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풀어쓴 글을 참조하여 <<목적없는 수단>> 제2부를 '미학-정치적 실험'으로 붙여본다. 제2부는 아감벤의 사유 중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같은 범부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일단 아감벤은 정치철학자로 소개되고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호모사케르로 표상화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는 그의 정치철학과도 연관되지만 또 다른 측면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해서 의미있을 것 같다. 물론 오독에 의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를 스펙터클의 사회로 보고 그 소통가능성을 몸짓, 언어, 얼굴을 통해 찾는다.

제2부
5. 몸짓에 관한 노트  


아감벤은 19세기 말경 부르주아 사회가 자신의 몸짓을 잃어버렸다고 선언하며 이 장을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짓을 잃어버린 시대는 바로 그 때문에 다시 그 몸짓에 집착하며 잃어버린 것을 영화를 통해 되찾고자 하며, 동시에 영화에 그 상실을 기록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영화는 이미지가 아니라 몸짓이다. 왜냐하면 이미지는 이율배반적인 극성에 의해 움직이는데 한편으로 몸짓의 사물화이자 말소이며, 다른 한편으로 본디 그대로의 잠재력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이미지에 작동하는 마법인 일종의 ‘구속’ 또는 사물을 마비시키는 힘을 풀어야 하며 이미지를 몸짓 쪽으로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이미지를 몸짓으로 되돌아하게 하는 장치임을 강조한다. 더불어 영화의 중심은 몸짓에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윤리와 정치 분야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바로의 지적을 받아 들여 몸짓을 행동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행위와 제작과 구별한다. 즉, 몸짓의 특징은 “그것이 생산되거나 행위되는 것이 아니라, 맡고 짊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에토스(윤리와 정치)의 영역을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 열어젖힌다고 한다. 더 나아가 만일 제작이 목적의 관점에서 수단이고 행위가 수단 없는 목적이라면, 몸짓은 도덕을 마비시키는 목적과 수단 사이의 거짓된 양자택일을 깨드리고 그런 이유로 목적이 되지 않고서도 그 자체로 매개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수단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몸짓은 “매개성을 전시하며, 수단을 그 자체로 보이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몸짓에서 인간들끼리 서로 소통하는 곳은 그 자체로 목적인 목적의 영역이 아니라 목적 없는 순수한 매개성의 영역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말’하는 행동(몸짓)을 소통수단으로 이해한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초월성도 없이 말 고유의 매개성 속에서 그 자체의 수단으로-존재함 속에서 그 말을 전시한다는 뜻이며 이런 의미에서 몸짓은 소통가능성의 소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몸짓은 말해야 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순수 매개성으로써의 “인간의 언어활동-안에-있음”이며 항상 언어활동 속에서 파악되지 않는 몸짓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몸짓은 말과 입을 틀어막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억과 말이 안 나올 때 얼버무리려고 배우가 즉석해서 하는 연기인 ‘개그’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몸짓, 철학, 영화는 근접해 있다고 주장하며 그 근접성의 지점을 순수 몸짓성, 즉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며 문자 그대로의 개그, 치유할 수 없는 ‘언어장애’로서 전시하는 개그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정치를 순수 수단의 영역으로 인간의 절대적이고 전면적인 몸짓성의 영역임을 주장한다.

6. 언어와 인민
아감벤은 알리스 벡커-호의 한계는 있지만 독창적인 테제(모든 인민은 집시이며 모든 언어는 은어)를 통해 언어와 인민 사이의 균일한 관계를 문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서구의 모든 정치 문화는 인민과 언어 사이의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오늘날의 지배적 정치이론과 근대의 언어이론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낭만주의 이데올로기는 “불명료한 어떤 것(인민 개념)을 좀 더 불명료한 어떤 것(언어 개념)의 도움을 받아 명확히 하고자 노력”했고, 이를 거의 자연적인 유기체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정치이론은 다수성의 사실(인민, 공동체)을 설명 또는 증명하지도 못하고 전제해야 하듯이, 언어학도 말한다는 것을 전제해야만 하며, 이 두 가지 사실의 단순 대응이야말로 근대 정치담론의 토대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집시와 아르고의 관계가 이런 대응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집시와 인민의 관계는 아르고와 언어의 관계와 같다고 하며 “모든 인민은 패거리이자 ‘코키유’이며, 모든 언어는 은어이자 ‘아르고’”라고 정의한다. 이렇게 되면, 서구의 정치적 상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도착적이고 집요한 기계들은 갑작스레 그 권력을 상실할 것이며, 인민이라는 관념은 그 수호자이자 발현물인 근대 국가에 의해 무의미해져 그 관념은 국가 정체성의 공허한 받침대에 불과하게 되고 그 자체로서만 인정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민이라는 개념과 그 어떤 국가적 위엄도 갖지 않은 언어들은 시민권 개념 안에서 재코드화될 때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언어, 인민, 국가는 사악하게 꼬여 있는데, 아감벤은 모든 인민은 집시이고, 모든 언어는 은어라는 테제가 이런 꼬임을 푼다고 한다. 그리고 이 테제는 서구 문화 내부에서 주기적으로 출현했지만 오해되고 지배적인 개념화로 되돌려졌을 뿐인 다양한 언어활동의 경험을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게 한다고 한다. 따라서 아감벤은 언어활동-문법(언어)-인민-국가라는 존재 사이의 연결망을 어떤 임의의 지점에서 끊을 때에만 사유와 실천은 시대에 대체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말한다는 사실[행동]과 다수성의 사실[공동체]이 한 순간 명확하게 되는 이런 중단의 형식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되고 변화하게 된다고 한다. 더불어 이 모든 경우에서 쟁점은 무엇보다 정치적이며 철학적이라고 강조한다.

7. 『스펙터클의 사회에 관한 논평』에 부치는 난외주석  


전략가
아감벤은 기 드보르의 책을 오늘날 지구 전체를 지배하게 된 스펙터클의 사회의 비참과 예속에 대한 가장 명석하고 엄격한 분석이라고 전제하고 저항 혹은 엑소더스를 위한 매뉴얼이나 도구로 사용해야하며 순수한 지성의 역량[잠재태]에서 행동하는 어떤 독특한 전략가의 저작, “지성의 능력 또는 자유의 작전을 위한 전략론”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판타스마고리아
아감벤은 1851년 제1회 만국박람회의 크리스탈 궁전이 맑스의 「상품의 물질적 성격과 그 비밀」에 강한 인상을 끼쳤다고 본다. 그리고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 즉 그 극단적 형태에 도달한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이 명백한 맑스의 흔적 위에 세우는 몸짓은 그만큼 더 주목할 만하다고 한다. 따라서 하이드파크의 크리스탈 궁전은 스펙터클에 대한 예언, 혹은 오히려 19세기가 20세기에 대해 꾸었던 악몽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이 상황주의자들이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첫 번째 임무라는 것이다.
발푸르기스의 밤
아감벤은 발푸르기스의 밤, 즉 최후의 심판을 둘러싸고 기 드보르와 드보르가 비교해도 좋다고 한 칼 크라우스를 대비한다. 칼 크라우스의 『세 번째 발푸르기스의 밤』(1952)에서 “히틀러에 대해서는 내 머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 이 잔혹한 기지가 묘사불가능한 것이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 직면했을 때 풍자가 보여주는 무능을 표시한다고 아감벤은 주장한다. 이에 반해 드보르의 담론은 풍자가 입을 다무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하며, 언어활동의 옛 집(그리고 문학 전통)은 이제 처음부터 끝까지 위조되고 변조된다고 한다. 즉, 크라우스는 언어를 최후의 심판의 장소로 만들면서 이 상황에 대처한다면 드보르는 최후의 심판이 이미 일어났고, 그 뒤 참이 거짓의 한 계기로서 인정됐을 때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언어에서의 최후의 심판과 스펙터클의 발푸르기스의 밤은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상황
아감벤은 상황이란 “집단적으로 통합된 환경을 조직하고 주변의 사건들로 자유롭게 유희함으로써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구축된 삶의 순간”이라고 제시한다. 그리고 상황의 실제 본성은 우리가 상황을 예술의 종언과 자기파괴 이후에, 그리고 니힐리즘의 시험을 거치는 삶의 이행 이후에 역사적으로 위치시키는 한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상황 그 자체의 고유한 장소는 삶과 예술이 서로 차이나지 않는 지점이며, 삶과 예술 모두 동시에 결정적인 변신을 겪는 지점이며, 결국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감당할 수 있는 정치의 지점이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상황주의자들은 삶을 무능하게 만들기 위해 환경과 사건을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직하는 자본주의에 맞서 매우 구체적이지만 정반대의 기획을 제시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지점은 상황주의자들이 전복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일어나는 곳이며, 니체가 말한 자기 사유의 결정적 실험을 위치시키는 비참한 무대이며, 세계를 거의 손대지 않은 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메시아적 전위의 지점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그 지점, 즉 구축된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은 어떤 잠재태의 현실화가 아니라 차후에 있을 역량의 해방이며, 여기서 몸짓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몸짓은 삶과 예술, 현실태와 잠재태, 일반과 특수, 텍스트와 상연이 마주치는 이 교차점을 가리키며, 몸짓 때문에 “공통된 사회적 실체의 결정체”는 상황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고 한다.
아우슈비츠/티미쇼아라
아감벤은 오늘날 세계 정치가 기 드보르의 『논평』(1988)의 시나리오를 성급히 패러디한 연출에 불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동구의 인민민주주의들의 집중된 스펙터클과 서구 민주주의들의 산재된 스펙터클이 통합된 스펙터클 속에서 하나의 실체로 통일된다는 것이 이 책의 중심 테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통합된 스펙터클을 위해 동구 유럽의 정부는 레닌주의 정당의 추락을 방치하였으며 서구 유럽의 정부는 다수결의 투표기계와 미디어의 언론통제라는 이름으로 권력의 평형, 사유와 소통의 실질적 자유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루마니아혁명을 상징하는 티미쇼아라는 극단 지점을 대표한다고 한다. 즉, 텔레비전과 비밀경찰의 통합된 스펙터클은 위조(가짜)를 진짜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제 진짜는 가짜의 필연적 운동 속에서 하나의 계기에 불과하며 이렇게 참과 거짓은 식별불가능하게 되었고 스펙터클은 스펙터클을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티미쇼아라는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시대의 아우슈비츠이며, 아우슈비츠 이후 더 이상 예전처럼 쓰고 사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티미쇼아라 이후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셰키나
아감벤은 카발라주의자들이 “셰키나의 고립”이라고 불렀던 것(앎과 삶의 분리)을 우리 시대의 조건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즉 구체제에서는 인간이 지닌 소통적 본질의 외화가 스스로를 공통의 토대 역할을 하는 전제조건으로 실체화했다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는 이 소통성 자체가 자율적 영역으로 분리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소통가능성 자체가 소통을 막게 되었고, 인간들은 자신을 이어주는 것에 의해 분리되었으며, 저널리스트들과 언론 통치가들은 인간의 언어적 본성을 소외시키는 새로운 성직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극단의 지점에서 언어활동은 모든 것의 무를 계시하며 숨겨지며 분리된 채 머물다가 마지막에는 스스로를 운명 짓는 권력에 도달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우리의 시대는 처음부터 인간들이 각자의 고유한 언어적 본질을 경험할 수 있게 된 시대이며, 그렇기에 현대 정치는 지구 전체에 걸쳐 전통과 신앙, 이데올로기와 종교, 정체성과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비우는 파괴적인 언어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을 끝까지 완수한 사람들만이 전제조건도 국가도 없는 공동체, 즉 공통적인 것을 무화시키고 운명 짓는 권력이 평정되는 곳의 첫 번째 시민이 될 것이라고 한다.
톈안먼
아감벤은 세계 정치가 국가형태의 마지막 진화단계인 통합된 스펙터클-국가(혹은 스펙터클-민주주의 국가)로 황급히 달려간다고 본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의 스펙터클-민주주의 조직은 유례없는 최악의 참주정이 될 위험이 있으며, 그 최악의 참주정이 맡은 임무는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에서 인류가 생존하도록 관리하는 것이지만 그 성공은 확실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어쨌든 스펙터클-국가는 모든 국가처럼 사회적 유대가 아니라 와해에 바탕을 둔 국가로 남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스펙터클-국가는 그 내부에 그 어떤 사회적 정체성이나 실제적인 귀속조건으로도 더 이상 규정할 수 없는 진정한 임의의 독특성을 대량으로 발생시킨다고 한다. 따라서 도래할 정치는 더 이상 새로운 혹은 옛 사회 주체들에 의한 국가의 정복이나 통제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국가와 비-국가(인류) 사이의 투쟁이며, 임의의 독특성들과 국가조직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탈구/분리라고 예언한다. 여기서 정치는 국가에 맞서 단순히 사회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과는 아무것도 상관없다고 한다. 톈안문 사건에서 끌어낼 수 있는 교훈도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즉 톈안문에서 국가가 맞닥뜨려야 했던 것은 재현될 수도 없고 재현되려고 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공통된 삶으로 스스로를 현시하는 그 무엇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며 이것이 귀속의 전제나 조건 없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사실이 국가가 전혀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위협이라는 것이다. 또한 귀속 자체, 즉 자신이 고유하게 언어활동-안에-있음을 고유화하려는 독특성, 그 때문에 모든 정체성과 귀속조건을 굴절시키는 독특성이야말로 도래하는 정치의 주체적이지도 사회적으로 안정되지도 않은 새로운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8. 얼굴  


아감벤에 의하면 인간만이 열림 속에 있고 겉모습 속에서 스스로를 현시하며 빛을 발한다고 한다. 이는 언어활동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겉모습(얼굴)은 인간에게 진리를 위한 투쟁의 장소가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얼굴은 공동체의 유일한 장소, 유일하게 가능한 도시로 얼굴의 드러냄은 언어 자체의 드러냄이고 이런 드러냄은 다만 열림이며, 그저 소통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노출은 정치의 장소라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재인하거나 자신의 겉모습 자체를 전유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미지를 사물과 분리해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열림을 하나의 세계로, 어떤 병영도 없는 정치투쟁의 장으로 변형시키며 진리를 대상으로 삼는 이 투쟁은 역사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현시해야 하는 겉모습은 인간에게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이 스스로를 재인할 수 없는 겉모양이 된다. 얼굴은 진리의 장소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직접적으로 가장의 장소이자 환원불가능한 비고유성의 장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조건은 가장 공하고도 비실체적인 것, 즉 진리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감춰져 있는 것은 나타난다는 사실 자체, 자기 자신이 얼굴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 자체이다. 이 겉모습 자체를 겉모습으로 끌고 가는 것이 정치의 과제이다. 그렇기에 진리, 얼굴, 노출은 오늘날 지구적 내전의 대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국가권력은 무엇보다도 겉모습에 대한 통제에 기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무엇보다 순수한 소통가능성(즉, 언어활동)을 소통하기 때문에, 정치는 인간의 얼굴이 그 자체로 출현하는 소통적 텅 빔으로서 떠오르며, 정치가들과 미디어 통치가들은 이 텅 빈 공간을 확실하게 통제하고자 애쓴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얼굴이고 오로지 얼굴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모든 것은 고유한 것과 비고유한 것, 참과 거짓, 가능한 것과 현실적인 것으로 나뉜다고 한다. 그리고 얼굴은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안면이 함께-있음이며, 따라서 얼굴의 진리를 파악하는 것은 안면들의 동시성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감벤은 얼굴은 바깥이며, 모든 고유성, 고유한 것과 공통적인 것,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차이나지 않는 하나의 지점이라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얼굴은 또한 모든 양태와 성질을 탈-고유화하고 탈-정체화하는 문턱이며. 그 문턱에서만 모든 양태와 성질은 순전히 소통가능해지며 얼굴을 찾는 곳에서만 바깥이 도래하고 외부성과 마주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이 되라고, 문턱으로 가라고, 고유성이나 능력의 주체로 머물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그것들과 함께, 그것들 속에서, 그것들을 넘어서 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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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 「맑스의 위기론과 노동 사회 벗어나기」, 『자본을 넘어, 노동을 넘어』, 도서출판 이후, 2009.

  

 

 

 

 

 

 

홀거 하이데는 머리말에서 우선 맑스의 위기 개념을 상업공황에 따른 혁명의 전제 조건으로 정식화한 것을 언급하고 노동 개념을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창조하고 나아가 (신처럼) 자기 자신마저 창조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이어 현재 사회를 일종의 ‘사회적 상흔 후 증후군’의 노동 사회라고 규정하며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자본에 속박해 버렸는가?” “자본과 결별하는 일은 왜 어려운가?” “노동운동이 숱한 경험과 좌절을 겪은 뒤 이제 맑스의 위기(공황) 이론은 앞의 질문들을 답하는 데 과연 유용한가?”라는 질문을 통해 맑스의 위기(공황) 이론을 적대주의에 관한 이론으로 포착하여 자본에 결박되어 있는 인간과 인간의 노동, 그리고 노동사회로부터의 탈출을 정치경제 비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신분석적인 차원까지 끌어들여 논의를 전개한다. 덧붙여 노동사회로부터의 탈출을 이끌어낼 반란 그 자체, 즉 “파괴에 대항해 생명력을 뿜어내는 일”은 이론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제 하이데가 주장하는 맑스의 위기 이론의 적대주의 이론으로의 포착으로부터 자본에 의한 인간의 두려움과 그에 대한 자기 내면화 과정 및 사회화(집단적 상흔)를 살펴보고 결국 자본주의 내부의 개혁으로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그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맑스의 위기(공황) 이론에 대하여 

맑스의 위기 이론이 1850년에 언급한 “새로운 혁명은 오로지 새로운 위기가 와야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말과 그 이후 맑스의 위기 인식은 상당히 달랐다. 이 때문에 그 뒤의 맑스주의자나 비맑스주의자들은 맑스의 불분명한 저작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다양한 이론들을 펼쳤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한 이론들은 근본적으로 적대주의라는 일반 이론의 다른 관점에 불과하며 이 적대주의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이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맑스는 이를 자본에 내재적인 적대 관계의 토대로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자본은 노동자로 하여금 필요노동을 넘어 잉여노동을 하도록 강제한다. 자본은 그렇게 해야만 증식할 수 있고 잉여가치를 만들 수 있다. (...)또한 자본이 스스로 그 고유한 한계를 정립하는 동시에 역시 그 한계를 넘어가려고 발버둥치는데,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모순이다.”(정치경제학요강)

문제는 맑스가 요강에서 다루는 이 “법칙”이 그의 사후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일단 이 법칙은 위기론과 결부되어 있고 이 위기론은 이윤율의 주기적 요동 운동과 관련 있는바 이에 대한 대처는 두 가지 동기에서 나온다. 첫째는 주기적 순환을 피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a자본주의를 안정화하기 위해/ b노동계급에 대한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이며 두 번째는 주기적 순환을 혁명을 위해 활용하는 방도를 찾기 위해서이다. 첫 번째는 경제 정책의 일반론으로 a는 케인스 이론이며 b는 사민주의 방책인 ‘케인스 이전의 케인스’ 정책이다. 두 번째는 처음에 언급한 맑스의 위기 이론으로 위기와 혁명과의 관계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맑스 사후 엥겔스를 비롯한 맑시주의자들이 “법칙”을 다루는 방식을 두 번째의 방식으로 순진하게 경제주의적이고 객관주의적으로 신비화해 버린 것은 아닌가? 더 큰 문제는 “법칙”을 이런 식으로 다룬다면 노동자의 주체성을 간과하는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여기서 하이데는 케인스 이론에서 위기가 바로 혁명으로 직결되지 않는 자본과 노동자의 관계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다. 케인스 이론(포디즘 포함)은 잘 알다시피 자본주의 축적 과정과 생산과정을 별 탈 없이 잘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방법은 산노동과 그에 대한 파괴(노동계급의 끊임없는 자본 외부로의 지향) 사이의 싸움인 적대 관계를 생산물 분배 싸움으로 전화시켜 내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자본이 노동계급을 적극적 행위자로 인정하되 자본의 품 안에서만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케인스에게 “위기나 계급투쟁 속에서 발전 동력을 만들어 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노동계급을 자본의 품 안에 품어 주기적 순환을 평탄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위기 자체를 세상에서 없애 버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특히 노동자의 주체성과 관련하여 1960년대 포드주의의 위기를 드러내는 다음의 슬로건은 자본 자체의 파괴를 상정하지 않으면 위기 자체를 세상에서 없앨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우리는 모든 것을 원한다!”, 그리고 “절대로 노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순진하게 포디즘의 위기 또는 케인스주의의 실험이 끝장났다고 단정내리지 말라!!! 이 지점에서 포디즘의 가능성을 다시 비판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자본은 “위기 없이”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내색하면 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의 입장에서 문제는 내재한 기본 모순의 “외부화”에 놓여 있다. 즉 저항이 거센 곳에서 빠져나와 저항이 별로 없는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것은 경쟁 세계에서 자본이 결코 자립적이지 못하고 부단히 생명력을 흡입해야만 살아갈 수 있음을, 그래서 그 힘을 부단히 새 영역으로 확장해야 함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위기란 것이 본질적으로 자본의 적대 관계 속에 내재하는 이상 위기는 순환성을 회피함으로써 극복될 수 없다. 따라서 산노동은 자본의 시각에서 낯선 것, 위협적인 것이지만 불행히도 자본은 자기 증식을 위해 그러한 산노동을 전적으로 의존한다. 바로 이 때문에 항상 어떤 인격체가 이를 대변하는 자본은 노동에 의해 지양될까봐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본은 어떻게 해서 자신의 주체성을 얻게 될까?

 

자본과 두려움

정치경제학적 범주인 “자본”을 인간과 사회적 관계 및 인간의 사회화 과정의 학습과 연결하여 분석한다면 “가치”형태로 사물화된 것을 표상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모두 다 가치(죽은 사물) 지향성을 갖게 되면 모든 참여자에게는 개별 행위와는 독립적인, 가치의 지배 현상이 나타난다. 즉 죽은 사물인 가치가 생동하는 과정을 지배하게 된다. 맑스의 표현으로는 “죽은 노동이 산노동을 지배”하는 것이다. 맑스는 죽은 노동을 자본이라고 하였기에 자본은 어떤 죽은 것이며 일종의 허구이면서 실재다. 그런 자본이 살기 위해서는 아니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사회적 행위를 하는 인간의 산노동이 필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 스스로(사회 속에서나 개인 속에서) 적대 관계를 한몸에 품고 있는 것이다. 한편에는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인 동시에 다른 한편에는 그 자신에 의해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재생산되며 앞의 생명력을 흡입하고 파괴하는 자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대 관계의 핵심은 분열이다. 사회적으로는 계급 간 분열로 나타나며 개인들에게는 에고와 자아 사이의 분열로 나타나는데 결국 에고가 자아를 지배하는 자아 지배 현상이 나타난다. 결국 개인은 자기 자신의 본질적 부분마저 “희생”시키기도 하며, 물질적인 떡고물을 조금 받는 대신 스스로를 팔아넘기기도 한다. 바로 이 “자기 착취”로서의 자아 지배야말로 외적 지배 및 외적 착취의 토대다. 여기서 인간이 자각하지 못하는 두려움이란 것이 자본의 구조적 원칙으로 작동한다.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배우며 또한 두려움을 억압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두려움은 우리의 생동하는 삶을 방해하는 파괴력을 지녔다. 이 두려움의 결과는 바로 복종심, 경쟁심, 폭력성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그 역사적 뿌리는 무엇인가?

 

노동 사회에서 폭력의 역할

“문명화 과정”은 “적응”을 위한 지속적 과정이 아니라 부단한 폭력의 역사였다. 수백 년간의 폭력적인 “유혈 입법”과 교육적 처벌, 노동 학교나 실업학교, 교도소 노동, 그리고 정신병원 등에 의해 규율 잡힌 노동자 계급의 탄생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규율 잡힌 새로운 사회가 탄생했다. 이 새 사회는 총체적으로 노동에 토대하는데, 그것은 노동의 필연성 자체에 더 이상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사회다. 여기서 “노동할 권리”라는 슬로건이 나오며 그리하여 외적 강제가 마침내 자기 강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임노동 뿐만 아니라 이것은 사람들끼지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며 이루어지는 생동적이고 창의적 활동(고전적 의미나 맑스적 의미에서 “생산적 노동”과 거리가 먼 활동)이 일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노동”으로 변환되었다. 이제 이 피하기 어려운 집단적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자.

 

폭력의 결과로서 집단적 상흔

심대한 상처를 주는 공격 앞에서 심적으로 견디기 힘든 희생자가 이를 극복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막대한 힘 앞에 ‘공격자와 동일시’를 하며 스스로 굴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강자와의 동일시가 진행될수록 그 사람 내부의 자아는 분열된다. 외적 정체성이 내부화될수록 그 외적인 욕구가 마침내 원래의 자기 욕구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결국 자신의 욕구에 대한 진정한 성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만약 그러한 상처들이 특정 개인에서가아니라 전쟁 또는 다른 익명의 대량 학살과 같은 경험에서 온 것이라면 익명의 거대한 힘이 문제가 된다. 이제 “공격자와의 동일시”는 체제와의 동일시가 되며 그 체제의 패러다임이 사람의 내면으로 주입된다. 이런 과정은 다음 세대에게도 영향을 주는데, 사회화란 일종의 누적 과정으로 그것은 모든 경험들이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항상 새로운 폭력이 등장할 때마다 거의 항상 “적응”만 강조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개인적 상처의 결과, 중독

우리가 사는 현실적 삶의 고통을 솔직하게 느끼지 않으려 헛수고하는 과정이 곧잘 중독으로 나타난다. 중독이란 일종의 반응 행위로서, 뭔가 참을 수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에 대한 자기방어 행위다. 사람들은 중독 행위를 통해 자기 고유의 느낌, 생각, 행위를 조작하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 내면의 느낌과 정직하게 접촉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환상 속에서만 포근함을 만들어 내며 지속적으로 자기를 파괴한다. 또한 근본에 깔린 두려움이 솔직함을 억압하거나 지속적 고립을 조장하고 탈연대화로 이어진다. 저항이 일어난다 해도 이는 두려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분노가 앞설 때뿐이다. 분노를 키우는 방법은 피해 의식으로 무장하는 길이며 투쟁이나 파업, 저항 등을 새롭게 전개하려면 부단히 불의에 토대한 분노를 자극해야 하는데 이는 결국 중독 사회로서의 자본주의 논리 속에 머무는 것이다. 또한 이 자본주의 패러다임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내면의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인이 자기의 중독 행동을 자꾸 통제하려는 시도도 아무 소용이 없다. 바로 이 강박증과 통제주의 환상도 중독의 매개물이자 중독적 행동 방식이기 때문이다.

 

노동 사회 탈출

우리가 자본주의를 단지 생산의 무정부성, 무계획성, 주기적 위기 대처의 무능함 등을 들먹이며 비판하는 것은, 마치 자본주의를 색다른 조직 형태로만 바꾸면 될 것 같은 착각을 초래한다. 그리고 사회 현실의 중독적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징후만 치료하면 될 것이라고 하는 생각 또한 아무 근본 변화를 이룰 수 없으며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생동성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 심층부의 두려움을 깨고 생동하는 과정을 사회적으로,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야 한다. 분노를 통한 방법은 승리하더라도 근본적 중독 체제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실패하면 좌절과 우울증에 시달리고 다시 적응하며 현실로 복귀한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그 체제 내부의 불의를 시정하려 하는 것은 한계에 봉착하며 적대 관계를 지양하려는 싸움이 결국 분배 정의를 위한 싸움으로 끝나고 만다. 즉 맑스의 표현대로 “기존 사회가 부여한 속에서 또 그 사회가 제공하는 수단으로만 성취 가능한, 즉 그러한 조건들과 수단의 재생산에 단단히 결박된 그런 사적 이해”를 발달시키며 이 체제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데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느낌과 생각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펼쳐 내야 한다. 우리가 겪는 그 어떤 두려움도 회피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인정하고, 동시에 분노나 일, 소비 따위의 중독물을 통해 자기를 기만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몇 가지 유의할 점

이상의 주장은 윤리적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예가 의미 있을 것이다.

*1868년 5월 프랑스에서의 구호 “절대로 노동하지 않을 것!”

*독일에서 정보 기술 영역의 고숙련 노동자 8백여 명이 상호 교류할 수 있는 내부 통신망을 구축하여 노동과 관련된 존재론적 이슈에 대해 토론하고 회사에 대응 행동을 조직한 것

*독일의 ‘2005 백수 연합’의 “행복한 백수들”이라는 구호

자본주의 전개 과정에서 박탈되고 파괴된 창의적이고도 신바람나는 잠재력을 부활시키려면, “대안의 실험”이란 것도 동시에 분석적 성찰(“이론”이 아님)과 더불어 진행되어야 한다.

 

맑스의 위기 이론, 그 후

맑스의 위기 이론은 없으며 맑스는 자본의 보편적 적대 관계를 규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맑스의 위기 이론은 부단히 반복되는 “자본주의는 결국 곧잘 돌아간다는 것”과 “자본주의는 어쨌든 우리 삶을 개선시키는 것”이라고 하는 신화화의 논리를 깨뜨릴 수 있게 돕는다. 그것은 “자본”이 우리 현실의 비참함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넘어, 우리 자신도 자본의 재생산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까지 책임성 있게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맑스의 분석은 자본주의가 죽음의 논리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며 온갖 개량주의 또한 죽음의 논리로부터 근본적 탈출을 방해하고 지연시킴을 드러냈다. 그러나 저항의 행위 그 자체, 해방의 과정 등은 결코 이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론이란 물화된 것을 폭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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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거 하이데는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자본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문제를 지적한다. 특히 근대와 자본이 폭력을 통해 내면화한 인간의 신체 저 깊숙한 곳에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두려움은 언제나 '중독'을 통해 표상화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내면화한 '두려움'과 대면함으로써 중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노동의 중단'이라고 하는 죽은 노동(자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행위를 그쳐야만 산노동을 끊임없이 포식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본의 시대는 끝장난다고 강조한다. 더불어 자본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노동의 '중단'과 같은 방법 이외 어떤 방법도 결국은 자본의 신화화에 기여하는 점임을 천명하고 있다. 

자본의 내면화에 대해서는 새로운 얘기는 아니지만 그 논리 전개에서 생각해 볼 지점이 분명히 있다. 특히 사회학자(?)이기 때문인지 자본의 내면화가 개인의 일이지만 사회화를 통해 집단화되고 이것이 다음 세대에 전승된다고 하는 점은 분명히 의미있는 지점일 것이다. 집단적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역사학자 라카프라가 <<치유의 역사학으로>>에서 911사건이 미국인들에게 어떤 집단적 트라우마를 형성시켰는지를 설명하면서 언급하였는데 역시 의미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현재까지의 저항은 두려움을 극복한 상태에서 전개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현재의 저항은 두려움의 또 다른 중독 현상인 분노와 분노의 조장을 통해 전개되는 것이며 이러한 저항은 여전히 자본의 생명력을 연장시킨다고 하는 지점도 새겨볼만하다. 분노는 불의로부터 나오는데 불의는 해결된다고 해도 그저 개혁에 그치는 것으로 근본적인 변화(자본으로부터의 탈출)가 아니다. 그 때문에 저항이 승리하더라도 자본의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연장시킨다. 물론 저항이 실패하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우울증과 고통에 빠질 것이고 더욱 더 자본에 적응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의 논의 중에서도 결론부분은 힘이 빠지는 면이 없지 않다. 자본으로부터의 탈출을 노동의 중단으로 설정하고 있는 지점이 그러한데, 단순히 노동의 중단이라는 선언에만 그친다면 중단 이후의 삶에 대한 부분에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도 없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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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투쟁입니까, 포스트모더니즘입니까? 예, 부탁드립니다!  

(슬라보예 지젝)

지젝은 바디우를 인용하며 오늘날의 문제는 "어떤 종류의 정치가 진정 자본이 요구하는 것에 이질적인가?"에 있다고 한다. 따라서 지젝이 보기에 중요한 것은 자본이며 자본에 이질적인 ‘민주주의의 창안’을 기획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젝은 현재 우리에게 부과하고 있는 '계급투쟁'이냐 '포스트모더니즘'이냐는 그릇된 양자택일에 선택의 거부(예, 부탁드립니다!)로 응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단 지젝, 버틀러, 라클라우는 이 점에서 유사하며 다시 버틀러와 라클라우 모두 불가능하지만 필연적인, 그리고 부인되는 동시에 불가피한 하나의 항(적대와/거나 보편성, 반성성과/이거나 '열정적 애착')을 다룬다. 이들 셋의 차이를 굳이 드러내는 이유는 지젝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하려는 ‘절박한 시도’이며 지젝 스스로 오늘날의 급진적인 정치적 사유와 실천의 (불)가능성과 싸우기 위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젝과 버틀러/라클라우는 보편성과 주체를 둘러싼 시각에서 차이점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차이는 보편성의 층위를 하나 또는 단일한 것으로 보느냐 둘 또는 중층적으로 보느냐의 차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한데 보편성의 층위를 하나 또는 단일한 것으로 본다고 생각하는 지젝의 입장에서 라클라우와 버틀러는 불가능한/비어있는 보편성을 전제하며 그 안에서의 헤게모니 투쟁 또는 수행적 모순을 밀고나갈 것을 정치적 실천과제로 삼고 있다. 이에 반해 지젝은 불가능한/비어있는 보편성 장에서의 헤게모니 투쟁과 수행성은 반유토피아적인 점진주의적 ‘개량주의’ 정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다른 층위/장/좌표로의 비약 또는 전환을 정치적 실천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재미있는 것은 지젝이 스스로 말하듯이 친구의 논리로 친구의 주장을 반박한다는 점이다. 즉, 라클라우의 보편성에 대해서는 버틀러가 강조하는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 개념을 가지고 반박하며 그와 반대로 버틀러의 라캉적 주체(‘빗금 그어지 주체’)에 대한 비판에 관해서는 라클라우의 적대 개념을 가지고 반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더 눈여겨 봐야할 것은 '근대적 주체'에 대한 버틀러와 지젝의 차이다. 알튀세르의 '호명된 주체' 개념와 라캉의 '빗금친 주체' 개념으로 대별되는 이들의 주체개념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은 계속해서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제 지젝의 논의를 충실히 따라가 보자.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개념의 주요 특징은 사회내적 차이들이 사회와 비사회를 분리하는 한계와 우연적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여기에 근본적 적대를 상정하는데 이 적대는 체계에 내적인 특수한 차이를 통해 오직 왜곡된 방식으로만 표상될 수 있기 때문에 외적 차이는 항상 이미 내적이며 나아가 이 둘의 결합은 결국 우연적이며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개념이 급진 혁명적인 등가 논리와 '수정주의적' 환원 사이에서 동요하며 '불가능한 총체'를 대표하는 특수한 요소들 사이의 끝없는 투쟁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점을 수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헤게모니 개념은 '불가능한' 거대 목표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지만 부분적 문제 해결에는 참여할 수 있다고 하거나 '불가능한' 사회의 충만함의 달성과 '다양한 부분적 문제들'의 해결 사이의 양자택일로 제한된다고 문제제기당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의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원리를 바꾼 '민주주의의 창안'은 제3의 길이 존재함을 보여주며 단지 '다양한 부분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 이상을 해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창안'은 이전에 '정상적' 권력작용의 장애물로 여겨졌던 것이 이제는 그것의 긍정적 조건이 된다는 점을 하나의 가능한 반론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의사소통의 궁극적 실패가 끊임없이 우리를 말하도록 강제하듯 권력 작용의 궁극적 불확실성과 변덕스러움(우연성)은 우리가 합법적인 민주적 권력을 다루고 있다는 유일한 보증물이다.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바로 그 보편적 개념에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단절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개념의 유의 상이한 종들은 한편으로 정치적 민주주의의 바로 그 보편적 개념에 내속적인 긴장을 설명하며 나아가 이 긴장은 단지 민주주의 개념에 내적인/내속적인 게 아니라 민주주의가 자신의 타자와 관계하는 방식에 의해 정의된다. 그 타자는 일차적으로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바로 그 정의가 '비정치적인' 것으로 배제하려는 것이다. 나는 정치적인 것과 비정치적인 것의 분명한 구분선을 긋고, 어떤 영역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정립하는 바로 그 몸짓이 탁월한 정치적 몸짓임을 승인하면서 그것이 정치적인 것에서 어떤 영역을 배제하는 몸짓이기에 이를 뒤집고만 싶다.  
  

 

  

고유한 역사적 주체, 경제적 계급투쟁의 특권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본질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서 후근대적인 환원될 수 없는 복수의 투쟁으로 이행한다는 이 표준적인 후근대적 좌파의 서사(라클라우의 서사도 포함)는 분명 현실의 역사적 과정을 서술하는 한편, 그것의 핵심에 있는 '체념' 즉,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체제를 극복하려고 하는 모든 실질적 시도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을 시야에서 지워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계급이 변함없이 명명되지만",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라는 다문화주의적 주문 속에서 거의 이론화되지도 발전되지도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후근대적 정치가 실질적으로 일종의 '경제의 정치화'를 촉진한다 하더라도 이 정치화는 일종의 대체물로서의 '유사 생산의 스펙터클'(수퍼마켓의 식품코너 등의 예)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후근대적 정치는 자본주의 내 지배의 문제에서 이론적으로 물러남을 의미하며 결국 후근대적 정체성 정치의 담화는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등의 공포를 다소 '과도'하게 고집함으로써 그 크기를 인정받지 못하는 계급투쟁의 잉여 투여를 이 여타의 '주의들'이 짊어져야 한다.  

라클라우의 발전도 '본질주의의 마지막 잔여물'인 '경제(생산, 계급)'를 제거하는 점진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결국 '상부구조적' 헤게모니 투쟁을 경제적 '하부구조'에 객관적으로 정초하기를 포기하면서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 투쟁을 특권화했다. 물론 후근대적 정치는 이전에 '비정치적'이거나 '사적'이라 여겨졌던 일련의 영역들을 '재정치화'하는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후근대적 정치가 작용하는 '정치적인 것'의 바로 그 개념과 형식이 경제의 '탈정치화'에 근거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재정치화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더불어 새로운 다양한 정치적 주체성의 후근대적 출현은 본연의 정치적 행위인 '계급투쟁과 자본주의의 전복'과 같은 근본적 층위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헤겔적인 '구체적 보편성'의 교훈을 '급진민주주의'에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개념과 '구체적 보편성'이라는 헤겔적 개념은 근접해 있다. 물론 라클라우는 보편자와 특수자의 악명 높은 헤결적 '화해'는 기각한다. 그러나 헤겔을 자세히 보면, 그 악명 높은 '화해'를 '상이한 보편자들의 교차, 두 보편자의 부분적 겹침'으로 볼 수 있다. 즉, 보편자의 모든 특수한 것이 자신의 보편자에 '부합하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 그 보편자에 완전히 부합하는 특수한 종에 도달하게 될 때 바로 그 보편자는 다른 유로 변환한다. 이를 '급진 민주주의'에 대입하면 경제의 영역을 정치화한다는 의미에서 실제로 '급진적'인 '급진 민주주의'는 정확히 더 이상 '(정치적) 민주주의'가 아니게 된다. 즉 사회의 '불가능한 충만함'이 실현되는 걸 의미하지 않고 다만 불가능한 것의 한계가 또 다른 층위로 이항되는 걸 의미한다. 그럼 우리가 '그 개념의 층위에서' 정치적인 것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면, 결코 자신의 우연성을 온전히 인정하는 정치적 행위자들을 다루고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여기서 나는 라클라우의 헤게모니 개념에서 작용하는 불가능성이 이중적임을 강조한다. '근본적 적대'는 훨씬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사회가 자신의 온전한 존재론적 실현을 성취하는 걸 가로막는 바로 그 적대/부정성을 합당하게 표상/접합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단순히 사회의 불가능한 충만함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사회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 불가능성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장 내에서 왜곡되고 표상-설정화된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적 환상의 역할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기본적 작용은 경험적 장애물을 항구적 조건으로 변형시키는 탈역사화의 몸짓일 뿐만 아니라 장의 선험적 종결/불가능성을 경험적 장애로 이항시키는 반대의 몸짓이기도 하다. 라클라우도 예를 들어 성공적인 혁명 후에는 비적대적인 '사회의 충만함'이 도래할 것이라는 바로 그 관념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기각하기에 이런 역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정당한 거부'가 모든 전면적 사회변혁의 '체념'으로 이어지고 부분적 문제의 해결로 귀결되는 것, 즉 '현존의 형이상학' 비판에서 반유토피아적인 점진주의적 '개량주의' 정치로의 도약은 부당한 단락이다.
 

 

Ⅲ 

 버틀러 또한 라클라우와 마찬가지로 보편성을 '허위적'인 것으로 본다. 그리고 보편성은 불가피하며 보편성의 규정된 역사적 형태 각각이 포함/배제의 집합을 수반하는 동시에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의 일부로서 이 포함/배제를 의문시하는 공간을, 포함/배제의 한계를 '재협상하는' 공간을 개방하고 지탱한다고 여기고 있다. 따라서 '허위적 보편성'에 대한 본연의 비판은 보편성이 '현실화'되고 근거하는 배제를 주제로 삼아 계속해서 그 배제를 의문시하고 재협상하고 전치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즉 보편성의 형식과 내용 사이의 간극을 떠안고 스스로 자신의 개념 속에서 성취되지 않은 것으로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이것이 '수행적 모순'이라는 정치적으로 매우 유용한 버틀러의 개념이 목표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우선, 배제의 논리는 항상 즉자적으로 이중화된다는 점이다. 종속된 타자가 배제/억압될 뿐만 아니라 헤게모니적 보편성 역시 자신의 부인되는 '외설적인' 특수한 내용에 의존한다. 우리는 이를 '탈동일시의 이데올로기적 실천'으로 부르고 싶은데 이데올로기는 바로 허위적 탈동일시의 공간을 구성할 때만, 즉 그 주체들의 사회적 존재가 놓인 실제적 좌표와 허위적으로 떨어져 있는 공간을 구성할 때만 유효하다. 사이버 공간을 통한 다양한 정체성의 유희나 그 반대인 자기 탐구의 태도는 모두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체제를 실질적으로 위협하기는커녕 궁극적으로 그것을 '살아갈 만한'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이론적 과업은 단지 '후근대적' 게임에 내포한 포함/배제의 특수한 내용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의 공간 그 자체가 출현하는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것이며 보편성이 사회-상징적 공간 속에서 작용하는 방식의 논리에서 일어난 근본적 전환을 탐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보편성이라고 하는 바로 그 기저의 개념은 어떤 식으로든 각각의 시기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또한 보편성의 구체적인, 실질적인 존재 상태는 전체 구조물 내에 본연의 자리가 없는 개인이다. 따라서 추상적 보편성이 나타나는 방식, 그것의 실제적 존재로의 진입은 이전의 유기적 균형을 파괴하는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운동이다. 그렇다면 버틀러가 허위적 보편성의 수행적 모순을 밀어붙이고 라클라우가 끝없는 헤게모니 투쟁을 제안할 때 문제는 이들의 '보편적' 지위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주의 자체를 역사화하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본질주의에서 우연성의 자각으로 나아가는 이 이행을 설명할 일종의 메사서사(존재의 역사적 운명-신기원, 지배적 에피스테메의 전환, 근대화, 자본주의의 동학을 따른다는 보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설명)가 필요하다.  
 

    

  

헤게모니 개념의 '보편적' 전망 또는 '타당성'은 그것이 최근에 출현한 오늘날의 특수한 사회적 배치에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과 결부시킬 수 있다. 사회-정치적 삶과 그 구조가 항상 이미 헤게모니 투쟁의 결과물이지만 정치적 과정의 근본적으로 우연적이고 헤게모니적인 본성이 최종적으로 '나타날/자신에게 회귀할'수 있는 건, 그리고 스스로를 '본질주의적' 짐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건 오직 우연성이 전면화된 '후근대적'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오히려 전환하는-분산되는-우연적인-아이러니한-기타 등등의 정치적 주체성이 출현하는 바로 그 배경과 영역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라클라우와 버틀러가 (적어도 잠재적으로) 혼동하고 있는 두 층위 즉, 주어진 어떤 역사적 지평 내의 우연성/대체가능성의 층위와 바로 이 지평을 정초하는 보다 근본적인 배제/배척의 층위를 보다 분명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버틀러가 주장하는 라캉 비평에 대응할 수 있다. 버틀러는 라캉의 '빗금 그어진 주체' 개념이 주체 구성의 모든 과정이 구성적이며 필연적으로 불가피하게 불완전하여 결국 실패한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인정하지만 바로 그 '빗금'이 모든 정치적 투쟁을 사전에 제한하는 비역사적인 선험적 금지 또는 제약으로 고양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성차 개념에서 라캉의 "성차는 실재적"이라는 명제를 성차는 비역사적이고 응결된 대립으로 단언하거나 성차의 대립은 헤게모니 투쟁 속에 낄 자리가 없는 타협할 수 없는 준거틀로 고정시켰다고 독해한다. 그러나 요점은 바로 그 보편성의 형식이 언제나 자신의 보편성 속에서 마치 탯줄처럼 특수한 내용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이며 이 때문에 문제는 보편성의 바로 그 비어있는 형식이 헤게모니의 '전장'으로 출현하기 위해 어떤 특수한 내용이 배제되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성차' 개념의 예를 통해 볼 때, 그 결과가 우연적인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과 '비역사적' 빗금 또는 불가능성은 엄밀히 상관적이다. 헤게모니 투쟁이 존재하는 건 바로 어떤 선행하는 불가능성의 '빗금'이 헤게모니 투쟁에서 내기에 걸린 공백(‘영역’)을 지탱하기 때문이다. 즉, 역사적 공간이 존재하는 건 오직 이 공간이 모종의 보다 근본적인 배제(또는 배척)에 의해 지탱되는 한에서다. 그렇다면 두 층위, 즉 특수한 내용이 비어 있는 보편적 개념을 헤게모니화하는 헤게모니 투쟁과 보편자를 비어 있게 하는, 따라서 헤게모니 투쟁의 영역이 되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버틀러와 라클라우는 모두 온전한 우연성을 내포한 추상적인 선험적 형식 모델을 제시하며 이는 '거짓 무한'의 논리를 수반한다. 즉, 최종적 해결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복잡한 부분적 전치의 끝없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역사주의와 역사성의 구별이 필요하다. 역사주의의 모든 판본은 우연적 포함/배제, 대체, 재협상, 전치 등의 끝없이 열린 게임이 벌어지는 영역을 정의하는 최소한의 '비역사적' 형식적 준거틀에 의존한다. 진정으로 근본적인 역사적 우연성의 단언은 역사적 변동 자체의 영역과 그것의 (불)가능성 조건으로서의 외상적인 '비역사적' 핵심 간의 변증법적 긴장을 포함해야만 한다. 따라서 역사주의는 (불)가능성의 동일한 근본적 장 내에서의 끝없는 대체의 놀이를 다루는 반면, 본연의 역사성은 바로 이 (불)가능성의 상이한 구조적 원리를 주제로 삼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비역사적' 지위를 인식할 수 있는가? 레비-스트로스의 '영[零]제도' 즉, 의미의 부재에 대립해 오직 의미의 현존 자체만을 의미화하기 때문에 어떤 규정된 의미도 지니지 않는 비어 있는 기표를 통해 인식할 수 있다. 영제도 또는 비어 있는 기표는 어떤 실정적, 규정적 기능도 지니지 않은 특유한 것이면서 사회적인 것의 부재, 전사회적 혼돈에 대립해서 그것의 현존과 현실성 그 자체를 알려주는 순전히 부정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장 순수한 이데올로기, 즉 사회적 적대가 폐지되고 사회의 모든 성원이 스스로를 인지할 수 있는 중립적인 포괄적 공간을 제공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의 직접적 체현이며 더군다나 헤게모니 투쟁은 바로 이것이 어떻게 규정될지를 둘러싼, 어떤 특수한 의미화로 채색될지를 둘러싼 투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의 동일한 논리가 사회의 통일뿐만 아니라 그것의 적대적 분열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버틀러에 대한 비판과 그녀의 반비판은 알튀세르의 '주체를 구성하는 호명'이라는 문제틀과 관련되며 이를 통해 버틀러가 라캉을 받아들일 수 없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다. 믈라덴 돌라르는 주체를 알튀세르와 같이 호명의 결과 출현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기커녕 오직 호명이 문턱을 넘지 못하고 실패할 때,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만 출현한다고 주장하며 호명에 대한 상징적 정체성의 저항(실패)이 주체라고 한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상징화에 저항하는 이 대상적 잔여/과잉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물질적' 지위를 주장함으로써 궁극적 제도로서 상징적 질서 자체가 갖는 '관념적' 지위를 오인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도리어 돌라르가 물질적 잔여로서의 실재를 주장하는 외관 속에서 알튀세르에 반해 주체성의 내적 (자기) 경험은 외적인 물질적 실천과/이나 의례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고전적인 관념론적 몸짓을 반복하여 결국 실재로서의 라캉적 '대상a'는 물질적 실천이 미치지 못하는 관념적인 심리적 대상의 암호명으로 판명난다고 한다. 더불어 돌라르가 큰 타자를 관념화하여 물질적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와 그 의례에서 비물질적/관념적인 상징적 질서의 개념으로 나아가는 (라캉적) 전환을 승인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큰 타자의 (비)물질성에 대한 돌라르의 논점은 전적으로 유물론적이다. 돌라르는 단지 호명(과 인지)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물질적 실천과/이나 현실적인 사회적 제도(학교, 법 등)의 의례로는 충분하지 않는다는, 즉 주체는 상징적 제도, 차이의 관념적 구조를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상상적 동일시인) 이상적 자아에 대립하는 (상징적 동일시의) 자아 이상으로서의 이 '큰 타자'의 '관념적' 기능은 또한 상호수동성의 개념, 즉 나의 수동적 경험을 타자에게 이항한다는 개념을 통해 식별된다. 여기서 상호수동성은 응시가 이중화되고, 내(예의 농구선수)가 '나 자신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는 것(예의 절음발이 청년의 응시를 통해 보이는 것)을 보는' 반성적 구조를 낳는다. 그러나 돌라르가 말하는 '잔여'는 외부성에 대립하는 관념적-비물질적-내적 대상이기는커녕 모든 내면화/관념화의 움직임 속에서 지속하고 '내부'와 '외부'의 분명한 구분선을 전복하는 우연적 외부성의 잔여다. 그렇다면 이 잔여는 바로 '내부성' 한 가운데 있는 환원될 수 없는 외부성의 흔적이며 그것의 가능성 조건인 동시에 그것의 불가능성 조건이다. 그리고 이 잔여의 '물질성'은 상징화에 저항하는 외상의 그것이다. 여기서 '물질성'과 소위 '외적 현실' 간의 등가를 거부하며 대상a를 심리적 삶 자체의 '관념적' 영역 안에 있는 관통할 수 없는/고밀도의 얼룩이라는 의미에서 '물질적'으로 보아야 하며 진정한 유물론은 '심리적 삶' 자체의 핵심에서 '물질적인' 외상적 중핵/잔여를 추출해내는 것이다.  

다시 버틀러는 의례와 믿음 사이의 관계에서 돌라르를 비판한다. 즉, 돌라르는 무릎 꿇고 의례를 따르기 위해서 주체는 이미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형적인 이데올로기적 악순환(주체화의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주체가 이미 그곳에 있어야 한다)에 사로 잡혀 일튀세르의 요점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버틀러는 비트겐슈타인을 참조하며 "우리는 무릎을 꿇기 이전에 먼저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말하기 이전에 단어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반대로 양자는 의미가 표출 그 자체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도래하리라는 '신념 위에서' 수행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례를 수행할 때 그 곳에 있어야 하는 믿음은 바로 '비어 있는' 믿음, 우리가 '신념 위에서' 행위를 수행할 때 작용하는 믿음이다. 이후에 의미가 발생할 것이라는 이 믿음과 신뢰가 바로 라캉을 따라 돌라르가 말하는 전제다. 그렇다면 우리를 상징적 과정에 참여하게 만드는 이 신념의 행위에 대한 반대는 부정이 아니라 보다 원초적인 배척, 참여의 거부다. 그렇다면 이 원초적 '예!'는 '예!'가 아니라 '아니오!'를 말하는 주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해 부정적인 방식으로 증명된다. 이 모든 오해의 기저에 놓인 건 주체 개념을 인식하는 방식의 근본적 차이다. 라캉에게 주체화 이전의 주체는 호명의 부름 속에서의 상상적 인지(오인)가 채우고자 애쓰는 바로 그 간극이며 여기서 주체와 실패의 밀접한 연계는 '주체' 자체가 상징화의 실패, 상징적 표상 그 자체의 실패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 즉, 주체는 이 실패의 '너머'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며, 이 실패를 통해서 출현한다. 그리고 대상a는 이 실패의 실정화/체현에 불과하다.  
 

 

  

'실재의 응답'으로서의 주체라는 이 개념을 통해 라캉의 실재와 상징계의 관계에 관한 버틀러의 비판과 직면한다. 버틀러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것으로서의 실재라는 규정은 그 자체로 상징적 규정이라고 하며 실재의 외적 한계를 지적하지만 여기서 라캉적 실재가 상징계에 엄밀히 내적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 실재는 단지 상징계의 내속적 제한이며, 상징계가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의 불가능성이다. 따라서 실재는 사실 상징계에 내적/내속적이지 그것의 외적 한계는 아니며 바로 이 때문에 상징화될 수 없다. 즉, 외적인 것으로서의 실재, 상징계에서 배제된 것으로서의 실재가 사실 상징적 규정이다. 따라서 상징화를 벗어나는 건 바로 상징화의 내속적 실패의 지점으로서의 실패다.  

이제 상징계를 통해 실재와 접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분석적 ‘행위’라는 라캉의 개념과 관계한다. 정의상 행위는 어떤 불가능한 실재의 차원과 접촉하는 몸짓이다. 이 행위의 개념은 주어진 장 내에서 '다양한 부분적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에 불과한 것과 다름 아닌 이 장의 구조화 원리를 전복하려는 보다 근원적인 몸짓을 구별하는 바탕 위에서 인식되어야 한다. 행위는 주어진 상징적 세계 내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것을 성취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가능성 조건을 소급적으로 창조할 수 있도록 자신의 조건들을 변화시킨다. 구체적으로 행위는 어떤 점에서 스스로를 쓰러뜨리는, 즉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쓰러뜨리는 '미친', 불가능한 선택을 행하는 것이며 그 때문에 이 행위는 주체가 스스로를 발견하는 상황의 좌표를 변화시킨다. 결국 '스스로를 쓰러뜨리는' 그런 극단적 몸짓(각종의 영화 예와 라캉 자신의 예)이 주체성 그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체(행위자)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진정한 행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다름 아닌 나의 정체성의 핵심을 재정의한다. 그리고 진정한 행위는 우리 존재의 부인되는 환상적 토대의 좌표를 전환시킨다. 행위는 단지 우리의 공적인 상징적 정체성의 윤곽을 다시 그리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자기 정체성의 명시적인 상징적 직물의 결여와 왜곡을 통해 이 정체성을 지탱하는 유령적 차원, 살아있는 주체를 괴롭히는 산죽은 유령, '행간에서' 전달되는 외상적 환상의 은밀한 역사를 전환시킨다.  

여기서 '환상의 횡단'이라는 개념과 (다른 층위에서는) 사회적 증상을 발생시키는 좌표를 전환시킨다는 개념이 결정적인데 그렇지 않다면 '허위적 행위'인 나치즘 또한 탁월한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위는 기저에 놓인 환상을 교란하고, '사회적 증상'의 지점에서 그것을 공격한다. 그러나 그 행위는 난데없이 나타나 그것이 개입하는 상징적 장을 교란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것의 숨겨진, 부인되는 구조화 원리인 이 내속적 불가능성, 걸림돌의 관점에서 그렇게 한다. 즉, 진정한 행위는 구성적 공백, 실패의 지점, 또는 주어진 배치의 '증상적 비틀림'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개입한다. 더 나아가 행위는 구조의 '증상적 비틀림'에 개입해야 한다는 이런 개념의 한 가지 명확한 정치적 귀결은 각각의 구체적 배치 속에서 우리가 '진정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결정하는 하나의 민감한 투쟁의 결절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의 몸짓이 행위로 여겨지려면 그것은 '환상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두 번째 특징은 '불가능한 것을 행하기', '소급적으로 자기 자신의 조건을 다시 쓰기'의 첫 번째 특징에 덧붙여진 또 하나의 부가적 기준이 아니라 이 두 번째 기준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첫 번째의 기준 역시 실로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실제로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행하는‘ 것이 실재에 대한 환상을 가로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철학-정치적 정세의 문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행위/과업은 '아무리 선의에서 그러더라도, 이것은 반드시 새로운 굴락(홀로코스트)으로 끝날 것이라!'라고 공유된 전제의 영역과 단절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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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푸코를 읽어야할 이유가 있어 스크랩해둔다. 특히 그의 강의록 중 아래에서 강조하고 있는 '자유주의 3부작'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안전,영토,인구>, <생명정치의 탄생>은 반드시 읽어야할 저서다.  

 

[한겨레 2009.7.8]

미셸 푸코(1926~1984)가 돌아왔다. 최신 사조에 목마른 계간지들이 연이어 그의 사상을 재조명하고 있는 가운데, 대중들을 상대로 한 ‘푸코 강좌’도 성업 중이다. 대체 무엇 때문에, 유행에 민감한 한국의 지식시장은 25년전 에이즈로 사망한 이방의 철학자를 다시금 주목하는가.

개인의 인간형 자체를 바꾸는
신자유주의 시스템 통찰력에
‘생명권력’ 등 후기담론 새 빛

푸코에 관한 최근의 논의들은 계간 <문화과학>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 임동근 문화과학 편집위원과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가 2008년 여름호와 2009년 봄호에 푸코의 ‘통치성’ 개념에 관한 분석글을 잇따라 실었다. 철학아카데미와 다중지성의 정원, 문화사회연구소 같은 강의·연구모임도 지난 겨울부터 푸코 세미나와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출판계는 또 어떤가. 김영사가 최근 지식인마을 총서로 푸코를 다룬 데 이어, 하반기에는 <푸코, 인간의 초상>(폴 벤느, 산책자),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서동진, 돌베개) 등의 연구서와 <미셸 푸코의 파르헤지아>(사계절), <안전, 영토, 인구> <생명정치의 탄생>(난장) 같은 푸코 강의록들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말 그대로 ‘푸코의 재림’이다.

기실 한국에서 푸코의 전성기는 1990년대였다. 마르크스주의가 승하던 80년대 한국에서 푸코는 비주류요 이단자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계기로 <감시와 처벌>(1989년), <성의 역사 1·2·3>(1990년) 같은 대표작들이 잇따라 번역되기는 했지만 90년대 후반 질 들뢰즈, 슬라보예 지젝 같은 재기발랄한 후학들이 무섭게 치고 들어오자, 그 역시 한때의 유행을 선도한 서구 사상가의 한 명으로 지식의 최전선에서 쓸쓸히 퇴역해야 했다.

반전은 2000년대 중반 ‘생명권력’ ‘생명정치’와 관련된 푸코의 후기 담론들이 뒤늦게 주목받으면서 찾아왔다. 여기엔 권력의 새로운 지배구조와 그에 대한 저항 가능성을 생명권력·생명정치 개념을 통해 해명한 네그리·하트의 <제국>과, 생명정치라는 틀에서 서양 정치구조를 해부한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연작의 영향이 컸다. 

최근의 ‘푸코 르네상스’는 생명정치와 함께 후기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통치성’이란 주제와 관련된다. 푸코가 통치성이란 개념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1970년대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했던 강의들이다. 여기서 푸코는 18세기를 전후해 유럽에서 등장한 새로운 권력관계(통치)의 특성을 지칭하기 위해 이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것의 핵심은 “행동방식 혹은 행실에 대한 통솔”이다.

통치는 법이나 규범을 통해 특정 행위를 ‘금지’하거나, 감시·처벌·훈육을 통해 개인의 신체를 ‘규율’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가장이 가족 구성원의 건강과 가계의 부를 관리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유사하게, 근대 국가의 통치는 생명을 가진 주민 전체(인구)에게 일정한 자유를 허용하면서 그들의 건강과 안전,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개인적·집단적 수준의 행동과 실천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런 통치를 위한 기술적 수단이 ‘폴리스’로 불리는 행정관리 기구들이며, 여기에 수반되는 지식이 ‘경제적 인간’을 대상으로 삼는 정치경제학(고전경제학)이라는 게 푸코의 분석이다.

푸코가 말하는 이 새로운 통치성의 다른 이름이 ‘자유주의’다. 주목할 만한 점은 푸코가 1978~79년 강의록인 <생명정치의 탄생>에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신자유주의’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푸코에게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 통치성의 또다른 형태다. 자유주의가 ‘인구에 대한 통치방식’을 고안하고 실천했다면,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인간형 자체’를 변형하는 데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푸코가 볼 때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동자는 신체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행위를 ‘자본’으로 다루는 기업가의 위치를 부여받는다. 이른바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탄생이다. 이런 푸코의 분석에서 도출되는 교훈은 무엇인가.

“푸코는 신자유주의를 좁은 의미의 이데올로기나, 특정한 역사적 시점부터 조성된 불가역적 현실로 간주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신자유주의는 신고전파 경제학이나 합리적 선택론 같은 학술 담론뿐 아니라, 일상의 자기계발 담론이나 노동자의 책임과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생산적 주체를 형성하려는 경영담론까지 포괄하는, 사회를 통치하고 삶을 조직하는 방식이란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얘기다.”(서동진 교수)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계급성’ 넘어 ‘통치성’


‘생명권력’ ‘생명정치’ 담은 푸코 강의록 8권 출간
프랑스 라발 등 사회과학 전 분야로 확대·적용


“최근 사회과학 논문 제목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통치성’이란 단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서구 인문사회과학계의 열쇳말로 자리잡았다. 푸코는 1970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에 취임한 뒤 1984년 사망할 때까지 이곳에서 강의했다. ‘푸코 르네상스’의 진원지는 그의 제자들이 푸코가 남긴 메모와 녹취 테이프를 편집해 1997년부터 출간하고 있는 강의록들이다.

14권으로 예정된 푸코의 강의록은 지금까지 8권이 출간됐는데,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이 ‘자유주의 3부작’으로 불리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1975~76년 강의록), <안전, 영토, 인구>(1977~78년), <생명정치의 탄생>(1978~79년)이다. 여기서 푸코는 ‘생명권력’과 ‘통치성’이란 주제에 매진하면서,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대한 예견적 통찰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말년의 푸코가 천착했던 통치성이란 주제에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니콜라스 로즈, 피터 밀러, 콜린 고든 등 영국의 사회과학자들이었다. 이들은 <푸코 효과>(1991년)라는 책에서 푸코의 통치성 이론을 처음 소개한 데 이어, 영국 사회과학 저널인 <경제와 사회>를 통해 통치성 이론을 경제·사회·정치·사회심리학·행정학·생명공학 등의 분야로 확대했다.

최근엔 프랑스 사회학자 크리스티안 라발의 작업이 돋보인다. 그는 푸코의 통치성 이론과 신자유주의 분석에서 영감을 얻어 신자유주의의 기원을 지성사적으로 분석한 <경제적 인간-신자유주의의 뿌리에 관하여>를 2007년 출간했고, 올해는 철학자 피에르 다르도와 함께 신자유주의 사회의 형성과 구조를 분석한 <새로운 세계이성-신자유주의 사회에 관한 시론>을 냈다.

라발은 신자유주의를 좁은 의미의 경제학 담론이나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는 통념을 비판한다. 신자유주의는 경제만이 아니라 사회·정치·행정·교육·문화 등 자본주의 사회의 전 분야를 총체적으로 조직하는 ‘새로운 합리성’이며, 인간을 경쟁을 통해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제적 동물로 호명하는 ‘새로운 주체 형성의 원리’라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를 계기로 확산되던 ‘신자유주의 종언론’이 최근 세계경제의 완만한 회복세와 더불어 빠르게 위축되고 있는 현실은 ‘푸코 학파’의 신자유주의 분석에 담긴 의미가 녹록지 않음을 실감케 한다. 이세영 기자

도움말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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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화는 라캉에 의하면 거울단계(상상적 동일화)를 넘어 상징계의 빈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빗금 그어진 기표로서 그렇게 말이다. 라캉의 상징적 동일화의 개념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 속에서 '호명'의 개념으로 재탄생했다. 상징계는 주체를 통해 작동된다. 즉, 상징계는 자기를 활성화시킬 주체를 필요로 한다. 누군가에 의해 이 주체의 자리가 채워져야 한다. 이렇게 큰타자는 누군가를 부르고 누군가는 이 부름에 응답하여 스스로를 주체로 내세우려면 그는 자신을 지워야 한다. 자신을 지운다는 의미는 예를 들면 관계맺는 공간과 밀접하게 연관맺고 있는데 농민이었다가 노동자가 된 사람이나 학생이다가 선생이 된 사람이나 솔로였다가 결혼한 사람이나 각각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항상 그 이전의 자신을 제거하여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누군가가 어떻게/왜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느냐이다. 즉 누군가가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거세 위협이라는 '외부적 억압'을 제기한다면, 알튀세르는 호명에 의한 '상상적 오인'이라고 하는 주체의 자유로운 선택 가능성을 전제하였다. 그런데 왜 주체가 그 자리를 선택하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그 선택은, 그 자리차지함은 '우연(맹목적 필연)'에 호소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속에서는 주체화밖에 없고 그렇게 된다면 주체화의 거부, 즉 혁명은 이루어질 수 없다. 혁명불가능성이 애초부터 전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극한으로 밀고 가 뚫어버린 사람이 지젝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젝은 라캉의 '강요된 선택'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라캉이 말하는 강요된 선택은 존재(육체)와 의미(상징계) 사이의 관계를 통해 보여준다. 누군가가, 즉 선-주체가 육체적 존재를 택한다면, 그는 쾌락을 얻지만 상징계 밖에 처한다. 고대의 추방이 단적인 예일 것이다. 고대적 추방은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결국 이것은 상징계에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 속에서 그의 쾌락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반면 상징계를 선택한다면, 즉 큰타자의 호명에 부응한다면 그는 삶의 의미를 얻지만, 동시에 쾌락을 상실한다. 즉 그는 상징계에 의해 노예적으로 착취된다 하더라도 적어도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라캉의 강요된 선택은 누군가가 어떻게 주체가 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주체에게는 쾌락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던가 아니면 차선의 선택으로서 상징계를 선택하던가 양자택일의 강요된 선택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선택은 불가피한 강요에 의한 선택이며,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는 것은 겉보기의 선택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주체에게는 극단적인 경우 죽음을 선택할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유는 주체가 상징계의 동일화를 벗어날 가능성을 암시하게 된다. 결국 돌파구가 있다는 것인데, 이런 죽음의 선택이 곧 라캉에게서 상징계로부터의 분리이다.(지젝은 상징적 죽음에 대한 예로 항상 여성을 통해 얘기하고 있다. 안티고네와 잉그리트 버그만이 바로 그들이다. 극단적으로 여성만이 가능하다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상징계 속의 주체는 결국 '강요된 선택'(상징적 죽음이냐 주체화냐)과 '환상의 뇌물'을 통해 이중적으로 포박된 존재인 것이다. 주체화란 상징계의 큰타자에 의해 '강요된 선택'을 통해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이를 매꾸기 위한 환상을 그 구멍에 진연하는 그런 것이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상징적 죽음이라는 '진정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젝은 여성만이 상징적 죽음이 가능하다고 한다. 왜 남성은 안되는가? 가부장제적 사회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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