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 「맑스의 위기론과 노동 사회 벗어나기」,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 도서출판 이후, 2009.

  

 

 

 

 

 

 

홀거 하이데는 머리말에서 우선 맑스의 위기 개념을 상업공황에 따른 혁명의 전제 조건으로 정식화한 것을 언급하고 노동 개념을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창조하고 나아가 (신처럼) 자기 자신마저 창조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이어 현재 사회를 일종의 ‘사회적 상흔 후 증후군’의 노동 사회라고 규정하며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자본에 속박해 버렸는가?” “자본과 결별하는 일은 왜 어려운가?” “노동운동이 숱한 경험과 좌절을 겪은 뒤 이제 맑스의 위기(공황) 이론은 앞의 질문들을 답하는 데 과연 유용한가?”라는 질문을 통해 맑스의 위기(공황) 이론을 적대주의에 관한 이론으로 포착하여 자본에 결박되어 있는 인간과 인간의 노동, 그리고 노동사회로부터의 탈출을 정치경제 비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신분석적인 차원까지 끌어들여 논의를 전개한다. 덧붙여 노동사회로부터의 탈출을 이끌어낼 반란 그 자체, 즉 “파괴에 대항해 생명력을 뿜어내는 일”은 이론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제 하이데가 주장하는 맑스의 위기 이론의 적대주의 이론으로의 포착으로부터 자본에 의한 인간의 두려움과 그에 대한 자기 내면화 과정 및 사회화(집단적 상흔)를 살펴보고 결국 자본주의 내부의 개혁으로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그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맑스의 위기(공황) 이론에 대하여 

맑스의 위기 이론이 1850년에 언급한 “새로운 혁명은 오로지 새로운 위기가 와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말과 그 이후 맑스의 위기 인식은 상당히 달랐다. 이 때문에 그 뒤의 맑스주의자나 비맑스주의자들은 맑스의 불분명한 저작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다양한 이론들을 펼쳤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이론들은 근본적으로 적대주의라는 일반 이론의 다른 관점에 불과하며 이 적대주의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맑스는 이를 자본에 내재적인 적대 관계의 토대로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자본은 노동자로 하여금 필요노동을 넘어 잉여노동을 하도록 강제한다. 자본은 그렇게 해야만 증식할 수 있고 잉여가치를 만들 수 있다. (...)또한 자본이 스스로 그 고유한 한계를 정립하는 동시에 역시 그 한계를 넘어가려고 발버둥치는데,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모순이다.”(정치경제학요강)

문제는 맑스가 요강에서 다루는 이 “법칙”이 그의 사후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일단 이 법칙은 위기론과 결부되어 있고 이 위기론은 이윤율의 주기적 요동 운동과 관련 있는바 이에 대한 대처는 두 가지 동기에서 나온다. 첫째는 주기적 순환을 피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a자본주의를 안정화하기 위해/ b노동계급에 대한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이며 두 번째는 주기적 순환을 혁명을 위해 활용하는 방도를 찾기 위해서이다. 첫 번째는 경제 정책의 일반론으로 a는 케인스 이론이며 b는 사민주의 방책인 ‘케인스 이전의 케인스’ 정책이다. 두 번째는 처음에 언급한 맑스의 위기 이론으로 위기와 혁명과의 관계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맑스 사후 엥겔스를 비롯한 맑시주의자들이 “법칙”을 다루는 방식을 두 번째의 방식으로 순진하게 경제주의적이고 객관주의적으로 신비화해 버린 것은 아닌가? 더 큰 문제는 “법칙”을 이런 식으로 다룬다면 노동자의 주체성을 간과하는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여기서 하이데는 케인스 이론에서 위기가 바로 혁명으로 직결되지 않는 자본과 노동자의 관계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다. 케인스 이론(포디즘 포함)은 잘 알다시피 자본주의 축적 과정과 생산과정을 별 탈 없이 잘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방법은 산노동과 그에 대한 파괴(노동계급의 끊임없는 자본 외부로의 지향) 사이의 싸움인 적대 관계를 생산물 분배 싸움으로 전화시켜 내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자본이 노동계급을 적극적 행위자로 인정하되 자본의 품 안에서만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케인스에게 “위기나 계급투쟁 속에서 발전 동력을 만들어 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노동계급을 자본의 품 안에 품어 주기적 순환을 평탄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위기 자체를 세상에서 없애 버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특히 노동자의 주체성과 관련하여 1960년대 포드주의의 위기를 드러내는 다음의 슬로건은 자본 자체의 파괴를 상정하지 않으면 위기 자체를 세상에서 없앨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우리는 모든 것을 원한다!”, 그리고 “절대로 노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순진하게 포디즘의 위기 또는 케인스주의의 실험이 끝장났다고 단정내리지 말라!!! 이 지점에서 포디즘의 가능성을 다시 비판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자본은 “위기 없이”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내색하면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의 입장에서 문제는 내재한 기본 모순의 “외부화”에 놓여 있다. 즉 저항이 거센 곳에서 빠져나와 저항이 별로 없는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것은 경쟁 세계에서 자본이 결코 자립적이지 못하고 부단히 생명력을 흡입해야만 살아갈 수 있음을, 그래서 그 힘을 부단히 새 영역으로 확장해야 함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위기란 것이 본질적으로 자본의 적대 관계 속에 내재하는 이상 위기는 순환성을 회피함으로써 극복될 수 없다. 따라서 산노동은 자본의 시각에서 낯선 것, 위협적인 것이지만 불행히도 자본은 자기 증식을 위해 그러한 산노동을 전적으로 의존한다. 바로 이 때문에 항상 어떤 인격체가 이를 대변하는 자본은 노동에 의해 지양될까봐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본은 어떻게 해서 자신의 주체성을 얻게 될까?

 

자본과 두려움

정치경제학적 범주인 “자본”을 인간과 사회적 관계 및 인간의 사회화 과정의 학습과 연결하여 분석한다면 “가치”형태로 사물화된 것을 표상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모두 다 가치(죽은 사물) 지향성을 갖게 되면 모든 참여자에게는 개별 행위와는 독립적인, 가치의 지배 현상이 나타난다. 즉 죽은 사물인 가치가 생동하는 과정을 지배하게 된다. 맑스의 표현으로는 “죽은 노동이 산노동을 지배”하는 것이다. 맑스는 죽은 노동을 자본이라고 하였기에 자본은 어떤 죽은 것이며 일종의 허구이면서 실재다. 그런 자본이 살기 위해서는 아니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사회적 행위를 하는 인간의 산노동이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 스스로(사회 속에서나 개인 속에서) 적대 관계를 한몸에 품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인 동시에 다른 한편에는 그 자신에 의해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재생산되며 앞의 생명력을 흡입하고 파괴하는 자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대 관계의 핵심은 분열이다. 사회적으로는 계급 간 분열로 나타나며 개인들에게는 에고와 자아 사이의 분열로 나타나는데 결국 에고가 자아를 지배하는 자아 지배 현상이 나타난다. 결국 개인은 자기 자신의 본질적 부분마저 “희생”시키기도 하며, 물질적인 떡고물을 조금 받는 대신 스스로를 팔아넘기기도 한다. 바로 이 “자기 착취”로서의 자아 지배야말로 외적 지배 및 외적 착취의 토대다. 여기서 인간이 자각하지 못하는 두려움이란 것이 자본의 구조적 원칙으로 작동한다.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배우며 또한 두려움을 억압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두려움은 우리의 생동하는 삶을 방해하는 파괴력을 지녔다. 이 두려움의 결과는 바로 복종심, 경쟁심, 폭력성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그 역사적 뿌리는 무엇인가?

 

노동 사회에서 폭력의 역할

“문명화 과정”은 “적응”을 위한 지속적 과정이 아니라 부단한 폭력의 역사였다. 수백 년간의 폭력적인 “유혈 입법”과 교육적 처벌, 노동 학교나 실업학교, 교도소 노동, 그리고 정신병원 등에 의해 규율 잡힌 노동자 계급의 탄생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규율 잡힌 새로운 사회가 탄생했다. 이 새 사회는 총체적으로 노동에 토대하는데, 그것은 노동의 필연성 자체에 더 이상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사회다. 여기서 “노동할 권리”라는 슬로건이 나오며 그리하여 외적 강제가 마침내 자기 강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임노동 뿐만 아니라 이것은 사람들끼지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며 이루어지는 생동적이고 창의적 활동(고전적 의미나 맑스적 의미에서 “생산적 노동”과 거리가 먼 활동)이 일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노동”으로 변환되었다. 이제 이 피하기 어려운 집단적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자.

 

폭력의 결과로서 집단적 상흔

심대한 상처를 주는 공격 앞에서 심적으로 견디기 힘든 희생자가 이를 극복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막대한 힘 앞에 ‘공격자와 동일시’를 하며 스스로 굴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강자와의 동일시가 진행될수록 그 사람 내부의 자아는 분열된다. 외적 정체성이 내부화될수록 그 외적인 욕구가 마침내 원래의 자기 욕구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결국 자신의 욕구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만약 그러한 상처들이 특정 개인에서가아니라 전쟁 또는 다른 익명의 대량 학살과 같은 경험에서 온 것이라면 익명의 거대한 힘이 문제가 된다. 이제 “공격자와의 동일시”는 체제와의 동일시가 되며 그 체제의 패러다임이 사람의 내면으로 주입된다. 이런 과정은 다음 세대에게도 영향을 주는데, 사회화란 일종의 누적 과정으로 그것은 모든 경험들이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항상 새로운 폭력이 등장할 때마다 거의 항상 “적응”만 강조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개인적 상처의 결과, 중독

우리가 사는 현실적 삶의 고통을 솔직하게 느끼지 않으려 헛수고하는 과정이 곧잘 중독으로 나타난다. 중독이란 일종의 반응 행위로서, 뭔가 참을 수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에 대한 자기방어 행위다. 사람들은 중독 행위를 통해 자기 고유의 느낌, 생각, 행위를 조작하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 내면의 느낌과 정직하게 접촉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환상 속에서만 포근함을 만들어 내며 지속적으로 자기를 파괴한다. 또한 근본에 깔린 두려움이 솔직함을 억압하거나 지속적 고립을 조장하고 탈연대화로 이어진다. 저항이 일어난다 해도 이는 두려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분노가 앞설 때뿐이다. 분노를 키우는 방법은 피해 의식으로 무장하는 길이며 투쟁이나 파업, 저항 등을 새롭게 전개하려면 부단히 불의에 토대한 분노를 자극해야 하는데 이는 결국 중독 사회로서의 자본주의 논리 속에 머무는 것이다. 또한 이 자본주의 패러다임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내면의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인이 자기의 중독 행동을 자꾸 통제하려는 시도도 아무 소용이 없다. 바로 이 강박증과 통제주의 환상도 중독의 매개물이자 중독적 행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노동 사회 탈출

우리가 자본주의를 단지 생산의 무정부성, 무계획성, 주기적 위기 대처의 무능함 등을 들먹이며 비판하는 것은, 마치 자본주의를 색다른 조직 형태로만 바꾸면 될 것 같은 착각을 초래한다. 그리고 사회 현실의 중독적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징후만 치료하면 될 것이라고 하는 생각 또한 아무 근본 변화를 이룰 수 없으며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생동성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 심층부의 두려움을 깨고 생동하는 과정을 사회적으로,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야 한다. 분노를 통한 방법은 승리하더라도 근본적 중독 체제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실패하면 좌절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다시 적응하며 현실로 복귀한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그 체제 내부의 불의를 시정하려 하는 것은 한계에 봉착하며 적대 관계를 지양하려는 싸움이 결국 분배 정의를 위한 싸움으로 끝나고 만다. 즉 맑스의 표현대로 “기존 사회가 부여한 속에서 또 그 사회가 제공하는 수단으로만 성취 가능한, 즉 그러한 조건들과 수단의 재생산에 단단히 결박된 그런 사적 이해”를 발달시키며 이 체제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데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느낌과 생각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펼쳐 내야 한다. 우리가 겪는 그 어떤 두려움도 회피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인정하고, 동시에 분노나 일, 소비 따위의 중독물을 통해 자기를 기만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몇 가지 유의할 점

이상의 주장은 윤리적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예가 의미 있을 것이다.

*1868년 5월 프랑스에서의 구호 “절대로 노동하지 않을 것!”

*독일에서 정보 기술 영역의 고숙련 노동자 8백여 명이 상호 교류할 수 있는 내부 통신망을 구축하여 노동과 관련된 존재론적 이슈에 대해 토론하고 회사에 대응 행동을 조직한 것

*독일의 ‘2005 백수 연합’의 “행복한 백수들”이라는 구호

자본주의 전개 과정에서 박탈되고 파괴된 창의적이고도 신바람나는 잠재력을 부활시키려면, “대안의 실험”이란 것도 동시에 분석적 성찰(“이론”이 아님)과 더불어 진행되어야 한다.

 

맑스의 위기 이론, 그 후

맑스의 위기 이론은 없으며 맑스는 자본의 보편적 적대 관계를 규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맑스의 위기 이론은 부단히 반복되는 “자본주의는 결국 곧잘 돌아간다는 것”과 “자본주의는 어쨌든 우리 삶을 개선시키는 것”이라고 하는 신화화의 논리를 깨뜨릴 수 있게 돕는다. 그것은 “자본”이 우리 현실의 비참함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넘어, 우리 자신도 자본의 재생산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까지 책임성 있게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맑스의 분석은 자본주의가 죽음의 논리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며 온갖 개량주의 또한 죽음의 논리로부터 근본적 탈출을 방해하고 지연시킴을 드러냈다. 그러나 저항의 행위 그 자체, 해방의 과정 등은 결코 이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론이란 물화된 것을 폭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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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거 하이데는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자본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문제를 지적한다. 특히 근대와 자본이 폭력을 통해 내면화한 인간의 신체 저 깊숙한 곳에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두려움은 언제나 '중독'을 통해 표상화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내면화한 '두려움'과 대면함으로써 중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노동의 중단'이라고 하는 죽은 노동(자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행위를 그쳐야만 산노동을 끊임없이 포식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본의 시대는 끝장난다고 강조한다. 더불어 자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노동의 '중단'과 같은 방법 이외 어떤 방법도 결국은 자본의 신화화에 기여하는 점임을 천명하고 있다. 

자본의 내면화에 대해서는 새로운 얘기는 아니지만 그 논리 전개에서 생각해 볼 지점이 분명히 있다. 특히 사회학자(?)이기 때문인지 자본의 내면화가 개인의 일이지만 사회화를 통해 집단화되고 이것이 다음 세대에 전승된다고 하는 점은 분명히 의미있는 지점일 것이다. 집단적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라카프라가 <<치유의 역사학으로>>에서 911사건이 미국인들에게 어떤 집단적 트라우마를 형성시켰는지를 설명하면서 언급하였는데 역시 의미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현재까지의 저항은 두려움을 극복한 상태에서 전개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현재의 저항은 두려움의 또 다른 중독 현상인 분노와 분노의 조장을 통해 전개되는 것이며 이러한 저항은 여전히 자본의 생명력을 연장시킨다고 하는 지점도 새겨볼만하다. 분노는 불의로부터 나오는데 불의는 해결된다고 해도 그저 개혁에 그치는 것으로 근본적인 변화(자본으로부터의 탈출)가 아니다. 그 때문에 저항이 승리하더라도 자본의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연장시킨다. 물론 저항이 실패하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우울증과 고통에 빠질 것이고 더욱 더 자본에 적응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의 논의 중에서도 결론부분은 힘이 빠지는 면이 없지 않다. 자본으로부터의 탈출을 노동의 중단으로 설정하고 있는 지점이 그러한데, 단순히 노동의 중단이라는 선언에만 그친다면 중단 이후의 삶에 대한 부분에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도 없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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