의 중심은 몸짓에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윤리와 정치 분야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바로의 지적을 받아 들여 몸짓을 행동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행위와 제작과 구별한다. 즉, 몸짓의 특징은 “그것이 생산되거나 행위되는 것이 아니라, 맡고 짊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에토스(윤리와 정치)의 영역을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 열어젖힌다고 한다. 더 나아가 만일 제작이 목적의 관점에서 수단이고 행위가 수단 없는 목적이라면, 몸짓은 도덕을 마비시키는 목적과 수단 사이의 거짓된 양자택일을 깨드리고 그런 이유로 목적이 되지 않고서도 그 자체로 매개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수단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몸짓은 “매개성을 전시하며, 수단을 그 자체로 보이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몸짓에서 인간들끼리 서로 소통하는 곳은 그 자체로 목적인 목적의 영역이 아니라 목적 없는 순수한 매개성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는 행동(몸짓)을 소통수단으로 이해한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초월성도 없이 말 고유의 매개성 속에서 그 자체의 수단으로-존재함 속에서 그 말을 전시한다는 뜻이며 이런 의미에서 몸짓은 소통가능성의 소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몸짓은 말해야 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순수 매개성으로써의 “인간의 언어활동-안에-있음”이며 항상 언어활동 속에서 파악되지 않는 몸짓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몸짓은 말과 입을 틀어막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억과 말이 안 나올 때 얼버무리려고 배우가 즉석해서 하는 연기인 ‘개그’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몸짓, 철학, 영화는 근접해 있다고 주장하며 그 근접성의 지점을 순수 몸짓성, 즉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며 문자 그대로의 개그, 치유할 수 없는 ‘언어장애’로서 전시하는 개그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정치를 순수 수단의 영역으로 인간의 절대적이고 전면적인 몸짓성의 영역임을 주장한다.

6. 언어와 인민
아감벤은 알리스 벡커-호의 한계는 있지만 독창적인 테제(모든 인민은 집시이며 모든 언어는 은어)를 통해 언어와 인민 사이의 균일한 관계를 문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서구의 모든 정치 문화는 인민과 언어 사이의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오늘날의 지배적 정치이론과 근대의 언어이론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낭만주의 이데올로기는 “불명료한 어떤 것(인민 개념)을 좀 더 불명료한 어떤 것(언어 개념)의 도움을 받아 명확히 하고자 노력”했고, 이를 거의 자연적인 유기체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정치이론은 다수성의 사실(인민, 공동체)을 설명 또는 증명하지도 못하고 전제해야 하듯이, 언어학도 말한다는 것을 전제해야만 하며, 이 두 가지 사실의 단순 대응이야말로 근대 정치담론의 토대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집시와 아르고의 관계가 이런 대응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집시와 인민의 관계는 아르고와 언어의 관계와 같다고 하며 “모든 인민은 패거리이자 ‘코키유’이며, 모든 언어는 은어이자 ‘아르고’”라고 정의한다. 이렇게 되면, 서구의 정치적 상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도착적이고 집요한 기계들은 갑작스레 그 권력을 상실할 것이며, 인민이라는 관념은 그 수호자이자 발현물인 근대 국가에 의해 무의미해져 그 관념은 국가 정체성의 공허한 받침대에 불과하게 되고 그 자체로서만 인정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이라는 개념과 그 어떤 국가적 위엄도 갖지 않은 언어들은 시민권 개념 안에서 재코드화될 때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언어, 인민, 국가는 사악하게 꼬여 있는데, 아감벤은 모든 인민은 집시이고, 모든 언어는 은어라는 테제가 이런 꼬임을 푼다고 한다. 그리고 이 테제는 서구 문화 내부에서 주기적으로 출현했지만 오해되고 지배적인 개념화로 되돌려졌을 뿐인 다양한 언어활동의 경험을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게 한다고 한다. 따라서 아감벤은 언어활동-문법(언어)-인민-국가라는 존재 사이의 연결망을 어떤 임의의 지점에서 끊을 때에만 사유와 실천은 시대에 대체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말한다는 사실[행동]과 다수성의 사실[공동체]이 한 순간 명확하게 되는 이런 중단의 형식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되고 변화하게 된다고 한다. 더불어 이 모든 경우에서 쟁점은 무엇보다 정치적이며 철학적이라고 강조한다.

7. 『스펙터클의 사회에 관한 논평』에 부치는 난외주석  


전략가
아감벤은 기 드보르의 책을 오늘날 지구 전체를 지배하게 된 스펙터클의 사회의 비참과 예속에 대한 가장 명석하고 엄격한 분석이라고 전제하고 저항 혹은 엑소더스를 위한 매뉴얼이나 도구로 사용해야하며 순수한 지성의 역량[잠재태]에서 행동하는 어떤 독특한 전략가의 저작, “지성의 능력 또는 자유의 작전을 위한 전략론”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판타스마고리아
아감벤은 1851년 제1회 만국박람회의 크리스탈 궁전이 맑스의 「상품의 물질적 성격과 그 비밀」에 강한 인상을 끼쳤다고 본다. 그리고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 즉 그 극단적 형태에 도달한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이 명백한 맑스의 흔적 위에 세우는 몸짓은 그만큼 더 주목할 만하다고 한다. 따라서 하이드파크의 크리스탈 궁전은 스펙터클에 대한 예언, 혹은 오히려 19세기가 20세기에 대해 꾸었던 악몽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이 상황주의자들이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첫 번째 임무라는 것이다.
발푸르기스의 밤
아감벤은 발푸르기스의 밤, 즉 최후의 심판을 둘러싸고 기 드보르와 드보르가 비교해도 좋다고 한 칼 크라우스를 대비한다. 칼 크라우스의 『세 번째 발푸르기스의 밤』(1952)에서 “히틀러에 대해서는 내 머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 이 잔혹한 기지가 묘사불가능한 것이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 직면했을 때 풍자가 보여주는 무능을 표시한다고 아감벤은 주장한다. 이에 반해 드보르의 담론은 풍자가 입을 다무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하며, 언어활동의 옛 집(그리고 문학 전통)은 이제 처음부터 끝까지 위조되고 변조된다고 한다. 즉, 크라우스는 언어를 최후의 심판의 장소로 만들면서 이 상황에 대처한다면 드보르는 최후의 심판이 이미 일어났고, 그 뒤 참이 거짓의 한 계기로서 인정됐을 때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어에서의 최후의 심판과 스펙터클의 발푸르기스의 밤은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상황
아감벤은 상황이란 “집단적으로 통합된 환경을 조직하고 주변의 사건들로 자유롭게 유희함으로써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구축된 삶의 순간”이라고 제시한다. 그리고 상황의 실제 본성은 우리가 상황을 예술의 종언과 자기파괴 이후에, 그리고 니힐리즘의 시험을 거치는 삶의 이행 이후에 역사적으로 위치시키는 한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상황 그 자체의 고유한 장소는 삶과 예술이 서로 차이나지 않는 지점이며, 삶과 예술 모두 동시에 결정적인 변신을 겪는 지점이며, 결국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감당할 수 있는 정치의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상황주의자들은 삶을 무능하게 만들기 위해 환경과 사건을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직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매우 구체적이지만 정반대의 기획을 제시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지점은 상황주의자들이 전복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일어나는 곳이며, 니체가 말한 자기 사유의 결정적 실험을 위치시키는 비참한 무대이며, 세계를 거의 손대지 않은 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메시아적 전위의 지점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그 지점, 즉 구축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은 어떤 잠재태의 현실화가 아니라 차후에 있을 역량의 해방이며, 여기서 몸짓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몸짓은 삶과 예술, 현실태와 잠재태, 일반과 특수, 텍스트와 상연이 마주치는 이 교차점을 가리키며, 몸짓 때문에 “공통된 사회적 실체의 결정체”는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한다.
아우슈비츠/티미쇼아라
아감벤은 오늘날 세계 정치가 기 드보르의 『논평』(1988)의 시나리오를 성급히 패러디한 연출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동구의 인민민주주의들의 집중된 스펙터클과 서구 민주주의들의 산재된 스펙터클이 통합된 스펙터클 속에서 하나의 실체로 통일된다는 것이 이 책의 중심 테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통합된 스펙터클을 위해 동구 유럽의 정부는 레닌주의 정당의 추락을 방치하였으며 서구 유럽의 정부는 다수결의 투표기계와 미디어의 언론통제라는 이름으로 권력의 평형, 사유와 소통의 실질적 자유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루마니아혁명을 상징하는 티미쇼아라는 극단 지점을 대표한다고 한다. 즉, 텔레비전과 비밀경찰의 통합된 스펙터클은 위조(가짜)를 진짜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제 진짜는 가짜의 필연적 운동 속에서 하나의 계기에 불과하며 이렇게 참과 거짓은 식별불가능하게 되었고 스펙터클은 스펙터클을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티미쇼아라는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시대의 아우슈비츠이며, 아우슈비츠 이후 더 이상 예전처럼 쓰고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티미쇼아라 이후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셰키나
아감벤은 카발라주의자들이 “셰키나의 고립”이라고 불렀던 것(앎과 삶의 분리)을 우리 시대의 조건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즉 구체제에서는 인간이 지닌 소통적 본질의 외화가 스스로를 공통의 토대 역할을 하는 전제조건으로 실체화했다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는 이 소통성 자체가 자율적 영역으로 분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소통가능성 자체가 소통을 막게 되었고, 인간들은 자신을 이어주는 것에 의해 분리되었으며, 저널리스트들과 언론 통치가들은 인간의 언어적 본성을 소외시키는 새로운 성직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극단의 지점에서 언어활동은 모든 것의 무를 계시하며 숨겨지며 분리된 채 머물다가 마지막에는 스스로를 운명 짓는 권력에 도달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우리의 시대는 처음부터 인간들이 각자의 고유한 언어적 본질을 경험할 수 있게 된 시대이며, 그렇기에 현대 정치는 지구 전체에 걸쳐 전통과 신앙, 이데올로기와 종교, 정체성과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비우는 파괴적인 언어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을 끝까지 완수한 사람들만이 전제조건도 국가도 없는 공동체, 즉 공통적인 것을 무화시키고 운명 짓는 권력이 평정되는 곳의 첫 번째 시민이 될 것이라고 한다.
톈안먼
아감벤은 세계 정치가 국가형태의 마지막 진화단계인 통합된 스펙터클-국가(혹은 스펙터클-민주주의 국가)로 황급히 달려간다고 본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의 스펙터클-민주주의 조직은 유례없는 최악의 참주정이 될 위험이 있으며, 그 최악의 참주정이 맡은 임무는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에서 인류가 생존하도록 관리하는 것이지만 그 성공은 확실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어쨌든 스펙터클-국가는 모든 국가처럼 사회적 유대가 아니라 와해에 바탕을 둔 국가로 남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스펙터클-국가는 그 내부에 그 어떤 사회적 정체성이나 실제적인 귀속조건으로도 더 이상 규정할 수 없는 진정한 임의의 독특성을 대량으로 발생시킨다고 한다. 따라서 도래할 정치는 더 이상 새로운 혹은 옛 사회 주체들에 의한 국가의 정복이나 통제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국가와 비-국가(인류) 사이의 투쟁이며, 임의의 독특성들과 국가조직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탈구/분리라고 예언한다. 여기서 정치는 국가에 맞서 단순히 사회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과는 아무것도 상관없다고 한다. 톈안문 사건에서 끌어낼 수 있는 교훈도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즉 톈안문에서 국가가 맞닥뜨려야 했던 것은 재현될 수도 없고 재현되려고 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공통된 삶으로 스스로를 현시하는 그 무엇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며 이것이 귀속의 전제나 조건 없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사실이 국가가 전혀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위협이라는 것이다. 또한 귀속 자체, 즉 자신이 고유하게 언어활동-안에-있음을 고유화하려는 독특성, 그 때문에 모든 정체성과 귀속조건을 굴절시키는 독특성이야말로 도래하는 정치의 주체적이지도 사회적으로 안정되지도 않은 새로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8. 얼굴  


아감벤에 의하면 인간만이 열림 속에 있고 겉모습 속에서 스스로를 현시하며 빛을 발한다고 한다. 이는 언어활동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겉모습(얼굴)은 인간에게 진리를 위한 투쟁의 장소가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얼굴은 공동체의 유일한 장소, 유일하게 가능한 도시로 얼굴의 드러냄은 언어 자체의 드러냄이고 이런 드러냄은 다만 열림이며, 그저 소통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노출은 정치의 장소라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재인하거나 자신의 겉모습 자체를 전유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미지를 사물과 분리해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열림을 하나의 세계로, 어떤 병영도 없는 정치투쟁의 장으로 변형시키며 진리를 대상으로 삼는 이 투쟁은 역사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현시해야 하는 겉모습은 인간에게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이 스스로를 재인할 수 없는 겉모양이 된다. 얼굴은 진리의 장소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직접적으로 가장의 장소이자 환원불가능한 비고유성의 장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조건은 가장 공하고도 비실체적인 것, 즉 진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감춰져 있는 것은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 자기 자신이 얼굴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 자체이다. 이 겉모습 자체를 겉모습으로 끌고 가는 것이 정치의 과제이다. 그렇기에 진리, 얼굴, 노출은 오늘날 지구적 내전의 대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국가권력은 무엇보다도 겉모습에 대한 통제에 기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무엇보다 순수한 소통가능성(즉, 언어활동)을 소통하기 때문에, 정치는 인간의 얼굴이 그 자체로 출현하는 소통적 텅 빔으로서 떠오르며, 정치가들과 미디어 통치가들은 이 텅 빈 공간을 확실하게 통제하고자 애쓴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얼굴이고 오로지 얼굴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모든 것은 고유한 것과 비고유한 것, 참과 거짓, 가능한 것과 현실적인 것으로 나뉜다고 한다. 그리고 얼굴은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안면이 함께-있음이며, 따라서 얼굴의 진리를 파악하는 것은 안면들의 동시성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감벤은 얼굴은 바깥이며, 모든 고유성, 고유한 것과 공통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차이나지 않는 하나의 지점이라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얼굴은 또한 모든 양태와 성질을 탈-고유화하고 탈-정체화하는 문턱이며. 그 문턱에서만 모든 양태와 성질은 순전히 소통가능해지며 얼굴을 찾는 곳에서만 바깥이 도래하고 외부성과 마주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이 되라고, 문턱으로 가라고, 고유성이나 능력의 주체로 머물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그것들과 함께, 그것들 속에서, 그것들을 넘어서 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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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 「맑스의 위기론과 노동 사회 벗어나기」,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 도서출판 이후, 2009.

  

 

 

 

 

 

 

홀거 하이데는 머리말에서 우선 맑스의 위기 개념을 상업공황에 따른 혁명의 전제 조건으로 정식화한 것을 언급하고 노동 개념을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창조하고 나아가 (신처럼) 자기 자신마저 창조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이어 현재 사회를 일종의 ‘사회적 상흔 후 증후군’의 노동 사회라고 규정하며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자본에 속박해 버렸는가?” “자본과 결별하는 일은 왜 어려운가?” “노동운동이 숱한 경험과 좌절을 겪은 뒤 이제 맑스의 위기(공황) 이론은 앞의 질문들을 답하는 데 과연 유용한가?”라는 질문을 통해 맑스의 위기(공황) 이론을 적대주의에 관한 이론으로 포착하여 자본에 결박되어 있는 인간과 인간의 노동, 그리고 노동사회로부터의 탈출을 정치경제 비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신분석적인 차원까지 끌어들여 논의를 전개한다. 덧붙여 노동사회로부터의 탈출을 이끌어낼 반란 그 자체, 즉 “파괴에 대항해 생명력을 뿜어내는 일”은 이론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제 하이데가 주장하는 맑스의 위기 이론의 적대주의 이론으로의 포착으로부터 자본에 의한 인간의 두려움과 그에 대한 자기 내면화 과정 및 사회화(집단적 상흔)를 살펴보고 결국 자본주의 내부의 개혁으로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그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맑스의 위기(공황) 이론에 대하여 

맑스의 위기 이론이 1850년에 언급한 “새로운 혁명은 오로지 새로운 위기가 와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말과 그 이후 맑스의 위기 인식은 상당히 달랐다. 이 때문에 그 뒤의 맑스주의자나 비맑스주의자들은 맑스의 불분명한 저작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다양한 이론들을 펼쳤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이론들은 근본적으로 적대주의라는 일반 이론의 다른 관점에 불과하며 이 적대주의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맑스는 이를 자본에 내재적인 적대 관계의 토대로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자본은 노동자로 하여금 필요노동을 넘어 잉여노동을 하도록 강제한다. 자본은 그렇게 해야만 증식할 수 있고 잉여가치를 만들 수 있다. (...)또한 자본이 스스로 그 고유한 한계를 정립하는 동시에 역시 그 한계를 넘어가려고 발버둥치는데,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모순이다.”(정치경제학요강)

문제는 맑스가 요강에서 다루는 이 “법칙”이 그의 사후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일단 이 법칙은 위기론과 결부되어 있고 이 위기론은 이윤율의 주기적 요동 운동과 관련 있는바 이에 대한 대처는 두 가지 동기에서 나온다. 첫째는 주기적 순환을 피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a자본주의를 안정화하기 위해/ b노동계급에 대한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이며 두 번째는 주기적 순환을 혁명을 위해 활용하는 방도를 찾기 위해서이다. 첫 번째는 경제 정책의 일반론으로 a는 케인스 이론이며 b는 사민주의 방책인 ‘케인스 이전의 케인스’ 정책이다. 두 번째는 처음에 언급한 맑스의 위기 이론으로 위기와 혁명과의 관계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맑스 사후 엥겔스를 비롯한 맑시주의자들이 “법칙”을 다루는 방식을 두 번째의 방식으로 순진하게 경제주의적이고 객관주의적으로 신비화해 버린 것은 아닌가? 더 큰 문제는 “법칙”을 이런 식으로 다룬다면 노동자의 주체성을 간과하는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여기서 하이데는 케인스 이론에서 위기가 바로 혁명으로 직결되지 않는 자본과 노동자의 관계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다. 케인스 이론(포디즘 포함)은 잘 알다시피 자본주의 축적 과정과 생산과정을 별 탈 없이 잘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방법은 산노동과 그에 대한 파괴(노동계급의 끊임없는 자본 외부로의 지향) 사이의 싸움인 적대 관계를 생산물 분배 싸움으로 전화시켜 내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자본이 노동계급을 적극적 행위자로 인정하되 자본의 품 안에서만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케인스에게 “위기나 계급투쟁 속에서 발전 동력을 만들어 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노동계급을 자본의 품 안에 품어 주기적 순환을 평탄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위기 자체를 세상에서 없애 버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특히 노동자의 주체성과 관련하여 1960년대 포드주의의 위기를 드러내는 다음의 슬로건은 자본 자체의 파괴를 상정하지 않으면 위기 자체를 세상에서 없앨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우리는 모든 것을 원한다!”, 그리고 “절대로 노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순진하게 포디즘의 위기 또는 케인스주의의 실험이 끝장났다고 단정내리지 말라!!! 이 지점에서 포디즘의 가능성을 다시 비판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자본은 “위기 없이”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내색하면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의 입장에서 문제는 내재한 기본 모순의 “외부화”에 놓여 있다. 즉 저항이 거센 곳에서 빠져나와 저항이 별로 없는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것은 경쟁 세계에서 자본이 결코 자립적이지 못하고 부단히 생명력을 흡입해야만 살아갈 수 있음을, 그래서 그 힘을 부단히 새 영역으로 확장해야 함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위기란 것이 본질적으로 자본의 적대 관계 속에 내재하는 이상 위기는 순환성을 회피함으로써 극복될 수 없다. 따라서 산노동은 자본의 시각에서 낯선 것, 위협적인 것이지만 불행히도 자본은 자기 증식을 위해 그러한 산노동을 전적으로 의존한다. 바로 이 때문에 항상 어떤 인격체가 이를 대변하는 자본은 노동에 의해 지양될까봐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본은 어떻게 해서 자신의 주체성을 얻게 될까?

 

자본과 두려움

정치경제학적 범주인 “자본”을 인간과 사회적 관계 및 인간의 사회화 과정의 학습과 연결하여 분석한다면 “가치”형태로 사물화된 것을 표상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모두 다 가치(죽은 사물) 지향성을 갖게 되면 모든 참여자에게는 개별 행위와는 독립적인, 가치의 지배 현상이 나타난다. 즉 죽은 사물인 가치가 생동하는 과정을 지배하게 된다. 맑스의 표현으로는 “죽은 노동이 산노동을 지배”하는 것이다. 맑스는 죽은 노동을 자본이라고 하였기에 자본은 어떤 죽은 것이며 일종의 허구이면서 실재다. 그런 자본이 살기 위해서는 아니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사회적 행위를 하는 인간의 산노동이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 스스로(사회 속에서나 개인 속에서) 적대 관계를 한몸에 품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인 동시에 다른 한편에는 그 자신에 의해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재생산되며 앞의 생명력을 흡입하고 파괴하는 자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대 관계의 핵심은 분열이다. 사회적으로는 계급 간 분열로 나타나며 개인들에게는 에고와 자아 사이의 분열로 나타나는데 결국 에고가 자아를 지배하는 자아 지배 현상이 나타난다. 결국 개인은 자기 자신의 본질적 부분마저 “희생”시키기도 하며, 물질적인 떡고물을 조금 받는 대신 스스로를 팔아넘기기도 한다. 바로 이 “자기 착취”로서의 자아 지배야말로 외적 지배 및 외적 착취의 토대다. 여기서 인간이 자각하지 못하는 두려움이란 것이 자본의 구조적 원칙으로 작동한다.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배우며 또한 두려움을 억압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두려움은 우리의 생동하는 삶을 방해하는 파괴력을 지녔다. 이 두려움의 결과는 바로 복종심, 경쟁심, 폭력성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그 역사적 뿌리는 무엇인가?

 

노동 사회에서 폭력의 역할

“문명화 과정”은 “적응”을 위한 지속적 과정이 아니라 부단한 폭력의 역사였다. 수백 년간의 폭력적인 “유혈 입법”과 교육적 처벌, 노동 학교나 실업학교, 교도소 노동, 그리고 정신병원 등에 의해 규율 잡힌 노동자 계급의 탄생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규율 잡힌 새로운 사회가 탄생했다. 이 새 사회는 총체적으로 노동에 토대하는데, 그것은 노동의 필연성 자체에 더 이상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사회다. 여기서 “노동할 권리”라는 슬로건이 나오며 그리하여 외적 강제가 마침내 자기 강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임노동 뿐만 아니라 이것은 사람들끼지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며 이루어지는 생동적이고 창의적 활동(고전적 의미나 맑스적 의미에서 “생산적 노동”과 거리가 먼 활동)이 일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노동”으로 변환되었다. 이제 이 피하기 어려운 집단적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자.

 

폭력의 결과로서 집단적 상흔

심대한 상처를 주는 공격 앞에서 심적으로 견디기 힘든 희생자가 이를 극복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막대한 힘 앞에 ‘공격자와 동일시’를 하며 스스로 굴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강자와의 동일시가 진행될수록 그 사람 내부의 자아는 분열된다. 외적 정체성이 내부화될수록 그 외적인 욕구가 마침내 원래의 자기 욕구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결국 자신의 욕구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만약 그러한 상처들이 특정 개인에서가아니라 전쟁 또는 다른 익명의 대량 학살과 같은 경험에서 온 것이라면 익명의 거대한 힘이 문제가 된다. 이제 “공격자와의 동일시”는 체제와의 동일시가 되며 그 체제의 패러다임이 사람의 내면으로 주입된다. 이런 과정은 다음 세대에게도 영향을 주는데, 사회화란 일종의 누적 과정으로 그것은 모든 경험들이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항상 새로운 폭력이 등장할 때마다 거의 항상 “적응”만 강조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개인적 상처의 결과, 중독

우리가 사는 현실적 삶의 고통을 솔직하게 느끼지 않으려 헛수고하는 과정이 곧잘 중독으로 나타난다. 중독이란 일종의 반응 행위로서, 뭔가 참을 수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에 대한 자기방어 행위다. 사람들은 중독 행위를 통해 자기 고유의 느낌, 생각, 행위를 조작하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 내면의 느낌과 정직하게 접촉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환상 속에서만 포근함을 만들어 내며 지속적으로 자기를 파괴한다. 또한 근본에 깔린 두려움이 솔직함을 억압하거나 지속적 고립을 조장하고 탈연대화로 이어진다. 저항이 일어난다 해도 이는 두려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분노가 앞설 때뿐이다. 분노를 키우는 방법은 피해 의식으로 무장하는 길이며 투쟁이나 파업, 저항 등을 새롭게 전개하려면 부단히 불의에 토대한 분노를 자극해야 하는데 이는 결국 중독 사회로서의 자본주의 논리 속에 머무는 것이다. 또한 이 자본주의 패러다임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내면의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인이 자기의 중독 행동을 자꾸 통제하려는 시도도 아무 소용이 없다. 바로 이 강박증과 통제주의 환상도 중독의 매개물이자 중독적 행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노동 사회 탈출

우리가 자본주의를 단지 생산의 무정부성, 무계획성, 주기적 위기 대처의 무능함 등을 들먹이며 비판하는 것은, 마치 자본주의를 색다른 조직 형태로만 바꾸면 될 것 같은 착각을 초래한다. 그리고 사회 현실의 중독적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징후만 치료하면 될 것이라고 하는 생각 또한 아무 근본 변화를 이룰 수 없으며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생동성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 심층부의 두려움을 깨고 생동하는 과정을 사회적으로,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야 한다. 분노를 통한 방법은 승리하더라도 근본적 중독 체제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실패하면 좌절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다시 적응하며 현실로 복귀한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그 체제 내부의 불의를 시정하려 하는 것은 한계에 봉착하며 적대 관계를 지양하려는 싸움이 결국 분배 정의를 위한 싸움으로 끝나고 만다. 즉 맑스의 표현대로 “기존 사회가 부여한 속에서 또 그 사회가 제공하는 수단으로만 성취 가능한, 즉 그러한 조건들과 수단의 재생산에 단단히 결박된 그런 사적 이해”를 발달시키며 이 체제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데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느낌과 생각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펼쳐 내야 한다. 우리가 겪는 그 어떤 두려움도 회피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인정하고, 동시에 분노나 일, 소비 따위의 중독물을 통해 자기를 기만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몇 가지 유의할 점

이상의 주장은 윤리적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예가 의미 있을 것이다.

*1868년 5월 프랑스에서의 구호 “절대로 노동하지 않을 것!”

*독일에서 정보 기술 영역의 고숙련 노동자 8백여 명이 상호 교류할 수 있는 내부 통신망을 구축하여 노동과 관련된 존재론적 이슈에 대해 토론하고 회사에 대응 행동을 조직한 것

*독일의 ‘2005 백수 연합’의 “행복한 백수들”이라는 구호

자본주의 전개 과정에서 박탈되고 파괴된 창의적이고도 신바람나는 잠재력을 부활시키려면, “대안의 실험”이란 것도 동시에 분석적 성찰(“이론”이 아님)과 더불어 진행되어야 한다.

 

맑스의 위기 이론, 그 후

맑스의 위기 이론은 없으며 맑스는 자본의 보편적 적대 관계를 규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맑스의 위기 이론은 부단히 반복되는 “자본주의는 결국 곧잘 돌아간다는 것”과 “자본주의는 어쨌든 우리 삶을 개선시키는 것”이라고 하는 신화화의 논리를 깨뜨릴 수 있게 돕는다. 그것은 “자본”이 우리 현실의 비참함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넘어, 우리 자신도 자본의 재생산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까지 책임성 있게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맑스의 분석은 자본주의가 죽음의 논리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며 온갖 개량주의 또한 죽음의 논리로부터 근본적 탈출을 방해하고 지연시킴을 드러냈다. 그러나 저항의 행위 그 자체, 해방의 과정 등은 결코 이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론이란 물화된 것을 폭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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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거 하이데는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자본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문제를 지적한다. 특히 근대와 자본이 폭력을 통해 내면화한 인간의 신체 저 깊숙한 곳에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두려움은 언제나 '중독'을 통해 표상화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내면화한 '두려움'과 대면함으로써 중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노동의 중단'이라고 하는 죽은 노동(자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행위를 그쳐야만 산노동을 끊임없이 포식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본의 시대는 끝장난다고 강조한다. 더불어 자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노동의 '중단'과 같은 방법 이외 어떤 방법도 결국은 자본의 신화화에 기여하는 점임을 천명하고 있다. 

자본의 내면화에 대해서는 새로운 얘기는 아니지만 그 논리 전개에서 생각해 볼 지점이 분명히 있다. 특히 사회학자(?)이기 때문인지 자본의 내면화가 개인의 일이지만 사회화를 통해 집단화되고 이것이 다음 세대에 전승된다고 하는 점은 분명히 의미있는 지점일 것이다. 집단적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라카프라가 <<치유의 역사학으로>>에서 911사건이 미국인들에게 어떤 집단적 트라우마를 형성시켰는지를 설명하면서 언급하였는데 역시 의미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현재까지의 저항은 두려움을 극복한 상태에서 전개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현재의 저항은 두려움의 또 다른 중독 현상인 분노와 분노의 조장을 통해 전개되는 것이며 이러한 저항은 여전히 자본의 생명력을 연장시킨다고 하는 지점도 새겨볼만하다. 분노는 불의로부터 나오는데 불의는 해결된다고 해도 그저 개혁에 그치는 것으로 근본적인 변화(자본으로부터의 탈출)가 아니다. 그 때문에 저항이 승리하더라도 자본의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연장시킨다. 물론 저항이 실패하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우울증과 고통에 빠질 것이고 더욱 더 자본에 적응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의 논의 중에서도 결론부분은 힘이 빠지는 면이 없지 않다. 자본으로부터의 탈출을 노동의 중단으로 설정하고 있는 지점이 그러한데, 단순히 노동의 중단이라는 선언에만 그친다면 중단 이후의 삶에 대한 부분에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도 없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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