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안전, 영토, 인구』(난장, 2012)

 

5강, 통치의 기원 사목권력

통치한다는 것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면 이 개념이 포괄하는 유형의 권력이 어떤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통치성을 왜 연구해야하는가? 이는 곧 국가와 인구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다(168). 하지만 국가와 인구라는 개념도 모호한 영역인데 이를 연구하기 위해 왜 통치성이라는 또 다른 모호한 개념을 통해 접근해야하는가? 이는 규율을 언급할 때 제기 했던 세 가지 방식을 통해 외부로 나가려고 시도했던 것을 상기하면 될 것 같다. 먼저 제도로부터 권력관계를 끄집어내 테크놀로지의 각도에서 분석하고(정신병원의 예), 기능으로부터 권력관계를 끄집어내 전략적 분석 안에서 재검토하는 관점을 취하며(감옥의 예), 대상의 특권으로부터 권력관계를 끄집어내 지식의 영업·분야·대상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그 위치를 재설정했다(172). 외부로의 이동이라는 이 삼중의 운동이 규율과 관련해 진행됐다면, 좀 더 근본적으로 그 가능성을 국가와 연관시켜 탐구하면, 당연히 국가로 귀결된다. , 규율메커니즘은 그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감옥, 작업장, 군대 같은 장소로부터 추출될 수 있다. 그러니 규율메커니즘을 전반적이거나 국부적으로 적용하는 책임은 최종심급에서 결국 국가에 있는 것이다. 결국 제도외적, 비기능적, 비대상적인 일반성 때문에 우리는 국가의 전체화하는 제도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173). 그렇다면 정신의학에서의 격리기술, 형벌체계에서의 규율기술, 의학제도에서의 생명관리정치처럼 국가와 통치성의 관계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가 이 강의 논점이다(175).

이제 다시 통치 개념을 돌아가서 16세기 이후 완전히 정치적인 의미를 갖게 되기 전까지 통치하다라는 말은 자신이나 타인, 타인의 신체, 더 나아가 그 영혼이나 행동방식에 행사될 수 있는 지배를 지칭하기도 하고 교류, 개인들끼리의 순환과정이나 교환과정도 지칭한다. 이 모든 의미에는 국가와 영토, 그리고 정치구조가 통치된다는 의미는 없고 인간만이 통치의 대상이 된다(178). 그런데 인간이 통치된다는 관념은 그리스·로마적인 것(배로 은유되는 도시국가가 통치대상)은 아니다. 그런 관념의 기원은 그리스도교 이전과 이후의 동방에서 찾아봐야 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통치는 두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사목적 유형의 권력이라는 관념과 조직형태이며 다른 하나는 양심지도나 영혼지도라는 형태이다.

첫 번째 사목권력의 관념과 조직을 살펴보면, ··수장이 인간과 관련해 목자이고, 인간은 목자와 관련해 무리라는 것은 지중해의 동방 전역에서 매우 빈번히 발견되는 주제이다. 이집트, 아시리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당연히 히브리인들에게도 이 주제가 발견된다(180,181). 이런 관계는 종교적 관계이기에 본질적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이다. 이것이 그리스와 다른 특수한 것이다(183). 그럼 이 목자의 권력을 특징짓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목자의 권력은 영토에 행사되는 권력이 아니라 정의상 무리에 대해 행사되는 권력, 더 정확히 말하면 어떤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거나 운동하고 있는 무리에게 행사되는 권력이다(184). 둘째, 근본적으로 사목권력은 善行하는 권력이다. 선행을 자신의 기능, 목적, 정당화로 삼지 않는 권력은 없다. 그러나 사목권력은 전적으로 선행하는 즉, 선행을 위해 선행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목권력의 핵심목표는 무리의 구제이다. 구제를 위해 식량 등 부양의 의무와 책무에 열정, 헌신, 부단한 전념을 기울인다. 더불어 불침번을 서는 등 모두 타인을 위해 배려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목권력이 그 자체로는 언제나 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185~188). 셋째, 사목권력은 개인화하는 권력이다. 다시 말해 목자는 모든 가축 무리와 한 마리의 양을 동시에 보살핀다. , 전체와 각자를 동시에 주시하는데 전체적인 동시에 개별적이라고 하는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사목과 관련된 권력기술, 그리고 푸코가 언급한 인구테크놀로지에서 재정비되는 이른바 근대의 권력기술 모두가 맞닥뜨리게 될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가축 무리와의 관계에서 목자가 희생한다는 문제, 즉 가축 무리 전체를 위해 목자가 희생하고 각각의 양을 위해 가축 무리 전체가 희생한다는 문제 속에서 목동의 역설이 더욱 강렬해지는 두 번째 형태가 있다(모세의 예). 결국 전체를 위해 하나를 희생하고 하나를 위해 전체를 희생하기, 바로 이 역설이 사목의 그리스도교적 문제계에서 절대적으로 중심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상의 사목권력의 관념은 그리스-로마의 사유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어쨌든 매우 이질적인 사목권력 관념이 서구 세계에 도입된 것은 그리스도교 교회를 매개로 해서였다. 모든 문명 가운데서 서구 그리스도교 문명은 가장 창조적이고, 가장 정복욕이 강하며, 가장 오만하고, 가장 잔인한 문명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서구의 인간은 그리스인이라면 용납하지 않았을 것, 즉 자기 자신을 양떼 속의 한 마리 양으로 여기는 법을 수천 년 동안 배워왔고 자신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줄 목자의 구원을 갈구하도록 수천 년 동안이나 배워온 것이 푸코가 강조하고 싶은 역설이며 이런 가장 독특한 권력형태는 다시 말하면 양떼치기 문제로 간주된 정치에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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